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세기 별 변화의 모습
시대배경과 환경과 사건 | 구약의 포로기에 성전 예배가 금지되었고 로마의 속국에서 회당예배를 드렸다. 제사 형태의 예배를 벗어나 말씀 중심의 예배로 전환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이 시대의 설교 | 구약의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해석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하여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회개와 믿음으로 받아드릴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승천과 심판 주로 오실 것을 선포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이 스스로 그 복음의 실제가 되었다. 복음의 설교사역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였다. 설교의 영향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어간다. 온 인류가 은혜의 믿음 안에서 죄로 죽은 영혼들이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 빛은 계속 주어졌다. 이 시대의 다른 설교자| 베드로, 바울, 요한 등의 사도들과 동역자들
설교역사의 Turning Point |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약속과 그것이 이루어진 것과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제1기 (주후 70 – 430) 고대 교부시대 교부들에서부터 크리소스톰(Chryosotom, 407 사망) 과 어거스틴 (430년 사망) 사역이 끝난 때까지
시대배경과 사건| 단일하고 강력한 로마의 정부로부터 받는 그리스도인의 박해시대였다.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서머나교회의 감독이며 목회자 폴리캅(69 ? – 155) 이그나티우스, 마터라 불리던 져스틴 (100- 165) 등이 있다. 이 당시 기독교인의 집회에서의 설교는 사제와 감독만이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참조: 알레고리란 무엇인가? 알레고리(Allegory)는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으로, 주로 문학에서 사용된다. 때로는 우의, 풍유로 불리기도 한다. 알레고리는 일반적으로 수사학의 형식으로 간주되지만 항상 언어를 통해 표현되지는 않는다. 눈짓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사실적인 회화나 조각, 의사적이거나 재현적인 예술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단어의 일반적인 용례보다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다른 수사학적인 개념들과 유사하지만, 알레고리는 그 상세함에서 은유보다 길게 지속되고 더 충만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유추가 이성이나 논리에 호소하는 데 반해 알레고리는 상상에 호소한다. 우화는 하나의 명확한 교훈을 가진 짧은 알레고리로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은유가 단어나 문장에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알레고리는 우화처럼 이야기 전체 등으로 훨씬 큰 범위를 지닌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설교|박해로 인한 열렬한 신앙의 깊이가 설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형식을 갖추지 않은 인격적 특성이 강조되었다. 사도의 전승과 성경과 설교자의 개인적 신앙 경험이 중심이었으며 예언의 성취와 알레고리 설교가 오리겐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성경의 해석과 적용이라는 고정된 형태를 이루었으며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 방법은 오류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시대 배경과 사건| 그리스도인들에게 혹독한 박해시대였다. 로마 분활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플라톤주의가 사회의 전반을 주도했다.
참조: 플라톤주의(Platonism) 다른 말로는 플라톤 철학(Platonic philosophy) 이라고 표현한다. 플라톤주의는 플라톤(428/427 - 348/347 BC)의 철학을 지칭하거나 또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특히 유래한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철학 체계들을 지칭하는 낱말이다. 좁은 의미로는 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실재론(Platonic realism)을 의미한다. 플라톤주의의 중심 컨셉트는 이데아론(Theory of Ideas)이다. 이데아론은 다른 말로는 원형 이론 (Theory of Forms) 또는 형상 이론(Theory of Forms)이라고도 한다.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론에 따르면, 매일의 일상 세상의 사물들의 본래의 모습은 초월적이며 완전한 원형 (archetypes)이며, 물질 세상의 사물들은 그 원형들(forms) 즉 이데아들(ideas)의 불완전한 복사체이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원형 또는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Form of the Good: 선한 존재라는 지고한 이데아)인데, 이 선의 이데아는 모든 다른 원형들 즉 이데아들이 나오는 근원이 된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은 이 선의 이데아를 이성에 의해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시대의 설교| 도덕적 영적인 문제와 인내와 참회에 대한 설교가 주어졌다. 세상적 삶의 방식과 관습과는 다른 도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교리에 대한 설교는 거의 없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하여 구원의 은총을 입기 위한 참회와 믿음이 강조되었다. 장차올 영광의 삶과 형벌의 삶을 주장하였고 교회의식이 점차 견고해지고 있었다.
시대 배경과 사건| 315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아리우스 이단의 발생하였으며 이단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325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아리안파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을 위한 종교회의) 교회의 세력이 커지고 예배가 존중 받았다. 설교에 대한 관심과 형태가 세련되게 발전하였다. 니케아 회의 이후 교리의 확립이 이루어졌다. 381년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정통교리를 위한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열렸다.
참고: 아리우스파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의 주장을 교의로 삼는 일파이다.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 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 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 아리우스파와 반 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이 시대의 설교| 초기성경을 읽고 교훈적 설교. 축제와 절기에 대한 설교. 성자와 순교자에 대한 기념일에 대한 설교. 예배는 정숙하지 않은 가운데 질서와 정교하고 화려한 발전. 수사학의 발전과 함께 대화체의 설교와 구별되는 논리 정연하고도 체계적인 설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전승이 퇴색 성경 주해 설교의 성장. 명상과 철학적 깊이와 인생이나 과거의 일 문학과 자연의 설교의 절명 자료가 됨. 말씀의 적용은 친밀하고 직접적이며 개인적이고 효과적.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동료 인간들의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려는 설교자의 열망이 있음. 진지한 호소와 권면과 책망 또는 위로와 함께 교리와 종교적 의무에 대한 교훈이 주어졌다. 교양 있는 계층의 사람이 회심 후 기독교에 귀화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참회를 통한 영혼의 회복이 있었다.
이 시대의 다른 설교자| 동방의 유세비우스 (Eusebius, 260 – 340)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295 – 372) 마카리우스 (Macarius) 시릴 (Cyril, 315 – 386) 서방의 힐라리(Hilary, 368 사망)밀란의 암브로스(340 – 397)
교양 있는 계층의 사람이 회심 후 기독교에 귀화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참회를 통한 영혼의 회복이 있었다.
참고| 교부들 중에 설교자로서 황금의 입이라 불리는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 의 설교의 주요한 네 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적이다. 그는 여러 권의 책들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설교 하였다. 그의 설교는 성경의 인용과 암시로 가득했다. 2.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단순하고 솔직하다. 그는 문자적 해석(Literal exegesis) 을 주장하는 안디옥 학파를 따랐다. 3. 그의 도덕적인 적용들은 현실적이다. 그의 설교들은 황제의 궁전과 화려함, 귀족 사회의 사치, 경기장에서의 야만적인 경기들 등 4세기 말엽의 생활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4그는 죄를 선고함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강당의 순교자였다. 그를 추방시키도록 만든 것은 그의 충실한 설교였기 때문이다. (존 스타트, 현대교회와 설교, 생명의 샘, 2008, p. 27.)
설교의 Turning Point |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됨. 핍박과 죽음을 피해서 카타콤의 그늘 밑에 있었던 설교가 지상의 빛을 바라보게 되었다. 문명사, 기독교회사, 설교사에 영향. 제2기 (430 – 1095) 중세초기 암흑시대 크리스도톰과 어거스틴부터 피터(Peter)와 교황 우르반 2세에 의한 최초의 십자군 설교까지
시대 배경과 사건 | 설교는 크리소스톰과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고대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이어 시대는 사악해졌고 설교의 암흑시기가 시작되었다. 부패가 시대의 표지였다. 인종적 정치적 분열은 교회의 분열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476). 교리 싸움으로 인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484)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을 상실해 버리고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의식이나 마리아와 같은 성인 숭배를 시작하였다. 라틴언어의 사용으로 예배가 구경거리가 되었다. 맹목적인 헌신과 신비에 대한 강조하였다. 칼케톤 공회의 (451) 그리스도의 신인교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시대의 설교| 예전과 예배 양식이 성장하여 교회의 예배에서 설교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교회의 가르침 고백성사가 발전하면서 복음의 핵심은 사라지고 있었다. 앞 시대의 설교를 모방하고 의지하였다.
