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의 줄거리 창조 타락 구속

하나님아들 2020. 1. 22. 18:28

성경 전체 줄거리(창조, 타락, 구속)

프로파일 제 5의 계절을 꿈꾸며  2019. 12. 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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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언제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지는데, 구약은 39권이고 신약은 27권으로 총 66권이다. 성경의 기록연대는 구약 성경의 모세오경이 B.C. 1450년경 모세가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신약성경은 A.D. 100년 경 쯤에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것 까지 1,500년의 기간에 기록되었고, 35명 가량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특이한 것은 성경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기록되어 있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딤후 3:16)이다. 그리고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어떤 문학적인 상상력이나 자신의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의 기록자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적인 권위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기록하신 것이고 또한 역사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삶과 행함에 대한 기준으로서 규범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사사로이 해석하거나 억지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성경의 자체적인 권위 아래 성경으로 해석하고, 성경 자체에 해석하고 믿음으로 화합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경을 일반적인 책과 같은 책으로 생각하는 소위 합리주의적 영향이나, 인간의 경험과 일치시키려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게 한다.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추론하거나 상상하기 보다는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 성경은 그 어떤 것에 앞서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상과 인간적인 이성과 경험으로 성경을 제단하려는 유혹을 과감하게 버리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 그리고 성경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류를 위해서 행하신 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은 인간과 인류에게 풍성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제공하고 인간과 인류의 삶과 행위의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준다.

성경은 66권으로 되어 있고, 성경의 저자가 35명이 넘고, 1,500년이라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인 간격이 있지만 성경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반역하고 거스린 인간의 타락과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완성이라는 큰 주제로 성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이야기의 거대한 흐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 실질적으로 전제가 되어야 하고, 성경의 백그라운드가 된다. 성경이 각권별로 저자가 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시대를 넘어서, 그리고 성경 저자의 인물됨과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완성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지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신 만물의 창조의 역행됨,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시는 것, 그렇기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완성으로 진행된다. 성경의 각 권은 하나님의 이 위대한 행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위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놀라운 이야기로 이어진다.

성경에 대한 거대한 이 흐름을 알지 못하고서는 성경을 결코 온전히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읽고 묵상하지만, 하나님의 이 위대한 창조 행위와 구원 행위,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과 완성을 보지 못하면 성경은 부분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고, 성경에 대한 적용도 실질적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성경적인 세계관에 대해서 큰 흐름을 알고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이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과 완성의 목적을 바로 알고, 인간이 얼마나 영화로운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이 영화로운 지위에서 떨어져서 오늘날의 비참한 실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화로운 상태로 회복되고 완성될 것인지를 알 수 있고, 성경을 통해서 참된 인간과 인류를 회복하고, 이생과 내세로 이어지는 시간과 영원의 문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오늘날의 시간의 삶을 투영 할 수 있게 된다.

창조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웅장한 교향곡과도 같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온 우주만물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제외된 존재는 없다. 이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큰 것에서 작은 것 까지 모든 것에 해당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원인과 목적이 되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하는 것,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과 인류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타락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하나님은 무목적으로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을 위해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압권은 인간의 창조이다. 인간의 창조는 모든 만물 창조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의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인간의 주요 역할이고 임무이며 책임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고, 생존의 이유와 목적도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존재목적이고 삶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운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주요 주제이며, 구속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뒤이어서 나오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아름다운 창조의 이야기는 인간의 타락으로 비극적인 상황이 된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창조의 장엄하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그 이후는 인간의 타락과 비극과 절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타락에 더욱 빛나시고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 즉 여자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타락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반역이 일어난다. 그것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창조주 하나님에게 독립을 꿈꾸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을 반역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기 된다. 원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생명을 살려 주시고 구속의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에게 창세기 3:14-24에서 다음과 같이 심판을 선언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서 전 피조계는 비참과 비극과 절망, 그리고 안식이 없는 땅이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원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모든 관계가 왜곡되고 파괴되었고, 창조의 질서가 왜곡되고 파괴되어 죄가 다스리고 사단이 다스리는 죄의 질서가 도입되고, 부패와 해체와 사망의 법이 온 피조계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산에서 추방되고, 에덴 이후의 삶은 낙원을 잃어버린 삶이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실상과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된 모습들에 대해서 롬 1:20-3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사단과 자기 독립의 길을 선택한 인간과 인류의 비참과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죄와 타락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가장 지혜로울 것 같지만,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영적인 죽음,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으로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육체는 한계 속에 죽음으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과 심판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런 비참한 실상에 대해서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하고, 죄와 사단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창조시에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상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를 인간의 죄와 타락을 무대로 바꾸어 버렸다. 만일 복음이 없었다면 인간과 이 세상은 지옥이상도 지옥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면 유리함이라.”(마 9:36)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갖는 비참한 실상과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예수님의 비통해 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표현한 것이다.

구속

인간의 하나님에게서 독립을 꿈꾸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반란을 일으켜서 타락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지고 에덴에서 추방되었지만 창세기 3:15절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받았다. 이것을 원복음이라고 일컸는다. 이제부터 인류는 하나님의 회복과 구속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다. 성경은 에덴 이후의 인류가 두 왕국으로 분리됨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전개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의해서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나라로 성별되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는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함으로 광야에서 40년 간을 방황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언약과 율법, 성막이 주어졌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치유되어야 했다. 모세는 광야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2세대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인도된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중부 가나안과 북부 가나안을 정복하고 요단 동편 땅과 서편 땅을 분배한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를 끝으로 여호수아서는 막을 내린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하고 가나안의 우상숭배와 가나안의 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고 결국은 영적인 혼란상과 난맥상을 빚게 된다. 사사기의 역사의 이스라엘의 반역과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서 압제와 핍박,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한 부르짖음과 사사들에 의해서 구원되는 순환이 무려 7차례에 걸쳐서 일어난다.

이스라엘의 악순환적인 순환의 고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는데, 과연 이스라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룻기는 사사시대의 타락과 암울한 역사 속에서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과 가정, 자손을 보존하셨다. 룻이 보아스와의 결혼을 통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이방여인이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게 된다.

