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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배학의 실제

하나님아들 2019. 1. 9. 16:52
예배학의 실제



 

 
 

예배학의 실제


이광복 목사 著

 

 

 

 

 


흰돌선교센타
서울 송파구 신천동 7번지
TEL. (02)202-7877∼80
FAX. (02)425-2569

 

 

서   언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주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자"를 찾으신다. 이것은 그만큼 기독교의 삶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주님의 가르치심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예배는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나는 만남의 광장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예배는 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한다(히 10:23∼25). 그러나 눈부신 사회적 발달로 인하여 생활이 안정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예배는 점점 퇴보되는 듯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에 본 저자는 부족하나마 13년간 목회현장에서 체험한 실천신학적인 의미로 본 예배의 문제점과 그 대책을 정리하여 교육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 교재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를 강조한다. 예배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들의 삶이므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축복·은혜"를 받으며, 성도들은 "헌금·기도·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에 중요점을 두었다.
   그리고 세속주의 형태와 자유주의 형태의 예배를 철저히 배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올바른 예배의 방향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돌리는 데 있는데, 자유주의나 세속주의 형태의 예배는 인간 중심의 예배를 드리므로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경건성과 은혜성을 떨어뜨리는 문제를 낳으므로 철저히 배격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의 자세이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좇아 드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중세의 예배처럼 성도들을 연극의 관람객으로 전락시키는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 아무쪼록 본 교재가 목회 현장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 출간하게 되었다.

                                           오직 예수!

주후 1997년 9월 1일
잠실에서 이광복 목사

 

 

목 차

Ⅰ. 예배의 개요……………………………………………………………………………………………9
  1. 원어적 의미…………………………………………………………………………………………11
  2. 성경적 의미…………………………………………………………………………………………14
  3. 학자들의 견해………………………………………………………………………………………19
  4. 예배의 중요성………………………………………………………………………………………21
  5. 예배의 요소…………………………………………………………………………………………24
  6. 예배의 목적과 원리와 기능적 역할………………………………………………………………29
  7. 예배의 축복…………………………………………………………………………………………36
Ⅱ. 예배의 역사……………………………………………………………………………………………39
  1. 족장시대의 예배……………………………………………………………………………………41
  2. 광야시대의 예배……………………………………………………………………………………45
  3.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예배…………………………………………………………………………49
  4. 신약시대의 예배……………………………………………………………………………………56
  5. 중세시대의 예배……………………………………………………………………………………66
  6. 종교개혁기의 예배…………………………………………………………………………………71
  7. 현대의 예배…………………………………………………………………………………………81
Ⅲ. 예배의 올바른 방향…………………………………………………………………………………93
  1. 예배의 갱신…………………………………………………………………………………………95
  2. 경건된 예배…………………………………………………………………………………………103
  3. 은혜스러운 예배……………………………………………………………………………………111
  4. 지정의가 조화된 예배……………………………………………………………………………114
  5. 드리는 예배…………………………………………………………………………………………118
  6. 말씀·기도·찬송의 조직적 예배………………………………………………………………121
  7. 종말론적인 신앙에 기초한 예배…………………………………………………………………126
Ⅳ. 예배의 종류와 조직…………………………………………………………………………………131
  1. 예배의 기획·연출·평가…………………………………………………………………………134
  2. 주일 대예배…………………………………………………………………………………………136
  3. 주일 찬양예배………………………………………………………………………………………153
  4. 수요예배……………………………………………………………………………………………158
  5. 금요예배……………………………………………………………………………………………163
  6. 새벽예배……………………………………………………………………………………………167
  7. 구역예배……………………………………………………………………………………………170
Ⅴ. 예배와 설교…………………………………………………………………………………………173
  1. 예배와 설교의 관계………………………………………………………………………………177
  2. 설교의 성경적 의미………………………………………………………………………………181
  3. 예배의 설교를 위한 준비…………………………………………………………………………189
  4. 예배를 위한 설교의 형태…………………………………………………………………………194
  5. 설교의 내용…………………………………………………………………………………………205
  6. 설교의 전달방법……………………………………………………………………………………208
  7. 세례 요한의 설교와 사보나롤라의 설교………………………………………………………214
Ⅵ. 예배와 찬송…………………………………………………………………………………………247
  1. 찬송의 정의…………………………………………………………………………………………249
  2.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254
  3. 예배찬송 선택의 주의할 점………………………………………………………………………257
  4. 예배 찬송 구성의 7대 종류………………………………………………………………………260
  5. 예배 찬송 인도자…………………………………………………………………………………263
  6. 고정 찬송……………………………………………………………………………………………268
  7. 각 예배의 찬송 사용법……………………………………………………………………………270
Ⅶ. 주의해야 할 예배……………………………………………………………………………………275
  1. 율법적인 예배………………………………………………………………………………………277
  2. 카톨릭 예배…………………………………………………………………………………………280
  3.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283
  4. 토착화 예배…………………………………………………………………………………………287
  5. 종교 다원주의 예배………………………………………………………………………………290
  6. 빈야드 예배…………………………………………………………………………………………292
  7. 신비주의 예배………………………………………………………………………………………296

 

 

 

 

 

Ⅰ. 예배의 개요(槪要)

 

 

                   1. 원어적 의미
                   2. 성경적 의미
                   3. 학자들의 견해
                   4. 예배의 중요성
                   5. 예배의 요소
6. 예배의 목적과 원리와 기능적 역할
                   7. 예배의 축복

 

 


【읽을 말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1. 원어적 의미

   예배(禮拜)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의 최우선 순위에 있으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서 쉽게 말하기가 어렵다. 현대에 와서 예배에 대한 학문적인 시도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예배(禮拜)의 어원적 의미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성경의 가르침과 여러 언어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히브리어의 의미
   구약에서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알맞은 어휘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예배(禮拜)의 전체적인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는 찾아보기 힘드나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의 두 단어를 소개할 수 있다.

   ① 아바드(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아바드 :    )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아바드(   )란 단어는 구약에서 290회 언급되고 있는데, 하나님을 섬길 때에 이 단어는 속박이 아니라 해방과 주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섬기다", "봉사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② 샤하(   )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샤하 :    )"(창 24:26)

   샤하(   )란 단어는 구약에서 170회 이상 나오는데, "엎드리다", "절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즉 "굴복하는 것" 또는 "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써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예배드리는 자가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⑵ 헬라어의 의미
   헬라어에서는 히브리어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禮拜)라는 의미의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프로스퀴네오(         )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프로스퀴네오 :          )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프로스퀴네오(         )란 "……을 향하여"라는 기본 전치사 프로스(    )와 "입 맞추다"(to kiss)라는 퀴네오(     )의 합성어로서 "절하다", "경배하다", "엎드리다", "입 맞추다", "굴복하다", "복종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60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요한계시록에 20회나 기록되었을 만큼 그 의미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전문적으로 경배(예배)하다"는 뜻이 있어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요 4:22∼24). 뿐만 아니라 지상의 통치자들에게 신체적으로 굴복 또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② 라투르기아(         )
"그 직무(라투르기아 :          )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1:23)

   라투르기아(         )란 단어는 "국가를 위하여 일하다"(to serve), "(유추적으로) 종교적인 봉사를 수행하다"(to perform religious service)라는 레이투르게오(          )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봉사, 섬김"(a service), "성직"(ministry)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이투르게오(          )는 "백성"(the people)을 의미하는 라오스(    )와 "일, 행위"(work)를 의미하는 에르곤(     )의 합성어로서 "국가와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 봉사한 일" 또는 "신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등을 가리킨다.

   ⑶ 독일어의 의미
   독일어로 예배(禮拜)란 "일", "섬김", "사역(Dienst)"의 의미와 연관시켜 "하나님의 예(Gott-
esdienst)" 또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Dienst f r Got)" 혹은 "이웃에 대한 봉사(Dienst am N chsten)"를 포함하여 기독교 예배의 본질을 더 깊게 이해하게 해 준다.
   ⑷ 영어의 의미
   영어로 예배(禮拜)란 "가치(價値)"라는 워스(Worth)와 "신분(身分)"이라는 쉽(ship)의 합성어로서 워쉽(worship)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Him supreme worth)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29:2)라는 말씀이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는 표현 등이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⑸ 한문의 의미
   한문으로 예배(禮拜)란 "경의를 표하다"는 예도 예(禮)와 "절하다"라는 절 배(拜)가 합성된 것으로서 "예를 다하여 절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겸손한 마음으로 경배하는 일을 나타낸다.

   ⑹ 한글의 의미
   한글로 예배(禮拜)란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진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므로 한글의 의미도 신에게 경의를 표하여 예를 올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 성경적 의미

   앞에서 예배(禮拜)란 단어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배(禮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신·구약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들을 통하여 예배(禮拜)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⑴ 구약의 의미
   원어적 의미로 볼 때 예배(禮拜)란 바로 전문적으로 경배하는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그 경배의 자세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① 성전을 향하여 경배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시 138:2)

   본문에 나타난 주의 성전은 다윗이 세운 성막을 가리키는데, 그는 성막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며 감사를 드렸다. 주의 전으로 불리는 성막은 곧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② 무릎을 꿇고 경배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라는 말씀은 초청이나 권유를 받고 "스스로 땅에 가능한한 길게 엎드리다"라는 의미로 찬양을 나타내는 적절한 몸동작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의 소유자이시므로 오직 그분만 경배의 대상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적 의미로 경배는 곧 찬양이 겸비된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

   ③ 하나님을 높이는 경배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내부로부터 여호와를 찬양하고 주의 발 아래 엎드려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경배하라고 선언하고 있다. 언약의 궤와 관련하여 성전이 여호와의 발등상(대상 28:2)으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여호와의 발등상 앞에 경배"라는 것은 바로 성전에서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것이다.

   ④ 거룩한 옷을 입고 경배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敬拜)할지어다"(시 29:2)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기에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되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거룩한 옷"이라는 하드랏 코데쉬(        )는 "거룩함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holiness)"에서 출발하는 "성스러운 의복" 혹은 "화려한 축제용 의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구약에서 "제사장의 옷"을 가리키며, 상징적으로 "성도의 행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한 옷을 입은 성도가 세속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⑤ 예물을 가지고 경배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신 26: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라는 신앙고백적인 헌사와 더불어 첫 소산의 광주리를 여호와 하나님 앞 제단에 두고, 그 제단을 향하여 경배하였다.
   이상의 증거를 통하여 볼 때 구약의 예배에 대한 관념은 종교적인 숭배, 순종, 봉사의 개념을 겸하여 마음 혹은 그렇지 않으면 마음과 몸의 존경을 표시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무한의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고 그분의 뜻을 좇아 봉사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⑵ 신약의 의미
   원어적 의미로 볼 때 예배(禮拜)란 바로 전문적으로 경배하는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보편적으로 "경배의 방법과 대상"에 있어 신약은 구약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그 경배의 자세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① 아기 예수께 경배
   "1……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고 하는데,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의 프로스쿠네사이(           )는 동방 군주의 백성이나 하나님께 겸손히 예배하는 자들에게 어울리는 깊은 존경심을 나타내는 동양의 풍습으로써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한다.

   ②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에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에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신령과 진정"이라는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는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완전히 성실하며 완전히 실제적(Real)이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예배는 "어디서"가 아니라 "무엇"으로 또는 "어떻게" 드리느냐가 문제이다. 따라서 예배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영으로, 곧 진실로 드려야 하며, 모든 예배는 진리의 영(요 16:13)이신 성령(롬 8:15)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③ 집에서 예배
   "13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도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3∼14)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행 2:1∼2)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 1:4∼5)는 말씀을 좇아 다락 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오순절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처럼 모인 무리들에게 임하였다.

   ④ 천국에서 예배
   "10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천국의 모습을 증거하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에도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피조물들의 주된 임무가 찬양을 곁드린 예배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만큼 예배는 신앙생활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도의 삶이 바로 예배화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⑤ 대환난에서 나온 자들이 경배
   "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본문은 대환난에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한 자들이 구원의 근원(根源)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증거하는 것이다. 본문 속에서도 예배의 대상과 방법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으니 곧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배의 모습은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의 삶과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 학자들의 견해

   예배(禮拜)의 원어적 의미와 성경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예배(禮拜)에 대하여 학자들은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⑴ 로버트 레이번(Robert G. Rayburn)
   "예배는 진실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와 존귀와 찬송과 사랑과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는 수단이다."

   ⑵ 헉스터블(John Huxtable)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對話)이다."

   ⑶ 지글러(Franklin Segler)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

   ⑷ 게인즈 도빈스(Gaines S. Dobbins)
   "예배는 틀에 박힌 날마다의 삶을 중단시키며, 우리의 변화되는 삶에서 영광과 존귀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그의 거룩하심을 묵상하며, 그의 사역에 새롭게 헌신하는 것이다."

   ⑸ 김득룡(金得龍)
   "예배(禮拜)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仲保)로 하여 하나님과 사람, 곧 예배자와의 교제(communication) 혹은 만남(meeting)의 징표가 되는 것이다."
   ⑹ 박형룡(朴亨龍) 박사
   "참된 기독교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무엇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이미 하신 바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다."

   ⑺ 본 저자의 견해
   기독교 예배(禮拜)의 정의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예배(禮拜)라는 용어 자체가 어느 한 가지 뜻으로만 한정(限定)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를 이해하려면 먼저 교회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라는 의미는 장미꽃의 그윽한 향기와 벌꿀의 달콤한 맛처럼 표현에 의해서 이해되기보다는 경험에 의해서 쉽게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의 종노릇하던 인간들(롬 5:12)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아 죄악과 사망에서 건짐을 받아 부르심을 입은 무리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삶의 전(全) 영역에 걸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부름을 받은 교회의 지체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광을 돌리는 예배화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중심은 주일 대예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란 성도들이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생활의 최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예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인 차원의 성격을 지닌 예배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예배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의 재림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모형으로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초대교회의 예배는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영원한 축제의 만찬을 맛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예배관이 퇴색(退色)된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임박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종말론적 성취의 차원으로서 드려지는 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4. 예배의 중요성

   기독교회에서 왜 예배가 중요한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삶 전체를 예배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예배는 신앙인들이 경배하는 신앙적 공언(公言)이기 때문에 예배는 신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회에서 예배의 중요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⑴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만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예배의 종교라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목사는 목회에서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의 성공은 예배의 성공에 의해 좌우(左右)된다. 또 예배의 성공은 바로 말씀과 기도와 찬송의 성공으로부터 보장된다. 그러므로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예배가 살아 있을 때에는 교회가 성장하였으나 예배가 죽어갈 때에는 교회가 타락하였던 것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대사관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의 성장은 바로 예배의 성공으로부터 좌우되므로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 된다.
   더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여받아 부르심은 입은 성도들이 모이는 공동체(共同體)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예배임을 증거하는 것으로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의 내용으로 입증되고 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은혜의 동참자들이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며 예배하는 무리들의 공동체이다."

   위의 신앙고백서의 주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예배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회의 핵심은 바로 예배이다. 그러므로 목회의 성공은 바로 올바른 예배로부터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⑵ 예배는 기독교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공동체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만남의 광장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에게 예배할 자를 찾으시느니라"(요 4:23)고 가르치신 말씀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배의 중요성은 기독교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과 속죄받은 성도의 거룩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예배에 있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김득룡 목사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일상생활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신령한 예배로 되지 않는한 우리 기독교의 생명을 상실된 자체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루어져야 될 신적 목적달성이 성립될 수 없고 또한 이것이 신앙을 기초한 합리적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며 예배가 기독교의 생명임을 증거하였다.
   이는 예배가 인간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구하시는 말씀과 신령으로 예배를 찾으심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 파견된 천국 대사관(빌 3:20)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엡 2:2; 고후 4:4)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통하여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엡 1:23)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과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생명이 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중요성이 하나님께서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사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에 있다면, 예배의 중요성은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⑶ 예배의 정신은 신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11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지어다 하니 14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1∼14)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될 일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 영원한 천국에서의 주요 관심사가 바로 예배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배의 광경을 모든 만물이 일치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는 찬송을 드릴 때 네 생물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이십 사 장로들은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분께 경배드리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채우는 것인 동시에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경배의 모형이 된다. 따라서 예배는 신앙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5. 예배의 요소

   예배는 중생한 성도들이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좇아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받은 심령의 분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중요한 예배를 위한 요소는 성도들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예배의 요소는 무엇인가?

   ⑴ 성시 교독문(Responsive reading)
   "11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12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14레위 사람은 큰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장색(匠色)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신 27:11∼15)

   교독(Responsive reading)은 서로 화답하는 말씀읽기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낭독되고 백성들은 그 언약의 말씀을 읽으므로 깊은 경험을 하게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명기 27장 11∼15절에 나타난 말씀을 들 수 있다.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과 저주의 산인 에발 산 중간 지점에 레위인이 서서 큰 소리로 율법을 읽었는데, 축복의 대목에는 그리심 산에서 "아멘"으로 화답하고, 저주의 대목에는 에발 산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므로 언약의 말씀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교독(Responsive reading)은 오늘날 예배에서 성시 교독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시 교독은 아름다운 언약의 말씀을 서로 화답하며 읽는 가운데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성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⑵ 죄의 고백(The confession of sin)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만나는 교제의 광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신 분이신 반면 죄를 용납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뵙는 예배의 시간에 죄악을 품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예배 전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숨김없이 낱낱이 고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죄악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⑶ 기도(Prayer)
   예배 중 기도는 매우 중요한 예전이 된다. 이때 드리는 기도의 순서는 범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목양적 책임을 담당할 목회자를 위한 기도와 그날의 예배와 말씀의 은혜에 대한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간략한 것이 좋다. 예배 중의 대표기도에 대해서 김영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회중이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짧게, 분명한 말씀으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것이므로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간절히 기도할 때나, 혹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조심스레 말씀을 드리듯이, 혹은 신하가 임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이듯이 정중하고 겸손하게 기도해야 한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공적 예배시 설교에 앞서 드리는 기도를 매우 중요시 한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그날의 예배를 주관하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인 동시에 말씀 중심의 신학을 기초로 하는 개혁주의 예배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⑷ 성경 낭독(The reading of scripture)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눅 4:16∼17)
   "1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2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느 8:1∼4)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 13:15)

   공적 예배에서 성경 낭독은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낭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도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신 사건(눅 4:16)은 바로 구약에서 회당 집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반복하신 것이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사도들도 회당에서 성경을 읽는 것으로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낭독은 예배의 한 행위가 된다. 따라서 성경 낭독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회중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도록 읽어야 한다. 그리고 영감스러운 말씀 낭독은 모든 회중들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낭독해야 한다.

   ⑸ 찬양(Hymn)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대하 5:13)

   본문은 솔로몬 성전의 봉헌식에 나타난 찬양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진실한 찬송을 드릴 때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백성들은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적 예배에 빠뜨릴 수 없는 또다른 요소는 바로 찬양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홍해에서 애굽의 마병대가 수장되는 장면을 바라보며 모세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과 미리암의 인도아래 여인들의 화답하는 찬송(출 15장)으로 입증되며, 주의 만찬이 제정된 후에 찬미의 노래(마 26:30)가 있었던 사실, 찬송할 수 없는 여건인 감옥 속에서 찬송과 기도를 드렸던 바울과 실라의 사건(행 13:25) 등으로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공적인 예배 중에 찬양대의 찬양과 회중의 찬송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공적인 의식임을 알 수 있다.

   ⑹ 설교(Preching)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6∼38)
   "8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8∼9)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악된 심령을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힘입어 나아가 두루 전파하므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따라서 설교는 목회에서 면류관의 다이아몬드와 같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의 성공은 바로 설교에서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보아도 사도들이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린 곳에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성도가 교통하시기를 원하셨음을 알 수 있다.

   ⑺ 헌금(Offering)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1∼2)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신 16:17)

   기독교의 헌금은 하나님의 주신 복을 따라 감사하므로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상징이다. 따라서 헌금은 단순히 돈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시간, 노력, 정성, 땀, 기술 등이 포함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헌금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고후 9장). 미리 준비하고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각각 정한 대로 드리되 즐겨내는 헌금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의 신앙으로 드려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헌금을 통하여 성도의 마음을 물질로부터 하나님께 옮기는 지렛대 역할(마 6:21)을 한다. 따라서 헌금은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다.

   ⑻ 축도(Benediction)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신 6:24∼2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신명기 6장 24∼25절의 내용이 구약적 축도의 형태로서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축복의 약속이라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신약적 축도의 형태로서 약속이 아니라 바로 선포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축도는 폐회를 알리는 마지막 절차가 아니라 바로 예배의 결실을 맺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성도들이 축도를 예배의 폐회를 알리는 하나의 절차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축도에 바로 예배의 모든 절차에 대한 축복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담은 선포가 담겨진 것이다.
   따라서 축도의 의미는 기도 형태의 "있기를 축원하나이다"가 아니라 바로 "있을지어다"라는 선포 형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종종 이 점을 오해하여 어찌 집례자가 "있을지어다라고 할 수 있느냐?"며 기원의 형태인 "있기를 축원하나이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축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선언으로써 하나님 편에서의 행위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집례자는 예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축도는 예배의 꽃이자 그 예배에 참석한 자들이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갈 때 주를 위하여 섬기는 일과 주를 위하여 살아갈 것을 요구하며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축도에 대한 예배 참여자들의 자세도 변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축도는 예배의 마지막을 알리는 절차가 아니라 바로 오늘 예배의 결실을 맺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도가 끝나기도 전에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자세는 농부가 일 년 농사 후 결실의 타작 마당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과 같은 것임을 깨우쳐 줘야 한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잠 3:16)

   비록 목회자가 두 손을 들고 성도들을 축복하는 것이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축도가 선포되는 그 시간은 성도들이 그날 드린 예배의 결실을 맺는 귀한 시간임을 가르쳐야 한다.

 

 

 

 

 

 

  6. 예배의 목적과 원리와 기능적인 역할

   기독교는 예배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무질서의 의식절차가 아니라 분명하고도 명쾌한 해답인 생명수를 주는 만남의 광장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예배에 나타나는 본질과 원리와 그 기능적 역할은 무엇인가?

   ⑴ 예배의 본질
   기독교는 예배의 종교라 할 만큼 예배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종종 오해할 때가 많은데, 이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예배의 본질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부와 힘과 전능하심을 찬양드리게 하려 함이었다. 즉 피조물로 하여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방법은 무엇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죄인된 인간이 속죄함을 받아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귀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의 역사는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인격적 계약 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계약을 지키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교제를 주셨으니 이것이 곧 예배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일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범죄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이 막혀버렸으나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시켜 주실 것(창 3:15)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예배는 바로 긍휼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죄 많은 인간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이루어지는 만남의 광장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② 구약의 예배는 상징적이다.
   "42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3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46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2∼46)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세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구약의 성막(성전, 회당)은 가시적으로 표시되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 중에 거주한다는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예배의 장소인 성막(성전, 회당)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시는 만남의 광장이다.

   ③ 신약의 예배는 실체적이다.
   "1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너희도 성령(聖靈)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處所)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聖殿)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구약의 예배가 상징이라면, 신약의 예배는 바로 실체이다. 즉 구약의 예배가 성막(성전, 회당)을 통하여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 안에서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건물로 지어져 가는 실체(엡 2:20∼22)이다.

   ⑵ 예배의 원리
   기독교의 핵심이자 생명과 같은 예배는 어원적인 의미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귀중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아니할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생명있는 종교가 가지는 유일하고 충분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예배의 원리는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① 예배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드리는 것이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성령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요 14:16, 26)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성령의 활동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 계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사 예수님의 하신 일을 기억(행 2:33)나게 하시고, 그 성령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위대한 구원의 역사적 사실이 절감되고, 참되고 진실된 예배의 응답을 끌어내는 내적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성공적인 예배는 바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삶에서 성령의 감동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예배의식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김득룡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예배의식이란 기독교의 계시에 의하여 형성되고 성령에 의하여 인도된 지난 날의 예배를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예배도 마땅히 성령의 역사적 통로(channel)를 따라야 할 것이다. 예배의 진실성(reality of worship)은 예배 형식의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배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self―oblation)과 연합하는데 있는 것이다……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24)야말로 성령의 지도와 억제 아래 드리는 참 하나님께로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② 예배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공동체적 행위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모인 공동체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관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로서 기독교 예배란, 창조주이시고, 섭리자이시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와 헌신으로 응답하는 동시에 회개와 구원의 확증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생(生)을 위탁하는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시므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으로 건축되는 것(엡 2:20∼22)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줄로 연결되어 성장되는 공동적인 접근이다.

   ③ 예배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증거를 준비하는 것이다.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본문은 예배가 중심이 된 초대 교회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된 성도들이 모이면 사도들의 말씀으로 은혜의 확신 속에 거하며 떡을 떼는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사랑의 줄로 굳게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지어져 가는 성전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니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모습은 모이면 말씀과 성도의 교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의 건물로 지어져가고 헤어지면 천국 대사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성도들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증거를 준비하는 영적 재충전(再充電)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회에서 배출되는 선교의 역꾼들로 인하여 거대한 공룡과 같았던 로마 정부가 주님이 승천하신 지 불과 300년도 못되어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인정하는 놀라운 복음전파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⑶ 예배의 기능적 역할
   실천신학자 뢰슬러(D. R ssler)는 "예배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에 대한 관계의 표현이요, 묘사"라고 하므로써 기독교의 예배는 기능적 의미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예배가 기능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① 가정의 기능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4∼46)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2:32)

   초대 교회의 예배는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눠 믿음의 공동체로서 가정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예배를 통하여 쉼을 얻고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얻고 기도로 시작하였다가 기도로 마치는 삶이 되었다.

   ② 치유적 기능
   "14너희 중에 누가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赦)하심을 얻으리라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役事)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4∼16)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영육간에 치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서신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던 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예배는 치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 전도 집회 때에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특히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치유될 것 같은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사도행전은 증거(행 5:12∼16)하고 있다.
   그러므로 "병든 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는 야고보서의 기록은 바로 이러한 치유의 역사가 예배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을 근거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영육간에 치료받는 이적이 동반됨을 알 수 있다.

   ③ 학교의 기능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聖靈)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7∼38)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오순절날의 베드로 설교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들은 오늘날 예배의 모범이 되는데 이는 그 예배를 통하여 무리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은 일반전도 집회에서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회개하는 무리들의 수가 날로 더하여 갔음을 증거(행 2:47; 4:4; 6:7)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말씀을 선포하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케 하는 학교의 기능을 동반하고 있다.

   ④ 훈련의 기능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초대 교회의 예배는 사도들이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그 말씀(마 28:19∼20)을 좇아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배를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행 5:42)라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양육시켰다. 그러므로 예배는 더욱더 충성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양육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⑤ 축제의 기능
   "1온 땅이여 들으라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2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1∼5)
   "26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신·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는 축제적 기능이 있다. 예배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말씀으로 가득찬 축제의 기능을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양육시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사역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만찬의 거룩한 질서(고전 11:17∼34)를 통하여 예배가 곧 축제임을 증거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는 예배가 희열이 넘치는 축제임을 암시(벧전 1:8)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매 주일예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으로의 만남의 광장이요, 그 만남의 광장을 통하여 죄 용서함과 영원한 나라의 약속의 확인으로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축제인 것이다.

   ⑥ 기도의 기능
   "13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3∼14)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

   예배는 영혼의 호흡인 기도가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즉 예배 속에는 기도의 기능이 포함된다. 초대교회의 예를 볼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성령을 받기까지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도들과 일백 이십 인의 무리가 모여 기도에 힘쓸 때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려고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둘 때 교회가 모여 예배를 통하여 기도로 간절히 구할 때 옥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생명과 같이 귀중한 예배는 기도의 기능을 동반하게 된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바로 그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아 신령한 하늘로부터의 축복이 임하게 된다.

   ⑦ 신앙의 기능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기독교 예배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것으로서 그 핵심은 신앙의 기능이 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입은 자들이 부르심을 받아 모인 믿음의 공동체로서 신앙의 기능이 동반된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의 정신은 바로 신앙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교회(행 7:38)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적 기능의 역할이 있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제공되는 신앙의 기능이 동반된다.
  7. 예배의 축복

   예배는 기독교 신앙에서 결단코 제외시킬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의식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기독교 삶의 핵심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귀중한 예배를 통하여 어떠한 축복이 임하는가?

   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레 10:3)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만물 위에 절대적으로 뛰어나신 하나님께 그분의 합당한 위치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임무는 없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사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심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성자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허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므로 예배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삼위일체되시는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이다.

   ⑵ 성도가 기쁨을 누린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찬양하리이다"(시 43:4)
   "52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2∼53)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순종을 통해 누리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승천하시는 주님께 경배한 자들이 큰 기쁨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었듯이 하나님을 예배한 자는 언제나 큰 기쁨을 안게 된다.
   예배를 통하여 아무도 손해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므로 하나님과의 연합이 되는 예배임을 알고 행하는 자는 복(福)이 있을 뿐만(요 13:17) 아니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눅 6:38) 후한 헤아림으로 심령 속에 넘치는 기쁨이 임하게 된다.
   그러나 예배의 부산물인 기쁨을 얻기 위한 조건부 예배를 드리는 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도는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어야 하듯, 예배로 인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 중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긴다"(삼상 2:30)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를 통하여 모든 영광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축제가 될 때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입게 된다.

   ⑶ 가정의 축복이 끊어지지 않는다.
   "12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18내가 네 나라 위를 견고케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비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대하 7:12∼18)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하나님이 들으신 바가 되어 "네 나라 위를 견고케 하되……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축복을 받게 된다. 이 약속대로 솔로몬의 가계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가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러워하는 축복이 된다.
   사실 이 약속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 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지지 않는 왕위 계승의 축복으로 이어진다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는가? 이러한 축복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는 솔로몬이 받은 모든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된다.

   이상과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서 심령으로 기쁨을 얻은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주변에 드러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전도의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백성들에게로 돌아왔을 때 "얼굴에 광채가 났던 일"(출 34:29)로 입증되며,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롬 14:7)는 사도 바울의 권면으로 입증되고 있다. 더구나 넘치는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 세계로 확산될 때 주의 재림을 앞당기게 되고(마 24:14), 또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앞당겨지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성도들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참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소요리 문답 제1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인생관인 동시에 성경적 예배관이기 때문이다.

 

 

 

 

 

 

 

 

 

 

 

 

 

 

 

 

 

 

Ⅱ. 예배의 역사

 

 

 

                       1. 족장시대의 예배
                       2. 광야시대의 예배
3.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예배
                       4. 신약시대의 예배
                       5. 중세시대의 예배
                       6. 종교개혁기의 예배
                       7. 현대의 예배

 


【읽을 말씀】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遍滿)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4∼15)

 

 

 

 

 

 

 

 

 

 

 

 

 

 

 

 

 

  1. 족장시대의 예배

   족장시대의 예배란,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것과 같은 믿음의 공동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족장과 그 가정에 대해서 언약을 세운 개인제단과 가정제단을 포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족장들의 가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족장들의 예배는 어떻게 드렸던가?

   ⑴ 가인과 아벨   믿음으로 드린 예배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3∼5)

   성경 최초로 나타난 제사는 바로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드린 제사였다. 그러나 인류 최초로 형제가 드린 아름다운 제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동기가 된 부정적인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물은 외면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시므로 인류 최초로 형이 동생을 살해하도록 하셨을까? 그 해답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성경 최초로 언급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것은 믿음으로의 제사였기 때문이며,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아니한 것은 믿음으로의 제사가 아니였기 때문이라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즉 히브리서 11장 4절에 비추어 볼 때 아벨이 바친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1:29)로서 믿음의 제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고 사도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즉 "가인 = 악한 자"로, "아벨 = 의로운 자"(요일 3:12)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제사는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에 의하면 "아벨의 제사 = 믿음의 제사", "가인의 제사 = 불의의 제사"라는 등식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⑵ 노아 시대   구원의 감사 예배
   "20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드리고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0∼22)

   노아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은 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의 가족 여덟 명(벧전 3:20)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였으나 성경적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예배의 형태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보호와 은혜의 교제를 더욱 바라는 노아의 감사하는 마음이 희생제사의 불꽃 가운데의 연기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⑶ 족장 시대   예배의 생활화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公道)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가인과 아벨의 제사, 노아의 제사는 개인적인 것이었다면, 족장 시대의 제사를 흠향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족장과 그 가정에 대해서 언약을 세운 개인제단과 가정제단이었다. 따라서 대표적인 족장 시대의 제사를 소개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예를 들 수 있다.

   ① 아브라함
   "6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창 12:6∼7)

   본문은 아브람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창 12:1)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된 후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감사를 드린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이러한 사실은 족장들의 삶이 이동(移動)과 더불어 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것의 시초가 된다.
   이 외에도 아브람은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나무 밑(창 13:18), 후손에 대한 언약을 체결할 때(창 15:9∼10), 모리아 산(창 22:2), 브엘세바(창 21:33)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자세에 대하여 칼빈은 "아브라함은 마음에 있는 제단을 어디로 가든지 지니고 다니셨다."라고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사건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원리에 대한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데 이는 예배가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presence)가 선행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곳만이 참된 예배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 참된 예배에는 희생의 제물이 그 중심임을 가르치고 있다.

   ② 이 삭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4∼25)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모리아 산에 번제를 드릴 때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사건을 경험(창 22:1∼17)한 아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은 이삭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미음의 가정에서 자손들에게 우선적으로 물려줘야 할 것은 신앙의 유산으로서 참된 예배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③ 야 곱
   "16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본문은 나이많아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은 하란으로 피난하는 길에 루스라는 곳에서 잠을 자던 중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꿈을 꾼 사건의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하고 단을 쌓았다.

   이상의 사실을 볼 때, 역사적으로는 족장 시대의 제사는 주로 하나님께서 족장과 그 가정에 대해서 언약을 세운 개인 제단이며, 가족 제단이었으며,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는 생명이 넘치고 진리에 가득차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축제의 장소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오실 뿐만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마음 속에 임재하셔서 생명수의 풍성함으로 체워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장시대 제사는 피흘려 죽게한 짐승을 제물로 불태워 드리는 번제의 행사로 이루어진 예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의 제물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긴 영적인 교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광야시대의 예배

   모세의 주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렇다면, 광야시대의 예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출애굽의 필요성은 무엇이었던가?

   ⑴ 출애굽이 필요한 이유   제사를 드리기 위함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출 5:1)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출 7: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1)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 8:27)

   애굽의 고역으로 인하여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케 하시는데 출애굽의 이유가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순종하는 믿음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는 애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려오게 된 배경이 야곱의 아들 요셉으로 출발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⑵ 안식일의 대표적인 예배   예배의 절대성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留)하는 객(客)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안식일은 예배를 위하여 특별한 날로 지정되었으며, 예배이외의 그 어느 것도 허락지 아니하셨다. 심지어 "네 문안에 유(留)하는 객(客)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을 만큼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는 예배의 절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⑶ 광야에서의 제사와 성막   최초 제도적 예배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장소로서 혹은 제사하는 장소로서 성막을 설치케 하셨다. 그리고 그 장소를 통하여 이스라엘과의 만남, 속죄, 화목의 관계를 이루시겠다고 제정하셨다. 성막의 지성소 안에 속죄소가 있는데, 이곳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만나 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든 일을 알려주신다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 주심을 약속하신 곳이었다. 율법시대의 성막 예배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

   ① 성전 이외의 장소에서는 제사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이외의 장소에서 제물을 드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② 제사의 모든 의식절차가 세부적인 것까지 규정되어 있었다.
   율법시대의 예배의식은 성전의 설비, 제사장의 예복, 희생 제물의 종류와 방법 등 세부적인 것까지 규정되어 있었다.

   ③ 대리적, 위탁적 제사였다.
   율법시대의 제사는 모든 백성들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백성의 대리로서 제사 의식을 행하고 백성들은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다만,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장막절)의 세 번의 절기 제사에는 12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④ 예배는 의식적이었다.
   율법시대의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처럼 설교는 없었으며, 동물의 희생적 제물로 제사의식을 대신하였다.

   ⑤ 예배는 상징적, 모형적이었다.
   율법시대의 동물을 희생제물로 드린 제사는 영적 진리를 가시적, 구성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면과 미래에 나타날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모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시대의 제사는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상징(히 10:1∼18)하는 것이며, 모형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갈라지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어버린 것(마 27:50∼51)을 예표한다. 율법시대에는 특별히 제정된 제사 규례가 있는데 5대 제사와 7대 절기를 위한 제사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5대 제사

                                  ① 번제(레 1:1∼17)
                                  ② 소제(레 2:1∼16)
                                  ③ 화목제(레 3:1∼17)
                                  ④ 속죄제(레 4:1∼12)
                                  ⑤ 속건제(레 5:14∼19)

 

   이후 율법시대의 공적인 예배는 모세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드려졌으며, 그 말씀에 근거하여 지어진 성막은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行陣)을 인도하는 중심이 되었다.

   둘째, 7대 절기
                                 ① 유월절(레 23:5)
                                 ② 무교절(레 23:6∼8)
                                 ③ 초실절(레 23:9∼14)
④ 칠칠절(레 23:15∼22)
⑤ 나팔절(레 23:23∼25)
⑥ 속죄일(레 23:26∼32)
⑦ 초막절(레 23:33∼36)


   유대인의 7대 절기는 매년 드리는 것이지만, 이 절기 행사는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율법이 가르치는 바를 좇아 드린 절기 행사였으나 그 상징적인 의미는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예표하는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그림자라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건들은 바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실체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실체는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우리는 주님의 강림하심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3.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예배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제사는 제물 중심의 예배였는데,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하여 그 땅의 토착 종교를 접하고 탈선하므로 범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알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나 사사들을 통하여 근근히 그 제사의 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⑴ 왕국 시대의 제사   성막 제사 제도의 계승
   "8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 제물을 이리로 가져 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번제 드리기를 필(畢)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삼상 13:8∼14)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접어든 이스라엘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성막의 제사제도가 그대로 이어져 왔음을 증거하고 있다. 즉 성막의 제사제도가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증거는 매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습(삼상 1:3)과 불량자 아들을 둔 엘리 제사장(삼상 2:12∼17), 그로 인하여 제사장의 직분이 엘리로부터 사무엘에게로 옮겨지는 일(삼상 3:1∼18) 등으로 입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수행하는 직무자에 대한 중요성은 사울과 사무엘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사울이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기한내에 제사장(선지자) 사무엘이 오지 않으므로 삼천 명의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하는 삼만 명의 블레셋 군대가 주는 위협은 살기가 되어 돌아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에서 떠나 흩어지자 초조해진 그는 율법이 금하고 있는 바를 어기게 되었다. 제사장만이 집도할 수 있는 번제와 화목제를 왕인 자신이 대신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의 왕위가 다윗에게 이어질 만큼 제사(예배)를 집도하는 제사장의 직분이 중시되었던 당시의 배경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다.


   "37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38오벧에돔과 그 형제 육십팔 인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호사로 문지기를 삼았고 39제사장 사독과 그 형제 제사장들로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 40항상 조석(朝夕)으로 번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게 하였고"(대상 16:37∼40)

   제2대 왕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집으로 상징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은 계시되었으나 다윗 대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장소 즉 모리아산 언덕에 성전이 건축되었다.

   "2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가로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할 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3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6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저를 택하여 내 아들을 삼고 나는 그 아비가 될 것임이라"(대상 28:2∼3, 6)

   성막의 제도를 철저하게 준수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려 왔던 다윗 왕은 자기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짓고 싶어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너는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건축하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성전 건축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들 대에 이르러 그토록 원했던 성전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⑵ 솔로몬 시대의 성전   성전 예배의 삶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을 마친지라 이에 그 부친 다윗이 드린 은과 금과 모든 기구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두었더라"(대하 5:1)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는 특별히 절기 행사 때마다 축제의 예배가 진행되었는데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의 7대 절기와 5대 제사로 드렸다. 특별히 솔로몬 시대의 성전 예배를 통하여 찬양대가 사용되었는데, 아버지 다윗 왕 시대에 악기로 찬양하던 4,000명의 찬양대(대상 23:5)가 존속되었으며, 제사장(대상 24:1∼31), 찬양대(대상 25:1∼31), 성전 문지기(대상 26:1∼9), 성전 재산 관리(대상 26:20∼28), 재판관(대상 26:29∼32) 등의 직분자로 분류하였다.
   ⑶ 회당 예배   전국 각처의 예배
   "1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2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5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8:1∼6)

   예루살렘을 비롯한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는 그 지역 예배를 위하여 특수한 회당이 있었는데, 이 제도는 예수님 당시(마 12:9; 막 14:54; 눅 4:14∼20)와 초대교회의 기록(행 6:9; 13:5; 14:1; 17:1)에도 나타나고 있다.

   ① 회당 예배의 역사
   회당 예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론은 유대학자인 페투코브스키(Petuchowski)의 연구발표에 근거하여 일반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로 소개되고 있다.

   첫째, 바벨론 포로시대에 등장했다는 설
   유대교의 회당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그리고 에집트 북쪽 엘레판타(Elephantine) 지역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더이상 하나님께 경배와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함께 모였고 조상으로부터 전수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토라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경배드리게 된 것이 회당제도의 출발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둘째, 마카비 시대에 등장했다는 설
   시편 74편이 마카비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믿는 자들은 8절(적들이 모든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불태웠다)에 근거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콜 모아데 엘:            )라는 표현이 회당제도의 시초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셋째, 바모트(bamot)로 보는 설
   신명기의 개혁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항상 제사드리러 지방에서 예루살렘(중앙지)으로 올라가야 하는 불편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곳곳에 "높은 제단들"(bamot)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제물 없이 예배하게 한데서 유래된 것이 회당이라는 견해가 있다.

