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70이레 예언 (단9:24-27)

하나님아들 2012. 9. 22. 00:19


70이레 예언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 개념:

*이레 = 7 = 1주간; 따라서 70이레 = 70주간 = 490일(년) 

*희년은 (7년 안식년 x 7번 = 49년 다음의 해, 곧 50년째되는 해로, 그 해에 빚을 면제해 주고, 종들은 해방시키고, 토지도 원주인에게 돌려준다.

 

"70이레"란 (šäbù`îm šib`îm) 말은 단 9:24에서 나타나는데, 70개 주간들 (seventy weeks), 곧 490일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대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90년의 기간이라고 이해한다.

단 9:24-27은 구약 예언의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여기 구절에 언급된 490년 기간에 죄가 다 제거되고 완전한 의가 드러나고 구약의 예언들이 다 성취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 490년 기간은 이 구절에서 세 개의 기간으로 구분되고 있다: 7이레 + 62이레 + 1이레 등. 첫 7이레 기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62이레 기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마지막 1이레 기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 . 이런 식으로 말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개 이 490년의 기간은 시작점은 약간 다르지만, 그 종착점은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주후 70년으로 (예루살렘 파멸 사건) 이해되어, 주님의 초림 때에 모두 성취된 예언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세대주의는 앞서 3대 구분된 기간 중 마지막 1이레 기간은 주님의 초림에서 멀리 건너뛰어 재림 직전의 7년에 (1이레)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즉 70이레 중 마지막 1이레 기간만 앞의 69이레 기간에서 떼어내어 재림 직전의 7년 기간이라고 분리시켜 버린다.

   

세대주의 신학에서 이 70이레 예언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로 이 예언에서 다음과 같은 세대주의 신학에만 독특한 사고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1)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계획은 서로 별개이며, 역사적으로 긴 공백기간을 사이에 둔다고 한다. 이 공백 기간은 (괄호 기간 = 신약시대)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이 연기되고, 교회를 위한 계획이 실행되는 기간이라 한다. 그런데 이 괄호기간은 구약 예언에 전혀 없다고 한다.

2) 재림 직전에 7년 기간의 대 환란기가 이스라엘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 7년 대환란 기간은 단 9:27이 묘사한다고 한다. 이 마지막 7년 대환란기 시작 때에 교회는 공중으로 들림받고 (휴거), 땅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불신자만 남는데, 그 때에 교회시대에 중단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시 재개되고 유대인에게 대 환란이 가해진다고 한다.

3) 이 7년 기간 초기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고 레위 제사장의 제사가 재개된다고 한다. 

4)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7년 기간의 언약을 이스라엘과 체결하나, 3년반 지나면 그 언약을 깨어 버리고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고 한다.   

 

이제 본문을 살펴 보자: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Seventy weeks have been decreed for your people and your holy city, to finish the transgression, to make an end of sin, to make atonement for iniquity, to bring in everlasting righteousness, to seal up vision and prophecy, and to anoint the most holy ‘place’ (v. 24). So you are to know and discern that from the issuing of a decree to restore and rebuild Jerusalem until Messiah the Prince there will be seven weeks and sixty-two weeks; it will be built again, with plaza and moat, even in times of distress (v. 25).

Then after the sixty-two weeks the Messiah will be cut off and have nothing, and the people of the prince who is to come will destroy the city and the sanctuary. And its end will come with a flood; even to the end there will be war; desolations are determined (v. 26).

And he will make a firm covenant with the many for one week, but in the middle of the week he will put a stop to sacrifice and grain offering; and on the wing of abominations will come one who makes desolate, even until a complete destruction, one that is decreed, is poured out on the one who makes desolate (v. 27)(NASB)

 

 

세대주의 해석

 

1. 단 9장의 70이레가 (70 주간들 seventy weeks) 도대체 무엇인가?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70이레는 70주간들, 곧 70 x 7 = 490일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대개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90년 기간으로 간주한다. 세대주의 학자들의 관심은 그렇지만, 이 490년 중에서 마지막 7년 곧 1이레 기간에 집중된다. 483년 기간은 주후 30년대 주님이 못 박히신 때까지이고, 그 다음부터 이 다니엘의 예언 시계가 멈추어 버린다고 한다. 즉 이 예언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 십자가 달리신 사건까지 해당되고, 그 다음 1이레 곧 7년 기간은 긴 괄호시대를 (교회, 이방인 시대) 거쳐 주님 재림 직전의 7년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렇게 마지막 1이레, 7년 기간을 재림 직전의 7년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단 9:27에 언급된 제사와 예물을 금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 보기 때문이다. 즉 단 9:27의 말씀,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가 모두 적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라 보는 것이다.

 

 

2.  언제 70이레 기간이 시작되는가?

