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생애와 사상 -하나님께 영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 3~6)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에 의해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종교개혁 진영은 일치하지 못했다. 종교개혁 진영이 갈라진 것은 성만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이었다. 이 장은 종교개혁의 다양성을 알아보고, 스위스 제네바의 대표적인 개혁자 칼뱅의 생애와 신학사상을 살펴본다.
1. 종교개혁의 5가지 종류
16세기 종교개혁은 단일한 현상이 아니었고 유럽의 전 지역에서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첫째, 마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루터교회를 형성했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
둘째,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칼뱅을 따르는 개혁파는 스위스를 비롯하여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셋째, 영국에서는 헨리 8세(1491-1547)가 수장령을 발표하고 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정하였다. 그 후 영국 식민지에는 성공회가 전파되었다. 이상의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 로마 가톨릭교회는 다 국가교회였고 유아세례를 실시했다.
넷째 재세례파(Anabaptist) 혹은 급진종교개혁운동(Radical Reformation) 운동은 국가의 교회 간섭과 유아세례를 반대하였고, 가톨릭교회와 주류 개신교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재세례파는 초록색 지역 (1555) 많은 재세례파인들은 로마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로부터 화형을 당했다. 다섯째, 로마 가톨릭 안에서는 종교개혁운동에 대응하고 자체 개혁을 하려는 반종교개혁운동(counter-reformation)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 개혁파는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 영국에서는 회중교회가 되었다. 이들은 북미 대륙, 호주로 건너가서 그곳에 장로교회를 세웠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 호주, 캐나다를 통해 전파되었다. 개혁교회는 유럽에서는 주로 개혁교회(Reformed)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주로 장로교회(Presbyterian)라고 부른다.
2. 루터파와 개혁파의 불일치
루터 당시 스위스는 13개의 작은 도시국가들이 모인 연방 국가였고, 가톨릭 진영과 개혁 진영으로 구분되어 갈등을 겪고 있었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원래 가톨릭의 사제였는데, 흑사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서 목숨을 건진 다음 성경과 어거스틴을 연구하면서 복음을 재발견하였다. 1520년대 하반기에 독일 황제와 교황은 독일의 루터파와 스위스의 개혁파를 군사적으로 공격하려고 했다. 이러한 위기를 만난 개신교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은 1529년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에 루터와 츠빙글리를 불러서 종교개혁 진영의 일치를 시도했다. 양 진영에서는 15개의 신앙 조항을 가지고 논의했는데 14개의 조항은 일치했지만, 마지막 성만찬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랐다. 그래서 루터파와 개혁파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16세기 스위스 연방의 구조
3. 16세기 성만찬 이해의 차이 16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을 집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성만찬에 임재 하는지 관심이 높았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죄용서와 구원에 중요한 문제였다. 1)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iation)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거행할 때에 떡과 즙의 속성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본질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뀌어 주님이 실재(real presence)한다고 주장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성체의 실체변화 교리를 확정했다. 또 미사를 거행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일어난 희생이 다시 반복된다고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떡과 즙이 주님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주장은 그것을 숭배하게 만들고 미신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은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위해"’(once for many) 희생제물(히9:28)이 되셨다고 했는데 그것이 반복된다고 하는 것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했다.
