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은 (John Calvin) 말했다:
죽음과 최종 부활의 날을 기쁨으로 기다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아직 진학을 하지 못한 사람이다 (기독교 개요 Institutes, 3.10.5)
성경 종말론은 개개인의 죽음과 그 이후를 다루는 개인 종말론과 인류 전체의 종말을 다루는 일반 종말론, 두 가지로 대분된다. 개인 종말론은 1) 육체적 죽음 2) 중간기 상태 3) 육체 부활 4) 성도의 심판 등으로 구성된다. 이 네 항목들 중에서 성경에서 가장 희미하게 언급된 것이 "중간기 상태" 곧 육체의 죽음 이후, 부활까지 성도는 어떤 상태에서 어디서 지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A 육체적 죽음
1. 성경에서 죽음은 세 가지로 제시된다.
(1) 영적인 죽음 - 이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현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를 지시한다 (창 2:17; 3:3, 8-9; 엡 2:1, 5);
(2) 영원한 죽음 (둘째 사망 혹은 영원한 영적 사망) (계 2:11; 20:6,14; 21:8);
(3) 육체적 죽음 - 일시적으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창 35:18; 약 2:26; 빌 1:21-24; 고후 5:1-8, 고전 15:35-58).
기독인들은 영적인 죽음에서 (현세에서나 영원 지옥에서나)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의 초점은 육체적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2. 육체 죽음의 원인
a. 육체 죽음이란 생물학적인 죽음을 가리키는데, 이는 영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인간의 범죄로 나타난 현상이다.
b. 죽음의 원인은 영적으로 본다면, 죄 때문이다 (롬 5:12)
궁극적으로 죽음은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시는 작용이다 (마 10:28; 행 17:28)
B. 중간기 상태
1. 이는 개인이 육체적 죽음을 맞는 순간부터 육체적 부활을 체험하기까지 중간기 상태를 지시한다.
2. 고후 5:6-8; 빌 1:21-24, 눅 16:19-31
이런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자신이 살아 있길 소망하는 마음을 피력한다. 그렇게 되면 죽지 않고 몸과 영의 분리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리되는 일은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벌거벗은" 상태이다. 바울의 삶과 죽음의 전망은 따라서, 이 지상에서 살면 주를 섬길 수 있어 좋다 (빌 1:21a, 22a, 24-26). 반면, 죽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하지만 더 좋다 (고후 5:6-8, 빌 2:21b,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좋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죽지 않고 즉시 부활의 몸, 영광의 몸을 입고 주님을 만나는 일이다.
3절에 의하면, 만약 그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여전히 살아 있는다면, 주님은 그에게 육신을 가진 자, 곧 몸으로 옷입은 자로 발견될 것이라 한다. 즉 주님의 재림 때에, 그는 영과 육이 분리 되지않는 태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몸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은 벌거벗은 채로 만나는 것과 같다. 바울 사도는 육체적 죽음과 전체 부활 사이에 몸이 없는 상태를 (state of disembodiment) 예상하고 있다 (4절에서 옷을 입지 않은 상태 참조). 4절은 2절의 확장된 반복에 불과하다.
고후 5:5에서 바울 사도는 확신을 말씀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성령님의 보증금은 정적 예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 성령님의 생명 주시는 능동적 역사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킨 능력의 원리가 또한 그 성도 안에서 역사하여 그의 죽을 몸을 최후 승리의 순간, 즉 그의 몸이 영화롭게 되는데서 나타날 그의 구속의 최종완성을 위해 그의 죽을 몸을 예비한다 (Hughes).
고후 5:6-8을 고려해 보자. 주목할 것은 6절과 8절에서 나타난 대조이다. 이 대조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두 존재 방식의 차이가 아니다. 즉, 하나는 몸으로, 하나는 몸 밖에서 존재하는 그런 존재 방식의 차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주께 대한 두 가능성 관계면에서의 방식 차이도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는 주님과 같이 있고, 하나는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그런 방식의 차이도 아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대조는 기본적으로 기독인의 존재 혹은 거주에서 두 연속적인 영역들에서의 대조이다. 즉, 처음에는 몸안에 거하고, 다음에는 주님과 같이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몸 안에서의 삶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몸 안에서 IN the body = 주께로부터 떠난 상태 ABSENCE from the Lord
몸 밖에서 OUT OF the body = 주님과 함께 거함 PRESENCE with the Lord
사람은 자기 몸 안에 있거나 몸 밖에 있거나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주님에게서 떠나 있거나 주님과 같이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 둘 외에 다른 제3의 방식은 없다. 고후 5:1-5에서 바울 사도는 육신적 죽음은 신체적 존재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인다. 여기서 그는 이것이 기독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존재 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생존하였고, 우리가 몸 안에 있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있는 방식이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신체상 죽어, 우리 몸에서 떠나 주님과 같이 거하는 상태이다. 이 두 존재 방식은 서로 배타적이다. 죽을 몸에서 떠남은 주님과 같이 거하는 것의 시작이다.
