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순절 성령운동의 신학적 평가 김경재 교수(한신대 신학과 / http://soombat.org)
I. Introduction
이 논문은 한국의 오순절교회의 성령론과 그 선교운동을 세계교회 협의회의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의 열려진 성령론에 근거한 새로운 선교신학의 관점에서 평가하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오순절 교회운동중에서 1960-90년대 불과 30년동안 단위 개체교회로서 회중교인수 13만명에 이르는 놀라운 교회성장을 이룩한 한국하나님성회(The Korean Assemblies of God) 교단의 조용기목사가 이룩한 한국오순절교회운동의 본질을 그의 성령론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신학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중심 논제는 한국 오순절교회운동의 놀라운 역동성은 철저한 문자적 성서영감론에 기초하여 성령의 제 1차적 사역목적과 활동영역을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에 국한 시키고 있다는 것. 그에 대조하여 바아르선언문에서 뚜렷이 나타난 WCC 에큐메니칼 선령론적 선교신학은 성서의 비평학적 연구를 용납하며 성령사역의 궁극적 목적은 세계의 구원 또는 역사의 창조적 변혁에 있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성령의 주활동영역은 교회안이 아니라 지구현실세계 현장에 있다고 보는데, 전자와 후자의 관점차이를 어떻게 한국 선교현장에서 화해하고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크게 두가지 캠프로 대별되면서 시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상호 긴장 갈등 견제 협동하면서 발전해왔다. 한 캠프는 신학적으로 '복음주의'(Evangelism) 임을 표방하면서 보수적이고, WCC에 가입하지 않으며, 개인영혼구원 중심적이며, 전도와 교회성장을 강조하는 광범위한 보수교단이 그것이다. 조용기목사가 이끈 '순복음 중앙교회'는 바로 이 한국보수교단의 대표적 교회중의 하나였다. 한국교회의 또다른 한 캠프는 소위 진보적 개신교단으로서 주로 KNCC에 가입한 교단으로서 이뤄지고 있다, 이 후자의 캠프는 WCC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로선을 지지하며, 복음의 사회적 증언활동에 힘쓰면서 인권운동, 환경생태운동, 통일운동, 노동자농민의 권익운동에 공헌하면서 소위말하는 'Missio Dei'선교시학 로선을 지지하는 교회들로서 구성되어 왔었다.
그런데, 1996년 7월 한국 개신교 보수교회운동의 대표적인 교단이며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가지고 놀라운 양적 교회성장을 이룩해왔던 앞서 언급한 한국오순절교회 대표격인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KNCC 정회원교단으로서 가입하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WCC나 KNCC나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적이 신학적 교리적 일치를 주장하지 않고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연합운동이기 때문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KNCC에 가입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그동안 한국 개신교의 진보적 캠프와 보수적 캠프사이의 긴장갈등의 역사를 감안할 때, '기하성'의 KNCC 가입은 한국사회와 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한국교회사적 사건은 단순히 KNCC 가입교단이 하나 더 증가했다는 교회정치적 사건의미로서 그치지 않는다. 그 역사적 의미는 아직 충분히 한국 개신교회들에게 의식화 되어있지 못하지만, 20세기 후반기를 지배하던 보수와 진보교단 사이의 신학적 갈등이나, 독선적 선교신학이 반성과 자기성찰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론과 선교신학의 차원에서 항상 목회자들과 신도들을 괴롭혀왔던 이분법적 논리 곧 개인구원 vs 사회구원, 전도 vs 선교, 인간의 내면적 해방 vs. 사회구조적 해방, 하늘나라 vs. 하나님의 나라, 등등 이분법적 논리의 굴레에서 해방된 보다 성숙한 선교신학의 정립을 요청하고 있다는 증좌인 것이다.
그런데, 선교신학의 새로운 정립은 신학적 중심교의 중에서도 특히 성령론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기하성'의 KNCC 가입이라는 축하할만한 한국교회사의 역사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일치'운동이 아직 전개되지 못한 이유중 하나가, 한국 오순절 교회가 지닌 성령의 신학적 이해와 기존 KNCC에 가입한 진보적 교단이 지닌 성령신학 사이에 아직도 대화해야하고 극복해야할 중요한 견해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담론화하여 한국교회의 보다 성숙한 에큐메니칼 운동과 선교신학 정립에 공헌하고자 하는 내적동기를 지닌다.