단 9:25에 의하면 70 주간들의 기간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min-möcä´ däbär lehäšîb welibnôt yerûšälaim) 라고 하는데서 보듯,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말씀이 나간 때부터" 시작된다. 세대주의 학자들은 대개 이 기간의 시작점을 1) 주전 458-57년의 아닥사스다 왕 7년 (라 7:11-26), 아니면 2) 주전 445-44년 아닥사스다 왕 20년 (느 2:1-8)으로 잡지만 대개는 후자를 택한다. 그 이유는 우선, 이 명령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이 재건 명령이 난 때로부터 메시아의 오는 때까지 69주간들이 경과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25절). 다시 말해 483년 기간이 (173,880일) 재건 명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까지 기간이다. 만약 이 기간의 시작점을 주전 445년 니산월 1일로 (3월 14일) 잡고 173,880일을 계산하면 (윤년을 고려하여 여분의 한날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주후 32년 4월 6일에 이르게 된다. 이 날은 그리스도는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로 본다. 만약 주전 445년 대신 주전 444년을 시작점으로 잡으면, 69주간의 기간은 주후 33년 3월 30일까지 이른다. 이렇게 날짜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보기에, 많은 사람들은 세대주의 해석이 연대기상 정확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세대주의 해석은 두 개의 결정적인 사실들에 근거한다: 1) 주전 445-44년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발해진 유일한 시점이다; 2) 70이레 기간은 문자적으로 정확한 기간으로 재건 명령에서 메시아 도착 시간까지를 가리킨다. 만약 이 두 주장이 거짓되면 세대주의 해석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재건 명령이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의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지시한다고 해석된다면, 세대주의 해석은 무너지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예루살렘 재건 명령이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이 유대인 귀환령이라고 이해하는데, 이런 입장이 맞다면 세대주의 해석은 흔들리게 된다. 이것만 아니라, 만약 70이레 기간이 문자적으로 정확한 수치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상징적인 완성의 기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확정될 수 있다 해도, 세대주의 해석은 약화되고 말 것이다. 세대주의는 문자적인 해석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3.  70이레 기간의 목표 혹은 의도는 무엇인가?

다니엘의 70이레의 목표는 24절에 제시된 6가지 사항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죄가 제거되고 완전한 의가 드러나며 구약 예언들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는 70이레 기간이 시작점이 어디건 간에 그 최종 목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세대주의 학자들은 대부분 주장하길, 24절에 제시된 그 목표는 전부가 아니라면 그 일부가 초림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에, 혹은 천년왕국 끝날 때에 이루어지리라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저들은 70이레의 마지막 1이레 7년이 여전히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세대주의 70이레 도표]

 

 

4.  언제 정확하게 마지막 1이레 7년이 시작되는가?

세대주의 학자들은 말하길, 26절에 의하면 69이레 "후에" 그러나 70째 이레 "전에" 두 사건들이 일어나리라 본다. 다시 말해 69이레와 70째 이레 사이에 두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사건들은 1) 메시아의 끊어짐 (십자가), 2)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그 성전 파멸. 그렇다면 70번째 이레는 언제 시작하는가? 그것은 주님이 재림하여 24절에 언급된 그 6가지 의도를 완성되키는 때인 현 시대의 마지막 때라고 한다. 이 70번째 이레는 세대주의자들이 소위 7년 대환란기라 부르는데, 27절이 묘사한다고 본다.

 

 

 

5.  26절에 언급된 "왕"과 27절에 언급된 언약을 체결하는 자는 누구인가?

26절에 언급된 그 왕과 27절에 언급된 한 주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언약을 맺는 자는 적그리스도라 한다. 이 한 주간 혹은 7년 언약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짐승 제사를 재개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한다. 그 마지막 7년 중간인 3년 반 시점에, 적그리스도가 그 언약을 깨고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나 7년 환란기 끝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그를 멸하신다고 한다.

 

 

6.   어떤 근거에서 세대주의자들은 69번째 이레와 70번째 이레 사이에 긴 괄호 공백기간을 상정하는가?

세대주의 해석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항은 69이레와 마지막 70번째 이레 사이에 긴 공백기가 자리한다고 믿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 공백기간이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어떤 근거로 이런 긴 기간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는 것일까? 세대주의자 Alva McClain의 주장을 들어보자:

a) 만약 본문이 엄격하게 연대기적, 역사적 전후관계로 사건들을 묘사한다고 우리가 이해한다면, 공백기간이 암시된다. 우선 25절에서 69이레의 기간이 메시아의 나타남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나서 이 69이레 기간 이후에, 두 사건들이 일어난다: 메시아의 죽음과 그 성읍의 파멸이다. 끝으로 27절에서 그리고 26절에 언급된 사건들 다음에, 마지막 1이레 곧 70번째 이레 기간이 나타난다. 예언된 사건들 중 둘은 69이레와 70째 이레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에, 공백기간이 암시된다.  

b) 24절의 사건들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성취되지 않았고 그분이 나타난 이래 어느 역사의 시점에도 성취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성취될 70번째 이레는 미래의 기간을 가리킨다.

c) 예언에서 공백기간의 암시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에컨대, 사 61:1-2와 눅 4:16-21을 비교해 보면, 은혜의 기간과 심판의 때 사이에 긴 공백기간이 (신약시대) 함축되어 있다.

d) 예수님은 친히 다니엘의 70째 이레가 여전히 미래사라고 선언하셨다 (마 24:15이하).  

