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도 교부들의 신학
1. 사도적 교부들의 신학 (속사도)
1) 사도적 교부의 정의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의 개인적인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속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사도시대 이후초대교회 기독교 저술가들을 가르킨다. 그리고 이들을 준사도, 혹은 사도적 교부라고 부른다.1)
그러므로 교부란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로서 사도들의 뒤를 이어 기독교회의 건설과 교리 발달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교부로서 지녀야할 자격중 중요한 한가지는 교리의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 즉 사도로부터 직접적인 예수님의 사역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이어야 한다는것이다.
초대교회에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교부들로서는 클레멘트(Clement) 로마의 힐마스(Harmas), 아피오케와 이그나시우스(Igatus), 서머나감독 폴리갑(polycarp),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Banaba), 파피아스(Papias) 등의 교부들이 있으며 이름은 없으나 글만 남겨진 것으로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보낸 편지와 디다케(Didache)등이 있다.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 같은 사람은 그들의 사상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이들을 교부로 포함시키는 엇갈림도 있었다.
교부의 시대를 구분해 본다면 니케아 시대 이전의 교부와 니케아 시대 이후의 교부로 구별을 할수 있다. 그리고 니케아 이전의 교부들을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당시 교회가 동서로 나누어 지지는 않았지만 지역의 언어를 따라 헬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교부를 헬라적 교부라고 부르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사는 교부를 라틴교부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그리고 동방교부와 서방교부는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로부터 교회가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을 하였는데 이때 부터는 분열의 골이 깊어 지면서 지역을 동서로 구분 하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이름을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
교부들도 역시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라고 부르던 것을 그때부터 동방교회에서 활동하던 교부를 동방 교부라고 하고 서방교회에서 활동하던 교부를 서방교부라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교회가 동서로 분열되기 이전에는 지역의 언어로 구별하여 교부들의 호칭을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로 나누어 부르게 되었고 로마교회가 완전히 나누어 지지는 않았지만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부터 그들의 신학은 교회의 분열을 가저오게 되는 촉매제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이 시작이 되면서부터는 언어적인 구별에서 지역적인 구별이 되어 동방교회의 신학과 서방교회의 신학으로 동방교부와 서방교부로 구별이 되게 되었다.
2. 사도적 교부들의 편지
1)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a)
속사도 시대의 클레멘트는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등이 활동하던 주후 90년에서 140년경의 어간을 말한다. 이 때 중요한 문헌으로는 디다케, 클레멘트1서신. 이그나티우스의 일곱서신, 폴리갑의 서신. 바나바서신, 헤르마스목자, 등이 있다.
그리고 속사도 시대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군주 감독제이다. 즉 교황제도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게 되었다. 클레멘트가 사도적 계승의 교리를 주장한 반면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제를 주창하였다. 클레멘트가 사도적 계승을 주창하게된 이유는 고린도 교회내의 분쟁과 관련이 있다. 클레멘트는 정당하게 임명된 고린도 교회의 장로들의 직책을 빼앗은것에 대하여 책망하면서 빼앗은 장로직을 복귀시킬 것을 권면한다. 그이유는 장로직은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온 것 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주창한 사람으로 역사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로마의 클레멘트는 역사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밝힐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대부분 1세기 말 로마교회의 유력한 장로로서 빌립보서 4:3절에 바울이 언급한 사람이거나 혹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처형된 클레멘트와 같은 사람이거나 그 사람과 연관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클레멘트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른데 대략 3가지 견해로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는 성 바울의 동역자로서 생명책에 있는 동역자들(빌4:3절) 중의 한사람이었던 클레멘트를 들수 있다. 오리겐과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저자 라고 한다. 둘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촌이자 기원후 95년에 그 황제의 집정관이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가 있는데 그는 그 직위가 끝날무렵 무실론과 유대관습의 혐의로 그의 아내 도미틸라와 함께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학자들은 그의 집정관 스트리터가 데오빌로일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클레멘트는 로마인이 아니었고 집정관이었던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매우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세 번째 학설은 클레멘트와 도미틸라 집안의 자유민으로서 그가 인종상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 편지의 저자일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는 고린도에 전해진 서신과는 많은 모순이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하기는 매우 힘들다.