사무엘서는 선지자 사무엘이 등장한다. 사사시대와 왕조의 교량 역할을 하는 사무엘 선지자의 등장으로 이스라엘은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고 또한 사울왕과 다윗왕을 왕으로 기름 붓는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사무엘이 출생하고 이스라엘에 등장한다. 엘리 제사장은 사사시대의 표징이자 불행의 표징이었다. 전쟁터에 법궤를 가지고 블레셋과 맞선 이스라엘은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 사무엘은 미스바로 이스라엘을 집결시키고 회개운동을 하고 법궤를 되찾았다.

이스라엘은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하고 사울이 이스라엘 첫 왕이 된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아니었다. 다윗은 사울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워서 이스라엘의 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울의 질투로 인해서 죽음의 위협과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합적인 왕으로 세우신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약을 주시고,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과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영원한 왕조의 약속을 받는다.

열왕기는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다윗이 성전건축을 원했지만 성전건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봉헌식을 갖는다. 솔로몬의 통치 하에 이스라엘은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다.

솔로몬 이후 아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솔로몬보다 더 무거운 짐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자 백성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산당을 지어 이스라엘은 분열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왕국이 되었다.

분열왕국 하에서 북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1세, 나담,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아함, 아하시야,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이고, B.C. 721년에 사마리아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남 유다의 왕은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요람),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여호아스), 아마샤, 웃시야(아사랴),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이고, B. C. 586년에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분열 왕국 때 활동한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은 엘리야와 엘리사, 호세아 선지자이고, 유다왕국의 선지자는 미가, 이사야, 나훔,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 오바댜 선지자이다.

열왕기의 역사는 다윗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와 직결되고, 또한 왕과 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과 관련이 있다.

역대기서는 예루살렘을 중심한 성전 중심적인 전개, 제사장적인 측면과 신학적인 측면이 두드러져서 열왕기서의 단순한 병행이 아니다. 역대상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다윗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고 역대하는 솔로몬의 통치와 분열왕국과 히스기야왕으로부터 바벨론 포로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한권으로 되어 있다. 바사왕 고레스는 조서를 내려서 이스라엘의 귀환을 허락한다. 이것은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세 차례에 걸쳐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다. 스룹바벨이 첫 번째 귀환의 지도자였고, 에스라는 두 번째에 귀환할 때의 지도자였다. 느혜미야는 세 번째 귀환 할 때 지도자였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이방민족들과의 혼인을 근절시키고 영적인 각성과 예루살렘의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했으나 르훔과 심새의 반대로 아다사스다 왕이 성벽 재건 역사를 중지시켰다. 느헤미야는 52일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 그리고 수문 앞 광장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에스더서는 바사 아하수에로 왕 시대에 수산 동편에 있던 유대인들이 하만의 유대인 말살의 계교에 큰 위험을 당했지만 왕후가 된 에스더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구원되는 이야기이다. 하만의 온갖 계교에도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통해서 유대인을 구원하도록 하고, 하만이 처형됨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서 유대민족을 보호하신 것이다.

욥기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욥이 재산과 자녀, 건강을 잃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욥과 세 친구의 변론을 통해서 의인의 고난과 사단의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에 대해서, 욥이 고난 가운데 중보자를 소망하게 되는 것,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 나타난다.

시편은 총 5권의 책으로 150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시편 1편의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150편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시편은 주제별로 7가지 유형이 나온다. 그것은 슬픔의 시, 감사의 시, 찬미의 시, 구원 역사의 시, 경축과 대관식의 시, 교훈과 지혜의 시, 신뢰의 시로 분류할 수 있다. 시편은 칼빈의 말대로 우리의 영혼의 모든 부위의 해부학이라 할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생하고 실질적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풍성하게 나타나 있다.

잠언서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하며 지혜롭고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해서 훈계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참된 지혜이다.

전도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없는 인생,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인생의 본분에 대한 감동적인 책이다. 일시적인 헛됨과 영원한 영원성은 엄연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인생의 운명은 인생 자체가 주는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헛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실천이 결여된 인생은 결코 인생의 참된 가치나 만족이 없는 헛된 삶이다. 전도자는 자신이 낙을 누리고 술과 쾌락 사업과 부, 처와 첩들이 많았던 경험들과 관찰들을 논했지만 불확실한 삶의 헛됨과 그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의 중심적인 삶,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을 즐거워하고 바라는 삶이 참된 가치를 주는 삶이다.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로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아가서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읽는 책이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랑을 예표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이다.

이사야는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이사야 선지자이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 활동을 시작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분열되어 두 왕국으로 존재했다. 유다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수리아의 공격을 당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유다도 앗수르의 위협을 받았다. 북왕국은 하나님과 말씀을 떠나 형식적인 신앙을 유지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임마누엘과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을 한다. 그리고 바벨론에게 유다가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자’라고 소개하고, 모든 피조물(바벨론, 앗시리아, 모압, 다메섹, 구스와 애굽, 에돔과 아라비아, 예루살렘과 두로에 대한 ‘여호와의 날’을 말한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날이다. 이사야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언을 한다. 하나님은 유다를 회복하실 것과 여호와의 종인 이스라엘과 구속의 노래, 그리고 유다를 회복할 고레스 왕에 대해서 예언하고 유다가 하나님께 돌아 올 것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에 대한 권면을 한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의 임박함 속에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을 함으로 이스라엘을 격려하고 회복을 소망을 준다. 이사야에는 새하늘과 새 땅에 예언, 그리고 메시야에 대한 예언(임마누엘,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다윗의 혈통, 수난받는 여호와의 종) 많이 나온다. 그리고 남은자 사상과 수난 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심판을 받는다는 것과 새언약을 통해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회복과 구원을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과 같은 동시대의 선지자이고,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와 여호야김, 시드기야 아래에서 예언을 했는데, 유다의 최대의 위기의 상황에서 예언을 했다.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지 않는 것과 우상숭배와 제사제도의 타락,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한 심판에 대한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교훈 삼아서 유다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도록 예언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결국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교훈삼지 않고 범죄했기 때문에 심판을 달게 받을 준비를 하도록 한다. 예레미야서의 주목할 점은 소망과 위로의 메시지 가운데 새 언약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언약을 파기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한 예루살렘에 대한 슬픔의 비가이다. 바벨론의 세 차례에 걸친 예루살렘 침략과 세 차례에 걸친 포로, 그리고 바벨론 포로와 외국 망명과 추방등을 배경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탄식과 유다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회복의 메시지가 나와 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함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하심과 유다 백성의 슬픔과 수치를 탄식하고 고통하며 소망을 가지고 회개의 촉구하는 선포를 한다. 그리고 유다 백성이 회복되어 귀환을 위한 기도를 한다. 예레미야 애가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게 멸망당한 것을 기념하는 아브월에 읽는 책이다. 성전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가장 큰 슬픔의 사건을 기념하면서 읽고 다시 재무장하는 것이다.