우리의 논제를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라 논구해 보려고 한다. 제2장에서 왜 1960-90년대에 특히 한국사회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이 폭발적인 성장과 더불어 놀라운 영적 운동과 교회성장운동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한국 종교문화의 총체적 입체상을 파악하는일과 역사적-문화적 상황분석에 주력한다. 제3장에서 우리는 '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 즉 속칭 '순복음교회'라고 더 널리 알려진 한국오순절 교회의 '5중복음론'을 그 교단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조용기목사의 성령론을 분석하면서 신학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제4장에서 WCC 선교신학 중 '하나님의 선교신학' 이 한국에 미친 영향과 1990년대에 에큐멘칼 신학의 선교신학적 결실물로 나타난 '바아르 선언문'의 성령이해와 그 선교신학이 지닌 의미, 특히 제3세계 선교현장에서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평가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진보적 개신교 교단의 선교신학은 근본적으로 '바아르선언문'에 나타난 성령이해와 선교신학 정신과 함께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신학자로서 김재준목사의 신학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소개 할 것이다. 제5장 에필로그에서 양 입장의 신학적 대화 가능성과 동아시아 선교전선에서의 신학적 과제 및 그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2] 1960-90년대 한국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한국 종교문화사적, 정치사회사적 분석
신앙적으로 말하면 1960-90년대 한국 오순절 교회의 폭발적 성장과 한국 성령운동을 통해 이뤄진 교회의 역동적 성장은 성령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며, 성령의 사역에 응답한 1960-90년대 한국교역자들과 신도들의 신앙적 헌신과 노력의 결과이다. 필자는 이점을 전제로하고 이 장에서 한국 오순절 성령운동과 교회의 영적 부흥운동의 종교문화사적, 사회정치사적 바탕과 총체적 시대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해 볼 것이다.
첫째, 한민족은 동아시아 삼국 중국, 한국, 일본중에서 2000년 오랜 세월동안 단일민족, 단일언어, 단일문화전통을 경험한 민족으로서, 지,정,의 세가지 특성중 감성적 측면이 발달한 민족이다. 종교적 특성은 철학적 심원성이나 도덕적 진지성을 결여하지는 않으나, 예술적 감수성이 사유의 심원성이나 실천의 진지성에 비하여 특히 발달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성문화의 발달은 종교문화에 있어서도 이론적 조직체계화나 계율적 윤리사상보다는 역동적 종교체험을 선호하는 성향이 한민족의 집단무의식 속에 존재한다.
예를 들면, 한민족의 고대종교인 샤머니즘은 논외로 하더라도, 인도나 중국불교의 8가지 금욕적 계율을 지키는 팔관법회가 한국에 들어와서는 한민족의 제천의식과 결합하여 일종의 종교적 축제제의로 형태변화를 이루게 된다. 중국의 신유학인 주희의 성리학이 한국에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신유학의 우주론 및 형이상학인 리기설(Li-Ch'i theory)의 논쟁과정을 추적해 보면, 리(Li)와 기(Ch'i) 상호 불가분리적 관계성을 전제하면서도 율곡성리학이나 실학사상에서 보는바 처럼 기(Ch'i) 우위적인 존재철학이 발달하게 된다.
그런데 기(Ch'i)라는 존재론적 실재는 서양의 프뉴마처럼 매우 역동적이고 인간의 감성적 체험을 긍정하는 존재론적 실재이다. 19세기말 서구문명의 동아시아 식민지배 침투시기에 민족적 저항운동 과정에서 출현한 , 한민족의 자생적 민족종교 동학(천도교)의 '시천주' 체험도 정태적 이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이며, 그 종교체험의 기본 게슈탈트는 이성적 이해가 아닌 몸 전체를 통한 체험인 것이다. 기독교가 한민족의 민중 속에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한민족의 종교적 영성이 지닌 감성적 특징은 오순절 성령의 체험신앙을 받아드리는데 기본적 토양이 된다.