시대 배경과 사건| 로마법이 시민 생활의 중심에 있었지만 무법과 약탈이 많이 있어서 야만적 행위와 법치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 시대의 설교| 알레고리 해석이 모두를 지배하였고 설교의 침체기의 암울함이 존재했다.
시대 배경과사건 | 야만적인 왕과 군주는 국가뿐 아니라 교회를 지배하며 혼돈을 가져왔다. 692년에 툴란 공의회(Tulan Council) 가 열기고 주교들이 매일 그리고 주일날에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을 상대로 해서 성경의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설교의 횟수 면에서 지속적인 하락이 이루어졌다. 이 시대의 설교| 7, 8세기는 설교의 혼돈 시기였다. 목회적 설교는 주일날, 성인 축일날, 축제나 여타의 기회에 성직자들이 사람을 모아 놓고 행하는 것이다. 수도원 설교는 수도원에서 주로 수사와 수녀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였다. 설교는 훈시적이며 신비적이었다. 이 당시의 설교는 구성 없이 권고하는 앞 시대의 설교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시대 배경과 사건 | 성상파괴 논쟁 때에 성화와 성물을 공경하는 문제를 두고 황제와 추종자들은 교회와 제국을 둘로 분열하였다. 787년 제 2차 니케아 회의가 있었으며 여기에서 성화 숭배를 인정하였다. 이 시대의 설교| 설교는 침체되었지만 지상에서 살아지지는 않았다. 불완전한 설교와 설교 횟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복음은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시대 배경과 사건 |교회사에서 로마와 그리이스 교회 간의 최후의 분열이 이 발생하였다. 교황과 샤를레망이 서방 제국을 설립해서 교황권에 특권을 부여했다. 로마의 분쟁이 9세기 중엽 상호 파문 선언으로 끝나게 된다. 이시대의 설교 |동방교회의 내용면에서 마리아와 성인을 찬미하는 것으로 동일한 것이 많았다. 자유로운 설교보다는 과거의 것에 매달렸고 대 바실과 크리소스톰의 설교를 독서로 선택했다. 설교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라틴어로 된 설교를 번역해서 지방어로 전하도록 한 뚜르(Tours) 주교회의 교회법 (813) 이 있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시대 다른 설교자| 게오르그 (880년 사망) 코티추스 (886년 사망)
시대 배경과 사건 | 10세기 초에 매춘의 통치라고 하는 포르노크러시(Pornocracy) 가 시작되었다. 타락하고 야심 찬 여성들의 어두운 영향이 두드러졌다. 폭동과 혼란이 교회에 있었고 세 명이 교황이라고 선언하는 사태가 이어진다. 어두운 시대가 더 깊어지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설교| 동방교회에서 설교는 내용 면에서는 동일성이 많다. 마리아와 성인들을 그 축제일에 찬미하는 것이었다. 교리는 없고 도덕적인 권고가 있다. 과거에 의존하는 설교는 계속되었다. 대 바실(Basil the Great)과 성 크리소트톰의 설교를 독서로 선택. (설교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에서 주어졌다는 것으로 얼마나 이 시대가 어두운가를 볼 수 있다.)
시대 배경과 사건 | 11세기 중반 스콜라 철학(Scholarsticism)의 발달과 11세기 말 1차 십자군 운동의 설교는 12세기 에 다가오는 부흥의 징표이며 원인이 된다. 카노사의 굴욕 (1077) 이 있었으며 이 시대의 선교 산업은 발전하였다. 로마 교회의 위계 구조의 발전과 함께 수도원주의는 지위와 권력이 있었다. 성직 매매, 탐욕, 성적 타락이 만연하였고 무지와 미신이 넘쳐났다. 그 당시 이후 귀족, 성직자, 평민은 사회의 세 계층으로 형성되었다. 그레고리7세의 죽음 (1085) 이전에 주창된 개혁은 성직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우르반 2세 (1099년 사망) 이교도의 손에서 성지를 회복할 거룩한 전쟁을 치르려고 하는 모두에게 사면을 약속했다. 이 시대의 설교|. 구세주의 대속 사역을 강조하는데 실패하였고 설교는 아주 소홀히 되거나 질이 나빴다. 이 당시의 설교의 특성과 내용은 옛 설교가로부터 빌어 온 것이며 전설과 교회의 미덕 같은 것으로 채워져서 단순한 복음을 흐려 놓았다.
참고| 6 - 11세기의 암흑시대에 대한 요약 9세기에서 11세기의 300년 간 암흑의 시기였다.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 설교모두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설교는 과거의 것을 대부분 조금 모방하거나 직접 베낀 것이다. 서방에는 지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조금 사용한다. 동 서 모두 대부분 성인들의 우화와 마리아를 우상화시키고 거룩한 아들과 거의 동격으로 보고 있으며 과장되고 거의 비 성경적으로 찬양한다. 고백성사와 그 밖의 것들을 강조하며 구세주의 대속 사역을 강조하는데 실패했다.
604년에 그리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죽음에서부터 1095년 십자군 전쟁의 시작까지 펼쳐지는 암흑기 동안의 설교는 끝이 없이 추락했다. 그럼에도 일부의 설교는 미약하고 부족하지만 그 시대로부터 보존되었다. 스콜라철학의 시작과 거룩한 땅을 불신으로 망쳐 놓은 사람들에 대항하여 전 유럽게서 일어난 신앙심의 물결 함흑기의 중요한 구속 사역이었던 선교 사업은 다행히 존재하며 시들지 않았다. 유럽의 생활 언어가 문학과 신앙의 표현 수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희미한 새벽의 광선이 었다.
샤를 마뉴 시대 이래로 중세 설교의 특이한 점중 하나는 성직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교 모음집(Homiliaries)을 준비하고 사용하였다. 그 설교들은 모델이나 가이드였으며 그 설교들에 몰두하여 외우기도 하였고 그것을 읽어주기도 하였다. 선호되던 모음집은 어거스틴과 아를르의 캐사리우스, 그레고리 대제 , 베데(Bede)의 것이었다.
제 3기 (1095 – 1361) 중세중기 스콜라철학시대 피터와 교황 우르반 2세에서부터 타울러 (Tauler, 1361년 사망)의 마감과 위클리프(Wiclif, 1361 서임) 사역의 시작까지
시대 배경과 사건 | 옥스포드 대학이 건립되었으며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다. 보름스 종교협약 (1122) 을 통해서 타협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교황은 영적 지도력의 상징인 반지와 지팡이를 통해 서임권을 행사하며 왕은 왕권의 징표인 홀을 통해 임명하도록 하게 하였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투쟁은 재연된 사건이다.) 이노센트 3세(Innocent 3) 재위가 있었고 성직자들의 영적 부흥과 함께 스콜라 철학이라는 지적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단들의 발흥에 대한 설교가 있었으며 스콜라주의는 종교를 대표했고 이단들은 대중을 대표했다. 이 시대의 설교|12세기의 설교자들의 교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들은 가톨릭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적이고 건전했다. 설교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성직자들이 설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가르치는 사제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군중들도 설교의 메시지를 설교를 전하는 사람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근대 유럽 언어로 쓰여진 12세기의 설교는 독일이 중심이 되었다. 영어로는 모리스가 편집한 ‘옛날의 영어 설교’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12세기의 자국 언어는 이미 독특한 성격과 상당한 정도의 견고함을 획득하고 있었다. 12세기부터 진본 설교를 갖기 시작한다. 12세기 설교의 형식과 내용은 설명적이고 훈계적인 옛 설교 형태 안에서 배열과 단락에 많은 관심을 주게 된다. 담화의 시대 (Narative age)였으며 논쟁, 설명, 교리와 비교하여 사건 기사를 자유롭게 담화하였다. 인간의 죄악성과 구원 받기 위한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으나 회개는 외적인 고행이 되어 버렸다. 동정녀 숭배, 연옥교리가 존재했다. 도덕적 가르침은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이며 강력하다. 기독교 신앙과 삶의 위대한 본질들은 그 설교들 속에 제시되어 있다. 신앙과 삶의 위대한 본질이 설교들 속에 계시되었다. 설교의 시간과 주제는 주일과 축제일에 주어진 절기 설교 (Sermnes de Temporibus) 성인 기념일날 성인의 날 설교 (Sermones DE Samtis) 설교는 미사 봉헌 후였다. 설교 장소는 교회당이나 수도원 예배당이었다. 설교의 Turning Point | 라틴어에서 벗어나서 자국 언어 사용으로 성경을 읽게 되었다. 자국의 언어의 사용은 16세기 에 있어서 각 국 언어의 승리를 성취하였다.