에스겔은 제사장으로서 바벨론의 세 차례의 포로로 잡혀 갈 때 두 번째로 바벨론에 끌려갔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후 5년째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과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그리고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로운 성전에 대한 이상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한 목자를 세워서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할 것이라는 것과 새영과 새마음을 주실 것이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새언약과 사랑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고 마른뼈와 같은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생기를 주실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떠난 하나님의 영광이 새로운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고 영광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성의 새 이름은 “여호아 삼마”(여호와가 거기 계시니라)“가 될 것이다. 예루살렘의 동문을 통해서 떠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다니엘서는 애굽의 쇠약과 앗수르 제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유다가 바벨론의 세 차례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간다. 포중 기간 중에 다니엘은 바벨론 궁전에서의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와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해 주어서 다니엘은 높임을 받고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되고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이 된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는데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겼지만 하나님께서 풀무불에서 그들을 건지신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의 꿈을 해석해 준다. 그러나 방백들의 음모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받는다. 다니엘서는 네 짐승의 환성과 수양과 수염소 환상, 그리고 칠십이레에 대한 예언과 열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다니엘서는 모든 열방의 왕과 우상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과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예언하고 있다. 조국의 멸망과 포로로 잡혀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하심과 세상 나라를 파하는 하나님과 메시야의 나라와 영원한 구원과 궁극적인 승리가 드라마틱하게 나타나고 있다.

소선지서. 호세야, 요엘, 아모스, 오바댜

소선지서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다.

호세아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부터 이스라엘이 멸망하던 때까지 예언 활동을 했다. 여로보암 2세 때는 정치 경제적으로 번영과 부를 구가하는 시대였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의 번영과 평화가 있었다. 상업과 무역이 융성하고 정치가들과 상인들은 생활이 높아졌다. 그러나 노동자들과 농부들은 가난과 굶주림과 압제로 고통을 당하고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최악의 방종과 배역의 시대였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호세야 선지자가 음란한 아내인 고멜을 값주고 사서 회개시켜 돌아오게 하는 신랑과 같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한 고멜과도 같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고 그녀의 자녀들(이스엘, 로암미, 로루하마)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그러나 음란한 아내 고멜을 데려오는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호세야는 이스라엘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말하고(호4:6-7)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3)고 외친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불붙붙듯 함을 호소하고 “그런즉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12:6)고 말한다.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주제가 나타난다. 여호와의 날은 회개하는 자에게는 축복, 그렇지 않은자에게는 저주와 심판 형벌의 날이다. 요엘 선지자는 유다 왕국에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고 예루살렘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회복을 촉구한다. 여호와의 날은 메뚜기 재앙으로 예고되고 심판의 날에 대한 경고 하나님의 심판과 성령을 부어주심과 축복에 대한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목자였고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 출신이지만 북이스라엘을 향해 예언을 했다.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최고의 부흥과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바알종교에 물들고 사회 경제적인 불의와 악이 횡행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과 유다와 열방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5가지의 환상과 회복에 대한 약속과 축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바댜는 남유다 왕국이 당한 재난에 대해서 기뻐하고 유대 왕국의 땅을 약탈하려고 한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에돔의 조상은 야곱의 형인 에서이다. 예루살렘이 침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지만 에돔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야곱족속이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을 말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들이 에돔을 다스릴 것과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을 말하고 예언하고 있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이다.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부흥과 더블로 교만과 우월감으로 이방인들을 멸시했다. 요나는 앗수르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향한 하나님께서는 큰 바람을 일으키셔서 폭풍을 일으키시고, 요나는 바다에 빠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 속에서 3일을 지낸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왕과 왕과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심판과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니느웨의 회개를 기뻐하지 않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덩쿨의 교훈을 통해서 니느웨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미가는 갓 지파 출신으로 모레셋 사람이다. 그의 예언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묵시이다. 미가는 유다 왕국에 예언을 하고 부요계층과 권력층이 평민들에게 행하는 부정과 착취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하나님은 심판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침략, 그리고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당하며 악한자가 그 땅에서 제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다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미래와 메시야 왕국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훔은 북이스라엘의 니느웨의 멸망과 남유다의 위로와 소망에 관한 책이다. 앗수르와 니느웨는 메대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질투와 보복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를 보복하시고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분이시다. 앗수르 왕과 니느웨는 정치, 경제적, 군사적으로 권세가 있지만 그들은 멸망할 것이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상관계에 대한 질문과 자기 백성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 그냥 두고 보시는 것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불의에 대하여 불의한 이방인들, 즉 갈대아인들이 세계와 유다 백성을 통치하고 군림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가 지체되지 않을 것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고 응답하신다. 하박국은 결국 악한 갈대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함으로 유다의 백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하박국은 마지막으로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3:2)라고 기도하고,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3:19)고 말한다.

소선지서.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스바냐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과 주변 열국들에게 임한 진노와 예루살렘의 죄와 장차 있을 구원에 대한 것을 예언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헛된 우상 숭배를 행하는 유다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언했는데, ‘여호와의 큰 날’이 빠르게 임해 바벨론의 있을 것과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의 날이다.

