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이상직(호서대 교수)
현대신학은 조직신학, 교회신학, 성서신학, 실천신학등 여러 분야에서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다. 이 글은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현대신학을 접근하였다.
그런데 현대라는 특수성은 이들 분야가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을 어렵게 한다. 현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시기적으로 이르며, 교회사학의 한 분야인 교리사는 결국 조직신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신학이 이론 뿐만 아니라 실천을 강조하는 추세에 있음으로 실천신학적인 관심을 고려하여야 하며, 성서의 현대적 의미를 강조하는 성서학자들이 점중하는 추세를 감안할 때 이들 분야들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Ⅰ. 현대신학의 공부 방법
현대신학을 연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 몇가지 이유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신학은 과거에 비하여 학풍이 매우 다양하다. 트레이시(David Tracy)는 5개의 모델로 현대신학을 구분하고 있으나, 좀 더 세분하면 수십개의 학파와 학풍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학풍을 다 공부한다는 것은 실제로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둘째, 다양한 현대신학을 지나치게 객관적으로만 연구하든가 반면에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타학파의 한가지 관점만을 비판하기 쉽다. 즉 신학하는 사람의 주제가 참여와 결단이 없이 여러 학풍을 비교하고 장·단점만을 따지는 주체성이 결여된 학문을 하기가 쉬우며, 반면에 자신의 입장과 다른 신학을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과정에서 어느 한가지 관점만을 부각시켜 그것이 전체 인양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따라서 자신의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학풍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학문적 성실성을 갖기는 쉽지 않다.
셋째, 현대신학은 철학뿐만아니라, 사회학, 역사학, 경제학, 언어학, 자연과학등 타 학문의 방법과 해석을 차용하고 있어서 신학의 고유한 방법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고, 엄청난 양의 타학문을 공부해야 하는 부담감을 주고 있다. 실제로 신학자들 가운데 경제학자나 종교 사회학자로 분류해야 되는 경우도있으며, 신학의 고유한 방법론을 부인하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또한 중세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연구하는 부담으로 충분하였으나, 현대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인문, 사회, 그리고 자연과학의 기초적 지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넷째,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던 성서의 규범성이 현대신학에서는 많이 흐려져 있어서 신학생들에게 혼동을 주고 있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 그리고 현재의 인간경험 가운데서 성서의 규범성을 이 셋 가운데 하나로 보는 현대신학자들도 있으며, 나아가 인간의 현재적 경험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신학자들이 비록 성서의 규범성을 받아들이고 있을 지라도, 성서해석상의 차이 때문에 성서의 문자적 영감을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의 비신화화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상의 난점들을 종합해 볼 때 현대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주장과 일치하는 신학적 입장을 발견하고, 그 입장으로부터 출발하여 비판적으로, 그러나 학문적 성실성을 가지고 다른 학풍을 평가해야 한다.
또한 인문, 사회, 자연과학등의 기초적인 학설과 학문적 방법론을 자신의 관심 분야와 연관시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자기와 반대되는 입장을 이해할 때 즉 부정판단을 통해서 자기의 입장도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자기 것 한가지 이론만을 공부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참된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의 고유한 방법론인 계시에 근거한 방법을 포기하고서까지 타학문의 해석과 방법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것은 신학의 자살 행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에 성서의 규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즉 인간언어가 불완전할지라도 그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증언되었고, 그 증언이 오늘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말씀된다는 성서관은 기독교신학의 전제로서 포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Ⅱ. 현대신학의 범위와 학맥
현대를 어느 기점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다. 트레이시는 현대신학의 5가지 모델들 가운데 하나인 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예로서 1869년에 열렸던 제1차 바티칸회의를 기점으로 삼는다. 또한 틸리히(Paul Tillich)는 16,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를 출발점으로 잡고 19, 20세기의 신학을 설명한다." 반면에 바르트 이후의 신학적 전개에 초점을 맞추어 현대신학을 논의하는 경향도 있으며, 1960, 70년대를 중심으로 미국의 현대신학을 논의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현대신학에서 정통주의의 영향력은 쇠퇴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신학의 범위에 16, 17세기의 정통주의와 연관시켜 20세기에 전개된 다양한 정통주의를 포함시켜야 한다. 정통주의의 특성을 틸리히는 두가지로 들고있다. 하나는 내용적인 원리로서 은총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한 칭의이며, 다른 하나는 형식 원리로서 성서의 권위에 근거한 신학적 원리이다." 정통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성, 역사의 심판자로서의 거룩청, 창조주로서의 주권을 강조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기도와 찬양, 헌신의 뜨거움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공헌을 하였다. 개인의 영적 구원을 위한 전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된 죄의 사회성에 대한 침묵이 묵시적 동의로 오해되는 측면과, 급변하는 현실과 역사에 대하여 무관한 신앙관을 가르친다는 비판을 현대의 정통주의는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 불리는 브로밀레이(G.W. Bromiley), 버쿠어(G.C. Be.kouwer),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칼 헨리(CarlHenry), 그리고 카넬(F.J, Camell) 등은 현대세계가 던지는 질문들을 외면하는 대신 복음의 메시지를 그 질문들과 연결시키되 복음의 영원성을 포기하지 않는 신학적 노력을 계속해왔다.
