신학

성령론 논쟁(허마스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기호

하나님아들 2020. 4. 29. 17:22

성령론 논쟁(허마스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여러 차례에 걸친 교회 회의를 통해 기독론에 관한 정통 교리가 확립됨으로 성자(聖子)이신 그리스도의 1인격 2성 2의(1人格 2性 2意)가 확정되었다. 즉 몸을 입고 사람이 되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한 인격체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시고, 한 인격인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고 교리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하여는 오늘날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니케아 신조(325년에 채택)에도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A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라는 간단한 언급밖에 되어 있지 않았다.[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Harper & Row: New York, 1978), 232.] 오랜 기간에 걸친 기독론 논쟁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그 때마다 문제가 되었던 부분들이 보강되고 신조로 채택되어 제6차 세계 교회회의인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이르러서는 기독론에 관하여는 완전한 교리가 확립되었다.[벌코프 저, 김진홍, 김정덕 함께 옮김,『기독교 교리사』(서울:세종문화사, 1972), 120.] 기독론 교리가 완성되어 가면서 성령에 대하여도 이단적인 주장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올바른 성령론의 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1. 니케아 이전의 성령론 논의
제3위 신이신 성령에 관한 논의가 최초의 교회회의인 니케아회의 이전에도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있어 왔던 성령에 관한 원시적인 진술들을 몇 가지만 살펴본다.

 

1) 허마스(Hermas, 140~155)
그에 따르면 성령은 선재(先在)하는 영인데 육을 입으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됨으로 성령과 성자의 동반자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성육하신 그리스도 안에 성령이 계심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복종할 수 있었다고 한다.[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Nashville:Abingdon Press, 1983). 89-90.] 허마스의 입장은 성자와 성령을 구별하기보다는 동일시하는 경향을 갖는다.

 


2) 오리겐(Origen, 185~254)
그는 성령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를 통해 제일 먼저 창조한 피조물인데 제3위 신인 성령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보다 제2위 신인 성자가 하나님과 갖는 관계가 더 밀접하다고 한다. 비록 성령이 성자로부터 창조되었지만 한 인격체이며 신적 예배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벌코프 저, 김진홍, 김정덕 함께 옮김,『기독교 교리사』, 82.] 로고스가 모든 이성적 사물 가운데서 활동함에 비하여 피조물인 성령은 주로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데 죄인을 감화하여 거듭나게 하신다. 성부가 모든 존재의 영역을 지배함에 비하여 성령의 활동 동だ?가장 제한적이지만 교회 가운데, 신자 가운데 역사함으로 성령의 역할은 삼위 하나님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J.S. 니이브 저, 서남동 옮김,『기독교교리사』(서울:기독교서회, 1972). 147~148.]

 

3) 아리우스(Arius, 256~336)
성자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 최고의 존재이며 성자가 창조한 최초의 피조물이 성령이라고 한다. 철저한 단일신론(monotheism)에서 출발한 아리우스의 신관(神觀)은 성자와 성령을 피조물로 격하하여 그 존재의 시작이 있는 유한한 존재로 파악한다.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90)에 따르면 성령에 관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고 그 중에는 성령을 단순한 능력 또는 힘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피조물로,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성령에 관하여는 아무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2. 니케아논쟁 이후의 성령론
아리우스의 반론으로부터 출발한 기독론 논쟁이 니케아회의를 시작으로 하여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이르기까지 약 350년간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성부 하나님과의 동질성(homoousios)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하여는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나타난 세례 예식문 정도의 표현으로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어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간단한 언급 밖에 깊은 논의가 없었다.

 


1) 정통적 성령론의 기초를 제공한 터툴리안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기 이전에 성령의 하나님이심과 삼위의 일체되심을 정통적 입장에서 주장한 신학자는 삼위일체(trinitas)란 말을 최초로 사용했던 터툴리안이다.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일찌기 그의 명저 "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Against Pra.eas)"라는 책에서 군주론(Monarchianism)을 반대하며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본질, 한 본체, 한 능력으로 삼위는 일체라 했다. 삼위는 본질의 통일에 의하여 모두 일체에 속하며, 단일체(Unity)를 아버지의 아들과 성령으로 구분하는 삼위일체(Trinity)의 신비는 그대로 보존된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은 성자와 성령이 본질상 하나님이란 정통적인 주장을 하면서도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發現)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삼위 간의 관계를 수원(水源), 하천(河川), 강(江)에 비유함으로 종속설(從屬說)이 그의 심중에 자리 잡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아버지는 온전한 본질이나 그로부터 나온 성자와 성령은 아버지보다 낮은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파생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종속(subordination)의 개념을 가지는 것이다.[워커 저, 류형기 역편, 『기독교회사』(서울:한국기독교 문화원, 1979), 61.]

