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충신과 진실[42](계19:11-21)

하나님아들 2019. 1. 27. 21:07

충신 진실[42]

성경: 계19:11-21절


본문에 '백마를 탄 자'는 그리스도입니다. 흰색은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며, 짐승과 그 추종자들을 심판하시 것이 승리의 내용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충신과 진실이라고 하십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공의로움'입니다. '그 눈이 불꽃같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는 능력을 말씀합니다. 한편 그분이 쓰신 '면류관'은 경주자들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이 아니라, 왕이 쓰는 왕관을 의미합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이 ‘피'는 십자가에 흘리신 속죄의 피 입니다.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15절)는 대적 자들을 포도주 짜듯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신 그의 뒤를 따릅니다.


본문에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수단이 세 가지인데 첫째는 그 입에서 나오는 검. 둘째는 철장, 셋째는 포도주 틀입니다.


여기에 '큰 잔치'는 짐승과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합니다. 이것은 16장에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킵니다.(16:13, 14, 16;17:2, 18;18:3). 그러나 결국 짐승이 잡히고,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잡히고, 이 둘이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집니다. 또 '말 탄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15절의 반복으로 말씀에 의한 심판입니다. 그들의 시체는 새의 먹이가 됩니다.


1. 흰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11절)


여러분 이단의 교주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흰말을 탄 모습입니다. 신천지의 이만희가 흰말을 타고 있습니다. 엘리야 복음 선교회 박명호도 흰말을 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도 흰말을 탔습니다. 세계일가공회 양도천도 흰말을 탔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재로 자신을 이긴 자니, 보혜사니, 하나님이니, 말세의 엘리야니, 정 도령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성경에 흰말을 타고 나오시는 예수님을 흉내를 내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흰말을 타고, 피뿌린 옷을 입고, 수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등장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역사는 삭막한 겨울, 씨를 심었던 봄, 무성한 여름을 지나서 열매를 맺고 따는 가을이 온 것입니다. 나무의 가치는 열매에서 나타나고, 진리는 마지막에 승리를 합니다. 젊을 때는 짐을 지고, 고생을 해도 노년이 평안한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메시지는 마지막 승리가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모든 불의와 악은 일소되고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긴다는 것을, 흰말을 타신 주님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환상을 보던 그때에, 교회는 지하에 있었고, 교인들은 박해 받고 고난을 격고 있었으며, 주의 종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진실이요, 진리이지만 로마의 힘과 박해 아래서 곧 무너지고 없어질 것같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에게, 로마의 황제들이 전쟁에 승리하면 흰말을 타고, 병사들과 같이 개선문으로 들어오지 않느냐. 백성들은 나가서 꽃을 뿌리며, 춤을 추며 환영하지 않느냐,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최후의 승리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어두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다. 너희들에게 있다. 교회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갈6:9절-.“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것은 그 시대 그들이나, 오늘 우리에게 지금 죽은 것 같아도, 망하는 것 같아도 , 끝날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드시 내가 이길 것이다.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낙심하지 말라. 흔들리지 말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의 승리자는 그리스도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이 어렵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고비를 넘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때가 있습니다. 고난의 밤이 있는데 그 밤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새벽이오고 아침이 온다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라, 믿고 살아라, 소망을 가져라 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 흰말을 타신 분의 이름이 나옵니다.

 

2. 충신과 진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1절)


국가 부도가 난 그리스는 국민 소득 3만 불이었던 나라였습니다. 유럽이 시작된 곳입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입니다. 세계문화 유산 1호인 아크로폴리스와 많은 유적지가 있습니다. 올림픽이 여기서 시작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 나라 말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한 나라입니다, 사도바울 당시 새로운 지식을 위해서만 시간을 사용하던 지성인들의 나라 아테네가 지금도 수도인 나라가 그리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종교를, 로마는 법을, 그리스는 문화를 세상에 주었다고 말하기도합니다,