①. 제 1 서신과 내용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편지는 A.D 96년경에 로마 교회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한 서신(Epistle to Corinthans)으로 모두 65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고전의 가장 아름다운 문헌가운데 하나이다. 비록 본문에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전통적으로 교회는 클레멘트의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편지에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였다. 사실 그는 당시 로마교회의 외교담당 지도자였다.3)
당시 고린도는 B.C 44년에 로마의 식민지로 건설된후 곧바로 로마화 되었다. 때문에 로마 교회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이제 로마의 관할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고린도 교회가 바울사도의 시대부터 분쟁이 있었다. 바울이 사역하던 당시도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니, 게바파니, 그리스도파, 등의 분쟁과 신비주의적인 은사론 때문으로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설상 가상으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혹독한 박해로 인하여 교회는 신앙의 상호 일치보다는 분쟁에 휘말리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4)
②. 교회의 분열을 타파하고 질서를 주요시하였다. 교회의 분열은 이질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합당한 질서를 강조하였다. 교회는 신앙의 겸손과 순결, 순종, 그리고 평화를 누리며 선을 행하기를 추구한 신앙을 회고한후 그 분열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전혀 있을수 없는 그리고 결코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③. 신자는 참다운 회개로 신앙을 지키는 삶과 경건을 촉구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한 회개란 성령으로 말미압는 회개, 즉 겸손에 이르는 회개이며 경건한 하나님의 자비를 통한 사랑을 말한다.
④. 믿음에 의한 기독교적 의는 변화된 삶을 말한다. 클레멘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 제사장이요 보호자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자이시다. 그를 통하여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리고 우리의 어리석고 어두워진 마음의 깨달음에 빛을 받게 되고, 교회는 그 믿음을 인하여 믿음의 의가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하나님의 의는 삶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것이다.
⑤. 클레멘트는 교회의 질서를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의 모든 성도는 다 장군이 아니라 하위 계급자들로서 상급자의 명령을 따라야 하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맏은 사역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인의 온전성이 들어나게 되기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고 사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듯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은 사도들로부터 세움을입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 질서를 무시하고 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클레멘트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파당을 피하고 피차 덕을 행할것과 사랑과 순종, 겸손으로 각자 직위에 대한 질서를 지켜 계승해야 한다.
지금까지 클레멘트의 서신을 살펴본바에 의하며 어떠한 교리적인 체계 보다는 고린도 교회의 실천적 삶의 가르침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인의 직분에 있어 질서를 강조하고 직분의 계승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2.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St. Ignatius of Antioch)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후에 A.D 70년부터 107년까지 37년동안 안디옥의 감독으로 있었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2세기초 로마로 압송되어 원형극장에서 순교를 당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는 로마인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일곱통의 편지를 기록하였는데 그중 다섯통은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 마그네시아, 빌라델피아, 서머나교회에 그리고 다른 두통은 로마교회와 서머나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에게 보냈다. 이그나티우스가 쓴 편지들은 서머나 감독 폴리갑에 의하여 모두 수집이 되었는데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에 대한 인성의 실제와 그의 수난의 실제성을 부인하는 가현설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고통들이 실제임을 확신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태어나 먹고 마시며 자라셨고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강조하며 그는 마리아의 아들로서 곧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성에 대하여는 설명하지 않았다.
②. 이그나티우스는 교회의 직분의 삼중적 방식을 최초로 제시한 저술가로서 감독과 장로와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필요 조건으로 감독이 있어야하고 만약 감독이 없다면 교회도 없고 세례도 없고 성찬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성례전을 신비적으로 이해하고 성만찬이 불명에 이르기 위한 의식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죽음이 가까워 오자 괴로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의 고난의 후속적 경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죽음앞에 이런말을 남겼다. “나는 모든사람들이 내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죽은다는 것을 알리기 바란다 나는 하나님의 알곡으로 맹수의 입빨에 찢김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떡으로 발견되기를 소원한다. 맹수들을 부추겨 그것들이 나의 무덤이되고 나의 몸을 한조각 남김없이 삼킴으로 내가 잠들 때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세상이 나의 육신까지도 보지 못할 때 그때에 참으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것이다.라고 했다.
③. 이그나티우스의 신앙적 모범
이그나티우스는 37년간 감독으로 사역을 하면서 예수께서 팔에 안으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자니라” 고 하셨던 바로 전설적인 어린아이(마18:2)가 바로 이그나티우스였을것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그의 신앙의 모범을 높이고 있다.