비록 공백설을 지탱하기 위한 여러 다른 근거들도 있지만, 이런 것들이 대개 중요한 이유들이다.

 

이런 세대주의 주장을 하나 하나 논박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비할 바 없이 더 적절한 해석을 제공하면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70이레 해석을 10개의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함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70이레 도표]

*70이레 시작점은 여기 도표와 약간 다를 수 있다 (아래 글에서는 시작점을 주전 586년으로 잡는다)

 

 

 

하나님의 마지막 희년(禧年)

(God's Final Jubilee) 

 

 

1.   단 9장의 역사적 문학적 문맥이 무엇인가?

단 9장의 첫 부분들은 다니엘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70년 추방 기간을 (렘 25:1-11) 염두에 두고, 그 기간이 언제나 끝날지에 관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자 기도를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9:1-2에 의하면, 그가 기도한 때는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 왕 원년이었다 (주전 539-38년). 만약 70년 포로 기간의 시작이 주전 605년부터라면 (렘 25:1, 9;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포로로 끌려갔던 해), 분명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기간은 거의 끝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70년 중에서 66년이 지났다. 이 때문에 다니엘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단 9:16, 18, 20). 분명, 단 9:20-27에 묘사된 가브리엘 천사가 가져온 응답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단 9:20-23 참조). 포이트레스는 (Vern Poythress) 이 점과 연관하여 말하길:

이런 상황의 논리적 귀결은 70이레 기간의 시작점은 기본적으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 추방 기간의 끝과 일치한다. 즉 70년 70이레 시작점은 주전 538년이나 그 직후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주전 444년을 시작점으로 잡는 것은 실제로 다니엘의 기도 응답에 의미가 없다. 그렇게 늦추면 다니엘의 긴급한 기도를 만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전 444년을 시작점으로 잡을 경우, 그것은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에 근거한 다니엘의 기도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의 결론과 다니엘의 70이레 예언의 시작 사이의 이런 연관성은 고레스 칙령의 성격과 의도를 고려할 때 아주 결정적인 것이 된다.

 

 

2.    단 9:25의 재건 명령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70이레 기간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은 예언의 성취로 바벨론이 함락된 후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칙령을 공포한다: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 1:2-3; 대하 36:23).

 

대하 36:21-22에서 고레스의 칙령은 예레미야의 예언의 종결과 이스라엘 회복의 시작을 표시하였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2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23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는 직접으로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에 대한 다니엘의 관심과 연결된다. 다니엘은 그의 에언에 근거하여 기도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단 9:2). 

단 9:25에서 70주간을 시작하는 그 칙령은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예루살렘 재건과 연관된 칙령은 이사야가 바로 고레스가 하리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사항에 관한 것이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 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Isa. 44:28).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Isa. 45:13).

 

요약하자면, 주전 605년에 예리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가 70년을 지낼 것이며,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파괴당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또한 70년 기간이 끝나면 바벨론이 망하리라고도 예언하였다. 따라서 다니엘은 고레스 원년에,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됨을 느끼면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사자 가브리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70이레 예언을 전해 준다. 그 70이레의 시작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라는 칙령이 발해지는 그 때부터 시작될 것이다. 주전 538년, 고레스는 그런 칙령을 공포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점은 이것이다. 즉, 주전 539-538년에 발해진 고레스의 칙령은 예레미야의 70년 포로 예언의 종결이고 (대하 36:21-23), 다니엘의 회복에 관한 70이레 예언의 시작이다 (단 9:23).

 

 

3.     고레스의 칙령은 예루살렘 성이나 그 성전 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하길, 주전 538년의 고레스의 칙령은 예루살렘 성읍의 재건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직 성전만 언급하기 때문에 70이레 예언의 시작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논박하기위해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우선, 포이트레스가 지적하듯,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이 회복과 예루살렘 성의 회복, 땅 자체의 회복은 긴밀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그런 상황에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성읍은 이스라엘 땅 전체에 약동치는 심장이었고, 이스라엘 전체의 안전에 직결되었다 (렘 7:4).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땅의 페허화를 에언하였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멸을 예언했었다. 특히 예레미야의 70년 페허 예언은  백성이 땅으로 회복될 것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렘 29:10,14). 이는 분명 예루살렘 성읍이나 성전 회복을 자동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성읍, 단 9:2,16,18; 성전, 단 9:17).

