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나라의 상황을 생각하며 글을 적는다.
먼저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글임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로서의 양심과 이 시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기록한다.
나라가 정치, 경제, 안보, 외교 등에서 총체적으로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면서, 나는 내가 목회하고 있는 개교회의 목회 상황에서, 나라의 상황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 생기고 있는 많은 문제의 원인을 내가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교계의 수상한 기류는, 좌파 기독교인들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들이 반기독교적인 지지자들을 지지하는 바람에, 나라 전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내부에서, 기독교인인 것처럼 생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잃어버리고,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반기독교적이며, 반성경적으로 교회를 오도해 왔다. 그것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머리카락이 짤린 삼손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는 기본적인 성향이 보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위와 자연에 대한 인정은 보수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라면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것이 정상적이다.
물론 진보적인 요소, 아니 개혁적인 요소라고 해야겠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변화하는 많은 가치와 문화를 성경으로 개혁해야 하기 때문에, 개혁적인 요소가 있고, 또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적인 요소는 반드시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권위를 무시하고, 동성애를 조장하는 정치인들을 지지하고, 심지어는 자신 조차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는 것을 본다. 우리 사회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진보적인 경향은 진보가 아니라 기존 권위에 대한 반역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을 그들은 진보란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문제는 신앙이었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한 것이, 인터넷이었다.
물론 그 전부터 개교회의 사정 상, 인터넷 상으로 설교를 블로그로 올리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전혀 알지 못했고, 하지도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를 찾는 중에, 내 생각을 쉽게 말할 수 있는 도구인, 간단한 댓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네이버의 개신교 부문의 지식인에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목회자인 덕에 교회나 신앙적인 부분에는 쉽게 답을 달 수가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이나 이단들의 글들은 신고도 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해 보니 대한민국이 얼마나 엉망이 되어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음에는 유튜브로 갔다. 거기는 정말 신세계였다. 수많은 자료가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곧 올바른 교리를 강론하기 시작했다. 짧은 동영상으로 올리려고 목적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올바른 교리의 부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참고로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목사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많은 좌파들의 사상, 주장, 논리들을 겪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결론은 잘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생각이 나는대로 적었기 때문에 계속 추가될 것으로 예상한다.
좌파 기독교인들의 특징
1.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른다.
좌파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감성적인 경우가 많다. 사랑을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행위를 이야기할 때도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자주 인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에 동조하기가 쉽다. 또한 세상에서 배운 원리들을 마치 성경의 원리처럼 이야기하기 때문에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그들의 이야기에 넘어간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너무도 당연하게도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터넷을 하면서 겪은 임상학적인 이야기다.
그들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시대나 문화, 그리고 개인의 합리적인-철학적이고, 인본적인- 추론을 의지한다. 대개의 경우는 자신이 만들어낸 예수, 혹은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고 말한다. 이것은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고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이야기를 성경과 비교해보면, 성경에 없는 추측성 이야기나 자신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이야기들 그리고 진보란 이름을 가진 무신론자들, 혹은 반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답습한다.
또 어떤 대형교회 목회자는 정치적인 좌편향을 감추고, 보수 우파 교인들에게 한 말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말라는 성경을 말씀을 정치적인 편향에 빗대어 인용했다고 한다.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지키라고 하신 말씀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을 자신의 생각이나 잣대로, 혹은 상황에 따라서 바꾸지 말고 그대로 지키라는 말씀이다. 즉, 그 목사처럼 그렇게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말씀인데, 그 말씀을 하나님과 정면으로 배치되어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 목사의 이야기가 옳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 교수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형교회 목회자는 그만큼 바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들이 진지하고, 조용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거기다가 조금의 사업수완이 있거나 정치적인 수완이 있다면, 그들의 수준은, 그들이 처음 신학을 하던 전도사 시절을 벗어나기 힘들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성경을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신학교 교수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신학교 교수들은 한 분야를 파고든다. 그래서인지, 다른 분야는 무지한 것이 보통이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책인데, 한 분야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 신학교 교수 중에서 그나마 성경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조직신학 교수들일 것이다. 그들은 과목의 특성상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경할 만한 교수들도 대부분이 조직신학 교수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자신의 전문 분야는 해박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목회자들보다 부족하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신학교 교수이면 큰 권위가 있고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오해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에 권위를 부여하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하거나 경악스러울 정도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적당한 규모의 교회의 목회자들, 즉 사색할 시간들이 있고, 성경을 연구할 시간들이 있는 목회자들은 평생을 성경 하나만을 파고든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말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의 사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목회자들은 대부분 중소교회의 목회자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목회자들의 주님에 대한 충성과 헌신과도 비례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라 세상의 지식이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계의 현실은 이러한 성경을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개선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외관을 가지고 진실을 안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든 일이다.