⑵ 루터의 공재설(共在設, Consubstantiation) 루터는 성만찬에서 떡과 잔의 본질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에 반대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하신 몸은 신성과 인성 사이에 '속성의 교류'가 일어나서 우주 전체에편재(遍在)하기 때문에 주님의 몸은 우리에게 주어진 떡과 즙 안에(in) 함께(with) 밑에(under) 실재(real presence) 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주님이 “이것은 내 몸이다 내 피다.”라고 말한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3) 츠빙글리의 회상설(回想設) 츠빙글리는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심판 날에 재림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성만찬 때에 예수님의 몸이 직접 오실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츠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말은 “이것이 내 몸을 의미한다.”라고 이해했다. 그는 성만찬을 집례 할 때, 최초 주님의 만찬을 회상하면서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기념설’ 또는 ‘상징설’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츠빙글리의 본래의 뜻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단순한 기념, 상징으로 보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두 가지 비유를 가지고 성만찬을 설명했다. 한 상인이 사업차 떠나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반지를 주고, 이것을 보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한다면, 그 반지는 남편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해주는 증표가 된다. 이처럼 성만찬은 예수님을 회상시켜주며, 재림 약속을 되새겨 준다는 것이다. 둘째, 츠빙글리는 군인들의 비유를 사용했다. 스위스 군대는 연방군이었기 때문에 같은 편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병사들의 어깨에 흰 십자가 견장을 달았다. 흰 십자가를 달았다. 이처럼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공동체에 충성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만찬에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차이는 그들의 기독론적 이해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4) 칼뱅의 영적임재설 칼뱅의 입장은 루터와 츠빙글리와 다르면서도 그 둘을 중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칼뱅은 루터처럼 성만찬에 예수님이 실재로 임재(real presence)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츠빙글리처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의 몸이 직접 오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 대신 주님은 성령으로 성만찬에 오셔서(spiritually real presence) 우리를 주님과 연결해 준다고 보았다. 그래서 칼뱅은 기독론적으로는 츠빙글리와 일치했고, 실재 임재라는 면에서는 루터와 일치했다. 칼뱅의 성만찬론은 에큐메니칼 했다. 오늘날 장로교회의 성만찬론은 츠빙글리와 칼뱅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성경은 루터, 츠빙글리, 칼뱅의 성만찬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현대에도 성만찬론은 개신교인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성만찬의 신비는 이성과 지성으로 논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4. 칼뱅의 생애(1507-1564)
1) 칼뱅의 학생시절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프랑스 누아용(Noyon)에서 세 아들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몇 년 후 그의 모친이 사망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교회의 재정을 관리했다. 칼뱅은 고독한 성격의 공부벌레였고, 12살 되던 해 주교의 서기로 발탁되어 주교의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다. 그는 법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인문주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청년 시절에 마틴 루터의 저서를 비밀리에 읽고 갑작스러운 회심을 하게 되었다. 1532년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최초의 작품인 「세네카 주석」을 출판했다. 그 당시만 해도 칼뱅은 철학도이자, 법학도였고, 신학자의 길을 갈 생각은 없었다.
2) 종교개혁 진영에 참여 1533년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파리 대학은 인문주의자, 종교개혁자와 로마가톨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칼뱅과 친분이 두터운 니콜라스 콥(Cobb)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콥은 임명식장에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것은 가톨릭의 중심지에 던진 폭탄과 같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칼뱅이 콥 총장의 연설문 작성에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이단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모자를 체포하게 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모든 개신교회는 뿌리가 뽑힐 정도로 박해를 받았다. 콥은 스위스 바젤로 도망쳤고, 칼뱅은 비밀 장소에서 숨어 지내다가 1535년에 바젤에 합류했다. 당시 바젤에는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 1482-1531)가 종교개혁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왕 프란시스1세 외콜람파디우스 (바젤의 개혁자)
칼뱅은 1536년 3월 개신교 최고의 고전으로 알려진 「기독교강요」초판을 출판했다. 이 책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변호하고,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을 왕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칼뱅의 나이는 27세였다.
기독교강요초판 기독교강요를 저술하는 칼뱅(상상도) 칼뱅은 그 책으로 인해 종교개혁 진영의 스타가 되었다. 칼뱅은 종교개혁자들이 망명했던 슈트라스부르로 망명을 떠났으나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혀 제네바를 거쳐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프랑스인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칼뱅을 찾아와서 종교개혁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칼뱅은 자기는 그냥 평생을 학자로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파렐은 “요나가 하나님 명령 어기고 도망하다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는데 너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싶으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칼뱅은 그 말에 공포를 느끼고 제네바에 가서 종교개혁을 돕게 되었다.
기욤 파렐 칼뱅을 협박하는 파렐
3) 1차 제네바 종교개혁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 시민들이 성만찬을 받기 전에 경건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타락된 삶을 살다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교정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샀고, 1538년 제네바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하여 1차 제네바 종교개혁은 실패했다.