 

둘째로, 라 1:2-4, 대하 36:23에서 언급된 고레스 칙령의 초점은 실로 성전이지만, 이런 구절들은 그 칙령의 전체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에스라 6:3-5에 제시된 그 칙령의 다른 묘사는 라 1:2-4에 언급되지 아니한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추정은 확실해진다:

라 6:3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전 곧 제사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전의 고는 육십 규빗으로, 광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전 금, 은 기명을 돌려 보내어 예루살렘 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안 각기 본처에 둘지니라

요세푸스는 고레스 칙령을 기술하면서, 예루살렘 성읍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논쟁의 필요상, 요세푸스가 잘못되었고, 고레스 칙령이 예루살렘 성읍 재건에 관한 분명한 언급을 담지않았었다고 하기로 하자. 그럴 경우, 포이트레스는 지적하길, 예루살렘 성읍의 재건은

그럼에도 성전 재건에 동반되는 것으로 전제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예루살렘 성읍에는 성전 재건을 위한 일군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전은 그 성읍에 거하면서 성전에서 섬길 제사장들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성전 제사를 위해 제사장들이 여하간 상주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단 9:2에 의하면, 다니엘은 예루살렘 성읍의 황폐화가 70년 지속되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성전만 아니라 성읍의 회복도, 70년 포로 기간이 끝나면, 같이 시작되어야 했다. 성읍의 회복은 느헤미야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듯) 예레미야 예언이 유효성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넷째로, 사 44:28, 46:13 등은 성읍의 재건도 언급한다는 것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다섯번째, 여러 본문들은 예루살렘은 적어도 느헤미야 시대 이전에 부분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 1:4, 9; 느 3:20, 21, 23, 24, 25, 28, 29, 7:3; 라 5:1, 6:9, 4:6). 예루살렘 성읍 회복이 그 때에는 완성되지 않았었단느 사실은 그 회복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었다는 말은 못될 것이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단 9:25하반절과 "거리와 해자"에 (plaza, moat) 대한 언급은 무엇인가? 이는 문제를 야기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칙령 자체와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실들 사이를 구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칙령은 70이레의 기간을 시작하게 만든 말로 된 행동 (verbal act) 이었다. 단 9:25하반절은 단지 말이 아닌,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실들을 묘사한다.

 

이런 증거들을 고려해 볼 때, 70이레의 시작점은 (the terminus a quo) 단 9:25의 성취로서 따라서 세대주의 해석을 지탱해 주는 주요 기둥 하나가 무너진 셈이다.

 

 

4.   70주간의 목표 혹은 의도는 무엇인가?

단 9:24은 70이레 예언의 목표가 여섯 가지임을 보여준다:

1) 허물이 마치며

2) 죄가 끝나며 (죄가 봉함되다)

3) 죄악이 영속되며

4)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5)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6)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3)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1)과 2)의 경우에 논란이 되는 것은 그것들이 언제 성취되느냐? 하는 것이다. 1)과 2)의 진술은 우리 주님께서 이미 초림 때에 이루신 바를 기술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재림 때에 (특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루실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원론적 구분은 잘못된 것이라 여겨진다. 예수께서 초림 때에 성취하신 바는 재림 때에 최종적으로 완성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4)번 항목 "영원한 의를 드러내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의롭게 된 상태를 가리키거나 (롬 3:21-22) 아니면 신천신지의 의를 지시할 수 있다 (벧후 3:13). 그렇지만 좀 더 숙고해 본다면, 이것도 역시 잘못된 이원론적 구분법이다. 성경의 증거는 피조물의 구속과 우주의 구속 사이의 상관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롬 8:18-25; 벧후 3:13-14). 사람과 자연계 모두의 화해는 이미 일어났지만 (골 Col. 1:19-20), 그럼에도 둘 모두의 화해는 여전히 이 시대 마지막 때에 최종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 8:21).

 

5)번 항목 "이상과 예언이 응하다"는 이상과 예언을 봉함하다로도 이해되는데, 이 말은 선지자들이 받아 선포했던 그 환상들로 특징지어지던 준비와 모형의 시대가, 그 목적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봉함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시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였고, 메시아의 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어떤 사람이 주장하길, 여기 의도된 바는 모든 예언 말씀의 최종 완성이 재림 때에 일어나리라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70째 이레가 따라서 미래에 놓인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만약 단 9장의 70째 이레가 현 시대라면 (우리가 주장하는대로), 세대주의 도식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여기 언급된 항목들의 최종 완성을 재림 때에 일어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번 항목 "가장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세례 (기름 부으심)을 지시한다 (행 10;38, 눅 4:34, 41). 구약에 성전이 기름부음 받는다는 증거는 없다. 한 군데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모세가 광야 성막에 기름을 바르는 레위 8:10-11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전은 아니다.

 

 

5.    단 9:26에 언급된 '왕'은 누구인가?