이런 변천은 곧장 연속적인 사건으로 일어나는가? 그렇다. (1) 6절에서 신체에 거주하는 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상태에 있지 아니함과 동시적이다. (2) 우리가 몸에 있을 때, 우리는 주께로부터 떠나 있다 (3) 7절에서 믿음으로 걷는 것과 봄으로 걷는 것이 서로 대조되었다. 둘 사이에는 중간 기간이 없다. 죽음이 일어나면, 믿음은 눈으로 봄에 자리를 내어주고 소망이 성취됨에 자리를 내어준다. (4) 성도의 신체적 죽음 직후에 의식이 생생한 가운데 주님과 함께 있게된다는 것이 빌 1:20-24에 언급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다.
몸에 거하다 = 자기 고향에 있다; 자기 백성 중에 있다. 반면 주로부터 떠나있다 = 자기 고향에서 떠나 있다; 외국에 있다.
7절은 6b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함이다. 혹은 어떤 의미에서 몸에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로부터 떠난 상태는 영적이 아니라, 공간적인 견지에서 그러하다 (마 28:19-20, 골 1:27, 요 17:23, 26). 몸안에 있는 동안 우리는 문자적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적어도 대다수는 그러하다), 신체상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떨어진 상태에서 믿음으로 걷는다. 사망이 우리를 공간적으로 주님 곁으로 인도하여, 그분을 보게 한다. 이처럼 죽음은 그리스도와 영적 관계를 절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대시키고 격상시킨다! 죽음은 우리를 주님을 직접 보게 만들고, 그분과의 교제의 친밀성을 증대시킨다.
신학적 함축들:
- 이런 사고는 로마 카톨릭의 연옥설에게 어떤 의의를 가질까? 연옥설은 기독인이 죽으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임재의 축복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죄로부터의 더 한층의 정결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 기독인들이 죽으면 완전 무활동, 무의식 상태에 들어갔다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깨어난다고 말하는 영혼 수면설에 (psychopannychia) 대하여는 어떤 의의를 갖는가? 그렇다면, 신약 몇 구절들에서 죽음을 "수면"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 27:52, 눅 8:52, 요 11:11-13, 행 7:60, 고전 7:39, 11:30, 15:6, 18, 살전 4:13).
(1) 잠 자는 일은 지상의 수고로부터의 안식을 의미한다. 즉 이 세상 활동의 중단이다. 그렇지만 잠을 자면서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깨어 활동한다.
(2) 잠 자는 것의 영상으로 죽음을 묘사하는 것은 몸이 활동을 중단하고 잠을 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혼 혹은 영이 무의식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3) 죽음을 잠 자는 일에 비유한 것은, 죄에 대한 처벌로서의 죽음의 고통은 적어도 기독인들에게 없어졌다는 사실을 예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도에게 죽음은 두려워 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잠간 잠을 자는 일과 같은 것이다 (눅 16:19-31, 마 17:1-8, 막 12:26-27, 계 6:9-11).
- 이런 구절들은 몸의 영혼이 빠져 나간다는 입신 체험에는 어떤 의의를 갖는가?
요컨대, 기독인의 중간기 상태는 죽음 직후에 그리스도의 임재 앞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 옮겨지는 동안에 우리는 성결 (더 이상 죄의 본성 곧 육과 싸우지 않게 된다), 행복, 더 강화된 생생한 의식 활동, 그리고 충만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등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최종적 영화는 부활 이후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 죽음 직후에 일어날 일은 생생한 의식이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저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께 가까이 할 수 없는 절대적 분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눅 16).
C. 육체 부활
1. 그 확실성: 그리스도의 부활 (요 11:25-26, 14:1-3; 롬 6:4-11, 8:11, 고전 15장, 고후 4:14, 빌 3:10-11, 21, 골 2:12, 3;4, 살전 4:13-18, 벧전 1:3-5, 계 1:18 등)
2. 그 성격 (고후 5:1-5) - 바울 사도는 신체적 죽음, 몸과 영혼의 분리를 천막의 해체에 비유한다. 그러나 죽음은 절망감으로 귀결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건물,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하늘의 영원한 집을 갖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건물은 무엇인가? 몇 가지 제안들이 있어 왔다:
하늘 (Heaven) - 하늘의 거처 (요 14:1-3); 아마도 새 예루살렘?