시대 배경과사건| 이태리와 독일은 혼란. 프랑스는 봉건제가 쇠퇴하고 절대 왕조로 가고 있었다. 영국은 의회 권력이 성장하며 입헌 군주제가 강화. 왕, 영주, 평민이라는 체제가 확립. 프랑스 군주제 강화, 십자군의 영향이 유럽의 사회 질서에서 나타나기 시작. 사치품과 교역을 자극하였고 상인들은 보다 부유해졌다. 쾌락문화의 발전. 왕과 귀족과 성직자의 교류활발. 지적인 삶이 강력히 상승. 대학들이 세워졌다. 프란시스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이 설교하는 교단으로 창설되었고 이단과의 싸움이 이어졌다. 이 당시의 특징은 스콜라 철학적, 대중적, 그리고 신비주의적이었다.
이 시대의 설교| 군중들은 설교를 들으려고 하였다. 베르솔드(Berthold)와 앤토니(Antony) 가 그 중심에 있었다. 설교의 효과로 개종과 열매들이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다. 십자군 원정의 군사적이고 모험적인 흥분은 좀 더 영적이고 도덕적인 움직임으로 자리를 양보했다. 효과적인 설교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성경적 기준에 떠나있는 오랜 전통의 피해는 여전했다. 알레고리 해석은 완전한 상상과 억지로 만들어 놓은 의미와 적용과 오해를 불러왔다. 선한 일의 중요성 성례와 고행과 이와 유사한 것들이 구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게 됨으로 복음의 진리와 건전한 기독교 더덕을 손상시키면서 까지 제시되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영광과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전설이 성경의 역사와 교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이 가르치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과 신비주의의 난해한 설명도 이해되는 것과 상관없이 전해 졌다.
설교의 특징과 영향| 13세기 전반의 설교는 선교적이고 대중적이었다. 많은 군중들의 열광과 광적이고 극단적인 요소들이 있었으나 그것으로 동일하게 하나님께 회심하고 삶을 고치는 것이 특징이자 열매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주로서 생생하게 전달되었으며 회개와 신앙의 의무가 진정한 기독교인의 경험의 열매와 증거로서의 기독교적인 덕목을 실천하라는 가르침과 함께 촉구되었다. 이 시대의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민중들의 무서운 죄가 용감하고 예리한 비난을 받았다. 형식에 있어서는 대중 설교가들의 설교는 분석과 세밀한 세문에 대한 스콜라 철학적 열정에 주로 영향을 받았다. 스콜라적인 설교에서는 지나친 공론, 세세한 구분, 분석의 지리한 세부묘사, 남발되는 궤변 그리고 쓸데 없는 결론이 항상 좋지 않은 결점이었다.
참고 | 스콜라 철학은 13세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추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설교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옹호자들과 적들이 함께 공존하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이란? ‘학자적인’(Scholastic)이란 단어와 학생 (Schoolman)이란 단어가 합해진 주로 학교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11세기의 안셀름(Aselm)과 12세기의 아벨라르드는 스콜라적인 설교를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안셀름은 엄격히 전통적인 것을 아벨라르드는 신학에 있어서 좀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대표한다. 스콜라 철학은 신학과 철학의 결합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을 성경 해석과 신학의 추론에 적용시킨 것이다. 설교에 대한 스콜라 철학의 공헌은 재료와 형식 양쪽에 관련된 것이다. 재료에 있어서 형이상학적인 미묘한 것들과 머리를 쪼갤 정도의 세밀한 구분들, 약화된 추론, 교리, 상상. 사유 등이 어느 정도 교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형식의 문제에서 스콜라 철학이 설교에 공헌한 것이 더 중요하고 지속적이다.
제 4기 (1361 – 1572) 과도기 종교개혁시대 요한 타울러와 위클리프로부터 종교개혁자들 쯔빙글리 (Zwingli 1531 사망) 루터(Luther 1546 사망) 칼빈 (Calvin 1564사망) 등과 마지막 사람인 존 녹스(John Knox 1572 사망)의 죽음까지 르네상스 시기 14 – 15세기 14세기 후반부에 위클리프와 더불어 시작되어 15세기 말엽에 사보나롤나(Savonarola)에 와서 발전되었으며 16세기 전반부에 루터와 그의 동료 계혁자들에서 설교의 절정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중세와 개혁기의 과도기에 있었다. 이 당시의 유럽은 전쟁과 야심과 억압과 잔인함 그리고 음모와 부패의 시대였다. 이 당시는 평화의 예술이 발전하였고 무역과 산업과 낭비와 사치가 공존했다. 상업은 지리상의 발견과 더불어 성장하였고 화약과 인쇄술의 발명은 전쟁과 문학의 발전을 주었다.
14, 15세기에 걸쳐 종교적인 문제는 16세기의 개혁의 시대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 당시의 교회의 부패는 일반적이며 극심했다. 조용한 신비주의자들은 은둔하여 하나님을 찾았으며 성직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악한 세대에서 신앙과 가치의 삶을 살았다. 개혁자들은 풍자와 탄식과 비난을 하였으며 죄를 공격하였다. 고아와 과부들을 방문하고 자신을 지키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성직자들은 무능했으며 허욕과 사치와 탐욕과 야심과 성직 매매와 착취가 진행되었다. 교황은 악덕의 모범이었고 교회의 도덕적인 타락은 세상의 비판을 받았다. 도덕적 타락과 종교의 타락은 엄청났다. 살인, 강도, 사기, 부정과 주술과 기적, 마녀 사냥과 마법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성인들 자체가 승배의 대상이 되었다. 경건한 사람들 조차도 엑스타시와 환상, 예언과 기적을 성스러운 매개로 받아 들였다. 이 시대는 참으로 개혁이 필요했다.
대중적 설교에서는 학문적 신비적 개혁적의 흔적들이 다양하게 발견된다. 설교는 복음적 설교를 통하여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과 선에 입각하여 청주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예화와 농담을 곁들여 전하는 것과 설교의 수단을 목적으로 삼아 청중의 충격과 웃음을 더욱 극적으로 유도하려는 타락한 유형의 설교가 있었다.
시대 배경과 사건 | 신비주의적인 설교의 발흥과 영향이 모든 곳에서 나타났다. 로마교회의 성경적인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교황의 아비뇽유수와 백년전쟁과 흑사병 대유행이 이 시대의 아픔이 되었다. 1348년 프라그 (Prague) 대학의 설립과 함께 대학의 역사가 시작하였다.