   넷째, 제사장의 직무 해결을 위하여 생긴 것으로 보는 설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학개 선지자의 설득으로 제2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하게 되나 제사장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제사장의 실직(失職)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이 미쉬마도트(mischmadot)로 전국을 24지역으로 분배하여 제물은 중앙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고 각 지역 24곳에서는 매일 정한 시간에 지역 회당에서 제사장들을 교대로 직무케한 것이 회당의 출발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의 네 가지 견해 중 본 저자는 유대학자인 페투코브스키(Petuchowski)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네 번째 이론인 제사장의 직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생긴 제도로부터 출발한 것이 바로 회당제도의 역사라고 본다. 이러한 사실은 학개 선지자의 주도 아래 제2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면서 시행하게 된 제물의 예배는 적어도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한 성전파괴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유대교를 존속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회당은 로마 제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통하여 약 150여 개소에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의 침공)과 솔로몬 성전의 파괴, 예배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떠난 오랜 기간 예언 활동의 쇠퇴 그리고 성경에 대한 가속적인 강조는 예배의 새로운 형태를 가져왔다."는 지글러(Segler) 교수의 주장은 성전 예배에서 회당 예배로 전환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국가적,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후에도 회당만은 존재하여 율법을 중심한 유대의 종교적, 사상적 공동체가 되었으며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② 성전제사와 회당예배의 차이점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 드려진 제사와 흩어진 유대인을 위하여 지은 회당에서의 예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첫째, 예배 형태의 차이가 있다.
  

   둘째, 예배 장소에 차이가 있다.


   셋째, 예배 내용으로 차이가 있다.


   넷째, 예배의 참여 형태에 차이가 있다.


   다섯째, 존속 기간에 차이가 있다.


   여섯째, 목적에 차이가 있다.

 
   일곱째, 용도에 차이가 있다.

   ③ 회당 예배의 순서
   회당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도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성전제사를 대치하고 랍비의 지도아래 국가의 공동 신앙을 위한 예배의 장소로 설립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식일날 회당 예배의 순서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첫째, 말씀 선포가 있었다.
   회당예배의 첫 번째 순서는 예배자가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신 6:4∼9; 11:13∼21; 민 15:37∼41 등의 말씀)를 낭독하고 참석자들은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에 읽는 쉐마(   )는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명기 6장 4∼9절 → 단 한 분 밖에 없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한 신앙고백
·신명기 11장 13∼32절 →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받을 축복과 불순종자가 받을 징벌
    ·신명기 28장 1∼11절 →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

   둘째, 기도가 있었다.
   쉐마(   )가 낭독된 후에는 조용한 침묵의 시간으로서 개인의 간구가 연결되는 기도의 순서가 있었다. 이때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총 18가지인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작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백
·영광 → 택하신 백성을 보호, 기르심,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
     ·간구 → 죄 용서, 이스라엘의 회복, 건강 생명의 보존 등 삶의 지혜에 대한 간구
               기근, 질병, 재난에서의 구원, 메시아의 오심 등

   셋째, 율법 낭독이 있었다.
   감사의 기도로 낭독을 시작하여 율법을 낭독하고, 감사의 기도로 낭독을 그친다.

   넷째, 예언시의 낭독이 있었다(찬송).
   율법 낭독의 중간과 설교 후에는 시편으로 찬미하며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오늘날의 찬양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다섯째, 설교와 권면이 있었다.
   낭독된 율법은 흩어진 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의 후손들을 위하여 그 지방의 언어로 통역하고 이어서 읽은 말씀에 대한 해석과 설교가 있었으며 권면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설교자는 특정한 직분에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회당장의 배려에 따라 정신적, 도덕적으로 필수적인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요구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라는 누가의 기록은 예수님이 당시 회당장은 물론 유대 사회에서 정신적, 도덕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섯째, 축복의 서원이 있었다.
   강해와 권면 혹은 설교가 있은 후 축복의 서원(민 6:23∼24)에 아멘으로 화답하므로서 회당 예배는 끝을 맺는다.

   이상과 같이 이스라엘의 예배의 역사는 개인적, 가족적인 제사에서 민족적인 예배의 생활이 공적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구약 예배(제사)의 개념과 신약 예배의 관계는 정일웅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하며 구약의 제사를 마치고자 한다.

   "우리가 여기서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유대종교의 예배는 결코 기독교의 예배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구약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게 되는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인 발전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예배로 나타난다. 그 때문에 특히 유대종교의 회당예배와는 깊은 역사적 연관성을 지닌다. 유대종교의 예배가 기본적인 형식으로서 감사와 속죄와 화목에 있다면, 회당예배는 이 세 가지의 신학적인 의미를 토라와 기도로 새롭게 발전시켰던 것이다."

 

 

 

 

  4. 신약시대의 예배

   구약의 제사(예배)와 신약의 예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구약은 신약에 열려져 있고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구약의 제사(예배) 형태는 신약에 의해 열려질 모형이라면, 신약의 예배는 구약에 감추어졌던 제사 형태가 지니고 있는 진리의 실체이다.

   ⑴ 예수님의 사역과 예배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예배의 형태는 그림자요, 모형인 구약시대의 제사가 주님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실체인 예배로 성취됨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예배의 특성은 어떤 것인가?

   ① 예배의 완성자로 오셨다.
   "13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성전 안에서……"(요 2:13∼14)
   "21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9)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예루살렘 성전도 찾으셨고 또 거기 머무셨을 뿐만(요 2:13 이하; 5:1; 7:14; 12:12) 아니라 성전 주변에서 자주 가르치셨다(막 11:27∼33; 14:49; 요 7:14; 8:20). 또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구절(막 13:2; 14:58; 마 26:61; 요 2:19)이나 성전 예배의 여러 절기를 지키는 일들(요 5장, 7장, 8장)과 수난의 주간을 대부분 성전에서 보내신 기록들은 성전 예배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유대사회에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유보적 사건으로 보여진 죄(罪) 용서의 권세를 수행(막 2:5∼7; 눅 7:48)하시므로 성전 예배의 제사 질서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유대종교의 지도자들로부터는 하나님의 권한을 남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졌다.
   반면에 주님은 회당 예배에 참여하셨을 뿐만(막 1:21 이하, 39; 6:2; 요 6:59; 18:20) 아니라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성경을 읽었고, 해석하였으며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눅 4:16∼21; 막 1:2
3∼28; 3:1∼6)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주님이 성전에도 참석하시고 회당 예배도 참석하심은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완성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이 구약의 제사(예배)나 회당 예배의 완성자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② 새로운 예배 형태의 질서를 구현하셨다.
   "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에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예수님을 만나 깊은 감동을 받은 사마리아 여인은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던 "예배를 위한 장소가 어디냐?"라는 시비에 대한 궁금증을 질문하게 되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운 그리심 산의 예배처는 옛날에 백성들을 축복한 장소(신 11:29; 27:12)로서 성경의 기록을 따라 이 산에 제단을 세우도록 명령이 있음을 안다(신 27:4 이하).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할 곳이 있다고 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신약시대의 예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즉 주님은 유대인의 형식화된 의식 중심의 예배와 사마리아 사람들의 말씀 없는 자의적인 예배를 반대하며 아버지께서 기뻐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형식의 유무(有無)보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가능한 예배의 실제와 본질을 가르치셨다.

   ③ 새롭게 성례전을 제정하셨다.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9∼13)
   "26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예수님이 새롭게 제정하신 의식인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마 6:9∼13), "성만찬"(마 26:26∼28), "세례"(마 28:19∼20)는 구약의 성전 예배나 회당 예배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예배의 구심점으로 지켜오는 의식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명령하신 이 성례전은 유대사회의 평민에 속하는 백성들과 버림받은 자들과 제자들 그리고 주님께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만찬은 식탁의 교제(공동체)로서 현재적으로 역사하는 종말에 대한 증표가 되었다.

   ⑵ 사도들의 사역과 예배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과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는 사도들의 사역과 예배 형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① 성전에서 모여 예배드렸다.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37∼47)

   본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초대교회의 예배 형태를 가장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일어난 청중들의 반응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회개의 예배(38절)
②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는 예배(42절)
                          ③ 기도에 전혀 힘쓴 예배(42절)
                          ④ 떡을 떼며 교제하는 예배(42절)


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는 예배(43절)
                  ⑥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44∼45절)
                  ⑦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예배(46절)
                  ⑧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46절)
                  ⑨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배(47절)
                    * 예배의 결과
                  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음(47절)
                  ②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해짐(47절)

   ② 하루 세 번의 기도회가 있었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행 2:15)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행 3:1)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육시더라"(행 10:9)

   유대인의 기도시간은 하루에 세 번―제3시(오전 9시에 해당), 제6시(오전 12시에 해당), 제 9시(오후 3시에 해당)에 기도를 드렸다. 유대인들은 세 차례의 기도시간을 엄수하여 기도시간이 되면 가까운 회당을 찾아가고 회당이 없으면 적당한 곳을 찾아가 기도드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시간이 "제9시(오후 3시에 해당) 기도 시간"이었으며,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간 시간이 제6시(정오에 해당)"였다는 기록은 사도들이 하루에 세 번 기도드렸음을 증거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세 번 기도드리는 것은 초대교회의 풍속이 되었다.

   ③ 예찬의 예배를 드렸다.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 11:17∼22))

   사도들이 사역하던 기간 중에는 그들이 지참한 식사를 들면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된 교제를 하는 것을 보여주는 애찬 시간(고전 11:17∼34)이 있었다. 그리하여 저녁 예배에도 주의 만찬을 겸한 애찬을 들었는데 교회가 부흥하므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집과의 차별이 생겨나므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부유한 자들은 포식을 하는 반면 가난한 자들은 굶주리게 되는 일이 일어나므로 교회에 건덕을 세우지 못하게 되었다.
   식사가 예배에서 분리되었다는 증거는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暗礁)요"(유 1:12)라는 유다서의 기록이나 "성만찬 성례전을 목적으로 하는 이른 아침의 모임을 단념하는 것이 비록 내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박해 하에서의 '평범하고 해롭지 않은 음식'을 위한 모임을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포기하였다."라는 플리니(Pliny)의 기록들은 성만찬을 위한 모임은 이른 아침의 예배를 통하여, 2세기 초기경에 애찬(agape or love feast)은 주일 오후 식사가 된 것 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각자가 집에서 식사를 하고 오게 하여 교회에서 애찬을 중지시키고 다만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고전 11:23)라며 주님이 명하신 만찬만 실시하여 모든 교인이 참여하도록 권하였다.

   ⑶ 초대교회 예배
   신약시대를 거쳐 주후 200년까지를 일컬어 초기 교회라고 한다. 이 시대는 예수님 당시 처럼 유대의 전통 사회에서 새로운 세계를 전파해야 하므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가혹한 핍박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예배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사례를 낳게 되었다.
   사실 이 당시 예배의 관심과 형태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이 거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겨진 다섯 개의 문헌은 우리로 하여금 초대교회의 예배 내용을 파악하는데 밝은 빛을 제공해 주고 있다. 즉 이 시대의 예배에 관한 중요한 문헌은 주후 140년까지 고린도에 보내는 클레멘트의 로마에서의 편지(Clement's First Letter; 주후 96년), 통치자 트라얀(Trajan)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핀스(Pning's)의 편지(주후 112년), 주후 112년 비두니아(Bithynia)의 로마 총독인 플리니(Pliny)와 같은 이방인들의 서간, 주후 115년에 순교한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간들, 헬라어로 기록된 교재 3장 231페이지의 다다케(Didaeche; 주후 130∼140) 등이다.

   ① 문헌에 의거한 초대교회의 예배 순서
   위의 다섯 가지 문헌들에 나타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초대교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써 먼저 예배자의 마음을 주께 드렸다.
   둘째,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고 그 말씀의 뜻을 강해하면서 필요한 신앙과 행위에 대해 설교를 했다.
   셋째, 기도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주님의 재림을 소원하는 기도(Maranatha)를 드렸고 아멘의 응답을 활용했다.
   넷째, 예물의 봉헌으로써 감사와 헌신의 표현을 계속했는데 이 예물은 주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도의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공동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고백과 신앙의 고백을 하였으며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섯째, 예배의 극치를 이루었던 성만찬 및 예수님의 공동체 일원이 되는 세례를 베풂으로써 예수님의 구속 사건의 새로운 다짐과 은총의 경험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의 순서는 매일매일의 예배가 종말론적인 의미로 드려졌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박해 속에서 카타콤을 중심으로한 비밀 예배로 변화하면서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닌 예배로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주후 90년경의 기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대표적인 기도문
   "우리 아버지 당신이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보여주신 당신의 아들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라"

   * 조각(덩어리에서 떼어진)에 관한 기도
   "즉 우리 아버지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보여주신 생명과 지식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라. 이 (빵)조각이 산들 위에 뿌려지고 다시 모여서 하나가 되듯이 당신의 교회로 하여금 세계의 끝에서부터 당신의 왕국으로 하나가 되어 들어가게 하소서. 내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능력이 당신께 영원히 있습니다."

   이 기도문 중 "이 (빵) 조각이 산들 위에 뿌려지고 다시 모여서 하나가 되듯이"라는 내용은 바로 모이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헤어지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세계의 끝에서부터 당신의 왕국으로 하나가 되어 들어가게 하소서"라는 것은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가 영원한 천국에서도 하나가 되는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 식사를 마친 후에 기도
   "거룩한 아버지 우리 마음에 주신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보여주신 지식과 신앙과 불사의 힘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라. 전능하신 주여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당신께 감사하도록 인간에게 먹을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신령한 음식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당신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라. 주여 당신의 교회를 기억하여 모든 악으로부터 구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완전하게 하소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사방으로부터 당신이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신 왕국으로 교회를 모아 주소서. 대개 능력과 영광이 당신에게 영원히 있습니다. 은혜를 주시고 이 세상은 사라지게 하소서. 다윗의 하나님께 호산나 누구든지 거룩한 자는 오게 하라. 거룩하지 못한 자는 회개케 하라. 주여 오시옵소서. 아멘"

   ② 교부 시대의 예배
   교부시대의 예배 순서는 기독교 신앙, 예배에 대한 것을 다룬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의 변증서(주후 155년경), 힙폴리(Hippoly)의 교회법에 잘 나타나 있다.

   《저스틴(Justin Marty)의 예배 순서》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낭독
    ·사회자의 설교(해석)
    ·기도(모두가 일어나서)
    ·빵과 포도주의 봉헌(성찬식)
    ·사회자의 기도(중보의 기도)―온 교우는 아멘으로 화답
    ·성찬의 나눔
    ·감사의 예물을 드림
 
   이때에 공적으로 예배드린 날은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주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의 첫날에 빛을 만드신 것에 근거하였다. 이 날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1∼14)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강조되었으며, 감사의 예물은 과부와 고아 등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저스틴(Justin Marty)은 세 편의 글을 남겼는데, 첫 번째 변명, 두 번째 변명,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이다. 특별히 첫 번째 변명 67쪽에서 초대 교회 당시의 예배 모습을 글로 남겼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요일이라고 불리우는 날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다.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사도들이 쓴 글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다. 읽는 것이 끝나면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그 읽는 내용에 맞추어 선하게 살아갈 것을 충고하고 권고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모두 일어나 기도를 드린다. 기도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와 물이 나온다. 모임의 주재자는 전과 같은 방식대로 자기의 힘 닿는 데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함께 아멘 하면서 그 기도가 상달되도록 찬송을 드린다. 감사를 드린 음식물들을 각 사람에게 나눠주고 또 참석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보낸다. 재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뜻에 따라 내고, 모아진 것은 주재자가 간직한다. 그는 그것을 고아나 과부, 병들거나 그밖에 다른 이유로 핍절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나그네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 우리는 모두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날은 하나님이 흑암과 물질을 변화시켜 세상을 만드신 첫째 날이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주님을 토요일 전날에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그 다음날(즉 일요일) 주님은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이 모든 것을 가르치셨음을 우리는 당신들에게 알렸다."

   이 내용은 교회사의 아주 초기의 문헌으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본문에 나타난 여러 가지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요일에 예배드렸다.
   "우리는 모두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초기 교회의 정규 예배는 토요일이 아니라 바로 일요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둘째, 한곳에 모였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모든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다"는 것은 정규적 예배를 위하여 지정된 장소로 모인 것을 의미하므로 오늘날 주일 대예배를 위하여 교회로 모이는 것과 같다.
   셋째, 성경 봉독이 있었다.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사도들이 쓴 글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예배 순서에서 성경을 봉독하는 것이다.

   넷째, 설교가 있었다.
   "읽는 것이 끝나면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그 읽는 내용에 맞추어 선하게 살아갈 것을 충고하고 권고한다"는 것은 오늘날 예배의 순서에서 목사의 설교와 같은 것이다. 즉 읽은 말씀에 따라 해석하고 그 해석된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적용할 것을 권면하였을 것이다.

   다섯째, 기도의 자세가 있다.
   주재하는 자의 충고와 권고가 끝나면 "모두 일어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기도, 헌금은 일어나 드리는 것이 성경적임을 이들의 예배에서 입증하고 있다.

   여섯째, 아멘의 화답이 있었다.
   모임의 주재자가 "자기의 힘 닿는 데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하였다는 것은 오늘날 예배의 순서에서 기도 후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과 같다.

   일곱째, 찬송을 드렸다.
   "그 기도가 상달되도록 찬송을 드린다"는 것은 오늘날 예배의 순서에서 찬송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그들의 기도 자세가 얼마나 진지했는가를 묘사하는 동시에 찬송도 기도의 일종임을 깨우쳐 준다.

   여덟째, 성도의 교제가 있었다.
   "감사를 드린 음식물들을 각 사람에게 나눠주고 또 참석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보낸다"는 것은 오늘날의 예배에서 성도들의 교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의 교제가 얼마나 진지했는지는 "참석하지 못한 사람"에게까지 배려하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아홉째, 헌금을 드렸다.
   "재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뜻에 따라 내고"라는 것은 오늘날의 예배와 비교할 때 헌금과 같다. "자신의 뜻에 따라 내는 물질"은 곧 스스로 감사해서 드리는 헌금의 모습이다.

   《힙폴리(Hippoly)의 예배순서》
    ·인사말(salutaio) :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마음을 들어 주께로 향합시다(Sursun Corda)
    ·감사를 그에게 드립시다(Gratias aganus)
    ·감사의 기도(Dankgebet)
      우리는 당신의 사랑하는 종 예수를 통하여 당신(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찬 제정의 말씀(Einsetzungsworte) : (고전 11:23 이하)
    ·상기(Anamnese) : 구원 행위에 대한 기억(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성령임재의 기도(Epikless)

   ③ 대전환기를 맞이한 기독교의 예배
   로마 정부의 박해 속에서 이십 명 또는 삼십 명씩 분산되어 동굴(catacomns)을 찾아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켜왔던 초대 교회의 예배 형태는 성찬의 나눔으로 예배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성만찬을 오해한 로마 정부로부터 기독교의 무리는 "식인종(食人種)"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내 피와 살을 먹으라"는 의식을 행하는 기독교인의 성만찬은 로마 정부에서 볼 때에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이유는 바로 기독교인을 로마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해받던 기독교 예배에 대전환기가 도래하였으니 곧 주후 312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은 사건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박해당했던 로마 정부로부터 보호받으므로 오히려 부패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중세 시대의 예배

   주후 312년은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날인 동시에 중세시대의 암흑기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가 구교로 공인되자 흩어져 예배를 드렸던 기독교인은 한곳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몰려드는 교인을 수용하기 위한 대형화된 교회의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콘스탄틴 대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받은 후에 나타난 또다른 현상은 몰려드는 교인들을 위하여 예배를 집전할 수 있는 성직자의 위치와 권위가 확장되므로 말미암아 예배의 조건들은 외적인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암흑기의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중세 시대의 예배는 어떻게 드려졌는가?

   ⑴ 동·서 교회의 분리
   주후 312년 로마의 박해만 받던 기독교가 드디어 로마의 국교로 공인받게 되자 이제껏 복음적인 면으로만 이어져 왔던 예배의 형태가 외적인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천되므로 기독교 타락의 독소로 싹트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주후 380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된 후 부작용이 예배 현장에까지 미쳐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 형태를 발전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국교로 공인된 이후 급격하게 늘어나는 기독교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므로 동·서 교회로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 과정에 대해서 정장복 목사는 "인위적인 정교한 형식은 수많은 기도문을 비롯하여 교독과 교창(交唱)을 양산(量産)하게 되었다. 특히 주님의 만찬은 미사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그릇 이해되는 결과를 가져와 구약의 제사 제도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갖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더욱이 마리아 숭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자 및 유물 숭배 사상이 나타나 초대 교회 시대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로까지 비약해 버리고 말았다. 이토록 비약한 의식 위주의 교회는 드디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간의 예배 양식에 대한 심각한 대립을 야기시켰으며 그 끊임없던 논쟁의 결말은 1054년 동방과 서방 교회의 영원한 분열이라는 불행을 남겼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의식 위주의 예배 형태는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예배 양식에 심각한 갈등을 일으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분열되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방 교회는 제정 러시아를 중심으로 존속한 반면 서방 교회는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 전세계에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⑵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차이점
  
   ① 예배의 의식에 차이가 있다.
   아름다운 것과 추(醜)한 것을 구분하기를 중시하는 헬라 문화를 배경으로한 동방 교회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시와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숭앙하는 정신이 예배와 접목되어 신비스러운 의식 행사가 많이 발견되는 반면, 전세계를 중심으로한 초기의 서방 교회는 말씀의 예전(禮典)으로부터 시작하는 본래의 순서를 그대로 지켰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의 예배는 더 많은 의식과 상징을 사용하고 예술성을 추구하므로 의식과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의 신비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예배의 의식으로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되고 있는 천상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배 광경을 재현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이와 같은 동방 교회의 풍성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상징적인 예배는 찾아 볼 수 없고 보다 간략하고 직접적인 예배를 드렸다.

   ② 말씀에 차이가 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말씀에 있다. 동방 교회는 그 출발 배경의 영향을 받아 언어를 사용하는 말씀의 예배 의식보다는 신비의 능력과 표현이 담긴 예배 의식을 사용한 반면, 서방 교회는 언어를 사용하는 예배 의식이었다.
   그 결과 동방 교회의 예배 의식은 개혁자들의 눈에 우상 숭배라는 낙인이 찍혀 이단적이라는 취급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③ 성찬식의 차이가 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또다른 차이점은 바로 성만찬의 의식에 있다. 의식과 영광스러운 미(美)와 신비성을 추구하는 동방 교회는 성만찬 의식에서 떡과 포도주의 준비를 그리스도의 수난의 내용을 세밀하게 상징하는 의식으로 바꾸어 교제 행위에 의미를 둔 반면, 서방 교회는 구원이 십자가의 화목제사의 결과라고 보기에 성만찬 의식을 화목제사의 관념으로 보았다.

   ④ 공통점은 예배에서 말씀의 쇠퇴기를 맞이 하였다.
   동방 교회의 예배는 정교한 의식주의로 인하여 신비화, 의식화된 반면 서방 교회의 예배는 원시적 예배(primitive rite)에 대한 곡해(曲解)로 화체(transubstantiation)의 신비화가 절정을 이루는 구경거리 연극으로 변해 버렸다.
   그 결과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예배의 형태는 말씀과 성례전이 균형을 이루었던 초대 교회의 신앙으로부터 벗어나 강론의 쇠퇴(衰退) 내지는 강론 없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⑶ 서방 교회의 예배 형태
   중세 시대의 예배의식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분열되었으나 중세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서방 전역을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의 고정된 예배 순서의 본보기를 가진 로마 카톨릭식이었다.

   ① 로마 카톨릭식의 예배 형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은 신비 종교와 이방 종교의 관습과 의식을 첨가하여 구약의 이전 제사로 돌아간 형태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예배의 본질적인 면을 "보고 만지는 성찬의 예식에서 찾고 음미(吟味)하려는 감각적 호소 방식을 택함"으로써 미신(迷信)적인 요소를 교회로 유입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세 교회의 미사는 라틴어로 거행되어 회중이 이해하지 못하므로 회중은 예배 참여자라기보다는 성직자에 의하여 연출된 하나의 연극을 구경하는 관람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미사에서 성경은 개방되지 아니하고 신부와 소수의 성가대에 의하여 라틴어로 진행되어 일반 성도들은 사제의 강론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더구나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사의 의식은 신자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주의 만찬은 미신과 뒤섞였고 성도들은 일 년에 한번 부활절 축제 때에만 참석하게 되어 교회의 미사는 성도들과 더욱 동떨어진 거리감만 주게 되었다.
   이처럼 카톨릭의 예배 형태가 본래 예배의 모습을 벗어나므로 잘못된 형태는 거기에 멈추지 아니하고 유료(有料) 미사와 면죄부 판매와 같은 계속되는 모순을 범하면서 성도들을 우맹(愚氓)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역사를 암흑기(暗黑期)라고 부를 정도로 침체의 늪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② 로마 카톨릭식의 예배 순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예배의 본을 벗어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식화는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되었는데, 그들이 드렸던 예배의 순서와 성찬식의 순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배의 시작(Introitus) : 찬양대와 회중의 찬송
       ② 단계적인 기도(Stufengebet) : 죄용서를 비는 고백의 기도
       ③ 주여 자비를(Kyrie eleison) : 9번 하던 것을 3번으로 줄였음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Herr, erbarme Dich!)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rbarme Dich!)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Herr, erbarme Dich!)
④ 영광의 찬양(Gloria in excelsis) :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Laudamuste)
       ⑤ 종합기도(Kollektengebet) : 예배시작에서 기도부분의 종합 이해
           (그날의 순서 변경에 관련된다)
       ⑥ 성경낭독(Schriftlesung) : 신약의 서신서 가운데서 낭독
       ⑦ 중간에 찬송(Zwischengesange) : (Graduale; Haleluja)
       ⑧ 복음서 낭독(Evangelium)
       ⑨ 설교는 읽은 성구의 해석이나 다른 본문의 낭독과 함께 강해하거나
          강론함(한국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강론이라고 부른다)
       ⑩ 사도신경 : 신앙고백(사도신경, 니케아신경)
       ⑪ 일반인을 위한 기도


       ① 주기도문(pater noster) : 성찬의 식사기도 내용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②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 : 떡 뗌에 있어서의 노래
       ③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여, 당신은 하나님의 어린 양……
          (Lamm Gpttes, Cheiste, du Lamm Gottes……)
       ④ 준비기도(R stgebet) : 성례의 영접 전, 회중이 준비하는 기도로 공동으로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마 8:8)를 기도한다.
       ⑤ 성체교환(Communionspendung) : 회중·찬양대의 성체교환의 노래로 분병
       ⑥ 성찬 후 기도(postcommunio) : 끝마침을 위한 감사의 기도
       ⑦ 축도(Segen) : 축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 기원(고후 13:13)


       ⑧ 최장 : 평안히 가라(Ite, missa est) 평안히 가라 너희들을 세상에 파송하노라
         "예배에서 믿음을 강화하였으니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도록 나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에로……

   ③ 로마 카톨릭식 예배의 문제점
   프랭클린 지글러(F. Segler) 교수는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① 미사의 화해적 성격을 강조하여 모든 종류의 악폐를 유발하였다.
       ② 회중은 예배의 참여자이기보다 단순히 방관자가 되었다.
       ③ 미사는 서로 맞지 않고 알기 어려운 서로 다른 출처에서 취한 기도들을
          주어 모은 것이 되었다.
       ④ 성찬의 음식과 예배자들을 봉헌하시는 성령님을 위한 기도가 없었다.
       ⑤ 미사는 죽은 날로 드려졌기 때문에 정적이었다.
          이것은 무식한 회중 사이에 미신을 조장하였다.

 

 

 

 

 

 

 

  6. 종교개혁기의 예배

   중세 시대의 예배는 형식적이며 종교 의식으로 전락시키는 문제를 낳게 되어 성도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는 불안한 신앙상의 갈등이 일어나므로 개혁의 욕구가 팽배해 갔다. 왜냐하면, 중세 암흑기의 교회 예배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전물로 전락하였고 일반 성도들은 구경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의 예배는 일반 성도들이 모르는 라틴어로 된 예배서와 기도서를 사용하므로 일반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였으면서도 소외감만 느끼게 하는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직의 강화는 교황이라는 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는 문제를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종교개혁의 횃불이 밝혀지게 되었다.

   ⑴ 루터(M. Luther)의 예배 특징
   1517년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교회 문에 95개 조문을 내어 걸므로 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역에 퍼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루터에 의해 일게 된 종교개혁의 강한 신조는 로마 카톨릭의 의식주의적인 예배에 불만을 갖게 하였으며 복음적인 믿음으로 기울어지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자극을 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루터의 예배가 지닌 특징은 어떤 것이었는가?

   ① 루터의 예배에 대한 개혁
   루터는 비록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으나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열할 생각보다는 복음적 태도에 입각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의 균형을 다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루터를 일컬어 지금껏 전래되어 온 예배의 의식을 개혁할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은 지극히 보수적인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루터는 단순히 카톨릭의 라틴어 미사에서 독일어 사용과 함께 독일어 찬송을 부르는 의식의 변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530년 챨스 5세에게 바치기 위하여 준비되었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24장에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이 미사를 폐지한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솔직히 미사는 우리 가운데 보다 더 경건과 열정으로 집례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사의 공적(公的)인 집례에 아무런 변동은 없었습니다. 다만 라틴어로 된 응답송에 우리의 독일어 찬송을 첨가하여 불렀을 뿐입니다. 이것은 오직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성경이 명하고 있는 성만찬의 의식이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인간의 준비로서 공로적인 행위의 제사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성례라는 인식으로 전환시켰다. 또 사제는 구약의 제사장이 아니며 모든 믿는 자가 다 제사장이라는 "만인(萬人) 제사장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수용함에 있어 성경에서 명확하게 금지되어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변경하기를 주저하므로서 그의 개혁은 충분히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다만, 그의 개혁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를 더욱 알기 쉽게 해준 공로가 있다.
   또 독일 미사(Deutscher Messe)에서는 중세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라틴어 찬송도 독일 민요 가락의 찬송으로 대치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한 그는 오르간의 사용을 허용하였으며, 찬양대로 하여금 라틴어로 합창을 하도록 하여 음악을 장려하게 하였다. 음악에 탁월한 능력를 가진 그는 예배에 찬송을 즐겨 적용시켰을 뿐만 아니라 37개의 찬송을 직접 작곡하였다.
   또 로마 카톨릭이 주장한 일곱 가지의 성례 중 성경에 분명한 근거를 가진 세례, 성찬, 고해성사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제거하였으며 성찬은 다시금 빵과 잔으로 나누어져야 함과 예배는 각 나라의 언어로 드려져야 함을 강조하고, 예배의 순서는 기독교의 산 예배를 돕는 것이지 법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므로 성도들이 구경만 하던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로 개혁시켰다.

   ② 루터의 독일 미사(Deutsche Messe)에 나타난 예배 순서
          ① 시작(Introitus: 찬송: 시편)
          ② 주여(Kyrie:dreimal 9번 하는 대신에)
          ③ 죄고백의 기도(Kollektengebet)
          ④ 서신낭독(Epistle)
          ⑤ 찬송(Graduale)
          ⑥ 복음서 낭독(Evangelium)
          ⑦ 사도신경고백(Credo: 루터가 지은 사도신경의 노래를 부름)
          ⑧ 설교(Predigt)
          ⑨ 주기도문의 석의(Vaterunser paraphrase)
          ⑩ 성찬의 경고 : 참회를 여기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⑪ 성찬제정의 말씀(Einsetungsworte)


          ⑫ 분병, 분잔 :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Christe, du Lamm Gottes)
          ⑬ 감사의 기도(Dankgebet)
          ⑭ 축복의 기도(Segen)

   ③ 루터의 예배에 대한 이해
   중세 카톨릭의 미사에서 구경꾼으로 전락된 성도들을 적극적인 참여자로 이끌어낸 루터의 종교 개혁은 복음적 태도에 입각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성공회와 함께 카톨릭의 의식에 전혀 거리감을 느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루터의 예배에 대한 이해는 막스웰(W. O. Maxwell)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① 살아 계신 말씀과 함께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이 있었다.
        ② 주님의 만찬이 중심되는 의식이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교의 세계 전역에서 매 주일 거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③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음식에 실재로 임하시는 성체 공재론(共在論)을 믿음.
        ④ 미사는 카톨릭 교회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의 반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들을 바쳐서 그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
        ⑤ 자국어(自國語)로써 미사를 드리도록 권하였다.
           1521년 비텐베르그에 제복을 입지 않고 첫 미사가 거행되었다.
        ⑥ 라틴어와 대부분의 의식적인 등불과 분향 및 제복을 사용하여서
           로마 교회의 옛 관례로 되돌아갔다.

   ⑵ 쯔빙글리(Zwingli)의 예배 특징
   스위스 취리히(Z rich)의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는 칼빈, 낙스와 함께 구라파의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다만,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식을 강력하게 제거시키는 개혁가였다.

   ① 쯔빙글리의 예배에 대한 개혁
   종교개혁을 표방한 그는 어느 교회보다도 철저하게 로마 카톨릭의 예배 요소를 배제하고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의 개혁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그는 상당 부분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그대로 받아들인 루터와는 달리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 아니할 정도로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개혁자이다.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베푸신 성만찬이 상징적이라고 믿은 그는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과 만찬의 기념적인 면을 찬성하는 루터의 성체 공재론을 모두 배격하고 기념설(상징설)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가 주장한 7성례를 거절하고 "세례와 성찬"만을 택하였으며 매 주일 예배에 행하였던 루터와는 달리 성례에 대한 기념적인 입장을 전제로 1년에 4번 정도를 족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쯔빙글리는 루터처럼 성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골고다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는 기념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쯔빙글리의 성만찬의 주장은 제네바 시의회와 당회에 영향력을 끼쳐 매 주일 성찬을 갖기를 원했던 칼빈도 자기의 뜻대로 하지 못했을 정도이다.
   특별히 그는 설교중심의 예배에 역점을 두었고, 설교는 성경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신앙의 원천으로 인도하는 것과 그것을 통하여 효력있는 신앙교육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 자신이 음악가이면서도 예배에서 음악을 폐지하고 시편과 성가의 교송적 낭송(交誦的 朗誦)으로 대치하였으며,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송가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서로 사용하였으나 1563년 취리히 교회의 예배에서는 이것마저 삭제하였다.

   ② 쯔빙글리의 예배순서
   쯔빙글리는 그 어느 개혁자보다 예배의식을 간소화하였는데 그 예배 순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기도(말씀의 올바른 처리를 위한 기도)
          ② 기도(정부당국을 위한 기도)
          ③ 주기도문
          ④ 마리아 송가(Ave Maria)
          ⑤ 설교
          ⑥ 교회의 광고/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⑦ 신앙고백(사도신경:credo)
          ⑧ 십계명 낭독
          ⑨ 죄고백의 기도
          ⑩ 죄용서에 대한 기도
          ⑪ 교회 음악은 회중들의 찬송으로 대신하고 성가대와 악기사용을 금함
   ③ 쯔빙글리의 예배에 대한 이해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강력한 반발을 제기했던 그는 칼빈과 함께 동·서방 교회의 우상숭배적이며 미신적인 경향에 대하여 "마술사들의 주술(magical mumbling)"이란 혹평을 가하며 성서에 입각한 초기 교회 예배 형태의 복귀를 강하게 부르짖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음악가이면서도 당시 중세 로마 교회의 예전에서 사용된 악기의 장황한 음악을 급진적으로 반대하였으며, 취리히 교회의 올갠을 끌어내다 파괴시켰다. 왜냐하면, 올갠은 교황 예찬을 위해 사용된 기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악기와 성가대를 폐지하고 회중의 찬송으로 대치하였을 만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유산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철저하게 배격시켰다.

   ⑶ 칼빈(J. Calvin)의 예배 특징
   칼빈은 불란서 태생으로 제네바에서 사역한 종교개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 개혁기의 사도 바울로 불리우며 개혁자 중에 개혁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예배에 대한 특징은 무엇인가?

   ① 칼빈의 예배에 대한 개혁
   칼빈에게 있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는 사단에 의하여 만들어진 최상의 증오물이었다. 왜냐하면, 장식과 의식의 상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깎아내리는 인간의 고안물로써 비성경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은 완전한 표준은 성경과 초대 교회의 관습이라며 가장 단순한 형태로 환원시켰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예배는 물론 신학에까지 영향을 미쳐 오직 모든 기준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예배관을 세우게 된다.
   또 칼빈은 루터가 로마 교회의 예배의식을 개혁한 것보다 더 개혁하고자 한 것이 그의 목적이었으며 성경에 가르친 바가 없는 것은 예배에 허용될 수 없다고 하므로서 중세 예배의 예식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런 면에서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의식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보수주의자라면 칼빈은 미사의 형식 중 상당 수의 예식주의를 제거시킨 온건주의 자이다. 이와 같은 두 학자의 현격한 차이는 말씀을 해석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니 루터는 "성경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칼빈은 구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확고하게 믿었으나 루터의 의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풍유적 해석은 성경의 뜻을 모호하게 만드는 사단의 계략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 해석자가 첫째로 할 일은, 해석자가 생각하는 것을 성경 저자로 하여금 말하지 않게 하는 대신 성경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성만찬에 대한 이해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화체설을, 루터가 성체 공재설을, 쯔빙글리가 기념설(상징설)을 주장한 데 반하여 그는 성령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또 성만찬의 집행 횟수도 말씀과 성찬이 함께 어우러지는 주례적 성찬식(Weekly communion)을 주장하였으나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제네바 행정관들의 반대와 쯔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Bullinger)와의 대화를 통하여 일 년에 네 번만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만찬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음식에 실재로 임재하신다고 믿는 성체 공재설을, 쯔빙글리는 이 모두를 거절하고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기념설(상징설)을, 칼빈은 성만찬을 통하여 성령이 함께 임한다는 성령임재설을 주장하였다.

 

   ② 칼빈의 예배순서
   칼빈의 예배순서를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다. 칼빈의 예배는 그 자신의 창안이 아니라 부처(Bucer)의 스트라스부르그(Stradbourg) 예식서의 수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로마 교회의 미사 예문의 주요한 줄거리를 따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배관은 하일러(Heiler)의 단언처럼 "그는 예배의 한 형식을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 거기에는 로마 교회 미사의 어떠한 단편적인 중요성도 그대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배의 발전에 있어서 제네바에서 개혁의 다른 지도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칼빈의 예배순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배 인도자(개회의 선언)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란 말로
             예배가 시작됨을 선언하고,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예배시작
             ② 참회의 기도(죄 고백)
             ③ 사면의 선포(죄 용서)
             ④ 회중의 시편찬송(1545년부터 십계명 첫 부분 낭독이 첨가됨)
             ⑤ 중보의 기도
             ⑥ 회중의 찬송(1545년부터 십계명 첫 부분 낭독이 첨가됨)
             ⑦ 주기도문
             ⑧ 설교 전 설교자의 자유로운 기도
             ⑨ 설교
             ⑩ 설교 후 기도(목회의 종합적 기도가 연결됨)
             ⑪ 주기도문의 석의
             ⑫ 회중의 시편 찬송
             ⑬ 아론의 축복의 서원(민 6:24∼26)

   ③ 칼빈의 예배에 대한 이해
   성경적이나 신학적으로 초대 교회의 예배를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방향을 제기한 칼빈의 예배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그의 예배관은 어떤 것이었나?

   첫째, 성경적·신학적으로 충실한 예배관을 강조하였다.
   예배 의식에서 루터는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것은 허용한 반면 칼빈은 예배와 모든 교회 생활을 성경에 합하는지 검토하고 "명령받지 아니한 것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예배 시간이나 장소, 기도 등의 문제에 일일이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선택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너는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에 가르침을 좇아 교회에서 우상 숭배의 요소를 지닌 미술품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감정과 정서와 심미적인 것과 함께 신학적인 건전성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예배에서 루터가 하나님께 향한 감사를 강조하는 주관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면, 칼빈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강조한 개혁주의 예배로서 객관적인 면을 더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예배의 이해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당시 로마의 신학적 언어로서 사제들만이 알 수 있는 라틴어로 예배를 주관하므로 성도들을 연극 관람객으로 전락시킨 문제를 비판하며 모든 예배는 참여자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배는 특수 계층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예배의 참여자인 회중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성경과 예배의식을 자국어로 번역하였다. 또 교회 음악도 회중들이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므로 악기에 의해 가사가 가리워진다는 이유로 제네바 교회에서 오르간이 철거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이 말씀의 전달을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되므로 교회의 오르간 사용은 물론 대위법적인 화성의 음악을 반대하고 단순한 멜로디를 원했다. 루터와는 달리 민요나 세속 음악을 교회 음악으로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찬송가 대신 시편에 곡을 부쳐 부르도록 하였다.

 

   셋째, 예배는 성도들의 덕성(德性)을 함양해야 한다.
   예배를 통하여 신앙 인격의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도로 덕성 함양에 이바지할 수 없는 것이 교회 내에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며 또한 예배의 실용적인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및 충성과 또한 이웃 사랑 등이 증대되는가의 여부로 보았다. 즉 예배가 실용적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및 충성과 이웃 사랑 등이 증대되느냐, 아니냐로 판별된다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벗어나 복잡한 의식 절차로 미신을 조장하고 우상 숭배의 요소들이 첨가되었다. 그리하여 성도들을 예배의 참여자가 아니라 연극 관람객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고 예배의 단순화를 통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 형태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따라서 예배에서 순진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모든 과장된 허식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보다 엄격한 편이었던 칼빈이었으나 예배의 단순화를 고집하여 회중들을 실망시키거나 교인들이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기보다는 의식을 존중하여 교회를 지키는 것이 낫다는 신축성을 보여 주었다.