제네바에서 쫒겨나는 파렐과 칼뱅
1536년 종교개혁진영과 카톨릭진영의 비교 주황색=개혁진영/ 푸른색=카톨릭진영
4) 슈트라스부르 목회 칼뱅은 슈트라스부르에 가서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를 하면서 저술 활동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종교개혁자 마틴 부서(Martin Bucer, 1491-1551)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칼뱅은 목회를 하면서 신학사상이 훨씬 더 깊어지고 성숙해졌다. 1541년에 제네바에는 종교개혁을 원하는 정부가 선출되었다. 그들은 칼뱅이 떠난 이후 종교개혁을 주도할 지도자가 없었고, 가톨릭의 압력이 더 거세졌기 때문에 칼뱅에게 제네바로 돌아와서 개혁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슈트라스부르 슈트라스부르 성마글렌교회(칼뱅의 목회지)
5) 2차 제네바 종교개혁 칼뱅은 154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지도했다. 그는 신앙의 박해를 피해 찾아온 프랑스 난민들을 위해 목회했고, 신학생들을 훈련시켰으며, 칼뱅의 영향력 아래서 존 녹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세웠고, 영국인들이 청교도혁명을 주도했으며, 네덜란드 개혁교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전쟁을 이끌었으며,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이 성장했다. 헝가리에도 개혁교회가 세워졌고 독일에도 칼뱅의 사상이 전해졌다.
칼뱅과 그의 아내 이델레뜨
스위스 지역의 언어의 차이
6) 칼뱅과 세르베투스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rtus, 1511-1553)는 스페인의 신학자이며, 의사로서 최초로 심장 혈액순환설을 발표하였다. 그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수학, 천문, 기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종교개혁 진영에 참여했는데, 1531년에 “삼위일체의 오류”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개신교 동료들은 그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1536년 파리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고 의사가 되었다. 1546년에 그는 칼뱅과 서신을 교환했다. 그가 1553년에 익명으로 출판한 「기독교의 회복」(Christianismi Restituio)은 삼위일체론과 성육신론을 부정했다. 그는 삼위일체론은 비성경적인 철학적 개념이라고 생각했으며, 삼위일체론 없는 기독교는 이슬람과 유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지닌다고 했다. 그는 성육하신 분은 제2격 성자가 아니고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 로고스(logos)이며, 그가 성령으로 잉태할 때 아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지상의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가톨릭교회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투옥되었으나 탈출하여 제네바로 도망쳐 왔다.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오지 말라는 칼뱅의 경고를 무시하고 제네바로 들어와서 체포되어 1533년 10월에 화형을 당했다.
그 후 칼뱅의 적대자들은 세르베투스의 처형의 책임을 칼뱅에게 돌리며 그를 비난했지만, 그러한 주장이 정당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16세기에는 이단자를 처형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행해지고 있었다. 둘째, 세르베투스에 대한 사법권은 제네바 행정당국에 있었고 칼뱅은 외국인의 신분에 불과했다. 셋째, 칼뱅은 목회적 차원에서 여러 번 그를 찾아가서 잘못된 교리를 취소할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넷째, 제네바 시가 형 집행에 대해 많은 도시들과 교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절대 다수가 그를 사형에 처할 것에 동의했다. 다섯째, 칼뱅이 온건한 참수형을 택하도록 권고하였으나 제네바 당국은 화형을 집행했다. 여섯째, 당시 로마가톨릭, 루터교, 재세례파들도 종교적 처형을 했다. 그들의 후손들은 누구도 과거 선배들의 역사적인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칼뱅의 후예들은 20세기 초 제네바에서 세르베투스의 처형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회개의 비석을 세웠다.