참고: 흑사병 유럽에서는 1340년대 처음 창궐한 이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공포의 대상이었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 약 2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다.[2] 이 때의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숫자이다. 최초의 흑사병 확산 이후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의 흑사병 발생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14세기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대흑사병"이라 불린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로 몰려서 집단폭력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사회학적으로 비평했을 때 흑사병 기간 동안 일어난 학살들은 마녀사냥처럼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전가한 희생양적인 폭력이었다. 한편, 흑사병의 창궐은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신조를 낳았고, 이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에 반영되었다. 흑사병은 유럽인들의 종교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흑사병으로 심판하니 고행을 함으로써 죄를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 시대의 설교| 교리의 부패, 성경의 해석은 지나친 은유적 해석, 타락한 도덕성, 전설과 설화는 지나치게 인용. 교리와 삶에서 부패하였고 오히려 이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설교가 가톨릭 교계에 널리 알려진 설교보다 오히려 교리적 순수성이라는 면에서 더 바람직했다. 시대의 다른 설교자|네덜란드의 게르하르트 흐루트 (Gerhard Groot, 1349 – 1384) 예수 형제단 창시자. 존 후스(John Huss, 1373 – 1415) 그는 교회의 부패와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교회의 평화를 깨트린 책임으로 황제에 의하여 화형을 당했다. 설교의 Turning Point| 성경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대중에게 퍼져나갔다.
참고 2| 신비주의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나라에서 철학과 생활뿐만 아니라 신학과 종교 그리고 설교에서도 나타났다. 신비주의를 정의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그 어떤 신적인 것과 세상과 격리된 영혼의 직관이나 느낌을 통해 내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가르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학자들의 구분에 있어서 신비주의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는데 신감, 종교적 (theopathetic) 신지, 철학적(theosophic) 기적, 기적적(theurgic) 으로 나눈다. 다시 이것을 정리하자면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으로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신비주의와 영혼이 신과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종교적인 신비주의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기적적이거나 비범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기사를 행하는 신비주의 등이 있다. 이들은 논리가 아닌 직관에 의하여 무아경 상태 속에서 진리를 본다. 종교적인 신비주의자는 명상에 의하여 신적인 감화력에 자신을 환전히 내어 맡김으로써 신을 알고 깨닫게 된다.
신비주의에는 늘 오류가 따라 다닌다. 신비주의는 가장 거룩한 경건성과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하지만 가장 커다란 죄악과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하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풍성한 종교적 활동과 관련이 있지만 가장 비정상적인 사색과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하다. 신비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의 권위 있는 계시로서 공경을 하고 받아 들이기도 하지만 내적인 빛에 의해서 성경이 수정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그리하여 심지어는 신적인 메시지로서의 성경을 완전히 부인하기도 한다. 신비주의적인 열망은 수도원에 이어졌으며 명상 생활과 성경연구, 기도와 수도원 생활이 영향을 끼친다. 설교단에서는 12세기에는 베르나르드(Bernard) 13세기에서는 프란시스와 도미니크에 의해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지난 시기에 베네딕트파와 어거스틴파, 프래몬스트런트파 등의 확장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비주의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스며있다. 무아경, 예언, 신경증적인 발작, 극도의 감정, 풍부한 눈물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도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신비주의가 발견되는 것은 이교적인 종단에서 나타난다. 신비주의의 한가지 공통점은 영혼과 하나님의 연합에 대한 교리였다. 기독교인의 영혼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교통이라는 이 한가지 위대한 생각은 모든 신비주의적 설교의 바탕에 깔려 있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인적 만남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에 관한 유일한 권위있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평가 절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대 배경과 사건 | 15세기 말 유럽의 힘의 중심은 스페인이었다. 순수 예술을 시작으로 르네상스의 문예 부흥이 꽃을 피웠다. 모든 인간 사고의 영역인 철학과 종교와 예술과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 대분열. 동로마제국 멸망(1453)으로 그리이스 학자들이 서방세계로 넘어 왔다. 공동생활의 형제단 (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 의 설립. 구텐베르그 라틴어 성경(1456)이 편찬되었다.
참고: 르네상스(Rinascimento, 프랑스어에서는 "재탄생"을 뜻함, re-는 "다시, 거듭"이며,nascere는 "태어나다"를 뜻한다.) 또는 문예 부흥, 학예 부흥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을 말한다. 과학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대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 문화사)와 로마 문명(→ 고대 로마사)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 안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국가, 즉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설교| 설교에 불경과 부조리와 심지어 음란까지 포함되었다. 이 후 초기의 개혁적 설교자들의 성경의 이용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였지만 성경의 승리의 원동력으로서의 강조하고 결론 짓는 태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잘못된 성경해석과 적용원리가 깊고 광범위 하게 번져 있었다. 시대의 다른 설교자| 독일의 존 가일러(John Geiler, 1445 – 1510)
제 5기 (1572 – 1738) 근대초기 단독시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시대로부터 윗필드 (Whitefiled)와 웨슬리(Wesley) 아래 일어난 영국 부흥기의시작까지 존 수타우피츠(John Staupitz, 1524 사망) 는 설교자로서보다 삶의 경건함에 있어서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책임자로서 후에 수도회의 주교 총대리가 되었다. 에르푸르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청년 마틴루터를 만났다. 교회의 면제부를 남용하는 루터의 초기 개혁 때까지 루터에게 동조하였다. 그는 명상에 몰두 하여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추구하던 신비주의자이다. 이 당시의 세계역사는 매우 급한 물결을 타고 있었다. 계급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종교와 문화의 발전, 반란과 전쟁, 중세기대의 산물인 기사도의 몰락은 근대 문명의 과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가공할 죄악들이 유럽에 여전히 가득했지만 도덕적인 개혁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화약의 사용은 전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저주 받은 인류의 무서운 상태는 더욱 더 참혹하고 파괴적이 되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다른 나라들에 대한 지식과 교류는 부와 창조의 힘을 계속 증가시켰다.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자각이 있었다.
이 시대에 과학과 예술과 문학은 매우 활발히 일어났다. 15세기에 있었던 새로운 발견은 물리학과 수학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 이론을 내 놓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미 다가오는 새로운 힘을 생각하고 예견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들의 삶과 작품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미켈란젤로부오나로띠는 1563년까지 살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다 빈치와 라파엘로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마자 죽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반 아익스 홀바인 이 독일에서는 알베르트 뒤러가 독일 예술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 문학에서도 문예부흥의 여세를 힘입어 힘찬 전진을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당대 최고의 인본주의자였다. 그는 당시 부조리를 공격하며 개혁 사상을 일깨웠다.
과학의 발달과 항해술의 진보로 인간의 사상의 폭이 확대 되었고 새로운 전쟁술이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인쇄술은 문학의 새 장을 열어서 고전을 부활시켰고 예술의 새로운 탄생은 문화의 질을 높였다. 인간의 정신력은 활기를 띠었고 시대적 사상은 모든 분야에 활기를 주었다. 봉건주의는 무너지고 시민계급이 세력을 얻게 되면서 평민들의 세력도 부각되었다. 대중 설교와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은 당시의 종교개혁이 대중들에 대한 인간애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서신과 출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고 개혁의 주된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시대 배경과 사건 | 가톨릭 교회의 부패로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일어남. 종교 개혁의 마지막 사람 존 녹스(John Knox 1572 사망) 의 죽음을 끝으로 개혁주의 주역이 떠난 후 순수한 설교는 정체되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었다. 개신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것에 기초하여 부패한 교회에 대항한 것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개인의 판단과 각자의 신앙을 선택할 자유를 주장. 신앙의 자유와 성경을 믿는 것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1516년 그리스어 성경(Greek Testment)의 완벽한 출판은 쯔빙글리와 에라스무스와 프로벤, 바겔 그리고 전세계가 놀란 사건이다. 이 시대의 설교| 삼위일체 중심의 신학과 신앙. 말씀과 성례전이 동반된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 사도들의 설교로 회귀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그 사랑의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이 중심 내용이었다. 설교를 통하여 도덕적인 부패가 크게 소멸되었다. 종교개혁과 설교의 관계에서는 상호의존, 보완, 지침이었다. 설교의 회복에서는 성경적 설교의 회복, 논쟁적 설교의 회복, 은혜의 교리에 대한 설교의 회복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설교의 공통적인 특징은 새 시대로부터 받은 영향과 기독교 예배와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필수요소로 설교를 강조하였다. 오류와 갈등이 종교 개혁자들의 설교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설교에서 성경의 위치와 사용이 두드러졌다. 종교 개혁자들로 인한 설교는 예배에서 제 위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이후 예배에서는 미사가 사라지고 성경강해가 중심이 되었다. 정기적으로 성찬식을 가졌다. 설교는 주로 믿음의 오류들에 대한 것이었고 논쟁적이었다.