   이상과 같이 종교개혁기의 예배는 의식과 형식 중심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변환되었고 성찬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만인 제사장주의에 의거하여 일반 성도들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예배 참여로 예배를 회복하게 되었다. 만인 제사장론의 출현배경에 대하여 정장복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우리의 이해를 돕게 할 것이다.

   "특별히 그 시대에 있었던 성직자들의 부패와 형식적인 예배 집례 등은 깊은 신앙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과 뜻을 바쳐 예배드리기를 희망했던 사람들에게 환멸과 불신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러기에 마틴 루터가 만인 사제론을 외치면서 그 시대의 교직계급을 비판하고 나섰을 때 열렬한 호응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평신도들이 말씀의 봉독이나 성만찬의 분병, 분잔 등을 통하여 예배에 직접 참여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구심적 무리들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르렀고, 성경의 연구에도 절대적 공헌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만인제사장론에 대한 오해이다. 사실 종교개혁과 더불어 이 이론의 출현배경은 성직자 위주의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이며 예배의 집례자에 대한 강력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참고적으로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특별히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급진주의 교회들의 입장이다. 여기서 급진주의 교회란 재세례파를 의미하는데 이들의 만인 제사장론의 적용이 "사제 무용론" 내지는 "사제 경시현상"을 낳게 되었다. 오늘날 침례교 계통에서 종종 보는 바와 같이 신학 훈련의 중요성이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회중들의 뜻에 따라 즉석에서 목사로 안수하므로 단순한 그룹의 지도자 혹은 말씀의 전도자로 전락시키는 문제를 낳고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등장하게 된 만인 제사장론의 교리를 그릇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유명한 예배 신학자인 지글러(F. M. Segler) 교수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하여 올바른 이해를 갖기 바란다.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라는 교리는 각 사람이 단순히 자기 자신이 제사장이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제사장이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의 회중의 모든 회원들은 공중 예배에 한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전한 생활과 진리를 중심한 태도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므로써 참된 기독교인은 전생활(全生活)이 참된 예배라는 것이 개혁주의 교회의 주장이다. 또 예배 의식에는 제사적 요소와 예언적 요소와 더불어 행하므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7. 현대의 예배

   현대 교회의 예배를 이해하는 데는 "개혁의 결실이 맺어졌다는 미국 교회들의 예배가 지금껏 19세기적 이해나 형태 그대로 계속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대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17세기 초반부터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종교개혁의 이론과 그 실천에 대단한 민감성을 보이므로 새 대륙의 개척을 위한 프론티어 정신 형성으로부터 종교개혁의 현장화라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열심과 노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철저히 시행하면서 교회의 자유로운 예배 의식의 개혁을 인도해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종교개혁은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 성숙은 미국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⑴ 개혁주의 예배
   종교개혁가들의 영향을 이어받은 개혁파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말씀 중심의 신학 그리고 교회 중심의 신학적 배경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크게 팽창한 선교열풍과 함께 예배 의식도 함께 전하므로 개혁자들이 주창하고 사용했던 예배 의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예배의 형태는 1855년 찰스 베어드(Charles W. Baird)의 『장로교 예배 의식』(the Presbyterian Liturgies)서가 발간되므로 일게 된 예배 복고(復古) 운동(liturgical movement)에 힘입어 1858년 독일 개혁 교회에서 의식의 회복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5년에 발간된『일반 예배서』(the book of Common Worship)가 수정을 거듭하다가 1946년에는 최종판이 간행되었고 1972년에 장로 교회의 새로운 예식서가 속속 출판되면서 개혁자들이 실행했던 의식과 초대 교회들이 갖고 있던 예배의 기본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심화되었다.

       【교회 예배 의식】
① 설교(딛 1:9; 행 9:20; 눅 24:47)
② 성경낭독(행 15:21; 눅 4:16∼17)
③ 성경교육(마 28:20; 히 5:12; 딤후 3:14∼17)
④ 기도(행 6:4; 딤전 2:1)
⑤ 찬송(골 3:16; 4:6; 시 9:11; 엡 5:19)

⑥ 전도(행 1:8; 딤후 4:2)
⑦ 세례(마 28:19∼20; 막 16:15∼16)
⑧ 성찬(고전 11:23, 28)
⑨ 헌금과 감사(행 11:27, 30; 고전 16:1∼14; 갈 2:10; 6:6; 빌 4:6; 딤전 2:1;
              시 50:14; 95:2; 116:17∼18)
⑩ 금식(눅 5:35; 마 4:2; 에 4:16; 욘 3:5, 7; 출 34:28; 24:18; 신 9:9, 18)
⑪ 권징(히 13:17; 살전 5:12∼13; 고전 5:4∼5; 딤전 1:20; 5:12)
⑫ 축복(고후 13:13; 엡 1:2)

   ⑵ 리마 예식문 소개 및 해설
   『리마 예식문』이란 1982년 남 아메리카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개신교, 카톨릭, 성공회, 동방 교회 등을 망라한 전세계 모든 기독교 대표들이 모여 최종 합의를 본 예식서로서 회의가 진행된 도시의 이름을 따서 만든 명칭이다. 리마 예식서의 예전이 결정된 과정에 대해서 정일웅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들은 비교 종교적 차원에서의 예배연구를 들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교회연합적 차원에서의 예배연구가 현실적으로 요구된다 할 것이다. 오늘날 W. C. C.를 통한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예배연구는 중요한 교회연합의 과제를 지닌 것이라 할 것이다.〈참고, 박근원 편저, 리마예식서, 대한기독교서회 1982, 이 책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1982년 W.C.C.의 모임이 있었으며, 그 때에 직제, 세례와 예전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특히 로마 카톨릭과의 연합을 전제로 한 예전서 모델(말씀과 성찬이 병행되는 예배)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 역사적 배경과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며, 동시에 저자는 한국 교회의 절기와 관련하여 말씀과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의 모델을 새롭게 소개하고 있다〉"

   이 예식문은 세계교회협의회(W. C. C.)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1972년 기독교의 통일성을 모색하기 위하여 수십 년 노력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 예식문은 세계 역사상 최초, 최대의 기독교 공동 예배문이라고 하나 그 내용을 수정없이 개 교회가 사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이 예식문은 개혁주의 교단은 물론 장로회를 비롯한 대다수의 교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예식문이다. 그 예식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찬예배(리마예식문)
      개회의 예배 
   * 1. 입례송(찬송 145장)……………………………………………………………집례위원, 성가대
   * 2. 인사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당신들
              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 그리고 당신에게도 있기를 기원합니다.
   * 3. 참회의 기도
        회중 :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들은 죄의 사슬에 묶여 우리들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나이다. 우리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우리가 한 일들과
               우리가 하지 않고 남겨논 일들에서 하나님께 거역하는 죄를 지었나이다. 우리
               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나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
               도를 인하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를 용서하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게 되며 또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행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                 백하며 간구하나이다.
   * 4. 용서의 선언
        목사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                   르심을 받았고 교회의 안수받은 목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서 성부 성
               자 성신의 이름 안에서 당신들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받았음을 당신들에게                 선언합니다.
        회중 : 아멘
   * 5. 자비의 연도…………………………………………………………………………………………
        목사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도 하나요 성령                 도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니라. 주님께 기도합시다.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목사 :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                 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은 하나요 우리가 한몸이니 이                  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목사 : 우리의 돌아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로다.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 6. 영광송(찬송 2장) (십자가를 바라보며)

      말씀의 예배 

   * 7. 그날의 기도(Collect)………………………………………………………………………………
        목사 : 기도합시다. 주 하나님이시여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여 사랑하는 독
               생자가 요단 강에서 세례 받을 때에 성령을 부어 주시고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성별하셨나이다. 우리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사 세례를 행함에 있어                   신실하여 그리스도의 성례를 간절히 원하며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섬기게 하옵소서. 세세 무궁토록 유일하신 하나님                 과 성령과 함께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 아멘
   * 8. 구약성서……………………………………………………………………………………………
   *  9. 사도서신……………………………………………………………………………………………
   * 10. 찬양…………………………………………………………………………………………………
   * 11. 복음서 낭독………………………………………………………………………………………
   * 12. 말씀…………………………………………………………………………………………………
   * 13. 침묵기도……………………………………………………………………………………………
   * 14. 니케아신조…………………………………………………………………………………………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보이는 것 모두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우리는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영원한 성부의 아들 참 빛으로 오
          신 참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스스로 계신 분, 그 분            을 통하여 모든 만물이 만들어졌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            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고
          난받아 죽으시고 장사지낸 지 사흘 만에 성경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예언자를 통하여 말하여 왔            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우주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들은 죄의 용서를 위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내세의            영생을 믿습니다.
   * 15. 중보의 기도………………………………………………………………………………………
        목사 : 믿음으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께 기도                 합시다.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목사 : 온 세상의 교회들을 위하여 성령을 간구합니다.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목사 : 박해와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자들과 갇힌 자들을 위하여,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간구합시다.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목사 :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게 하는 세례 안에서 눈에 보이도록 하나                 가 될 수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구합시다.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목사 : 교회들로 하여금 한 식탁에 둘러 앉아 받는 성찬의 친교를 성취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힘 주심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회중 :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목사 : 교회들이 한 주님을 섬기는 서로의 교역을 서로 인정하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회중 : 아멘

      성찬의 예배 
   * 16. 대화…………………………………………………………………………………………………
        목사 : 주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회중 : 그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림이 마땅합니다.
        목사 : 주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회중 : 당신과도 함께 하시길 원합니다.
        목사 : 마음을 경건히 하십시다.
        회중 :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마음을 경건히 하겠습니다.
   * 17. 서언…………………………………………………………………………………………………
        목사 : 진실로 주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언제나 어디서나
               영광돌리는 것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옳은 일이요 또한 선한 일입니다. 주님
               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이 선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                 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시고                  주의 종으로 성별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성찬의 예전을 제                 정하사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이를 행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며 먹고 마                 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속                  받은 이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직을 주사 그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사역을 나                 눌 사람들을 선택하시사 주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먹이며 성찬을 통하여 살아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 18. 찬송(284장)
   * 19. 성찬 제정 기도……………………………………………………………………………………
        목사 : 이 창조의 성령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말씀을 성취케 하소서. 주께서 팔리시던                 날 밤 떡을 떼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                 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받아 먹으라. 또 잔을 들고 축사하신 후 그들                  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 모두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너와 많은 사람                  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와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                  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위대한 것입니다.
        회중 : 아멘
   * 20. 주기도문 : (주기도송을 다같이 부른다)
   * 21. 평화의 인사
        목사 :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                 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나이다. 우리들의 죄를 보지 마옵시고 주님의                 교회의 믿음을 보옵소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항상 이 평안을 내                  려 주옵소서. 영원한 주님의 나라와 온전한 일치로 우리를 인도하옵소서.
        회중 : 아멘
        목사 : 주의 평화가 당신들에게 영원히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 그리고 당신에게도
        목사 : 옆에 앉아 있는 이웃 사람과 더불어 화해와 평화의 인사를 서로 나눕시다.
   * 22. 떡을 뗌
        목사 : 우리가 떡을 뗌도 그리스도의 몸을 나눔이요 우리가 축복의 잔을 마심은 그리                 스도의 피를 나누는 것입니다.
   * 23. 하나님의 양
        회중 : 하나님의 양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나님                의 어린 양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이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옵소서.
   * 24. 성찬분금(경건히 떡과 잔을 받는다)
   * 25. 감사의 기도………………………………………………………………………………………
        목사 : 평안 속에 주께 기도합시다. 오! 주 하나님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세례로 연합하게 하시고 성찬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사오니 감사드리나이                 다. 우리를 인도하사 교회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 일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징표들을 소중히 간직하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의 아                  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 아멘
   * 26. 폐회찬송(135장)……………………………………………………………………………………
   * 27. 파송의 말씀과 응답 
        목사 : 여러분은 이 시대 민중의 삶의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든지 그것을                 말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아픔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기쁨과                  감격으로 화해자와 예언자의 길에 매진합시다.
        회중 :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거기에 가렵니다. 성                 령께서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 28. 축도…………………………………………………………………………………………………
        목사 : 주께서 당신들을 축복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주께서 그의 얼굴을 당신들에게                  향하여 비추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로우십니다. 주께서 은혜로 돌보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당신들을 축복하시고 영원토                  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회중 : 아멘

   이상에 나타난 리마 예식서는 비록 개신교, 카톨릭, 성공회, 동방 교회 등을 망라한 세계 모든 기독교회 대표들이 모여 최종합의를 본 예식서라고 그들이 주장하고 있으나 이 예식서는 세계교회협의회(W. C. C.)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앙과 적제 위원회의 주도로 모인 것이며 그 중심에 카톨릭 교회가 있다. 그러한 사실은 예식서 본문에 나타난 문맥들을 보면 카톨릭적인 용어나 방법들이 많이 가미되어 있음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예식서는 교회를 하나로 묶자는 종교통합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하나되는 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의 하나이지 이러한 예식서로 묶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교회사에 끼친 폐단은 아직도 생생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의식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들과 통합적인 예식서를 만든다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
   그리고 리마 예식서가 초대 교회의 예배의식과 부합되지 않은 증거는 장로회나 기타 한국의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아무도 이에 동조하지 않으므로 입증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예식서로 하나되자는 것은 결국 말씀 중심의 예배에서 의식 중심의 예배로 인하여 암흑기를 맞이하였던 중세 카톨릭 교회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므로 문제가 있다.
   따라서 리마 예식서는 성경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예식서이다. 왜냐하면, 리마 예식서는 세계교회협의회(W. C. C.)가 연합 집회 시에 예배의 통일을 위하여 내놓은 것으로서 중세 교회적인 혹은 카톨릭 교회적인 의식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정일웅 목사는 "리마 예식서는 예배의 재(再)신성화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교회연합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일치의 장점을 예전에서 찾으려는 시도였다."며 리마 예식서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⑶ 로마 카톨릭 교회
   현대 교회의 예배 동향을 말할 때마다 빠뜨릴 수 없는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공예배에 대한 관심이 기독교회 전체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이 관심을 일컬어 소위 예식운동(Liturgical Movement)이라고 하는데 19세기 중반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전교회로 파급되어 예배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예배로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종교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교회를 하나로 묶자는 의도가 담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이 운동은 다시금 의식주의 예배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카톨릭 교회가 현대 종교 개혁으로 지칭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3∼1965년)에서  라틴어의 미사로 국한되었던 것을 과감히 탈피하여 모국어로 드리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극관람자에 불과했던 미사 참여자들을 적극적인 참여로 변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 내용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옛 풍습의 의식주의적인 예배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작에서         
   ⊙ 입당 전 해설                          범 례
   ⊙ 입당                         ⊙ 사제만 할 수 있는 부분
   † 인사                         † 합송
   † 참회
   † 자비를 구함
   † 대영광송
   † 본 기도

      말씀 전례 
   ⊙ 제1독서 전
   ⊙ 화답송
   ⊙ 제2독서 전
   ⊙ 연송 또는 부속가
   ⊙ 복음 환호성
   † 복음
   † 강론
   ⊙ 사도신경
   ⊙ 보편 지향 기도

      성찬 전례 
   ⊙ 봉헌
   † 예물기도
   † 감사송

      영성체 예식 
   † 평화의 기도
   † 영성체
   ⊙ 영성체송
   ⊙ 감사 침묵 기도
   † 영성체 후 기도
   ⊙ 공지사항

      마침 예식 
   † 강복
   ⊙ 파견

   카톨릭 교회가 예배시 라틴어 미사로 드리던 것을 미사 드리는 자의 모국어(母國語)로 드리게 한 것은 높이 살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예식 순서는 아직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식화 미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비록 모국어로 미사를 드리므로 구경꾼에 불과했던 성도들이 적극적인 미사를 드리게 된 점은 수긍이 가지만 아직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예배로서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카톨릭의 미사 의식은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여 교회 위에 군림하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추구하려는 예배 의식은 성경의 가르침과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도 전세계 교회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그 통합의 방법에 있어서는 인위적인 예식의 순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카톨릭 교회가 추구하려는 교회의 연합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톨릭 교회는 종교의 옷을 입은 배교의 정치단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예배 의식 속에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들어 있을 수 없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외식적인 예배 형태에 대해서는 종교개혁가들이 절대적으로 제지하였으며, 그들의 신앙노선을 물려받은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예배 형태가 마지막 때 배도할 세력이며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는 음녀로 본다.

  
   기독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의 이해는 뮐러(M ller)가 주장하고 있는 네 가지의 관점으로 대신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⑴ 예배와 예배의 이론들이 시대적 환경의 변화에 의존되었다.
   교회사 속에 나타난 예배와 예배의 이론들은 그 시대적 환경에 따라 변화되어 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여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의 발표와 함께 콘스탄틴 대제에 의한 전환
       ② 7세기 경 로마 교회의 미사 모습의 변화
       ③ 바로크(Barock)와 고딕(Godik) 문화의 시대변화
       ④ 종교개혁을 통한 변화
       ⑤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3세의 예전서 발간에 의한 변화
       ⑥ 세계교회협의회(W. C. C.)를 통한 교회연합의 형성과 발단에 의한 변화

   ⑵ 예배를 신성화하는 과정과 비(非)신성화하는 흐름이 있다.
   교회사 속에서 예배는 신성화의 과정과 비신성화의 과정, 그리고 다시 재신성화 하는 과정의 흐름이 초대 교회에서 로마 교회로, 종교개혁으로 그리고 현대에 이르면서 대두되었다.

   ① 예배의 신성화(Sakralisierung) 과정
   주후 4∼7세기까지의 기간으로서 고대 교회들은 기독교 예배를 신성화하였다. 이 기간에 유대인의 예배와 구약의 성전제사의 개념들이 기독교 예배와 비교시켜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2∼13세기의 중세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점은 바로 종교개혁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도되게 된다.

   ② 예배의 비(非) 신성화(Entsakralisierung) 과정
   예배의 신성화 과정은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비판의 대상이 되고 대처방안으로 예배의 비(非) 신성화(Entsakralisierung)를 추구하는 과정을 목표로 출발하게 되었다.

   ③ 예배의 재(再) 신성화(Resakralisierung) 과정
   현대는 오히려 예배의 재(再) 신성화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리마 예식서의 등장(1982)이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교회연합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일치의 상징점을 예전에서 찾으려는 시도였으니 결국 재(再) 신성화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⑶ 예배의 계급화와 민주화의 흐름
   핍박을 받던 기독교가 주후 312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으므로 대전환을 이룬 이래로 성직의 강화와 함께 기독교는 제도화되고 계급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다시금 성직화와 성례화된 예전을 새롭게 변화시키려 하였고, 곧 만인 제사장이라는 원칙과 함께 예전의 계급적인 구조의 변화를 힘쓰므로 교회의 영적인 직무는 구별하면서도 계급적인 것은 탈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좋은 예가 성직자를 평신도와 구별하게 하는 예식의 복장을 없애려는 것에서 민주적인 변화를 추구하게 되고 예전의 순서 봉사에 평신도들의 참여도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⑷ 예배 형식의 성장과 감소의 현상
   예배의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예배 형식의 성장과 감소의 현상을 지적하였다. 이는 예배 형식은 성장과 감소의 현상은 교회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세상 문화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믿음에 대한 확신은 식어지고, 식어진 믿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의식이 강조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예배는 의식으로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성도들의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질 때 참된 예배가 된다. 이상과 같은 교회사 속에 나타난 예배의 흐름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나타난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Ⅲ. 예배의 올바른 방향

 

 


                       1. 예배의 갱신(更新)
                       2. 경건된 예배
                       3. 은혜스러운 예배
                       4. 지정의가 조화된 예배
                       5. 드리는 예배
                       6. 말씀·기도·찬송의 조직적 예배
7. 종말론적인 신앙에 기초한 예배

 

 

 

【읽을 말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1. 예배의 갱신(更新)
 
   예배는 성도와 하나님이 만나 교제를 나누는 만남의 광장이자 최고 축복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주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신령과 진정"(요 4:24)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사 속에 나타난 예배관을 볼 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본질적인 면으로서의 예배보다는 예식서와 아름다움의 단장을 통하여 예배를 신성화시켜 왔었다. 이제 종교개혁가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대전환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올바른 예배의 갱신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⑴ 전통적인 예배관의 문제점에서 탈피하자!
    전통적인 예배관은 기독교 본질의 경건성과 유교 문화에 자리잡았던 민족 고유의 풍습이 어우러져 참된 예배의 개념을 흐려 놓았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예배의 지나친 의식화와 경직화를 들 수 있다.

【전통적 예배관의 문제점】
① 지나친 의식화로 예배의 본질을 흐렸음
                        ② 예배의 경직화로 은혜성을 떨어뜨렸음

   예배의 지나친 의식화는 예배의 본질을 흐려 놓았으며, 예배의 경직화는 은혜성을 떨어뜨리는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좇아 예배의 본질을 회복할 예배 갱신을 이룩하여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예배의 지나친 의식화와 경직화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므로 예배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그 결과 성도들의 예배 참석률이 급격히 하락하고 급기야는 교회의 부흥을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전통적 예배관의 문제가 낳은 결과】
                      ① 성도들이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함
                      ② 성도들이 예배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림
③ 성도들의 예배 참석률(출석률)이 급격히 하락
                      ④ 교회 부흥의 쇠퇴기를 맞이 함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가들이 주장처럼 초대 교회의 예배 모습과 자세로 돌아가야 할 새로운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갱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의 갱신에 앞서 주의해야 할 독소들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먼저는 예배의 신비주의 추구로 잘못된 중세 암흑기의 예배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야 하며, 무질서의 예배로 인하여 예배의 본질을 흐리는 문제를 제거시켜야 하며, 문화의 발달로 인한 세속화 방향의 예배관을 주의해야 한다.

【예배 갱신에 부작용을 초래할 독소들】
                  ① 신비주의 예배 형태가 될 위험성
                  ② 무질서의 예배관으로 예배의 본질이 흐려지는 위험성
                  ③ 예배의 부흥에만 몰두하여 세속화 되는 위험성

   이상의 사실들에 유의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요 4:23)에 합당하도록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⑵ 생활화된 예배
   예배란 지글러(Franklin Segler) 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믿음의 광장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예배는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예배의 생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예배의 생활화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① 삶의 1순위가 되어야 한다.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4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千代)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3∼6)
  
   십계명 중 4계명까지는 엄격한 의미로 보면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찬양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영광돌리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사 43:21)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가르치신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 있어 예배는 삶의 제1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응답주시고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나님외에 다른 신들을 경배하거나 찬양하면 질투하실 정도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주일 대예배 한 번으로 모든 예배의 의무를 다했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이처럼 안이(安易)한 예배에 대한 인식으로 인하여 오늘에 이르러 금요예배가 사라져 가고, 새벽예배가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예배가 사라져가는 잘못된 관습은 믿음이 식어진 증거이므로 필사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잘못된 예배에 대한 인식은 철저하게 바꿔야 한다. 그런즉 우리가 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더 열심히 생명선으로 삼고 지켜야 할 예배는 일곱 가지이다.

                                    ① 주일 대예배
② 주일 찬양예배
                                    ③ 수요예배
                                    ④ 금요예배
                                    ⑤ 새벽예배
                                    ⑥ 구역예배
                                    ⑦ 가정예배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가 삶의 제1 순위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배가 하나님의 부르심인데,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된다.
   반면에 예배를 등한히 여기는 성도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니 얼마나 교만한 자가 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겠다고 고백하는 자를 찾으신다.

   ② 장소에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0∼21)

   성경은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성전(렘 26:2; 시 5:7; 눅 18:10; 24:53; 행 3:1; 계 11:1), 초대교회는 주로 집(행 1:13∼14; 5:42; 12:12; 20:7∼9; 롬 16:5; 고전 16:9; 골 4:15),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창 22:5), 발등상 앞에서(시 99:5), 성막(시 132:7)에서, 각각 자기 처소(습 2:11)에서, 성산(시 99:9)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나 예배(요 4:21∼23)드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도,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예배의 본질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과 성격을 떠난 사마리아인의 예배와 유대인의 예배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디서나 주님을 모신 맘 천국이라는 찬송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어떠한 장소, 어느 곳에서라도 예배드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대예배는 엄숙하게 드리고 찬양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등은 소홀히 해도 되는 것으로 착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배 = 대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경건함과 준비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의 불필요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님을 따르는 자는 "습관을 좇아",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③ 삶 속에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경배하며 그를 섬기는 봉사적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예배는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바로 삶 속에서 지속되어야 할 생명의 교제요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총체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신앙적인 삶의 근원이 바로 예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예배와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바로 통일된 하나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어떻게 삶 속에 지속될 수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분야이다. 이에 대하여 정장복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우리에게 좋은 해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예배란 단순히 매주일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배란 어떤 경우에도 단절될 수 없는 것이기에 생활 속에서 지속되어져야 한다. 현대의 많은 성도들은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자신의 의무 이행을 다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예배란 생활 가운데서 지속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 이행을 다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위치와 신분 속에는 예배의 생활화가 새로운 의미로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환언(換言)하면 예배를 통하여 연접(連接)된 그리스도의 흔적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되어지는지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던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논증은 존 로빈슨(John Robinson)이 말한 대로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 무리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흔적을 보여 주지 않는 한 성만찬을 통한 예배의 의미는 사실상 무가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예배와 생활과는 언제나 연속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배가 왜 성도의 삶에서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사도 요한이 장차 될 일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0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본문은 천국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 몇 안되는 성경의 증거이다. 천국은 구원받은 자들의 대표를 상징하는 이십 사 장로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 보좌 앞에 던지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구원의 기쁨이 크고 감사함을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예배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동시에 성도들이 반드시 드려야 할 의무라는 사실을 놓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의 가치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지속되어질 때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보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므로 더욱더 빛나게 될 것(마 5:13∼16)이다.

   ⑶ 21세기를 대비한 목회
   새로운 천 년(千年)의 시대가 열리는 21세기는 각종 변화가 큰 폭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는 21세기를 준비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앞둔 한국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박종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교육의 형식이 바뀔 것이다.
   우리 나라 교회의 교육 형식은 대부분 청각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는 청각 중심의 문화에서 시각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졌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교육의 형식도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별히 21세기는 다양한 기능을 추구했던 금세기와는 달리 최상의 기능만 살아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최고의 것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도 무계획적인 것에서 계획적인 예배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② 교육의 방법이 바뀔 것이다.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교회의 교육 방법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공통적이며 다양한 방법에서 개인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육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
   더구나 미래에 주님이 오시므로 완성될 천국에 소망을 전하는 목회자들에게 이 부분의 올바른 인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자칫 잘못하면 고도의 문화가 발달된 사회에서는 허구적인 것으로 전락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준비하는 올바른 예배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각 중심, 시청각 중심의 교육방법으로 전환이 교회의 예배에 적용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배의 중심인 설교 후 성도들에게 남아 있는 인지도를 조사한 결과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③ 예배 음악의 방법이 바뀔 것이다.

 

   ④ 리더 쉽이 바뀔 것이다.


   이상과 같이 21세기를 열어갈 목회 현장의 리더 쉽은 개인적·수동적 형태의 리더에서 전문적·기능적·다양성에 기초한 리더 쉽이 요구되고 있다. 예배도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지속적인 방향으로 전개해 나갈 때 한국 교회의 앞날은 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지식을 넣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을 넘겨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21세기를 예측하는 각종 저서에 나타난 경향들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는 미래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경건된 예배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 7:7)

   예배는 원어적인 의미로 살펴보아도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게 드리는 최고의 의식인 반면 드리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주님의 책망처럼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좇아 드리는 헛된 예배는 아닌가?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받으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⑴ 경건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예배의 주체는 성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디모데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디모데서가 바로 목회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경건"은 곧 목회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또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며 전인격적인 사랑을 요구하셨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는 주님이 육체로 계실 때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므로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항은 예배자의 자세에 대하여 "경건한 경외로 성경을 봉독하는 것과 견실한 강도(講道), 이해와 신앙과 숭경으로 하나님께 복종하여 말씀을 양심적으로 듣는 것, 마음에 감사함으로 시편을 찬송한 것과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를 정당히 거행하며 가치있게 받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종교적 예배의 모든 부분들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경건함"으로 드려야 할 뿐만 아니라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총회헌법 제4편 2장은 "② 예배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목사가 낭독하거나 인증하는 성경 밖에서 다른 것을 읽지 말 것이요, 귓속말이나 출입하는 자에게 인사나 곁눈질이나 졸음이나 웃거나 그밖에 모든 합당치 못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이요"라고 하므로서 예배드리는 자는 경건한 자세로 드려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경건한 태도의 예배관이 필요한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중심으로 회개한 이스라엘의 감사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들의 율법준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축복이 주어지듯,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경건함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넘치는 축복으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람의 육적 상태는 영적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경건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자는 그의 영적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구하는 갈급한 심령이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바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함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도의 경건이 연합되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할 것이다.

   ⑵ 경건한 복장으로 드려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29:2)

   구약의 제사법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이루는 자세는 바로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한 옷"이란 물론 제사장의 성결한 복장을 의미한다.
   물론 교회사 속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사장직의 복장을 신성화시켜 사제들과 평신도를 구별하는 표식으로 사용하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사제들만 드리고 일반 성도들은 연극을 관람하는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예배의 의식화 작업을 앞세운 것은 박해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성직의 강화와 무엇보다도 말씀이 없는 예배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말한 "만인 제사장" 사상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예배에서는 로마 카톨릭처럼 사제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복장차원의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예배를 위한 모든 자들의 복장에 평준화를 이루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복장은 사치스러운 옷을 피하고 순수함과 정결로 예의 바르게 단장한 복장으로 임하는 것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는 자의 자세이다. 그러나 문제는 벗는 문화인 서구의 영향을 받은 우리 나라의 현실은 동방예의지국으로 칭송받아왔던 입는 문화에서 벗는 문화로 전환되어 예배의 복장에 무질서를 가져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8)

   물론 단정한 복장만이 믿음의 척도라는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난스럽게도 성도의 옳은 행실을 복장과 관련시키고 있음을 볼 때 예배를 위한 복장의 준비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세속적인 분위기를 유발하는 복장은 삼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배를 위한 올바른 복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정규오 목사는 "외국 선진국에서는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을 보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려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한다. 시장에 가는 사람, 직장·공장에 가는 사람, 무도회·카바레·연회에 가는 사람,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는 성도의 의복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예배에 참석하려는 성도는 평상복 차림의 정장을 해야 하고 특히 여성들의 경우 노출복이 좋지 않다……예배시 의복에 유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라며 예배시에 정장차림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또 황원찬 목사는 "시편에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라'(시 29:2)는 구절이 나온다. 이 묘사는 정장의 빛난 차림으로 엄격하게 차렷 자세로 대열을 갖추고 있는 군대와 같다. 질서의 가치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들―예수 그리스도의 성육, 생애, 십자가 및 부활―을 입증하고 그 뜻을 전달하는 데 의의가 있다. 인간들은 의식이나 형식을 통하여 소통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영적인 반면에,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속성도 갖고 있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는 데는 외적 표현이 필요하다. 비록 외형이 예배에서 영적인 것에 항상 예속되어야 하지만, 영적인 예배는 그 외형을 가져야 한다"며 예배의 외형을 장식할 복장의 의미에 대해서 주장하였다.

   ⑶ 철저하게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본문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형제들이 주님께서 행한 일들을 주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과 제자들에게 보이소서(요 7:1∼5)라고 하자 "내(예수) 때"와 "너희 때"를 첨예하게 대립시키면서 "준비"에 대하여 가르친 사건이다.
   물론 "이 말씀은 철저하게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라며 의아심을 갖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도 준비하여야 함을 가르치는 것으로 본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때 = 아직 이르지 아니한 시간"이나 "무리들의 때 = 늘 준비되어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는 때가 늘 준비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늘 준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요즈음 예배의 순서를 철폐하자는 주장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형태를 보면 인도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흥적으로 예배를 진행한다. 찬송도 인도하는 대로 할 뿐만 아니라 순서 담당자들로 즉흥적으로 예배를 인도한다. 설교는 짧게 선포하며 기도를 포함한 모든 것을 성령의 인도따라 진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거룩한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이들의 예배는 위험한 예배의 형태이다.
   따라서 준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평안한 마음을 가진 자외에는 그 누구도 평안한 말을 할 수가 없다. 즐거운 마음을 가진 자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즐거움을 외부로 나타낼 수 없다. 순종의 법을 배우지 않는 자는 타인을 명령할 수 없다."는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준비가 없었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본문은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눅 22:32)는 권면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베드로의 굳센 결단의 의지는 가야바의 뜰에서 당연히 인정해야 할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여 모른다"(마 26:69∼75)고 부인하므로 실패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는 주님을 위한 준비는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를 위하여 준비하는 자는 준비위원은 물론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기도로 준비하지 않을 때는 실패한 예배를 드린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
   이처럼 예배를 위한 준비는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의식화 되므로 성도는 연극의 관람객으로 전락시켰던 문제를 종교개혁을 통하여 제거하고 예배의 집도자는 참여자들이 하나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참고적으로 종교개혁 후에 나타난 각 교파별로 영향을 준 내용을 도표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② 개혁교회                      ① 루터교회


                       ④ 자유교회                         ③ 성공회


             ⑤ 퀘이커교회                            ⑥ 감리교회


                             ⑦ 오순절교회

   참된 예배를 위한 준비에 대하여 총회헌법 제4편 제1장은 "①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조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대로 그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③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④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황이라는 한 인간이 앉아서 믿음보다는 제도 속에서 공적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비성경적인 사실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개혁 기간에 일어난 예배의 형태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타났다.

 

   이러한 개혁기의 예배형태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배의 형태에 따른 교파의 신앙적 위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익(右翼)에 속하는 교파는 예배가 다소 카톨릭적이며 예전을 갖춘 교파를 의미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루터교회의 예배이다. 반면에 좌익(左翼)은 예배의 집행을 전통적인 의식과 예식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주장하며 예배의 참다운 특질을 추구하는 교파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익(右翼)의 의미와 좌익(左翼)의 중간에 서 있는 교파로 개혁교회와 감리교회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개혁교회가 중간에 속하는 것에 대하여 의아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중간이라는 것을 정치적인 의미로 보면 안된다. 즉 정치적인 용어로는 우익은 좋은 무리로, 좌익은 나쁜 무리로, 중간은 회색적인 무리로서 역시 좋지 못한 단체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중간이라는 것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것은 종교개혁기의 사도 바울로 불리우는 칼빈이 예배의 단순화와 의식화의 관계에 대하여 주장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예배는 순진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모든 과장된 허식을 세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고………모든 불필요한 동작이나 행위 혹은 언어들은 모두 제거되어야 하며, 모든 언어나 행위 및 도구들은 그것들이 전달하고 표현하려는 내용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예배가 단순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하면서도 의식(儀式)에 익숙해 온 회중을 실망시키거나 혹은 목사가 의식의 단순화를 고집하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기보다는 의식을 존중하여 교회를 지키는 것이 낫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가 예배의 본질을 떠나 의식화되므로 말미암은 폐단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예배의식의 단순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배의식화를 고집하는 것으로 인하여 교인들이 실망하여 떠나게 하기보다는 의식을 준수하여 교회를 지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관이다. 이러한 면에서 개혁교회의 예배형태가 우익(右翼)도 아니고 좌익(左翼)도 아니라 온건주의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개혁교회의 입장은 바로 사도 바울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악한 자들에게는 내가 악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악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사도 바울이 누구인가? 팔일만에 조상의 풍속을 좇아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5∼6)로서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 바울이 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자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가 되고, 악한 자들에게는 악한 자와 같이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단 하나의 목적,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되는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바로 개혁주의 교회이다. 오직 말씀,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기를 위하여 온건주의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는 말씀 중심의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3. 은혜스러운 예배

   예배는 하나님과 그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만나는 축제의 광장이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세상 모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넘쳐야 한다. 그렇다면, 은혜스러운 예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⑴ 하나님께 응답하는 행위로 알 때 은혜스러워진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예배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아가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은혜스러운 예배라 할 때 자칫 그 의미를 오해하여 "열광적인 예배 = 은혜스러운 예배"라는 등식을 성립시킬 때가 많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열정적인 예배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참된 은혜의 예배는 "나같은 죄인을 불러주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행위"로 알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바로 그 예배를 통하여 "무엇을 얻을까?"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란 바로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격을 갖춘 이가 누구일까?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정의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런즉 예배는 알렌(R. B. Allen) 교수의 주장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므로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⑵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예배이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우리는 종종 예배를 드리면서 조건부 신앙으로 드릴 때가 많다. 즉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의 의식적 행위를 다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 결과 슬픈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사라져 버리고 기쁘고 즐거울 때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조건부 신앙이 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보면 우리에게 예배의 참된 본질을 일깨워 주고 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 구원에 감사하는 예배가 곧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된다.
   한국 교회사를 볼 때에 가까이는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는 비결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한국교회가 급속하게 부흥하였던 사례가 있다. 그러나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경제적 부(富)를 이룬 지금에 와서는 예배에 대한 열정이 식어졌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예배를 통하여 물질적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한순간에 일평생 모았던 재물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또 자기의 몸에 악창이 나서 잿더미에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을 정도의 고통(욥 2:7∼10)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양한 욥의 신앙이 바로 참된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돌린 모범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서 잠깐 동안 있다가 없어질 물질에 그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으므로 세상의 물질이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이 곧 천국이요, 축제의 광장인 것이다.

   ⑶ 예배의 절정
   21세기에 있을 교회의 예배를 예측한다면 따분한 예배나 재미 없는 예배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세상을 향하게 할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부흥회적인 예배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올바른 예배를 예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에서의 참된 예배를 계획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위한 예배는 어떤 형태로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그 방법을 전통적인 내용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예배의 볼륨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하여 찬송에 조금 높아지나 기도와 광고, 헌금에 다시 하강하고, 설교와 통성기도에서 높은 상태를 유지하나 축도에서 다시 처음상태로 환원된다. 그러나 21세기의 예배는 시작부터 높은 상태로 출발하여 기도와 찬송으로 그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헌금과 광고에서 조금 낮아지며 다시 설교와 통성기도에서는 그 높이가 절정에 이르러 축도에까지 이어지므로 설교로 말미암은 기쁨을 안고 돌아가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눈부시게 발달하는 현실 앞에 예배는 수구주의(守舊主義)로 전락하여 예배에 대한 성도들의 참여도를 반감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천 년 시대를 맞이할 목회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예배로 리드해 갈 수 있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4. 지정의(知情意)의 조화된 예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이것이요"(막 12:30)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치신다. 이것은 바로 지옥의 자녀에서 천국의 자녀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지정의(知情意)가 조화된 예배를 드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ㅡ                                          지적인 예배


                                     정적인 예배  의지적인 예배

 

   ⑴ 지적인 예배
   "8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8∼9)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6∼37)

   지적(知的)인 예배란,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성경은 말씀을 중심으로한 예배에는 뜨거운 성도들의 반응이 나타났음을 증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낭독한 말씀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깨닫게 하매 백성이 다 울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두 제자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으며,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온 무리가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지적 예배란, 말씀을 중심으로한 설교를 통하여 일어나는 응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적 예배란,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예배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반응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바로 전하여준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살전 2:13)이다.

   ⑵ 정적인 예배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7하나님을 찬미하며……"(행 2:42, 47)
   "29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9∼31)
  
   정적(情的)인 예배란, 말씀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감사하는 예배를 말한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바로 신앙의 열정이 용광로(鎔鑛爐)의 불길처럼 풍성하게 넘쳤던 그러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난 무리들의 반응(행 2:37∼47),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기도에 힘쓰는 모습(행 12:5), 찬송할 수 없는 여건인 감옥에서도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사도 바울과 실라의 신앙적 자세(행 16:25)는 바로 말씀 중심의 예배를 통하여 은혜받은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므로 정적인 예배는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은혜를 깨달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세상이 능히 감당치 못함을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이 추구했고 개혁주의 교회가 추구하는 예배가 바로 말씀으로 인한 정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정적인 예배는 황원찬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통하여 요약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것을 예배 행위에서 어떤 흥분에 감정적 반응하는 것과 혼동하기 쉽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자의 반응이 감정적 만족일 수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떤 예배다운 반응이 없이 감정적으로 깊이 자극되는 수가 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 회중의 절반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릴지라도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눈물일 수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예배자가 무엇을 드리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시고 섭리자이시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와 헌신으로 응답하는 동시에 회개와 구


원의 확증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생을 위탁(Commitment)하는 행위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예배가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⑶ 의지적인 예배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2)

   의지적인 예배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는 예배,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봉사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도록 삶을 강조하고 믿음의 행함을 강조하는 예배를 말한다.
   그렇다면, 의지적인 예배는 어떻게 드릴 수 있는가? 바로 말씀을 중심으로한 설교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은혜가 충만하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봉사와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예배이다.
   그러므로 의지적인 예배는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가 주장한 것처럼 "예배의 핵심은 실천적 믿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지적인 예배의 동기에 대해서는 정장복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설명되고 있다.

   "예배자와 믿음이라는 관계는 불가분(不可分)의 것이다……그러면서 성경은 아브라함, 모세 등이 드린 모든 예배는 독실한 믿음의 소산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믿음이란 당장 보지 못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따르는 변함없는 자세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예배자들의 요건은 섬기는 대상의 존재와 역사를 과거―현재―미래적 차원에서 확고히 믿는 의지적이며 결단적인 믿음을 선행시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적인 예배의 동기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은 말씀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독실한 믿음의 소산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봉사와 충성의 행함으로 나타나게 된다(약 2:26). 그러므로 성경은 의지적인 예배에 성공적인 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울 뿐만 아니라 충성을 요구(고전 4:1∼2)하신다.
표상학적으로 본 각 학파의 신앙


   보수주의와 신령주의 학파에서는 자유주의를 배도하는 세력으로 인식하며 의식주의와 자유주의에서는 세계교회 평의회(W. C. C.) 및 종교 통합을 주장한다. 그리고 주의하여야 할 것이라면 보수주의 학파는 열정(熱情)이 부족한 점을 기억하여야 하며 신령주의 학파는 신비주의자, 기복주의자가 되기 쉬운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5. 드리는 예배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우리는 예배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예배를 보러 가는 것이 맞는가? 용어상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으나 사실 이 두 방법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드리는 예배이다.

