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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나님아들 2019. 12. 18. 16:59

교회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시작하는 말

인간은 자신의 삶을 결정할 때 자신의 본능에 의해 결정하기보다는 개인의 결단, 사회적 가치, 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는 많은 복잡한 요소가 작용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 종교적 신념,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의 특징 등이 서로 얽혀서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같이 우리의 선택에 있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근저에는 소위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다. 세계관이 무엇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가치관은 그 무엇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를 느끼는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세계관과 가치관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이며 이 둘을 함께 다루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본다. 본고에서는 이 둘을 따로 분리해서 살피지 않고 함께 다루고자 한다.

제임스 사이어에 의하면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이다.” 즉 세계관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총체적인 인생관을 표현하는 실재에 관한 그의 전제들과 확신들의 총체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전제들에 묶여있다. 단지 그러한 전제들과 확신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자신의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가르침의 사명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1. 세계관(가치관)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의 근저에 놓여 있는 뿌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이해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의식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선결과제는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불가피하게 세계관을 견지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경의 종류에 따라 보이는 대상의 모습과 색깔이 달라지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따라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인식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분별하고 그러한 세계관으로 자신을 잘 무장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 사람의 세계관이 그에게 이토록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고 할 때 그것을 검토하는 일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와 문화와 교회의 상황을 분석해야 하며, 이러한 상황분석에 대한 결과로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 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는 인간의 자기 초월의 능력을 거울을 보는 것에 비교하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결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약 1:22-25, 고후 13:5, 고전 11:28)

2. 기독교적 세계관(가치관)이란?

도예벨트의 표현으로 말하면 “세계관이란 아르키메데스의 고정점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를 이용하면 작은 힘으로도 엄청나게 무거운 물체를 쉽게 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만일 지구밖에 적절한 고정점만 있다면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세계관은 마치 이 지렛대를 갖다 댈 수 있는 고정점과 같아서 어떤 철학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의 틀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철학적 사색도 아르키메데스의 고정점과 같은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고는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예로 ‘GODISNOWHERE’와 같은 붙어 있는 단어를 읽는 것 하나를 보더라도 유신론자는 ’GOD IS NOW HERE’로 읽을 것이고 무신론자들은 ‘GOD IS NO WHERE’로 읽을 것이다.

뉴슨은 “기독교 세계관이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적인 진리들을 숙고함으로 얻은 깊은 진리들을 체계화한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기독교적 세계관도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양하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 칼빈과 웨슬레의 세계관이 다르고,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근본주의와 개혁주의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세계관과 다른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예벨트 이후 기독교적 세계관은 대체로 ‘창조-타락-구속’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창조-타락-구속’의 구조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포함해야 할 필수 요건들을 도출하는 기초가 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세속적 세계관을 성경적 입장에서 평가 비판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3. 기독교 세계관(가치관)에 대한 기독교 교육의 핵심

‘창조-타락-구속’의 구조에 대해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와 적용’에서 양승훈은 비기독교적 세계관과 비교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창조-타락-구속’의 구조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자 내용이 된다고 본다.

(1) 하나님의 창조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중심이 되는 하나님은 단일론(單一論)이나 이원론(二元論)의 신(神)과 뚜렷이 구별되는 분이시다.

– 신(新) 플라톤주의나 범신론(汎神論) 그리고 몇몇 동양 종교의 단일론 에서는 피조 세계를 하나님께 흡수시킨다. 그러나 유물론이나 자연 주의 그리고 세속적 휴머니즘의 단일론에서는 하나님을 피조 세계 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 이원론에서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이들 간의 관 계를 혼돈 하고 있다.

– 18세기의 이신론(Deism)에서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사의 진행을 부정했다.

– 19세기의 낭만주의는 자연의 생동성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함으 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왜곡시켰고,

– 현대의 자연주의적 휴머니즘은 모든 것을 자연으로 환원시킴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왜곡시켰다.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범신론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 없이 피조 세계만을 받아들이면 자연주의로 흐르게 된다.

