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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핵심

하나님아들 2020. 3. 31. 16:38

예배의 핵심
 

 


예배의 핵심


예배의 핵심은 항복입니다. 항복이란 말은 우리에게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죠. 일종의 패배를 의미하기 떄문입니다. 요즘의 경쟁시대에서 우린 절대로 포기하지말것이며, 항복이란 생각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꼐 굴복하는것은 예배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신의 사랑과 자비에대한 자연스러운 답례인 것입니다.우린 우리자신을 신께 바칩니다. 어떤 두려움이나 의무감이아닌, 사랑으로 말입니다.사도 바을은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삶을 신께 경배로서 바치라고 촉구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


 


명심하십시오,. 우리자신을 신께 재물로 바치는것이 예배의 모든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우리의 모든 바침을 방해하는 세 가지가 있읍니다.


두려움, 자존심, 그리고 주저함입니다.


 


나는 신을 믿을수 있는가?


우리가 그분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그분꼐 바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게 될떄까지 우리는 그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바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던져 버립니다. 우리가 신의 사랑을 꺠달을 수록, 신꼐 우릴 바치는것은 쉬운일이 됩니다. 그의 사랑에 대한 가장 위대한 표현은 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시킨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서 5:8)


 


신은 우리를 노예로 부리거나 우리를 위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꺾으려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기꺼이 우리자신을 바치기를 종용하십니다. 신은 사랑이시고, 해방자이시며, 그분께 순종함은 속박이 아닌, 자유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완전히 자신을 바치게 될떄, 우린 그분은 폭군이 아닌, 구원자이며, 상사가 아닌, 형제이시며, 독재자가 아닌 친구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


우리의 자존심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린 우리가 그저 피조물이며 모든것을 주관하지 못한다는것을 받아들이기 싫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오래된 유혹이 바로 "너는 신처럼 되리라" 란 것입니다. 모든것을 우리의 통제하에 두고싶은것은 우리삶에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다 줍니다. 삶은 투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야곱처럼, 그것은 실제로 신과의 투쟁인 것이란 사실입니다. 우린 신이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이 투쟁에서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린 신이 아니며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신처럼 되려고 하는것은 사탄이 그러는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우린 자신의 한계에 부디쳤을 때에 짜증이나고, 화와 분노가 치솟게 됩니다. 우린 더 영리하고, 강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유능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알게 되면 우린 시기하고 질투하고, 스스로를 경멸하게 됩니다.


 


항복의 의미는


신께 항복하는것은 수동적인 단념이나, 게으름에대한 변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상유지에 대한 인정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 반대의 의미입니다. 변화가 요구되는것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희생하고,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신꼐선 종종 자신을 바친 사람들에게 자신과의 싸움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항복은 겁쟁이들을 위한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사람들을 통제하고, 우리의 계획대로만 일을 추진하고, 상황을 우리를 위해서만 통제하는 대신, 신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신을 의지하는 것이 신께 항복하는 것이란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신꼐서 그 모든일을 하시도록 의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것을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항복은 믿음입니다. 요샙은 신의 목적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왜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한체 말입니다.  성서에 "모든것을 신께 항복하고 그분을 참고 기다려라." (시편 37:7)


항복은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보면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성향에 대한 어려운 전쟁과도 같은 것입니다.


 


항복에 대한 축복


우선 여러분은 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하느님과 화해하고 가까워지게나. 그리하면 정녕 복이 돌아오리니,"(욥기 22.21)


둘째로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세쨰로 우리는 삶에서 하느님의 힘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꼐의 항복은 여러분을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신께 복종하는 사람은 신이 직접 쓰십니다. 마리아는 그녀가 어떤 세상적인것에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신께 모든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주의 천사가 신의 일어날 법하지 않은 계획을 말하자, 마리아는 조용히 대답하였습니다. "난 주의 종이오니, 신이 원하시는 바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루가 1:38).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


세상사람들은 아마도 그 무엇엔가 항복하게 됩니다. 신이 아니더라도, 여론이나, 돈이라던가 두려움이나 자존심.. 등등 말입니다. 우린 신께 찬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으린 아마도 우언가에 항복할 자유는 있을지 모르나, 거기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스텐리 존스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께 복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혼돈에 대한 복종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꺠닫게 됩니다. 신의 자비와 축복을 방해하는 것들은 다름이 아닌, 우리의 이기심, 지나친 자존심과 너무나 큰 욕심이런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으리 자신의 계획에 열중한다면 우리는 신의 우리 삶을 만드신 목적을 이룰수가 없습니다.