   ⑴ 원어적인 의미
   주님이 말씀하신 "경배"와 "섬기라"는 두 단어는 연속적으로 이해할 때 예배의 참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경배하다"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경배하다, 굽어 엎드리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지상의 통치자들에게 굴복 혹은 순종한다는 의미가 있다. 다음으로 주님이 사단의 유혹에 대응하며 말씀하신 "섬기라"는 헬라어 라트레이아(       )는 "고용된 종"(a hired servant)이라는 라트리스(    -  )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타난 "경배"와 "섬기라"는 단어는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上典)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인시키는 일인 동시에 예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로부터 "주의 종"이라는 성직의 개념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세 가지 보배를 드리는 사건에서도 되새겨보아야 할 의미가 담겨져 있다. 먼저 경배라는 단어는 프로스퀴네오(         )이며, 다음으로 "드리니라"는 헬라어 프로세네그칸(           )이다.
   이 단어는 "……을 향하여"라는 기본전치사 프로스(    )와 "나르다, 운반하다"(carry)는 페로(    )의 합성어 프로스페로(        )의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단번에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경배"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배의 원어적 의미는 동방 박사들이 동방에서 별을 보고 쫓아온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사막의 여행길에서 생명을 지켜주는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단번에 아낌없이 드리듯,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단번에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원어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를 기억할 때 더욱더 분명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⑵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사건에서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즉 동방 박사들이 동방에서부터 "그(예수)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있는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여"(마 2:9∼10) 그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세 가지 보물을 예물"(마 2:11)로 드렸다.
   동방 박사의 경배도 그들의 개인적인 사역에 의해서 드린 것이 아니라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듯이, 성도들의 예배도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하나님과 사람, 곧 예배자와의 교제(communication) 혹은 만남(meeting)의 징표이다. 즉 루터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대화의 광장이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깊은 신앙적 의미가 교차하는 것이다. 먼저 예배자는 기도와 찬송과 헌금을 드리며 하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것이며 다음으로 말씀과 은혜와 축복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내려오게 된다.
   그런즉 참된 예배는 구속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초 위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응답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를 통하여 예배 참여자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도와 찬송과 헌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위로부터 풍성한 생명의 말씀과 은혜와 축복을 받아 영적 재충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축제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 그리할 때에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서 뜨겁게 응답하는 대화의 현장이 발생될 것이다.

   ⑶ 드리는 요소들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찬송과 기도와 헌금이 있으며,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서 말씀과 축복과 은혜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조화를 이룰 때 은혜의 스파크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모습을 이루게 된다. 혹자(或者)는 "예배보러 간다"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예배의 개념이다. 예배는 결단코 우리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보러 간다"는 표현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용어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예배에 대한 한국 교회의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받는 예배(혹은 보는 예배)에서 드리는 예배로 전환해야 한다. 왜 받는 예배(혹은 보는 예배)에서 드리는 예배로 전환해야 하는가?

 

   드리는 예배를 주도하는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찬송이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예배 시작의 경배 찬송 : 다같이 일어나서 두 손을 들고 드림
② 찬양대 찬양 : 온 성도가 일어나서 함께 드리는 자세(앉아 있으면 감상이 됨)
       ③ 헌금 독창 : 1∼2절은 찬양대, 3∼4절은 온 교인이 함께 드림
       ④ 저녁예배 찬양 : 1∼2절은 찬양대, 3∼4절은 온 교인이 함께 드림
       ⑤ 회개 찬송 : 통성기도 후 두 손을 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를 함께 드림
       ⑥ 고정 찬송 : 예배 중간, 축도 후 항상 고정적인 찬송을 드림
       ⑦ 많은 찬송 : 가능한한 많은 찬송을 드림, 박수치며 드리는 찬송은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므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더욱 나타냄
       ⑧ 집중 찬송 : 20분 찬송(주일찬양, 수요예배, 금요예배 묵도 후 연속 찬송)
                      15분 찬송(주일 낮 예배 전 연속찬송)

   이상의 사실들은 예배(禮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드리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게 할 때에 성도들은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참된 감사와 봉사와 충성을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과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6. 말씀·기도·찬송의 조화적 예배

   루터(Luther)는 예배의 삼 요소를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조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배의 요소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⑴ 말씀 중심의 예배에 힘쓴 초대 교회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6∼37)

   오순절날에 선포되는 베드로의 설교(행 2:14∼36)는 예루살렘 교회를 회개의 심령으로 가득차게 하였다. 베드로의 설교를 시작으로 초대 교회의 예배는 언제나 은혜가 풍성한 말씀의 선포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도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 말씀을 듣는 모든 백성이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느 8:7∼9),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행 2:14∼37),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가 부흥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행 2:42∼47), 바울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13:42∼44).
   이러한 사실은 예배의 중심은 언제나 말씀의 선포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말씀 중심의 예배로 드려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은혜가 넘치는 예배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바로 예배의 세 가지 요소인 경건성, 은혜성, 신비성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만약 예배에서 경건성만 강조하면 신앙의 뜨거움이 사라져 버리고 남을 비판하는 시각으로 흐르기 쉬운 반면 은혜성만 강조한 나머지 찬양과 경배로 뜨거운 예배를 드린다면 경건성을 무너뜨리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세 가지 요소는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참고적으로 교회사 속에서 이러한 파급구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감정중시         성서에 입각한 기독교         이성중시

          몬타누스파(2세기)

                                                              영지주의(2∼3세기)

          수도원제도(금욕주의)
              (3∼10세기)
                                                             스콜라주의(11∼14세기)

          신비주의(14∼15세기)

                                                           정통파 종교개혁(16∼17세기)

           경건주의 및 감리교 부흥운동
                 (17∼18세기)        
                                                            자유주의(19∼20세기)

           오순절파 및 성령운동
                   (20세기)

   도표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교회사 속에서 성서에 입각한 기독교의 흐름은 이성 중시와 감정 중시의 두 틀 속에서 교차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물론 이것은 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움직여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원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성 중시의 교회관이 타락할 때 감정을 중시하는 몬타누스파가 등장하였으며, 몬타누스파가 타락할 때 이성을 중시하는 영지주의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역사의 반복을 거쳐 현대는 감정을 중시하는 오순절파 및 성령운동의 등장으로 교회의 부흥에 촉진제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또한 문제가 발생하므로 다시금 말씀 중심의 예배로 돌아가려는 갈등 속에 있다.
   이를 볼 때에 비록 인간은 타락하여 말씀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종들을 통하여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로 회복시켜 주심을 알 수 있다.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인과 당당하게 싸웠던 엘리야가 두려워 떨며 도망할 때에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남겨 주사 위로해 주셨듯(왕상 19:9∼18)이, 언제나 복음을 사랑하는 종들을 통하여 말씀 중심의 예배로 전환시켜 주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구속의 은총이다.

   ⑵ 기도에 힘쓴 초대 교회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초대 교회의 예배나 각종 모임에는 특별히 기도에 힘쓰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많이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행 1:4)을 좇아 열 한 제자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아우들이 모여 기도한 사건(행 1:13∼14), 날마다 성전에 모여 기도에 힘쓴 사건(행 2:42),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기도하므로 모인 곳이 진동하는 이적의 사건(행 4:31), 기도에 전무하려는 사도들의 결단(행 6:4),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한 기도(행 12:5),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기도한 사건(행 12:3),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므로 옥문이 열려지고 매인 것이 풀어진 사건(행 16:25)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예배나 각종 모임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주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증거로 보여진다. 즉 주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베푸실 때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눅 9:28)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눅 9:29)며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가르침 때문으로 본다.

   ① 기도의 성경적 의미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罪)"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참된 예배는 기도가 살아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상한 심령을 안고 나온 성도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기도에 힘쓰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는 신앙의 용광로와 같은 열정으로 넘쳐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② 예배에 적합한 기도의 시간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행 3:1)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행 16:1)

   주님은 공생애 말기인 예루살렘에서 낮이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밤이면 "습관을 좇아"(눅 22:39) 기도하셨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상황도 주님의 가르침을 좇아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초대 교회는 하루에 세 번 곧 제3시(6시에 해당), 제6시(정오에 해당), 제9시(오후 3시에 해당)에 기도드렸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오순절날 성령의 강림으로 기도드렸던 시간이 제3시(행 2:15)이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이 제9시(행 3:1)이며,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간 시간이 제6시(행 10:9)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만큼 예배에서 기도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의 기도는 어느 정도가 적합한가?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나 통계를 제시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러나 대예배를 제외한 다른 예배의 순서에서 기도의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이 좋다.
   참고적으로 본 저자가 시무하는 목양 교회의 예를 들면 대예배를 제외한 기타의 예배 시간에는 통상 30분의 통성기도 시간이 있다. 이때의 기도 내용은 크게 세 부류로 구분하여 조목조목 기도한 후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개인기도시간으로 5분을 추가로 갖고 있다.

   ③ 예배에 적합한 기도의 자세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성경은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대체로 아홉 가지의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무릎을 꿇고 기도(왕상 8:54; 대하 6:13; 왕상 18:42; 스 9:5; 단 6:10; 눅 22:41; 행 7:60; 9:40; 20:36; 21:5; 엡 3:15), 서서 기도(삼상 1:26; 대하 20:9; 막 11:25; 눅 18:11, 13), 손을 들고 기도(출 17:11; 왕상 8:38, 54; 시 28:2; 63:4; 88:9; 딤전 2:8), 땅에 엎드려 기도(창 24:52; 왕상 18:42; 마 26:39; 막 14:35), 가슴을 치며 기도(눅 18:13),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요 11:41),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왕하 20:2),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삼상 1:12∼13),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히 5:7) 등이 있다.
   대예배의 중보 기도는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회중 전체의 공적인 공동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이므로 장로가 하기 보다는 예배 인도자인 목사가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대예배 외의 주일 찬양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은 통성기도로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때의 기도는 서서 하는 기도나 개인이 대표적으로 기도하기 보다는 전교인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들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죽음에 직면해서 근심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을 울며 호소하였기 때문(시 130:1)이다.

   ⑶ 찬송으로 영광돌린 초대 교회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대 교회에 나타난 예배의 결론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찬미한 그들의 예배 모습이 하나님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에게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초대 교회의 예배생활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씀에 은혜가 넘치고 기도에 전력을 다하므로 지극히 높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승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예배는 공동체로서의 아름다운 모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는 영광의 찬송을 드렸으며, 백성들에게는 칭송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의 향기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깨우쳐 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배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는 양면에서 아름다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예배가 자아만족만을 추구하면 사람들에게 혐오증을 주고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예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조화된 초대 교회의 예배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전세계의 교회와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예배의 모범이 된다.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더 왕성하여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천국 대사관의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7. 종말론적인 신앙에 기초한 예배

   "11…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기독교의 예배의 결실은 바로 종말론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다. 즉 우리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의 예배는 종말론적인 신앙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는가?

   ⑴ 주님이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6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6∼29)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6∼20)

   주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과 포도주로 유월절을 대신할 성만찬의 예식을 제정하셨다. 즉 유월절의 포도주가 하나님과 그 백성 간에 언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흘린 피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오늘 만찬은 바로 유월절의 성취를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유월절은 신약의 주님으로 말미암은 죽으심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신약은 구약에 예언된 사건의 완성으로서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즉 주님이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시므로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그 종말은 아직 완성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념해야 할 종말론적인 예배의 의식으로 제정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시작된 종말"과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종말"의 사이에서 옛 세상과 새로운 세상이 어우러져 있는 삶을 살기에 항상 긴장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정일웅 목사의 다음 주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종말론에 기초한 예배란 역시 오스카 쿨만의 구속사적 종말론으로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행하는 영적인 사건이 곧 기독교의 예배인 것이다. 여기 이미와 아직이란 이미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경험된 구원과 그의 재림에 의하여 완성될 구원, 즉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하심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미래적으로 기다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특별히 성만찬의 의미는 미래적인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만찬에서의 신비적인 교통을 현재적으로 선취하면서 그 완성의 날을 기다리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새 세상과 옛 세상을 겸하여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긴장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배는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신앙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⑵ 초대 교회가 드렸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헬라어 마라나다(        )는 초대 교회의 신앙상태를 잘 묘사하는 용어이다. 즉 그들은 예배 가운데 영으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마라나다로 기도하며 찬양했던 것이다.
   또 기억하여야 할 것은, 마라나다(        )는 헬라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해서 쓰여졌던 아람어식(Aramaric)의 공적인 기도문이었으며, 이 표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아람어로 시작하여 멀리 헬라권으로 들어갔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디다케(Didache) 10, 6의 성찬식 기도문에도 나오는 용어임을 볼 때 이 단어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기도문이 되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임박한 주의 재림을 믿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예배는 언제나 마라나다라는 용어가 예배에서 중요한 인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예배에서 마라나다 신앙으로 준비하는 예배를 드렸던 이유는 주님께서 임박한 재림을 증거하셨기 때문(마 10:23;  마 24:42∼44)이다.
   초대교회의 예배가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드려졌음은 김득룡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신약 시대의 예배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의 재림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에 완성되는 모형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예배는 종말론적인 현상(eschatological phenomenon)이라 불리워졌으니, 과거를 현재에 효과적으로 만들뿐 아니라 미래의 예시와 메시아적 영광을 현재에서 효과적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구속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예배의 경축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종말론적 성취를 보고, 종말론적 교회로서의 자신을 알아차리고, 종말론적 완성의 소망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⑶ 성도의 최대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거대한 공룡과 같은 로마 정부의 박해가 산더미 같은 파괴가 되어 엄습해 올지라도 그들이 소망 중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축복에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한계시록의 끝 부분에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사도 요한의 답변은 아마도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복창했을 것이다. 그것은 주님 다시 오시면 영광의 자리에서 누리게 될 축복과 아울러 지금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핍박도 끝이라는 생각에 외치고 또 외치고 싶었을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종말론적인 신앙에 기초한 것이므로 하루 하루의 생활 속에 드려지는 예배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예배에 있어 최선을 다하는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이 세상 너머를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종말론적인 소망을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배가 종말론적인 신앙에 기초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델링(Gerhard Delling)이 주장한 것처럼 예배의 본질이 역사 속에서는 끊임없이 구원을 수행하는 동시에 영원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서 끝을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산 너머 그곳에 행복의 샘터가 있다면 그 누구도 산을 넘어가는데 주저하거나 낙오할 이유가 없을 것이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에게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통의 늪으로 느껴지듯, 우리 주님이 강림하시면 영원한 천국에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기쁨이 있음을 믿음으로 받는 자는 주님의 재림이 최대의 소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 이후의 예배에도 종말론적 차원의 성격을 지닌 예배가 계속 이어졌으나 굳세지 못한 믿음으로 인하여 퇴색되어 갔음은 안타까운 일인데, 그 이유에 대하여 정일웅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기독교의 예배를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해한 것은 초대교회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퇴색되어 갔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관계로 이해되는 것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영원한 축제의 만찬으로서 선취적인 의미가 전제되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에도 기롱(譏弄)하는 자들이 나와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라며 조롱하였듯이 말세지말을 맞이한 오늘날에도 이러한 자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려는 성도들을 조롱하며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최대 소망은 바로 주 예수 다시 오시리라는 것에 있음을 기억하며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Ⅳ. 예배의 종류와 조직

 


1. 예배의 기획·연출·평가
                           2. 주일 대예배
                           3. 주일 찬양예배
                           4. 수요예배
                           5. 금요예배
                           6. 새벽예배
                           7. 구역예배

 

 


【읽을 말씀】
"25왕이 레위 사람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 26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27히스기야가 명하여 번제를 단에 드릴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29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대하 29:25∼29)

 

 

 

 

 

 

 

 

 

 

 

 

 

 

 

 

 

  
   기독교인의 삶은 예배화의 생활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예배는 헉스타블(Jehn Huxtable)의 주장처럼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이자 지글러(Franklin Segler)가 주장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있어 예배는 삶의 근거를 제공해 줄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화 물결에 힘입어 문화적 특혜를 누리는 오늘의 시점에 있어 예배가 주는 중요성을 잃어버린 성도가 많이 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예배에 흥미를 잃어버린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물론 일차적으로는 성도들 개개인이 져야할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맡은 목회자의 책임이 더 크다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를 맡은 목회자들은 베드로가 전하여 주는 말씀을 경계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목회자는 이와 같은 베드로의 증거를 경계의 거울로 목회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로서 주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수 가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요 21"15, 16, 17)이나 질문을 받았던 종이다. 그러한 그가 이러한 서신서를 초대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낸 것은 주님의 그 질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양 떼들 가운데 감독자(監督者)로 세우심을 입은 자들(행 20:
28)로서 양 무리를 치는 사역을 위임받은 자이다. 따라서 예배는 목회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성공적인 예배를 위하여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목회의 현장에서 예배의 종류는 어떻게 분류되며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본 장에서는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예배의 종류와 그 조직을 소개하며 주님이 맡겨주신 목회사역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예배의 기획·연출·평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목회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바 된 교회를 성령의 보증으로 양육하도록 세움을 받은 감독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도록 양육할 책임이 있다. 비록 목회자가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갈 예배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고 적용할지라도 그 기획을 이끌어가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출발해야 할 것이다.

   ⑴ 기획(企劃)
   "15……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내 어린 양을 먹이라 16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다. 목회자는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로 보내심을 받은 일꾼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수님의 양떼를 양육하는 일을 집행할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대화인 예배를 집행할 책임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참된 예배를 위하여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예배를 기획해야 하는 목회자는 텔레비젼의 프로를 제작하는 프로듀서(P. D)와 같은 것이다. 프로듀서의 기획에 따라 작품이 만들어지듯, 예배는 목회자의 기획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프로듀서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지나가는 것이지만 예배는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것이기에 프로듀서의 기획과 목회자의 예배 기획에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배 형태(수요, 금요, 대예배 등)에 따라 기도, 찬송, 헌신, 각종 순서 등을 기획하고 집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를 위한 준비는 적어도 3개월 전에 구상하여 준비하고 기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별히 헌신 예배의 경우 연간 교회에서 몇 번 드릴 것이며, 헌신 기관의 설정과 헌신 예배를 위한 강사의 선정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잘못 편성된 작품이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당하듯, 잘못 구성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당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로부터도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기획이 세상 사업의 기획보다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기업가들의 기획은 한곳으로부터 검증받으면 되지만 목회의 기획은 하나님과 성도들로부터 이중적으로 검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⑵ 연출(演出)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연출(演出)은 기획된 내용에 따라 작품을 창출해 내는 것을 말한다. 텔레비젼 드라마나 영화 프로에서 연출자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영화(映畵)를 한편 만들 때 누가 감독이냐에 따라 영화가 판이하게 달라지며, 텔레비젼 프로도 프로듀서에 따라 그 프로의 운영이 판이하게 다르다.
   목회자는 성령의 보증으로 교회를 양육할 감독자로 세움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배를 완벽하게 진행시키는 연출가의 자질이 있어야 한다. 즉 예배를 은혜스럽게 인도하는 목회자의 연출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는 기획자와 감독(연출)자가 다르므로 각기 자기의 맡은 분야에서 책임을 다하면 그 직분에 충실한 것이 되지만 목회자는 혼자서 기획하고 감독(연출)해야 하므로 교회에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⑶ 평가(評價)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모든 일의 결과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듯, 예배도 모든 순서가 끝난 후 오늘의 예배에 나타난 장·단점을 발견하여 장점은 계속적으로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여 은혜롭고 경건한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예배를 건축의 한 과정과 같다고 볼 때 "기획 = 설계", "연출(감독) = 건축", "평가 = 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목회자는 혼자서 한 건물을 지어가는 설계사요, 건축사요, 감리사이기 때문에 세상의 업무와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성공은 올바른 기획·연출·평가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2. 주일 대예배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곳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주일 대예배는 성도들에게 큰 의미를 주게 된다. 그렇다면, 주일 대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⑴ 성경적 근거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성경은 주일 대예배에 대하여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그러한 순서를 일괄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없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예배를 볼 때 대예배의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즉 성경낭독, 설교, 권면이 담긴 사도들의 가르침(행 2:42; 20:7)과 기도와 떡을 나누는 예식, 시편 등을 노래하며 찬송드리는 것(행 2:47), 신앙고백(롬 10:9∼10; 빌 2:11), 헌금(고전 16:2), 축도 혹은 송영(고전 16:24; 고후 13:13; 갈 6:18; 계 22:21) 등이 포함되었다.

   ⑵ 대예배의 특징
   대예배의 특징은 대체로 초대교회의 예배에 나타난 특징을 따르려는 시도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배의 경건성
   주의 날에 모인 예배는 대체적으로 경건한 예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한 예배란 곧 경직된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므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쓸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떡을 떼며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행 2:42∼47)이다. 총회헌법 제4편 예배모범의 제1장은 거룩히 지켜야 할 주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조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② 이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③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④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⑤ 개회 때부터 이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⑥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를 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모든 일을 행함이 옳다.

   ② 대표적인 예배
   주의 날에 모인 예배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예배였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쉬신 날(출 20:11)이며,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신 5:15)이자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의 완성(히 4:9)을 기억하며 성별된 날로 지켰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인 매주일의 첫날을 기념하며 거룩하게 지켰으니 오늘날 주일의 개념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매주일 첫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주일 아침에 모여 예배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 20:7),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고전 16:2),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계 1:10)라는 기록들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예배행위가 주일에 행해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예배였음을 증거하는 구절(행 20:7)에 대하여 알포드(Henry Alford)는 "이 곳에서 그 관습의 계속된 암시를 가진다. 이러한 것은 부활절 직후부터 시작된 것 같고(요 20:26), 종교적 목적을 위해 주 중 첫날에 모인 것이다"고 하였으며, 브루스(F. F. Bruce)는 "주의 첫날에 모였다는 기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위해 그날에 모이는 관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우리가 가진 최초의 명확한 증거이다"고 하였다. 참고적으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기독교의 주일로 대표적 예배로 삼았던 각종 역사적 문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후 80년경에 기록된 12사도의 교훈은 "매주일마다 모여서 떡을 떼고 감사하라"
   ② 주후 105년경의 사도들의 교훈은 "매주 첫날에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성찬식을 행하라. 왜냐하면, 주의 첫날에 우리 주님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③ 폴리갑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주후 30∼117년)는 "모든 크리스찬 형제들은 주의 날을 축제일로, 부활의 날로, 한 주간의 모든 날의 여왕의 날로, 가장 중요한 날로 지키도록 하시오. 이날에 우리 생명이 다시 소생하고 죽음을 이기는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또 마그네시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유대교적 배경을 지닌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그들은 더 이상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고 주일을 준수하면서 살아가는 새 희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주일에 우리들의 생명도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용솟음쳤다"
   ④ 주후 130년의 사도교부 문서 중의 하나인 디다케는 "매주일 주의 날에 모든 교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뗄 것이며, 각자의 죄를 고백한 후 주께 감사를 드리라. 이것이 바로 너희가 드릴 신령하고 온전한 예배니라"
   ⑤ 주후 130년경에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서간문인 바나바경은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신 날, 곧 제8일을 기쁨으로 지키노라"
   ⑥ 베드로 복음은 "주일이 밝아 오매"
   ⑦ 순교자 저스틴(Jusrin Marty 주후 100∼165년)은 "일요일에는 도시와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사도들의 글이나 선지서들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우리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⑧ 북아프리카교회의 장로인 터툴리안(Tertullian 주후 150∼220년)은 "크리스찬은 제8일마다 축제일로 지킨다"
   ⑨ 고린도의 주교 디오시니우스(주후 170년)는 "오늘 우리들은 주의 거룩한 날을 지냈습니다. 이날에 우리들은 당신의 서신을 읽었습니다"
   ⑩ 이레니우스(Irenaous 주후 140∼200년)는 주후 178년 로마 주교에게 부활절이 일요일에 축하되어야 하는 여부에 대한 논쟁적 문제에 관하여 "주의 부활의 신비는 주일 이외의 어떤 다른 날에도 축하되어서는 아니됩니다"
   ⑪ 클레멘트(Clement 주후 159∼215년)는 일요일과 안식일을 영적으로 해석하면서 주일은


히브리인의 안식일과 모종(某種)의 유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알렉산드리아의 영적인 방법을 적용한 교부들 가운데 최초의 사람이었다.
   ⑫ 안디옥 교회의 목사인 데오빌르(Theophilue 주후 162년)와 오리겐(Origen 주후 200년)은 "만약 우리가 특정한 날들, 예컨대 주일과 같은 날들을 늘 준수한다는 문제 때문에 반대를 받는다면……나는 완전한 기독교인에게는 즉 항상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항상 주일을 지키고 있다라고 대답해야겠다"
   ⑬ 예수님의 탄생부터 콘스탄틴까지 교회 역사를 기록한 학자인 유세비우스(Eusebius 주후 265∼340년)는 "초기 크리스찬들은 주 중 첫날에 모였고, 그날을 주의 날(主日)이라고 불렀으며 이날에 예배, 성경읽기, 설교, 주의 만찬을 행했다. 그 이유는 이날에 죽음을 이기고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⑭ 국제표준 성경백과 사전(I. S. B. E)은 "안식일을 더이상 지킬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 새 영을 주고 빛을 일어나게 하는 주의 날을 지킨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는 매일 모이는 특별한 예배가 있겠으나 이것은 오래 지속하지 못했고 다른 특별한 날을 선택해야만 했었는데 그날은 물론 주일이다"
   ⑮ 주후 321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은 기독교 일요일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칙령을 발표하였는데 일요일을 법적으로 로마제국의 공휴일 및 예배일로 제정하여 "이 칙령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만 허락하고 모든 재판관들과 시민들과 장인들은 존경스러운 태양의 날에 쉬어야 한다"

   ③ 예배의 대중성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 20:7)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 2:46)

   안식 후 첫날에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인 사건은 곧 주의 날(主日)에 드리는 예배가 초대교회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드렸던 예배였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주일 대예배에 대한 인식만큼은 웬만한 성도들이라면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음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더구나 주후 312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주의 날이 기독교의 축제일이자 로마제국의 공휴일로 제정하면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만 허락"하고 모든 재판관들과 시민들과 장인(匠人)들이 주의 날에 쉬어야 한다고 선포한 것은 거룩한 주일이 기계적으로 지켜야 하는 주일(主日)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켰던 주일(主日)이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일(主日)을 지키는 것은 어느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에게 적용된 점을 볼 때 당시 주일(主日)의 예배가 대중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주일 대예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준수하려는 신앙적 자세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매우 좋은 선례라고 본다.

   ⑶ 목양교회의 주일 대예배 순서
   본 저자가 섬기고 있는 목양 교회는 주일 대예배의 순서를 "경배와 찬양", "봉헌과 찬양", "말씀과 축복"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배 전 찬송
   대예배가 시작되기 20분 전(前)에 소강단 앞에서 경건한 찬송을 인도하여 그날의 예배가 성공적이도록 마음을 열게 한다. 이때 모든 성도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게 되므로 매우 효과적이다. 이 찬송이 끝날 즈음에 찬송 인도자는 사회자가 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예배 시작 1분여 정도의 시간을 두고 내려 온다.

   ② 입례송
   전교인이 일어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라 내 영혼아"라는 찬송으로 예배를 시작한다.

   ③ 예배의 부름
   주악에 맞춰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며 예배의 부름에 응답한다. 본 저자는 흔히들 예배의 순서를 "묵도"로 표현하는 방법에서 벗어나 "예배의 부름"으로 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묵도"라는 용어가 성경적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방식이자 세속적인 용어에서 유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황원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강단에서 종을 치는 것과 묵도를 선언하는 동시에 예배가 시작된다. 이는 회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는 긍정적이나 로마 카톨릭에서 있었던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또한 묵도는 원래 기독교 예배의 순서에 처음 있지 아니했다. 이것은 일본의 신도(神道)주의와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개신교는 '이제 다같이 우리의 뜻과 정성을 모두어 예배를 드리겠습니다.'의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들을 예배 가운데 임하게 한다. 그러함으로써 예배의 주도권을 인간이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유하시고 사용하고 계심을 알리게 되는 것이다."

   ④ 통성기도
   사회자의 인도로 전교인이 지난 한 주간 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초대 교회 교인처럼" 살지 못한 일을 회개한 후 사회자가 회개 기도의 마무리를 한다. 이러한 통성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분명히 하는 간구의 기도이자 모든 은혜와 돌보심과 자비하심에 무한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드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기에 남김없이 모든 죄를 고백하도록 한다. 그리고 통성 기도 후에 전교인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⑤ 신앙고백
   회개의 기도와 찬송 후에 전교인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⑥ 교독문
   찬송가 뒤에 있는 교독문을 순서별로 교독한다. 특별한 절기에는 그 절기에 맞는 교독문을 선정하여 교독한다.

   ⑦ 대표 기도
   본 교회에서는 교독문 후에 이어지는 대표 기도자를 일반 교회에서 장로로 세우는 것과는 달리 사회를 보는 목사가 기도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대표 기도는 교인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축복권이 있는 목사로 세우는 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예배예식에도 목사가 대표기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주일 대예배의 목회기도(중보의 기도) 또는 대표 기도자를 목회자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일웅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목회기도는 서구 교회들에서 모두 예배인도자인 성직자가 담당한다. 그리고 예전의 원리에 따라 볼 때도 교회의 목사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전반의 중요한 내용의 기도 제목을 잘 파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일은 장로보다는 목사가 하는 것이 올바른 질서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⑧ 찬 송
   설교의 주제와 맞는 회개를 담은 찬송을 선정한다. 이 찬송의 3절 혹은 4절이 찬송될 때 헌금위원장을 중심으로 헌금위원들이 강단 앞으로 나온다.
 
   ⑨ 헌 금
   헌금 시간에는 소강단 앞에 그날의 헌금봉사를 담당할 책임 장로가 서고 헌금위원들을 그 앞에 세우고 독창자로 하여금 헌금이 완료될 때까지 찬송드리게 한다. 그리고 독창자가 찬송을 드릴 때 3∼4절은 전교인이 함께 부르도록 한다. 또 헌금이 완료되면 예배당 제일 후미(後尾)에서 질서정연하게 들어오게 하며 이때 전교인은 일어서서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를 찬송한다. 그리고 그날의 헌금위원 장로가 드려진 헌금을 강단으로 올리면 당회장이 나아가 헌금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드린다.
   ⑩ 교 제
   교제란 설교에 들어가기 전 모든 성도들이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이란 찬송을 드리며 서로간에 교제를 나눈다. 이때 가급적이면 멀리 있는 성도들까지도 서로 눈 인사로 교제를 나누며 한 마음으로 예배에 동참하게 한다.

   ⑪ 알 림
   성도의 교제 후에 당회장이 교회의 제반 소식, 등록자 등을 알린다. 그리고 교회의 특별한 행사를 비롯한 당회장의 동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린다.

   ⑫ 성경 봉독
   성경 봉독은 사회자의 주도 아래 그날에 읽어야 할 말씀을 개인이 읽는 것이 아니라 전성도가 합독하여 말씀을 읽도록 한다.

   ⑬ 찬양
   성경 합독 후 교회의 주력 찬양대인 시온찬양대의 찬양을 드리게 된다. 이때 전성도는 일어나서 경건한 자세로 찬양대의 찬양이 끝나기까지 찬양대석을 향하게 한다. 이때 드리는 찬송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전교인들이 느끼도록 하는 경건성을 유지해야 한다.
   찬양이 끝나면 그 찬송에 담겨진 영적 의미를 깊이 깨달아 전교인이 아멘으로 화답하게 한다. 그리고 이 찬양이 끝나면 사회자도 강단 아래로 내려가 좌석에 앉아 말씀을 듣도록 하므로 드리는 예배로서의 기초를 확고히 한다.

   ⑭ 설 교
   주일 대예배의 설교는 제한된 시간 내(30∼40분)에 전교인을 향한 것이기에 쉽고 간단하면서도 영적 깊이가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⑮ 기 도
   설교가 끝난 후 당회장은 본문 말씀에 입각하여 전교인이 통성으로 기도하도록 인도한다.

    찬 송
   설교 본문에 맞는 감사와 기쁨이 담긴 찬송으로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출발할 제목으로 선정한다. 은혜가 넘칠 때는 반복적으로 드릴 수도 있다.

    축 도
   찬송이 끝나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축복인 축도로 마무리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성도들이 축도가 예배의 마무리라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축도야말로 그날의 예배에 대한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아무리 바빠도 축도가 끝나기 전에 나가는 사례가 없도록 해야 한다.

    10분 통성기도
   축도가 끝난 후 전교인으로 하여금 예배를 통하여 깨끗함을 입은 성도가 되었으므로 일주일 동안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며 개인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게 한다.

    찬양대의 찬양
   통성 기도의 시간이 되면 찬양대는 힘차고 경쾌한 리듬의 찬송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성도들에게 힘을 불어 넣도록 한다.

   이상의 내용이 본 교회의 주일 대예배 순서이다. 본 교회의 예배 순서 중 특이할 만한 것은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라는 것이며 또한 회중을 대표한 기도자를 장로 혹은 집사로 세우는 일반 교회의 전례와는 달리 목사로 세운 것이다. 이는 기도가 성도들의 소망을 담은 것인 동시에 축복의 권한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축복권이 없는 자를 세우기 보다는 축복권이 있는 목사로 세우는 것이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다른 특이점은 예배가 끝난 후 전성도들로 하여금 10분 통성기도를 통하여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서 은혜받은 말씀대로 살고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되리라는 결단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또 설교 시간에는 설교자 외에는 사회자라도 좌석에 앉아 말씀을 듣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드리는 예배로서의 진행을 유지하여 은혜와 사랑과 소망이 넘치는 예배시간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순서에 맞추어 사회자가 대표기도를 하므로 예배의 전반적인 순서가 정확하면서도 빠르게 진행되므로 교인들로 하여금 예배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전교인이 드리는 예배에 대한 것으로 감사가 넘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함을 깨닫는 축제의 예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는 상한 심령을 안고 예배에 임했을지라도 치유받는 이적의 역사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에도 말씀으로 말미암은 감사의 열매가 가정과 생업과 사업의 터전 위에 맺히게 될 것이다.

 

 

 

 

 

 

 

 

 

 

 

 

 

 

 

 

 

 

 

 

 

  3. 주일 찬양예배

   교회는 주일 대예배와 구분하여 주일 저녁예배 혹은 주일 찬양예배라는 명칭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렇다면, 주일 찬양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⑴ 성경적 근거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초대교회의 주일예배는 하루 종일 거룩하게 교회에 모여서 지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예배 풍토는 곧 오늘날의 저녁예배 혹은 주일 찬양예배의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찬양예배 혹은 주일 저녁예배의 성격과 같은 예배가 초대 교회에서 드려졌음을 증거하는 문헌이 있는데, 비데니아의 총독 소푸리니우스가 도라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주후 112년 경)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

   "저들이 정한 날 해뜨기 전에 정기적으로 회집하여 하나님에 대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노래를 노래하고, 아울러 서약을 하여 이런저런 범죄를 범하지 않고 도리어 훔치고, 죽이고, 간부, 위증, 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거기서 일단 해산하여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다시 회집하는 습관이 있다."

   그렇다면, 주일 저녁예배는 왜 생겼을까? 이에 대하여 김영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주일 저녁예배는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킨다는 뜻에서 주일 저녁에 다시 모여 예배드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배우고 더 뜨겁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주일 오전 예배 한 번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저녁에 다시 모여 예배하는 전통이 생긴 것이다. 독일 교회에서는 주일 오전에 한 번만 예배드린다. 그래서 교회가 생기가 없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오전에 자기들이 속해 있는 교회 예배당에 가서 예배하고 오후에 자기들끼리 모여 다시 예배한다. 영국이나 미국의 많은 교회들, 즉 부흥운동에 힘입은 교회들은 저녁예배를 드린다."

   주일 찬양예배는 개 교회마다 먼 거리에서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들이 오전에 예배드린 후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모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교회에서 제공하는 중식(中食)을 먹은 후 예배당에서 쉬었다가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 오후 찬양예배는 엄격한 의미로 볼 때 주일 저녁예배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일 찬양예배는 대도시 중심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형태이며 농촌이나 도시의 외곽 지대에 있으면서 교회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교인화 되는 지역 교회에서는 저녁예배로 모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주일 저녁예배를 오후 찬양예배로 전환된 계기는 단순히 장거리에 거주하는 성도들이 도시의 교회에 출석하므로 발생하는 제반적인 문제점을 보완하는 의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일웅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근년에 한국교회는 저녁예배를 행하지 못하고 주일 오후 예배로 발전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지역교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회중 중심의 교회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로 여겨진다. 먼 곳에서 오는 성도들이 저녁에 다시 오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주일 낮 예배로 모였다가 교회가 중식을 제공하고, 오후 예배로 모여 저녁예배를 대신한다. 서울을 중심한 대도시들의 현상이며, 지역을 중심한 교회들은 그대로 저녁예배로 모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⑵ 예배의 특징
   소푸리니우스가 도라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정한 날 해뜨기 전에 정기적으로 회집한 예배"가 있었으며, 그 집회의 해산 후 "공동식사를 위하여 다시 회집하는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주일에 오전 예배와 오후 찬양예배 혹은 주일 저녁예배의 참석은 거룩한 주일을 성수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일 오후 찬양예배는 어떤 형식으로 드리는 것이 좋은가? 아무래도 주일 대예배가 거룩함과 경건함이 어우러진 예배라면, 주일 찬양예배 혹은 주일 저녁예배는 낮 예배에서 충족하지 못한 것을 채우는 형식의 예배가 좋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 대예배를 오전 11시에 시작하므로 12시의 점심 식사시간을 고려한 시간적 문제로 인하여 성경공부나 찬양예배의 성격을 전하는 예배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오후 찬양예배나 저녁예배는 대예배와는 형식이나 순서가 다르게 편성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후 찬양예배나 저녁예배는 대예배 때에 충족시키지 못한 기도, 혹은 찬양이나 성경 공부에 대한 것으로 채우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효과적인 저녁예배 혹은 찬양예배의 순서에 대하여 정일웅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저녁예배를 '찬양예배'라고 불러왔다. 이것은 아마도 주일 공예배와 구별하여 붙여진 것으로 이해한다. 역시 낮 예배와는 달리 찬송을 많이 부르는 순서를 가진 예배로 이해된다. 많은 교회들이 이 저녁예배 시간을 교회내의 각 기관이나, 부서의 연대(連帶)로 '헌신예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역시 예배 순서는 주일 공예배처럼 행할 수 없지만 준하는 범위에서 개 교회가 적절한 순서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볼 때 오후 찬양예배의 성격은 기도, 찬송, 성경 공부 방면에 중점을 두고 순서를 배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

   ⑶ 목양교회 찬양예배 순서  


   ① 예배의 부름
   헌신예배를 주최하는 기관장의 사회로 타종(打鐘)하므로 주일 찬양예배가 시작된다. 그리고 예배의 부름에 대한 주악이 끝나면 전성도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② 찬양과 경배
   사회자는 신앙고백이 끝나면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라는 선포와 동시에 찬양을 인도할 부목사에게 강단을 인계하고 찬양대석으로 간다. 찬양 인도자는 전성도들로 하여금 두 손을 들고 "찬양하라 내 영혼아"라는 찬송으로 시작하여 은혜와 사랑이 담긴 찬송을 박수치며 20분 정도 인도한다. 그리고 찬송의 마지막은 고요한 리듬의 곡을 선정하여 박수 없이 부르면서 찬송을 마친다.

   ③ 통성기도
   찬양을 인도한 부목사는 규정된 시간에 찬양을 마치고 전교인들의 통성기도를 인도하는데, 그 내용은 말씀주실 목사님을 위하여, 말씀을 받기 합당한 심령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헌신예배를 드리는 기관을 위하여 기도한 후 "오직 예수"의 찬양으로 통성기도를 마친다.

   ④ 찬 양
   부목사로부터 강단을 물려받은 사회자는 "제2여선교회 찬양 후 목사님 나오시겠습니다"라는 선포와 함께 찬양대석에 가서 헌신 위원들과 함께 찬양을 드린다. 그리고 3∼4절의 찬송은 전성도들이 합창하므로 끝을 맺는다.

   ⑤ 광 고
   담임 목사는 찬양대가 마지막 찬양을 드릴 때 강단에 올라 같이 찬양을 드린 후 찬양이 끝나면 교회 소식을 전성도들에게 전한다. 이 시간은 교회의 모든 문제를 드러내어 놓고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기도로 준비하는 시간이므로 일반적인 개념의 광고라기 보다는 설교성이 포함된 광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드려진 예물을 위하여 기도한다.

   ⑥ 성경봉독
   설교자는 그날에 필요한 성경 말씀을 전성도들과 함께 합독한다.

   ⑦ 설 교
   함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는데 이 때의 설교는 주일 대예배에서 시간의 제약 때문으로 전할 수 없었던 말씀을 강해하는 방법으로 전파한다. 그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이 되도록 한다.
   ⑧ 통성기도
   설교 후 설교자의 인도로 말씀을 생각하며 전성도들의 통성기도를 인도한다.

   ⑨ 찬 송
   설교자의 통성기도 후에 말씀에 부합되는 찬송을 반복적으로 은혜스럽게 인도한다.

   ⑩ 통성 기도
   부교역자를 강단에 세워 통성 기도를 인도하게 하는데, 먼저는 교회와 목회자를 위하여, 다음으로는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하여, 나라와 정치지도자들을 위하여, 이북 동포와 복음으로 하나되는 역사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한다.