한편 이들과 다른 복음주의 자들은 국제적선교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책임을강조하였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에서 발표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과 1989년 같은 목적으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차 로잔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 발표된 '마닐라 선언문', 그리고 1977년 시카고 근처에서 복음주의의 소명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던 45명의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에 발표된 '시카고 성명'은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경건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를 종합한 슬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이후의 자유주의는 변증적인 과제와 비판적인 과제를 현대신학에 도입하였다. 변증적인 과제는 변화하는 인간 사회와 문화가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답변하는 과제를 뜻하며, 비판적 과제는 성서, 교리,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전통적인 권위를 무조건 수용하는 대신 역사 비판적인 방법과 이성의 합리성에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변증적인 과제와 비판적인 과제는 19세기 자유주의가 쇠퇴한 이후에도 현대신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대정신을 이루고 있다.
슬라이에르마허는 종교적 직관 즉 절대의존감정이 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근거라고 보았다. 절대의존감정 안에서 신은 유한 속에 현존한다. 그 뒤를 이어 리출(A. Ritchl)과 하르낙(A. von Hatrack)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기독교와 문화, 하나님과 인간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적 구원을 역사와 사회 안에서 윤리적 진보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연속성, 윤리적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 그리고 역사비판적 성서연구 등이 19세기 자유주의의 특성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19세기의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성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통하여 기독교 사신(使信)의 본래적 의미를 탐구하여 인간의 역사와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는신학 작업인 신정통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바르트(Karl Barth), 브룬너(Emil Burnner), 불트만(Rudolf Bultmann), 고가르텐(F. Gogarten), 틸리히, 니이버 형제 (Reinhold Niebuhr & H.R. Niebuhr) 등이 그들 사이의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신정통주의 학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Karl Barth)는 자유주의의 교육을 받았으며 자유주의 추종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펜 빌의 목회현장의 경험과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전쟁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여 인간 이성과 도덕심에 의존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느꼈다. 그는 바울의 로마서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자만심의 위기와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이 위기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 삶의 근원이된다는 것을 선언했다. 바르트의 성서연구에 힘입어 성서의 본래적 사신을 탐구하는 운동이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이르러 더욱 촉진되었다. 그런 그 방향은 바르트와 달랐으며, 불트만의 경우 성서의 표현양식과 전승양식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탈신화화라는 방법을 통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인 형식을 벗겨내고 성서 본래의 사신인 케리그마를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 발견의 준거로 보았다. 성서의 케리그마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언어와 세계관으로 번역되거나 재 해석될수 있다고 불트만은 믿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가속화된 산업화와 개발 경쟁에 힘입어 세속적인 가치관이 확산되고, 경제적인 수준의 간격이 나라에 따라 계층에 따라 심화되어 갔다. 그 결과 급진적인 신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실례로서 세속신학과 해방신학의 확산을 들 수 있다.세속신학은 성과 속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이세상에서 종교인으로서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본훼퍼(D. Bonhoeffer)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종교성과 경건성을 핑계삼아 이 세상에서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치 않고 있다고 본좨퍼는 말한다.