둘째, 한국 개신교의 선교역사 속에서 19세기 말에 구미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된 개신교 교파신학은 그 주류가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되었는데, 19세기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했던 선교신학의 원천은 18-19세기 미국개신교의 대각성 운동이후 줄기차게 지속되어온 영적 부흥운동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웨슬레신학 영향을 받은 감리교 선교사들은 물론이요, 장로교목사들 마져도 머리는 청교도적이고 칼빈주의적 근본주의적 신학으로 훈련되었을지라도 그들의 가슴은 무디( Dwight L.Moody), 토레이(R.A.Torrey), 채프만(J.W. Chapman)등 19세기 부흥운동가들의 성서실재주의, 성령세례, 신유경험, 성결운동, 전도운동등에 의해 강렬하게 영향을 받았던 선교사들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교회사가 민경배교수도 지적하기를 한국에서 개신교가 성공한 이유중 하나가 19세기 후반 한국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대체로 경건주의자들(Pietists), 심령부흥주의자들(Revivalists), 그리고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의 신앙과 신학이었으며, 그러한 복음주의적, 부흥회적 기질이 한민족의 심성에 맞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1907년 한국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성격이나 그 발단 과정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 초기선교사 신학과 신앙의 성격을 잘 반증하는 것이며, 1907년 한국교회 평양 '대부흥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1980년 서울 여의도광장에 초교파연합 부흥집회로 모인 '세계복음화대성회'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대형집회는 '대규모 전도부흥운동'(Mass Evangelistic Reval Movement)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교회사적 사실들은 한국 개신교가 오순절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또 성공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여러 가지 요인을 고루갖춘 신앙적 옥토라는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 1960-90년대 한국의 오순절 성령운동이 폭발적인 성장과 성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사회사적 배경을 빼놓을 수 없다. 1945-1960년 기간 한국사회는 세계냉전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남북한 간의 민족 상쟁이라는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과 문화적 공백기로서 민중은 의지할 곳없이 헤매는 양무리가 되어 있었다. 1960년대 초에 정치적으로 군사혁명을 거친후, 절대빈곤극복과, 반공국시를 내걸고 군사정부 주도하의 근대화 공업화 산업화의 격동기로 한국사회가 소용돌이쳤다. 농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낯선 도시공장에로 전입해왔고, 수백년살던 마을공동체를 떠나 시장경쟁상황이라는 거치른 광야에로 내몰려가게 되었다. 민중은 심리적 불안, 물질적 빈곤, 사회정치적 소외, 육체적 질병, 종교적 모호성에 시달리던 한국근대사의 격동기였다. 1960-90년대 약 30년간은 서구사회가 300년동안 시간을 걸려 겪어야 했던 근대화, 공업화, 도시화, 산업화과정의 변화충격을 일시에 몰아쳐 겪어야 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사람은 내면적인 자기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시달려야했으며, 처음겪는 냉정한 초기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쟁상황 속에서 위로처를 찾게 되었다. 그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단순한 정신적 위로만이 아니라 건강과 신유의 복음, 총체적 축복신앙, 자신감을 심어주는 적극적 사고, 따뜻하고 끈끈한 유대감을 제공하는 오순절교회 계통의 신앙공동체 출현은 대부분 '고향상실의 소외' 속에서 시달리던 한국민에게 곧바로 복음이요 사마리아 여관이었다. 1960-90년대 한국 순오순절교회운동 특히 순복음교회의 급성장 할 수 있었던 종교문화사적, 교회사적, 정치사회사적 배경으로서 위와같은 세가지 핵심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한국 순복음교회의 '오중복음론'에 나타난 성령신학과 그 신학적 평가
3.1. 조용기목사가 담임하는 순복음중앙교회 발전약사
'순복음교회'라는 교회명칭에서 '순복음'의 의미는 영어로 표기할 땐 'Full Gospel'이다. 'Full Gospel' 으로서의 복음의 통전성을 강조하려는 신학적 내면동기를 외면적으로 표출하여 교회 이름자체로서 채택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 이름 자체가 본의든 본의 아니든 한국의 기존교회들이 복음진리의 부분성, 비충만성,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는 기존한국교회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순복음'을 영어로 표현할 적엔 'Pure Gospel'이 아니고 'Full Gospel'이라고 강변하지만, 한국단어의 형용사적 의미론에서 pure, whole, full, perfect는 서로 내적으로 의미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어로서의 '순복음교회'라는 의미는 일반 대중에겐 'Full Gospel' 의미로서보다는 'Pure Gospel'의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힘이 가진 본래적 속성 때문에, 조용기목사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순복음교회'라는 교회이름자체는 기존교회의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뉴앙스를 한국민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교회의 교단이름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미국 미조리주 스프링필드에 본부를 둔 'Assemblies of God' 교단에 속한 교회이다.