 


성경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한데서 성령의 명칭이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되어 그의 이름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래됨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이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려함에서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됨을 발견하게 된다(요 16:14). 이는 마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음과 같다(요 7:18). 현재 활동하고 계신 성령은 성부 성자와 더불어 완전한 신성과 영광을 함께 가지고 계시지만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아타나시우스의 정통적 성령론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터툴리안을 통해 삼위 하나님의 본질상 동질성(consubstantiality)이 주장되고 이것이 아타나시우스를 대표로한 정통적 신학자에 의해 니케아신조에 반영되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2)는 아리우스 이단설인 성령의 피조설과,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의 성령은 세째번 권세를 가지신 세번째 계급의 하나님이란 주장을 반박하면서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성부 성자와 더불어 동질의 신성을 가지신 것을 주장했다.[J.L. 니이브 저, 서남동 옮김, 『기독교교리사』, 196.]

 


3) 성령의 종속설을 극복한 어거스틴
서방 교회의 신학을 대표하는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에 이르기까지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된다는 로고스 기독론이 극복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De Trinitate, 417년)"에서 "…성자와 성령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하거나 또는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종속의 개념을 반대한다. 단지 성자는 출생한 자로서, 성령은 나온 자로서 인격적 상이성을 가질 뿐이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삼위는 완전한 일체임을 주장한다. ) 어거스틴은 성령의 성자와의 동질성을 말함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너무나도 동등하사 신성에 있어서 성부는 성자보다 더 크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부 성자의 합체도 성령보다 더 크지 않으시다"라며 성령의 종속적 개념을 부정한다.[워커 저, 류형기 역편,『기독교회사』. 167.] 터툴리안이 삼위 하나님의 동등성을 말하며 종속설을 말한 것은 삼위 하나님의 신성과 인격의 차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잘못된 종속설을 타파한 어거스틴의 성령론과 충돌됨이 없는 주장이다.[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255, 257.]

 

4) 동서방교회의 견해차
서방교회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는 세 인격(person)이요, 같은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동의하며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 못지 않게 성부와 성령이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이러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589년의 톨레도(Toledo) 회의에서 성령의 발현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 성령"으로 읽도록 신조를 수정하였고 809년의 아아켄(Aachen)종교회의에서 서방교회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했다. 즉 스페인 황제는 결정을 주저하는 교황 레오(Leo) Ⅱ세의 재가를 얻어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의 "…또한 성령을 믿사오니 이는 주되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고 그는 성부에게서 나왔고(proceeds)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하는 신앙고백에 "성부 및 아들(filioque; and the Son)에게서 나왔고"라는 수정을 가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아버지만이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시기에 성령은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함으로 동.서방 교회간의 견해차이가 심화되고 서방교회가 받아들인 `filioque'가 마침내는 동서방 교회를 분열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3. 필리오케(filioque) 논쟁

 

성령의 발현(發現, procession)교리에 관하여 서방교회는 어거스틴적 삼위일체설에 의해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proceeds)과 같이 아들에게서도 나온다고 하는 "및 아들(스페인어로 filioque)"을 신조에 덧붙임으로 성령의 이중적 발현을 주장하였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성령을 보내는 이가 아들이심을 밝히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 하여 성령이 아들로부터 발현함을 말하고 있고 더욱이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하심으로 성경이 이중 발현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카파도기아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 단수적 기원을 말하며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나온다(e. patre per filium)"고 주장함으로 성령의 발현 근원을 아버지에 국한시킨다. 성령은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서 보내시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성경이 요한복음 14장 26절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와 같이 성령의 출처에 대하여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가 또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성경해석상의 차이가 있고 이러한 상이한 견해는 동서방 교회간의 갈등으로 발전하다가 교회회의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못한 채 교회가 동서방으로 나누어지는 요인이 되고 만다.


성령의 출처 문제를 놓고 동방교회가 결의한 총회는 879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인데 서방교회와 별도로 모인 이 세계 8차 교회회의에서 `filioque'를 반대하는 동방교회의 입장을 밝히고 그 후로는 서방교회와 공식 접촉이 단절되었고 1054년에 통일 로마 제국의 교회는 동서로 분립하여 동방교회는 희랍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로 서방교회는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 Church)으로 나뉘어졌다.