   ⑪ 축 도
   부교역자의 통성 기도가 끝나면 설교자는 강단에 올라가 축도로 성도들을 축복한다.

   ⑫ 찬 송
   예배의 마지막은 "가서 제자 삼으라"는 복음성가를 합창하며 그날의 은혜받은 말씀을 안고 세상으로 파송받는 천국의 대사관직을 수행하도록 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이 찬송을 통하여 더욱더 굳센 믿음을 지키리라는 결단의 시간이 되도록 한다.

   이상과 같은 순서로 주일 찬양예배를 마치면 보편적으로 오후 2시에 시작한 예배가 오후 4시∼4시 30분 정도에 끝나게 된다. 그리고 본 저자는 주일 찬양예배의 설교 시간은 보편적으로 1시간 30분 전·후를 할애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말씀의 충분한 의미를 전달하여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되도록 노력한다.

 

 

 

 

  4. 수요예배

   만약 성도들에게 "왜 수요예배를 드리느냐?"라고 질문한다면, 대다수의 성도들이 답변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습관적으로 드리고 있는 수요예배이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면 쉽게 대답할 성도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요예배가 필요한가?

   ⑴ 성경적 근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사실 성경은 수요예배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명하지 않고 있으나 각 교회의 실정에 맞추어 행하는 예배의 수단과 방법으로서 성경의 간접적 지원을 받는 예배이다.
   따라서 수요예배의 출발은 사도 시대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날마다 모이지는 못하더라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않기 위하여 한 주의 중간인 삼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므로 유래되고 있다.

   ⑵ 예배의 특징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출 3:18)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출 5:3)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 8:27)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야 할 조건을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 "사흘 길"이란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사흘 길쯤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려야 했으나 정작 그들은 사흘 길쯤 가서 희생제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게 되었다. 여기에 수요예배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영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24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 15:22, 24)

   본문의 사건은 수요예배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군대는 물 속에 장사지낸 바 된 그 큰 이적을 경험한 후를 의미한다.
   그처럼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체험한 그들이었으나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갔을 때 물을 얻지 못하자 감격의 체험도 잊어버리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홍해의 놀라운 이적의 체험을 대예배로 비추어 본다면 그 예배로 말미암은 기쁨과 감사의 체험이 있을지라도 사흘 길쯤이면 마음이 강퍅해짐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요예배 혹은 삼일 기도회는 성도들의 신앙을 위하여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요예배의 출현과 그 성격에 대해서 황원찬 목사와 정일웅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우리에게 좋은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다.

   "기도회나 주간 중의 예배에 대해서는 물론 성경에 규정한 바는 없고 각 교회의 실정에 맞추어 행하는 수단과 방법이라 하겠다. 사도 시대 교회에서도 매일 집회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앙생활을 양육하기 위해서 장려할 만한 일이다. 특히 주간 중의 기도회나 다른 집회는 어떤 특성을 살려 가짐이 좋은 것이다. 다른 예배 때에 강조하기 어려운 기도에 대해 강조한다든지 특별 행사를 가지는 것으로 성도들의 영적, 지적 성장을 위해 순서를 가짐이 좋을 것이다. 주간 중의 수요 기도회는 주의 반(半)의 세상적인 생활을 중단하고 영적 생명의 힘을 공급받는 데 이로운 점이 있어서 필요성을 느낀다."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삼일기도회'란 이름으로 시작된 수요일의 집회를 수요예배로 부른다. 주간에 교회가 행하는 중요한 예배행사 중에 하나이다. 이 예배는 원래 주간의 중간 일에 성도들의 신앙을 독려하고 기도를 중심한 모임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기도보다는 역시 설교를 중심한 예배가 행해지며, 보통 목사들에 의한 성경강해식의 공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수요예배 혹은 삼일기도회는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윤택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충전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수요예배의 형식은 찬양과 기도와 성경강해식의 공부가 곁들어지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하여 김영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수요일을 기도회 예배라고 부른다면 역사 마찬가지로 기도를 주로 하는 예배이면 좋을 줄 안다. 목회자는 여하튼 집회와 예배를 위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교인들과 더불어 어떻게 더 은혜롭게 예배하며, 어떻게 복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어 믿는 자의 수가 더하며, 성도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갈 것인가를 연구하며 위하여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⑶ 목양교회 수요예배 순서


   ① 예배의 부름
   당일의 헌신예배 드리는 기관의 기관장이 나와서 사회를 보는데 타종(打鐘)과 함께 "000교구 헌신으로 수요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는 선포와 동시 주악에 맞춰 수요예배를 시작한다. 그리고 주악이 끝나면 전성도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② 찬양과 경배
   사회자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이 끝난 후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를 선포하고 찬양을 인도할 부교역자에게 강단을 넘긴다. 전성도가 두 손을 들고 "찬양하라 내 영혼아"로 시작한 찬양은 수요예배의 성격에 맞도록 회개와 구원,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곡을 선정하여 박수치며 찬양케 하며 마지막 찬양은 고요한 가운데 은혜로운 찬양으로 끝을 맺는다. 찬양시간은 동일하게 20분 전·후가 적합하다.

   ③ 통성기도
   찬양이 끝나면 찬양인도자는 지난 삼일 동안 "예수님처럼 초대교회 교인처럼"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말씀주실 목사님과 말씀받기에 합당한 심령이 되기 위하여, 헌신예배 드리는 기관을 위하여 통성기도를 인도한다. 기도 후에 "천부여 의지없어서"를 3절까지 전교인이 두 손들고 함께 드린다.

   ④ 찬 양
   통성기도가 끝나면 사회자가 강단에 올라서서 "000선교회 찬양이 있은 후 목사님 나오시겠습니다"를 선포한다. 그리고 헌신 기관의 찬양을 드리게 되는데 3∼4절은 전성도들이 함께 찬양을 드리게 된다.

   ⑤ 광 고
   설교자는 헌신기관과 전성도들이 드리는 찬양의 마지막 절 부분에 이르면 강단에 서서 합창으로 찬양을 마친 후 그날 헌신 기관원의 출석을 점검하여 전 요원이 출석한 경우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박수를 친다. 그리고 그 후에 주일부터 수요일까지 있었던 교회의 모든 소식을 전한다. 본 저자가 시무하는 목양교회는 광고의 시간이 설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할 만큼 상세하면서도 은혜 충만하게 전하고 있다.

   ⑥ 성경봉독
   교회 소식을 알리는 시간이 끝나면 설교자는 그날 전할 말씀을 전성도들과 함께 합독한다.

   ⑦ 설 교
   본 저자는 주일 대예배를 제외한 모든 예배의 설교를 강해설교 중심으로 하는데, 그 시간은 보편적으로 1시간 30분∼2시간 정도 드리게 된다. 설교를 통하여 본문의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적용방식으로 전(傳)하고 또 모든 예배를 대예배처럼 드리도록 가르친다.

   ⑧ 통성기도
   설교가 끝난 후 설교자가 전성도들을 통성기도로 인도한다. 이때 드리는 통성기도의 내용은 설교의 내용을 중심으로한 것이어야 한다.

   ⑨ 찬 송
   설교에 부합되는 찬송을 설교자의 인도로 드리게 한다. 그리고 은혜로운 부분에 이르면 반복적인 찬송으로 말씀이 주는 은혜를 계속 간직할 수 있도록 한다.

   ⑩ 통성기도
   이때의 통성기도는 부교역자를 세워서 드리게 하는데, 설교자가 드린 통성기도와는 달리 세 부분으로 분류하여 드리게 한다. 먼저는 교회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위하여, 다음으로는 "나도 한 사람"이라는 표어와 함께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마지막으로는 이 민족과 동포를 위하여, 정치지도자들과 교회와 주의 종들을 위하여, 이북동포를 위하여 기도하게 한다.

   ⑪ 축 도
   통성기도가 끝날 즈음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축도하므로서 축복권을 행사한다.

   ⑫ 개인기도
   축도 이후 성도 개개인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하는 시간으로서 통상적으로 5분 이상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때의 기도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문제만 놓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는다.

   이상과 같이 목양교회의 수요예배 순서는 찬양과 기도와 성경공부가 가미(加味)된 예배로서 주중(主中) 삼일째 되는 날에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재점검하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귀한 예배 시간이 된다. 이러한 예배의 형태는 21세기를 준비하는 목회의 방향에 부응(副應)하는 예배이므로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한다.


  5. 금요예배

   금요예배는 수요예배보다는 성도들에게 비교적 쉽게 이해되어지고 인식된 예배이다. 그러나 금요예배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때 이 시간의 예배 또한 매우 은혜스러울 뿐만 아니라 감사가 넘치는 예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금요예배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⑴ 성경적 근거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32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둘지며 33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출 26:31∼33)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고 영혼이 떠나시다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膽力)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찢어진 성소의 휘장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성막에서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갈보리 언덕 위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이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이 날을 기념하여 금요일 저녁에 기도회 성격의 모임을 갖는 것은 한국교회만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예배이다.

   ⑵ 예배의 특징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後嗣)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6∼17)

   금요예배의 성격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운명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금요일의 예배가 중요한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이 사실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참된 의미로서의 금요예배를 드릴 수 없다.
   우리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할 때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은혜를 더욱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하여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지성소의 휘장은 300명의 제사장이 동원되어 24가닥의 실을 한 끈으로 엮은 82개의 끈으로 짜진 것으로서 그 두께가 약 10㎝인데, 이 두께는 황소 두 떼가 양편에서 서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아니할 정도로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죄악은 너무나도 크기에 이세상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무흠(無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요일(金曜日)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금요예배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는 기도회 성격의 예배를 갖는 것이 좋다. 더구나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세상에서 믿음이 점점 사라져 갈 것(눅 18:8)이라는 주님의 예언이 실현되는 듯한 이 시기에 금요예배의 활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⑶ 목양교회 예배순서

   ① 예배의 부름
   당일 헌신을 드리는 기관의 장이 나와서 "000 선교회 헌신으로 금요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는 선포와 함께 예배가 시작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② 찬양과 경배
   사회자는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라는 선포와 함께 찬양을 인도할 부교역자에게 강단을 인계하고 내려 온다. 동일하게 찬양인도자는 "찬양하라 내 영혼아"로 찬양을 시작하여 뜨거운 박수와 함께 경쾌한 리듬과 속죄와 회개를 담은 은혜로운 가사의 찬송을 드리며 마지막은 그날의 찬양과 경배를 장식할 고요한 곡으로 끝을 맺는다.

   ③ 통성기도
   찬양인도자는 마지막 곡을 끝으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며 지난 5일 동안 예수님처럼 초대교회 교인처럼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말씀주실 목사님과 말씀받기에 합당한 심령이 되기 위하여, 헌신예배를 드리는 기관을 위하여 기도한 후 찬양인도자가 마무리 기도를 한다. 그리고 전성도들이 두 손을 들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338장)라는 찬송을 드리게 한다.

   ④ 찬 양
   회개의 찬송이 끝난 바로 직후 사회자는 강단으로 올라와서 "000선교회 찬양이 있은 후 목사님이 나오시겠습니다"라는 선포와 함께 찬양대석으로 옮겨 함께 찬양을 드린다. 그리고 찬양의 3∼4절은 전성도들이 함께 드리므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더욱 실감있게 나타내게 한다.

   ⑤ 광 고
   찬양의 마지막 곡이 시작될 때 강단으로 올라가 5일 동안 교회의 제반 소식을 상세하게 전함으로 비록 헤어져 있었으나 이 소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한다. 그리고 그날 드린 헌신위원들의 출석률을 점검하여 전원 참석한 경우에는 격려를 하고, 사정이 있어 전원 출석하지 못한 선교회를 위해서는 권면을 한다.

   ⑥ 성경봉독
   그날 전할 말씀을 설교자가 선포하고 전성도들이 합독하도록 한다. 사회자가 읽는 대신 설교자가 읽는 이유는 예배의 흐름과 시간 단축을 위한 것이다.
   ⑦ 설 교
   금요예배가 기도회 성격이 짙으므로 설교의 내용도 가급적이면 구속의 은혜와 다시 오실 주님의 소망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여 온전한 구원의 소망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방향으로 한다.

   ⑧ 통성기도
   통성기도는 일반적으로 3부로 드리게 된다. 일차적으로는 설교가 끝나면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설교자의 인도 아래 통성기도를 드리게 한다. 이차적으로는 설교자의 인도로 말미암은 통성기도가 끝나면 부교역자로 하여금 전성도들에게 기도 제목을 부여하며 통성기도를 드리도록 한다. 먼저는 교회와 교역자들을 위하여, 다음으로는 선교와 전도를 위하여, 마지막으로는 교회와 주의 종들, 나라와 민족, 이북 동포를 위하여 기도하게 한다(약 20분).
   삼차적으로는 이러한 통성기도가 끝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조목조목 기도제목을 정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게 한다. 먼저 믿음의 문제를 위하여 안수받기를 원하는 성도를 세워서 전성도들과 함께 통성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리며, 다음으로 가정과 자녀들을 위하여 안수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세워서 전성도들과 함께 통성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리며, 또 사업과 생업의 문제를 위하여 안수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세워서 전성도들과 함께 통성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병들어 고통받는 자들을 위하여 안수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세워서 전성도들과 함께 통성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린 후에 담임 목사가 마지막으로 제목을 정하여 드렸던 기도의 내용들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통성기도로 끝맺는다.

   ⑨ 축 도
   통성기도가 끝나면 설교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밤에 모여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드린 모든 이들에게 참된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며 축도로 예배의 끝을 맺는다.

   ⑩ 개인기도
   축도가 끝나면 바로 개인적인 기도 시간을 갖게 한다. 이 때의 기도내용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한다. 어떤 개인의 문제도 바로 이 기도 시간을 활용하도록 한다. 강단에서 부교역자를 세워 5분이 지나면 타종(打鐘)으로 시간을 알려주고 그 이후는 성도들이 자유롭게 기도하다가 돌아가게 한다.
   이상과 같이 금요예배는 찬송과 기도와 말씀 공부가 가미된 예배이나 기도회의 성격을 더욱 짙게 드리게 한다. 또 병든 자와 고통 받는 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회가 될 수 있도록 목회자는 힘써야 한다.
  6. 새벽예배

   새벽예배는 교회가 부흥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만큼 한국교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예배이다. 그러므로 새벽예배는 교회의 부흥을 위한 중요한 예배임으로 목회의 성공을 원하는 교역자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새벽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⑴ 성경적 근거
   "새벽 오히려 미명(未明)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밤을 세우면서 기도(눅 6:12)하셨고, 밤이면 감람 산에서 기도(눅 22:39∼40)하셨다. 이러한 사실들은 교회로 하여금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대한 좋은 예화가 있는데, 모(某) 목사님은 새벽기도회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참지를 못하고 "어떤 ×××가 새벽예배를 만들었나?"라며 폭언(暴言)을 할 때 옆에서 그 폭언을 들은 사모가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마가복음 1장 35절을 내밀면서 "목사님! 새벽기도는 주님이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그 목사님으로 하여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도록 깨우쳐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 새벽기도는 비록 주님이 모범을 보이신 것이지만 목회의 현장에서 어쩌면 가장 골치 아픈 사역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힘이 들고 고달픈 새벽예배이나 그것이 곧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교역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문제점들도 있을 것이나 한국교회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는 이상근 박사의 주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본문은 유월절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말씀하신 내용이다. 주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본을 받도록 행하신 것이 어찌 발을 씻기신 사건으로만 국한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되어야 하는 범위가 봉사와 충성과 기도로까지 확산되어야 함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예배는 주님이 모범을 보이신 사건이므로 변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⑵ 예배의 특징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聖靈)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새벽예배의 특징은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려는 것인 동시에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의 삶을 살려는 결단인 것이다. 그런데 새벽예배를 게을리 하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예배는 하루의 출발을 성령으로 시작하려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적 결단이므로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벽예배는 각 성도들이 하루의 출발을 기도로 시작하는 신앙적 삶의 원천이 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새벽예배는 간단 명료하면서도 단순한 말씀을 전하고 개인이 기도하는 시간에 많이 할애하는 것이 좋다.

   ⑶ 목양교회 새벽예배의 순서


   ① 예배의 부름
   사회자가 등단하여 "주악에 맞춰 묵도하시므로 000 선교회 헌신 새벽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로 예배의 부름과 함께 새벽예배가 시작된다.

   ② 신앙고백
   사도신경으로 다같이 신앙고백을 드린다.

   ③ 통성기도
   하루의 시작을 말씀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모든 문제점을 회개하고 말씀을 주실 목사님과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심령이 되도록 기도하고, 헌신예배를 드리는 기관을 위하여 기도한다.

   ④ 찬 송
   통성기도가 끝나면  전교인이 두 손을 들고 "모든 영광 하나님께"를 찬송 드린다.

   ⑤ 찬 양
   통성기도 후의 찬송이 있은 다음은 헌신예배 드리는 기관이 찬양을 드리게 되는데 이때 1∼2절은 헌신예배를 드리는 기관이 3∼4절은 다같이 찬양을 드리게 된다. 새벽예배에 찬양대를 세우는 것은 아마도 목양교회가 지니고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⑥ 말 씀
   헌신기관의 찬양이 끝난 후 목사가 등단하여 성경말씀을 봉독한 후 설교를 한다. 이때의 설교시간은 15∼20분 정도가 가장 적합하다.

   ⑦ 통성기도
   설교를 마친 후 목사의 인도로 그날 주신 말씀을 상고하면서 통성기도를 드린다. 이때의 통성기도는 회개의 통성기도가 아니라 그날 주신 말씀처럼 힘차게 살기 위한 몸부림의 통성기도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통성기도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⑧ 축 도
   통성기도 후 목사는 새벽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을 위하여 가정과 직장과 사업 위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도록 축복한다.

   ⑨ 개인기도
   목사의 축도가 끝나면 개인적인 기도시간을 갖는다. 새벽예배의 총소요시간은 30분 내외가 적합하며, 새벽예배 끝난 후 보편적으로 6시까지 개인기도가 이어지게 된다.
  7. 구역예배

   구역예배는 일주일 중 하루를 선택하여 구역원끼리의 신앙적 교제를 위하여 도모하는 예배이다. 이 예배 또한 한국교회에서는 익숙해진 예배이다. 그렇다면, 구역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할 것인가?

   ⑴ 성경적 근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

   구역예배도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교회가 일주일에 하루를 선정하여 교회의 구성원인 구역별로 모여 예배드리도록 정한 교회법에 속한 것이다. 사실 구역예배의 형태는 수요예배와 마찬가지로 사도시대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날마다 모이지는 못하더라도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의 본문을 지키기 위하여 자주 모이는 것이 신앙생활의 유익을 주기 때문에 생긴 교회의 전통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일 뿐만 아니라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구역예배가 비록 교회의 전통이지만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예배이므로 경솔히 여겨서는 안된다.

   ⑵ 예배의 특징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聯結)하여 주 안에서 성전(聖殿)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구역예배는 일주일 중 하루를 선정하여 구역원끼리의 신앙적 돈독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처럼 구역예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성전(聖殿)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구역예배의 모임도 작은 교회로서의 모임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구역예배의 모임은 구역원끼리의 문제점을 놓고 기도하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임이다. 따라서 구역예배의 활성화는 주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소대(小隊) 단위의 십자가 군병들의 진격(進擊)이라 할 수 있다. 또 구역예배는 공과공부와 함께 주일날 담임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⑶ 목양교회 예배 순서


   ① 신앙고백
   구역원이 모이면 신앙고백으로 구역예배를 시작한다.

   ② 찬 송
   신앙고백 후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③ 통성기도
   찬송 후 통성기도는 "교회를 위하여", "구역을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합심하여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마무리 기도는 사회자가 실시한다.

   ④ 공과공부
   목양교회의 7단계 공과 중 해당 공과공부로 말씀을 나눈다.

   ⑤ 통성기도
   공과공부 후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구역원 전원이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한다.

   ⑥ 구역헌금
   통성기도 후 구역헌금을 드린다.

   ⑦ 헌금기도
   드려진 예물을 위하여 회원 중 한 사람을 지목하여 기도하게 한다.

   ⑧ 찬 송
   헌금기도 후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⑨ 주기도문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구역예배의 순서를 모두 마친다.

   ⑩ 친교(親交)
   구역예배 후 구역원끼리 친교(親交)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 구역원들에게 있는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논의하고 합심하여 기도할 것은 기도하고 구역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은 담당 구역장을 통하여 상부기관으로 보고케 한다.
   구역예배 후에 이루어지는 친교(親交)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가는 신앙의 공동체 건물이므로 하나님의 교회와 구역원을 위하여 건설적인 문제를 토의하고 기도해야 한다. 믿음이 연약한 구역원들의 신앙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문제, 사단적인 요소가 가미된 논제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Ⅴ. 예배와 설교

 

 


                        1. 예배와 설교의 관계
                        2. 설교의 성경적 의미
                        3. 예배의 설교를 위한 준비
                        4. 예배를 위한 설교의 형태
                        5. 설교의 내용
                        6. 설교의 전달방법
7. 세례 요한과 사보나롤라의 설교

 

 

 

【읽을 말씀】
  "43폐회한 후에 유대인이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 13:43∼44)

 

 

 

 

 

 

 

 

 

 

 

 

 

 

 

 

 


  
   "8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8∼9)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찬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42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 13:43∼44)

   목회의 성공은 예배에 있다면, 예배의 성공은 바로 설교에 있다. 그러므로 목회에 있어 설교는 바로 면류관의 다이아몬드와 같이 중요한 것이다. 목회자에게 설교가 중요함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의 증거를 제시하면 바로 본문에 증거되고 있는 말씀이다.
   학사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 모든 백성이 울었던 사건(느 8:8∼9),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행 2:14∼36)를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며 반응한 사건,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날마나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구원받는 무리의 수를 더하게 한 사건(행 2:42∼47),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에 이르러 이방인에게 설교를 하여 부흥된 사건(행 13:42∼44) 등은 목회에 있어 설교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본문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들은 목사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설교임을 말해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목회의 직무에 대하여 김외식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목회자의 직무인 설교가 지금 우리시대에 이르러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한국교회사를 되돌아보면 목사와 성도들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시각은 신령한 사람으로 인식하였다. 즉 영적인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목회의 가장 중요한 직무인 설교가 위기시대를 맞이하고 있는가? 왜 교인들은 설교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신앙적으로 방황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정성구 목사는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결핍되어 있다. 둘째, 설교내용이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량적이다. 셋째, 메시지의 틀이 상업적이거나 성공에 매달려 있다."

   따라서 예배의 핵심은 설교에 있으므로 예배의 성공은 설교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개혁주의 교회들은 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둘 만큼 예배의 비중에서 설교를 중요시하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가 추구하는 예배의 특징에 대하여 정일웅 목사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말씀 중심의 신학 그리고 교회 중심의 신학적 배경에 근거하여 본 예배"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자는 균형잡힌 설교를 통하여 청중들을 바르게 인도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정장복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오늘을 사는 양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먹이만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입에 맞지 않는 먹이는 좀처럼 먹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때 그 지나친 편견 때문에 병을 얻고 기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 목자의 책임이 있다. 목자가 자기 양들을 진심으로 사랑할진대 그들이 좋아하는 꼴만을 먹여 편식시키고 균형잡히지 않은 건강을 가져올 수는 없다. 그들이 찾는 꼴만을 먹일 때 양적인 부흥은 현저할 것이다. 그러나 기형적으로 성장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누가 너를 그토록 기형적으로 키웠느냐?'는 질문과 함께 그 목자를 부르는 날,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균형잡힌 말씀의 꼴을 양들에게 먹여 아름답고 튼튼한 건강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양식을 예배 속에서 공급해야 하는 설교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배 순서에서 설교의 시간이 결정적인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된다. 설교로 말미암아 옛 사람은 파괴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입어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교만이 예배의 중심이 되는 것임을 기억하여 목사는 설교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1. 예배와 설교의 관계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하나님이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만남의 광장이다. 그리고 설교는 그 만남의 광장인 예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와 설교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⑴ 설교자는 예배의 중심
   "42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 13:43∼44)

   바울과 바나바가 예배 중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 반응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는 것이었다. 예배의 핵심이 설교에 있다면, 설교자는 그 예배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이다. 물론 모든 예배의 내적인 면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외적인 역사는 설교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가 예배의 중심에 서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심인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서 말씀의 가르침을 좇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할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많은 무리가 바울과 바나바를 좇듯이 목회자를 좇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왕성케 하는 일에 앞장서게 될 것이다.

   ⑵ 설교는 예배의 생명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찬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사도행전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증거하는 말씀인 동시에 목회자들로 하여금 예배의 생명이 설교에 있음을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본문의 내용도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인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무리들에게 나타난 반응은 성만찬을 통한 성도의 교제와 기도하는 것이며, 그러한 반응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설교는 예배의 생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교의 성공은 곧 예배의 성공이며, 설교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설교가 예배의 생명인 이유에 대해서는 정일웅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설교는 개혁교회 예배의 심장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장부와 같은 중요성은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으로 교회의 교육적 임무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설교 없이는 예배일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설교의 기능은 복음전파와 신앙의 가르침에 그 중요성을 갖는다……설교는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게 하고,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며, 세상의 일상에 직면하는 여러 가치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가치 기준을 선택하며 살아야 할 것이며,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도우는 기능을 가진다."

   ⑶ 예배에서 설교의 효과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러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3:36∼38)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교회사는 물론 모든 설교가나 목회자들에게는 절대로 경시할 수 없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전하는 것이며, 이 설교에 나타난 청중들의 반응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예배에서 설교로 말미암은 효과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청중들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을 간파하며 표현하는 대중음악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음악의 특징은 "자연적 음악"이며, "함께 나누어 가지는 음악"이며, "가슴으로 익혀지는 음악"이다. 그렇다면, 예배에서 설교가 주는 효과는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① 교회를 존재케 한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새로운 마을이나 도시로 들어갔을 때에 전파한 내용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하셨던 일을 증거하였다. 이 증거를 통하여 회개한 무리들이 모여들므로 교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의 지체로서 모이는 공동체는 사도들이 전파하는 말씀을 통하여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을 통하여 양육되어졌던 것(행 2:42)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설교는 교회를 존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②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설교는 목사로 하여금 가장 창조적인 행동으로 보이게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좌절, 욕구와 죄, 기타 여러 가지의 병폐적인 문제들을 통하여 복음이 역사하는 방법을 전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나사렛 예수가 바로 조상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회개하므로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설교는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이 된다.

   ③ 예배 행위의 주제를 제공한다.
   루터의 주장처럼 예배의 삼 요소는 "말씀·기도·찬송"인데, 그 중심적인 요소는 바로 설교로부터 출발한다. 즉 설교의 주제를 중심으로 찬송과 기도가 통일되어진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배 행위의 통일된 주제를 제공한다.

   ④ 예배 의식에 본질적인 내용을 준다.
   설교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사건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와 사랑이 포함되어 청중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참된 설교는 예배 의식에 본질적인 내용을 제공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도록 인도한다. 그만큼 설교는 예배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⑤ 예배에 생명력을 증거하는 훌륭한 기회이다.
   설교는 예배에 참여한 공동체에 성경 말씀을 봉독 후, 그 봉독된 말씀에 대하여 설교자의 신앙적인 인격을 통하여 증거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봉독된 말씀에 사로 잡힌 바 되어 설교하게 될 때에 그 설교는 더욱더 값진 것이 되어 예배에 풍성한 생명력을 더하게 된다.

   ⑥ 예배 행위에 있어서 결정체가 된다.
   설교는 예배 행위에서 성경봉독과 성만찬의 중간에 위치한다. 설교가 설교자 자신의 말로 된 기독교의 메시지 선포라면 믿음으로 그 설교를 받아드리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알리는 또다른 결정체가 된다.
   따라서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충성하는 자녀들로 인도하게 될 때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 행위에 있어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봉사와 충성을 결정짓는 결정적 제공을 한다.

   ⑦ 예배에서 은혜받는 수단으로 제공된다.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므로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예배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수직적으로 뚫고 들어오는 통로"이며, 그 말씀이 청중들에게 임하는 은혜의 선물이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은혜받는 수단으로 제공되어 "하나님과 나 사이 = 믿음의 역사"로, "나와 내 이웃 사이 = 사랑의 수고"로, "우리 모두 = 소망의 인내"를 갖게 한다(살전 1:3).

   이상과 같이 올바른 설교의 효과는 모이면 말씀의 가르침으로 은혜를 받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교회의 건물로 자라가며, 헤어지면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 42∼47절에 나타나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2. 설교의 성경적 의미

   예배의 중심은 설교에 있으므로 예배에서 설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는 설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지속적으로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영원하고 중단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교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인가?

   ⑴ 예배 설교자의 위치
   예배의 중심이 설교라면 그 설교를 담당할 설교자의 위치 또한 중요하다. 그렇다면, 예배에서 설교자의 위치는 어떠한가?

   ①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監察)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① 복음 전파자의 신분 → 하나님께서 그에게 메시지를 맡기셨으며
             ② 복음 전파자의 자격 →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을 받았으며
             ③ 복음 전파자의 목적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할 사명을 부탁받은 귀한 신분의 소유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강단에서 설교자의 위치가 중앙에 자리하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② 하나님의 종(奴僕)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예배의 설교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종이요, 사환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던 모세(히 3:5)를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③ 대언자의 사명(使命)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職務)를 다하라"(딤후 4:5)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예배에서 설교를 담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맡겨진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 때문에 충성만 요구될 뿐이기 때문이다. 한신대 오영석 교수는 설교자가 받은 사명의 귀중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대언(代言)할 특별한 사명을 위탁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신비의 세계를 응시하며 영감과 계시를 기다리는 심혼의 사람입니다. 설교자는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의 나팔수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청중의 눈을 열어 하늘의 빛을 바라보게 할 것이며 신선한 생명의 말씀으로 영혼을 살려내고 갈등 속에 허덕이는 영혼에게 시원한 생수를 공급하게 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은 설교자의 위치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나팔을 부는 자이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적군의 칼에 제함을 받으면 그 피가 설교자의 머리로 돌아갈 만큼 중요한 사명(겔 33:1∼5)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진리의 전달자" 혹은 "대변자", "세움을 받은 자"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이 영광스러운 호칭들을 경홀(輕忽)히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마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직분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직(聖職)이기 때문이다.

   ⑵ 예배 설교의 의미

   모든 설교는 인간의 음성으로 선포될지라도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의 설교자가 선포하는 설교의 의미는 무엇인가?
   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3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5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학 1:3∼5)

   선지자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그런데 선지자 학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선지자 학개가 선포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John Calvi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교자가 봉사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설교자는 비록 개인의 언어로 전파할지라도 그 말씀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임금의 특명을 받은 암행어사가 마패(馬牌)를 높이 들고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면 그 말은 곧 임금의 권위를 가지고 외친 것이듯, 설교자의 설교도 하나님의 음성을 전파하는 것이다.

   ② 설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고, 성령의 감동을 입은 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목회자의 설교를 통하여 전달되고 있다.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그 성취된 말씀으로 인하여 신약시대를 열어가시고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므로 구원의 약속이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열어가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설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생명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설교가 지닌 중요성은 "목사(牧師)의 설교(說敎)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인 연결(incarnational connection)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인쇄물, 컴퓨터로 대치될 수 없다"는 티모씨 켈러(Timothy Keller)의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③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역사한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들 속에서 말씀이 역사하였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에 대하여 쓸 것이 없었고(살전 1:3, 9), "형제 사랑"에 관하여 쓸 것이 없었고(살전 4:9), "주의 강림"하심에 대하여 쓸 것이 없었다(살전 5:1).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 자랑이 되었다(살전 1:2).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것은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성도들 사이에 이루어진 조화가 있다. 즉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고전 2:1)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였으며, 그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서 말씀이 역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우선적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예배의 설교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막 8:36∼37)으로 생각하며 전할 때 청중들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역사한다는 것이다.

   ⑶ 예배에서 설교가 미치는 영향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悖逆)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37∼39)

   본문은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로서 설교분야에 대한 연구를 논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비록 짧은 본문이지만 설교의 영향력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는 말씀에 나타난 "이 말"이란 바로 2장 14∼36절까지의 설교를 말한다. 더구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베드로의 설교는 확신에 찬 설교자의 신앙 인격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나타난 영향력은 어떤 것이 있는가?

   ① 마음에 찔림을 받는다.
   역사적 사실을 들어 증거하는 베드로의 설교(행 2:14∼36)에 나타난 청중들의 반응은 바로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이다. 범인(凡人)인 베드로(행 4:13)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에게 마음에 찔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설교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능력있는 설교는 바로 마음에 찔림의 역사를 일으키게 된다.

   ② 사도의 권면이 있었다.
   설교를 들으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달으므로 그 대책을 추구하게 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도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갈 바를 구하였던 것이다. 이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권면하였다.

 

   이처럼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신중의 변화를 추구하게 되어 갈 바를 질문하게 되고, 설교자는 청중들의 질문을 성경이 전하는 대로 "회개 → 세례 받음 → 죄 사함 받음 → 성령을 선물로 받음"이라는 사실을 권면해야 한다.

   ③ 구원의 열매가 열렸다.
   이처럼 설교에 반응하여 회개한 무리들을 향한 베드로의 권면을 받고 세례를 받으니 이날에만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는 구원의 열매가 열렸다.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으므로 청중들이 결신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④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에게 나타난 외부적인 역사는 바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즐거워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그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행 13:42)고 요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모이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처럼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계속적으로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듣기를 갈망하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설교를 들은 성도들이 다음 예배가 기다려지도록 하는 책임이 목사에게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⑤ 성도의 교제가 있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에게 나타난 외부적인 현상은 "서로 교제하기에 힘쓰는 것"(행 2:42)이었다. 즉 설교의 위력은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므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교회로서의 건물이 지어져 가는 것(엡 2:20∼22)이다.

   ⑥ 기도에 힘썼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또다른 반응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쓴 것"(행 2:42)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능력있는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함을 의미한다.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싹틔우는 역할을 한다.

 

   ⑦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는데(행 2:43) 이는 그 설교가 전인격적인 설교였음을 암시한다. 즉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설교는 큰 능력과 표적을 동반하게 됨을 묘사한다. 이러한 기사와 표적은 주님의 공생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기사와 표적은 곧 사도들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⑧ 올바른 물질관을 소유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것"(행 2:44∼45)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물질을 바친 것으로서 그들이 설교를 듣고 올바른 물질관을 확립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자기들은 그 물질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은혜가 넘칠 때 모든 물건을 통용할 뿐만 아니라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역사가 일어났다.

   ⑨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또다른 반응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신앙의 열매"(행 2:46)를 맺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설교의 능력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날마다 집에서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성도의 교제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오늘날의 교회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오직 권하여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는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를 신앙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⑩ 하나님을 찬미했다.
   베드로의 설교는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 그 자체였기에 이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설교의 반응에는 외적(外的)인 역사와 내적(內的)인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오순절의 설교에 나타난 외적인 역사라면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열정(熱情)을 통한 믿음의 선행(善行)으로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받는 기쁨을 소유"하는 것이라면, 내적인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최고의 축복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연적인 표현"이다.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최고의 축복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믿음의 선행(善行)을 보이므로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즉 이들이 보인 믿음의 선행(善行)은 도덕적인 선행(善行)이 아니라 바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른 믿음의 거룩한 행실인 것이다.

   ⑪ 교회가 부흥하였다.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의 결과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고 하시므로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한 이 사건은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목회의 목적이 최고조에 달할 정도의 효과인 교회의 부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목회의 성패(成敗)를 좌우(左右)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과 같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나타난 초대 교회의 반응은 목회자로 하여금 깊은 의미를 안겨주고 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목사의 설교에 위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따라서 목회자의 전인격적인 설교는 풍성한 은혜를 낳게 하므로 교회의 모든 문제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난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제거시키는 효력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설교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즉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아니할 것이다.

 

 

 

 

 

 

 

 

 

 

  3. 예배의 설교를 위한 준비

   이시대는 홍수 속에 먹을 물이 없어 기갈을 맞듯, 설교의 홍수화 속에서도 영혼의 갈급을 해결하지 못한 성도들이 방황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자의 준비 부족으로 인한 말씀의 기갈에 있다.
   주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일곱 가지 비유의 결론을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곡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고 하셨다. 따라서 설교자는 항상 천국의 제자된 자처럼 생명력 있는 설교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영혼을 위하여 육신의 양식을 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만(눅 12:13∼21), 지혜로운 종은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게 될 것"(마 24:44)이다. 새로운 천 년의 시대를 맞이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설교의 기갈(飢渴)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설교의 기갈(飢渴)이 오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⑴ 설교의 위기가 닥친 이유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예배에서 설교는 성경의 자국어 번역과 함께 종교개혁이 가져다 준 또다른 선물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설교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담당해야 할 설교의 분량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담당해야 할 설교의 분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에 나타나듯이, 한국 교회 목회자의 일주일 설교 분량은 어림잡아 20회 이상은 족히 된다. 주일 낮예배의 설교가 15분으로 대치되는 독일 교회와 비교할 때 천양지차(天壤之差)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천 년의 시대를 목전에 둔 오늘날 교계에 불어닥친 설교의 위기는 왜 일어난 것인가? 오늘날 설교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이유에 대한 정장복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말씀이 그리워서 개신교의 예배를 찾아왔던 구교(舊敎) 성도들의 모습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학도들에게 설교에 관한 훈련을 강화하고 예배를 집례한 신부들의 의무로써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명문화한 후로 구교의 예전에도 말씀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우 1970년대 후반부터 구교의 성장이 눈에 띄게 활발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개신교의 설교에 심취될 수 없는 이유와도 관계를 갖는다. 오히려 남발(濫發)된 설교 때문에 '믿음이 없어지고 확신이 약해진'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틸리케가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라는 개탄을 늘어놓을 정도로 개신교의 설교에 위기가 도래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한국 개신교 예배 가운데서 외쳐지고 있는 설교 현장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 볼 때가 왔다……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설교의 파트너인 회중들은 설교에 대하여 부정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지루하고 신선하지 못한 설교에 짜증을 내면서 들을 귀를 막아 버리는(switched off) 현상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독백적인 설교에 싫증을 느끼면서 현대적 커뮤니케이션의 무지에 항의를 한다. 그리고 회중들의 삶의 현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설교의 내용들을 그토록 애써서 경청해야 하는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설교자의 서재나 주변에서 좀더 진지하고 풍부한 자료를 수집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설교자의 태만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분량의 설교를 담당해야 할 목회자가 준비하지 못한 설교로 인하여 성도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므로 우리는 가슴깊이 새겨보아야 할 내용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배에서 선포되어야 할 설교의 준비가 목회자에게 절대적인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김득룡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설교는 예배에서의 산 증거를 준비시켜야 한다. 설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들은 회중이 온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 사랑, 소망, 용서, 이해의 산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 설교의 역할이다. 설교는 예배 행위에서 결정적 시간이 되게 하여야 한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빈번한 설교 횟수로 인한 준비 부족에서 오는 설교의 기갈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방지책은 주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천국의 서기관된 제자의 도를 계승한 설교자의 직분을 감당할 때 가능한 것이다.

   ⑵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 준비해야 할 설교자의 사명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되어 주인이 맡겨준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도록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도록 성령의 인도로 감독자로 세우심을 입은 자(행 20:28)이다. 그런즉 목회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맡아 다스려야 할 일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충분히 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준비해야 할 한달 동안의 설교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

 

   이처럼 많은 분량의 설교를 담당해야 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설교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준비로 설교에 임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목사만이 지니고 있는 스트레스의 원인은 정일웅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한 교회에서 10년, 20년 혹은 30년을 목회한 사람은 매주일 같은 사람들을 앉혀두고 설교를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말을 다했으므로 이젠 더 짤래야 짤 것이 없는 형편에서, 다가오는 주일에는 무슨 말씀으로 설교하느냐 하는 것이 정말 형언할 수 없는 부담임을 목회자들은 경험한다. 여러 다른 교회를 순방하면서 설교하는 부흥사일 경우에는 같은 설교를 해도 괜찮지만, 늘 같은 청중을 대하는 목회자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무엇을 설교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의 목사에게 있어 설교의 준비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달 동안 대략 60편∼65편 정도의 분량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서점에 설교를 주제로한 서적이 홍수를 이루지만 정작 교인들의 심정을 움직이는 설교는 부족하므로 홍수 속에 식수의 기근이 닥치는 듯한 문제점을 낳게 된다. 그렇다면, 천국의 서기관된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설교자의 준비는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설교자는 학도(學徒)가 되는 일을 결코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서재는 목사관의 가장 중요한 방이다. 목사는 매일 아침 그의 서재에서 네 시간을 보내야 된다는 옛 규칙은 만일에 저가 신규의 보배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오늘날에도 진리이다. 그의 마음을 항상 새롭게 또 잘 수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효과있는 강단 사역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넓고 깊게 그리고 규칙있는 체계적 독서를 통하여서만 되어질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은 목사의 장서 중에서 항상 가장 우선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항상 설교를 준비하여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지혜로운 종이 되기 위하여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리할 때에 우리 주님이 강림하셔서 "지혜롭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시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준비와 관련한 함수 관계에 대해서 김득룡 목사의 다음과 같은 비유는 우리에게 좋은 해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한 위대한 음악가(그의 이름이 Paderwski인지?)가 한번 말하기를, 만일 그가 하루 동안 연습을 빠뜨리면 그 자신이 그것을 알았고, 그가 만일 이틀을 빼면 그 친구들이 그것을 알았고, 만일 사흘간을 빠뜨리면 대중이 그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설교자도 음악가와 같이 쉬지 않고 계속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⑶ 토요 설교 준비의 문제점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하니"(행 6:4)

   초대교회에서 부흥하는 교회의 역사에 걸맞은 목회를 하기 위하여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였다. 이처럼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하였던 신앙적 자세는 오늘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목회 성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는 예배 행위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간이 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예배란 존 헉스터블(John Huxtable)의 주장처럼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의 설교를 어느 날짜 정도에 완료하는 것이 좋은가? 간혹 토요일은 설교 준비하느라고 외부 손님을 일체 만나지 않는 목회자의 경우도 있다. 과연 토요일에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합당한가?
   이에 대하여 본 저자는 부정적으로 본다. 만약 주일의 설교를 토요일에 준비한다면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될 것이다. 우선적으로 올바른 설교를 준비할 수 없을 것이다. 예배의 성공을 좌우하는 주일 예배의 설교를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일 전날 준비하는 설교에는 풍성함이 없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미리 준비한 설교의 장점에 대해서는 티모씨 켈러(Timothy Keller)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일주일이나 그 이상 유예기간을 가진 후에 설교를 꺼내 보았을 때 당신은 그 설교가 처음 준비할 때 느꼈던 것과는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토요일에 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다가 만약 피치 못할 일이 발생할 경우 문제가 생기게 된다. 목회의 일선에서는 언제나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요일의 설교 준비만을 고집한다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설교 준비에 소홀히 할 경우가 생기면 그때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 되어 주일 예배를 망치게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볼 때 예배에서 설교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귀중한 설교의 사역을 게을리하는 목회자는 주님으로부터 외면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목회를 위해서 설교자들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일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4. 예배를 위한 설교의 형태

   거듭 강조하였듯이, 예배의 성공은 바로 설교에 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선포될 설교의 내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를 위한 설교의 형태는 어떤 것이 적합한가?