개혁설교의 특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회개하고 믿은 죄인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용서하시고 사유하시는 사랑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를 강조하였다. 고해성사와 연옥, 거의 신격화된 동정녀와 성인들의 중보, 공덕과 면죄부이론 등 모든 형태의 인간적 죄사함은 모든 것을 이루신 구세주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구원의 진리 앞에서 살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의 설교의 영광은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과 신앙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이 원칙 아래에서 기독교 교리, 예배, 생활의 진실된 개혁에 특징적인 요소로 여기게 되었다. 풍유는 사라졌으며 무모하고 근거가 없는 신비적 해석은 개혁자들에 의해 이성적이며 분명하고 문법적이고 교훈적인 강해 설교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은 설교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지각있고 설득력이 있는 성경 해석을 설교의 확고한 기초로 삼음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의 진보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종교개혁의 설교의 자료 가운데 성경이 위엄과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다만 구습이 남아있고 스콜라 학풍이 강단 설교에 선물로 남겨준 정밀한 설교 형식과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다. 설교의 Turning Point | 기독교 설교 발전사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전환점이 되었다. 설교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 정신과 특성을 달라지게 하였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받은 삶을 살도록 설교하였다. (기독교의 진리를 보존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연합이 깨어지는 가운데 다양한 관점의 설교가 탄생)
참고: 종교개혁과 설교 종교개혁은 설교에 구심성(centrality)을 부여하였다. 강단이 제단보다 높아진 것이다. 루터는 구원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말씀 없는 성체용 빵과 포도주는 성례전적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교회는 약속의 말씀에 생명의 은혜를 입고 있다. 그리고 이 동일한 말씀에 의해 양육되고 보존된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지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 게다가 우리는 오직 이 두 가지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죄의 용서에 대한 표시와 약속을 발견하기 때문에 진정한 성례전들은 세례와 성찬 오직 이 두 가지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모든 것이 없어도 영혼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2]
만약 그 영혼이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 영혼은 부요 하고 어떤 것에도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며, 진리, 빛, 평화, 의, 구원, 기쁨 그리고 자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이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기 때문에 그렇다.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필요성은 이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만약 어떤 영혼이 설교를 믿는다면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그 영혼을 기르고 그 영혼을 의롭게 하고 자유 하게하며 그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그의 기독교 강요를 썼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높였다. 그는 참된 교회의 제일 중요한 표징은 말씀에 대한 충실한 설교라는 사실을 강조했다.[3]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설교되고 들려지며 성례전이 그리스도의 재정하심을 따라 집행되는 곳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는 영원한 표식으로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4]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그 표식도 효력을 상실한다. 말씀과 성례전은 교회의 필요 불가결한 표징이었던 것이다.[5]
루터의 후예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의 칼날이 무뎌갔으며 영적 능력도 상실 되어 갔다. 신학상의 논쟁은 처음에 설교를 고무시켰지만 계속되는 논란은 독단적 궤변이나 인신 공격으로 빠져 들었다. 교리상의 차이나 신념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힘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스콜라적 또는 교리적인 설교를 하였고 신비적이며 영적인 면이 있었다. 지나치게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영향을 받은 설교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 당시에 칼빈의 후예들도 가톨릭과 루터의 후예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투쟁관계에 있었다. 특히 프랑스와 1세 치하에서 시작되었던 개신교도에 대한 프랑스의 박해는 1572년 8월에 성 바르돌로뮤의 밤의 대학살이라는 유혈 참극을 빚게 되었다. 그로부터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칙령이 발포되기까지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는 내란과 종교 분쟁을 겪으면서 계속해서 휘몰아쳤다. 이러한 영향으로 프랑스에서의 개혁파 설교는 점차 시들어갔다. 다만 제네바에서 베자가 종교적 세속적 양방면에서 설교의 영향력을 지켜 나갔다. 그럼에도 개혁주의 설교는 가톨릭 교회에 영향을 주었고 내용에 있어서나 영적 능력 면에서 진보를 나타내었다.
시대 배경과사건 | 17세기의 인류의 진보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두드러졌다. 독일은 17세기 초반에 30년 전쟁이라는 내전으로 힘을 잃었다. 군주제를 확고히 잡은 프랑스와 시민들이 세력을 확장해 가던 영국은 그들의 국력을 과시하며 신대륙과 인도의 광대한 식민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영국은 사악과 범죄가 난무 하였다. 술취함, 도박, 방탕함, 거짓말, 속임수, 경솔함, 낭비함 그리고 모든 악이 유행하였다. 섹스피어의 밀턴은 대표적인 문인으로 그 세태와 함께 하기도 하고 묵인했다. 여기에서 청교도들(Puritans)이라 불리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삶과 교리와 교회 정치는 엄격하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것을 옹호하였다. 영국의 청교도 대륙이동. 교리적 논쟁들이 강단을 장악. 이 시대의 설교| 17세기 청교도의 설교는 성경강해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이 있었다. 강한 양심으로 설교자들은 스스로가 열정적으로 하던 자신들의 일을 믿었다. 성령의 검을 신뢰하였던 것이다. 사려 깊은 가운데 완전함과 이해력과 사상의 힘이 있었다.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자유로운 문학적인 표현과 운율, 다양한 사상의 적응,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국교회의 설교들은 제목설교 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설교의 Turning Point | 영국의 제임스와의 후원 아래 흥정역 성경의 출판 (많은 설교자들은 말씀 속에서 새롭게 발견된 진리를 설교 단을 통하여 전달. 설교 사역의 불길이 시작)
제 6기 (1738 – 1900) 근대후기 선교시대 죠지 윗필드와 웨슬리 시대로부터 19세기 말까지
시대 배경과 사건 | 개신교 국가들에게 있어서 초기의 종교적 열정주의로부터 회의적인 반동의 냉냉한 물결이 흘렀다. 영국에 있어서 자연신론 (Deism)과 관용주의 절학적 회의주의 그리고 독일의 이성주의적 비평주의는 18세기 개신교의 암흑시대로 만들었다. 미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영적 대각성운동이 있었다. 독일에 있어서 눈길을 끄는 종교적인 사건들 중 하나는 모라비안 형제들의 설립과 발전이었다. 심각한 박해를 이겨나가며 신비적 경건과 세계와 지역의 선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에는 진젠도르프 백작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낭트 칙령의 폐지로 인하여 큰 타락의 전환점이 되었다. 위그노들(Huguenots)에 대한 박해는 18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성직자들이나 백성들이나 도덕적인 부패와 종교적 삶의 불신실함은 종교적인 힘을 파괴시켰다. 18세기 잉글랜드의 신앙과 도덕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정치의 부패가 만연했고 가증하고 방종하며 술취함과 도박과 도색등의 악덕이 땅을 황폐화시켰다. 모든 학교에는 이신론과 회의론이 만연하였고 보링보로크, 흄, 깁본 등과 같은 철학적 작가들이 교회의 신앙을 멸시하게 만들었다. 이때 영국에서 반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휫필드와 웨슬레의 부흥이었다. 이들의 부흥운동은 중산층 하층민 수천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상류층 까지 급속히 확장되었다. 이 운동은 기독교 고리와 삶에 있어서 경시되던 측면들을 강조하였고 현대 박애정신과 선교적 관심의 여명이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죤 하워드(John Howard)윌리암 윌버보포스(William Wilberforce)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등의 헌신자들이 이 운동을 이어나갔다. 1720년 미국은 영국의 신민지로서 초기 퓨리탄들의 개척정신 쇠퇴해 가고 세속주의와 무신론주의가 점차 증가되고 있었다. 이때 뉴저지 주의 화란 개혁교외의 목사로 부임한 독일의 경건주의 목사 프래링 허센의 설교에서부터 부흥의 역사 시작되었다. 이후에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으로한 대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설교 | 독일 개신교 설교자들과 설교는 경건주의 (the Pietistic) 합리주의 (the Pationalistic) 초자연주의적 명상주의 (Supernaturalisticc Mediating) 이 주도하였다. 암흑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휫필드(Whitefield)와 웨슬레(Wesley) 그리고 동료들의 주도하여 일어난 부흥운동의 설교는 그 시대에 거의 찾아 볼수 없는 것이었다. 복음적 설교 안에는 위대한 영적 부흥기의 두 지도자와 그 동료들의 헌신적인 수고과 명성과 더불어 영원히 연결되어 있었다. 설교는 대중적이면서도 성경적이었다. 신앙의 내적 경험을 통한 중생에 중점을 둔 설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믿음의 말씀을 선포했으며 생명으로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올바른 회심의 증거요 필수적인 열매로서 거룩한 삶을 열정적으로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위 은혜의 교리 안에서 일치 하지 않았다. 설교의 Turning Point | 말씀을 통한 성령의 부흥을 통하여 개인의 회심과 선교의 시대를 연 시대였다.