보통의 대형 교단의 경우, 4년의 대학과정과 3년의 신학대학원 과정, 그리고 일련의 총회 인준 과정을 거치면 목사가 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인가는 관련이 없다. 그저 정해진 과정만 거치면 목사가 될 수 있다. 이는 우리 교단의 경우인데, 사실 이것도 한국에서 꽤나 엄격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군소교단의 경우 이러한 것보다 열악한 교육 환경을 거쳐 목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과정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머릿 속으로만 알고 지적인 교리로만 하나님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교회에 대한 관점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니 하나님을 만나거나 동행의 경험이 없는 목회자들은 세상의 영향을 받아, 목회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또 그런 만큼 그들이 세상의 문화에 대해 가지는 관점이나 태도도 하나님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대개의 목회자들은 피드백을 가질 기회가 없다. 믿음이 있는 목회자이든, 없는 목회자이든 자신이 제일인 줄 알고 목회를 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일상일 수 있다. 물론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목회자들은 늘 낮아지고, 하나님께 경고를 받겠지만, 그렇지 못한 목회자들은 자신의 주장에서 물러서는 경우가 드물게 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개선될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 목회자가 좌파가 되는 치명적인 이유다-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사회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특히 공산좌파들과 이슬람, 이단들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가지고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대개의 좌파 계열의 목회자들은, 대형 교회에 대한 비난, 교회의 세습, 예수님의 성품, 기독교 윤리, 성 윤리 , 교회의 정치 참여 등의 다양한 방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그러나 좌파를 지향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도 개인 속에 내재되어 있거나 사회 속에 내재 되어 있는 하나님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관점과 별반 다름없이 말한다.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가 성경의 관점과 일치한다면 다행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성경을 기반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없다.
여담이지만, 인터넷 상에서, 그들이 성경을 얼마나 읽었냐고 물어보면 성경을 50독이라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물론 나이가 든 사람이 일 년에 일독 정도 해서 50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일 년에 일독해서 어떻게 성경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는가?(심지어 목회자 중에 일년에 일독한다고 자랑하는 자도 있었다. 창피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랑한 이는 좌파에서도 유명한 목회자다.)
아마도 이들은 목회를 하기 위해 성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을 읽는 목적이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세상 때문에 성경을 읽어내리는 것 같다.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에 젊은 목회자들의 경향도 그러한 것 같다. 지금은 과거의 목회자들보다 많은 정보를 접하고, 공부를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정보의 발달도 한 몫을 한다. 그래서인지 현대의 목회자들은 과거보다 더 지적으로-세상의 관점에서- 되어가는 것 같다.
일례로 원어에 대한 부분도 과거보다 훨씬 정확하고, 좋은 자료를 쉽고, 간단하게 접할 수 있다. 과거의 목회자들이 두꺼운 주석과 원어 사전과 원어 성경을 가지고 씨름을 해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자료들은 젊은 목회자들은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원어 몇 자를 더 배운다고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거나 성령의 역사를 더 불러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 자체로 대화하는 사람들이니까 더 좋은 크리스챤이 되었을 것이고, 유대 랍비가 가장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원어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바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라는 것과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목을 맸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성경을 알아가는데 우리의 노력도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다.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성경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그들만이 성경을 잘 알 수 있다.
목사들은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해박해야 한다. 목사들의 중요한 존재 목적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함이지, 세상에서 칭찬듣는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 목사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때로 기도로, 때로 묵상으로, 때로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러나 좌파 계열의 목회자들은 성경을 알기 위해 간절한 기도나 죽음을 각오한 금식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신본주의에 대한 생각이나 순종이 없다.
이러한 결과는, 성경을 모르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성경은,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며,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모든 규칙과 원리를 정하신다고 기록한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원리대로 돌아가며, 또 그래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독윤리, 세상의 여론, 권세, 또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이들과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노라면 이들이 믿고 있는 예수가 성경의 예수님인지, 부처인지가 혼동이 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마냥 베풀고 나누어주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진리와 의로움에 기반한다. 이것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다. 사랑은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인데도 말이다.
사랑이라는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좌파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와 생각을 주장하는데만 관심이 있다.