조용기목사가 카리스마적 능력으로 이끌어온 '순복음 중앙교회'는 짧은 역사이지만 3단계의 발전과정 곧 개척기(1958- 1961), 발전기(1961-1973), 성장기(1973-2000)로 구별된다. 순복음 중앙교회는 1958년 5월 당시엔 목사안수를 아직 받지않은 조용기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가 서울변두리 외곽지대 대조동에 천막을 짓고 교인수 5명으로 시작되었다. 조용기목사는 회상하기를 "천막교회의 시작은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가난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두 젊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신뢰와 하나님 뜻에 대한 절대순종의 믿음을 가지고 초인적인 열정목회를 한 결실은 개척 6년만인 1964년에 신도수 1,000명을 넘어서서 서울 중심부 서대문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고, 개척 12년만인 1970년엔 18,000명의 교회로 급성장을 하게 되어 10,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여의도 교회당을 짓고 헌당하였으며, 1980년도엔 이미 단일교회로서 세계최대규모인 신도숫자 13명을 초과 하는 세계적 오순절 교회가 되었다.
3.2. 한국 오순절 교회운동의 '오중복음'의 신학적 의미와 평가
한국교회사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오순절 교회사에서 놀라운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한 조용기 목사는 그의 목회경력 40년을 뒤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이 오중복음(The Five-Fold Gospel)을 힘있게 외치는 곳곳 마다 사람들이 중생하고, 심령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되며, 영육간의 치료와 자유함이 임하였습니다. 중생, 성령충만,축복,신유,재림 - 이 다섯가지 복음은 나의 멧시지의 핵이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의 진수라고 생각합니다. '오중복음'이 순복음 신앙의 이론적인 부분이라면 '삼중축복'(The Three-Fold Blessing)은 오중복음의 실천부분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Rev. David Cho의 증언대로 한국오순절교회 신앙운동의 신학적 이론과 목회적 실천목표는 오중복음론과 삼중축복론 속에 다 들어있다. 우선 그 내용을 핵심만 서술하면서 신학적 의미를 지적해나가기로 하겠다.
조용기목사는 오중복음론을 해설하기전에, 기존교회나 신학이 범한 복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 여러가지를 지적한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은 첫째로서 복음은 영혼만을 구원해준다고 해석하는 경우, 둘째로서 복음을 윤리와 도덕규범으로 해석하는 경우, 셋째로서 복음을 또하나의 도덕적 율법으로 해석하는 경우, 넷째 복음을 반율법주의로서 보는 경우, 다섯째로서 복음을 학문대상이나 사회개혁의 원리로 이해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로서 복음을 샤머니즘의 도구로 보는경우등이 모두 복음에 대한 왜곡된해석이나 이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왜곡과 변질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아니하는 성경을 대하는 잘못된 신학적 태도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중복음론이나 삼중축복론을 떠받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조용기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중의 기초는 '성경문자무오설'을 받아드리는 성경절대주의 신앙이다. 그는 말하기를 "순복음이란 성령의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Fully), '다'(totally) 믿고 받아드리는 '추만한 복음'(Full Gospel)을 의미 합니다"라고 강조한다. 한국의 오순절 신앙운동의 열정과 역동성이 분출하는 진원지도 문자적 성경무오설에 입각한 성경절대주의요, 그 신학과 신앙운동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의 근본원인도 바로 문자적 성경무오설이 지니는 배타적 독단론과 성경연구에 대한 일체의 비판적 연구를 이단시하는 성경문자주의에 있는 것이다.
물론 종용기목사의 성경무오설은 경직화된 문자주의는 아니며, 영감적 해석과 그의 놀라운 창조적 성령체험에 의해 종교개혁자 루터,칼빈의 가슴을 감동케했던 그런 역동적 성경관을 지니지만, 성경문자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성경이 말하려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그의 해석학적 입장은 자유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교회론에 갇우어놓는 '성령의 교회론 포로' 또는 주 하나님을 성경이라는 경전에 유폐시키는 본의 아닌 오류를 범하게되는 위험을 지닌다.
성경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의 복음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Totus Deus)을 계시해주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Totum Dei)을 독점적으로, 배타적으로 계시하는 실증적 문서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배타적 성경절대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개신교 교파주의 신학은 언제나 '오직성서만의 원리'가 성경을 절대자 하나님 처럼 절대시하는 '우상화'에로 전락하여 "하나님만이 하나님 이시게 하라"(Let God be God!)는 명제로서 표현되는 '프로테스탄트원리'(Protestant Principle)를 위반하는 과오를 범할 위험을 지닌다.
순복음교회의 오중복음 제일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속죄능력에 의한 '중생의 복음'( The Gospel of Salvation)이다. 구원의 본질을 십자가의 은총과 대속적 공로로 말미암는 인간의 거듭남 중생(Regeneration, Rebirth)라고 본다.