참고: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설교에 대하여 휫필드는 영국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미국의 대 부흥의 불씨를 붙인 사람이다. 그는 학창시절 배웠던 연극과 웅변을 사용하여 웅변적이며 연극적인 설교 전달 방식[6]이라는 특수한 설교를 하였다. 그가 연극과 웅변이 결합된 설교 방식을 사용하여서 거듭남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청중들의 반응이 뜨겁게 일어났다. 그는 웅변적으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요지를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성령이 강하게 역사함으로 언제나 철저한 회개가 열매가 일어났다. 그의 설교는 수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회심하게 하였다. 이러한 휫필드의 부흥운동을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이라고 부른다.
그의 설교가 위대했던 것은 그의 숨은 인격에 달린 것이었다. 그는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그는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보통 4시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으며 5시와 6시 사이에는 새벽 설교를 하였다. 그는 모든 선한 사업에 있어서 순수했고 사욕이 없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는 바른 눈을 가지고 있었고 한결같이 기쁘고 명랑한 심령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애롭고 보편적이며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설교자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설교의 내용과 구조 영감이 넘치는 설교는 훌륭한 내용과 구조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며 교리적이며 복음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언제나 죄와 인간의 심성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회개의 절대적 필요성 그리고 믿음과 거룩함과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전하며 순수한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 하였다. 그는 원죄와 거듭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7] 성도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전했다. 그의 교의는 원죄와 칭의와 중생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청교도의 것이었으며 설교구조도 청교도의 패턴을 따라 서론, 주제의 배분 (division of the subject)과 적용 그리고 결론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설교에 있어서 현실의 적용은 설교의 모든 부분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수시로 하였다.
설교의 전달 기술 휫필드는 설교 전달의 기술을 통달한 설교자였다. 그는 풍부한 음성과 음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였다. 그는 음성사용법과 제스처의 역할은 물론이고 말의 기능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효율적으로 설교하기 위하여 원고 없이 강단에 섰다. 그는 원고 없는 설교를 통하여 더 큰 빛과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 원고에 얽매이는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를 단절 시킬 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휫필드는 원고 없이 설교 하였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자연스럽게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설교를 우리라는 피상적인 대상에게 행하지 않고 당신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하여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영적인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휫필드의 설교는 한결같이 명료하고 간결[8]하였다. 그는 난해한 논증과 번잡한 사유로 청중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길고 복잡한 문장을 피하여 쉽고 간결하게 말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요점만 말하였던 것이다. 간결한 성구와 적절한 설명 그리고 적절한 예화가 그의 설교를 빛나게 하였다. 또한 청중의 수준에 너무 어렵게 보이는 단어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휫필드는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뛰어난 묘사를 설교에 사용하였다. 그는 눈으로 보는 듯이 이해 할 수 있게 말하였다. 자기의 주제를 완벽하게 극적으로 표현하여 청중은 휫필드가 전하는 설교를 실재로 있는 사실로 받아 드렸다. 그는 설교의 말씀을 살아있는 그림으로 묘사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설교는 회중들이 보았고 느꼈고 들을 수 있었다. 휫필드의 설교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으며 설득력이 있었다. 휫필드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설교하였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는 이단과 회의론자들과 싸웠지만 냉엄하고 무미건조한 비평으로는 절대로 싸우지 않았다. 온전한 복음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전파하는 진리의 삶으로 싸웠던 것이다. 또한 그는 도시선교와 지역선교에 열심을 보였다. 구역조직과 야외전도와 가정선교에 열심을 보임으로 사회봉사와 같은 진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현대 목회의 기초를 마련한 점이 설교자로서의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참고: 조나단 에드워드 와 설교(Jonathan Edwards and Preaching) 조나단 에드워드는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이자 부흥 신학과 복음주의의 아버지로서 미국 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신학자 이며 철학자 이다. [9] 에드워드의 설교방식 그의 설교는 강해적이며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의 관심은 말씀을 순수하게 그림 그리듯이 전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들려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열정과 긴장감과 애원함을 함께 쏟아놓았다. 그는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설교를 듣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강하게 진동시킨 것이다. 그는 설교자의 마음이 설교의 준비와 똑같이 준비되는 것에 철저했으며 그의 태도는 한결 같은 모습을 보였다.
에드워드는 그의 설교를 전부 적었으며 조지 휫필드가 에드워드가 목회한 메사추세츠 주 노스햄프톤에서 설교했을 때까지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 휫필드의 즉흥적인 설교에 강한 인상을 받은 에드워드는 그 후로 간편한 메모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설교 원고를 읽기만 한다고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첫 부흥이 그들에게 일어났을 때 설교를 할 때 어떻게 설교하느냐는 방식보다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에드워드의 말씀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였고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일깨우기 위한 타오르는 열정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의 설교의 감동 에드워드의 설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원론에 강조를 많이 두고 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전 인류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칼빈주의적 문화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설교는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보석과 같은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모든 삶의 유형을 다 포함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도덕법을 총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설교 에드워드는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그는 회심에 대하여 설교하였고 말씀에 대한 적용은 강력하였다. 그는 죄인들을 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성령이라는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는 교리를 다룰 때 사람들이 싫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에드워드의 설교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리적이었으며 항상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종교 개혁의 중심에 있었던 칼빈과 닮았다.
에드워드는 그의 설교 본문을 지지하는 모든 성경을 찾아서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이 성경 해석의 해석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 길로 나갔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계시된 진리 안에서 성경의 조화를 확증시켰으며 그의 설교는 그것에 대한 선포였다. 그는 교리가 함축하고 있는 것들을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성경적인 방법을 따랐으며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알고 있었다. 교리가 행위를 규정하고 성경에 중심 된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그의 큰 강점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설교를 연구하는 동안 기도를 쉬지 않았다. 설교 준비를 위하여 그는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루에 13시간이나 연구에 몰두 했다. 현대의 설교자인 우리는 그의 이러한 면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설교자 에드워드는 부흥 기간 동안에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주시기도 하고 거두시기도 하는 것이다. 부흥의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깨달았던 그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굳게 하였다. 오늘날 설교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기독교 목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 글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시대 배경과 사건| 모더니즘 안에서 과학의 발전과 사상과 문화의 발전이 지속되었다. 칼 마르크의 사회주의 이론 등장하였고 찰스다윈의 진화론이 주장되었다. 산업혁명을 통한 급속한 도시화 현상과 생산력 증대로의 물질주의의 시작은 이 시대를 대표한다.