한 번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안디옥을 방문하였을때에 이그나티우스를 보고자 하였다. 이그나티우스를 만난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음과같이 말했다. 여기 사악한 마귀, 사람들을 속이는자가 있구나, 이때 이그나티우스는 “나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트라이야누스 “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죽인 그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제인가? 이그나티우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일로 인하여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특별한 법도 제정하지 않고 그를 로마로 압송하여 4500여명이 모이는 원형경기장에 구경을 하러온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맹수들에게 먹이가되어 순교를 당하였다. 그는 죽음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오! 주여 나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이와같이 영화롭게 하신 것을 허락해 주셨나이다”
⑤ 감독제를 주창한 이그나티우스
클레멘트가 사도적계승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그나티우스는 군주 감독제를 주창한 사람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임밖한 순교를 앞에 놓고 서신서들에 나타난 이단분파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감독제를 강력히 주장하였다.-이그나티우스는 장로와 감독을 구분하여 모든 사람들은 감독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한다.
“여러분 존경스러운 장로단이 현이 수금에 맞추듯 감독에게 맞추고 여러분은 교회가 에수 그리스도에게 밀착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밀착된 것 처럼 감독에게 밀착되어야만 조화로운 일치를 이룰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감독은 성만찬, 세례, 아가페를 집전하며 이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기도 한다. 이렇듯 감독에게 순종하고 감독과 일치될 때 성도들의 모든 행위는 확실하고 합당하고 한다. 에딘(Jedin) 이 편집한 교회사에서는 이러한 군주 감독제가 주후 120년경에 안디옥과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으며 150년경이후에는 전 기독교지역에서 우세한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3. 서머나 감독 폴리갑(St. polycarp of Smyma)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제자이자 이그나티우스의 친구이다. 그는 A.D 79-165년경에 사역을 하였는데 생존시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소아시아 교회의 대변자로서 사역을 했다. 그리고 폴리갑은 요한계시록 1장과 2장에 나오는 일곱교회중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고 후에 그는 초대교회의 교부 이레니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폴리갑은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치세중에는 장작더미의 불속에 던저져 모진 고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활활타는 장작 더미의 불속에서도 타지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에 병졸들의 칼에 찔려 순교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업적은 매우 크다. 그가 남긴 큰 업적이라고 한다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사도이후 기독교회의 교부였던 이레니우스와의 사이에 ”사도들의 신앙”을 전승하는 교량역활을 하였던것이다.
①. 오직 예수의 종말론적 신앙
폴리갑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자는 모두가 적그리스도이며, 그리고 십자가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마귀에 속한다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에 주체는 하나님이 지옥의 고통에서 해방하여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강조하여 그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죽은자와 산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는 신앙이다.
②. 행함이 있는 삶
폴리갑은 신앙의 삶에 실천을 강조한다. 그는 종말론적 신앙을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로 오실것이기 때문에 이땅에서 살면서 불의, 탐욕, 돈에대한 사랑, 거짓 증언을 피하고 저주를 저주로 갚지말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③. 순교적 신앙
신앙에는 순교적 신앙을 유지하라고 강조한다. 165년경 서머나에서 목회하던 폴리갑은 교회에 혹심한 박해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모든 것을 단념한후 침착하고 당당하게 처신하였다. 그는 오히려 대적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당시의 최대 시험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신인(神人)처럼 받드시 주로 부르도록 강요받는것이었다. 만약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사형을 의미한다. 폴리갑은 로마로 압송되면서 집정관앞에서 가이사를 주로 숭배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집정관은 폴리갑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맹수들의 우리에 던져 버리겠다는것이었다. 이때 폴리갑은 “나를 맹수의 우리에 던지시요”라고 단호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집정관은 다시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그리하면 살려주겠다. 이에 폴리갑 “내가 86년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으나 그분은 한 번도 나에게 어떠한 잘못도 행하지 않았다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여 준 나의 왕을 욕할수 있겠소 당신은 한시간동안 타는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그불은 이내 꺼질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장차 올 심판의 불과 영원한 징벌의불은 모르고 있소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시요라고 단호히 말했다고 한다. 그는 그일로 인하여 순교를 당했지만 그후 그는 카톨릭신앙 전승의 기둥이 되었다. 오직 예수의 신앙으로 그는 생을 마쳤다.