   ⑴ 설교의 여러 형태
   예배의 성패를 좌우하는 설교는 목회자에게 있어 최우선의 과제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예배를 위한 설교의 형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① 본문 설교
   본문설교란, 제목과 대지를 성경 본문에서 잡을 뿐만 아니라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말한다. 즉 성경 본문이 전하고 있는 모범적인 특성들을 대지로 선정하고 그 이상의 정보를 설교자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근거하여 작성한 설교를 말한다. 본문 설교가 지니고 있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는 반 클리브(N. M. Cleave)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② 강해 설교
   강해 설교란, 주어진 성경 본문을 통하여 대지를 취할 뿐만 아니라 소대지도 취하는 설교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형태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본문을 각권을 따라 강해하는 형식으로 주일 오후 또는 수요 예배에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강해 설교의 정의에 대해서는 리펠드(Walter L. Liefeld)가 밝히고 있는 다섯 가지의 특징으로 대신할 수 있다.

   첫째, 강해 설교는 하나의 기본적인 본문을 취급한다.
   둘째, 강해 설교는 성서 해석학적 성실성(hermeneutical integrity)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본문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셋째, 강해 설교는 결집성(結集性; cohesion)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각 부분을 하나의 전체가 되도록 구성한다는 뜻이다.
   넷째, 강해 설교는 움직임(movement)과 방향(direction)이 있다. 강해설교는 원저자가 의도한 방향으로 청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
   다섯째, 강해 설교는 적용을 포함하는데, 적용은 본문의 목적이나 의미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강해 설교는 종교개혁 당시 루터나 칼빈이 주일 낮 예배에서 주로 취했던 설교 방법인데, 이 형태의 설교도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고 있다. 강해 설교의 장점은 정성구 목사의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으며 단점은 곽안련(A. C. Clak) 목사의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③ 제목 설교
   제목 설교란, 본문에서는 단지 화제나 주제만을 취할 뿐 설정된 특정 주제를 따라 하는 설교이다. 그리고 설교의 대지는 설교자에 의해서 주제에 대한 수사학적인 가능성에 맞추어 고안될 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주제에 대한 지식이 전체 성경 안에서 취급된다. 제목 설교의 장·단점은 정일웅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④ 주제 설교
   주제 설교란, 특정 주제를 설정하고 그 주제에 맞게 성경의 말씀을 적용적으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이 형태의 설교는 주제를 먼저 설정 후 그 주제에 맞는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통례이다. 예를 들면, 각종 헌신 예배를 들 수가 있다. 주제 설교의 정의에 대해서 정성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주제 설교는 한국교회 강단에 보편적인 설교의 형태이다. 사실 지난 100여년 동안 익숙해온 설교의 형태이다. 주제 설교는 한마디로 말해서 주제에 따라 구분된다. 주제가 성경본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원칙이나, 그 반대로 먼저 주제를 정한 다음에 그 주제에 맞는 성경본문을 취할 수도 있다. 즉 이 방법은 주제 또는 어떤 제목을 택하고, 성경 전체의 말씀을 섭렵하면서 그 주제를 뒷받침 해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흔히 교리적인 설교를 할 때 이런 방법으로 다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제 설교의 정의는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헌신 예배 등을 통해 드려지는 경우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제 설교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정성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⑤ 원어 설교
   원어 설교란, 기록된 본문의 원어적 배경을 살펴서 본문의 의도를 드러내는 형태의 설교이다. 원어 설교는 기록된 본문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서 증거하는 것이므로 설교에 힘이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자칫 잘못하면 성도들로 하여금 경직된 감을 갖게 하거나 따분한 설교로 전락하기 쉽다.

   ⑥ 예화 설교
   예화 설교란, 성경 본문의 사건을 중심으로한 예화를 소개하는 식의 설교이다. 그러므로 예화 설교는 그 내용에 있어 단조로움을 피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⑦ 간증 설교
   간증 설교란, 개인의 신앙간증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취하는 형태의 설교이다. 간증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뜨거운 신앙으로 향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 장점이 있으나 간증자의 지나친 극화식의 간증으로 외면당할 수 있다.

   ⑧ 교리 설교
   교리 설교란, 성경 본문에 나타난 말씀들을 체계화시켜서 취하는 설교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 설교의 문제점은 자칫 잘못하면 성경 본문의 기록들을 기계화시키는 것이다. 개혁주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성경 신학자들은 성경의 기록법에 대하여 저자 개개인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구속의 역사를 손상시키지 않고 성령에 인도되어 기록되었다는 유기적 영감설을 믿기 때문에 지나친 교리 설교는 기계적 영감설로 흐르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교리 설교는 한국교회가 일찍부터 성경신학보다 교의신학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설교의 형태이다. 즉 어떤 주제를 설정하면, 그 주제에 맞게 성경을 조직해 나가는 식의 설교이다.

   이상의 설교 형태 중 대표적인 것은 제목 설교, 본문 설교, 강해 설교인데, 특별한 내용을 전하려고 할 때 혹은 특별한 상황을 설교하려 할 때는 제목 설교를 필요로 할 때가 있으나 가급적이면 설교자는 제목 설교를 피하고 본문 설교와 강해 설교를 취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제목 설교가 지니고 문제점이 크기 때문이다. 제목 설교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장두만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오늘날의 소위 제목 설교라는 것은 대개가〈도약대식 설교〉(jumping board sermon)라고 할 수 있다. 수영을 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 들어가는 방법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도약대에서의 다이빙이다. 그런데 일단 물 속에 들어가고 나면 도약대는 더이상 필요 없게 된다. 설교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가 이와 같다. 설교를 시작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일단 설교가 시작되고 나면 본문은 전혀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설교는 좀 심하게 말하면 청중에 대한 간접적인 기만 행위이다. 하나님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함으로 설교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듯한 인상을 청중에게 주지만 설교 전체가 본문과는 상관이 없고 설교자 자신의 얘기로만 채워져 있다면 청중에 대한 기만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⑵ 모든 부분에 살아 있어야 할 성경 본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는 모든 부분에서 본문의 내용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을 떠난 설교자는 영적 살인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대명제는 설교 본문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 본문과 설교의 관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① 본문을 떠난 설교의 문제점
   설교는 철저하게 본문의 의도를 드러내고 본문이 제시하는 방향에서 전파되어야 한다. 그런데 종종 본문을 떠난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 본문과 상관 없는 설교이다.
   본문은 장식용으로만 읽고 본문과 상관이 없는 내용을 전하는 설교는 본문을 죽이는 설교이므로 절대적으로 금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므로 성경 본문이 전하는 바를 증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둘째, 억지로 연결시키는 설교이다.
   성경의 본문을 인용하지만 그 본문을 억지로 연결시키므로 말미암아 본문의 내용을 오용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는 칼빈(John Calvin)이 주장한 것처럼 설교자가 생각하는 것을 성경 저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사단적인 설교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을 떠난 설교는 죄악된 행위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본문의 내용을 무시하는 설교이다.
   본문을 떠난 설교의 대부분은 자기의 말이나 예화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본문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종에 불과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예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넷째, 본문을 약화시키는 설교이다.
   본문을 떠난 설교는 비록 성경 본문을 읽었을지라도 설교 가운데 본문의 내용이나 중심을 약화시키거나 적게 나오게 한다. 즉 본문을 설교하지만 너무 약하거나 양적으로 미미한 설교가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해 설교가 아니면 설교가 아니다"라는 혹독한 지적을 항상 명심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② 본문 내용에 충실한 설교의 특징
   본문 내용에 충실한 설교란, 본문의 내용이 의도하는 바를 충실하게 증거하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형태의 설교는 설교자로 하여금 소명 의식에 불타게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청중들에게는 은혜가 넘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 충실한 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본문의 말씀을 최대한 사용한 설교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의 특징은 오늘 주시는 그 말씀의 의도를 밝히 드러내며 그 본문을 최대한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둘째, 각 대지마다 본문이 전제되는 설교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의 특징은 설교의 내용 구성에 있어 읽은 본문을 충분히 반영하기 때문에 각 대지마다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는 어느 부분에서나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는 충성된 설교이다.

   셋째, 본문의 뜻을 정확히 해석해서 사용하는 설교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자들이 당대의 사회적·정치적·신앙적 문제 등을 살펴서 기록한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정확한 뜻을 해석하여 설교로 전파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 중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7)라는 말씀은 당시의 성도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었을까? 주후 1세기 중엽 초대교회에서의 "공중의 개념"은 "마귀의 거처"(엡 2:2)이자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이 거하는 장소"(엡 6:12)이다. 그러므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7)라는 말씀은 로마의 박해와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넷째, 본문의 특징을 최대한 잘 나타내는 설교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는 본문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특징을 가장 바르게 설교하는 것이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파도가 넘치게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롬 10:17)이다.

   다섯째, 본문에 관련된 신·구약 성경을 충분히 사용한 설교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을 증거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 열려져 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신·구약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충실한 설교는 하나님의 의도를 최대한 바르게 증거하려는 충성된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의 의도를 바르게 증거할 때에 더욱더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③ 본문 설교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
   본문에 충실한 설교의 작성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가 있다. 그렇다면, 본문 설교의 작성을 위한 요소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 성구를 제시하라!
   설교의 작성은 설교의 내용에 관련된 성경 본문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목사의 설교는 강한 명령과 책망 등이 담길 수도 있으므로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둘째, 옆길로 가지 말라!
   설교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설교가 본문의 주제를 이탈하여 다른 길로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본문을 이탈하는 것은 궤도를 이탈한 기차와 같은 것이다.

   셋째, 확실성을 줘야 한다.
   본문 설교의 중요성은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장성한 믿음의 성도로 성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딤후 3:17)임을 기억한다면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해야 한다.

   ⑶ 균형(均衡)있는 설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그 목적이 분명하게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준비한 설교의 목표를 바르게 설정하여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균형있는 설교를 해야 하며, 청중들은 그 설교를 듣고 설교의 목적(의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의 목적에 따라 구분될 설교는 어떤 것이 있는가?

   ① 선포적인 설교(kerygmatic preaching)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6∼38)

   선포적인 설교란, 주로 불신자(不信者)를 향하여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외친 것을 말한다. 즉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 사역, 수난과 부활, 승천과 재림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14∼38)를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대로 죄인의 손에 죽으셨으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셨으며
                  ②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과 구세주이심을 선언
                  ③ 회개로 용서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촉구

   선포적 설교는 현대 설교에서 좀더 분명한 목적 의식 속에서 외쳐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선포적 설교에 대한 정의는 정장복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선포의 설교는 예수가 누구시며 어떠한 역사를 이 땅에서 하셨는지 선포하여 아직도 이 예수와 함께 있지 못한 인간들에게 회개를 불러 일으키고 예수 앞에 돌아오는 결단을 촉구시키는 설교이다. 그러나 이 설교가 반드시 불신자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믿는 자들 중에서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망각해 버린 이들에게도 이 설교는 필요한 것이다."

   ② 교훈적인 설교(didactie preaching)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교훈적인 설교란, 딱딱한 신학적인 풀이, 교단이 가지고 있는 교리의 특수성의 해석, 어려운 본문의 차분한 주석,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법칙, 교회 생활의 준수 등 믿음의 사실들을 이론으로 정립하여 가르치는 설교로서 "교리 설교"라고도 한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신서가 이에 속하는 것이다. 교훈적인 설교에 대한 정의는 로버트 넌스(Robert H. Nounce)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교리 설교의 최대의 효과는 진리를 설명하고 정돈시켜 주는 과정을 통하여 진리를 자명케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리그마(선포적 설교―저자 주)는 놓아진 초석이요, 디다케(교리적 설교―저자 주)는 그 초석 위에 세워진 진리의 체계이다. 그러기에 이 두 요소가 병존하지 않고는 완벽한 진리의 집을 지을 수 없다."

   ③ 치유적인 설교(therapeutic preaching)
   "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치유적인 설교란, 고도의 발달된 문화 속에서 개발된 기계 문명의 혜택을 받고 또 그것을 즐기며 살면서도 심각하게 정신적인 고통의 압박을 받는 현대인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상처받은 심령이 치유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설교는 우리 주님의 사역이나 사도들의 목회 현장에서 육신과 마음의 병든 자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일컬어 치유적인 설교 혹은 목양 설교(pastoral preaching) 또는 위로 설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치유적인 설교는 고난의 종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53:5)의 성취로서 주님이 오시므로 성취되었다. 치유적인 설교의 정의에 대해서는 황원찬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우리 민족 역시 고난의 민족이다. 한국 교회는 고난의 민족과 함께 성장해 왔고, 목회자는 언제나 치유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국 교회에 영향력을 많이 끼쳤던 목사들의 설교의 공통된 특징은 치유적인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3·1운동 후 좌절과 허탈에 빠졌던 민족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내세를 강조한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치유적인 메시지의 대표라 할 수 있다. 한경직 목사도 6·25를 전후한 월남민의 고통을 위로하고 복음으로 희망을 주었다는 점에서 치유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였다 할 수 있다. 70년대 여의도 순복음교회 역시 70년대의 산업화에서 야기된 소외, 가난, 질병에서 소위 3박자 구원이라는 치유적 메시지가 강하였다. 80년대에 부흥한 교회 역시 그렇다."

   또 놀라운 것은 현대 교인들의 절대다수(絶對多數)가 상한 심령을 안고 찾아와 포근하고 부담없는 치유적인 설교를 찾고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부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적인 설교의 폐단에 대해 정장복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한편 이 설교가 교회의 양적인 부흥에 공헌한다고 하여 많은 설교자들이 이 목양 설교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균형 잃은 설교 사역을 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 교회 강단의 일면이다."

   ④ 예언적인 설교(social―prophetic preaching)
   "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3)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마 3:2)

   예언적인 설교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세례 요한이 혼탁한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과 그 진리를 외쳤던 설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언적인 설교란 이 사회의 부정, 부패, 그리고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바르게 지적하고 그릇된 길로 간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여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책임있는 설교를 가리킨다.
   구약의 예언자나 신약의 세례 요한은 예언적인 설교에 충실하여 당시의 사회적 문제,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들을 외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강하게 외칠 수 있었던 데 비하여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그러한 점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장복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현대의 설교자의 임무가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 예언적인 설교는 피할 수 없는 설교자의 의무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각박한 상황 속에서 몸조심과 말조심에 너무 민감하게 사로잡힌 오늘의 예언자들이 적지 아니함을 볼 수 있으나, 설교자는 내가 사는 세계의 정치 체제의 부조리와 도덕적 탈선 등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지적해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이 사명을 감당키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때문에 외쳐야 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 예언적인 설교가 치유적인 설교와는 상대적인 것 같으면서도 유기적(有機的)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예언적인 설교가 지니고 있는 특징에 대해서 황원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예언적인 설교는 치유적인 설교보다 적극적 의미가 내포된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상처 치유에 대한 강조점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또 다시 강도 만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제도적 장치나 치안 유지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찾도록 하는 것이 예언적 설교이다. 둘째, 예언적 설교는 개인적이라기보다 공동체적 삶에 더 관심을 갖는다. 셋째, 현재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미래의 환상이 있어야 한다. 개교회의 성장에만 매달리면 예언적 설교가 소홀히 될 가능성이 있다. 자기 교회뿐 아니라 교회가 처해 있는 역사, 사회에 관한 역사 의식을 갖는 공동체적 설교가 필요하다. 넷째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비젼이 있는 예언적 설교는 내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나라에 임하소서'라는 주기도문처럼 나라의 현존에 대한 비젼이 있을 때 가능하다."

  5. 설교의 내용

   예배와 설교의 관계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것이라면 바로 설교의 내용이다. 설교는 종합 예술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설교의 내용이 성경의 의도를 바르게 전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 것인가?

   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행 8:5)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8)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1)

   예배의 설교는 복음(福音)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복음(福音)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 즉 탄생, 공생애의 모든 사역과 고난, 죽음, 장사, 부활하심, 승천, 재림 등이 포함된다.
   초대교회의 설교에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는 말씀은 산헤드린 성전에서 성전 경찰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였으니 그들이 설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열정(熱情)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행 5:4)에서도, 사마리아(행 8:5)에서도, 땅 끝(행 17:18; 28:31)까지 이르러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전파였다. 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설교의 중심은 "예수 믿고 구원"을 전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 전파였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과 함께 살고 복음과 함께 죽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헌 목사의 통계에 의하면 서울 시내 400여 교회의 주보에 나타난 설교를 분석한 결과 복음에 관한 설교는 30%라면, 윤리·도덕적인 설교는 65∼70%라는 안타까운 통계가 나왔다.
   그렇다면, 왜 복음적인 설교를 해야 하는가? 설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간의 음성으로 성경을 전하는 것인데, 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요 5:39)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결정체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적인 설교가 선포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종교개혁기의 사도 바울로 불리우는 칼빈(John Calvin)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의도를 겉치레하지 않고 또 청중의 귀를 간지럽히지 않고 '백성의 유익과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傳)"해야 한다.
   또 "첫째는 성경의 바른 해석과 적용이며, 둘째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며, 셋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전한 루터(Luther)의 신앙유산을 물려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 설교에서 복음적인 설교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정장복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구속사건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듭 새롭게 발견하면서 회중들의 가슴 속에서 참된 감격과 감사가 우러나오도록 하는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그 설교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예배의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설교는 회중들의 신앙을 늘 신선하게 할 수 있으며 새로운 힘을 축적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만일 설교의 초점이 이러한 방향에서 어긋난다면 그 설교는 자칫 미신적인 신앙이나 주정주의(主情主義)의 신앙으로 흘러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⑵ 신학 강의가 되지 않도록 하라!
    "……이 세상이 자기 지혜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고전 1:21)
"……말의 지혜대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인데, 그가 전하려는 설교의 본질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도들의 능력있는 설교를 통하여 사람의 겉모습에 호감을 가져 범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설교자가 전하는 복음이 세상의 지혜나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설교는 신학적으로 건전한 것이어야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예배의 설교가 신학강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종합신학이므로 모든 신학은 설교를 위해 그 존재의 필요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설교는 교의 신학과 성경신학에서 이룩된 교리체계 위에 세워진다는 신학의 목적과 설교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한다. 즉 설교를 위한 신학으로 존재할 때 신학은 아름다워지고 설교는 교회의 부흥을 이루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신학이 능력 있는 설교를 위한 안내자가 아닌 설교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교두보가 되면 문제를 낳게 된다. 신학과 설교의 아름다운 가교적(架橋的) 역할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서는 정성구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는 일차적인 과제가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사의 위대한 황금시기에는 언제라도 위대한 설교자들이 있었고, 그런 설교자들을 통해서 신학(神學)도 교회(敎會)도 자기 모습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설교에서 신학이 할 수 없는 일은 구술성과 예배의 상황이다. 원래 교회의 선포적 신학은 말하고 듣는 것이었다. 복음은 원래 외쳐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복음은 단순히 학리적(學理的)인 연구대상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외쳐져야만 의미가 있다. 복음은 선포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배 중에 선포되도록 되어 있다. 설교는 신학으로 하여금 본래의 사명과 의무를 깨닫도록 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복음의 원점에서 생각하도록 도와 준다."

   ⑶ 철학적·지식적 설교를 금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擄掠)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본문의 배경은 골로새 지방에 그 당시 이방인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헬라의 여러 도시에 있는 유대인 학교에서도 가르쳤던 철학이라고 불려진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골로새 교인들)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성도들을 꾀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순수한 신앙에서 떠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설교에는 문학, 철학, 신학, 윤리, 도덕, 각종 지식의 동원이 필요는 하지만 문학적 설교, 철학적 설교, 신학적 설교, 윤리적 설교, 도덕적 설교, 지식적 설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학문과 지식을 전달하는 말장난의 무대가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예배에서 설교의 내용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며,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와 이해의 산 증인이 된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설교의 역할은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6. 설교의 전달 방법

   루터(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설교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인간의 이해에 적합하도록 해석되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교개혁과 부흥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설교의 부흥이요, 설교를 통해서 주어진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복음이 바로 설교되어질 때 교회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설교의 전달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⑴ 뜨겁고 능력있는 설교를 하라!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 1:5)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데살로니가 교회나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한 편의 설교마다 뜨겁고 능력있게 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종이 된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귀중한 특권을 천사에게도 주지 않고 예배를 집례하는 설교자에게 주셨다.
   따라서 설교자는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는 것이며 그 예배에 허락된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에 있다"고 주장한 청교도들의 신앙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설교에 불을 붙여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설교를 불 속에 던져라"는 요한 웨슬레이 목사의 주장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노력과 헌신으로 준비한 설교의 내용을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능력있게 증거할 때에 청중들로부터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반응과 함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진실과 열정이 기독교 설교에서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의 후계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oyd Jones) 목사가『설교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불타는 논리! 감동적인 이성! 이 두 가지가 모순된다는 말인가? 물론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당신이 사도 바울과 그밖의 다른 이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 진리에 관한 이성은 매우 감동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불타는 정열의 신학이다. 정열로 표현되지 않는 신학은 불완전한 신학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신학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결점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설교란 정열에 불타는 인간을 통해 나오는 신학인 것이다."

   그리고 진실과 열정이 기독교 설교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현실적으로 입증시켜 주는 사례가 있다. 25명으로 갈보리 채플 교회를 담임한 척·스미스 목사는 설교의 열정으로 사역을 담당한지 17년 만에 25,000명으로 성장시키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얼마나 열정적이었든지 설교에 대한 자기의 열정이 식어지기 전에 설교를 전달하기 위하여 의자에서 뛰어나갈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리고 찬양대의 찬양이 길어지는 것은 자기의 열정을 식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열정의 결과는 놀랍게도 25명에서 시작한 사역이 17년 만에 25,000명으로 늘어나는 결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설교자의 불붙는 듯한 열정은 청중들에게 놀라운 변화의 물결을 예고한다. 반대로 자기의 마음이 열정으로 가득차 있지 아니하면 청중들에게 냉랭함만 전달될 뿐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능력의 불을 붙여야 한다.

   ⑵ 청중의 관심을 설교자에게 집중시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회자 사도 바울의 자긍심(自矜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할 정도로 돈독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이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우선적으로 본문의 증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설교를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만큼" 청중의 관심을 설교자에게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들의 관심을 자신의 설교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청중의 관심을 설교자의 설교에 집중(集中)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① 질문(質問)
   자칫 지루하기 쉬운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흩어지기 쉬운 청중들의 관심을 설교자에게 모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의 대답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② 특별한 선언
   설교 중 청중들이 지루하게 느끼거나 관심이 분산되는 것을 감지(感知)하면 지혜롭게 본문 속의 사건들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갖추어야 할 특별한 선언을 통하여 분산되는 청중들의 관심을 설교자에게 집중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 주일에 설교하는 도중 청중들의 관심이 분산되는 것을 감지(感知)하면 "주님의 영화로운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기 위하여 한 가지 결단을 선포하고자 합니다"라고 제시하면 분산된 청중들의 관심이 다시 설교자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때에 "이 고난 주간에 우리 모두 금식에 동참할 것을 선포합니다"라고 표현하므로 청중들의 관심을 계속적으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③ 미래의 전망
   믿음의 사람들에게 앞으로 닥치게 될 전망을 선포함으로써 진취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러한 제시는 신앙생활에 확신을 줄 뿐만 아니라 청중들의 관심을 설교자에게로 돌리는 효과가 있다.

   ④ 예화의 활용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들의 분산되는 관심을 돌리기 위해 설교 본문의 중심 주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예화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 청중들의 관심을 설교자의 입술로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⑤ 제스처
   설교 중 자연스러운 제스처는 본문의 내용을 강조할 뿐 아니라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자의 설교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제스처는 오히려 청중들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하여 설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독소가 됨을 알아야 한다. 제스처가 설교에 미치는 영향은 N. M. 반 클리브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어색하거나 의미 없는 제스처는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그런 제스처에 신경이 쓰여 정작 주의를 기울여야 할 메시지에는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계속적으로 손을 휘젓는다거나 강단을 오가며 껑충껑충 뛴다거나 하는 등의 제스처는 메시지 전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무 가치도 없다."

   ⑥ 찬송(讚頌)
   설교 도중 은혜되는 부분에서 말씀과 부합되면서도 청중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찬송을 간단하게 부르면 청중들의 마음과 설교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좋은 효과를 얻게 된다. 그렇게 할 경우 청중들의 관심은 설교가 끝날 때까지 설교자의 입술만 바라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⑦ 특별한 표정
   설교자는 설교를 하는 도중 중요한 말씀을 전파할 때에는 말씀에 부합되는 진솔한 표정을 지으므로 청중들의 관심을 설교자에게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천국을 말할 때에는 감동적이며 소망적인 표현을, 지옥을 말할 때에는 위험한 길을 걷는 어린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은 표현으로 설교할 때 청중과 설교자의 마음은 하나가 된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것을 찾는다면, 유대 교권자 앞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설교할 때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는 스데반의 얼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며 유대인을 향한 그의 심정을 드러낸 사도 바울의 편지,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라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편지 등은 보는 자나 읽는 자로 하여금 편지를 보낸 사도 바울의 심정을 눈에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설교자는 한 편의 설교를 하는 동안 청중들의 관심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방법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설교자와 청중들이 하나가 되는 예배의 설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⑶ 은혜가 풍성케 하라!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인간의 언어적 수단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야 함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설교에 풍성한 은혜가 넘쳤던가?

   ① 읽고 해석하는 설교
   "8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12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라"(느 8:8∼9, 12)

   본문에 언급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오랜 세월 동안 했던 후예들이기에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로 다 깨닫게 하니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더구나 에스라가 읽어준 율법의 해석을 듣고 깨달은 백성들에게 나타난 또다른 역사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물건을 통용하는 교제의 역사가 일어났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바로 에스라 선지자가 해석해준 율법의 내용을 밝히 알므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를 볼 때에 본문을 읽고 해석할 때에도 성령의 강한 역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풍성히 넘침을 알 수 있다.

   ② 적용되는 설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청중들의 마음에 찔림을 준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행 2:14∼36)를 말한다. 즉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요지(要旨)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 없는 자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나사렛 예수가 옛 조상들로부터 고대해 왔던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는 선포에 설교를 듣는 무리들의 가슴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사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반응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베드로의 설교에 은혜가 충만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③ 결단을 유도하는 설교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은혜로운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회개의 역사와 함께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나타나게 되었으니 곧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색(吝嗇)함은 은혜받지 못한 증거라는 사실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는 설교를 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더 부흥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적 결단에 불을 붙이는 촉진제가 될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볼 때 설교자는 그날의 예배를 위하여 충분히 준비한 설교를 가지고 강단에 서야 함은 필수적이며, 그 준비한 내용을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함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부터 성령의 충만함으로 은혜가 넘쳐야만 청중들에게도 은혜가 풍성히 넘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세례 요한의 설교와 사보라롤라의 설교

   본 단원은 세례 요한의 설교와 역사상 위대한 설교가였던 사보나롤라의 일대기를 합성시켜 설교로 꾸민 것이다. 본 저자가 시무하는 목양교회에서 2회에 걸쳐 설교했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성경의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 있음
   그는 = 세례 요한임.
   그의 생활 = 광야 생활이었음.
   그의 음식 = 메뚜기와 석청
   그의 설교 = 강력한 설교로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음

   교회사에서 = 세례 요한과 비슷한 인물이 있음.
                위대한 설교가였음.
   "사보나롤라" = 루터보다 30년 전에 출생하였음.
                   그를 중세의 세례 요한이라고 하였음
   어느날 = 사보나롤라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음.
   이 책을 읽었을 때 = "내가 가장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마음 속으로 외쳤음.
   사보나롤라를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은 = 제 삶의 또 하나의 기쁨임.

   오늘부터 2주간 =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적용적으로 사보나롤라에 대해서 설교할 것임.
   이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 은혜를 받고자 함.
   그러나 = 주로 사보나롤라를 소개하고자 함.

   기롤라모 사보나롤라(G. Savonarola)
   중세의 수도사 = 어두운 시대에 새벽을 부르짖는 설교자였음.
   이탈리아의 한 도시국가에서 = 설교를 통해 교회의 변혁과
                                 신앙의 혁신을 외쳤음.
   출생 = 1452년 9월 14일 이탈리아의 페라라(Ferara)라는 도시에서 출생.
   루터보다 = 30년 전에 출생하였음.
   키 = 작았음.
   몸 = 항상 꼿꼿이 세우고 다녔음.
        얼굴이 우유빛처럼 하얗고, 빛나는 눈과 메부리 코를 가졌음.

   당시 = 르네상스가 꽃피던 시대임
   교황 피우스 7세 = "내가 천국에 간다면 하나님께 기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성자인지 종파분자인지 예언자인지 악당인지를
                        제일 먼저 물어 보겠다."

   역사의 다소 다른 평가 있음.
   카톨릭의 평가 = 일부는 부정적임.
   그러나 = 그는 위대한 예언자요 설교자였음.

   당시의 타락상 = 이루 말할 수 없음.
   교황청 = 타락의 극치를 보였음.
            성타락, 성직매매, 진리는 찾을 수가 없었음.
   수도원도 =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타락하여
              이미 구원이 떠난 집단에 불과하였음.

   개인주의, 세속주의, 합리주의 = 기독교 신앙의 3대 적(敵)임.
                                     이 세 가지가 팽배하였음.
   이러한 상황에서 = 이탈리아의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플로렌스(Florence)를
                     중심으로 사역하였음.

   신비적 요소 = 성경해석의 알레고리를 잘한다는 일부의 오해
                  계시, 예언을 중시한다는 일부의 오해
                  다소의 견해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 성경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며
                           민족을 회개시킨 위대한 설교자였음.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 = 개혁의 모든 씨앗이 되었음.
                          개신교도는 아니지만 성경제일주의, 믿음으로 구원 등
                          신학사상이 동일하였음.

   각 시대 = 그 시대에 필요한 설교자를 기다림.


            초 림                  종교개혁                  재 림
          구약의 말기                중세의 말기                 신약의 말기
         = 세례 요한                 =사보나롤라             =두 증인 같은 설교자

계 11:5 =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옴.
                                                              불같은 말씀 권세를 의미함.

   초림때
   제사장들 = 2만 여명이나 있었음.
   그들은 = 벙어리였음. 짖지 못한 개들이었음.
             개 밥 그릇에 있는 밥알 몇 개를 보고 벙어리가 되어 버렸음.

   하나님은 = 그 시대의 타락을 보고 부르짖는 종을 사용하심.
                하나님의 뜻을 거침없이 선포하는 종들을 사용하심.
                그가 = 세례 요한이었음.
                중세에는 = 사보나롤라였음.

   수많은 제사장 =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무용지물이었음.
   세례 요한 = 부르짖는 충견 한 사람을 사용하셨음.

   중세 = 수많은 신부들은 무용지물이었음.
   사보나롤라 = 이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셨음.

 

     경건생활

   마 3:1 =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며…"
       4 =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⑴ 관찰

   세례 요한 = 집이 없었음. 광야에서 살았음.
   비오는 날 = 동굴이나 바위 틈에 쭈그리고 잠을 잤을 것임.
   음식 = 광야에 있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음.

 


   ⑵ 해석
 
   광야의 삶 = 메뚜기, 석청으로 음식을 삼았음.
   한마디로 = 세례 요한의 경건한 삶을 보여줌.
               무소유의 신앙, 세상과 짝하지 아니한 모습임.
   그는 = 항상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경건한 삶을 살았음.
   광야에서 = 온 종일 기도와 찬송, 말씀을 묵상하는 것외에
               다른 것은 할 것이 하나도 없었음.

 

 

   ⑶ 적용
  
   사보나롤라도 =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

   ① 영적 = 광야의 삶을 살았음.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임.
       기도의 사람이었음 = 하루에 6시간씩 기도하였음.
       성경을 탐독하였음 = 성경 66권을 거의 외웠던 수도사였음.

   ②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 깊이 연구하였음.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을 탐독하여 영향을 받았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 성경이었음.
      설교 중 = 성경 어디에서든지 자유로히 사용하였음.

   ③ 오락, 유희 = 어려서부터 멀리하였음.
        교회의 부패
        영적 무감각     = 항상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음.
        사회의 타락

   그가 = 고백한 내용이 있음.
   김남준 역,〈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p. 50∼51에서

   "저는 눈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끔찍한 인간의 범죄와 방탕, 음란함과 도적질, 교만과 우상숭배,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신성모독을 목격했을 때 세상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덕은 곳곳에서 경멸을 당하고 오히려 더러운 악은 높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제가 겪어야 했던 고난이었습니다. 저는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간구하였습니다. 나를 이 죄악의 수렁에서 건지시고 갈 길을 보여 주시기를……"
  
   이상 = 얼마나 경건생활에 몸부림을 쳤는지를 알 수 있음.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 세 가지를 지켰음.
                            청빈, 순결, 복종.
   ④ 금식 = 소식 위주의 식사를 하였음.
              화려한 음식이나 폭식을 죄악시 하였음.


   ⑤ 옷 = 청결하였지만 가장 낡고 조잡하고 천한 차림이었음.
            수도원에서 그는 귀신과 같은 모습이었음.

   ⑥ 하나님과 연합되는 법 = 김남준 저,〈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 57에서
    = "오직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쾌락을 경멸함으로써만이 도달할 수 있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 세상 육적인 것 경멸주의 영향을 받았음.
      ● 성 프란시스의 =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였던
                         신앙사상에 영향을 받았음.

   ⑦ 이 세상을 버려야 = 비로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하였음.

      ● 화려한 모피를 입고, 가죽 구두로 치장하고 = 물 속을 헤엄칠 수 없음.
      ● 아름다운 장신구, 화려한 목도리, 늘어진 옷을 입고 = 달음질 할 수 없음
         즉 = 이 세상을 버려야 예수를 따라갈 수 있는 것임.

        시대를 각성시킨 사람들의 공통점
         ·철저한 경건생활을 하였음.
         ·영혼의 순결성을 갈망하였음.
         ·죄에 대한 민감한 반응과 회개를 하였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경험하였음.

   롬 13:14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공동번역에서는 =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육을 만족시키는 일 = 아예 생각하지 말아야 함.
   이것이 = 성경의 요구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 = 너무도 세상과 타협해 버렸음.
                      경건생활을 잃어가고 있음 = 세상을 즐기고 있음.

   딤전 4:7
   =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빌 4:8
   =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벧후 3:11
   =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을 하라"고 하였음.

   세례 요한 = 사보나롤라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되고 있음.
   세상 풍조는 다 변해도 = 끝까지 믿음의 행실을 지키는
                           영혼이 되시기를 축원함.

 

 

 

 

 

 

 

     설교의 모습


   2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10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⑴ 관찰

   당시 바리새인들 = 율법의 형식에 눈이 멀었음.
   종교적 의식은 성대하였음 = 그러나 하나님과는 역사상 가장 멀어졌음.
   세례 요한 = 담대히 회개를 촉구했고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는 설교를 하였음.

 


   ⑵ 해석

   세례 요한의 설교 = 그 시대를 깨우는 설교였음.
   하나님 편에서 타협하지 아니한 = 선지자적 설교를 충실히 감당하였음.
   폭우가 쏟아지는 = 번개와 뇌성이 치는 설교를 하였음.
   그는 = 강력한 종말론적인 설교를 하였음.
   도끼가 나무 뿌리에 = 강력한 설교를 하였다는 의미임.
                           영적인 설교를 하였음.
   찍어 불에 던짐 = 종말론적인 설교의 의미임.

 

   ⑶ 적용

   사보나롤라 = 세례 요한과 같은 설교를 하였음.
   그의 설교의 특징 = 다음과 같음.

   ① 열정적인 설교
       김남준 역,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 138에서

   "그의 설교는 번개불의 번뜩이는 섬광과 같았고 울리는 천둥 소리와 같았다. 방탕과 음란한 도시의 정신의 뿌리 부분에 심판의 도끼를 대는 것이 그의 직무였다. 그는 하나님의 연민에 대하여 설교하기 보다는 오히려 심판과 진노에 대하여 설교함으로써 죄악된 도성을 각성에로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메시지가 그의 설교에 인색하리만치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불의와 죄악상을 보면서 넘치는 열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함으로써 그릇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돌려놓고자 하였다. 그는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것이 설교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생각하였다"


   ② 당시 두 설교 비교

    
   ③ 성경을 중시한 설교
      김남준 역,〈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 133에서

   "그는 단지 성경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일관하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항상 상황을 다루고 있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성경 본문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철학서적을 섭렵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성경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 = 네 가지로 분류됨.
   첫째 : 신앙의 진리
   둘째 : 기독교인의 삶의 단순성
   셋째 : 임박한 경고
   넷째 : 플로렌스의 새로운 정부와 정치

   ● 성경을 떠나지 아니하였음.
   ● 상황을 중시하였음 = 즉 현재의 적용을 중시하였음.
   ● 철학 등 = 지식 설교를 탈피하였음.

   그의 성경책
   항상 = 너덜너덜하게 다 헤어진 것이었음.
          그 책갈피와 여백에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교훈과 결실, 해석들을 깨알같은 글씨로 적은 것이 가득하였음.

   ④ 예언자적 설교
      김남준 역,〈기롤라모 사보나롤라〉pp. 144∼145에서
   = 특징을 분석하였음.
   "그의 설교는 묵시적인 사상과 예언자적인 소명의식, 퇴폐적인 교회에 대한 임박한 심판, 하나님의 의로우심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심판 등을 설교했고 이 설교는 항상 장시간 계속되었다. 설교시간 중 대부분을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것으로만 계속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 사역을 종합해 볼 때 또 하나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연속 설교를 즐겼다는 것이다"

   예언자적 설교
   퇴폐에 대한 심판설교
   장시간 설교
   성경본문 위주 설교
   연속설교였음.

   칼빈과 메튜헨리 = 설교의 대가들임.
   이들의 주석 = 설교를 했던 것들이었음.

   ⑤ 사보나롤라의 설교 사역
   초기에는 = 실패했음.
   1481년 = 고향 폐라라에서 설교사역을 시작함.
            감명주지 못하였음.
            설교를 단념하려고 하였음 = 크게 실망하였음.
            이때 = 자신의 설교에 회의를 느꼈음.
            그래서 = 설교를 단념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였음.

   두 번째 = 플로렌스에서 설교사역을 함.
              역시 큰 반응 일으키지 못하였음.
              강직한 설교는 쾌락을 사랑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지 못하였음.
 
   세 번째 = 1484년 시에나(Siena)에서 설교사역을 함.
              산게미냐노 동네로 파송을 받음.
              예언자적 세 가지 주제로 설교하였음.
              첫째 = 이 시대 교회는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것이며
              둘째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워질 것이다.
              셋째 = 이 모든 일은 신속히 성취될 것이다.

   이후 = 종교개혁으로 그의 설교는 성취되었음.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음.

   당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음.
   수많은 사람들 = 몰려옴.
   사람들 =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음.
            늦으면 = 자리 잡을 수 없었음.
            건물 밖에까지 몰려들었음.

   그의 설교 = 더욱 능력을 발휘하였음.
               급류와 같이 회중을 향해 부르짖었음.
               불타오르는 확신으로 = 회개를 촉구하였음.
               준엄한 메시지 = 모두를 영적으로 다운시켜 버렸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 설교의 흐름을 보면 심히 가슴이 아픔.
            복음적 설교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음.
            세례 요한과 같은 설교, 사보나롤라와 같은 설교가 사라짐.

   강단 = 세상과 타협해버린 설교를 함.
            윤리, 도덕, 교훈, 철학, 기복, 신비 = 심각함.
            이런 것 = 초등학문임.

   고전 2:1
   = 바울은 설교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음.

   세 가지 풀이 있음


         독 초(毒 草)             황 초(黃 草)             녹 초(綠 草)
       이단사설(異端邪說)           영양가(營養價) 없음          생명(生命)의 말씀
                                                                세례 요한의 설교
        먹고 영이 죽음                먹고 시들시들             사보나롤라의 설교


   세례 요한과 같음.
   사보나롤라와 같은
   = 강력하고도 종말론적인 단단한 설교를 먹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함.
  

 

 

 

 

 

 

 

 

 

 

 

 

 


     설교의 영향


   5∼6 =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            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⑴ 관찰

   세례 요한의 설교 = 당시 위대한 영향을 주었음.
   설교를 듣는 자들 = 모두 그에게 나아와 회개했고,
                       세례를 받았음.