성령의 호칭과 사역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구약에 약 100번 정도 성령에 대한 인용이 있다. 그 첫번째가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인데 [하나님의 신]으로 불리는 성령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역사하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시편 33장 6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하였는데 [입 기운]이란 '바람' 또는 '숨'을 가리킬 때 쓰이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인데 성령을 지칭하고 있다.
성령은 우주의 창조나 죽은 생명을 새 생명으로 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도 흙으로 빚어진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창 2:7). 밤에 찾아와 영생을 길을 묻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요 3:5)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며 성령의 역사와 바람이 부는 것을 비교하셨다(요 3:8).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서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신다고 했다(벧전 4:14).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한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고 부르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이라고 말씀하셨다. 보혜사란 한자의 뜻대로라면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스승이라는 말인데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이고 우리 옆에서 위로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도 불린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령은 그 외에도 여호와의 신(사 11:2), 주 여호와의 신(사 61:1), 그 아들의 영(갈 4:6), 영광의 영(벧전 4:14)이라 불린다.

 

성령의 사역, 즉 하시는 일을 살펴보자. 성령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인데(딤후 3:16)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 34장 16절에는 여호와의 입이 명하시고 그의 신이 모으신 책이 여호와의 책 즉 성경임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이 인간 저자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거룩한 책이다.
성령은 천지 창조에 제3위 하나님으로서 함께 동참하셨다. 세상을 만드시는 초기 사역을 기록한 창세기 1장 2절 외에도 성령은 만상(萬象)을 이루셨고(시 33:6의 입 기운), 인간의 생명을 지으신 일과(창 2:7의 생기), 동물을 창조하실 때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라고 성령의 창조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은 태초의 창조 뿐 아니라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일 즉 인간의 재창조에 주도적 역할을 하신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였고 인간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수적이다(딛 3:5).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책망하시며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인도하신다(요 16:8).


성령은 인간을 구원하는 중생의 사역 뿐 아니라 깨끗하게 하시는 성결의 역사를 이루신다. 오순절 날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라고 설교하며 죄를 용서함 받는 중생에 이어 성령 세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성령은 인간의 영을 살리실 뿐 아니라 충만하게 하심으로 신자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다(행 15:8-9).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참여하셨다. 즉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고(마 1:18,20), 40일 금식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고(마 4:1), 세례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으며(요 1:32), 성령의 권능으로 병을 고치기도 하시고 말씀을 전하셨다(눅 4:14).

 

 

 


성령의 신성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신자들이라면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사도신경을 외우게 될 것이다. 주일 대예배 시간에 온 회중이 함께 사도신경을 외우며 교회의 기초가 되는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의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성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이나 성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부분은 꽤 많은 편이지만 성령에 관해서는 매우 간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을 믿사오며" 라는 표현 속에서 성령의 존재 정도만 인정하는 수준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초기 교회의 세례 의식문의 삼위일체적 표현이나 성령께도 영광을 돌리는 초기의 송영이나 찬송에 기초를 둔 것이다.
주후 4세기경에 있었던 기독론 논쟁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성과 인격성이 확정되었다. 325년에 결정된 니케아 신조에서 성령에 관한 것은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정도를 지나지 않았다. 주요 관심사가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완전한 인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3위 하나님이신 성령에 관하여 논의가 되기 시작하면서 그가 다른 두 위의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셨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의 이단 아리우스는 예수님도 피조물이지만 성령도 예수님에 의하여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신학자는 성령을 힘이라고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세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영물인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피곤할 때 피로회복제를 먹으면 피곤이 가시고 새 힘이 솟는 것같이 성령이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공급하는 힘 또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가? 성령의 신성이나 인격성을 논함에 있어서 어떤 이는 아무런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성령에 관하여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신약 시대 특히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를 흔히 성령 시대라 부르는데도 성령에 대하여는 바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언어가 제한적인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가 성령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던 중에 비둘기와 비교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래서 비둘기 한 마리를 구하여 새장에 넣어 두고 주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주일이 되자 선교사는 교회를 돌보는 집사에게 새장을 강대상에 가져다 놓으라고 부탁하였다. 그랬더니 이 아프리카인은 슬픈 표정으로 말하기를 어제 밤에 고양이가 성령님을 먹어 버렸다고 보고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례를 베풀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니 성령께서도 동등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고, 찬송을 부를 때도 "성부 성자 성령께 찬송과 영광 돌려보내세"라고 말하니 삼위 하나님은 동일하게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만일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성부나 성자와는 다른 성질을 가졌다고 말할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자 예수님이 성부와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인 것과 같이 성령은 성자와 동등한 하나님이시다. 다만 성자는 출생되어 보내심을 받았고, 성령은 나왔다고 설명된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설명하는 글 가운데 "출생되지 아니한 자, 출생된 자, 나온 자라고 구별되는 경우 이외에는 모든 점에서 하나" 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께서도 영원한 존재이며 신성과 능력에 있어서 아버지나 아들과 동등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단일성을 말하기 위하여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나 삼위일체 안에 세 인격이 있고 각 인격은 완전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으로 피차간에 동등하시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동질(同質)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성자와 성령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하거나 아버지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세 인격은 각각 삼위일체의 어느 하나 보다 크지 아니하며 본질에 있어서 각각 동등한 하나님이시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대로 인간의 언어는 절대적인 진리 특히 하나님에 관하여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하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이것을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가 불충분한 수단일 수 밖에 없으나 침묵하지 않기 위하여 말하는 것 뿐이다.