학개는 성전건축에 대해서 독려하는 책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에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성전 재건보다도 자신들의 삶에만 치중되어 성전 재건은 15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있다.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의 선지자로 성전재건을 격려한다. 스가랴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8장까지 메시야 왕국에 대한 8개의 이상, 9-14장은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이다. 특히 메시야의 초림과 그 왕국에 대한 배척과 거절, 그리고 재림을 통해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경배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요 마지막 책이다. 바벨론에서 본토로 귀환하고 성전 건축을 명하고,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성전을 재건하고 많은 시간이 경과했지만 메시야 왕국의 축복이 없자 형식적인 신앙, 흠있는 제물의 제사, 불경건과 불의가 판을 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하셨는가?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호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헛됨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행하는 것의 유익됨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 고통이 임하는 것이 그들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과 회개를 촉구한다. 그들이 더럽힌 제사의식에 대해서 각성을 촉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경고와 약속을 통해서 메시야 왕국에 대한 대망을 하도록 각성시켰다.

신약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천국복음과 사자복음이라고 부른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과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약속대로 오신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마태는 구약의 예언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공생애 기간의 말씀, 십자가의 죽음을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제시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하려고 오셨다.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영접과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하심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에 대해서 거절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일찍 기록되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고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왕되심이 강조되었다면,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종되심이 강조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된 예언의 성취가 강조되고,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고 확대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마가복음 예수님의 행적과 이적에 대해서 많이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중심주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능력있는 종이신 예수님의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종이신 예수님에 대한 소개와 복음의 전도,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반대와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 예루살렘 입성과 배척당하심, 그리고 성전멸망에 대한 예언과 재난 예언, 재림에 대한 것과 수난당하심과 부활, 그리고 지상명령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누가복음은 사랑받는 의사 누가가 기록한 것이다. 누가복음 1:1에서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함으로 기록목적이 데오빌로 각하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배운바를 확실함을 알게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했다.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메시야 복음을 주제로 한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가 되시고 모든 사람들의 구주이심을 말하고 있다. 누가는 메시야 예수님의 사역 전에 세례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과 제사장 사라랴의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주의 구원을 알리는 세례요한의 사역과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것, 예수님이 할례와 유월절 지키신 것등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마귀에게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갈릴리에서의 사역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과 재림 징조에 대한 예언과 말세에 깨어 있을 것을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소개하는데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알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지상명령을 주시고 승천하시는 기록이 나와 있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이 책의 기록목적에 대해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고 말한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부르고 요한복음은 ‘제 4 복음서’라고 부르고 독수리 복음서라고 부른다. 요한복음 서두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선재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시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말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강조되어 있다. “나는 ~이다”(헬,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의 신성 표현인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6:35), “나는 세상의 빛이니”(8:12, 9:5), “내가 문이니”(10:7), “나는 선한목자라”(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내가 참 포도나무요”(15:1)등이 나와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속이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시기 까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님의 강림과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권능을 입고 예루살렘과 유다,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제자들이 순종하는 역사의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의 역사이다.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는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뽑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였다. 성령이 약속대로 강림하고 제자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 예루살렘은 베드로의 설교로 3,000명이 예수님을 믿었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고, 5,000명이 돌아오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께 돌아 온다. 사도들은 예수님으 증거하다가 공회 앞에 서게 되고 그곳에서도 예수님을 전했다.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도록 7집사를 선택하고, 스데반은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사도 외에는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들은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빌립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다. 이때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복음을 받았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이방에 복음을 전한다. 바울은 세 번에 걸쳐서 진행되는데, 제 1차 전도여행은(행전 13, 14장) 구브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르스드라와 더베에서 행해졌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제 2차 전도여행(15-18장)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에서 행해졌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 3차 전도여행(19-27장)은 에베소, 그리스, 드로와, 밀레도에서 행해졌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 왔다. 바울은 성전에서 바울은 체포되었고, 바울은 대중들과 산헤드린 앞에서 변호하고, 가이사랴로 떠나서 벨릭스는 헤롯궁에 갖힌다. 바울은 2년 동안 감옥에 구속되었다. 바울은 벨릭스와 베스도와 아그립바 앞에서 변호를 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한다.

로마서

로마서는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 말미에 고린도교회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는 기간에 기록되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전달하려는 중이었고 그 일이 끝나면 스페인에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 그래서 로마 교회의 후원을 필요로 했다. 로마서는 바울서신 중에서 가장 교리적이고 논리적이다.

바울은 서두에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은 사실과 복음에 대해서 설명한다. 복음은 성경에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말하고 있다. 바울 당시에 복음은 어리석은 것이고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이 믿는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바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의 비참한 실존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제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와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서 논증하고 전 인류가 죄의 종노릇하고 있으며 자연인의 의와 율법의 의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함을 말한다. 인간과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과 죄의 속박에서 자유하지 못하다. 인간의 의와 율법의 의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율법외의 의의 계시가 아니면 결코 인간은 소망이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이다. 예수를 통한 의는 믿는 자에게 차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신 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게 되었음을 예수님을 통해서 얻는 의에 적용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이 있기 전에 의의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는 약속을 따라 되어지는 의이다.

바울은 첫째 아담인 아담으로 말미암는 인류의 실존과 둘째 아담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인류의 실존을 대조한다. 첫째 아담은 불순종과 죄로 인해 사망을 도입했고, 둘째 아담인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사와 영생을 도입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어 성화된다. 죄로부터의 자유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견인에 이르고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된다.

