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학/뽈 리꾀르의 신학적 해석학 이창용(평택대 신대원)
1. 들어가는 말
프랑스의 대표적 해석학자 뽈 리꾀르는 철학적, 신학적 작업을 통해 아주 인상적인 사상의 길을 왔다. 리꾀르는 인간의 의지, 악, 신화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 등의 다양한 주제와 실존주의, 현상학, 구조주의1),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분석 철학 등의 현대철학의 방법들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종합하려는 연속의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사상은 끊임없는 ‘해석의 모험’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리꾀르의 신학적 해석학2)에 관한 논문들은 성서해석학, 성서해석의 논구를 통해 영어로 번역, 편집되었고, 불어로는 구조주의 해석학과 논쟁을 담은 성서주석과 해석학과 주로 90년대의 논문들이 수록된 <책읽기3> 으로 편집되었다.
리꾀르의 신학적 해석학은 현대의 성서해석들- 불트만, 구조주의 성서해석, 문학적 성서해석-과의 대화 및 대결을 통해 성서 언어의 특징과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본래의 계시의 말씀(케리그마)과 쓰여진 말씀(성서)의 긴장 속에서 성서의 통일된 이해를 추구하는 데 있다. 본 논문은 하나의 체계화된 신학적 해석학의 이론이기보다는 현대 철학 해석학과 신학의 해석학의 대화시도라고 할 수 있는 필자의 신학의 해석학의 면모를 소개하고 그의 신학의 해석학을 재구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2. 현대의 신학의 해석학의 문제 상황과 원리
리꾀르의 신학적 해석학은 본래의 말씀과 쓰여진 말씀, 쓰여진 말씀과 생생하게 이해된 말씀간의 이중적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신학적 해석학이 가지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약과 구약의“두 성경간의 관계”또는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관계” 에 대한 물음에서 해석하였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구약과의 관계와 해석하였고, 하나의 문서(구약)와 하나의 사건(신약-예수그리스도)에서 출발했고 이러한 사실에 의거 옛 문서를 영적으로 해석한 결과 구약자체의 의미 변화‘를 가져 왔다. 갈라디아서4:24에서 말하는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여자, 하갈과사라의 두 아들을 각각 율법과 복음 아래 있는 사람으로 비유한다. 이것은 일종의 우유(의)적(all goriquement), 영적 해석을 명시한 것으로 드러내주는 예이다. 신약의 말씀자체가 구약의 재해석학이다.
둘째 어떻게 ‘성서해석과 우리의 삶의 해석이 일치되고 조화 되는가’ 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사심의 의미는 항상 믿는 자의 실존의 의미를 해명해주고 반대로 믿는 자의 구체적 실존적 의미로부터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가 다시 확인되는 해석학적 순환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 사건의 케리그마가 오늘날 어떻게 성서독자에게 알려지는가의 과정을 이해하는 일이다. 한 사람에 대한 케리그마는 쓰여진 신약의 텍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성서의 텍스트는 제일 먼저 케리그마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과 보고 속에서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고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최초의 해석을 담고 있다.
3. 철학적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의 상관관계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적 해석학자의 한사람으로서 리꾀르는 신학적 해석학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기에 앞서 철학적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반성한다. 리꾀르는 신학적 해석학이 철학적 해석학에 의해 발전된 일반적 해석의 원리들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학적 해석학은 철학적 해석학의 방법적 원리들과 개념들- 담화, 문서, 설명, 해석, 거리두기 또는 소격화 3)수용 또는 철학적 해석학이 적용된 특수한 경우이다. 필자는 철학적 해석학의 원리를 ‘객관화와 이해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객관화란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자기 의사를 표현함으로써 어떤 사실에 대해 보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 즉 언어 사건 또는 언어행위가 문서화되는 과정이다. 말이 일단 글이 되면 그 글은 문서의 양식이나 문학상의 장르에 따라 독특한 글의 구조를 가지게 되고 ‘글의 본문 내용’ 은 의미를 형성한다. 어떤 글의 의미가 지시하는 사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명제적 진리치로 구분될 수 있다. 이 두번째 의미가 바로 “텍스트의 사실”이며 “텍스트의 세계”이다. 문학작품에서 이러한 텍스트의 의미세계는 경험적 현실세계를 모방함으로써 현실을 재구성 또는 재기술이라 한다.