본훼퍼의 '종교성 없는 기독교' 또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표어는 많은 오해를 받았다. 본훼퍼가 종교성 또는 하나님이라는 핑계거리를 만들어 하나님의 진정한 부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경계했다면, 반 뷰렌(P. M. van Buren) 등 신 죽음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간다고 믿고 있는 현대인들의 세속성을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초월적인 절대자로서 하나님 없는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기독교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되었다.
해방신학은 남미의 가난한 민중들의 억압당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가톨릭 교회의 목회적 관심으로부터 태동했다. 대표적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G. Gutierrez)는 정치적, 역사적, 영적인 삼중 해방을 강조한다. 정치적 해방이란 부유한 국가들과 억압하는 계급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압박민들 사회집단의 갈망과 노력을 의미한다. 역사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의 과제인 "새로운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사회의 실현"을 인간생활의 모든차원으로 확신시켜가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해방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불의와 억압의 토대를 근절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해방을 가능하게 해주는 참된실천(ortho-praxis)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해방신학자들은 주장한다.
현대신학의 마지막 학맥으로서 인간경험의 긍정적인 요소를 신정통주의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동시에 급진 신학운동들보다는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의 긍정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하는 수정주의 신학운동을 들 수 있다. 수정주의란 넓은 의미에서 성서와 전통에 나타난 최선의 가치관이 현대의 세속적 가치관보다 현대의 인간 경험의 해석을 위해서 더욱 유용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해 있다. 수정주의 신학운동의 관심은 광범위하며, 다원주의적 세계관의 입장에 서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며, 기술적 이성의 제한을 넘어서는 탈현대주의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근원적인 초월 가능성과 종교적 상상력과 상징적의 긍정적 요소를 적극 수용한다. 과정신학, 탈현대주의신학, 종교다원주의신학, 종교언어의 상징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신해석학적 신학 등이 여기에 속한다.
과정신학은 불변의 실체로서의 세계를 부인하고 모든 만물이 상호교섭의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역동적으로 성장해가는 세계를 강조한다. 신도 홀로 존재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만물들의 자아실현 과정에 동참하는 신이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초대된 신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신은 모든 만물의 자아실현 과정에서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아를 실현해가도록 설득하는 신이다. 인간의 자유와 그로 말미암은 악의 결과는 인간이 져야한다. 그러나 신은 이러한 인간의 악의 고통을 수용하여 새로운 희망과 대안으로 바꾸어 제시한다. 역할 분담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에서의 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믿는 기독교적 신앙이 약화되고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관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외에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인정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 된다고 정통주의는 믿고 있다. 자신의 신앙의 궁극성을 포기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해야만 참 다운 대화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자신의 신앙의 궁극성을 고백하면서 타종교의 신앙고백과의 창조적 대화가 가능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이 보다 정직한 신학적 태도가 아닐까. 타종교에 대한 궁극적 관심의 표현 없이 참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견해에 비추어 보면 타종교와의 대화의 문제는 쉽게 결론 지을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현대사회에서 타종교와 공존하는 종교적 관용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 경우 궁극적 관심을 공유하지 못하는 파편화된 사회의 문제가 있으며, 강제적으로 파편화된 사회를 통합시키려는 종교전쟁의 경우를 세계 곳곳에서 보게된다. 전도는 미련한 것이지만 폭력적인 통합에 대한 설득적 대안이며, 결과적으로 회심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참된 대화가 가능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Ⅲ. 현대신학의 최근 동향
인간악, 세속성, 상호의존성, 희망과 해방의 실천 등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하는 신학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치료하는 신학이어야 한다는 자각은 비단 현대 신학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복음서를 비롯한 성서 전체의 일관된 내용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인간되심과 구체적인 참여를 증언하고 있으며, 바로 이점에서 현대신학은 과거의 신학의 변증적 과제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의 비판적 과제는 신학의 고유한 학문성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역사 비판학, 합리주의, 과학주의, 세속주의 등의 비판적 방법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성을 보여 왔다. 즉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자율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현대신학은 직면하고 있다.