바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섭리는 유대인이 복음을 수용하고 이방인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간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자를 일으키실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경륜과 역사를 언급한 후 믿는자들의 실천강령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한 제사로 몸을 드리는 것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와 국가, 사회의 윤리와 관계가 있다.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듣게 된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시정하기 위해서 기록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분쟁, 그리고 그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들이다. 고린도교회는 분쟁과 성도덕, 불신 법정에의 소송, 결혼과 양심의 문제, 공중예배, 은사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은사의 종류와 필요성, 그리고 사랑의 원리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하도록 한다. 그리고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성과 부활의 증인들, 그리고 필요성과 부활한 몸에 대해서, 부활의 시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고린도후서는 개인적이고 자서전적인 서신이다. 바울이 아시아, 즉 예베소에서 당하는 고난의 목적,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는 계획이 변경된 이유,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근심과 복음 사역에 대한 변호와 직분에 대한 변호,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회개한 것에 대한 기쁨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연보와 유대인가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교회의 복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서 주는 자의 축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자신의 사도직과 권위를 변론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이라 자칭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짓 사도들,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 사단의 일군들이라고 일축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중매장이로 소개하고,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책망, 그리고 거짓 교사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환상과 낙원에 대한 계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인의 자유의 대헌장과도 같은 것이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진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져서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것에 대해서 바울의 강한 책망과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유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바울은 거짓교사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참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참 사도인 것과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버리고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그들이 의롭게 된 것이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된 것에 대해서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강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430년에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생긴 율법이 의를 얻도록 하지 못한다는 것과 율법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차별없이 하나요,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대로 유업을 잇는 자라고 명쾌하게 논증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초등학문에 종노릇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원하는 것, 그리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염려와 유대주의자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을 이간시켜서 자신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려고 자유케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함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는 것과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을 말하고 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 충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고 성령을 따라 행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서로가 짐을 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과 가르침을 받는자가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는 것을 권하고,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을 말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는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면하고, 육체를 자랑하도록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에베소서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을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골로새서이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같은 시기에 기록된 쌍둥이 서신으로서 교회의 통일성, 즉 일치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에베소서는 소아시아의 수도로서 예루살렘과 안디옥과 함께 삼대 중요한 도시중으로 하나로 다이나나(아데미)라고 하는 여신의 신전이 있었고 소아시의 상업의 중심지였다. 바울은 이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했고 사도 요한도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내가 죽었다.

바울은 하늘의 신령한 복, 즉 하나님의 창세전에 예정하심, 예수님의 구속, 곧 죄사함, 그리고 성령의 인치심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할 것과 마음의 눈을 떠서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할 것, 그리고 우리에게 배푸신 능력의 크심을 알게 하도록 기도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냄으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음과 행위와 공로가 아님을 말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는 이방인, 무할례당, 이스라엘 밖의 사람,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되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중간에 막힌담을 헐어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됨을 말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예수 안에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주안에서 하나님의 처소로 함께 지어져 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고,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하나님의 권속,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자가 되었다. 그리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서 지어져가는 존재가 됨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에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을 전하는 복음의 일군이 되었음을 말한다.

바울은 두 번째 기도를 하는데, 그것은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해 달라는 것, 믿음으로 그리스가도가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 사랑 가운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과 하나 됨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것과 사도와 선지자, 복음을 전하는자.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세우신 것과 직분의 목적이 성도를 온전케하는 것, 봉사의 일을 하는 것,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옛사람과 새사람의 대조를 통해서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을 권면한다. 성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 지혜롭게 행하는 것,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는 것을 아내와 남편의 관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에 적용한다.

바울은 주 안에서와 그 힘으로 강건해지는 것과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전투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말한다.

빌립보서

빌립보 교회는 비옥한 평야에 자리하고 있고 마게도니아 왕이 주전 4세기 경에 건설한 빌립보시에 자리하고 있는데,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교회로 유럽 최초의 교회로 자주장사 루디아의 개종과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이다. 루디아는 두아디라의 상인으로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 집을 통해서 예배 처소가 되어 빌립보 교회가 탄생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재정적인 후원을 한 것과 복음사역의 협력을 위해서 에바브라디도를 보낸 것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바울이 옥중에 있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 것과 바울이 옥중에 있는 것이 복음의 진보로 나타난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연합하고 협력하고 분열되지 말 것, 그리고 디모데가 방문할 것과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것의 필요성,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하나 될 것, 그리고 빌립고 교회의 재정적인 후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옥중에서 보낸 편지이지만 “기쁨”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골로새서

골로새서는 옥중서신이면서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와 많은 구절과 단어가 비슷하다. 바울이 아시아를 떠나 2년 이상 있는 동안 골로새 교회에는 영지주의적인 사상이 침투했고 그래서 빌립보 교회에는 유대주의적인 율법주의와 금욕주의, 그리고 “철학과 헛된 속임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 천사숭배등과 같은 철학에 빌립보 교회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있는 바울을 찾아가서 교회의 문제를 상의하고 바울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고 만물보다 먼저 계신자라는 것, 그리고 교회의 머리요 죽은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자,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심,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화평을 이루셔서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되기를 기뻐하심에 대해서 말한다. 바울은 거짓된 이단과 이단에 대한 경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골로새 교인들이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도록 권면하고 있다. 권면의 기초는 예수님의 재림 때 예수님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내들에게, 남편들에게, 자녀들에게, 부모들에게, 종들에게, 주인들에게 새사람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기도에 항상 힘쓸 것과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을 것,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전도할 문을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도록 기도를 부탁한다. 그리고 외인을 향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해서 설립이 되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와 에게해의 북쪽 사이에 위치한 마게도냐의 항구도시로 빌립보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빌립보에서 이곳에 와서 3주일 동안 회당에서 설교를 했다. 그때 유대인과 많은 헬라인의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행 17:4).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살피게 했고, 디모데가 교회의 소식을 가져왔다. 디모데는 교인들이 심판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재림 전에 믿는자들이 죽게 되었을 때 주님을 만나보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하는 것에 대해서 전해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 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로 인해서 감사와 칭찬을 한다. 그들은 복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다 사도와 주를 본받는 교회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던 당시를 회상하는 글과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방문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디모데의 파송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울은 종말에 그들이 마땅히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더욱 많이 힘쓸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거룩함과 형제사랑과 종용히 자기 일을 할 것과 그들의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주 안에서 자는 자들의 부활을 언급하여 소망없이 슬퍼하지 않도록 한다. 주님께서 재림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말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그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자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을 말함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주님께서 밤에 도둑같이 오실 것과 멸망의 날이 이를 때 결코 피할 수 없다고 말하고 데살로니 성도들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고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에 오직 자지말고 깨어 근신하라고 말한다. 주님의 목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과 예수님과 함께 살도록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피찬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도록 한다. 바울은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에 대한 안위와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항상 선을 좇을 것과 항상 기뻐할 것, 쉬지 말고 기도할 것, 범사에 감사할 것, 성령을 소멸치 말 것, 예언을 멸시치 말 것,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강림 시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기원한다.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 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 나온다. 데살로니가 후서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는 서두로 시작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성장과 사랑의 풍성함을 감사하고큰 박해 속에서도 인내와 믿음을 인해 여러 교회에 자랑함을 이야기 한다. 그들의 핍박과 환란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는 것이고, 그들의 고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를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환란을 받게 하는 자는 환란으로 갚으시고 환란을 받는 자들에게는 안식을 갚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과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시고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쉬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미혹당하지 말라고 한다.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을 것과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않을 것을 말한다. 불법의 사람은 대적하는자,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이라고 내세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강림하셔서 그를 죽이시고 폐하시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 말하는데, 재린 전에 배교자와 성전에 앉은 불법자가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주님의 재림 때 멸망을 당할 것을 말한다. 바울은 악하자의 나타남은 사단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을 말한다. 그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미혹의 역사를 믿게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 영광스럽게 되는 것과 바울을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건지시도록 기도를 부탁한다.