참조: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1892) 의 본문 선택과 성경읽기 스펄전은 설교 준비에서 본문과 주제의 선택에 어떤 설교자보다 큰 의미를 부여했다. 스펄전은 여러 시간 동안 앉아서 기도하며 설교의 주제를 주시기를 기다렸다. 본문의 선택에 있어서 스펄전의 고민은 설교할 본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고라야 할지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정원에 수만 가지의 아름다운 꽃들 가운데서 하나만 골라야 하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스펄전의 본문에 대한 고민은 주님의 교회와 회중에게 보다 적절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고민이었다. 성경의 좋은 것 중에서 어떤 본문이 절절한 시기에 전해 질 수 있는 가에 대한 그의 정성은 고귀한 것이었다.
본문선택의 기본원리는 성령을 신뢰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설교할 본문을 얻기 위해서 설교자의 무릎을 강조하였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이는 설교자가 아니라 성령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본문에 대한 선택 역시 그 분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 성경적이며 현명한 자세인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분의 손에 겸허히 내어 놓고 성령께 강림하셔서 정해진 때를 위하여 그의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의 양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어떠한 순간에도 성령께서 자신에게 설교본문을 주실 것임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10] 그는 권능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적절한 본문을 찾는 실제적인 원리 그는 어느 한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아서 거기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게 되면 설교의 주제를 달리 더 찾아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기도를 하며 간구를 하지만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다가 마음에 깊이 이끌리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주제를 선정하는 문제에서조차도 그리스도 없이는 설교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교회와 회중의 영적인 상태와 필요를 고려한다. 여기에서 경계할 것은 특정 회중에 관한 지나친 관심이다.[11] 그는 모든 교인을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주님의 교회에서 번지고 있는 죄들이 무엇인지 숙고한다. 교인들의 세속적 생활과 탐심과 기도와 분노와 교만 그리고 형제 사랑의 결핍과 비방 등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서 그 문제에 대한 합당한 말씀의 주제로 삼는 것이다. 만약 이단이나 악한 생각들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다면 그것들을 교정할 수 있는 본문을 설교본문으로 정하는 것이 스펄전의 구체적인 주제 선정 방법이었다.
본문 선택의 원리는 성령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본문이 잘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성령의 또 다른 인도하심이 있다면 설교자는 그것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잘 준비해 놓은 설교를 취소하고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에 의지하여 순전히 즉석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펄전의 성령의 의존성이 설교자의 설교준비의 소홀히 하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스펄전은 설교 준비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설교를 앞둔 한 두 시간 전에 하늘의 사자가 설교의 본문을 저절로 전달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요 그로 인해 본문 없는 강단을 경험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오히려 설교자는 설교를 위하여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며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는 성경을 계속해서 읽되 특별히 한 장을 읽고 각 절마다 깊이 묵상하거나 혹은 한 절을 선택하여 그 구절에 온 정신을 쏟을 것을 권면한다. 그렇게 할 때 읽는 절이나 장에서는 본문을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거룩한 주제에 정신을 쏟는 동안 적절한 말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성경 읽기의 원리 설교 주제와 본문의 선택이 일단 끝나면 설교자에게 남겨진 다음 과제는 성경 읽기의 문제가 남는다. 성경 읽기의 기본적인 원리는 성경 자체를 읽고 성경으로 목욕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교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 했다. “신학의 대가였던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와 비교해보면 오늘날의 설교에는 성경이 지나치게 적게 나타나 있습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이 사용한 거의 모든 문장은 성경 말씀에 빛을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스펄전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을 때에 주석서나 다른 어떤 참고자료들보다 성경 자체를 많이 읽을 것을 권했다. 물탱크에서 마시는 것보다는 쏟아나는 맑은 샘에서 마시는 것이 언제나 제일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석서들보다는 성경자체를 읽는 것이 은총 가운데서 자라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설교가 철저하게 본문 자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설교자의 생각이 아닌 계시의 본문이 설교 속에 흘러 넘치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성경 본문 속에 누워서 그것으로 흠뻑 젖어 있을 때에 가장 좋은 설교를 하게 된다고 고백 하였다.
성경 읽기의 구체적인 원리 스펄전에 따르면 성경 읽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의 파악이었다. 그는 성경을 기계적으로 많이 읽는 것을 피하라고 한다. 한 사람이 성경을 얼마나 많이 통독하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읽은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읽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스펄전은 하루에 성경을 여러 장을 읽기 보다는 짧은 몇 구절이라도 정독과 깊은 이해를 위해 묵상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각성시키기를 겸손히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설교자들이 성경의 영원한 빛을 “감히 보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눈을 열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라고 권면을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은 후에는 묵상하고 기도하라 스펄전은 성경을 읽으면 묵상할 것을 권한다. 묵상은 말씀을 소화시키며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에 비유한다. 성경의 묵상은 진리의 말씀으로 설교자를 단련시키고 영혼을 더욱 강건하게 세워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은 후 그것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해석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그 책의 의도와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책의 저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지으신 분은 성령하나님이며 그 분에 의하여 그 뜻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라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예수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율법이나 교리보다 더 크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마 12: 6) 스펄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하거나 느끼지 못한 채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가 비록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통독한다 할지라도 성경은 죽은 책이 될 것이며 우리의 영혼 역시 죽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읽기는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결국 스펄전에게 올바른 성경읽기란 모든 본문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여러분이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한다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39~40) 고 하셨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는 당시의 많은 설교자들에게 경고를 하며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한다. “어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관하여 설교할 수 없거나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자들에 관하여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한마디는 결코 그런 설교를 들으러 가지 마십시오. 죽은 사역은 어느 누구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라고 한 이 말은 오늘날 현대의 설교자에게 각성과 회개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
이 시대의 설교| 이 시대는 자유주의의 신학이 다양하게 그 가지를 뻗으며 기독교에다가 현대의 사상을 가미하는 설교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하나님 중심에서 세속적인 문화와 인간 중심의 설교가 막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청교도의 흐름과 전통을 추구하는 개혁주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로 주어지는 회심과 믿음을 강조하였다.
참고: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집회의 위험성 19세기를 통하여 “헌신의 요청이나 즉석의 결심”을 호소하는 유형의 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이든 의지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나쁜 것이다. 사람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로 구분되어 있다. 의지는 처음 지성을 통하여 그리고 감정을 통하여 그 영향아래에서 의지의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롬 6: 17 참조)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이 충분하게 증거되지 못했음에도 결신의 호소에 응하여 앞으로 나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강압은 분명히 위험하다. 말씀의 증거나 결신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성례와 말씀의 증거는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반 마술적 견해와 거짓된 체험을 피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거기에 응하는 것으로서 어떤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헌신이나 결신에 대한 요청은 거짓된 구원에 합석시키면서 위장된 회개를 유발 시키는 것이다. 참된 죄의식의 역사, 즉 중생과 믿음의 선물을 주심과 새 생명을 주시는 참된 역사는 오직 성령만이 하시는 일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에서의 오순절 날에 일어나 가장 극적인 모형을 우리는 바라본다. 베드로가 설교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죄책감 때문에 울부짖었다.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설교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파헤치고 그것들을 적용했다. 설교를 통하여 회심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 시간을 통하여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고 앞으로 나왔다. 이는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자연 안에서나 피조물 계에서 또는 사람들의 영혼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죄인이라도 스스로 그리스도를 택할 수는 없다. 따라서 결심이라는 것은 매우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죄인은 완전한 절망과 연약한 가운데에서 “더러운 죄인 생명 샘에 나가오니 주여 날 씻으소서 나 죽겠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나간다. 즉시 믿겠다고 하는 결신자들과 서서히 나타나는 결신자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이 일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우리는 성령께 맡기는 것과 성령의 실수 없는 역사에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제 7기 20세기부터 21세기 전까지 칼바르트와 마틴로이드 존스
참고: 청교도를 이어받은 복음주의자들 20세기 금세기 초 낙관주의는 먼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그 다음에는 참호 속의 진흙과 피의 참사로 산산이 부서졌다. 유럽은 초토화 되었고 목사들의 발언은 보다 냉정해 졌다. 그러나 설교 사역의 특권과 능력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낙관 주의를 버리고 인류에 대한 새로운 현실주의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신앙을 표명하였던 칼 바르트(Karl Barth) 와 같은 지각 있는 신학자들은 설교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12]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행해진 설교에 관한 그의 한 강의에서 본 회퍼는 설교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더욱 강력히 강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에서의 세속화의 과정이 가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동안에도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선포되었다.[13] 전쟁 이후에 시간이 갈수록 설교의 능력은 점점 쇠하였다. 교회는 쇠퇴하였으며 설교의 부활은 메아리가 되어 갔다.