이들은 현대판 바리새인이다. 오직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주의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의 입술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저주하신 일을 이야기를 하면 깜짝 놀랜다. 그리고 태도가 적대적으로 변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진리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태도가 달라지는, 상대주의자들이다.
3. 지혜가 없다.
이것 역시 1번의 원인에 맞물려 있다. 모든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지혜의 근본이기도 하고, 완전한 지혜이기도 하다. 신본주의적인 신앙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니, 당연히 지혜가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의 생각을 보고, 글로도 읽고, 동영상으로도 보았지만, 그 속에서 성경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말들도 설득력이 있고 매끄럽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성경은 편협하고 편향된 것이라 진리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많은 좌파 기독교인들이 전광훈목사를 비난하고, 그가 이끄는 집회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 집회에 참여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사람은 드문 것같다. 참여해보지도 않고. 들어보지도 않고, 추측으로 그냥 비난하는 것이다. 전광훈목사가 한 일이나 그의 메시지를 들어본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기가차고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터무니없는 행동들을 너무나 담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생각나거나 두렵지도 않은건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든다. 이들에게는 "열매로 알리라"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도 떠오르지 않는가 보다.
이것은 성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좌파 사상가나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았지만, 하나같이 핵심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선동이나 감성팔이로 일관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신기했다. 이런 거짓말을 들으면서 진리를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이 거짓을 모르다니 말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지혜를 가리신 것처럼 말이다.
4. 교만하다.
성경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교만한 성품이 있다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죄인된 사람들의 본성 중에 하나가 교만이기도 하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만난 경험이 없어서 일까? 하나같이 좌파 기독교인들은 교만하다. 뭔가 알 수 없는 우월감으로 무장되어 있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은 성경에서 패망하는 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만나면 교만할 수가 없다. 물론 단기적으로 그러한 현상이 있을 수 있지만,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뉘우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입술로는 십자가를 이야기하지만, 십자가가 이야기하는 죄인들의 허물과, 무지함, 교만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로만 해서인지, 십자가를 잘 말하지도 않고,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별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삶에서는 그러한 것을 더욱더 찾아보기 힘이 든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의 삶을 보면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마치 자신이 특별하고 일반 기독교인들보다 더 나은 것처럼,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인 수준을 가진 것처럼 행세한다. 그런데 가까이서 뜯어보면 별게 없고, 심지어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이런 행태와 모습은, 형제를 멸시하면 안 된다는 성경의 말씀을 늘 떠올리게 하고 내 마음을 경계하게 만든다. 그래서 늘 어렵다. 형제를 멸시하면 안 되는데, 벌거숭이 임금님같은 그들의 모습은 나를 늘 시험에 들게 한다. 정말 이들은 기독교인들일까?
5.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기를 좋아한다.
이 특징은 앞 선 특징들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영향을 주기도 한다. 참된 기독인의 삶이란, 자신의 삶이 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삶일것 이다.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그 뜻을 물으며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회적 현상이나 사람들이 있으면, 일단 비난한다. 정상적인 기독인이면 비난하기 전에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본주의란 책 속에만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기도도 하나님께 묻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세워놓고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를 한다. 그러니 모든 것이 거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의 모양은 기독인이지만, 실상은 마귀에게 쓰임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이들이 싫어하는 기독인은 참된 기독인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많은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다. 교회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이들 좌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흑암의 세력 편에 서 있는 것이다.
6. 죄에 대한 자각이 없다.
죄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그 죄가 자각될 때는 사람들이 회개에 이르게 된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말은 회개가 없다는 말이며, 회개가 없다는 말은 기독교인으로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리라"고 선포하셨다. 회개는 천국을 경험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개념, 곧 천국에 대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p.s.낙서처럼 적는 글이라 수시로 업데이트를 하겠다.
그리고 성령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던데,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교리상으로는 누구나가 성령이 임한다(요1-3장 참조).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것은 어린아기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갓난아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간혹 거듭남과 동시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특이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어째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남을 겪고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살아온 배경의 영향을 받고,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때로 반기독교적인 문화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아간다. 위의 좌파 기독교인들처럼 말이다.
우리가 완벽하게 성령의 음성에 순응한다면, 아마도 좌파기독교인이란 단어자체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때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서-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세밀하게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100% 좌파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권위를 인정하고, 현재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특징은 그 사람이 보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한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좌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그들을 경계할 필요는 있지만, 언제든지 안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이단의 경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지, 이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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