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돌트 회의(The Synod of Dort)를 촉발시킨 5인의 신학자들

하나님아들 2020. 1. 7. 23:26

돌트 회의(The Synod of Dort)를 촉발시킨 5인의 신학자들

 

-돌트 회의 폐막 390주년-

 


16세기 말, 칼빈주의 신앙의 자유를 내세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 초에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이 발생하였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  야곱 알미니우스(Jakob 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 

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정죄되었으나,

계속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야곱 알미니우스(Jakob Arminius, 1560-1609)

 

아르미니우스는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제네바로가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부터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면서,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디에르크 코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신학이론서를 출판하였다.

 

 

 

                      디에르크 코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에게 그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책을 읽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코른헤르트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기사야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라고 보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항상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가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론으로부터 '힌트'를 받아 

칼빈의 예정론에도 비판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국교가 칼빈주의였으므로,

아르미니우스는 자기의 이러한 사상 변화를 상당 기간동안 숨겨야 했다.

그러다가 1603년 라이덴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놓았다. 

결국  같은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프란시스코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와의 

격렬한 신학적 논쟁이 발생하였다.

 

                       프란시스코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

 

 

                                                                                    라이덴(Leiden) 대학(1614년)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 윌리엄 공 오렌지에 의해 1575년,  라이덴(헤이그 외곽)에 설립된 명문대학이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에 반대하였고,

유기의 작정 혹은 이중예정을 부정하였다. 

고마루스는 타락 전 예정설을 고수하고 유기의 작정을 믿었다. 

고마루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정된(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라이덴 대학 교수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는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고 하였고,

당시 네덜란드의 국교가 칼빈주의였으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궁지에 몰렸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①인간의 신,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조건적 예정

②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무제한적 속죄

③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반응하는 것이 가능한 인간의 부분적 타락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할 수 있는 있거나,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⑤ 중생한 자도 은혜로부터 타락하여 멸망할 수 있는 가능성

 

 

           요한 위텐보가에르트

(John Wtenbogaert, 1557-1644)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反)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돌트 회의’(The Synod of Dort, 1618. 11.13 -1619. 5.9)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의는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약 6개월간의 토론 끝에 톨트회의는 

다음의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확정하고,

그 내용을 서술한 ‘돌트 신경(Canons of Dort)’을 작성하였다.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돌트 회의’(The Synod of Dort, 1618. 11.13 -1619. 5.9)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인데,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청교도를 사랑하는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