성경에 나타나는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의 필연성이나 어떤 제한에 묶여 있는 분이 아니라 우주를 초월하신 지고(至高)의 주권자이시며 다른 어떤 것과도 대등한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원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창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 창조주와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기독교적 세계관과 단일론, 이원론, 이신론, 자연주의 등 비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큰 차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성경과 다르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 되지 않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피조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사실이다.

– 우주 가운데 있는 만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역동적인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의 섭리의 은총으로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므로 모든 피조물은 전적으로 이러한 하나님 의존적 특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존성을 주장하는 세속적 인본주의, 자연주의, 진화론 등이 있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 자존하는 존재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출애굽기 3:14의 말씀이 하나님의 자존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때 천하 만물 중에서 이와 같은 자기를 소개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는 것이다.(요 1:13)

–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강요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또한 피조 세계에 대한 목적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역사 전체에 피조물을 통해 그의 선하심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창조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우주는 정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되고 인도되는 유목적적 우주이다. 이것은 내재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에 의해 주어진 과정만을 이루어 가는 진화론적 목적과는 달리 초월적인 창조주께서 피조 세계를 위하여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인격적인 목적론이다.

– 피조 세계에 대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문화 명령이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아름답고 질서 정연한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이 피조 세계를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이 관리하도록 위임하셨다. 이 말은 이신론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관여하시지 않는다거나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이 피조 세계의 주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관리자요 청지기일 뿐이다. 인간이 청지기라는 사실은 피조 세계를 소극적으로 보존 관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를 조작 계발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피조 세계란 가시적인 자연계는 물론 인간의 책임이 수반되는 전 영역을 포함한다. 사회 구조나 경제 질서, 정치 제도, 논리 체계, 심미적 자존적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들이 하나님의 규범의 실현이나 형상의 반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 창조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뿐 아니라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서도 자신을 나타내신다.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히 자연 만물에 나타나 있다.(롬 1:19,20) 이런 피조물 중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창조 사역의 정점이다. 이간은 타락으로 훼손되고 제한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창 1:26,27)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한 속성을 나타낸다.

이상의 창조와 창조주와 창조에 대한 견해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기독교적 신관, 인간관, 자연관, 학문관, 도덕관, 결혼관, 역사관, 시간관 등의 기초가 된다.

(2) 인간의 타락

인간의 타락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타락 기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완전무흠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타락했다고 되어 있다. 이 타락 기사는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반역의 원인이 되었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 세계간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수많은 반(反) 성경적인 세계관, 학설이나 주장, 이데올로기의 기원이 곧 인간의 타락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풍미하고 있는 인본주의적, 유물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나아가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좀 더 심층적인 고찰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 있는 에덴의 원래의 피조 세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법칙에서 벗어남으로서 인간과 함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범죄 한 것은 그에게서 나올 온 인류의 범죄를 초래하였다.(롬 5:12)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고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어기는 것이 악이며 그 결과는 죽음임을 의미한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언약의 파기이며 하나님과 의존적인 관계를 거절하고 인간 자신이 자기의 주인임을 선언한 행위였다.

이런 불순종은 인간의 전인격적인 변화를 수반하여 지적으로는 불신앙과 교만이, 의지에서는 하나님과 독립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의 성품은 실제 삶에 나타나 이제 인간은 선한 일을 위해서는 굉장한 극기와 절제가 필요하지만 악한 생각이나 행동을 위해서는 조금도 결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그 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까지 손상을 가져왔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하와에게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전가하기에 이르렀다.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근심과 공포, 절망과 좌절, 이질감과 불합리, 무의미와 소외감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의 소외는 여타 피조 세계에까지 확장되었다. 타락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물질세계와 생물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성경은 말하기를 땅은 타락한 아담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고(창 3:17,18), 피조물은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기를 고대하게 되었다고 했다.(롬 8:20-22)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훼손된 관계 때문에 생긴 인간 죄악의 대표적 형태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피조 세계의 일부를 절대화시켜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섬기는 것이다. 이는 결국 창조주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의존적인 존재로 전락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피조 세계와의 관계까지 왜곡하는 것이다.