4. 디다케 (The Didache)
디다케의 본래이름은 열두사도의 가르침이다. 이 문서는 1875년 이슽찬불에서 발견되기 까지는 잊혀진체로 있었다.디다케는 16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의 연대와 저작에 대하여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디다케는 3부분으로 되어있는데 그 첫째 부분은(1:1-6:2) 은 두길문서라고 부른다. 이 문서에 따르면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하나는 사망의 길이다. 둘째 부분은 (6:3-10:7절) 일련의 예배적인 가르침이다. 즉 세례와 금식, 그리고 기도와 성찬문제등을 다르고 있다. 셋째 부분은 (11;- 15장) 은 일종의 훈련지침서이다. 거짓선지자들의 문제와 성찬에 대한문제와 감독과 집사 선출의 문제와 세상의 마지막과 여기에 대한 준비등이 다루어진다. 이 책을 기독교 사상사의 측면에서 보면 무었보다도 신학적인 흐름에 따르면서 도덕주의를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5)
그 이유는 교회 직제에 관해 초기 역사에 광해 분명한 한계가 명시되어 있지 않음으로 그동안 전수 되어온 사상들을 억망으로 만든었기 때문이다. 그 때 까지만 해고 교회의 직제가 감독제도가 교회 통치의 보편적 형태였으나 그는 감독과 장로의 직제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비고정적 직분으로부터 감독들과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의 고정적 직분까지 변천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와 성찬에 관해서도 실시에 대한 교훈까지 담겨져 있다. 즉 이런 방법으로 세례를 베프시오 이것을들 암송하면서 흐르는 물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시오 만일 흐르는 물이 없다면 다른물을 사용하시오 그리고 만약 이것 저것도 없다면 깨끗한물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머리에 뿌리시오 따라서 세례받기전에 세례받는 이나 세례를 주는이나 금식을하도록하고 할수만 있다면 다름이들도 금식에 동참할수 있도록 한다. 또한 금식을 할 때에도 외식하는자들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하며 후반부에는 목회에 관련된 내용도 포함이 되어 있으며 마지막장에는 세상의 종말과 재림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5. 파피아스(Papias A.D60-130년)
파피아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이다.6)
6. 헤르마스(Hermas)
헤르마스는 1세기말에서 2세기 초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로마에서 로다라는 부녀에게 팔렸던 크리스천 노예였다. 로다는 그를 해방시켜 주었고 헤르마스는 결혼하고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어었으나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온 가족이 회개하고 그는 로마에서 선지자로 있는동안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편집하였는데 그것이 곧 목자서(The Shepherd of Hermas)이다. 이책은 환상과 비유에 관한책으로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 그리고 10개의 비유등의 3부로 되어있다. 5개의 환상은 회심을 촉구하는 권면과 박해시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권면 했다. 그리고 12개의 계명은 기독교인의 의무를 요약한 것으로 이것들을 순종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확신한다. 또한 12개의 명령서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디다케 (The Didache)
디다케의 본래이름은 열두사도의 가르침이다. 이 문서는 1875년 이슽찬불에서 발견되기 까지는 잊혀진체로 있었다.디다케는 16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의 연대와 저작에 대하여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디다케는 3부분으로 되어있는데 그 첫째 부분은(1:1-6:2) 은 두길문서라고 부른다. 이 문서에 따르면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하나는 사망의 길이다. 둘째 부분은 (6:3-10:7절) 일련의 예배적인 가르침이다. 즉 세례와 금식, 그리고 기도와 성찬문제등을 다르고 있다. 셋째 부분은 (11;- 15장) 은 일종의 훈련지침서이다. 거짓선지자들의 문제와 성찬에 대한문제와 감독과 집사 선출의 문제와 세상의 마지막과 여기에 대한 준비등이 다루어진다. 이 책을 기독교 사상사의 측면에서 보면 무었보다도 신학적인 흐름에 따르면서 도덕주의를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결론
속사도 교부들의 신학은 분명하게 특정한 신학의 학파까지 전진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정도의 신학적 학파 또는 경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많은 다양성을 였볼수있는데 이러한 다양성 뒤에는 통일성도 있다.
이처럼 초대교회 로마에서는 또다른 유형의 기독교가 싹트고 있었다. 기독교가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방형으로 발전하여 도덕주의나 율법주의로까지 진전하게 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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