이 '중생의 복음'은 인간이 원죄론과 십자가의 속죄산앙을 전제로한다. 성경무오설을 받아드리는 성서영감론에 기초하기 때문에, Rev. David Cho의 신학적 인간학은 철저허게 성경의 증언대로 따른다. 그는 피조세계의 삼라만물과 인간의 출현자체가 "우연히 생긴 것이거나 진화되어 발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창세기 1-2장 창조설화를 '설화'로서가 아니라 사실적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육과 혼과 영으로 창조된 인간은(살5:23) 본래 타락전은 불사적인 영체로 지음받은 존재였으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가능한 존재였는데, 타락후 인간의 영적 생명은 죽고 죽음, 죄, 질병의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타락한 상태로부터 회복은 오로지 독생자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을 토하여 속량받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오중복음의 첫 번째 '중생의 복음'은 복음주의적 신앙공동체만의 특징적 교의가 아니고 모든 기독교신앙의 근본교의이기 때문에 오순절교회만의 신학적 특징이라고 말 할 것은 없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는 칭의(Justification)단계, 성화(Sanctification)단계, 영화(Glorification)단계라는 세단계 또는 차원이 있음도 말하기 때문에 매우 정통적인 구원론과 핵심을 공유한다. 다만 특징적 차이를 말한다면, 창세기 3장 타락설화를 문자적으로 역사사실적 의미로서 해석하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의 타락을 주도하는 유혹자 사탄의 실재성과 타락의 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하여 매우 인과론적 단순논리가 적용되어, 타락설화에 대한 상장적 비유적 성서해석은 용납되지 않고 초자연주의적 합리주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오중복음의 둘째번 주제는 '성령충만의 복음'(The Gospel of Fullness of the Holy Spirit)이다. 이 둘째번의 복음의 특징은 오순절 교회신학의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동시에 조용기목사가 이끄는 한국 순복음교회 복음이해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성령충만의 복음'은 오순절교회의 성령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교의학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교회의 성령론은 정통적인 니케야-콘스탄틴 공의회에서 정립된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성령은 성부,성자와 더불어 삼위이레 하나님을 이루시는 제3위의 신적 위격으로서 인격성을 지니시고 보혜사 (parakletos)로서 영원,전지,전능 무소부재등 모든 신적 속성을 지니시며 신적 영광과 존귀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정통적 고백을 한다.
'성령충만의 복음' 교리에서 특징은 '성령세례'(Baptism in the Holy Spirit)이론에 있으며, 중생체험에서 받는 성령역사와 성령세례 체험에서 받는 성령의 역사를 구별한다는 점에 있다. 중생이 성령과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고 새 생명을 받아드리는 체험이라면,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놀라운 봉사적 권능을 얻기위한 체험으로서, 성도들과 교회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중생의 체험과 더불어 성령세례의 체험을 해야한다고 순복음신학은 말한다. 직접 조용기목사의 말을 인용해본다:
"중생의 체험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으나 이는 별개의 체험입니다. 성령세례는 주님께서 중생한 성도에게 맡기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님께 사로잡혀 영적 능력을 힘입는 체험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로서는 방언, 복음전파능력, 각종은사를 들고 있다. 그리고 성령세레를 받은 신자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계속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성령충만' 이라고 부른다.
'성령충만의 복음'에서 특기할 점은 두가지인데, 그 하나는 중생체험과 '성령체험'을 별개의 체험이라고 분명하게 명시적으로 구별한다는 점과, '성령체험'을 한 사람의 궁극적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와,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는일과,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 일차적 목적이 있는 것이며, 세계와 역사를 창조적으로 변혁시켜가라는 '하나님의 선교'신학 모티브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의 오순절교회운동, 구체적으로 조용기목사가 이끄는 순복음교회 교세확장이 지난 1960-2000까지 폭발적으로 가능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놀라운 폭발적 교세확장에도 불구하고 순복음교회가 1960-90년대에 정치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증언운동,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비판적 운동, 인권 및 노동운동 측면에서 왜 소홀했거나 침묵함으로서 보수적 정치세력에 간접적으로 득을 보게하였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양교회사 속에서 요아킴의 성령운동이나, 토마스 뮌처의 성령운동에서 보는 것처럼 본래적인 성령운동은 사회변혁적 운동으로까지 필수적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한국의 오순절 교회는 '성령충만의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성경구절에 의존하여서만 이해함으로서 비정치화, 탈정치화 하게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보수적 정치세력을 돕는 보수교단이라는 아이러니를 낳게된 것이다.
오중복음의 셋째 이름은 '신유의 복음'(The Gospel of Divine Healing)이다. 신유란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앍고있는 인간의 몸에 초자연적적인 신적능력이 자용하여 질병으로부터 해방받아 건강을 회복하는 신앙적 사건을 말한다.