중간기용 신체 (Intermediate body) -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입을 영화롭게 된 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육체적 혹은 썩을 그런 몸은 아닌 신체, 그럼에도 완전히 영적인 몸은 아닌 그런 신체. 그러니까 중간기 기간 동안에 적합한 어떤 종류의 신체로, 최종, 영화롭게 된 부활체와 구분되는 어떤 신체 (마 17:3, 계 6:9-11).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
부활한/ 영화로운 몸 - 이것이 가장 개연성 있는 답변이다. (a) 1a에서 "집"은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지상의 몸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1b의 "집"은 장차 나타날 하늘의 몸을 가리켜야 한다. (b) 그 묘사를 주목하라: 손으로 짓지 아니한 = 영적인 spiritual (고전 15:44, 48, 49); 그 집은 지상의 몸의 일시적, 잠정적 성격에 비하여 영원하다. 그 몸은 지상과 대조되어 하늘에 있다 (1a).
이런 해석에 대한 주요한 장애물은 바울이 "우리가 가질 것이다" 라고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로 (우리가 갖는다)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표현은 죽음 직후에 성도는 자신의 영화롭게 된 몸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양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면, 고전 15:22이하, 15:51-56, 살전4-5장의 사고와 충돌하게 된다. 그런 구절들은 모두 영화롭게 되는 일이 재림 때에 일어난다고 말씀한다. 더구나 성경에서 종종 미래 실체나 미래 소유물은 저자의 견지에서 너무나 확실하여, 그것이 현재 시제로 언급되기도 한다. 즉 미래에 나타날 바가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에 이미 현재로 존재하는 양 표현하기도 한다. 바울이 "우리가 갖는다"라고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갖는 일이 곧장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갖는 일의 확실성과 그것의 영구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소망의 표현이다.
*어떤 사람은 주장하길, 바울이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신체적 죽음과 최종 부활 사이의 경과 시간을 하늘 성도들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자기의 부활 신체를 죽음 이후 곧장 받는 양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중간기 상태는 죽은 자들이 반드시 경험하는 상태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고후 5:6-8, 빌 1:21-24, 계 6:9-11). 죽은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살전 4:17). 죽을 때에 성도는 떠나서 주와 같이 있게 된다 (빌 1:23). 그렇다면, 중간기 상태와 (죽음) 전체 부활 사이에 어떤 종류의 존재를 성도는 입게되는 듯 보인다.
2절부터 시작하여 바울 사도는 자기 표상들을 혼합한다. 1절에서 부활 신체는 집 혹은 거처에 비유되었다면, 2절에서 그것은 의복에 비유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집으로 옷 입는다고 말함으로 (2b) 두 표상들을 혼합한다. 그러나 의복을 입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한 의복을 다른 의복 위에 입는 것이다. 여기서 그림은 하늘 신체를 지상 신체 위에 말하자면 외투처럼 입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 신체가 지상 신체를 덮고 더 나아가 지상 신체를 흡수하고 변화시키기 까지 한다. 부활 신체는 그러므로 없는 데서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즉 과거의 신체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생으로 시작된 영적 과정의 성취에 불과하다. 우리는 현재의 신체를 변화시킨 것을 입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완전 새로운, 다른 신체를 입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요소를 모두 갖게 된다 (빌 3:20-21, 고전 15:53: 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을 입으리라.
D. 성도의 심판 (고후 5:9-10)
1. 심판의 대상들 - 성도들 (a) 문맥은 기독인들을 다룬다 (고후 4:16-5:10); (b) 9절에서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자 노력하는 "우리"와 10절에서 언급된 판단되는 "우리" 사이의 관계; (c) 불신자들은 좋은 것을 가질 수 없다 (10절); (d)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한다 (고전 6).
2. 심판의 성격
1. 심판의 목적은 죄에 대한 처벌을 위함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 행한 주께 대한 충성과 헌신, 선행을 심사하여 상급을 주기 위함이다.
2. 심판의 불가피성 - 우리는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3. 심판의 보편성 - 문자적으로, 우리 전부가
4. 심판의 개인성 - 롬 14:10-12
5. 심판의 완성 방식 - 우리 모두는 드러나야 한다 (고전 4:5)
6. 심판의 장소 - 그리스도의 심판대
7. 심판의 주체 - 그리스도 (요 5:22)
8. 심판의 기준 - 육체 생활에서 되어진 일들에 대한 (그것에 정비례하여) 보상
9. 심판의 내용 - 보상의 내용은 성도의 거할 집과 면류관?
10. 심판의 때 -재림 때에 혹은 계 10:11이하에 묘사된 큰 백보좌에서 악인 전체에 대한 심판과 동시적으로
연관된 질문들:
- 이 세상에서의 행위 혹은 말이 선한가 악한가를 무엇이 결정하나?
- 선한 행위들에 대한 상급은 무엇인가? (마 5:11-12, 25:19-21, 눅 19:12-27; 고전 3:10-17, 롬 2:6-10, 엡 6:7-8). 또한 계 2:7, 10, 17, 23, 26-28, 3:5,12, 21 참조.
- 악한 행위에 대한 보응은 무엇인가? (고전 3:10-17).