바울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여 주님이 오실 것임으로 일을 할 필요도 없고 일을 하지 않고 교회 안팎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게으르게 행하여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드는 자들에 대해서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한다. 그리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디모데전서

디모데전서는 디모데후서와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에 속한다. 목회서신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서신이다.

디모데전서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인데,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에 처음 방문했을 때 회심을 하고 제 2차 전도여행때 바울과 동행하는 인물이다. 디모데는 부친이 헬라인이고 모친이 유대인이다.

주제는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 행해야 할 일, 즉 교훈과 기도, 교회에서의 여자, 교회 직원의 자격(장로와 집사), 거짓말하는 자들, 경건에 대한 연습, 늙은 과부의 재정적 지원, 장로와 안수, 물질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로 호칭하고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도록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목적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긔고 거짓이 없는 사랑에 둔다. 바울은 디모데가 바울이 지도한 예언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울 것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한다. 바울은 예배와 기도애 대해서 권면하고 교회의 직분인 장로와 집사직에 대한 권고를 한다. 그리고 바울은 거짓 교리에 대해서 경고를 하는데, 성령께서 후일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리라는 것, 그리고 양심이 화인을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다.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금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지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이다.

바울은 교회 내에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행동지침들을 교훈한다. 과부들과 장로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할 것에 대해서, 그리고 가르치는 장로들(목회자)를 존경할 것들, 그리고 연소한자들에 대한 교훈이 나와 있다.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해서,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6:11-12)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탄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6:20)고 말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순교직전에 보낸 서신으로 유언과도 같다. 디모데후서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을 만난 체험과 복음을 전하는 헌신적인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이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바른 교훈을 지키고 가르치며 거하라는 것, 그리고 바른 교훈을 전파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한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음을 말하고 디모데에게 들은 복음을 지키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 강할 것과 많은 증인 앞에서 들은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의 좋은 군사로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을 말한다. 바울은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즉 다윗의 씨로 오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바울은 3장에서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데, 19가지의 배교의 특성을 말하고 이것에서 멀리하라고 당부한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지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도록 하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에 대해서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는 목적이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심판의 주이신 예수님 앞에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하는 말씀을 하는데, 그것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항상 힘쓰고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일에 신중하고 고난을 받는 것과 전도자의 일을 하는 것, 직무를 다하라고 권한다. 바울은 자신이 전제와 같이 부어지고 떠날 시각이 가까이 왔다는 것,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것을 말하고 바울을 위해 예배된 의의 면류관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과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실 것을 말한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주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고난과 환란과 박해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다.

디도서

디도서는 바울이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이라고 부르는 디도에게 보낸 서신이다. 디도는 헬라인으로서 수리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아 회개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디도를 예루살렘 공의회와 제 3차 전도여행때 동행해서 3번 고린도교회에 보냈다.

디도서는 그레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디도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옥중에서 풀려서 사역을 하다가 불가피하게 그레데 교회를 떠나야 했고 디도를 그레데 교회를 복음의 교훈을 따라 세우도록 한 것이다.

디도서에는 장로의 자격과 이단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는 유대주의 할례파 사람들에 대해서 엄히 꾸짖으라고 말함으로 교인들이 믿음을 온전케 하도록, 그리고 유대인들의 허탄한 이야기와 명령을 따르지 않도록 하고 있다.

바울은 늙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젊은 여자와 남자, 종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의 목적은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심과 깨끗케하고 선한 일을 열심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모든 권위로 책만하여 업신여김을 받지 말도록 한다.

바울은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대해서 복종할 것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준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선한 일의 동기는 은혜의 복음을 따라 중생됨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익하고 헛된 변론과 족보 이야기, 분재오가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다.