조용기목사의 순복음교회 신앙에 의하면 인간생명은 본래 영,혼,육의 통일체로 구성된 전인적 존재였으며, 타락 또한 전인적 차원에 영향을 미쳐 영은 하나님과 영적 교통능력을 상실하였고, 혼은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렸으며, 육체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탐욕과 죄악의 동인이 된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원사건과 성령강림은 인간의 총체적 구원을 가능하게 한 것인즉, 현대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믿는자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시고 신유체험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순복음신앙에 의하면 신유는 '의학적 치료'(Medical Cure)가 아니며, 최면술적 치료방법이나 정신요법과 엄격하게 구별되며, 강신술이나 신접한 자의 초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신유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하여(고전12:9) 성령이 직접행하시는 은총의 사건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순복음교회의 '신유복음'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멧시지가 되었으며, 실질적으로 암등 현대의학의 한계로 손을 더 이상 못대는 질병을 치유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여 한국오순절 교회의 성장은 가속력을 얻게되었고, 조용기목사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그의 신유은사를 지닌 능력자로서 인정하면서 1960-90년대 순복음교회 급성장의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조용기목사는 '신유의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의학적 치료가 죄가 되거나 비성경적이라고 보지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 질병관은 매우 독특하다. 현대 세균학과 해부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조용기목사는 인간의 질병을 일으키는 3대원인이 마귀,범죄,저주라고 보는 것이다. "병균을 비롯한 모든 질병의 조건들은 근원적으로 마귀로부터 파괴적인 세력을 공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질병의 근원은 마귀요 사탄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한 이해는 긍정적으로 보면 인간을 영,혼,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신비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합리주의적인 인과론으로서는 다 해명되지 않는 인간생명의 다차원적 존재신비성을 신화적 표현법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삼라만사를 성경을 텍스트로하여 해명하려는 문자주의적 성경관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중복음'의 네 번째 주제는 '축복의 복음' (The Gospel of Blessing)이다. 이 네 번째 '축복의 복음'은 '성령충만의 복음' 과함께 한국 오순절교회 곧 순복음교회 복음이해와 성령론의 특징이다. 미국 웨슬레신학 계통의 성결신학의 4대복음은 중생, 성결, 신유,재림인데 반하여 한국의 오순절 신학은 성결대신 '성령충만'이 들어가고 '축복'이라는 주제가 더하여진 것이다.
'축복의 복음'은 한국 순복음교회를 매우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교파로만든느데 큰 영향을 미친 교리이다. 이 교리에 이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하여 가져온 총체적 구원은 당순히 정신적 영적 차원만이 아니라 물질적, 자연적 차원을 다 포함하므로 물질적 축복을 누리며, 겅강을 포함한 샬롬을향유하는 것이 바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금욕주의적 기독교, 물질과 풍요를 죄책감으로 받아드리는 전통적 영성신학에 강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복음 복음'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면 요한삼서 2절 말씀에 기초한 '삼중축복'론( The Three-Fold Blessing)으로 나타난다. 삼중축복론은 '오중목음'이로의 실제적 적용이라고 볼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보면 '축복의 복음' 의 구체화이다. 삼중축복이란 "네 영혼이 잘됨같이"(영혼의 축복,The Spiritual Blessing), "범사에 잘되며"(생활의 축복, The Daily Blessing),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육체의 축복, The Blessing of Health)을 말한다. 삼중축복론은 단순히 요한삼서 2절 성경한구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전체의 증언에 기초한다고 보는데, 타락으로 인하여 영과 육체가 죽음에로 운명지워지며 자연이 저주속에 떨어진 것같이(창2:16-17, 창3:19, 창3:17-18) 구원에 의하여 영과육과자연이 모두 구원에 동참한다고 보는 것이다.(사53:5,사53:4,고전15:42-45,사53:5,고후8:9,갈3;13)