 

 

 


성령의 인격성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성령을 아버지의 영(마 10:20)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라고도 부르니 성령께서 신성을 가지셨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그의 인격성을 인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성령이 단순한 능력이나 힘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는데(행 1:8) 사람들이 이것을 착각하여 성령이 어떤 힘인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다.
성령께서는 성부나 성자와 똑같이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인격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서는 성령께서 지, 정, 의(知, 情, 意)를 가지셨음을 성경에서 증명하면 될 것이다. 성령께서 신성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분이라면 그는 우리의 기도와 찬송을 받으시며 성부나 성자와 동등하게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 되시는 것이다.


성령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즉 지적(知的)인 존재라는 말이다. 초대교회 신자들 중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헌금을 드리면서 자기들의 땅을 판 돈 중에서 일부를 감추고 다 드리는 것처럼 속였을 때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행 5:4,9). 즉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성령께서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 분이라는 말이다(고전 2:17). 성령은 과거의 일 뿐 아니라 장래의 일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요 16:13).
성령은 지식 뿐 아니라 느낌을 가지고 계시는 정적(情的) 존재이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반역할 때 성령께서 근심하시며 그들의 대적이 되어 그들을 치셨다고 했고(사 63:10),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명하신 것을 볼 때 성령께서는 근심하실 수 있는 정서를 가지신 분임일 알게 된다.