   400년 동안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당시 유대인들에게
                세례 요한의 설교는 생명수와 같았음.

 

   ⑵ 해석

   세례 = 옛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것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임.

   유대민족을 = 새 생명의 길로 인도했음.
                 살려 내는 설교를 했음.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몰려옴.

 

   ⑶ 적용

   ①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옴.

   사보나롤라 설교의 영향
   예언서를 중시했음.
   첫 번째 강해가 = 요한계시록이었음.
   큰 영향 =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대거 몰려옴.
   많은 사람들 = 좌석에 앉지 못함.
                 선채로 강해를 들었음.
   교회사에서 증거함 = 힘 있는 설교가 선포되는 곳에는 성도들이 모인다는 것임.
   교인들 = 1시간 전 이미 예배당 문이 닫혔음.
            미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 쇠창살을 붙들고 매달려서
            설교를 들으며 회개했음.

   장시간 동안 설교를 하였음.
   설교가 다 끝났는데도 = 이제 막 시작했다고 여길 정도였음(위의 책, p. 75).
   회중을 = 성경 속으로 끌어들여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었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함 = 성경만이 영혼의 구원을 위한
                                   참된 안내서라고 선언.

   그의 = 유명한 설교
          노아의 방주
          출애굽기
          학개, 에스겔, 아모스, 요한계시록 등.
          특히 = 예언서를 좋아하였음.
   예언자들의 위치가 = 곧 시대의 종들의 위치가 되어야 된다고 주장하였음.

   그는
   = "나는 교회가 갱신되기를 갈망하며 설교한 것, 나는 이 일에 있어서 오직 성경만을
      나의 유일한 길잡이로 삼았다"(위의 책, p. 94).
   성경에 대한 사랑과 박식함이 = 뛰어났음.
   로마 카톨릭 교리를 존중하였음.
   그러나 = 모든 교리는 성경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음.

   ② 성도들과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줌.
   그의 설교의 영향
   당시 철학책이 유행함 = 그러나 이 철학책들이 사라짐.
   큰 회개의 역사 = 예배시간이 통곡의 시간이 됨.
   수많은 성도가 모임 = 교회에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를 찾게 됨.

   모든 죄인들 = 교회에 나와 예배 드렸음.
   형식적인 신자들 = 조국의 죄악과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부자(富者)들 = 자신들의 재산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줌.
   철천지 원수간들도 = 서로 용서함.
   자선(慈善) = 온 도시에 충만하였음.
   사치가 사라짐 = 옷차림이 도시전체 검소해짐.
   수도사 지망생 = 급증하였음.
   교회와 수도원 = 그 옛날의 청빈함을 회복함.
   성직자들 = 말씀 연구와 기도하는 일에 몰두하게 됨.
   건달들 = 사라짐.
   감옥 = 텅텅 비었음.
   유행가가 사라지고 = 찬양으로 온 도시가 바뀌었음.

   허형의 화형식을 거행함(세속주의에 대한 화형식이었음).
   음란물, 가발, 세속적인 책들 = 모두 불태웠음.
   이것들을 모아둔 양(量) = 7층 높이, 한층 둘레가 92m, 높이가 18m나 되었음.
                           즉 산더미보다 컸음.

   사도행전 19장의 재현과 같았음.
   바울 = 에베소에서 말씀을 전할 때 이 도시가 변화되었음.


   세례 요한 = 초림 당시의 설교도 큰 영향을 주었음 = 영적 쿠테타를 일으켰음.
   사보나롤라 = 중세 설교로 영적 혁명을 일으켰음.


   ③ 로렌조에게 영향을 줌.
   로렌조 = 당시 플로렌즈의 통치자였음.
   설교로 = 그의 부패를 질타하자 둘 사이가 악화되었음.
   로렌조 = 사보나롤라를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괴롭혔음.
   로렌조가 임종할 때 = 죽음이 두려워서 자신이 박해했던 사보나롤라를 불러
                        기도를 통해 자신의 죄를 사죄받고 싶어 하였음.

   자신은 = 세 가지 죄가 있다고 고백하였음.
   첫째 = 볼테라를 약탈한 것.
   둘째 = 미혼 여자들의 지참금을 위해 설립된 기관에서 관리하던
          결혼지참금을 빼앗음.
   셋째 = 자기를 죽이려던 파찌(pazzi)의 암살음모를 적발한 후
          플로렌스 시민에게 무자비한 처형을 한 것.

   사보나롤라 = 로렌조를 위로했음.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사면을 위한 = 기도를 해 주는 조건으로 세 가지를 요구하였음.
   첫째 :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 OK 대답.
   둘째 : 부당하게 모은 재산 모두 나눠주시오 = 망설이다가 OK 승낙.
   셋째 : 플로렌스에 그 옛날의 자유를 다시 돌려주시오.
           주권을 백성에게 돌리라는 것임.
           정치체제를 공화정으로 되돌려 놓으라는 것임.
           대답하지 않자 = 그러면 나도 기도하지 않겠음.

   로렌조가 죽음 = 아들 피에로가 권력을 승계함.
                   부족한 인간, 타락, 운동과 축제만 즐겼음.
                   결국은 피에로의 정권이 무너짐.

   사보나롤라 = 전권(全權)을 잡게 됨.
                  시민들 적극적으로 원하였음.
                  그는 신정정치를 하게 되었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는 = 하나님의 말씀임.
            사람의 말이 아님.
            목사의 말이 아님.
   설교를 듣고 = 우리 삶이 변화되어야 함.
   초대교회 = 행 2: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찌할꼬!"라고 변화됨.

   살전 2:13
   =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받음이니 = "열렬히 받는 것"을 의미함.
   설교에는 = 빛과 열이 있음.
              보여줌. 자라게 함 = 그래서 삶을 변화시킴.
              이러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함.

 

 

 

 

 

 


     당시 지도자들에 대한 자세

   7 =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⑴ 관찰

   당시 지도자들 =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장로들
                   말할 수 없이 타락하였음.
   특히 =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가르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맹공을 퍼부었음.
   그의 약한 면 =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까?"고
                  한때 잠시 의심했던 연약성도 있었음.
   그러나 = 그는 사자처럼 불을 토하였음.

 

   ⑵ 해석

   바리새인 = 현실주의, 의식주의로 타락한 신앙의 모습임.
   사두개인 = 합리주의, 이성주의로 타락한 신앙의 모습임.
   즉 = 당시 형식주의, 외식주의 신앙과 합리주의 신앙이 영적으로 눈을 멀게 하였음.
   세례 요한 = 이를 맹렬히 공격하였음.

 

 

 


   ⑶ 적용

   사보나롤라 당시의 = 교황청
   타락의 극치를 이루어 = 칠흑같은 어두움이었음.
   영적으로 =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음.
              시대를 이끌 영향력을 상실하였음.
   십자가 복음이 사라짐 = 르네상스의 영광에 심취하는 자들이 되어 버렸음.
   교황청 = 전쟁과 탐욕을 통해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음.


   설교 =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로마 교회에서 사라져 버렸음.
   갖 가지의 제도와 예배 = 외식으로 전락하였음.
   성만찬 = 즉시 예수님의 피와 살이 된다고 하였음.
            타락한 것음.
   교회당은 = 영적 죽은 시체들로 즐비하였음.
               인간들의 사교모임이 되어 버렸음.


   당시의 교황 = 알렉산더 6세
   돈으로 교황이 되었음 = 타락의 극치를 이루었음.
   교황청 = 사보나롤라에게 부패를 탄핵하는 설교를 하지 말도록 하였음.
   사보나롤라를 = ● 협박하기도 함.
                  ● 아첨하기도 함.
                  ● 뇌물을 보내기도 함.
                  ● 정신병자로 매도하기도 함.

   1495년 10월 = 교황은 모든 공적, 사적 설교 금지령으로
                   강력히 제재하였음.

   교황청이 = 추기경 자리를 제의하였음(굴하지 않자 타협해 온 것임).
   그러나 = 그의 답변은

   "내가 만일 그러한 것들을 탐하였다면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이 남루한 의복들을 벗어버리겠다고 교황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소원은 주교직이나 추기경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추기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허락하셨던 죽음, 곧 주님을 위하여 나의 몸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원하는 바는 추기경의 모자도 아니고 주교의 관도 아닙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 대신에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성자들에게 주신 바 순교의 붉은 피로 물든 모자 그것을 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는 = 세상 영광, 물질, 명예를 헌신짝처럼 여겼음.
   그가 본 것은 = 오직 천국이었음.
                   천국의 영광과 축복만을 보았음.

   사보나롤라는 =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알렉산더 6세에게
                    이렇게 외쳤음.
   그는 = "로마 카톨릭의 교회 알렉산더 6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직을 매매하는 자이며              온갖 파렴치한 죄악을 저지른 자요 거듭나지 못한 자다"라고 외침

   놀라운 일임 = 당시 교황청은 하늘을 찌르는 권세였음.
                 이런 권세도 그는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음.
                 교황이 사람 목숨 끊는 것은 =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대였음.

   알렉산더 6세
   역대 교황 가운데 = 가장 사악한 자임.
   5명의 사생아를 두었음 =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음.
   반대자들 = 독극물에 의한 살인을 저질렀음.

   사보나롤라 = 교황이 무신론자라고 맹공격하였음.
   그는 = 스코틀랜드의 개혁자인 존 낙스처럼
          하나님과 죄밖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음.

   인간적인 모습
   약한 면도 있었음.
   그는 = 결코 한없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음.
   로마 교황청에 의해 = 체포되었을 때 고문에 못이겨 잘못 약속을 하기도 하였음.
   그는 = 분명히 연약한 한 수도사에 지나지 않았음.

   김남준 역,〈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 148에서


             그의 인간적 모습                   그의 영적 모습
             
                  연약한 자                             한없이 강한 자
                                                  하나님이 그를 강하게 하셨음


   세례 요한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헤롯 왕의 죄를 공격하였음.
   사보나롤라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시 교황의 죄를 공격하였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 신앙의 타락에 대해, 비진리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함.


   오늘 이 시대
   교회의 타락한 모습 = 말할 수 없음.
   혼합주의, 세속주의 위기 앞에 = 세계 교회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

 

   세 가지 모습임.
   ① 타협적 모습 =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모두가 그러니 나도 할 수 없다." 함.
   ② 무감각적 모습 = 타락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음.
 
   ③ 공격적 모습 = 사단의 모습으로 보고 목숨걸고 타락과 싸우는 것임.

   우리는 = 타락에 대해서 공격적 모습을 가져야 함.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논리가 = 믿음의 세계에서도 동일함.
   목숨걸고 싸우는 = 십자가 군병들이 되시길 축원함.

 

 

 

 

 

 

 

 

 

 


     최후의 모습

   마 14:10 = "……요한을 목베어……"


   ⑴ 관찰

   세례 요한 = 헤롯 왕의 잘못을 계속 공격하였음.
   헤롯 왕 =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음.
             세례 요한이 간음죄라고 직언하였음.
   이 일의 결과 =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 사건과 관련하여
                  목 베임을 당하였음.


   ⑵ 해석

   "목 베어" = 순교를 의미함.
   세 가지 죽음이 있음.
   ① 자연사 = 수명이 다해 죽는 것임.
   ② 사고사 = 질병, 교통사고, 기타 사고로 죽는 것임.
   ③ 순  교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믿음 때문에 죽는 것임.
   세례 요한 = 믿음의 꽃인 순교로 최후를 마감함.


   ⑶ 적용

   사보나롤라 최후
   그는 = 순교로 끝을 맺었음.

   교황청 = 그의 설교 금지령을 플로렌스 의회에 보냈음.
   의  회 = 교황의 협박을 못이겨서 설교 금지령을 내림.


   사보나롤라
   두 명의 제자와 함께 = 이단자로 재판을 받았음.
                         사형을 선고받음.
   죄명 = 이단자. 이교자, 교황청을 멸시한 자
   옥중에서 = 시편 50, 51, 30, 31편을 주해와 설교를 썼음.
   몸 = 착고에 매였음.
   영 = 설교를 선포하고픈 갈망이 있었음.
        아무도 막지 못하였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싶은 몸부림이었음.

 

   그의 최후의 모습
   = 김남준 역,〈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p. 126∼127에서
      리돌피(R. Ridolfi)는 = 그의 처형 장면을 = 다음과 같이 묘사함.

   "기롤라모 사보나롤라를 비롯한 세 순교자들은 이제 텅빈 복도를 지나가기만 하면 십자가에 다다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엷은 흰 옷을 입은 채로 복도를 걸어 내려갔으며 각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은 수사와 또 다른 위로자를 한 사람씩 동반하고 있었다. 몇몇 나쁜 아이들이 복도 밑으로 내려와서 복도의 판자에 난 구멍을 통해 이 세 사람의 맨발을 날카로운 바늘로 찔렀으나 그들은 이러한 조롱과 모욕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 묵묵히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 내려갔다. 이윽고 사보나롤라는 자신에게 고해를 받은 신부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말한 다음에 작은 신조를 암송하면서 교수대가 있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맨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그는 자신이 선포하는 설교단 아래서 환성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던 그 수많은 군중들을 내려다 보았다. 밧줄은 그의 목에 걸쳐졌고 줄은 당겨졌다. 사형 집행자는 즉시 사보나롤라의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에 그가 화염의 고통을 받도록 장작더미 위에 불을 붙이려고 하였다. 사형 집행인은 쇠고리를 떨어뜨렸고 불은 붙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이미 죽은 후였다. 1498년 5월 23일 오전 10시 경의 일이었다."

   군중들 = "선지자여 너의 권세를 버리고 이전의 기적을 향해 보라"고 외쳤음.


  

                  예수님                                보헤미야의
          유대인들에게 순교당하심                    존 후쓰(J. Huss)도
                 모두 떠남                               순교하였음
                


사보나롤라
                                      모두 떠나갔음
                                      조롱거리가 됨
최후 = 예수님의 모습이었음
                                     주님과 같이 순교함


   그의 최후의 말 =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큰 고난을 당하셨도다"

   교황청 = 시체를 태워 아르노 강물 위에 버림.
            기억에서 빨리 사라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음.
   그후 = 교황청은 그를 이단자로 낙인찍어 역사 기록에 남겼음.
   20세기에 와서 = 교황청 안에서 성자반열에 올려야 된다는 주장이 나옴.

   김남준 역,〈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 151에서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그토록 자신을 돌보지 않은 설교 사역과 교회 개혁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분깃은 순교였다. 설교자로써 그의 분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타오르는 장작불, 목맨 밧줄, 원수들의 함성, 이것이 이 세상에서 그에게 남은 마지막 몫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설교자에겐 이 세상에서는 아무 분깃도 없었다. 이 땅에는 그의 고귀한 설교 사역의 헌신을 갚아줄 것이 없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데려 가셨다. 그의 말씀 선포는 칠흑 같은 중세의 암흑 속에서 곧 임하게 될 종교개혁의 앞길을 달리는 세례 요한의 외침이었다. 설교자는 죽어도 그가 외친 진리는 살아서 그렇게 다음 세대를 깨웠던 것이다."

   예수님
   구약종말 = 칠흑 같은 영적 암흑 속에서
               새로운 신약 복음시대를 위해
               깨우시고 순교하셨음.

                                            
       예수님의 모습
                                            

   주님은 우리를 위해 = 죽으셨음, 순교해 주셨음.
   우리는 주님을 위해 = 무엇을 할 것인가?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고 누려야 할 것인가?
                         신약성경 어디에 그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마 16:24∼25
   = "24……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        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 십자가 = 십자가는 순교를 상징함.
   즉 순교의 십자가를 지고 = 주님을 따르라고 한 것임.
   이러한 자가 = 다시 사는 것임.
                 영원한 목숨을 얻는 것임.

   세례 요한과 사보나롤라
   = 이 두 사람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지금은 다시 목숨을 찾고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꽃 = 순교임.
                자랑의 면류관임.

   계 20:4
   =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 순교시대가 아님.
   그러나 = 우리는 삶 속에서 순교자적 삶을 살아야 함.
            이러한 신앙을 가지시기를 축원함.

 

 

 

 

 

 

 

 

 


     교회사에 미친 영향


   마 3:11 =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⑴ 관찰

   세례 요한 =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음.

   예수님보다 = 6개월 먼저 와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메시아임을 증거하였음.

   예수님께 = 세례를 베풀었음.


   ⑵ 해석

   세례 요한 = 당시 깨우는 사명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새로운 빛을 보여준 것임 = 즉 신약시대의 개막을 알렸음.

   예수님께 세례 =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사명 충실히 감당한 것임.

 

 


   ⑶ 적용

   사보나롤라 = 역사에 미친 영향
                  종교개혁의 씨앗 역할을 하였음.

   김남준 역,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p. 97에서
   루터는 = "사보나롤라는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라고 하였음.
            중세의 수도사라고 부르지 아니하였음.
   루터는 =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쳐들었을 때
            사보나롤라의 생애와 교훈으로부터
            자신이 많은 감화와 교훈을 받았다 라고 고백하였음.

   루터가 영향 받은 사람
   ●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 존 위클리프(John Wiclif)
   ● 보헤미아의 존 후쓰(John Huss) 등.

   1523년에 루터는 = 사보나롤라의 시편 설교를 높이 평가하였음.
                     루터 자신이 서문을 써서 간행하였음.
   즉 사보나롤라는 = 루터 종교개혁의 밀알이 되었음.

 

   사보나롤라는 = 먼저 핀 한 송이 철쭉과 같은 일생이었음.
                    그는 당시 교황청의 무서운 권위 앞에 순교의 재물이 되었음.
                    그러나 = 종교개혁의 꽃은 루터를 출발로 전 유럽을 뒤덮었음.

   사보나롤라는 = 새로운 종교개혁시대의 막을 열게하는 세례 요한과 같았음.

 

 

   이들은 = 시대와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작은 등불이 되었음.


   토마스 카알라일
   = "설교단은 세상 역사의 뱃머리이다"라고 하였음.


   인생은 = 짧음.
   성경은 = 안개와 같다고 하였음.
            베틀과 같다고 하였음.
   세상 사람들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도
                   짧은 인생을 표현하고 있음.


   우리는 =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호랑이는 = 가죽을 남김.
              화가는 = 그림을 남김.
              소설가는 = 소설을 남김.
             성도들은 = 위대한 삶을 남겨야 함.
               그래서 =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줘야 함.
               또한 = 그 시대에 위대한 신앙의 흔적을 남겨
                      복음이 계승되도록 해야 함.

   이러한 면에서 = 세례 요한과 사보나롤라는
                   우리에게 가장 모범적인 모델이 되고 있음.

 

 

 

 

 

 

 

 

 

 

     결론

   우리는 = 두 번에 걸쳐
   위대한 설교가 = 세례 요한의 신앙과 사보나롤라의 신앙을 살펴보았음.

   마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오늘 이 시대
   세례 요한의 시대임.
   사보나롤라가 살았던 시대임.
   어쩌면 = 이 시대가 더 타락한 시대인지 모름.
   신랑이 더디 오므로 = 모두 쿨쿨 졸며 잔다고 하였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풍파는 다 변해도
   다른 교회의 모습은 다 변해도
   다른 성도들의 모습은 다 변해도
   우리는 = 끝까지 깨어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함.
   깨어 있는 자만이 =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영광에 동참할 것임.
   할렐루야!

 

 

 

 

 

 

 

Ⅵ. 예배와 찬송

 

 


                           1. 찬송의 정의
                           2.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
                           3. 예배 찬송선택의 주의할 점
                           4. 예배찬송 구성의 7대 종류
                           5. 예배찬송 인도자
                           6. 고정 찬송
                           7. 각 예배의 찬송 사용법

 

 


【읽을 말씀】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대상 15:16)

 

 

 

 

 

 

 

 

 

 

 

 

 

 

 

 

 


  1. 찬송의 정의

   기독교인과 찬송, 성경과 찬송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찬송이 신앙생활의 활력소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찬송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⑴ 원어적 의미
   신·구약 성경은 총 399회에 걸쳐 찬송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 구약에서 351회나, 그 중에 시편에만 95회나 언급되고 있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과 찬송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① 구약의 의미
  "……저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바라크:    )……"(대하 6:13)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바라크:    )"(시 95:6)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바라크:    )하라 하매 회중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바라크:    )하고……"(대상 29:20)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바라크:    ) 기도하며"(단 6:10)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랄:    )할지어다"(시 117:1)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할랄:    )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할랄:    )하리이다"(시 145:2)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랄:    )할 것이요……"(사 62:9)
   "……여호와를 찬송(할랄:    )하며 감사하는데……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할랄:    )하여……"(대하 5:13)

  
   이상과 같이 구약의 대표적인 찬송에 대한 용어로는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송축(경배)하다", "찬양을 받다"라는 바라크(   )와 "칭송(송축)하다", "자랑하다", "찬송하다"라는 할랄(   )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감히 만질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찬미의 자세가 담겨져 있다.
   ② 신약의 의미
   찬송이란 단어가 351회나 사용된 구약과 비교할 때 신약에서는 미미할 정도인 48회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신약에서 찬송이라는 단어는 보편적으로 네 가지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좋은"(good)을 의미하는 유(  )와 "말씀"(a Word)을 의미하는 로고스(     )의 합성어로서 "좋은 말" 또는 "연보"라는 뜻을 가진 율로기아(       )와 "신들이나 영웅, 정복자를 칭송하는 노래",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라는 휨노스(     )를 들 수 있다.

   "가로되 아멘과 찬송(율로기아:        )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계 7:12)
   "한 입으로 찬송(율로기아:        )과 저주가 나는도다"(약 3:10)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율로기아:        )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휨노스:      )하며"(엡 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시와 찬미(휨노스:      )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이상의 사실들을 볼 때 신약에서 찬송의 의미는 "찬송", "연보", "찬미" 등의 "선하고 좋은 의미"를 담고 있어 성도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⑵ 찬송과 성경의 관계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찬송"이란 단어를 보면 거의 예외없이 "하나님께"라는 말이 있어 찬송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목적이고 성도들이 은혜받는 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찬송과 성경은 어떤 관계인가? 성경과 찬송과의 관계에 대하여 황원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대상이 사람이라고 할 때 찬송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다. 성경과 찬송을 그 대상면에서 살펴볼 때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상의하달(上意下達)의 도구이고, 찬송은 인간의 뜻을 하나님께 전하는 하의상달(下意上達)의 도구이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다면 성도는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다. 찬송은 성경과 같이 하나님과의 종적 관계를 이어주는, 성도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경과 찬송은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관계 면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황원찬 목사의 주장을 도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찬송은 성도가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귀한 찬송을 천사나 다른 피조물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이사야의 예언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그러므로 예배에서 성도들이 드리는 찬송은 그들의 심중을 하나님께 드리는 더없이 귀한 헌신임을 알아야 한다. 찬송이 성도가 드리는 헌신이라는 사실은 정일웅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기독교의 예배와 찬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음악과 노래가 주는 영향의 지대함 때문일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시와 멜로디를 엮어 표현하는 감사요, 고백이요, 찬미인 것이다……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로서, 세상의 노래들과 구별하여 우리는 성가(聖歌)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노래라는 뜻이다."

   ⑶ 예배와 찬송
   "하나님을 찬미하여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말씀으로 은혜받은 후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내적으로는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교회를 세워갔을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는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으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와 찬송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의 세 가지 요소가 바로 "말씀", "기도", "찬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의 3대 요소인 "말씀·기도·찬송"의 관계를 농사로 비교하면 그 중요성은 더욱더 분명해진다.

 

   예배와 찬송의 관계가 이처럼 밀접하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것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은 베드로가 인도한 예배의 결과를 증거하는 사도행전 2장 47절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예배에서 찬송이 ⅓이상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계를 입증한다. 이에 대하여 정일웅 목사는 다음과 같은 주장하고 있다..

   "예배는 찬송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실제로 주일에 진행되는 예배의 순서 가운데 찬송과 노래와 악기 사용의 빈도는 예배의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고 하겠다.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오르간(피아노) 연주에서 시작하며, 성가대의 기원 송영, 영광송, 기도송, 회중찬송, 찬양대의 찬송, 설교 후 찬송, 봉헌송, 주기도송, 후주와 마침송에 이르기까지 찬양대와 피아노 또는 오르간의 반주는 동반된다……예배에서 실제로 찬송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것은 예배에서 찬송의 기능적인 면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예배에서 찬송을 부르면 실제로 우리는 예배의 사회성을 경험하게 된다. 예배의 사회성이란 개인과 공동체 간에 경험되는 실제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먼저 찬송은 삼위의 하나님을 향하여 그를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지만, 노래하는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즉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 가운데서 '나' 자신을 경험한다. 그리고 노래하는 공동체, 즉 믿는 자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예속되어 있는 자신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개방하고, 믿음 안에 일치하며, 환영받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배 중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찬양대의 위치로 입증된다. 어느 예배당이든지 찬양대의 위치는 강단 옆 가장 돋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예배에서 찬송이 이처럼 중요한가? 그것은 바로 찬송은 "한 주일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살겠습니다"는 신앙고백이 입술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사와 음악으로 엮어 표현하는 성도의 감사, 고백, 찬미, 특권이다. 따라서 이처럼 귀중한 찬송은 가사에 그 생명을 우선적으로 두고 음악은 그 가사를 운반하는 도구 역할에만 머물러야 한다. 자칫 잘못하여 곡(曲)을 중심으로 하는 찬송을 드리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감정을 즐겁게 하는 유행가가 됨을 주의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예배와 찬송 개념"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김영재 목사의 주장으로 잘 나타나 있다.

   "칼빈은 음악이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으며, 시(詩)에다 멜로디를 붙일 경우 그것은 마음 속에 더 깊이 아로새겨지며 감동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음악과 가사가 예배에 사용될 수는 있으나 음악이 가사(歌詞), 즉 말씀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고 찬송의 목적인 가사가 흐려지는 일은 절대적으로 범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찬송의 가사가 우리의 신앙을 담은 고백이며, 기도이기 때문이다.

 

 

 

 

 

 

 

 


  2.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

   "12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일백이십 인이 함께 서 있다가 13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14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2∼14)

   본문의 사건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예배를 드리는 장면이다. 120명의 나팔 부는 제사장의 반주에 맞춰 4천 명의 찬양대 그리고 수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름다운 찬양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찬양을 드릴 때, 전에 구름이 가득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막 완성 후에 나타난 구름과 동일한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 예배의 찬양을 받으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배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시켜 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은 무엇인가?

   ⑴ 찬미의 제물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헬라어 율로기아(       )는 "찬송(讚頌)"이라는 의미 외에 "헌금(獻金)"의 의미도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약의 찬송이 바로 구약의 제사 제물과 같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찬송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찬미의 제물과 같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에 정결한 제물을 드렸듯이, 신약의 찬송도 덩결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이는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⑵ 신앙고백의 역할
   찬송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사에 멜로디를 엮어 표현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헌신의 찬송은 바로 성도의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다. 따라서 찬송은 입술의 열매로서 일주일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의 목적은 가사에 있으므로 곡이 가사를 흐리게 하거나 약화시키는 일은 금해야 한다. 다만, 곡(曲)은 가사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곡이 가사를 지배하면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곡은 찬송을 운반하는 수단, 가사는 찬송의 목적이 될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찬송이 된다.

   ⑶ 회개의 역할
   찬송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이자 신앙고백인 동시에 회개의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찬송은 가사의 내용대로 살았는지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찬송을 드리면서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면서 "이렇게 살았습니까?", "이렇게 살겠습니까?", "이런 믿음입니까?" 반문하며 회개를 촉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찬송을 통하여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므로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라는 감사와 함께 회개를 하게 된다.

   ⑷ 하나님과 화목의 역할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대하 5:13)

   일백이십 인의 제사장이 나팔을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할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찬송을 흠향하시고 그들과 화목하셨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데에는 반드시 화목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구약은 희생제물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간 제물이라면 신약은 찬송이 중간제물이다.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찬송은 귀중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찬송은 곡이 아니며, 음악도 아니고 기능도 아닌 바로 믿음의 열매요, "입술의 열매"(히 13:15)이며,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찬송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한다.

   ⑸ 새로운 신앙 결단의 역할
   예배에서 찬송은 성도들로 하여금 새로운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설교를 듣고 찬송드릴 때 새로운 신앙적 결단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예배는 축도 후에 고정 찬송으로 결단하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 왜냐하면, 찬송은 삶의 지표가 되고 가사의 내용이 새롭게 부각되어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⑹ 예배의 거룩성, 경건성, 은혜성을 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드리는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첫 송영은 장엄함과 함께 거룩성을 나타낸다. 즉 찬송을 드릴 때 경건해질 뿐만 아니라 은혜가 넘치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찬송은 은혜를 받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⑺ 진리 보존의 역할
   찬송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사와 멜로디로 엮어 표현하는 감사의 고백이요, 찬미이기 때문에 교회사 속에 나타난 찬송은 그 시대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찬송을 통해 동일한 신앙이 교회사 속에 계승된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은 설교와 부합되는 것을 선정하므로 진리를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찬송으로 은혜받고 그날 받은 설교의 말씀이 더욱더 풍성하게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서게 된다. 따라서 예배에서 올바른 찬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아니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이 다양하게 나타남을 살펴보았다. 목회의 성공이 예배에 있으며, 그 예배의 성공은 말씀에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은혜스럽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도록 찬송이 화목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예배와 찬송은 목회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예배찬송 선택의 주의할 점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은 앞에서 살펴 보았다. 찬송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화목케 하는 찬미의 제사이다. 따라서 찬송이 예배에 중요한 만큼 예배의 효율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찬송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예배에서 중요한 찬송을 어떻게 선택하여야 할 것인가?

   ⑴ 예배의 종류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찬송은 예배의 종류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주일 낮 예배, 찬양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헌신예배 등 다양하게 드려지는 예배의 종류에 따라 찬송도 거기에 맞는 곡을 선택해야 한다. 예배의 종류와 맞지 않는 찬송은 양복입은 신사가 고무신을 신은 것과 같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그날의 예배도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⑵ 예배 참석 대상을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
   예배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일반예배의 경우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貧富) 격차, 높고 낮음이 없다. 그러나 교도소, 군부대, 직장예배 등의 특별예배로 드려야 할 때도 있다. 따라서 예배 인도자는 이러한 예배 참석 대상을 고려해서 찬송을 선택해야 한다.

   ⑶ 선곡(選曲) 일지를 사용하라!
   예배에서 찬송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만큼 목회자가 좋아하는 찬송만 선택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쌀밥이 좋은 것이지만 쌀밥만 먹을 때 각기병(脚氣病)에 걸리듯 찬송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으므로 편식(偏食)은 성도들의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찬송가의 제일 앞에 찬송가의 제목별 분류가 나와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것으로 시작해서 예배의 시작, 천국, 성경, 교회, 성례와 예식, 다양한 절기와 행사, 성도의 생애 등 각종 형태의 찬송가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는 찬송가의 선곡 일지를 활용하여 예배에 맞는 찬송의 선택으로 효율적인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⑷ 교회력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고전 16:8)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 드리는 교회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 첫째는 주님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일요일)을 기념하여 "주의 날(The Lord's Day)"로 지킨 것이며, 다음으로는 사도들도 외면하지 않고 지켰던 유대 민족의 고유의 절기인 유월절, 부활절,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절, 보리 수확기에 드리는 맥추절,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등이 있다.
   그리고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가 처음 수확한 농산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추수 감사절 등은 오늘날까지 교회력으로 준수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교회에서 준수하는 교회력으로는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성서주일 등과 같은 예배에 더하여 신년 감사주일, 종교개혁주일, 어린이 주일, 창립일 등으로 확대되어 지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력의 출발과 그 변천 과정에 대한 것은 정장복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신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부활절을 맞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회상하는 준비의 기간을 가졌었다. 이러한 절기적 행사는 점차 확산되어 사순절, 주현절, 오순절과 같은 절기를 설정하게 하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칙령에는 크리스마스, 신년, 부활절, 승천일, 성령 강림절 등이 언급되었고, 1671년의 칙령에는 성 금요일이 추가로 언급되었다. 그 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계속하여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각종 성자의 성일을 합류시켜 교회력으로서의 고유한 품위와 의미의 전달에 손상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 보수적인 개혁자들(루터 계열)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의미를 상실한 교회력을 지키는 것을 전면 거부하고 성탄절과 부활절을 받아들였었다……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17세기 퓨리턴들에 의하여 버려졌던 각종 예배 의식에 새로운 관심을 쏟으면서 영국 교회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의식과 교회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교회력과 거기에 따른 성서 일과에 예배 신학자들이 이렇듯 관심을 쏟은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로 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16세기 개혁자들이 교회력을 외면했던 이유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더이상 그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교회력이 합리성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로, 복음의 선포가 단순히 설교의 사건으로써만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형태를 비롯하여 깊은 의미를 지닌 적절한 절기를 통하여서도 이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를 지닌 교회력의 새로운 인식은 전세계 개신교 속에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파고 들어왔으며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도 교회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날로 더해 가고 있다."
   ⑸ 잘 아는 찬송을 선택하라!
   예배의 찬송은 성도 개인이 드리는 것이지만 그 개개인의 찬송이 조화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찬송은 성도들이 잘 모르는 곡을 선택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찬송은 연습이 아니라 바로 실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모르는 찬송은 예배 전 충분히 연습하여 익힐 것이나 예배의 찬송은 전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⑹ 가사 위주로 선택하라!
   찬송은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멜로디로 엮어 드리는 곡조 있는 기도임을 앞에서 밝혔다. 따라서 찬송의 선곡은 가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좋아하는 곡만 선택해서 부르는 것은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찬송은 예배에 부합되는 내용의 가사를 드리는 것이지 목회자가 좋아하는 음악을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⑺ 찬송가의 제목 분류에 의해 선택하라!(현재 찬송가 내용)


  4. 예배찬송 구성의 7대 종류

   예배에서 찬송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예배찬송에 구성되는 종류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대예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일곱 가지의 기본 조건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배찬송의 구성에 필요한 일곱 가지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는가?

   ⑴ 예배 전의 찬송
   예배 전에 오르간 혹은 피아노, 합창, 독창 등을 은은하게 반주(찬송)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예배시작 15분 전에 전성도가 다같이 찬송을 드리게 한다. 예배 30분 전부터 찬송을 연주한다면 녹음된 테잎의 활용도 가능하다.
   이때의 악기 연주를 일컬어 전주(The organ prelude)라고 하는데, 이는 예배의 부가물도 아니며 교인들이 자리를 정돈할 동안 혹은 교인들이 모여들 때를 기다리는 시간을 떼우는 것이 아니다. 전주(The organ prelude)도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순서이다. 이와 같은 전주(The organ prelude)의 목적은 황원찬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전주곡은 분위기를 창조해야 하고 그 예배의 서주(序奏)를 마련해야 한다……이를 위해 목회자는 올겐주자와 자주 토론을 가지는 것이 신령한 예배를 위한 진지한 평가의 표현과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위한 책임을 분담할 모든 사람들 앞에 지켜져야 할 필요한 목적을 명심하게 하는 기회를 얻게 할 것이다. 올겐주자가 예배에 있어서의 자기의 사명에 대한 자각과 목회자가 자기에게 바라는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이 없다면 그 예배가 가져야 할 통일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전주(The organ prelude)곡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경건하고 경외심이 일도록 송영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전성도들이 예배 참여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재인식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⑵ 예배찬송(감사, 기도, 찬양) = 설교전 찬송
   예배찬송은 설교 전에 드리는 찬송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부르는 찬송은 간구나 간증 성격의 찬송은 적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 전에 드리는 찬송에 대해서는 김영재 목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잘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새해를 맞이 하는 예배에서 대뜸 '아침 해가 돋을 때'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시편 90편에서와 같이, 먼저 '영광의 왕께 나 경배하며' 등과 같은 찬송으로 창조주 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시편 찬송을 불러야 한다. '아침 해가 돋을 때'는 자신을 위하여 간구하는 찬송이므로 예배를 마치면서나 불러야 한다."

   ⑶ 봉헌 찬송
   헌금은 예배의 순서에서 성도들이 드리는 또 다른 귀중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릴 때 찬송을 드리는데 이때의 찬송은 독창도 좋다. 목양교회에서는 헌금을 드릴 때 찬양대원 중 한 사람이 나와서 독창을 하고 3∼4절은 전교인이 합창하고 있다. 그리고 헌금이 강단으로 드려질 때 전교인이 일어나서 헌금을 드리는 내용과 일치한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348장 4절)라는 찬송을 드린다.

   ⑷ 특별 찬송(찬양대 찬양)
   "31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32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대상 6:31∼32)

   찬양대의 성경적 유래는 다윗이 성전에서 노래만을 하도록 사명을 부여하므로 유래가 되어 그후 오늘날 교회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따라서 주일 대예배의 찬양은 설교와 관련된 찬양으로 선정해야 하며, 효율적인 찬양을 위해서는 설교자는 4편의 설교를 미리 지휘자에게 주어 준비케 하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하여 정장복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찬양대의 지휘자는 언제나 설교자와 관계를 가지고 설교의 내용과 일치된 찬양을 찾아야 한다. 설교자로서 예배의 현장에서 느끼는 마음 아픈 일의 하나가 곧 설교는 A라는 주제인데, 찬양은 C라는 주제였을 경우이다. 이런 부끄러운 예배를 드리지 않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최소한 두주간 전에 설교의 윤곽 정도라도 지휘자에게 전달해 주어야 할 것이다……가능하다면 설교자와 대화해서 1개월 정도의 메시지 내용을 미리 받아 지휘자가 적절한 곡을 선정하여 성가대원들을 미리 연습시킴으로써 그 찬양의 완전한 소화와 함께 활기찬 영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⑸ 말씀 찬송(헌신과 회개) = 설교 후 찬송
   설교가 끝나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설교와 관련된 찬송을 부른다. 이 때에 부르는 찬송은 말씀대로 살기를 결단하는 헌신과 회개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 이 찬송은 설교자를 통해 선포된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감사의 응답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 후에 이어지는 헌신과 회개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지체없이 감사의 표현을 하는 예배자로서의 실천적 행위를 보이는 순서로써 진행되어야 한다.

   ⑹ 송영 찬송
   송영은 문자 그대로 짧고 단순한 찬송으로 찬양대의 주도 아래 은혜롭게 부르는 것이어야 한다. 송영에는 첫 송영, 헌금 송영, 마지막 송영, 기도 송영 등이 있다. 그러나 송영도 성도의 기도임을 기억하여 성도들이 예배의 순서에서 송영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예배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송영에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는 유다서(유 24)와 요한계시록(계 1:5∼6)에 나타나 있다.

   ⑺ 예배 후 폐회 찬송
   모든 예배가 끝나면 찬송으로 마무리를 하는데 주일 대예배는 송영 후에 드리지만, 수요예배, 금요예배, 찬양예배는 축도 후 폐회 찬송이 드려진다. 그리고 주일 대예배의 폐회 찬송은 찬양대의 찬양으로 드리지만 그 외의 예배에서는 오르간, 피아노의 연주로 대치된다.
   따라서 폐회 찬송은 찬양대의 찬양, 합창, 독창, 오르간, 피아노 연주 등이 스피커로 방송되어 성도들이 예배당을 떠나 문 밖에 나가기까지 계속 연주되어 찬송 속에 내일의 일터로 힘차게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예배찬송의 일곱 가지 종류를 살펴보았다. 그 어느 순서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찬송은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 동시에 그 찬송을 통하여 성도들이 새로운 확신과 힘을 얻는 것이므로 귀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러한 찬송의 역할을 기억하여 성공적인 예배로 인도하여야 한다.

 


  5. 예배찬송 인도자

   예배에서 찬송은 설교·기도와 함께 예배의 삼대 요소로 꼽힌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올바른 예배찬송으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산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예배찬송 인도자는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

   ⑴ 예배에 필요한 세가지 음악 기능 담당자
   교회에 세 가지 음악 기능담당자가 있으니 바로 지휘자, 반주자, 찬송인도자이다. 이 세부류의 음악 기능 담당자는 예배의 찬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 세 음악 기능 담당자의 역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 유의해야 할 사항은 찬송인도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찬송인도자는 찬양대 지휘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찬송인도자는 찬양대 지휘자가 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찬양대 지휘 즉 음악적 기능이 있다해서 예배찬양 인도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찬송 인도자는 예배의 직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목회자는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⑵ 찬송인도자의 중요성
   예배에서 찬송인도자가 중요한 이유는 찬송의 효율적인 운용은 예배에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찬송인도자의 영향은 찬양대 지휘자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찬송이 은혜스러운가, 은혜스럽지 못한가는 찬송인도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⑶ 찬송인도자의 자격
   예배에서 이처럼 귀중한 위치에 있는 찬송인도자는 어떤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적합한가?

   ① 음악적 자격
   찬송인도자는 음악적 자격이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음악적 자격이란 음악에 대하여 뛰어난 기능적 소유자라는 의미는 아니라 성도들을 인도해 나갈 수 있는 기량의 소유자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고운 음성의 소유자라야 한다. 왜냐하면, 거친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이 나오게 하기 때문이다.
   ② 신앙적 자격
   찬송인도자의 또다른 자격은 믿음이 부족한 청년보다는 나이가 듬직한 집사, 장로, 교역자가 적당하다. 그리고 신앙적 신뢰도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자가 믿음이 있는 척 하며 찬송을 인도한다면 성도들이 은혜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③ 복장의 문제
   찬송인도자의 또다른 자격은 단정한 복장을 입어야 하는데 가운을 입거나 정장을 해야 한다. 간혹 청바지에 가벼운 티 차림의 청년들이 찬송을 인도하는 모습을 보는데 이는 예배의 생명과 같은 경건성을 헤치는 문제가 있다.