한국순복음교회의 오중복음론 중 '축복의복음' 이론은 1960-90년대 한국 사회가 물질적 빈곤을 탈출하여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에로의 전환기에 한국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물질적 부의 획득활동에 적극적 동기부여를 가능케 했으며, 역으로 물질적 부의 축복을 받으려는 인간의 강력한 동기가 신앙적 동기와 상승작용을 하여 순복음교회의 급성장에 또다른 요인으로 작동하였다. 그러나 순복음교회의 '축복의복음'은 막스베버가 말하는바 초기자본주이형성시기에 작동한 퓨리탄니즘의 경건신학이나 직업에대한 강렬한 소명의식과는 좀 다른 색깔을 나타낸 것이었다. 더욱이 사회적 정의를 바로세워야한다는 크리스챤의 예언자적 공동체 책임윤리가 약화된체로 '축복의 복음'론을 강조한 결과 종요기목사의 본래의도와는 다르게, 급변하는 도시화계획 과정 속에서 '토지지가상승' 에 따른 불노소득적인 부의 획득마져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비윤리적 자기합리화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오중복음'의 마지막 다섯째는 '재림의 복음'(The Gospel of Second Coming)이다. '재림의 복음'이란 신약성경과 특히 요한 계시록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말세예언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믿는 것이다. 그 중요내용은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교회의 휴거와 7년환난,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천년왕국과 최후심판, 그리고 신천신지의 실현이 중요 핵심 내용이다.거듭말하거니와, 순복음교회의 신학 특히 조용기목사의 성령론과 구원론은 철저한 문자주의적 성경영감설과 성경무오설에 기초하여 있기 때문에, 현대 성경비평 연구결과로서 말하는 바 곧 계시록을 당시 묵시문학적 종말신앙을 반영한 상징적 종교경전이라는 이론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재림의 복음'내용중 특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두 번 이뤄지며, 종말의 때에 성도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황홀한 상태 속에서 공중에 들리움 받는다는 휴거(Rapture)를 개인신도의 휴거가 아니라 교회의 휴거로서 파악한다는 점등이다. '교회의 휴거'와 함께 교회를 지키고 교회와 함께 하던 성령도 지상에서 떠나게되어 지상은 완전히 멸망할 죄악의 도성으로 버리움 받고 심판 받는다는 '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악과 죄, 사탄과 죽음, 불신자와 성령을 거스리는 자들에 대한 영원한 심판사상은 '보편적 만인구원론'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의 구원론이 세계와 역사의 구원( Salvation of the World and History)이 아니라, 세계와 역사로부터의 구원(Salvation from the World and History) 이라는 이원론적 도식을 견지한다. 곧 교회/세계, 빛의 아들/ 어둠의 아들, 천사군단/ 사탄군단, 선택 받은자/ 버림받은자 등의 이분법적 도식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잘 나타낸다.
이상에서 '오중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그 핵심점에서 고찰하였다. '오중복음'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결국 한국 오순절교회의 성령신학과 그 운동에 대한 신학적 평가의 문제가 된다.
첫째, 한국 오순절 교회의 성령운동은 1960-90년대 약 30여년간 한국사회의 급변하는 공업화,도시화,산업화 과정 속에서 소외되고 인간의 자기정체성 상실에 고통당하던 사람들에게 구원과 위로와 소망의 멧시지를 줄 수 있었다. 특히 영육을 함께 아우르는 총체적 구원신학을 제창하게 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둘째, 성경을 성령의 감동감화에 의해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편집되고 전승된 경전으로 이해하는 성경축자무오설은 현대성경비평학적 연구를 비신앙적 태도라고 규정하게된다. 본시 서구신학 전통에서는 장로교 칼빈주의자들 특히 근본주의신학에 근거를 둔 보수주의는 역동적 성령론을 강조하는 오순절운동과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점을 나타내보이지만, 한국 현대교회사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성령운동, 부흥운동, 오순절 운동을 함께 묶어주고 진보적 개신교신학에 맞서 공동전선을 펼수있었던 공통분모는 다름아닌 '성경축자무오설'에 입각한 문자적 성경절대권위를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인 것이다.
셋째, 한국 오순절교회 성령의 신학은 철저하게 사도행전적 신학인데, 강렬한 복음전도열, 교회개척운동과 양적부흥 운동, 대형부흥집회운동, 뜨거운 기도운동, 신유와 방언등 은사운동을 일으켜서 한국 개신교에게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초에 전체한국 개신교교인수 100만명에 머무르던 교인숫자를 30년만에 1000만명에 이르도록 폭발적 증가에 오순적 순복음 교회신앙과 성령운동은 공헌하였다.
넷째, 성령충만의 복음을 강조하는 한국 오순절교회 성령신학의 결정적 문제점은 성령의 사역을 교회안에 갇우어 놓음으로서 창조의영, 생명의영, 우주적 그리스도의 영, 생태학적 치유의 영으로서의 포괄적이고 우주적 성령의 활동을 교회론 중심으로 제약하였다. 성령의 일차적 사역이 교회를 세우고 관리하는 일이라고 보는 성령론은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나, 여성신학이나 생태학적 신학에 대한 관심도 미미하였다.