신자들이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연약 속에 빠져 있을 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했다(롬 8:26).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감화를 소멸하지 말고 성령께 순종하여 그를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소멸한다는 번역(살전 5:19)은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를 소멸함을 뜻하는 것이니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행 5:32).
성령은 의지를 가지고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전도자 빌립에게 성령께서는 사막에 위치한 가사로 가라 명령하셨는데 이는 에디오피아의 내시로 재무장관직을 맡고 있는 이를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사건이었다(행 8:26).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어도 의지를 가지고 명령하시는 성령께 순종했을 때 내시 개인만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에디오피아를 복음화하는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의 수고로 부흥하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계기가 마련될 만큼 일반인들에게도 인식이 바뀌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안디옥교회의 정, 부(正, 副)목사 격인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지시하셨다. 순종한 안디옥교회는 최초로 이방인에게 선교사를 파송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파송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울 사도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을 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행 16:6) 선교팀을 유럽으로 보내시고자 작정하셨기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해 유럽 전도를 하게 하신 일을 발견하게 된다(행 16:9-11). 선교사를 선택할 때, 파송할 때 그리고 사역지를 결정할 때 등 성령의 의지를 따라 행할 것이며, 성령께서는 당신의 뜻하신 바를 따라 행하게 하시는 인격적인 존재이심을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자기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고 했다(고전 12:11). 신자들이 자기의 소원을 따라 하나님께 성령의 은사를 구하지만 허락은 사람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성령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믿은 후에 능력있는 봉사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눅 24:49).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기도도 찬송도 힘있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 14:15). 기도에 힘이 없거나 찬송 시간에도 기쁨이 없는 이들은 성령 충만을 위해 간구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죄인을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실 뿐 아니라 거듭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성령 세례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약속하셨다. 물로 세례를 주던 세례 요한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마 3:11; 요 1:33).
성령 세례란 무엇이며 누가 성령의 세례를 받는가를 살펴보자. 우선 물세례와 성령 세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본다. 물세례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거듭나 새 사람이 된 것을 증명하는 예식인데 중생(重生)함으로 자기가 지은 죄 즉 자범죄(自犯罪)에서 용서받는다. 그러나 타락한 성품 즉 죄성(罪性)은 여전히 신자 안에 남아 있다. 이것을 원죄(原罪)라고도 부른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에서 깨끗함을 받는 단계가 있는데 신자가 거듭난 후에 믿음을 따라 순간적으로 성령 세례를 받을 때이다. 이를 온전한 성결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계에서 사람은 원죄로부터 정결함을 받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게 되며 능력있는 봉사를 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의 시카고 출신 부흥사인 무디는 보기 드문 대설교가였다. 그가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세계적인 대전도자가 된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디는 이런 고백을 했다. 그가 매우 고심해서 설교를 준비해도 늘 허공을 때리는 것 같았고, 한 여신도는 입버릇처럼 "무디 씨의 설교에는 힘이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그 부인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함께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을 구했다. 시카고의 대화재 후 그가 뉴욕에 갔을 때 이상한 힘이 그의 머리 위를 누르는 것을 느꼈다. 무디는 즉시 호텔로 돌아가 "오, 하나님이시여 손을 멈추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성령을 부어 주셨고 이후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 힘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령 세례를 성경에서는 성령의 충만(행 2:4,38),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심(행 11:15), 성령을 받음(행 19:2),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눅 24:49)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령 세례는 단회적(單回的)인 경험이고 성령 충만은 반복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사도들이 오순절 날에 아버지의 약속하신대로(행 1:4) 성령 세례를 받아 성령 충만하였는데(행 1:4), 그 후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를 받게 되자 다시 모여 합심 기도를 드릴 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을 다시 받은 사실을 보아 일회적인 성령 세례와 반복적인 성령 충만을 구분할 수 있겠다(행 4:31). 성령 세례로 성결함을 받은 후에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성장과 함께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여야 한다.

성령 세례는 사도들이나 초대 교회 신자들 뿐 아니라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행 2:39) 즉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성령 세례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거듭난 후에도 자기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으며 육체 속에서 한 다른 법 즉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싸우며 자기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 것을 회개하며(롬 7:17-24) 자신과 죄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성령 세례를 간구하여야 한다(눅 24:49).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은 현재형이니 지금 구하여야 하겠고 수동태 동사형으로 쓰였으니 우리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마 7:11) 즉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눅 11:13).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며 성령 세례를 사모하는 중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행 8:15).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부어 주심을 받게 된다(행 10:44). 빈 마음 그릇에 기름 같은 성령(요일 2:27)이 말씀과 함께 넘치게 채워진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읽으며 묵상할 것이다.
성령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 성령"(행 5:32)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신다고 했다. 능력 있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고(행 1:8)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여야 한다.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 충만의 축복을 받게 된다.

 

 

 


성령의 은사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은사(恩賜, gift 또는 charisma)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로운 선물을 의미한다. 기본적인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입은 신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사이다.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으면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며 주님과 동행을 실감하게 되고(갈 2:20)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보호를 은사라고 했다(고후 2:10-11). 위기와 고난 속에서 본인이 드리는 기도나 다른 성도들에 의해 드려지는 중보의 기도를 통해 위기에서 건지심과 보호의 은사가 주어진다(시 50:15). 이러한 은사들은 신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초자연적인 신비 현상들 즉 방언, 귀신을 내쫓거나 병을 고치는 은사 등만으로 한정하는 오해가 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이가 자기와 같은 은사를 받지 못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교만해지는 경우가 있다. 은사를 받은 이는 더욱 겸손하여야 하겠고 덕을 세우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도록 해야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나눠 주시는 이는 한 분 성령이시고 신자들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직임을 맡기사 여러 가지 역사를 하게 하신다(고전 12:11). 신자가 구하거나 선택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개인의 환경과 재능에 따라 성령께서 자유로이 신자들에게 각양의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신자들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서로 봉사하여야 한다(벧전 4:10).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주시니 성도들은 한 몸의 지체들로서 분쟁이 없이 서로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고전 12:18,25).
성령의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서 몇 가지 기본적 종류로 구분된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고전 12:8; 롬 12:7)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잘 전달할 수 있는 은사이다.
[믿음](고전 12:9)의 은사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는 기본적인 믿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것 같은 초월적인 믿음을 말한다.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30)를 예수님께서 행하실 때는 즉시 그리고 완전히 고침을 받았으나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바울 사도는 자기의 병이나(고후 12:8-9)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딤전 5:23). 그러나 성경은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과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일으킬 것을 말하고 있다(약 5:14-15).