세대주의자들은 이 "왕"이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 주장한다. 그렇지만, 26절에서 그 성읍과 (예루살렘) 성전이 오는 그 왕의 군대에 (한, 백성) 의해 파괴되리라고 말씀한다. 세대주의자들은 이것이 주후 70년의 로마군을 지시한다고 바로 지적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이 군대가 속하는 그 왕은 로마 장군 디도가 아니라, 재생 로마 제국에서 그 군대가 사라진지 2천년 이상 지나서 일어날 왕이라 한다. E. J. Young은 이렇게 응수한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로마군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군대는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한 왕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한 왕의 군대'라는 속격 관게는 그 군대와 그 왕은 동시대인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군대는 그 왕에게 속하고, 그 군대는 그의 군대이다. 그런데 어떻게 주후 70년의 로마군이 아직도 나타나지 아니한 한 왕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하는 그 군대는 앞으로 나타날 왕의 군대가 아니라, 자기 당대의 왕의 군대였다. 이 왕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과거 디도 장군의 군대를 회상하면서 그들은 나의 군대였다고 말할 것인가? 현대사에서 예증해 본다면, 같은 이탈리아인이라 해도 뭇솔리니는 저 먼 조상인 디도 장군의 군대를 자신의 군대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어 자체가 이런 해석을 배제한다.

 

요약하자면, 장차 올 왕은 (다니엘의 견지에서 미래) 로마의 디도 장군으로 그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읍과 그 성전을 주후 70년에 멸하였다.

 

 

6.    26절과 27절은 전후관계로 연결되는가? 아니면 그것들은 동일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병행 묘사들인가?   

세대주의 해석의 열쇠는 25절이 69번째 이레로 끝나고, 27절은 70째 이레를 시작하므로, 26절은 이 두 사건 사이의 공백에서 일어하는 사건들을 기술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백기간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2천년 가까이 되고 있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a. 라론델에 (LaRondelle) 의하면 다니엘이 70이레가 이스라엘을 위에 작정되었고, 메시아가 첫 69이레 기간이 지난 후에 끊어지리라 선언했을 때, 자연스런 가정은 메시아의 죽음이 마지막 주간 동안 언젠가에 일어나리라고 보는 것이다. 페인은 (J. Barton Payne) 결론짓길, "메시아의 죽음이 70째 이레에 일어난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가정은 무엇일까?”

b.  세대주의자들은 69째 이레와 70째 이레 사이의 공백기간은, 26절과 27절이 일어날 사건들을 현대적 작가가 하듯, 엄밀하게 연대기 순서로 기술한다고 믿는 신념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자세히 고찰해 본다면, 26, 27절은 구약 히브리 시가서에 특징적인 그 병행법 문체로 구성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즉 27절은 26절의 사고를 반복하면서 더 한층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26절 < 27절; A < B 공식). 69번째 이레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26절) 70째 이레에 (27절) 일어난다. 메시아의 죽음과 예루살렘의 파멸이 26-27절에 묘사된 두 주요 사건들이다. 26하반절과 27하반절 사이의 문자적 상응을 특히 주목해 보라.

26하반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하반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7.   세대주의자들은 26절과 27절 사이에 공백기간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사실인가? 

a.   방금 우리는 26절과 27절 사이에 공백기간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26절과 27절은 전후 관계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기술하는 것이 (A B C D) 아니라, 같은 사건들을 병행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A B A B).      b.   24절에 언급된 목표들이 주님의 재림 때에 성취된다고 인정한다 해도, 69째 이레와 70째 이레 사이의 공백기간은 필요치 않다. 70째 이레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해, 70째 이레의 후반부 3년 반) 현 시대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면, 70째 이레는 공백기간이 없이 바로 69째 이레를 뒤따른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예수께서 초림 때에 성취하신 바는 그가 재림 때에 최종 완성시키실 것이다.

c.   사 61:1-2상반절과 61:2하반절 사이의 공백기간을, 세대주의자들은 예언 내용에서의 공백기간이 존재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지적한다. 그런 주장은 아무런 효력도 없다. 비록 우리 주님이 눅 4장에서 사 61:1-2 전체를 인용하시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날과 진노의 날은 우리 주님의 사역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쉽게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 3:10-12, 23:37이하 참조.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d.   우리 주님은 마 24장/ 막 13장에서 인류 종말 사건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70째 이레는 완전히 미래에 놓인다고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마 24장이나 막 13장을 자세히 살펴 본다면, 주님이 가리킨 그 멸망의 가증한 것이나 큰 환란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멸 사건과 연관된다.

e.   예레미야의 70년 기간 구조에 다니엘의 70이레 구조가 근거하는데, 예레미야의 70주간에는 공백기란 개념 자체가 없다.

f.     다니엘의 70이레 기간에서, 7이레와 62이레 사이에 공백기간이 없다 (25절). 따라서 69이레와 (7 + 62이레) 70째 이레 사이에도 공백을 가정할 이유가 없다.  

g.    예언이 결정적으로 시간을 구체화시키는 다른 경우들을 점검한 후에 (창 15:12; 45:6; 민 14:34), 필립 마우로는 (Philip Mauro) 결론 짓길:

그러므로 어떤 결정적 시간이나 공간의 분량이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단위들로 구체화될 경우, 어떤 특정한 사건이 그 기간이나 분량 안에서 일어나거나 발견되리라고 할 경우, 그 시간이나 공간의 기간이나 분량을 구성하는 단위들은 지속적으로, 연속적으로 흘러간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에는 예외가 없으며 절대적인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We are bold, therefore, to lay it down as an absolute rule, admitting of no exceptions, that when a definite measure of time or space is specified by the number of units composing it, within which a certain event is to happen or a certain thing is to be found, the units of time or space which make up that measure are to be understood as running continuously and successively). 70년은 중간에 어떤 공백이 없는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70년 기간을 가리킨다. 70이레 혹은 70주간들이라 하면, 70개의 주간들이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지속되는 기간을 가리킨다. 70마일이라 하면, 중간에 끊김이 없이 연속적으로 지속적으로 70마일의 길이를 의미한다.

h.    논쟁을 위해서 490년 = 490 시간 단위들이라고 가정해 보자. 70 주간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그리고 그 70주간들을 7주간, 62주간, 1주간 등으로 삼대분 하는 이 예언이 마지막 두 주간들 사이에 70주간보다 더 긴 기간의 공백을 가정해야 바로 해석되는 예언이라면, 이 예언이 과연 신빙성이 있을 것인가? 만약 69주간들이 (이레들) 정확하게 끊김이나 공백이 없는 483년의 연속 기간이라면, 그리고 만약 1주간이 (1이레) 정확하게 7년 연속 기간이라면 (논쟁을 위해 그렇게 가정해 보자), 이 둘 사이에 2000년이나 가까운 긴 공백의 기간이 개입되어야 해석이 가능한 예언이라면, 그것이 신빙성이 있을 것인가?

i.    이 공백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는 세대주의 해석법의 틀에 맞추기 위해서 본문에 없는 외적 요소를 도입한 결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약 세대주의 신학 체계에서 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각기 다른 시대에 다루신다고 하는 이상한 사고가 없었다면, 단 9장의 70이레 예언에서 그렇게 69째 이레와 70째 이레 사이에 긴 공백 기간을 설정할 이유가 있었을까?

 

 

8.   단 9:27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26절과 27절 사이의 병행 관계에 비추어, 26상반절의 메시아는 다름 아닌 27절 상반절의 언약 체결자와 (마 26:27-28, 막 14:24, 눅 22:20, 고전 11:25, 히 8-10장 참조) 동일 인물인데 그는 다름 아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두 절들 사이의 병행 관계에 비추어 볼 때, 26하반절의 왕과 27하반절의 황폐케 하는 자는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 동일 인물이다. 

 

메시아가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유대교의 제사 제도를 폐지시킨다는 의미이다 (히 7:11-12, 27, 9:26-28, 10:9; 마 27:51; 막 15:38). 아니면 이 말씀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주후 70년에 파괴당함으로 유대교 제사가 그쳐진 사실을 예언한다 (마 23:37-24:2).

 

 

9.    70이레 기간은 연대기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상징적으로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70이레들은 (70주간들),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이 정확하게 70년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연대기적으로 490년의 기간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바벨론 제국이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에 의해 무너짐으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 기간이 끝에 이르렀다. 예레미야의 70년 기간의 시작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제안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해를 시작점으로 잡아도 정확하게 70년의 기간을 맞추기 곤란하다:

612년의 앗시리아의 니느웨 함락에서 주전 539년 바벨론 멸망까지 = 73년

느부갓네살의 즉위한 해 혹은 갈그미스 전투가 일어난 해인 주전 605년에서 주전 539년까지 = 66년

주전 597년에 일어난 바벨론에로의 포로 추방에서 주전 539년까지 = 58년

주전 586년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에서 주전 539년까지 = 47년

혹은 성전이 파괴된 주전 586년에서 재건된 516년까지 = 70년

 

이 마지막 제안은 정확하게 70년이 맞아 떨어지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 기간이 70년이라 했지만, 성전이 파괴되고 재건되는 기간이 70년이라고 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주전 539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고 제2 성전이 재건된 516년에는 이미 고국에서 20년 이상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제안은 고려 대상에서 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은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70년의 기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7과 10이라는 수자의 상징성에 ("완전"을 상징) 강조점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70년 기간이 전혀 70년과 어울리지 않게 오랜 기간이라거나 70년에 턱없이 부족한 짧은 기간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70년에 근사한 기간이지만, 70년에 딱 맞아 떨어지는 정확한 기간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근사한 수치로 말하는 것은 렘 27:7, 겔 4:6-8, 창 15:13, 16 (출 12:40, 41과 비교)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70년 기간은 특정한 황폐화의 기간으로, 그 이후에 신이 방문하는 그런 기간을 가리킨다. 볼드윈은 (Baldwin) 지적하길, 70년 기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때를 지시하는 정해진 용어였다 (슥 1:12). 데이빗 케네디는 (David Kennedy) 비록 세대주의자이지만,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시 90:10, 사 23:15을 70이란 수치가 심판의 전체성을 지시하는 수자를 가리키는 예들을 제시한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결론짓길:

단 9장은 바벨론의 패권이 이제 끝났다는 (주전 539년) 시간 표시와 함께 시작된다. 렘 25:11-12, 29:10은 70년이 바벨론에 대한 심판으로 끝나리라고 강조하였다. 만약 예레미야의 시작점이 (terminus a quo) 주전 605년이었다면, 주전 539년은 (다니엘이 기도한 시점) 66년이 경과한 셈이다. 다니엘은 70년이 다 차기까지 운명론에 갇힌 자처럼 체념하고 그냥 기다리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는 예레미야의 회복 약속이 지금 성취되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 . 66년은 70년에 근사한 수치이지만, 다니엘은 70년 기간의 정확한 기간보다는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의 내용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인다. 어쩌면 우리도 다니엘의 70이레 예언의 수적인 정확함 보다 그 예언이 언급하는 중요한 사건들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지 모른다. . . 만약 예레미야의 70년 기간이 66년이나 48년으로 드러났다하면, 다니엘의 70이레 (주간들) 예언이 490년이 아닌 다른 기간으로 드러났다고 놀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류폴드는 (Leupold) 창조의 한 주간 7일은 항상 수자 상징법에서 신적 사역의 표지가 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70이란 수치는 7 x 10인데, 이는 대략적인 수치로, 완전, 완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7 x 7 x 10의 수치는 최고로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에 이르는 기간을 상징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만약 70주간들 (70이레들) 혹은 490년이 연대기적인 정확한 수치를 지닌 기간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면, 그 신학적 의의는 무엇일까? 490년의 상징적, 혹은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왜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70주간들 (70이레들, 혹은 490년) 기간의 관점에서 말을 했을까? 예컨대, 하나님은 가브리엘을 통해서 40주간들이나 (40 x 7 = 320년) 50주간들을 (50 x 7 =350년) 말씀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우리는 단 9장의 언약적 성격을 주목해야 한다. 메레딧 클라인은 (Meredith Kline) 아주 통찰력 있는 사고를 제시한다: 

다니엘의 기도와 그에 대한 응답 예언의 공통적 초점은 단 9장 전체에 스며있는 주제이기도 한데, 그것은 야웨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사고이다. 특히 하나님이 신실함을 통한 언약 제재들 (상벌규정) 시행 사고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단 9장에서만 다니엘서 전체에서 기이하게도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인 야웨가 등장한다; 단 9:2, 4, 10, 13, 14, 20). 이 중심 주제는 다니엘의 기도 첫 마디에서부터 나타난다. 다니엘은 자기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하였는데, 그분을 묘사할 때, 언약을 지키시는 주라고 칭한다 (4절). 바로 그 사고에 근거하여 다니엘이 간구할 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란 사고는 그 기도의 근거일 뿐 아니라, 그의 간구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의 상벌 규정에서 처벌을 시행하셨듯, 언약이 보장하는 그 긍휼을 시행하시라는 것이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가브리엘의 예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그 추방 이후에 회복의 약속을 (레 26:42이하, 신 30;3이하) 이루심으로 언약을 지키시는 자라는 점을 곧장 입증하시리라는 것이었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기 말로 다시 발했던 그 예언 (렘 29:10), 곧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는 말씀을 따라 자신이 언약을 지키는 이심을 입증할 것이었다. 그 언약의 장래를 계시하면서 가브리엘의 응답은 그 기도의 간구가 바라본 그 지평 너머로 비상하기 시작한다. 그 응답은 단지 유대인 이스라엘의 고토로의 회복 정도가 아니라,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그 언약 질서를 최종 완성에 이르도록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다니엘의 기도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그 기도가 "감사" 기도 (토다) 장르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감사 기도에서 간구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자기 백성을 향한 그분의 행동에서 드러났다는 점을 고백하고, 언약을 깨뜨린 자기 백성의 죄를 고백하며, 언약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길 간구한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가브리엘의 응답은 언약적 구조를 가질 것이 기대된다 (레 26:40-45). 이것이 사실 정확하게 다니엘의 기도에 주어진 응답 구조이다. 응답 예언이 주조된 연대기적 주형틀은 다름 아닌 안식년/ 안식일/ 희년이란 주형틀인 것이다 (sabbatical).

 

이스라엘 사람 자신들만 아니라 (안식일), 땅도 안식해야 (7년 마다 안식년) 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가브리엘이 70주간들을 (70이레들) 말할 때, 70주간들이 이스라엘을 위해 작정되었다고 할 때, 그는 7년 기간, 땅의 안식년 기간인 7년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레 25:2-7). 클라인은 (Kline) 안식 사고 자체는 백성을 위해서나 땅을 위해서나, 언약 질서의 최종 완성의 예언적 상징으로서 기능하였다고 지적한다. 모세 언약에서 자세하게 규정된대로, 안식은 구원의 해방, 회복, 안식의 메시아 시대의 표지로 기능하였다 (히 4:1-11 참조).