다섯째, 순복음교회의 문자적 성경주의는 제3세계 특히 아시아의 전통종교와 전통문화의 가치를 식별해내지못하게 하여 동아시아의 세계적 보편종교들을 모세시대 가나안에 번성했던 야훼신앙이 정복해야만 할 이방종교와 동일시하는 해석학적 맹목성을 야기시켰으며, 복음의 토착화신학운동을 종교혼합주의 라고 매도하게되었다. 종교간의 대화나 협동을 용납할 수 있는 신학적 포용성이 전혀없기 때문에, 불교 유교 천도교등 전통종교들은 우상종교로 폄하되고 배타적 정복대상이 됨으로서 한국 개신교는 한국 문화 및 사회 속에서 이방인이 되고, 심각한 문화적 갈등,분쟁의 당사자가 되게하였다.
[5] Epilogue
한국 오순절교회의 성령이해와 성령운동은 초대교회의 케류그마에 충실하면서 매우 역동적 능력을 발휘하여 1960-90년대 한국교회를 급성장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96년 한국 보수교회를 대표하며 교회부흥운동을 주도해왔던 대한기독교하나님의 성회가 KNCC 회원교단으로 가입함으로써 한국 개신교는 새로운 21세기의 선교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오순절교회의 오중복음론에서 우리가 살펴본대로, 순복음교회신학의 성령론은 전도중심, 교회중심, 기독교 교세확장중심에 강조점이놓여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WCC의 Baar Statement가 선포하는 바처럼, 성령의 사역범위와 활동방식이 전피조물의 세계, 기독교전래 이전의 토착종교들, 그리고 생태계의 생명지속과 보존에까지 이른다고 고백하지는 않는 것이다. 더나아가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구약성경을 꿰뚫고 흐르는 '예언자정신', '화육신앙', 그리고 피조세계전체를 하나님의 무한 사랑으로 속량하여 구원한다는 '궁극적 은총 승리신학' 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러한 중심교의가 삶의 전영역에 까지 침투하여 관철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그 결과 Richard Niebuhr가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라고 타이틀을 붙인 명저에서 제시하는 '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라는 창조적 변혁이론이 오순절 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조용기목사가 성령세례 및 중생체험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과정과 책임적 실천윤리를 성령의 열매로서 크게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조용기목사가 중심이 된 한국 오순절교회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는 '문자 주의적 성서무오설' 즉 고전주의적 성경영감설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피선교지역에서 교회를 부흥케하였던 '오직 성서만'의 원리가 오늘날 토착문화와 전통종교간의 충돌을 낳고,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창조세게 전체 현실 안에서 구원사역을 펼치시는 성령의 사역활동을 보지못하도록 교인들의 눈을 가리우고 있는 셈이다.
조용기목사가 속한 순복음신학의 성경관은 바울시대와 우리시대가 몸담고있는 '상황' 변화와 그 차이를 무시하고 있으며, 다른한편 WCC 에 속한 진보적 교단은 인간의 상황변화를 넘어서 있는 영원히 새로운 복음적 케류그마 본질을 약화시키거나 상대화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문제는 어떠한 성경관을 갖느냐의 문제 곧 올바른 '성서해석학'에 관건이 달렸다. 이문제가 바르게 신학적으로 해결되면 한국 보수교단과 진보교단은 각각의 '성령의신학' 이 지닌 교파적 특성과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서로 보완하면서 21세기에 선교현장에서 힘있게 연대성을 지속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부딪히고있는 21세기 선교신학정립에 있어서 상호 상충하는 '성경관'의 차이를 화해시키고 바르게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20세기 하나님의 큰 종이었던 칼 바르트가 그의 로마서 초판 서문에서 들려준 말을 참고하는 것이 최선의 대답일 것이라고 믿는다.
Paul, as a child of his age, addressed his contemporaries. It is, however, far more important that, as Prophet and Apostle of the Kingdom of God, he veritably speaks to all men of every age. The differences between then and now, there and here, no doubt require careful investigation and consideraion. But the purpose of such investigation can only be to demonstrate that hese differences are , in fact, purely trivial. The historical-critical method of Biblical investigation has its rightful place: it is concerned with the preparation of the intelligence - and this can never be superflous. But, were I driven to choose between it and the venerable doctrine of Inspiration, I should without hesitation adopt the latter, which has a broader, deeper, more important justification. ............................................
Fortunately, I am not compelled to choose between the two. Nevertheless, my whole energe of interpreting has been expended in an endeavour to see through and beyond history into the spirit of the Bible, which is the Eternal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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