우상숭배와 관련한 성경적 견해는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면 대신 다른 것을 섬길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섬기지 않는 중립 상태에 있을 수가 없다. 이같이 무엇인가를 섬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어거스틴은 ‘종교적 집중’이라고 불렀다. 우상숭배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왜곡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진정한 행복, 안정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공허가 있다.”고 했고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의미는 모든 사람은 자기가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을 경배할 때 하나님을 닮아가고 우상을 섬길 때 우상을 닮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겨 창조 본연의 인간의 모습인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야 한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단은 본질적으로 불순종과 반역의 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우상을 섬기게 되면 사단은 우상을 통해 우상 숭배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인도한다. 이 시대에는 진보주의, 인본주의, 배금사상, 기술주의, 하이테크주의, 그 외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현대판 우상으로서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다.

일단 인간이 이러한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한편으로는 공포감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감으로 자신을 속박한다. 일단 인간이 우상에 의해 속박되게 되면 다음 단계로서 우상은 예외 없이 숭배자들로 자존적 존재임을 선언하게 한 후 하나님을 배격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특성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의 이면을 보면 예외 없이 우상 숭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배격하던 18세기 계몽시대에는 이성(理性)을 우상화하였고 19세기 낭만시대에는 인간의 자유를 우상화하였으며 20세기 물질문명은 과학을 우상시하였고, 21세기 사이버공간에 사로 있는 하이테크시대에는 인터넷이 우상시되고 있다.

(3) 타락한 죄인의 구속(救贖)

창조는 모든 존재와 인식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세계관 논의의 출발점이 되며, 타락은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피조 세계의 상태에 대해 근원적 진단을 내림으로 올바른 세계관의 평가 기준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구속은 피조 세계가 사단이 왕 노릇 하는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가 왕 노릇 하는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의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구속은 타락한 인간이 온전하고 무흠한 상태가 됨을 의미하기보다 그렇게 될 가능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회복이라는 의미로서 구속에 대한 이해는 구속이 인본주의적 유토피아나 과학기술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테크노피아나 컴퓨토피아와 전혀 다른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고 후자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속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모두 본래의 선한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redemption(다시 산다는 의미), reconciliation(화해), renewal(새롭게 함, 롬 12:2), regeneration(거듭남) 등은 원래 상태로 돌아감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예수께서 만물을 회복하신다는 것은 먼저 인간에게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형상(엡 4:24, 골 3:10)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피조 세계를 향한 본래 의도를 이루시고,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에 화목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피조 세계의 회복을 다른 말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혹은 도래(渡來)’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공간적, 시간적 개념보다 하나님의 통치권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이루어지는 곧이 곧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4. 기독교 세계관(가치관) 정립을 위한 교회 교육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상황은 가치 혼돈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사회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간은 자유의지를 소리 높이며 하나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를 신처럼 생각한다. 이러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이다. 이제 사이버 공간은 가정과 학교, 교회의 시공간의 차원을 뛰어넘어 인간의 영혼까지 잠입해 들어오고 있다. 문명의 최대의 이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최대의 위기로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교회 교육을 바라보는 기독교 교육적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성경보고 기도하면 된다는 단순한 신앙적 교육의 차원을 넘어 근본적인 차원의 기독교 교육적 접근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개인의 가치를 기독교 세계관에서 이해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적용하는 교육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글은 총회 교육부에서 발간하는 새 교재 ‘하나님 나라 : 부르심과 응답’ 교육 내용 범위에 속하는 다섯 가지의 주제(케리그마, 디다케, 레이투르기다,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의 일부를 다루는 글이다. 디다케의 범주 즉 교회가 마땅히 가르치고 가져야할 세계관과 가치관, 이 세상 속에서 참 그리스인으로 설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한 것이다. 교회는 위에서 다룬 개혁신학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확립하여 가르침의 내용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교과 내용을 대하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개혁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미 개혁된 신앙의 추구가 아닌 지속적으로 개혁해 나가는 정신이 교회 교육을 감당하는 이들의 삶에 깊이 스며들 때 이 도전 많고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 졸고를 마친다. 

김도일 교수(호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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