이 나라는 대학원까지 무상 교육입니다. 기숙사 식비도 물론 모두 무상입니다. 정부가 일자리 만들어 주기 위해서 공무원 수를 계속 늘렸습니다. 그래서 공무원 수는 전체 노동인구 25%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은, 할 일이 없어서 점심 먹고 퇴근합니다. 그리스에선 매년 8만5000명의 대학 졸업생이 나오는데 나오는 즉시 실업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초까지 그리스는 유럽의 우등생 그룹에 들었는데 30년 만에 국가부도가 나고, 망한 이유는 돈으로 표를 사는 정치인, 그리고 그런 정치인을 계속 뽑아준 유권자의 합작품이었습니다. 사무직과 기술직은 모두 길거리에 나앉고, 대학생들은 마약과 성매매를 하며, 기업주들은 공장을 폐쇄하고, 매년 수백 명씩 스스로 생명을 끓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자기 살을 베어 먹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 나라 정치인들이나, 학자 그리고 지성들이 이렇게 하면 망한다, 안 된다, 하고 나서서 막지를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충신과 진실이라는 주님의 이름 앞에서 그리스 나라 이야기를 한 것은 그들의 지도자 들은 나라도 망하게 한 간신(奸臣)들이요, 진실을 버린 거짓말쟁이들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서 인용을 했습니다. 충신이라는 말은 헬라어 ‘피스토스’란 말로 충성스러운 자, 신실한 자라는 뜻이며, 진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참된 구주라는 말입니다. 충신의 반대는 간신이고 진실의 반대는 거짓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충신이 되고, 진실한 사람으로 살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요,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충신입니까. 진실한 사람,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기 필요나, 유익, 혹은 감정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간신이 되는 것입니다. 또 진실이라고 하는데, 말이 달라지거나, 마음이 달라지거나, 이전에 먹은 마음을 지금은 지키지 못하고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충신이요,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그 당시의 신자들에게 도전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닮는 것, 그것이 신앙이요. 과제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충신과 진실의 이름의 승리자인 나를 만날 것이고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싫어해도 바른 길이면 가야하고, 누가 좋아해도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신이고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시류와 바람에 따라서, 이동하고 흔들리지 말고, 살아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실재로 예수님이 지상에 있을 때 세례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목이 잘려죽었습니다. 그때 바리세인들이, 이제 예수 당신 차례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눅13:32절-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절-.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가지 말라고 제자들이 만류를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행20:24절-“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요즈음 신종 바이러스 메르스로 인해서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하는 것을 보세요. 국가의 유익이나, 안정은 관심이 없습니다. 선동하고 불을 지릅니다. 얼씨구, 잘됐다는 듯이, 대통령을 욕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국민세금 월급으로 받아먹고 뭐하고 있습니까. 6월5일 과학 저널 네이처에서 한국에서 메르스가 곧 사그라질 것이다, 라고 발표를 다 했습니다. 일본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반경 30㎞내에 320만 명 거주했는데 사고 1년 내 4만 8000명 죽었습니다. 앞으로 50년 내 85만 명이 방사능에 의해서 암으로 사망한다는 것입니다. 의사 49만 명이 비상진료를 했습니다. 또 후쿠시마 현의 인구 13만 6천여 명이 현 밖으로 나가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통령 하야하고, 나라가 절단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총리가 바꿨습니까. 일본 국민과 언론, 방송은 국가의 어려움이나 위기가 올 때 누구를 탓했습니다. 원자력 건설한 도꼬전력 회사 불 지르고 회장 감옥 보내고 그랬습니까. 어려움이 있으면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나라를 생각하고 힘을 합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구 탓하고, 욕하고 원망부터 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한해 교통사고와 자살로 2만 명 이상 죽습니다. 매년 에이즈 발생 600명 이상입니다. 1인당 평생 치료비용은 1억입니다. 이것은 메르스보다 더 심각합니다. 그런데 언론이나 정치인들 뭐라고 합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이런 중에 누구 탓하고 원망하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동성애 축제 허락하고 돈을 지원하는 것이 정치인들입니다. 충신이 어디에 있고, 진실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알고 있는 진실을 따릅니까. 진실하게 삽니까. 알면서도 지키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말씀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진실하지 않습니다. 충신이 아닙니다.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왜 충신이고 진실입니까. 배워라, 따라라, 너희도 이런 이렇게 되라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생각납니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3. 불꽃같은 눈

12절-“.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은 칠레에서 2003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마젤란 망원경인데 2018년에 완공예정입니다. 이 망원경은 (지름 8.7m짜리 거울 7개) 지름 25m입니다. 미국, 호주, 대한민국이 협력하여 건설 중이며, 우리도 완공이 되면 1년 중에 약 한달 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만드는 이유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기위한 것입니다.