   ⑷ 찬송인도의 방법
   예배찬송을 효과적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가사를 OHP나 비디오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때 찬송은 몇 개의 찬송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반면에 모르는 찬송은 금하고 뜨거우면서도 느리지 않도록 찬송을 인도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록(Rock)음악 형태의 악기나 연주법은 금해야 한다. 찬송인도자는 필요시 은혜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또 박수치는 찬송과 박수치지 않는 찬송을 섞어서 하는 것이 좋다. 황원찬 목사는 회중 찬송의 역기능적인 요소에 대하여 남용(Misuse), 의미없이 부르는 찬송(Meaningiessness)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이 예배찬송 인도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역기능적(逆機能的)인 요소로 작용하게 됨을 방지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방치하게 된다면, 예배는 성공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⑸ 뜨겁게 인도
   "1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1∼6)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이자 할렐루야 시집(146∼150편)의 결론이다. 그리고 본문은 다윗이 마지막 일생을 장식하면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전심전력으로 찬양해야 함을 신앙적 고백으로 담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비록 짧은 여섯 구절의 말씀이지만 찬송에 대하여 깊은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 담겨진 다윗의 고백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① 찬송의 장소(場所)
   제일 우선적으로 다윗은 "성소와 궁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소는 지상에 계시는 하나님을, 궁창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찬송의 장소는 땅과 하늘 가운데 있는 모든 곳에서 찬양해야 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성도들의 찬양도 장소를 불문하고 드려져야 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② 찬송해야 할 이유
   장소를 불문하고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며 바다보다도 넓고 하늘보다도 높은 넓으신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찬양은 바로 신앙적 고백이요 어거스틴이 주장한 것처럼 가사와 곡(曲)으로 드리는 이중적(二重的)인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찬송은 뜨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찬송에 성도의 신앙적 고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③ 찬양의 방법
   다윗은 말하기를 찬양의 방법에 대하여 모든 악기를 동원함은 물론 춤을 추어 찬양하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올 때 옷이 벗겨지는 것을 모르고 춤추며 찬양드렸던 것을 회상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춤"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말씀의 은혜로 말미암아 넘치는 감사와 함께 나오는 율동과 세속적인 춤이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춤은 배척받아야 할 것이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함께 나오는 율동은 허용됨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대예배를 제외한 모든 예배에서 악기를 동원하며 율동으로 찬양드리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④ 찬송의 대상
   마지막으로 다윗은 찬송의 대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호흡이 있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증거하는 다윗의 신앙적 고백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예배찬송 인도자는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와 부르심에 대하여 진솔한 심정으로 감사드리는 찬송이 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예배에서 찬송인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⑹ 박수치며 인도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본문은 왕(王)되신 하나님을 찬양한 고라 자손의 시(詩)인데,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을 향하여 개선 장군이 돌아올 때 온 국민이 손바닥을 치며 환호하듯 찬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인도자는 주일 대예배를 제외한 모든 찬송에서 박수치며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은혜 넘치는 찬송에는 즐거운 마음이 동반되므로 박수치며 찬송을 인도할 때 거룩한 찬송의 분위기가 금대접에 담겨 하늘 보좌 앞으로 올리워 갈 것이다.

   ⑺ 선정된 예배 찬양곡에 대한 결재
   찬송인도자는 예배찬송에 필요한 찬양곡을 사전에 선정하여 당회장에게 결재받도록 하는 것이 좋다. 목양교회는 한 주간의 찬송인도에 필요한 찬양곡을 선정하여 지도목사가 결재하도록 하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97년 8월 3째           


   이상의 사실들을 기억하여 예배찬송 인도자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의 결정은 예배인도를 맡아야 할 당회장의 책임에 있다. 그러므로 목회의 성공은 바로 예배라는 사실이 이와 같이 사소한 일에도 미치게 됨을 알아야 한다.

 

 

 

 

 

  6. 고정(固定) 찬송

   예배찬송을 선정할 때 일정한 찬송가를 고정적(固定的)으로 선정하여 부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예배 때마다 각기 다른 찬송을 선정하여 부르는 것이 좋은가? 본 저자는 동일한 예배에서는 고정적인 찬송이 효과적이라 생각하므로 고정 찬송을 선호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⑴ 고정(固定) 찬송의 정의
   고정(固定) 찬송이란, 예배시간마다 정해진 순서에서 동일한 찬송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본 저자가 고정찬송을 선호하는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케 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은혜롭고도 뜨겁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정적(固定的)인 찬송은 예배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믿음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친근한 분위기를 조성해 줄 필요가 있으므로 권장되어야 할 방법이다.

   ⑵ 교회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 가능
   고정적(固定的) 찬송이 효과적일지라도 기계적인 활용이 아닌 교회마다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찬송은 바로 예배에 활력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찬송의 선정은 예배를 중심으로 선정되어야 한다. 참고적으로 목양교회에서 활용하고 있는 고정적(固定的)인 찬송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⑶ 고정(固定) 찬송을 활용할 때 유의할 점
   고정 찬송은 개교회의 특성에 맞춰 정할 수 있다. 그러나 몇 개월 또는 몇 년씩 사용하다 바꾸는 것이 좋다. 계속적으로 고정적인 찬송만 활용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무감동적인 찬송을 드리게 하는 문제점을 낳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황원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부정적인 면은 눈에 잘 띄이지 않기 때문에 간과될 위험성이 있다. 경험이 많은 성도들은 마음이 딴 데 가 있어도 입으로는 찬송가를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찬송에 너무 익숙해져서 소홀히 넘어 가버리게 되는 경우이다. 감동이 없어지는 이유는 너무 익숙해진  찬송 때문에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배드리는 데 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만일 살아 계신 예수님과 깊이 사귀지 못한다면, 생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주는 복음과 관계 없다면 찬송이 줄 수 있는 생명력을 많이 기대할 수는 없다. 신약 성경의 찬송가는 믿는 자의 능력있는 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음악을 바꾸지 않고 매일 부르는 것으로만 계속해서 부르게 되면 예배까지 망치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나 교회 음악인이 이렇게 역기능적인 방법으로 찬송을 습관적으로 부르게 한다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경험에서 나오는 음악을 능력있고 생생하게 해줄 가능성이 줄어들거나 없어질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기억하여 목회자는 고정적(固定的)인 찬송이 주는 폐단을 고려하여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경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흐르는 물은 썩지 않으나 고인 물은 썩기 때문이다.

 

 

 

 

 


  7. 각 예배의 찬송 사용법

   예배와 찬송의 관계에서 찬송은 예배에 활력을 불어 넣는 세 가지 요소 중의 하나라면, 예배는 찬송으로 넘치는 은혜를 더욱더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귀중한 예배의 찬송 배열에 대한 실례를 목양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⑴ 주일 대예배


   ① 예배전 찬송(다같이)
   예배 시작 15분 전부터 약 12분 정도 다함께 찬송을 드림
   ② 예배전 찬송 묵상(다같이)
   예배 시작 3분 전에 오르간 소리에 맞춰 모두 묵상기도함.

   ③ 찬양경배(다같이) = 고정
   예배의 부름에 다같이 일어나서 두 손을 들고 찬양을 드린다.
   1절 :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2절 :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④ 예배 부름 송(찬양대)
   다같이 고개 숙여 예배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세를 취하고 찬양대의 찬양이 드려짐

   ⑤ 통성기도 후 찬송(다같이) = 고정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하여 이처럼 간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죄인 부르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찬송하게 하소서
                      아버지 아버지 은혜 베푸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광 받아 주옵소서"

   ⑥ 예배찬송(다같이) = 매주일 다름

   ⑦ 헌금찬송 1(독창자와 성도)
   매주일 찬송이 다르며 간주 후 3절은 모든 성도와 함께 드림

   ⑧ 헌금찬송 2(다같이) = 고정
   다같이 일어서서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하늘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348장 4절)

   ⑨ 헌금찬송 3(찬양대)
   드려진 헌금에 대한 축복기도 후 찬양대 찬송.
   송영으로 짧은 찬양으로 함.

   ⑩ 교제찬송(다같이) = 고정
   모두 함께 "오직 예수"로 인사 후 고정된 찬송을 드림.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525장 1절)

   ⑪ 찬양대 찬송(찬양대) = 가장 수준 높은 찬송임
   성도들은 좌석에서 일어나 찬양대를 향하여 찬양이 끝날 때까지 서있음.

   ⑫ 설교후 찬송(다같이)
   설교 후 설교 내용에 맞는 찬송을 드림

   ⑬ 축도찬송(찬양대) = 짧은 송영


   ⑭ 예배후 찬송(찬양대)
   찬양대의 찬양이나 오르간, 피아노 연주 혹은 테이프를 통해서 드림.

   ⑵ 주일 찬양예배와 찬송 배열

   주일 찬양예배는 대예배의 형태를 탈피하여 차별화를 두는 것이 좋다.

   ① 예배 부름 찬송(찬양대)
   찬양대와 오르간 또는 첫 송영의 의미임.

   ② 찬양과 경배(다같이)
   20분 동안 찬양을 드림.
   고정 1 : "찬양하라"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고정 2 : 마지막 찬송
            "하나님의 나팔소리"(168장)

   ③ 회개찬송(다같이)
   20분 찬양 후 통성기도 드린 후에 드림.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장) = 고정

   ④ 특별 찬양(찬양대)
   예배드리는 기관에서 담당.
   1,2절은 기관 찬양대의 찬양으로 3, 4절은 전교인들이 함께 드림.

   ⑤ 연결찬양 = (다같이)
   설교 후 30분 통성기도 시간에 사용
   기도 후에 "오직 예수"

   ⑥ 축도 후 찬송(다같이)
   다같이 일어서서 "가서 제자삼으라"(고정)를 드림

   수요예배와 금요예배도 주일 찬양예배와 골격은 같으나 다른 점이라면, 설교 후 기도로 인도하고 "할 수 있다 하신 이는"이라는 찬송을 드리며, 금요예배는 특별기도회 순서가 있다. 이러한 예배찬송의 인도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
   ⑶ 새벽예배와 찬송 배열


   ① 오르간 연주(반주자)
   예배 10분 전에 반주자가 드림(오르간이나 피아노 반주).

   ② 예배의 부름(반주자)
   오르간으로 드림.

   ③ 통성기도 후 찬송(다같이) = 고정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나는 자유해
          충성하리 하나님께 충성하리 하나님께 충성하리 하나님께 나는 자유해
          마라나다 주 오신다 마라나다 주 오신다 마라나다 주 오신다 나는 자유해"

   ④ 찬양 = 각 선교회 찬양대
 
   ⑤ 축도 후 오르간 찬양(반주자)
   축도 후 모두 개인 기도시간 시작 때 약 5분 정도 오르간으로 연주함.
   이시간의 반주는 힘있는 기도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함.

 

 

 


Ⅶ. 주의해야 할 예배

 

 


                          1. 율법적인 예배
                          2. 카톨릭 예배
                          3.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
                          4. 토착화 예배
                          5. 종교다원주의 예배
6.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
                          7. 신비주의 예배

 

 


【읽을 말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羊)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1. 율법적인 예배

   ⑴ 율법적인 예배의 정의
   율법적인 예배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구약의 율법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므로 예배로 인한 참된 기쁨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예배는 주의해야 할 예배관이다.

   ⑵ 율법적인 예배의 특징
   "9또 가라사대 너희가 유전(遺傳)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有益)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許)하지 아니하여 13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막 7:9∼13)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예배를 책망하시기를 "사람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는도다"라고 하셨다. 즉 그들은 당대 자칭 거룩의 대명사격인 존재로 자처하였던 바리새인, 서기관의 전한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적인 예배의 특징은 현대에 이르러 보수(保守)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전통을 유전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예배의 참된 기쁨을 제한시키고 있다.

   ⑶ 율법적인 예배의 문제점
   자칭(自稱)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지킨다면서도 사람의 유전을 좇아 예배를 드리는 율법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율법적인 예배가 지닌 대표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① 외식주의 예배로 흐르게 된다.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外飾)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마 23:33)라는 끔찍한 책망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의 믿음은 말씀을 중심으로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의 유전을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믿음을 이어받아 율법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예배의 중심인 말씀을 떠나 형식적, 외식적인 예배로 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의 핵심인 말씀 중심을 떠난 율법적인 예배는 문제가 있다. 주님도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개념을 책망하실 때 "너희가 박하(薄荷)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하셨던 것처럼, 율법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와 같은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② 기도를 제한한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1∼13)

   주님은 자기의 의(義)를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가슴을 찢으며 통곡으로 회개드린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드시며,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포(눅 18:14)하셨다.
   이처럼 율법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바리새인식의 기도를 선호하여 통성으로 회개하는 기도를 배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의 참 의미는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 아뢰이는 것"(삼상 1:15)임을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분"(마 12:20)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칭 의롭다며 외식적인 기도를 드린 바리새인의 신앙적 자세를 본받아 예배에서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 아뢰는 통성기도 등을 제한시키는 율법적인 예배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말씀이 없는 율법적인 예배는 회개한 심령이 되지 못하므로 통성기도라는 좋은 기회를 사람의 유전을 좇아 제외시키고 있다.

   ③ 찬송이 제한한다.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38∼40)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청중들은 언제나 찬송이 앞서게 된다. 나같은 죄인을 부르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전능하신 손길로 보호해 주시는 넘치는 은혜로 인하여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영접한 기쁨을 찬송으로 드렸던 무리들의 기쁨을 바리새인들이 제한시켰듯이, 율법적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인색할 뿐이다. 박수치는 것을 제한하며, 감격에 넘치는 아름다운 율동의 찬양도 제한시키고, 은혜가 넘치는 간증적인 성격의 복음성가를 제한시킨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예배는 하나님과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간의 거룩한 대화의 장(場)인 예배를 은혜롭지 못하게 인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로 인한 즐거움과 흥미를 잃어버리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적인 예배는 배척되어야 한다.

 

 

 

 

 

 

 

 

 

 

 

  2. 카톨릭 예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사 속에서 암흑의 긴 터널기를 조성한 잘못된 무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배도하는 음녀 세력 혹은 요한계시록이 밝히고 있는 짐승으로 상징되는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종교개혁자들의 눈에 비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비성경적인 형태로 흘러 왔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카톨릭 교회의 예배가 잘못되었는가?

   ⑴ 카톨릭 예배의 순서


   ⑵ 카톨릭 예배의 특징
   카톨릭 예배의 특징은 외적인 형식과 외식을 강조했던 중세시대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드렸던 예배의 형태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세시대에 제정된 미사(Mass)라는 예배 행위를 통하여 의식 중심, 예식 중심의 예배가 성행되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 교회 미사의 특징은 말씀 중심의 예배보다는 신비의식화적인 예배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적인 분류로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로 불리우는 서방교회의 미사 의식과 동방 교회의 미사의식을 비교해 보면 그들의 특징을 알 수 있다.

 

   ⑶ 로마 카톨릭 교회 예배의 문제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형태는 외적인 의식 중심, 예식 중심의 예배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말씀 중심이 아니라 의식과 예식 중심으로 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모(某)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의 예배보다는 카톨릭 교회의 엄숙한 예배 의식에 호감을 갖는다고 할 만큼 예배형식에 치중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카톨릭 교회의 예배가 지닌 점은 무엇인가?

   ① 신비주의로 흐르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벗어난 것이므로 의식과 예식 중심을 강조하므로 예배가 신비주의로 흐르는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대화의 광장이 되어야 하는데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은 말씀 중심의 예배가 아니므로 자연히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닌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정장복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 예전이 주는 문제점들은 무엇보다도 집례하는 사제의 존재가 너무 신비스럽게 취급되었던 점과, 회중들이 예전의 내용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그리고 이런 예전의 신비성은 죽은 자의 영혼 구원에까지도 효과를 줄 수 있다는 탈선적 신앙을 불러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7성례를 비롯한 성모 마리아 및 성자들의 숭배 행위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십계명의 해석을 혼돈시키는 중대한 오류를 낳고 말았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은 그리스도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교황이 앉아 있으므로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적그리스도(짐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교황의 절대적 권위는 아직도 "신의 대리자"라는 의미로 세상 속에 한 국가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신비주의 의식의 예배로부터 맺혀진 열매인 것이다.

   ② 미신과 혼합된 성례중심주의로 흐르고 있다.
   중세시대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따르는데, 이들은 성찬식을 통하여 예배의 현장을 완전히 신비의 자리로 만드는 문제점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하여 김득룡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적인 면을 보고 만지는 성찬의 예식에서 찾고 음미하려는 일종의 감각적 호소 방식을 택함으로써 많은 미신이 생기는 결과를 초래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그 의식을 거행하는 데는 수많은 책이 필요했다. 즉 시편, 교송성가(交誦聖歌), 찬송가, 성경, 특별 기도문의 책, 행렬성가 그리고 사회에 필요한 식례집(式例集), 서품 정식서, 성무 안내서(聖務 案內書)들이었다. 미사에 이와 같은 거창하고, 복잡한 의식이 포함된 것은 성례전을 통하여 은혜가 내린다는 일종의 권위주의적인 교회관에 근거한 것이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을 망각하고 있다.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성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심은 단연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형식은 말씀 중심이 아닌 의식, 예식 중심의 예배였기 때문에 설교 중심의 예배를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루터(Luther)의 비판에 잘 나타나 있다.

   "로마 카톨릭의 예전이 다만 성경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일이 망각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지 않는 예배는 기독교 예배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말씀 중심의 예배를 떠난 그들의 예배는 많은 악폐를 유발시키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종교 통합 운동의 우두머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말씀 중심의 예배를 떠난 결과이다.
  3.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

   열린 예배란, 최근에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서 근자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고 있는 열린 예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⑴ 열린 예배의 의미와 성경적 근거
   열린 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 누구이든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식을 택한 예배 스타일을 말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열린 예배의 성경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전파하리라"(사 66:19)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나타난 것처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이방인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할 것에 근거하여 열린 예배를 통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배받을 것에 대한 시편의 증거(시 96:3, 10; 57:9)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에 주신 모든 복을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신 26:10∼11),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잠재적인 예배자로 보았다는 기록(롬 15:9∼11; 시 86:9; 65:5∼7), 이방인 고넬료를 부르시듯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예배를 명하셨다는 기록(행 10:34∼35)을 근거로 한다.
  
   ⑵ 열린 예배의 특징
   열린 예배의 특징은 짧은 드라마(Skit), 비디오 음악, 멘트,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모임의 장소는 교회형식을 탈피하여 극장형으로 탈바꿈하고, 불신자들은 관중이 되어 신자들과 함께 예배 드리고 예배 인도자들은 발표자가 되어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복장을 보면 불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하여 설교자 및 예배 인도자는 간단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예배에 임하게 된다. 따라서 열린 예배의 특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필요에 따라 예배에 많은 기능들을 첨가한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필요와 이해를 파악하고 예배에 많은 기능들을 첨가한다.
   ② 예배를 철저하게 기획한다.
   "질서대로 하라"(고전 14:10)는 사도 바울의 증거에 따라 한 번의 예배를 위해 3개월 전부터 팀이 구성되어 모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한다.

   ③ 예배 중에 환희와 축하의 요소가 많다.
   예배의 내용이 경건미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환희와 축하의 요소들을 많이 포함시키고 있다.

   ④ 음악의 선택이 자유롭고 다양하다.
   직접 작사, 작곡한 현대음악을 많이 사용하는데 참석자는 듣고 인도자만 주로 찬양한다. 그리고 찬양의 순서를 보면, 약간 느린 곳으로 시작하여 빠른 템포의 곡, 느린 곡의 순서로 이어간다. 또 7∼8인조 밴드(피아노, 키보드, 드럼, 나팔 등을 포함)를 이용하여 아주 신나게 연주한다. 그리고 가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멀티미디어를 사용한다.

   ⑤ MTV(신세대를 위한 케이블 TV)를 활용한다.
   신세대들에게 맞도록 3분 정도에 수천 개의 이미지가 들어가는 비디오를 제작한다.

   ⑥ 설교 전에 10분 정도 드라마(Skit)를 사용한다.
   그날의 설교 메시지와 관련된 내용을 10분 정도의 드라마로 제작하여 미리 보여주고 그 의문을 설교로 해소시킨다.

   ⑦ 전체적인 분위기를 기획한다.
   좋은 예배 분위기를 위하여 조명을 온화하게 하며, 음향을 듣기 편하게 신경 쓰고, 좌석은 극장식 의자로 바꾸며 실내 온도를 냉·난방 시설로 완벽히 갖춘다.

   ⑧ 예배 후의 평가가 철저하다.
   열린 예배에 맞도록 예배 후에 돌출되는 문제점 등을 파악하며 철저한 평가로 다음의 기획에 참고한다.

   ⑶ 열린 예배의 문제점
   불신자들을 개종시킨다는 명목 아래 함께 기획되어진 열린 예배의 내용은 성경적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이에 대한 본 저자의 견해는 불신자들을 개종시킨다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그러나 예배의 진행에 대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배의 대상에 문제가 있다.
   개혁주의 예배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만나는 대화의 광장으로서 그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그런데 열린 예배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관심을 두기 보다는 예배드리는 불신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인간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한 예배로 흐르는 문제가 있다.

   ② 예배자의 복장에 문제가 있다.
   열린 예배를 인도하고 진행하는 자들의 복장은 불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하여 가벼운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다. 그러나 성경은 많은 곳에서 복장 문제를 신앙과 연결시키고 있는 입는 문화를 전하고 있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의의 세마포"라는 것도 결국은 신앙과 옷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신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려는 명목으로 가벼운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진행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따라서 열린 예배의 진행자들이 입는 복장은 문제가 있다.

   ③ 형식이 파괴된다.
   열린 예배의 또다른 문제점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한다며 일반 예배의 형식을 파괴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거룩한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이들은 놓치고 있다. 더구나 성령님도 인격적이심을 놓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형식을 파괴하는 열린 예배의 진행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④ 음악의 연주 형태에 문제가 있다.
   열린 예배의 음악 형태는 불신자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므로 시끄럽고 세속적인 형태의 연주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예배의 본질을 벗어난 세속적인 모습일 뿐이다.

   ⑤ 설교가 약화된다.
   기독교의 예배는 설교가 핵심이거늘 열린 예배는 설교를 너무 짧게 하므로 문제가 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2천년 교회사 속에서 설교를 등한히 여긴 예는 없다. 그러므로 설교를 약화시키는 열린 예배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⑥ 성도에게 맞추는 예배이다.
   예배는 대상이 하나님이며, 성도는 드리는 자일 뿐이다. 그런데 열린 예배는 주위에 모여든 불신자들을 향한 것이기에 대상과 드리는 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진행되기 보다는 인기에 부합하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려는 시장 개념을 도입시켜 유행하는 예배로 전락시키고 있다.

   ⑦ 교인화를 만든다.
   열린 예배는 철저한 복음의 증거로 교인화하여 교회 성장에 예배의 본질이 있는 기존의 기독교 예배개념을 벗어나 불신자들을 무조건 교회로 유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므로 문제가 있다. 더구나 열린 예배의 무분별한 도입은 유교, 불교 등 다종교 속에 살아가는 한국의 종교적 배경과 고유의 문화적 배경을 무시하고 윌로우 크릭 교회의 열린 예배 형식을 무조건 받아들이므로 기존의 정착된 예배 형식을 파괴하고 있다.
   열린 예배의 문제점은 교회적인 시각으로도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신문 기자의 눈에도 문제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문화일보 김종호(金鐘鎬) 기자는 열린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열린 예배에서는 목사가 예복인 가운은 물론 양복을 입지 않으며 일방적인 설교도 하지 않는다. 묵도, 성경봉독, 헌금, 축도 등의 순서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참석자들은 편안한 카페나 공연장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예배는 재즈, 록 음악 등의 연주로 시작된다. 이어서 노래팀이 나와 참석자들과 함께 대중가요와 현대기독음악(CCM contemporary Chrisian Music) 등을 부른다. 춤을 출 때도 있으며 찬송가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가 조성되면 당일의 설교 주제에 맞춰 짧은 연극이 공연되기도 하고 개그를 하기도 한다. 토크 쇼를 할 때도 있다. 주제에 따라 비디오로 텔레비젼 광고나 잡지에 실린 선정적인 사진을 보여줄 때도 있다. 설교 주제는 '부모와 자녀의 갈등', '성(性)', '사랑과 나눔', '북한동포 돕기' 등 현실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이 대부분이다. 설교는 목사가 혼자 말하지 않고 목사와 참석자들의 대화형식으로 진행된다……열린 예배는 주로 젊은 층을 겨냥한 예배이지만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교회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재즈, 록 음악대신에 가벼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등 내용이 조금 다르지만 기본 틀은 마찬가지이다."


  4. 토착화 예배

   요즈음 한국 교회나 신학계에 "토착화이즘"이라는 용어들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토착화 예배"라는 이론이 등장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⑴ 토착화 예배의 정의
   토착화 예배란, 서양 교회의 유산인 오늘날의 예배 형태를 벗어나 우리 민족 고유의 형태에 맞는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예배의 국산화(國産化)"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⑵ 토착화 이론의 형태
   신앙에서 토착화 이론은 찬송가의 토착화를 비롯하여 감사절, 예배, 신학, 결혼식, 국기 의례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찬송가의 토착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는 서양 문화의 유산이므로 우리 문화에 맞는 찬송가의 가사, 곡을 선정하여 사용하자는 이론이다. 특별히 음과 리듬을 한국의 전통적인 음과 리듬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② 예배의 토착화
   토착화 예배의 형태는 우리나라에 장구치고 꽹과리치는 무속 신앙의 형태를 좇아 북 치고 장구치며 꽹과리치는 한국적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노제(路祭)가 있는데, 죽은 이의 혼을 부르기 위하여, 또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춤을 추는데, 한국식 예배도 이렇게 드리자는 것이 토착화 예배의 이론이다.

   ③ 추수감사절의 토착화
   지금 교회가 드리고 있는 11월 셋째 주일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신앙적 유산이므로 한국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한국 고유의 추수감사절로 드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이론의 배경은 신앙적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한 해의 농사 풍년을 조상 귀신의 돌보심으로 거둔 것이기에 감사드리는 추석을 하나님께 한 해의 수확을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절로 대체할 수 있는가?

   ④ 신학의 토착화
   신학의 토착화란, 각 민족 고유의 사상을 신학과 접목시켜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의 배경은 "동양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음양 오행설의 상성과 상극의 질서를 하나님의 은유 혹은 해석적인 지평으로 삼고, 기존의 신학적 내용과 사회, 문화, 정치, 윤리의 형상을 이 틀 안에서 해석하는 상생신학(Life Sharing)"에서 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토착화란, 동학 이후 나타난 상생신학(Life Sharing)의 개념을 기독교 신학에 접목시켜 요한 웨슬레의 보편 정신과 관련해서 해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에 이어 제3의 타락한 신학이다.

   ⑤ 결혼식의 토착화
   결혼식의 토착화란, 오늘날 웨딩드레스의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등장하여 치르는 예식장의 결혼식은 서양 문화의 유산이므로 우리의 전통적 양식을 따라 신부는 화관을 쓰고 신랑은 사모와 관복을 입고 혼인식을 치르자는 이론이다.
   그러나 결혼식의 토착화 이론은 유교의 복장에 무속을 가미(加味)한 혼례상을 차려 놓고 유일신을 경배해야 할 목사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강요하려는 사단의 흉계가 담겨진 것이다.

   ⑥ 예배당에 태극기를 부착하는 문제
   토착화 이론은 예배당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애국가를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시키자는 것이다. 물론 애국심을 고취시키자는 데에 아무도 거부하거나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태극기를 예배당에 걸어 놓고 애국가와 찬송가가 어우러지는 예배를 드리자는 이론은 무속사상과 기독교의 신앙을 혼합하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될 수 있는가(고후 6:14∼16)!

   ⑶ 토착화 예배의 문제점
   예배의 토착화 이론은 신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통합운동과 같은 맥락이다. 더구나 예배의 토착화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민족 고유의 잡신(雜神)과 동일하게 대하는 무서운 사단의 흉계가 담겨진 것이다.
   더구나 "오직 예수로만 구원"(행 4:12) 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가르치는 종교다원주의 예배의 토착화 이론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이들의 이론은 유일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잡신으로 전락시키려는 사단의 부하들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상 토착화 이론의 주장은 이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배경과 사상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와 성도들(행 20:28; 고전 6:20; 7:23)에게 정결한 신부의 믿음으로 단장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범 종교 통합사상과 관련된 예배의 토착화는 기독교 신앙 안에 머물 수 없다.

 

 

 

 

 

 

 

 

 

 

 

 

 


  5. 종교다원주의 예배

   종교다원주의 예배란 근래에 등장한 이론으로서 기독교가 제일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 예배란 무엇인가?

   ⑴ 종교다원주의 예배의 정의
   종교다원주의 예배란 모든 종교가 각기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그 정상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라는 정상에 이르는 것인데, 다만 방법에 있어 다양한 종교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한 길"일 뿐 그 외에 다른 종교의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기독교는 세상의 많은 종교 중 하나일 뿐 유일한 구원을 주는 생명의 종교라는 인식이 없다.

   ⑵ 종교다원주의 예배의 형태
   종교다원주의 예배란 형태는 각 종교가 한 무대에 서서 화합하며 각기 섬기는 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 각각의 종교는 다른 종교의 찬양과 설교를 통하여 서로 이해하게 되고 자기들의 종교를 다른 종교에 이해시키는 계기로 삼는다.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 예배의 형태로는 91년 세계교회협의회(WCC) 호주 총회에서 14개 종교가 함께 참석하여 한 무대에서 예배드린 예가 있으며,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여러 종교가 함께 참석하여 잠실체육관에서 미사를 드렸다.
   토착화 예배의 형태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단체가 한국에 와서 집회할 때에 드린 예가 있으며,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 호주 총회에서는 호주 전통의 음악과 전통의 무속을 예배 형태에 삽입하여 드렸다. 그리고 14개의 종교 즉 기독교를 비롯하여 힌두교, 이슬람교, 유교, 불교 등의 지도자가 함께 강단에 올라가서 한 하나님을 부르며 찬양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 예배를 인도했던 한 사람은 성령이 임재한다며 춤을 추고 죽을 영을 불러 내는 의례로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한 남자들의 영이 나오고,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한국 여자들의 영들이 나온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이 나오고, 광주에서 죽은 학생들의 영이 나오고 있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죽은 영들이 나오고, 땅과 물과 공기의 영도 나오고 있다. 해방자 예수의 영도 나오시오!"라며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⑶ 종교다원주의 예배의 문제점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6)

   종교다원주의 예배의 문제점은 매우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론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더없이 좋은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와 성도들이 우상숭배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니 얼마나 가증하게 여기시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 예배 모임의 선봉에 항상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있어 주도하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와 같은 형태는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 내지는 타락하여 배도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인 음녀(淫女)와 같은 일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모(某) 카톨릭 대학의 종교학 교수가 신학전망지의 논문 발표에서 "카톨릭과 한국 무(巫)의 해후"라는 특집에서 밝힌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기독교는 무교신앙에서 역동적이고 실제적이며 살아 있는 종교성을 배워야 하고 한국무교는 굿정신의 이상적인 모습인 공동체성(共同體性)을 채현하는 쪽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음식을 나누며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는 굿판의 모습은 카톨릭 미사 성찬전례의 딱딱하고 배타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이다. 미사는 함께 나누고 섬기는 하늘의 굿잔치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 그리스도의 구원을 찾는 종교의례로서의 미사굿이 되어야 한다……무속의 진오귀 굿에서 구송(口誦)되는 무교신화에 나오는 무당의 시조 바리데기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라는 외형상의 유사기능을 가진다. 이 땅의 종교문화를 감안할 때 '예수는 바리데기'라고 고백하는 '예수바리데기론'도 가능하지 않을까? 고풀이나 씻김굿 등을 통한 무속의 한풀이는 그리스도교의 성사(聖事)적 기능에 해당된다."

   "기독교의 중재자 예수 = 무속의 중재자인 바리데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사상은 "천주교도 기독교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카톨릭의 사상은 바로 타락하여 배도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인 음녀(淫女)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 예배의 문제는 심각한 피해를 낳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의 생명과 같은 삼위일체 되신 유일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을 파괴하는 종교다원주의 예배는 배척받아야 할 것이다.
  6.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

   지금 한국교회는 "빈야드 운동의 신드롬"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 운동을 배우기 위하여 "토론토 공항 빈야드 펠로우쉽"을 방문한 한국교회의 목회자만도 약 3,000여명에 달하고 있으며, 평신도를 합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는 어떤 것인가?

   ⑴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의 정의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의 정의는 성령이 역사하는 역동적인 예배이다. 즉 성령이 역사하심에 따라 즉각적인 순종을 통하여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의 형태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의 한 부분인 말씀도 즉각적인 영감을 따라 주시는 예언적인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 이러한 사실은 "빈야드 교회 협의회의 신조 및 신앙고백 제5장 우리의 우선순위 A. 예배" 부분에 나타난 주장으로 증명되고 있다.

   ① 우리는 우리의 전(全)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우리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서 우리 중심부에 모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과 그의 영광이 우리에게 머물기를 갈망한다.
   ② 우리는 친근하고, 역동적이고, 현대문화와 일치하고,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스타일과 함께 성령이 역사하는 예배를 추구한다.

   ⑵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의 형태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의 형태는 성령의 역사하는 역동적 예배를 주장하므로 예배의 한 부분인 말씀도 즉각적인 영감을 따라 주시는 예언의 말씀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30∼40분의 찬양에 15분 정도 설교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찬송가나 일반적인 복음성가로 찬송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작성된 찬송집도 없이 일반인들이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찬송을 스크린에 비추어 앞에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만 부르게 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거룩한 죽음의 체험", 웃는 것, 소리를 지르는 것, 몸을 떠는 것, 넘어지는 것, 비명을 지르는 것,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 씩씩거리는 것, 나귀 소리를 내는 것, 사자처럼 부르짖는 것, 암탉처럼 소리를 내는 것, 개처럼 짖는 것, 돼지 소리를 내는 것 등과 같은 웃음 예배와 동물 울음소리에 대한 경험을 일컬어 토론토 축복이라고 한다.

   ⑶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의 문제점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는 윔버 목사를 비롯한 빈야드 운동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복음주의자들로, 그리고 빈야드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 형태를 보면 몇 가지의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빈야드 운동의 예배에 나타난 찬양에 문제가 있다.
   그들의 예배에 나타난 찬양의 특징은 대부분 현대 음악의 곡조에 어울리는 것으로서 그들만의 독특한 감미로운 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예배 참석자들은 찬송을 따라 부르기 쉽지 않은 곡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점은 라틴어를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므로 예배 참석자들을 연극 구경 관람객으로 전락시켰던 중세 카톨릭 예배의 의식과 유사하다.
   그리고 빈야드 운동의 찬양에 나타난 가사는 대부분 성경구절, 성령님의 임재를 호소하고 있으나 경배, 할렐루야, 예수 찬양, 하나님께 영광과 같은 짧고 단순한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므로 상당 부분에서 강신(降神)을 호소하는 주문과 같은 무속적인 방법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반주자들의 자세는 현대감각에 맞는 옷차림(반바지 차림의 젊은 연주자나 티셔츠 청바지 차림의 연주자 등 정장을 하지 않는 편리한 복장), 현대 감각에 맞는 연주법, 대중적인 음악 연주법, 현대 감각에 맞는 창법(감미로운 선율, 현대 감각에 맞는 연주 자세), 때로는 껌을 씹어가며 연주하는 자세 등은 다분히 세속적인 연주법이므로 문제가 있다.

   ② 거룩한 죽음을 체험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거룩한 죽음이란「오순절 은사운동 사전」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성령 은사 운동 집회시 사람들이 뒤로 쓰러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것도 비성경적이다. 이에 대하여 정동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표적과 이적이란 말인가? 이것이 고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표적이란 말인가? 과연 이것이 믿지 않는 이 세상을 흔들어 놓으며, 교회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을 구해 내는 현상이란 말인가? 그런데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은 이런 우스꽝스런 축복이야말로 윔버와 그의 추종자들이 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라는 것이다……물론 병고치는 이들은 여러 가지 주장을 하지만, 증거를 대라고 하면 모두 다 도망가 버린다."

   ③ 웃음 예배와 동물 울음소리에 문제가 있다.
   빈야드 운동에 나타난 예배의 특징은 웃음을 준다는 성경의 말씀(시 126:1∼2; 욥 8:120∼21; 눅 6:21)을 근거로 예배 중 웃음과 동물의 울음 소리 같은 체험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나 이는 성경해석에 대한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웃음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은 억지이다. 만일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인간은 기계에 불과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웃음 소리는 그렇다지만 동물의 울음 소리는 무엇인가? 빈야드 운동의 예배에 나타난 문제점에 대하여 정동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① 토론토 축복 혹은 거룩한 웃음 예배는 모든 예배와 영적 훈련에 참가하는 사람이 의식과 함께 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중요한 성경의 법칙을 무시한다. 즉 모든 사람은 지(知), 정(情), 의(意)를 지니고 있는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② 성경 어디에도 소위 토론토 축복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③ 토론토 축복은 사람의 기분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④ 토론토 축복은 대규모의 최면이다.
   ⑤ 토론토 축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크리스찬들의 맹신에 대한 기준을 약화시킬 뿐이다.
   ⑥ 토론토 축복은 거룩함에 이르는 지름길을 약속한다. 그런데 이 현상 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에 관한 성경적 방법을 무시하고 있으며, 아무 의식없이 깔깔대고 웃거나 우는 것에 빠져들어감으로써 자신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진보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⑦ 토론토 축복은 복음을 흐리게 만들며 에큐메니칼 일치를 촉진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다.
   ⑧ 토론토 축복은 새 생명을 얻거나 회개하는 것을 강조하는 대신에 즐거움과 쾌락을 강조한다.
   ⑨ 토론토 축복은 남들에게 과장해 보이려는 시도와 불경스러운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⑩ 이같은 실수로 인해, 토론토 축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매우 창피한 것으로 비쳐지게 한다."

   ④ 배도하는 세력인 카톨릭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1966년 카톨릭 교회 안에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면서 빈야드 운동과 카톨릭은 커다란 교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연대감과 영적 능력을 공유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인 존 윔버의 사상은 로마 카톨릭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을 강력히 권장한다. 다음과 같은 존 윔버의 주장은 빈야드 운동의 예배에 나타난 교리가 로마 카톨릭과 관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듭난 복음 전도자라서 오순절 은사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로마의 교황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을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나는 교황으로 인해 감격하며 그가 이 목표(교황이 지난 10년 동안 이룬 복음화)를 위해 교회를 부르고 있다는 데 대해 기뻐한다."

   또 정동수 교수는 로마 카톨릭의 배도하는 사역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지난 12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인류 위에 로마 교회의 법을 강제로 적용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힛틀러의 나찌 정권을 포함한 군사력, 고문, 화형 등을 통한 압력이 사용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러던 중 1963년에 교황 23세는 세계 종교통합을 위해 '제2바티칸공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에큐메니즘을 주도해왔다. 그들이 오랫동안 갈구해 오던 인류장악을 오순절 은사운동이 촉진시키고 있으므로 교황청은 양손을 벌린채 만족스러워하며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배도하는 역사를 살펴 볼 때에 빈야드 운동과 카톨릭의 연관성 문제는 이제 명확해졌다. 빈야드 운동은 기독교 내의 한 신비주의 운동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과 카톨릭의 연합 활동을 우리는 주의깊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저자는 빈야드 운동이 종교다원주의를 주도하는 카톨릭과 연합하는 모습에서 빈야드 운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빈야드 운동을 온전한 성령의 역사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가 외형적으로 볼 때는 부분적으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혹의 영이 일으키는 현상을 성령의 현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현상을 올바르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능력을 체험한 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아야 할 것이다.

 

 

 

  7. 신비주의(神秘主義) 예배

   마지막으로 주의해야 할 예배란, 신비주의 예배이다. 문화가 발달될수록 인간은 연약해져 자꾸만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비주의 예배란 어떤 것인가?

   ⑴ 신비주의 예배의 의미
   신비주의 예배란, 예수님의 능력과 이적과 표적을 모방하여 신비주의를 가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신비주의 예배의 형태는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서도 많이 나타났던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 예배는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⑵ 신비주의 예배의 특징
   신비주의 예배란, 예수 이름을 빙자(憑藉)하여 입신환상, 직통계시, 안찰, 지나친 병고침의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추구한다. 물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근래에 일어났던 우리 주변의 사건들을 볼 때 신비주의 예배는 많은 사회적, 종교적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다.
   신비주의 예배의 특징은 바로 대부분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의 재림을 주장했던 다미 선교회의 이론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허구였음을 시간이 증거해 주지 않았던가?
   또 안찰기도로 신유역사를 일으킨다는 자들의 헛된 주장도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환자의 전신(全身)을 손바닥으로 두들겨 병을 고친다고 주장하다가 애꿎은 병자만 죽음으로 몰아 사회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⑶ 신비주의 예배의 문제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도 미혹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이적과 기사를 신문, 방송 등의 사회 소식을 통하여 많이 들어 왔다. 물론 이적과 기사와 표적은 예수 이름을 의지할 때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축복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음을 입는 역사는 주님 당시는 물론 초대교회의 사도들에게서도 나타났으며 교회사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믿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특권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제외한 무속과 기독교의 신앙을 접목하여 행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이론에 근거한 자들에 의하여 안찰로 살인범으로 몰린 사건, 직통 계시를 주장하며 성경이 금하고 있는 주님의 재림 날짜를 측정하는 일, 천국에 다녀 왔다면서 비성경적인 입신체험의 주장은 신비주의 예배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다.
   이처럼 신비주의자들의 예배관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무속적인 면과 최면적인 면이 복합되어 기독교의 이적인 것처럼 가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 예배관은 성경을 떠난 것이므로 금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헤치는 사단의 무리로 등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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