신학적 해석학은 철학적 해석학의 원리로부터 선포된 생생한 말씀과 문서화된 성서를 구분할 것을 배운다. 즉 하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형성되어 주어져 있는 구약이나 헬레니즘문화에서 형성되어 전승되고 있는 문서의 전이해를 필요로 한다. 말씀선포의 원천인 증언들과 증언들에 대한 해석이라는 이중성이 신학적 해석학이 출발하는 거리두기(소격화)의‘해석학적 상황’이다.
리꾀르는 구약학자 폰라트, 신약학자 아모스 빌터, 베어드슬레 등의 성서신학자의 도움 아래 성서 주석에 있어서 세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하나의 구조와 특정한 신앙고백의 양상과의 관계. 둘째 성서 각 권에 들어있는 구조들간의 특정한 쌍의 관계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신학적 함축의 긴장관계. 셋째 모든 형식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성경전체의 해석 공간에서의 의미들의 갈등 또는 순환관계이다.
리꾀르는 성서의 이해란 성서본문이 전개하는 텍스트의 의미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현실로부터 이탈하여 성경자신이 지시하는 새로운 의미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부름을 이해하는 일이다. 동시에 텍스트의 세계의 자기제시 앞에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자기에 대한 가상과 왜곡을 파괴하는 작업이다. 이처럼 해석학의 독특성과 독자성은 성서텍스트 역시 여러 텍스트 가운데 하나이지만 성서가 지시하는 새로운 존재는 오직 성경의 고유한 텍스트 세계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성경의 모든 의미 내용들은 오직 하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뗄 수 없이 연결된 하나님에 의해 통일성을 얻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리꾀르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은 우리의 실존적 이해의 해석틀에 성경 텍스트 세계를 맞추려는 오류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불트만의 해석학은 그 기본 동기와 방법적 추구의 면에서 리꾀르에게 갚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꾀르의 신학적 해석학은 불트만과의 대결을 성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불트만의 비신화화-실존론적 해석의 비판
리꾀르의 불트만 비판은 불트만의 신학적 기획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 아니라 불트만의 작업을 현대의 해석학적 상황에서 성서의 말씀의 신앙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진지한 시도로서 인정하면서 그 해석학적 의도와 구조를 해명하고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을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리꾀르에 따르면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했다는 소식”을 성자 독자요 말씀을 듣는 청중인 현대인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작업은“현대인에게 무의미한 신화적 세계상을 묘사하는 것에 불과한 잘못된 스켄들을 파기하고 모든 인류에게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진정한 스켄들, 즉 예수그리스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나타나는” 일이다.
리꾀르는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이 가지고 있는‘해석학적 순환’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불트만이 제시하는 성서 해석의 상황은 이해와 신앙의 순환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성서의 이해는 해석자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가 이해하려는 의미, 즉 성서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제시하는 신앙의 세계는 텍스트에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반면에 텍스트의 이해는 항상 신앙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꾀르는 이해와 신앙의 순환논리에 의해 본래적 케리그마의 의미와 그에 대한 신앙의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불트만의 해석학적 기획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불트만은 성서텍스트의 신화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진술의 의미 자체는 더 이상 신화적이 아니다” 라는 전제 아래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직면한 세계와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하는 의미들은 신화적 표상에 의해 대상화된 언어에 속하지 않는 순수한 언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언어로서 하나님의 행하심, 행위로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미래를 예시한다.
둘째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존재론, 특히 철학적 인간학의 측면으로부터 “성서적 인간학에 접근하고 성서의 우주론적이고 신화론적인 진술을 인간실존의 개년들로 해석할 수 있는” 적합한 개념적 도구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트만이 하이데거로부터 채용한 것은 실존적 존재론이 갖는 풍부한 내용이 아닌“ 실존 범주로 환원된 단순한 형식”이었다. 리꾀르는 기독교 신학이 하이데거 철학과 의미있게 대결하려면 그의 사유의 긴길을 전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고 믿는다.
리꾀르는 불트만의 비판에서 드러난 것처럼 리꾀르의 신학적 해석학의 관심은 두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로 신학적 해석학의 일차적 연구 대상인 성서언어의 독특성과 의미의 해명에 관심을 잡중한다. 다음으로 성서언어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종교현상학과 철학적 결과와 더불어 추구하고자 한다.