빌레몬서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짧은 서신으로서 사회문제, 즉 노예제도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과 용서에 대해서 통찰을 가질 수 있다. 노사도요 대사도인 바울은 노예 오네시모를 위해 주인 빌레몬에게 간국하게 용서와 화해를 호소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인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으로 주인의 물건을 훔치고 로마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아시아에 두기고가 파송될 때 오네시모를 보내고 빌레몬에게 회개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 드릴 것을 호소한다. 비록 신분이 노예이지만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생각하도록 한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전에는 주인에게 손해를 입힌 무익한자였지만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다는 것과 바울의 심복(심장)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이 바울을 동역자로 생각한다면 오네시모를 영접하여 바울에게 하듯하고 불의를 행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다면 바울이 계산하겠다고 한다. 바울은 간곡하게 빌레몬에게 호소함으로 오네시모에 대해서 빌레몬에 대해서 관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졌지만 신앙이 성장하기 못하고 다시 유대 율법주의로 회귀하려는 자들에게 저자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재차 강조 할 필요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말씀계시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이요 최고의 계시를 예수를 통해서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예수님은 만유의 상속자이고 창조자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본체의 형상이시다.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하시는 일을 하시고 놓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서 논하는데, 예수는 천사,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비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증한다. 저자는 유대주의에 만연된 천사숭배나 예수님이 천사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예수님의 탁월성과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모세와 율법의 성취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보다 우월하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간 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늘의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아론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 레위의 제사장직에 속하지만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하늘의 대제사장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래위지파의 대제사장직보다 우월하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붙잡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주으로 환원하려는 배교에 대한 경고, 그리고 믿음의 인내의 필요성도 언급하고 있다.

11장은 믿음장으로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 저자는 구약의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저자는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 사라와 이삭과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와 라합, 기드온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의 계시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믿음의 진실성을 증거 했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

신약의 성도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받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많은 경고가 나온다. 그것은 태만과 불신앙, 영적인 미숙, 고의적인 죄, 그리고 배교와 거역에 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그 어떤 존재와 비교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신앙이 필요하고,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탁월성, 위대성은 믿음의 가치의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서 감당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이교주의적인 가르침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배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야고보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1,2,3서와 유다서는 일반서신, 공동서신으로 부른다. 이유는 특정 교회나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교회 일반에 보내어진 서신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저자를 밝히고 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다. 그리고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12지파이다.

야고보서는 참 신앙은 시험으로 정결케 되는 산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고 시련이 주는 유익을 말한다. 그것은 인새를 만들어 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지혜의 필요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자들에게 시험에 대해서 해결할 길도 주신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악을 하나님께 악을 돌리지 않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차별을 두지 말 것과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이고 율법이 범법자로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죽은 믿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심을 받은 것을 말함으로 믿음이 행함과 일하고 온전해 짐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선을 행하는 것과 혀를 제어하는 것, 그리고 하늘에서 난 지혜로 살아 갈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세상과 벗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됨을 말하고 세상과 벗 삼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을 말하고 두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주님이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본질을 환기시키고 허탄한 생각에 대한 경고를 하고, 부자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주님이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에 인내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맹세하지 말 것과 고난 중에 인내를 가지고 기도 할 것과 복음의 증거가 죄인을 사망으로 구원하고 죄가 용서됨을 말하고,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의 인내를 할 것을 당부한다.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서의 내용이 행함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정경성에 대해서 오해를 하지만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로마서가 교리적인 것이라면 야고보서는 실천적인 것이 강조되어 있다.

베드로전서

베드로 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가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낸 서신이다. 시련과 고난에 대한 단어가 많음을 통해서 초대 교회가 많은 핍박 속에 처해 있다는 것과 그 가운데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이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받은 자들임을 상기시킨다.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예수님을 죽음과 부활, 그리고 거듭나게 하심과 산 소망에 있게 하심에 대해서 찬송한다. 그리고 믿는자들에 대해서 말세에 나타난 구원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은 사실을 말한다. 시험으로 근심하는 자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기뻐하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자들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주님의 재림시에 주실 은혜를 바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욕을 본받지 않고 부르신 이처럼 행실에 거룩하고,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형제 사랑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나도록 힘써야 한다. 베드로는 그들이 산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되도록 권면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2:9)라고 베드로는 말한다. 베드로는 그들이 전에는 백성이 아님, 긍휼을 얻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됨과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자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나그네로서, 시민으로서 사환들, 아내와 남편들로서 어떻게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죄없이 고난을 당하는 자, 선을 위한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영광중에 들어 가셨다. 예수님의 본은 고난을 인내하도록 해 주고 정욕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도록 한다.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에 대해서 이상이 여기지 않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한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인내는 주님의 재림시에 영광을 얻도록 할 것이다.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도록 권면하고 젊은자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겸손하라고 한다. 그리고 근신과 깨어 있을 것을 권면하는데, 이는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굳게하고 대적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하게, 굳건하게,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이고 수신자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자들”로 되어 있다.

베드로 후서는 영지주의적인 이단의 영향을 받고 성도를 경고를 하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성격이 짙나면 베드로후서는 교회에 침투한 이단에 대해서 유혹되거나 잊어버리거나 주님의 재림 신앙을 망각하지 않고 들은바 복음에 굳게 서게 하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한사실을 토대로 힘써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애와 경건, 형제 우애를 할 것과 구원과 성숙,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믿는자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얻도록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과 강림이 교묘히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주님의 크신 위엄을 본 것을 말하고, 성경에 대해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는 것과 사람의 뜻으로 낸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는 거짓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에 대해서 교훈하는데,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들이고, 그들을 따름으로 도가 비방을 받을 것, 그리고 그들은 심판과 멸망을 받을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설명과 그들에 대한 심판과 그들의 위험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경고한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재림의 성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주님의 재림과 강림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의 멸망에 대해서 언급하고 마지막 날에 경건치 않는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 그리고 그 날을 위해서 하늘과 땅이 보존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재림의 지연이 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는 것과 그 날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에 과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는 것을 말하고 “너희가‘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믿는 자들은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주님의 오래참으심이 구원이 된 줄로 여길 것과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는 것, 그리고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서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권면하고 있다.

요한일서

요한일서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초기 기독교의 이단인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가현설에 대해서 경고하고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했다. 그리고 수신자들이 기쁨이 충만케 하려는 것과 잘못된 이단에 빠져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다.

1:4에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 2:1에는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5:13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으로 기록목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로고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언급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다는 것과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를 아는 것이요, 진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형제 사랑이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을 세상의 일시성과 하나님의 뜻의 영원성을 대비한다.