그렇다면, 70 주간들이란 구조틀이 기도에 대한 응답 예언의 틀로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단 9:24에 언급된 그 여섯 가지 목표가 성취될 시작과 끝의 연대기적 경계들을 확정하기 위함이었다 라기보다, 그런 구조틀로 응답을 주신 것은 무엇보다, 그 구조틀이 안식과 연관된 틀이며, 다음으로, 안식 사고와 (7이란 수자)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브리엘이 7로된 70개의 단위들의 기간 곧 490년의 기간을 말했다는 사실을 대할 때, 방금 숙고한 그런 신학적 의의는 분명하게 확인된다. 왜 하나님은 30이나 50 혹은 80 주간들을 말씀하지 않고 70주간들 (70이레들)을 말씀하였겠는가? 그 이유는 레 25:8-55와 희년의 준수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레 25:8-12을 주목해 보자:

레 25: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희년을 (禧年상세하게 점검해 본다면, 희년을 두신 것은 1) 모든 소유지를 원래 모세가 (여호수아가) 분배한 그 원래 주인이나 가족에게 회복시키고 2) 모든 유대인 노예들을 해방시키며, 3) 빚을 면제하고, 4) 땅을 기경하지 않고 묵혀 두어 안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희년은 사회적 공의와 평등, 자유, 용서, 석방, 회복이 일어나는 해였다. 희년은 새로운 시작, 도덕적, 영적, 민족적 갱신과 회복을 알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희년이 궁극적 구원의 전조, 상징이 되고,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이루실 그 회복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실로, 메시아께서 가져올 그 종말, 구원의 마지막 날은 모세가 선포한 그 희년의 구조틀로 제시되고 묘사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490년 혹은 70주간들의 기간이 이스라엘을 위해 작정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심대한 신학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10개의 희년 기간들, 곧 희년의 궁극적 원형을 지시하는 기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구원과 회복의 완성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희년은 사 61:1-2에 이렇게 묘사된다: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우리 주님은 눅 4:16-21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에게서 자기 사역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 하셨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는 희년이 갖는 예언적, 모형적 의의를 지니는 희년의 원형이자 성취자이신 주님께서 오심으로 와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라벗 슬로안은 (Robert Sloan) 설명하길:

희년/ 안식년에 관한 모세법 규정은 사 61장의 저자나 사 61장의 인용을 통해 누가 혹은 예수님이나 모두 예수님의 오심과 그의 활동으로 동이 튼 하나님의 종말의 시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단 9:24에 제시된 70주간들 예언의 의도는 그 궁극적 구원, 그 해방, 구속, 회복 곧 희년이 상징적 표지였던 바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희년이 왔다고 선언하실 때, 사실상 다니엘의 70주간/ 이레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 이전의 모든 희년들은 그것의 전조적 표지들에 불과했던, 그 종말적 희년의 새 시대는 이제 예수님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통해 동이 튼 것이다. 70이레 예언의 목표는 하나님의 최종 완성의 희년 구원이다 (THE GOAL OF THE 70 WEEKS PROPHECY IS THE CONSUMMATE JUBILARY SALVATION OF GOD). 그 때문에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희년의 구조틀로 제시된 것이다: 10개의 희년들 = 490년의 기간에 하나님의 희년 역사가 완성된다! 그러므로 70이레 기간의 의미는 연대기적이라기보다 신학적이다. 70이레 기간은 정확한 구속 역사의 연대기적 기간을 확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 역사의 마지막 희년을 완성시키리라는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10번의 희년 구조틀은 (즉 70이레들 혹은 490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상징이다. 그 기간의 종점에 영원하고 완전한 희년이 나타날 것이다: 신천신지 (계 21-22).

 

 

10.    그렇다면, 우리는 구속 역사의 구조와 흐름에 대한 다니엘 예언의 기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니엘의 70째 이레의 전반 기간은 에수님의 세례 때부터 주후 70년까지 이른다.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파멸이 그 7년의 중간이고, 나머지 후반 기간은 신약 시대 전체에 해당된다. 클라인은 (M. Kline)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가브리엘의 예언의 성취를 우리가 위치한 유리한 고지에서 바라볼 때, 70째 이레의 후반 기간은 새 언약 공동체 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대는 구 언약 질서에서 해방되고, 구 언약 시대의 마지막 날들과 새 언약 시대의 시작 날들은 한 세대나 서로 중복된다. 신약 계시록의 영상에서, 그 마지막 반 주간은 열방들의 광야에 처한 교회 시대인데, 계 12:14에서 한 때와 두때, 반때로 표현되고 있다. 70이레 기간은 마지막 희년으로 끝나는 10번의 희년 기간들이기 때문에, 70째 이레는 천사가 세상의 구속과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런 해방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임했던 주의 은혜의 해가 완성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Meredith G. Kline,  “The Covenant of the Seventieth Week,” The Law and the Prophets.  Ed.  John H. Skilton.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4.  Pp. 452-469.

 

출처 : 주님과 얼굴 맞댄 만남
글쓴이 : 중일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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