Monument_to_Michael_Servetus_Champel 4. 교회론 ①교회의 필요성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꼭 필요한 두 가지 제도는 가정과 교회이다. 가정과 교회는 그 역할이 비슷하다. 가정은 인류에게 주신 축복의 통로이고, 교회는 성도에게 주신 축복의 통로이다. 하나님이 교회를 주신 이유는 인류가 구원을 받고 영적인 유익을 지속적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교회는 구원과 복의 도구인 것이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모든 영적 유익은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 유익을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다. 칼뱅은 성도들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교회가 어머니와 같이 중요하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녀의 태 안에 우리를 잉태하고 우리를 낳고 젖을 먹여 양육하고 우리가 육신을 벗고 천사처럼 될 때까지 돌보고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생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평생토록 이 학교에서 떠날 수 없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 혹은 구원이 불가능할 것이다"(IV.i.4).
②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전통적으로 성도들은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보편적 교회”(one, holy, apostolic, catholic church)를 고백했다. 사도신경에서도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칼뱅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성도의 공동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어거스틴 전통을 따라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와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atholic church)를 구분하였다. 보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거룩성이 있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모임이기 때문에 세속성도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교회란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로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분리주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지상의 불완전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 현대 사회에서 교인이 평생 한 교회를 섬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평생을 메뚜기처럼 옮겨 다녀도 완전한 교회는 찾을 수 없다. 자기가 속한 곳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으면 완벽을 찾지 말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③ 교회의 표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시려고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교회를 나타내는 표지(signs)는 말씀 설교와 성례이다. 교회 안에는 말씀 설교와 세례ㆍ성만찬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성경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지 않으면 그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세례와 성만찬은 주님이 제정하셨다. 믿음으로 받는 세례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는 표식이다. 세례는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는 귀로 듣는 말씀이지만, 성만찬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느끼면서 더 친숙하게 느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뱅은 칭의와 성화를 두 가지 은혜로 보았다. 그는 세례를 칭의와 관련시켰고, 성만찬은 성화와 관련시켰다. 세례와 중생(칭의)은 한 번만 받는 것이지만, 성만찬은 반복된다. 세례 이후 성만찬을 계속 받을 때마다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④ 교회의 4가지 직분 칼뱅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돕기 위해 교회를 주셨고 그 안에 직분을 세우셨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연구를 통해서 목사, 장로 교사, 집사 네 가지 직분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 모든 직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다. 목사가 아니라도 필요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장로가 아니어도 다른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를 살피고 도울 수 있다. 집사가 아니라도 이웃을 구제하고 봉사할 수 있고, 신학자가 아니어도 주일학교 교사로 섬길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와 분수에 따라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능력에 맡지 않는 직분을 고집하거나 기존의 직분을 무시하게 되면 교회 질서가 어지러워진다. 그래서 성도는 전 교회의 화합과 질서를 고려하면서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⑤ 장로교제도의 특징 교회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정치제도를 발달시켰다. 첫째, 가톨릭,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는 감독(주교)제도를 가지고 있다. 감독제도는 감독이 예배와 설교 행정의 권한을 대표한다. 둘째, 회중제도이다. 교회 행정과 지도자 선출에 성도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셋째, 장로제도는 의회제도를 택하고 있다. 교인들의 투표로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회(당회)에서 주요 안건을 결정한다. 칼뱅은 모든 교인들이 안건을 결정할 때에 때로는 분위기와 기분에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교인들의 대표들이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는 귀족적 민주주의 정치를 선호했다. 칼뱅은 제네바 시 안에 컨시스토리(Consistory)라는 제도를 세웠다. 그것은 오늘날의 노회와 비슷한 제도였다. 그후 장로교회는 당회(session), 노회(presbytery), 대회(synod), 총회(assembly)를 발전시켰다. 개교회 안에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있다. 한 지역 안에는 그 지역의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서 노회를 구성한다. 장로는 개 교회에 소속되지만 장로교 목사는 노회에 소속된다. 장로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그 목사가 소속된 노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청빙이 된다. 주(state)나 도(province) 단위의 총회를 대회라고 한다. 그리고 전국적인 기관인 총회가 있다. 총회는 노회의 상위기구이지만 위법 사항이 없는 한 총회가 노회의 결정에 간섭할 수 없고, 노회도 당회의 결정에 간섭을 할 수 없고, 노회도 당회의 결정에 간섭을 할 수 없는 독자권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칼뱅주의가 들어간 나라들, 특히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네덜란드는 이런 장로정치제도의 영향으로 의회 민주주의가 일찍 발전했다.