치과에 가면 X레이 촬영을 합니다. 산모들에게는 초음파를 통해서 아기상태를 살핍니다. 장기의 상태를 좀 더 정밀하게 보려고 C. T촬영을 합니다. M. R. I는 해상도가 좀 더 좋아서 더 비쌉니다. 이것은 전부 보는 것들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멀리 보느냐, 안 보이는 것을 볼 것인가. 또는 많은 것을 한 번에 보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합니다. 또 나노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단위로, 고대 그리스에서 난쟁이를 뜻하는 나노스(nanos)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나노미터(nm)는 머리카락의 1만분의 1이 되는 크기가 됩니다. 이것을 봅니다.


현대 과학은 얼마나 멀리 보느냐, 얼마나 많이 보느냐, 얼마나 작은 것을 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원자나 핵문제는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인공위성이나, 우주개발은 먼 것을 볼 수 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의 집에 텔레비전전이나 핸드폰은 많은 것, 큰 것을 작게 해서 볼 수 있는 기술입니다. 세상은 보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사람 잘못 보면 평생 후회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천국을 보고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밝아집니다.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뜻의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의 3대 걸작 조각품 중에 하나입니다. 미켈란젤로가 25살 때 조각한 이 작품은, 어머니인 마리아가 죽으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인데, 이 조각을 완성한 뒤 미켈란젤로 자신이 자기 작품에 감명을 받아 “부오나로띠”라는 낙관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자기 이름입니다. 이런 조각을 완성한 미켈란젤로 부오라로띠는 쉬려고 휴양지로 갔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을 본 뒤에 문득 자신이 조각한 ‘피에타’상을 떠올렸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자연의 작품 앞에 나의 조각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그러나 주님은 이 자연 어디에도 자신의 낙관을 남기지 않으셨다. 아! 나는 너무 교만했구나.’ 이날 깨달음을 얻은 이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에 다시는 낙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능력 앞에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겸손을 배웠던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자기를 본 것입니다. 달라졌습니다.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을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의 눈으로 기록합니다.


제가 왜 보는 것에 대하여 계속 말씀을 드리느냐면, 불꽃같은 눈을 가지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우리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십니다. 과학은 물체만 보지만, 주님은 마음과 영혼까지 보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고난, 로마제국의 학대, 사단 마귀의 유혹과 역사, 그리고 개인이 아픔과 기쁨 그리고 가는 길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감추거나 가릴 수가 없습니다. 솔직하고, 정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감출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139편 7절-“.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결론

13절-“.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주님이 입으신 피 뿌린 옷은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옷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랍니다. 레인코드는 비옷이고, 정장은 격식을 갖춘 옷입니다. 곁 옷은 실내나, 식탁에서 벗는 옷입니다. 드레스는 예복이고, 작업복은 일할 때 입는 옷입니다. 잠옷은 밖으로 입고 나오면 안 됩니다. 속옷은 밖으로 나오면 결례입니다. 그런데 피 뿌린 주님의 옷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랍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피는 말씀을 통해서 알려지고, 말씀은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고 있다. 이런 말입니다.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바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서 윤리 도덕이나, 성공하는 법이나, 참고 견디는 것 같은 것이 핵심인줄 압니다. 말씀의 핵심은 피요, 피는 십자가요, 속죄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D L 무디는 거듭난 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 것을 서약하고 생활했는데도 늘 넘어졌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산으로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 신령한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아, 이제 됐다!”라는 생각을 하고 산을 내려와 살았지만 그 은혜가 한 달도 가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흥집회를 쫓아다니기도 했지만 이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화인 맞은 양심인가보다. 성경 속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의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마음인가보다”하며 스스로를 혐오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펴든 성경에서 로마서 10장 17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무디는 말씀을 읽기 시작했고, 이후에 그는 전 미국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붙잡으므로 모든 것을 가지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피요, 십자가요, 죄사함이요, 속죄요, 은혜의 출구요. 그리스도가 입고 있는 피 묻은 옷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사십부터가 아니다. 이십부터도 아니다 인생은 십자가로부터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조영호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생명샘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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