5. 성서 언어의 은유적 성격
리꾀르에 따르면 은유를 여러 수사학적 표현 방식 중 언어의 의미 창조 기능을 대표하는 표현양식이다. 모든 문학적 장르 글에서 이러한 은유적 표현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글에서 기존의 의미와 다른 새로운 의미가 창조되고 인간실존과 현실이 새롭게 기술된다. 성경 비유의 은유적 성격에 대한 반박을 리꾀르는 현대 비유 연구의 창시자 윌리허에서 찾는다. 월리허는 복음서의 비유의 기능을 은유로서 규정하는 것을 단적으로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은유적 해석이란 일종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서 비유 속의 각 단어들에 숨겨진 ‘참된’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리꾀르는 성경비유의 기능을 그가 ‘긴장이론’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은유이론에 의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 이론은 은유과정을 한 단어의 의미가 문장 맥락과의 관계에서 수시로 변형되어 다양한 의미로 형성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삼중의 긴장관계가 성립한다.
삼중의 긴장 관계란 1. 은유적 표현이 사용된 문장들과 비유 전체 사이의 긴장 2. 한 단어의 은유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의미를 순간적으로 형성할 때의 긴장 3.최종적으로 은유를 통해 복합적으로 그려지는 장면과 일상 세계의 현실과의 차이에서 어는 긴장이다.
6. 성서 담론4)에서 음성과 글의 뒤엉킴
리꾀르는 ‘성서담론5)에서 음성과 글의 뒤엉킴“ 이라는 논문에서 그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내게는 한편 일상 언어적인 세속적 맥락에서 일상언어로 사용되는’말‘ 과 ’글‘ 이라는 용어와 다른 한편 높은 수준의 교의학적인 진술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하나님 ‘말씀’ 과 ‘성서’의 관계라는 대문자로 쓰여진 동일한 용어의 사용 사이에 있는 간격이 극복할 수 없어 보인다. 그는 일상언어의 차원에서 말과 글이 어떻게 서로 교차하면서 상호 보완 관계를 형성하는지를 예시한다. 말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인간신체의 직접적인 활동, 특히 ‘음성’을 통해 나타나는 반면에 ,글은 음성으로 표현되는 말을 기호와 문자를 통해 공간적으로 외면화한다. 따라서 글과 말은 그 본질적인 속성상 서로를 대신할 수 없는 양극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분리되어 작용하지 않고 일종의‘상호 친화성’속에서 뒤엉켜 있다.
리꾀르는 성서에서 말씀과 본문 사이의 ‘수평적인’ 해석학적 순환 관계, 즉 일상 언어의 차원과 신학적 언어의 차원의 관계와 교차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구약성문서의 지혜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월적 성격과 인간의 언어의 세속적 성격 중 어느 하나도 무시되지 않고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지혜의 말씀은 나이가 없으며 동시에 일상적이다.
7. 해석과 설교에 있어서의 상상
우리가 상상이라고 말할 때 흔히 그것을 실재가 아닌 가상적 현실(환상적 세계)을 추론하거나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우에 상상은 실재와 논리적으로 관련된 이성이나 과학과는 반대되는 의미로 특별히 이것은 인과율에 의해 추구되는 논리적 사고와는 대치되는 논리의 비약적 사고로 이해되었다. 성경 해석과 설교에서 상상을 이러한 의미로만 이해할 때 상상의 사용은 회의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다룰 상상은 우리의 성경 해석과 설교에 있어 가장 요긴한 기능과 의미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의와 범위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리꾀르(Ricoeur)나 멕파게(McFague)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방식은 단순히 카메라의 눈처럼 사물(텍스트를 포함)을 '보는 것'(seeing)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해 여러 가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며 상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갖는 인간의 관련적, 창의적(상징적이며 상상적) 인식을 은유로 봄으로서 이 경우에 은유란 단순히 언어상의 '말의 수식이나 형용'(figure of speech)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사용에 있어서 인간의 인식 방법 자체를 말한다(Wilson 1993: p.135).