만약 신의 깊은 사업이 우리안에 이루어지게 하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하십시오.


모든것을 신께 드리십시오. 과거의 후회, 현재의 문제들, 미래의 열망, 두려움, 꿈, 약점, 버릇, 아픔 등등 말입니다. 예수님을 차의 운전석에 앉게 하시고 모든것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두려워 마십시오. 그분 아래서 제어되지 않는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될 것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필립비서 4:1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루가 9:23)


 


20세기에 위대한 기독교계의 지도자인 빌 브라이트에게 물었습니다. "왜 신께선 당신삶을 이렇게 많이 이용하시고 또 축복하셨나요?" 그러자 그는 "제가 어렸을떄에, 저는 신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난 그것을 적었고 바닥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계약서엔 '오늘부터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신과 계약서를 작성해본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의 권한에 대하여 논쟁을 하고 있는지요? 이제 우리는 신께 복종할 떄입니다. 그의 사랑과 위대함과 그의 지혜에 대해 말입니다. 


 




느헤미야 8장 8절 ? 12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동기며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기쁨 즉 여러 가지의 기쁨이 아니라 오직 그 기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그 기쁨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날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을 즐겁게 하는 프로그램과 감동을 주는 기획 등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 안에 소위 깔끔하고 잘 정돈된 예배처럼 보여 지는 데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를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예배인가 하는 것은 소홀이 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드려지는 그런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물을 드려도 그 드림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림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대가에 집중하여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물 드리는 자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오로지 기쁨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아주 험난하고 세상으로부터 모욕과 수탈과 핍박을 받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뻐하기는 커녕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처지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기쁨이 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곧 우리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공적인 예배 즉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섬김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말은 곧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끈 여호수아도 죽음이 가까웠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것인가 선택하라고 요구하면서 여호수아와 그의 가정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만을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또한 바알과 아세라를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에 바알과 아세라를 예배하는 것이 문제 될 것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여호수아가 보기에 그들의 행위는 결단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한 동시에 돈과 세상권력을 섬기는 경우를 봅니다. 돈과 세상권력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극적인 우리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 올 때에 왕복이 아닌 제사장들이 입었던 에봇을 입고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다윗은 겉옷도 입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하여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옷이 벗겨질 때도 하나님앞에서 기뻐했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모습을 보던 미갈은 다윗이 왕으로서 품위조차 지키지 못한다고 하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비난보다도 더 비참해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예는 하박국서에도 나옵니다. 하박국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할 심판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제 하박국의 민족들은 바벨론에 의해 포로가 되고 불타고 죽임을 당하는 그런 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감사할 구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박국선지자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철저하게 망하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서도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로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선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수문앞 광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 날에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는 성경책을 낭독하고 낭독한 것을 해석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에스라자신이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 깨닫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말씀듣는 자세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말씀전하는 자들은 말씀듣는 자들이 큰 벽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말씀듣는 자들은 딴생각하거나 낙서를 합니다. 자신에게 필요없다고 여겨지는 말씀엔 외면하거나 잠을 잡니다. 말씀앞에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포로생활을 하고 다시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이방민족들로부터 수탈과 멸시를 당하며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핍박하고 재산을 빼앗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그 상황을 보게 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날 이렇게 무능하고 나약한 자들이 되었는가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처한 오늘의 상황이 결코 하나님이 무능하시거나 외면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거역한 결과임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날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따라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과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고통과 수치를 당하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는 자들을 보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단지 마음에 감정 때문에 울기는 하지만 말씀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우는 경우는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개의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난 결과로 인해 근심하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사람들은 백성들에게 그 날은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진 것을 나누어 주어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인해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는 울며 슬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그 기쁨을 위한 것이 곧 너희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돈이 힘이 아니고 권세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기쁨이 곧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성통곡을 하던 자들을 정숙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그 기쁨을 위한 것이 곧 우리의 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은 바로 성일이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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