- 고후 5장은 우리의 공적 (功績) 행위와 자기 본위적 순종을 가르치는가?
-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소망이 순종에 대한 적절한 동기를 제공하는가?
- 언제 이 심판이 일어나는가? 육체 죽음 때에, 중간기 상태 기간에, 재림 때에, 대 백보좌 심판의 때 (계 20장)?
책들이 이제 닫혔지만, 그것들은 그 때에 다시 열릴 것이다. 우리가 이 몸에서 행한 일들은 우리에게 선악간 되돌아 올 것이다. 모든 경건한 생각, 모든 죄악된 생각, 모든 은밀한 기도, 모든 은밀한 저주, 모든 알려지지 아니한 자선 행위, 모든 숨겨진 이기적 행위: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는 몇 해 동안 그것들을 기억하지 아니했지만, 어쩌면 전부 잊어 버렸겠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행동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인정하는 것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전에 행한 바를 우리 자신이 얻게 될 것이다 (James Denney).
부록:
로마 카톨릭의 연옥설
로마 카톨릭의 연옥설의 토대는 죄의 이중적 결과라는 사고이다:
중한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박탈해 버린다. 따라서 중한 죄는 우리로 영생을 박탈시키고, 영생의 상실은 죄의 영원한 처벌이라 불린다. 다른 한편, 모든 죄는 아무리 시시하다 해도, 피조물들에게 건강치 못한 부착물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여기 지상에서나 아니면 죽음 이후 연옥에서 반드시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 정결케 하는 과정을 통해서 죄의 일시적 처벌이라 불리는 바로부터 그 사람은 자유를 얻게 된다 (카톨릭 교리 문답집 Catholic Catechism, 1472).
연옥 자체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교제 안에서 죽으나, 여전히 불완전하게 정결케 된 자는 누구나 영원한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그런 사람은 정결케 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서, 천국의 기쁨에 들어갈 거룩함을 얻어야 한다. 교회는 이 선택된 자의 마지막 정결 과정을 연옥이라 Purgatory 부른다. 이는 정죄된 자들의 처벌과 완전히 다르다 (카톨릭 교리 문답집, 1030-31).
크리프트에 (Peter Kreeft) 의하면, 연옥이란 죽음의 순간에 곧장 천국으로 들어가기 불충분한 자나 그렇다고 지옥에 보내야 할만큼 악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정화시킨다. . . 연옥은 하늘의 현관과 같다 혹은 하늘의 배양기 (인큐베이터), 혹은 하늘의 세탁소와 같다 (Catholic Christianity [Ignatius] 149).
이처럼 연옥은 카톨릭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신자들의 공적을 첨가시키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은 성도의 공적 행위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즉 인간으로 할 수 없는 바를 그리스도께서 홀로 감당함으로 죄인들이 그를 믿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카톨릭은 이런 교리를 만들어 내었던가?
(1) 마카비하 12:44에서 유다 마카비는 죽은 자의 부활과 산 자가 죽은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던 양 기술한다. 그 책의 저자는 만약 유다 마카비가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후에 그 저자는 기술하길, "그러므로, 유다 마카비는 죽은 자를 위해 속죄를 하여, 그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도록 하였다"고 한다 (12:46).
(2)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 초대 교회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관례가 있었다.
(4) 고전 3:11-15 (벧전 1:7)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본문은 성도가 연옥에서 자기들의 죄를 정케 하려고 잠시 불에서 태움을 받는다는 사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행한 일들이 태움을 받는다.
- 이 본문은 죄의 결과를 가리키지 않고, 행한 일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 말씀한다. 여기서 이슈는 죄와 그 처벌이 아니라, 행한 일과 그 보상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당하는 손실은 그리스도를 제대로 섬기지 아니한 때문에 받을 보상의 손실이다.
- 불은 개인이나 어떤 이의 영혼을 죄로부터 정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어떤 사람이 행한 일의 자질을 드러낸다 (13절). 연옥의 불은 성도들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고 변화시켜 저들로 하늘에 들어가기에 적절하게 만든다고 한다. 여기 본문에서 불은 어떤 사람이 행한 바 일의 자질을 시험하거나 드러내어 그가 행한 일이 보상을 받기에 적절한 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 문맥에 따르면, 이 구절들은 교회 지도자들을 특히 다룬다. 즉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세운 바울, 바나바, 베드로 같은 자들을 다룬다. 모든 성도들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 고전 3:15은 암 4:11, 슥 3:2과 유사하다. 바울의 요지는 계속 건축을 잘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그는 타는 불에서 아주 아슬아슬하게 끄집어 내어진 막대기 같은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행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이 겨우 구원만 받고 상급은 전연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어디서도 여기 본문에서 이것이 중간기 상태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13절에서 "그 날에"라고 하는데, 이는 주의 날,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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