여기서 은유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 상상은 실재(reality)와 관련된 이성이나 과학과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된 가상적 세계에 대한 '상상/추측'의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은유와 마찬가지로 언어적 표현 내면에 있는 것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deeper sight)을 의미하는 것(Riegert, 1990: p.46)으로 리꾀르가 '옛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보는 상상적 능력'을 은유로 이해하여 이것을 '제 2의 순진성'(second naivety)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 방법으로서 상상은 '부재'를 '현존'으로 바꾸고 실재성(actuality)을 가능성(possibility)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을 현존하고 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으로 전환하는 인간의 사고 능력'(Kearney, 1991: p.4)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인과율에 기초한 수평적 논리성과 대조되는 사고 형태지만 그러나 논리성을 무너뜨리기보다는 도리어 논리성을 보충하고 강화해 주는 긍정적 역할과 기능을 한다(Wilson, p.136). 특별히 해석과 설교에 있어서 이 둘-논리와 상상력-이 상호 보충적으로 사용될 때 해석과 설교의 효과는 극대화된다(Wilson, pp.137-38). 이 경우에 상상은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축에 걸려 있는 개념들을 오직 하나의 일괄된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움직여 가는 논리성과는 달리 전혀 외관상으로는(인과율에 있어서도) 유사성이 없는 두 개념을 보다 창의적이고 의미 있게 연결시키는 사고형태로 이것은 비유적/구상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예로 우리가 "사랑은 빨간 장미다"라고 할 때, 사랑과 빨간 장미와는 문자적으로 전혀 관련성이 없지만 그러나 사랑의 아름다움과 연약성 그리고 그것이 주는 상처는 빨간 장미의 모습 가운데 잘 표현되어 있다. 물론 복음서에서도 이와 같은 상상의 형태를 가진 다양한 은유적/구상적 표현들이 많이 있다(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이중 탁월한 예가 된다).
여기서 상상이란 본문 가운데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문에다 억지로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의 의미를 회상과 연상을 통해 보다 풍성하게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Wilson, p.138). 즉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과거의 신앙 전승들(OT) 가운데 있는 범례적 사건들을 회상하고 연상함으로 본문의 상징적 의미를 풍성히 경험한다.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사건들을 연관시킴으로 본문의 풍성한 상징적 의미의 가능성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Riegert, 1990: 50ff) 이것은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물론 저자의 견해와 함께-본문을 해석할 뿐 아니라 본문이 또한 우리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갖는 상상의 동원을 의미한다.
8.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리꾀르의 신학이 출발하는 문제상황은 구약과 신학, 성서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과 성서 텍스트에 대한 이해 갈등사이의 갈등상황이다. 그는 현대의 신학적 해석학이 직면한 이런 문제를 성서언어자체에 대한 반성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닌 신학적 반성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리꾀르에게 있어 신학적 반성은 철학을 비롯한 현대의 학문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의미 있게 추구될 수 있다. 그의 신학적 해석학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하고 반성된 신앙에 도달하려는 길을 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꾀르의 해석학적인 공헌은 무엇보다도 해석의 주된 노력을 텍스트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로 돌려놓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두가지 명제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첫째 명제로 현재의 형이상학적 위기는 전승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상실되어 버린 초월과 형이상학의 차원들과 의미 내용을 되얻어 내고 새롭게 깊이를 재어보는 시도를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즉 초월이 무엇이며 또 시간과 공간 저쪽에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잠정적인 이해의 일치에 의지할 수 없고, 현재에 초월과 영원한 존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현재에 다시금 확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것에 관한 전승된 말들의 의미의도를 정확하게 분석함으로서 확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6) 두번째 명제는 문서화된 본문자체의 현상에 강조를 둠에 있다. 문서화된 본문의 특징은 그 본문이 더불어 그 저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그 자체로서 유의미적이며 그 자체의 영행력을 평가하는 자율적 언어 구성물이 된다는 것이다.
리꾀르의 성서해석학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비평주의의 사막을 넘어서 우리는 다시 부름받기를 원한다” 라고 리꾀르는 자신의 저서“악의 상징”을 마감하면서 기록하였다. 그가 시도한 성서해석학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신자를 위한 성경의 강해는 아니다. 그는 상징적 사고의 지시를 따르면서 인간과 인간존재와 모든 존재의 존재에 대한 유대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종교철학사고를 반성의 힘으로서, 그리고 일관적인 진술의 요소 속에서 수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종교철학적인 사고에 있어서 성경텍스트는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리꾀르의 해석학이론의 부제인 담화와 의미의 잉여에서 그는 담화 안에 나타난 사건과 의미의 변증법을 성서라는 텍스트에 작용하여 부활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소망의 빛 안에서 자유를 지향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텍스트의 세계는 또는 텍스트의 주제와 만난 주체의 텍스트 앞에서의 자기이해를 통하여 생산적 사상을 통하여 내어줌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 과정 속에서 성서 비평이후에 텍스트의 객관적인 의미에서 이탈되어 버린 역사실증주의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문자적 우상주의를 극복하고 텍스트의 문학적인 장르와 스타일로 제기능을 하여 텍스트의미를 그 풍부함 가운데서 전달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놓은 점에서 그 공헌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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