교부시대 이후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은 희랍의 철학적인 방법론을 차용하여 신론, 인간론, 그리스도론 등 신학적인 주제들을 해석하여 왔다. 따라서 타학문의 방법론을 차용하여 신학의 주제들을 설명하는 작업은 현대에 나타난 독특한 현상만은 아니다. 어거스틴과 안셀름을 거쳐 아퀴나스에 이르는 중세의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루터, 칼빈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신앙이 반이성적이거나 반윤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타학문의 방법론과 주제의 차용이 문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교현상이나 신앙의 본질을 경제학, 정치학, 언어학, 사회학과 같은 다른 학문의 척도를 가지고 파악하려는 것은 결국 종교현상과 신앙만이갖는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한 요소-성이라는요소-를 놓쳐버리게 될 것이라고 알리아데(M. Eliade)는 경고하고 있다. 종교학자로서 종교현상의 환원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엘리아데의 통찰력은 신학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고로서 전환될 수 있다.
성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의 선포를통해서 전달되는 신의 계시를 규범으로 하여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운명에 대한 궁극적 의미를 해석하는 신학의 학문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일이야 말로 이러찬 환원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요청된다. 그러나 계시의 형태가 현대인에게 주로 성서라는 언어적 형태로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성서라는 신학의 규범올 해석하는 해석학적인 과제가 현대신학의 최근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즉 종교 언어의 의미성의 문제와 그 언어의 해석의 과제는 신학의 학문적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어적 형태로서의 계시를 신학적 논의의 중심적 과제로 삼는 이유는 언어는 단지 표현으로서의 수단에 머물지 않고 경험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가기 때문이다. 가다머(Han-Georg Gadamer)는 해석학적 이해의 목표는 고전과 독자의 떨어져 있던 두세계를 융합시켜 주는 것이며, 결국 독자로 하여금 고전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리죄르(Paul Ricoeur)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언어 가운데 은유(metaphor)는 유사한 두개의 세계를 결합시켜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전혀 다른 두개의 세계를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결합시켜준다. 유대인 남자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은유에 의해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통합된 것을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이에서 보듯이 은유는 어의적 충격(semantic shock)를 불러 일으킨다. 리꾀르는 상징과 시적-신화적 이야기 형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의 종교적인 체험을 가정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적 형태는 은유와 더불어 상징적 표현, 시적-신화적 언어 형태라고 보았다. 이에 대한 좀더 깊은 논술은 구조주의와 탈현대주의자들의 논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레비스토로스의 구조주의적 인류학에서 종교적 언어의 환원 불가능성과 구조적 자율성을 깊게 파헤치고 있다.
현대신학이 이성과 역사적 비판학을 통해서 신학의 고유한 방법론적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신학의 위기까지 초래했던 상황은 종교적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학적 진보로 말미암아 급변하게 되었다. 현대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역설이 아닐수 없다. 타학문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확보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에 이러한 고유한 학문성을 타학문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율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도서 -
김명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Hordern, William. 「현대신학의 동향」, 김성환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겄.
Kliever, Lonnie D. 「현대신학사상 Ⅲ」. 맹용길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8.
Tillich, Paul.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 송기득역.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7.
- 주 (註) -
1 . David Trary, Blessed Rage for Order : The New Pluralism in Theology (New York : the Seabury Press, 1978), pp. 22∼42. 트레이시의 5가지 모델은 본 논문 2장에서 5가지 학맥으로 인용되었다.
2. Paul Tillich,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 송기득 역(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7), pp. 18∼25.
3. 프리츠 부리, 「현대미국신학」, 변선환 역 (서울 : 전망사, 1988).
4. Paul Tillich, op. cit., pp. 22, 23.
5. Willian Hordes, 「현대신학의 동향」, 김성환역(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1), pp.84∼108.
6.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p. 21∼24.
7. Gustavo Gutierrez, A Thology of Liberation (London:SCM Press, 1973).
8. M. Eliade. Pattems in Comparative Religion (Clevelands New York:Meridan Books, 1958), p. Ⅷ.
9. David Tracy, The Analogical Inagination(New York:Crossroad, 1981), pp.99-153. 여기서 트레이시는 조직신학의 우선적인 과제를 해석학으로 보았다.
10. Hans-Georg Gadamer, Truth and Methoid (NewYork:Crossroad, 1989), pp.369-79.
11. Paul Riroeur, The Rule of Methedor: Multidisciplinary Studies of the Creation of Meaning in Language (Toronto : University of Toronto,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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