[능력 행함](고전 12:10,28)이란 병 고치는 신유의 은사 외에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효과적인 선교와 전도를 위해 따르는 은사이다. 전도를 방해하는 남자 무당(엘루마)을 눈멀게 한 바울의 능력을 통해 총독 서기오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좋은 예이다(행 13:6-12).
[예언](고전 12:10; 롬 12:6)은 장래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미리 말하는 은사를 가리킨다.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언의 중심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순진한 이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 예언을 많이 하고 있으니 주의하여야 한다(렘 14:14).


[영(靈) 분별의 은사](고전 12:10)는 성령과 악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은사이다.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가를 시험해 보고 분별해야 한다(요일 4:1).
[방언과 방언 통역하는 은사]가 있다. 방언은 평소에 알지 못하던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행 2:8)도 있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대신(對神) 방언(고전 14:2)이 있다. 대신 방언을 사람이 알아듣도록 통역하는 은사가 방언 통역의 은사이다. 성령이 충만하면 방언을 한다고 오해하여, 방언을 못하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장 큰 성령의 은사는 [사랑]이다. 여러 가지의 은사를 말한 후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고 권한 바울 사도는 이어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인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전 13장).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10)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띠와 같다(골 3:14).
그 외에 섬기는 일, 권위(勸慰)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도 지체된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나눠 주시는 은사들이다(롬 12:4-8).


 


현대 성령론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성령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수 1:7)는 말씀을 명심하여야 한다. 좌로 치우치면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자유주의로 흘러가게 되고, 우로 치우치면 극단의 신비주의로 치닫게 될 위험이 있다.
성령론을 인간의 이성이 미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석하려다 보니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기록되었음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한 계시이며 오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신학에서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부인하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진리의 말씀을 떠나 좌로 치우쳤기 때문이다.


한편 우로 치우치는 경우가 있다. 성령의 역사를 특정 개인과 집단에 유리하게 해석함으로 특정인을 신격화하거나 자기들의 집단만 참 교회인 것처럼 위장하는 사이비 이단들이 있다. 성령의 직통 계시를 받는다던가 성령의 능력이 자기에게 특별히 임하였다고 주장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경우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일수록 자기를 감추고 하나님만 내세우며, 자기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고든(Gordon)신학교의 창설자인 고든 목사는 현대에도 새로운 오순절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나 성령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굴복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내어 맡기고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를 이룰 때 기독교의 새로운 오순절이 시작되곤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제자를 훈련하는 현대 교회에서 성령 없는 사역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성령이 교회를 시작하게 하셨고 또 자라게 역사해 오셨기 때문이다. 성령 없이도 인간의 노력이나 지식 또는 조직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성도 개인이 성령의 거하시는 성전이 되고 그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갈 때(엡 2:21-22) 교회는 능력 있는 조직체가 될 것이다.
성령 없는 복음주의나 성령 없는 현대주의가 이단만큼이나 치명적이 될 수 있다. 성령의 일하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성령을 소유하려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온전히 소유될 때 즉 성령에 충만한 신자가 될 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게 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성령 없는 개인이나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다. 경건의 모양보다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현대 교회 신자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기도하고 성령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와 성령론은 신비주의적 요소를 강조하는 오순절 계통과 이와는 반대로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양분되어 있다.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열심이 있고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이르는 경우가 많으나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교만해지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한편 자유주의 교회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경험을 앞세우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하기 쉬운 약점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신비주의로 흘러서는 안되나 신비적인 요소를 빼 버릴 수 없다.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 육체 안에 머무신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며, 이러한 비밀스런 결합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연결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극단의 신비주의는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기의 체험을 앞세우는 위험이 있고, 극단의 자유주의는 성경의 교훈에서 떠나 성령의 역사를 부인함으로써 기독교의 참 모습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죄인에게 새 생명을 부어 주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순종하면서 신앙을 지켜 가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리는 의로운 도구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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