요한은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적그리스도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자이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이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 아버지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착념하여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도록 권면한다. 아버지와 아들안에 거하면 주님의 강림 하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거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그것은 의와 사랑과 신앙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도록 하고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의 표식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는 영이다. 만약 이것을 부인하며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이것은 결코 양립 할 수 없는 것이고, 세상에 속한자들과 하나님께 속한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랑의 의무와 의의 승리, 그리고 신앙의 기초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요한이서

요한이서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보내는 서신으로서 거짓 교사를 경고하고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들이 사랑과 진리와 충성됨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요한의 방문 계획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서신을 보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여 경고하고 복음 진리에 충실할 것을 권하고 있다. 요한은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인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수신자들에게 분별력 있는 사랑을 권하고 이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도록 하고 있다.

요한은 누구든지 복음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그들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입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을 피하고 교제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삼서

요한삼서는 요한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인 가이오에게 보낸 서신이다.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음을 기뻐하고 가이오와 정반대되는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래서 으뜸되기를 좋아하고 형제들을 맞아드리지 않고 교만하고, 악한 말로 비방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교회에 내 쫓은 디오드레베의 예를 들어 악한 것을 본받지 않도록 권면한다. 그리고 뭇사람과 진리의 증거를 받은 데메드리오를 칭찬하고 진리의 동역자인 그를 추천한다. 요한은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과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함을 말한다. 요한 이서와 같이 자신의 방문계획을 알리고 있다.

유다서

유다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이고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서신의 저자이다.

유다는 거짓되고 부도덕하고 탐욕적인 이단사상에 대항하여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그리스도의 긍휼을 끝까지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도록 하고 있다.

유다서의 권면에는 “가만히 들어 온 사람 몇” 사람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수신자들에게 영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경계하고 경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경건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다. 그리고 홀로 하나이신 우리의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불신으로 멸망당한 옛 이스라엘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진 것,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음락으로 멸망당함으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요한은 이단들에 대해서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그들이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 영광을 비방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이성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행하는 것과 그들이 결국을 멸망당할 것을 말한다. 그들은 원망하는 자요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해 아첨하는 것, 분열을 일으키는 자, 육에 속한 자, 성령이 없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수신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말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그들에게서 자신을 지키고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최선의 대처법은 이미 들은 복음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서 기록한 책이다.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때 황제숭배가 강요되고 이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핍박이 심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다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게 되고 소아시아의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은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해석에 있어서 많은 주의를 요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해서 많은 이단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어 왔다.

요한계시록의 서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서 지시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리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1-3)고 말함으로 이 책의 기록 목적을 말해주고 있다. 로마의 핍박 중에 있는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속히 될 일을 보여줌으로 위로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줌으로 읽고 듣고 복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은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1:19)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네 본 것”이란 1장에서 주의 날에 성령으로 감동되어 본 일곱 금 촛대와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나오는 아시아 7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말하고 있고, “장차 될 일”은 4장의 열린 문을 통해서 성령에 감동되어 본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환상과 그 보좌에서 이루어지는 일들과 지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계시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의 계시라 함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천사들에게 받은 것과 인자의 환상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현재 계시는 소아시아 7교회인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편지한 것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미래 계시는 하늘 보좌의 환상과 인봉한 책, 그리고 7인 재앙, 그리고 7나팔 재앙, 7대접 재앙,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과 사단의 결박, 천년에 대한 기록, 사단의 마지막 반역과 백보좌 심판과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계시가 이에 속한다.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승리의 주님이시다. 지금도 주님의 교회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은 승리를 주시는 주님이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로서 마지막에 최종적인 승리를 통해서 심판과 구원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선하신 창조 세계에 개입된 죄와 타락은 온 피조물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구속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졌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담과 하와에게 구속의 약속을 주셨고,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인류의 소망이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구속이 어떻게 진행되고 성취되는가의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전적타락과 부패로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는 다르게 피조계가 진행되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속의 역사를 진행시키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구약에서 약속되어진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신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밟으시고 승리하셨으며 성령님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영생을 얻는 것이 가능해졌다.

성경과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죄인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예수님 안에서 풍성하게 베푸셔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와 풍성한 생명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서사시이다. 그것은 마치 대하드라마와 같이 웅장하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대조되어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인간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도 동시에 보게 된다. 그러나 약속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회복되어 온전한 관계와 교제를 누리게 된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는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마침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의 역사를 보게 된다. 인간과 인류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사단과 죄, 죽음의 종노릇하는 비참함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진리, 사랑의 아들의 아들로 옮겨져 하나님의 생명으로 풍성하게 되어진다.

완성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오심과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전파와 교육, 그리고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치심,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과 성령을 보내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으로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교회는 그 완성을 향한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세상에 재림하셔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은 갈수록 좋아지는 낙관론적인 전망 속에 있지 않다. 세상은 세상 나라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결핍, 그리고 진리의 사랑을 거절하고 세상의 나라의 본질 속에서 진행되어지고, 사단은 만국을 미혹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것에 속아 하나님과 말씀과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자들을 심판하시고 믿는자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땅을 미혹하고 사람들을 거짓된 것으로 미혹한 사단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에수님을 믿지 않는자들은 영원한 불못인 지옥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새하늘과 새땅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신다. 이 세상의 죄와 타락과 부패로 발생된 눈물과 사망과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구속받은자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구속받은 자들은 아들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강이 보좌에서 흘러 나와 길 가운데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열 두가지 열매를 맺을 것이고 달마다 열매를 맺고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서 있다. 거기에는 다시는 저주와 심판이 없고 밤과 등불과 햇빛이 없고 형벌과 심판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비추시고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시고 성도님들은 구원의 상을 받고 영원한 복락에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요, 구속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이고, 또한 성도의 믿음의 승리요 영원한 소망의 성취이며 완성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것이 반드시 속히 될 일에 대한 계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을 통해서 계시록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 신중하게 읽도록 한다. 그리고 또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자들, 그리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과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는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은 가까워왔고, 만물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 완성이 없다면 성경을 읽는 것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미완의 그림이 되고 허전한 그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완성이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히스토리는 완성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주님의 교회와 성도는 복이 있고 큰 소망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