⑥ 교회와 국가관계―강한 사회참여전통 칼뱅도 루터처럼 두 왕국설을 지지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구세주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주권과 교회의 주권을 다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칼뱅은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통치를 할 때에 성도와 교회는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신앙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강요할 때는 교회가 저항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대표자를 통해서 질서 있게 저항해야 한다고 했다.
■ 칼뱅은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성경에 비추어 말씀을 입증하려 했으며, 성경적으로 교회를 개혁했다. 그래서 개혁교회 전통은 말씀 앞에서 끝없이 자신을 개혁하는 것이다. 칼뱅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았고, 그것을 위해 교회를 섬겼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해서 구원하신 목적은 바로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마치 주님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칼뱅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만을 선택했던 사람이다. 바로 그 신학과 그 정신이 칼뱅을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예상문제
9장 칼뱅의 종교개혁사상(16세기)
○X 01.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파, 개혁파, 성공회, 재세례파, 감리교 5종류가 있었다. ( ) 02. 재세례파는 국가교회와 유아세례를 반대했다.( ) 03. 개혁파와 루터파가 일치하지 못한 것은 1529년 아우구스부르크 회담이었다.( ) 04. 칼빈의 개혁주의(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에 전파한 사람은 존 녹스였다.( ) 05. 칼빈의 개혁사상은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헝가리, 덴마크로 전해졌다.( ) 06. 칼빈을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로 부른 사람은 파리대학 총장 니콜라스 콥이었다.( ) 07. 「기독교강요」초판은 1536년이고 제5판은 1559년이었다.( ) 08. 칼빈은 세례를 칭의와 관련시켰고 성만찬은 성화와 관련시켰다.( ) 09.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 10. 칼빈의 교회론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 밖에 있다. ( ) 11. 루터와 츠빙글리가 일치하지 못한 것은 세례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이었다. ( ) 12. 16세기 성만찬 이해의 차이의 밑바닥에는 기독론의 차이가 있었다. ( ) 13. 루터파 성만찬은 낮아진 기독론을 강조하고 개혁파 성만찬은 높아진 기독론을 선호한다.( ) 14. 기독교강요 초판(1536)을 쓴 목적은? 박해받는 프랑스 개신교를 변호하고 종교개혁 사상을 왕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
15. 종교개혁의 5가지 종류에 들지 않는 것은? ① 루터파 ② 개혁파 ③ 성공회파 ④ 재세례파 ⑤ 청교도파
16. 16세기 성만찬 이해에서 바르게 짝지어 진 것을 고르시오 ① 루터파-화체설 ②로마가톨릭-공재설 ③ 츠빙글리-상징설 ④ 칼뱅-영적임재설
17. 다음의 도시 가운데 칼뱅의 개혁사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① 스코틀랜드 ② 네덜란드 ③ 스위스 ④ 스페인
18.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 이신칭의, 회개, 성화와 예정론은 어디에서 다루어지는가? ①1권 신론 ② 2권 기독론 ③3권 성령론 ④ 4권 교회론
19. 칼뱅은 성례전(세례 성만찬)을 ‘칭의’와 ‘성화’와 연결시켜서 이해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① 세례 – 칭의, 성만찬 – 성화 ② 세례 – 성화, 성만찬 – 칭의
20. 칼뱅의 4중 직제에서 예배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려고 둔 직제는? 21. 칼뱅의 4중 직제에서 말씀과 성례, 치리와 이웃사랑을 다 실천하는 직제는?
주관식 칼뱅의 신학사상에서 인간에게 있는 “이중 지식”은 무엇인가? 칼빈의 4중 직제 네 가지를 쓰라.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란? 칼뱅주의 초월 칼빈에게 “보이지 않는 교회”란 무엇인가? 직업소명설이란?
서술하라 칼뱅의 기독교강요 제2권(기독론)과 제4권(교회론)을 연결하는 제3권(성령론)은 어떠한 내용이 다루어지는가? 가톨릭의 화체설, 루터의 공재설, 츠빙글리의 회상설,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설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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