자유 교회에서는 1938년부터 1968년 까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목회를 하던 마틴로이드 죤스(Martin Lloyd Jones) 는 메시지를 쉬지 않고 전했다. 그는 50, 60년대의 가장 훌륭한 설교자였다. 그는 그의 저서 ‘목사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 설교의 사역은 이제까지 부름 받을 수 있었던 누구에게나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었던 누구에게나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었던 것이다.” 전통을 따르는 오늘날 기독교회에 있어서 가장 절박한 필요는 참된 설교이다. 예수님의 설교로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한 복음의 전파는 오늘 날 까지 전통가운데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 분이 선택한 사람들을 통하여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시대 배경과 사건| 초기의 낙관주의와 세계 1, 2차 세계대전의 반발. 전쟁 이후 교회와 설교가 쇠퇴되었다. 칼바르트(1886 – 1968)가 1919년에 출간한 로마서 강해는 신학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신 정통주의라고 부른다. 인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발전한 시대. 이 시대의 설교| 20세기 금세기 초 낙관주의는 먼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그 다음에는 참호 속의 진흙과 피의 참사로 산산이 부서졌다. 유럽은 초토화 되었고 목사들의 발언은 보다 냉정해 졌다. 그러나 설교 사역의 특권과 능력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낙관 주의를 버리고 인류에 대한 새로운 현실주의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신앙을 표명하였던 칼 바르트(Karl Barth) 와 같은 지각 있는 신학자들은 설교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행해진 설교에 관한 그의 한 강의에서 본 회퍼는 설교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더욱 강력히 강조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에서의 세속화의 과정이 가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동안에도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선포되었다. 전쟁 이후에 시간이 갈수록 설교의 능력은 점점 쇠하였다. 교회는 쇠퇴하였으며 설교의 부활은 메아리가 되어 갔다. 시대가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설교는 획일적인 방법을 탈피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설교는 이미 설교자의 선포가 권위를 갖기 보다는 회중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그들을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설교자가 중심이 된 것에서 교제중심의 예배로 변해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 배경과 사건 | 인본주의 과학주의 물질주의 낙관주의는 세계 1, 2차 대전 이후로 서서히 그 형상을 잃어갔다. 인간의 악의 절정을 바라본 지성인들은 방황을 하였고 이 시대에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 진리가 될 수가 없었다. 정치적 안정, 과학적 진보, 물질적 풍요의 기대가 정체되어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가 열리게 된 것이다.
참고 : 설교를 위한 현대세계에 대한 연구 현대세계에서는 성경 및 신학 연구 자체만으로는 훌륭한 설교에 부족을 느끼게 된다. 성경의 말씀이 현실에서 적용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전혀 상관이 없다면 아무도 듣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설교자는 인간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오늘날 가장 훌륭한 설교자는 언제나 근면하여야 한다. 사람들과 회중을 알고 인간 현장의 모든 고통과 기쁨과 영광과 비극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설교 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지 않는 시간에는 눈과 귀를 열어서 보고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집중하다가 세상의 풍조와 타협하거나 유행을 좇고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으로 전락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과 같은 책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여권주의, 낙태, 안락사, U.F. O. 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떤 때에는 전문적인 군사와 국제 경제 질서에 대한 사실과 정보를 밝혀줄 문헌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이 없을 때 오늘날의 설교에서는 성경의 진리가 추상적으로 변하여 허공으로 살아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설교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광고와 영화에서 주는 영향력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느껴 보는 것은 설교의 메시지를 하나님께 구할 때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된다.
성경의 말씀으로 현대세계의 적용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다. 제시된 현실의 사실과 그러한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돌보시고 무력한 자를 보호하시고 공의를 요구하시며 그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아낌없이 나누도록 요청하신다는 것을 성경으로부터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 중 8억이 빈민이며 매일 만 명의 기아와 그와 관계 있는 질병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덧붙이면 그 메시지는 더욱 더 통렬하고 살아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끝없이 정보를 습득함과 동시에 독서를 하도록 해야 한다. 1주일에 약 2권의 책은 설교자로서의 기본 자세일 것이다.
설교자는 그 모임의 회중들을 알기 위하여 제 3자가 되어 듣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성경적 안목에서 회중들은 현대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안목에서 서로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말씀이 현실에 부딪힐 때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설교자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혼자 상상하며 질문과 대답을 구하는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큰 문제는 무엇이며 진정한 성공과 승자와 걱정과 소유 등의 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알고 하나님께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해야 하겠는가? 에 대하여 간구하는 설교자를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신다.
성경과 현대에 대한 연구에 대하여 우리는 고대의 성경 본문과 현대의 현장과 성경과 문화의 충돌과 말씀과 세상이라는 양면성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체계적이며 포괄적으로 열린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숙고하는 동시에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사회를 이해하고 노력해야 하고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신학교에서는 한적하고 고요한 장소에서 하나님 말씀과 성경을 연구하면서 심방을 하는 설교자를 기대하고 있고 배우고 있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의 생활과 환경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설교자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만들어서 묵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묵상 중에 연구한 자료는 꼭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요약하여 보관하도록 해야 한다.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드리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목회자는 축복받은 설교자이다.
이 시대의 설교 | 다양한 주관주의적인 신비적인 운동과 자유주의적 신학의 바탕 아래에서 인간적인 관점의 행복과 축복의 추구를 이루고 있다. 열린 예배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면서 설교자의 권위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다양한 문화가 교회의 중심에 잡게 되었다. 설교는 더 이상 회중들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닌 시대이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성령 운동과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자 하는 가운데 참된 교회에 대한 고민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부각되었다. 문제의 해결은 성령의 조명을 따라 삼위 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증거를 지속하여야 하며 구원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요구하여야 한다. 신학적 교리적 교회론적 입장에서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해야 할 사명도 우리에게는 있다. [1]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있다. [2]존 스타트, 현대교회와 설교, 생명의 샘, 2008, p. 31. [3]칼빈에 있어서 설교란 목사의 근본적 의무들 가운데 하나였다. 칼빈은 설교라는 우선적 과업 앞에서 다른 어떤 일단의 목회적 노력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도들처럼 목사도 복음을 충실하게 설교할 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면에서 목사를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부른다. (디도서 첫 번째 설교, CO, LIV, p. 385) [4]존 스타트, 현대교회와 설교, 생명의 샘, 2008, p. 33. [5]존 스타트, 현대교회와 설교, 생명의 샘, 2008, p. 34. [6]그러나 전달의 방식이 설교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과 말씀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 일반은총의 역활을 강조할 뿐이다. [7] 칭의를 강조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8] 미주 총신대학의 조해수 총장님의 설교도 간결하고 명확한 장점이 넘친다. [9] 그는 1734년 대각성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존 윌슨 편집, 조나단 에드워드의 구속사, 부흥과 개혁사, 2007, p. 16.) [10]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도하면서 읽거나 묵상 중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11] 예를 들어서 헌금을 많이 하거나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한다거나 높은 신분의 직책을 가진 경우 등이다. [12]존 스타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13]존 스타트, 현대교회와 설교, 생명의 샘, 2008, p. 54, 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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