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종말론
김영봉(협성대, 신약신학)
요한네스 바이쓰(Johannes Weiss)와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가 예수를 유대적인 종말론의 배경에서
보아 온 이래, 거의 1세기 가까이 이것은 하나의 정설이 되어 왔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예수의 종말론" 혹은 "종말론자 예수"는 신약학계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예수를 종말론적인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이, 만만찮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역사적 예수를 논할 때, 그 동안에는 당연시되던 "종말론"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본 논문은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의 종말론적인 가르침이 어떠했으며, 그것을 오늘날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다. 그러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종말론"이라는 용어의 문제를 먼저 정의하고,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그 동안의 다양한 해석들을 일별해 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종말론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지에 대하여 판단해 볼 것이다.
1.
"종말론"이라는 용어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독일에서 만들어진 조직신학적 용어로서, 그리스어 ("마지막",
"끝")와 를 합성하여 만들었다. 이 용어는 어느 새 세계 거의 모든 사전에서 정의되고 있다. 웹스터 사전(Webster's II)은
"죽음과 같은 마지막 사건들에 관심 하는 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용어의 정의는 우리말 사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양주동의
국어사전을 보면, "기독교 신학에서 세기의 종말에 관한 미래를 취급한 사상"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다. 심지어 성서 사전을 보더라도 그 정의는
거의 유사하다. 앵커 바이블 딕셔너리(Anchor Bible Dictionary)를 보면, 종말론을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간단히
정의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정의에서 종말론은 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학 분야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생긴다. 조직신학을 다루는 사람들이 신학의 다양한 분야들을 분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용어로서 사용된 "종말론"이 성서에
적용되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야훼의 날" 혹은 "그 날"이나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이라는 용어가 지시하는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날"은 야훼께서 결정적인 구원의
행동을 행하시는 날이다. 초기의 구약의 예언들을 보면, 야훼의 날은 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었다. 물론, 후대로 가면서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그 경우에도 "야훼의 날"은 곧 "세상의 종말"은 아니었다. 야훼가 일으키시는 다양한 구원 행동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것은 신약성서, 특히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이 세상의 종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후에 보겠지만,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는 이 세상의 종말을 기대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을 기다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
결정적인 구원 행동은 이 세상의 종말을 포함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직신학적인 혹은 사전적인 의미로서
"예수는 종말론자였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적인 혹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예수가 종말론자였다고
규정하면, 그는 이 세상의 종말을 기대하였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행동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실의 일부를 말하고 있기는 하다.
예수는 이 세상의 종말이 꽤 임박해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가르치고 행동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기대했던 것은 "세상의 종말"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조직신학적인 용어로써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할 경우, 예수가 종말론자였다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을 믿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결정적인 방식으로 구원의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종말론자들이었다. 예수는 바로 그 결정적인 구원 행동을 선포하고 기대하였다. 우리는 꼭 이러한 의미에서만 예수를
종말론자라고 말해야 한다. 조직신학적인 의미의 종말론은 성서학에서는 오히려 재림론과 동의어로 쓰여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위험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의 차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종말론을 논하면서 혼란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 전승들을 다루면서 사고는 여전히 조직신학적으로 하다 보니, 자연히 혼란과 오류가 발생한다. 필자가 서두에서 이 용어의 문제를 다루고
넘어가는 이유는, 그 동안 책을 읽고 가르치는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혼란들을 수 없이 발견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종말론은
"마지막 일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2.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예수의 종말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조사에 앞서서, 우선 그 동안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면상, 그들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한다든지 그 입장에 대하여 세밀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각각의 입장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간략하게 비판을 하고 넘어 갈 것이다.
1) 철저히 미래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
이것은 1892년에 요한네스 바이쓰가 예수의
선포에 대한 작은 책자를 내면서부터 퍼진 입장이다. 이 입장은 1906년에 알버트 슈바이쳐가 기념비적인 예수 연구서를 냄으로써 하나의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이 책을 낼 때 두 사람은 30세 전후의 젊은 신학도였다. 이 젊은 신학도의 주장이 한 세기의 정설을 세웠다는 것은 경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철저히 미래적인 것이었다. 특히 슈바이쳐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매우 임박했다고 믿었고, 따라서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그 임박한 미래를 직면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중간기 윤리"(interim
ethics)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에 쏟아져 나왔던 예수전 연구의 한 중요한 경향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세기의
예수전 연구는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삼았으나, 연구자들 대부분은 그것을 "지상적인 도덕 세계"로 이해를 하였다. 이것은 19세기의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알버트 리츨(Albert Ritschl)의 공헌이었다. 바이쓰와 슈바이쳐의 주장은 1세기를 지배해 온 이러한 경향을 일거에
수정하면서, 그 이후의 예수 연구가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묵시적, 미래적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물론,
20세기의 예수 연구에 있어서 이들의 입장이 철저하게 고수된 것은 아니었다. 뒤에 보겠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하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유대적인 묵시적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아직도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들이 예수의 미래적 선포만을 주목한 나머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을 의미하는 전승들을 간과하였다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2)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이것은 영국의 신약학자 다드(C. H. Dodd)의 주장이었다.
다드가 책을 펴내기 시작할 초기에 그는 예수의 선포 속에 미래적인 차원과 현재적인 차원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그는
미래적인 차원을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임박한 미래에 대한 예수의 믿음을 인정하면, 슈바이쳐의 중간기 윤리 이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대부분 그 정당성을 잃어버린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사역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은 중간기 윤리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의 사역 속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을 위한 지침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펴면서 다드는 미래적인 차원으로 해석되어 온 전승들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한다.
그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것이 바로 (마 4:17//막 1:15; 눅 10:11)에 대한 해석이다. 다드는 이것이 현재 완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그는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는 모든 전승들을 이런 식으로 재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는 많은 전승들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면서 현재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만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예수가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한
것처럼 그려 놓았다. 그는 이러한 바탕에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들이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드는 "철저히 미래적인 종말론" 프로그램이 예수와 그의 교훈들을 위험 속에 몰아 넣었다고 보았으며, 그의 "실현된
종말론" 프로그램은 이러한 위기로부터 예수와 그의 교훈을 구원해 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 다드의 이론은 계속하여 지지자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미래적인 것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는 많은 예수 전승들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차원에서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3) 신화적 종말론(Mythological Eschatology)
"예수가 착각에 빠져 있던 시한부 종말론자였다"는
오해로부터 예수를 구출하려는 사람은 다드 뿐이 아니었다. 동시대의 또 다른 신약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도 그의 신학적
도구였던 실존주의 사상으로 이 구출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는 예수의 종말론이 철저히 미래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바이쓰-슈바이쳐의 이론에
동의하였다. 그는 다드의 시도를 부정직하고 회피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예수 전승을 제대로 본다면,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승 분석에 있어서 정직하려고 하였다.
그 대신 불트만은 예수의 미래적 종말론이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서 만들어진 기대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비신화화(demythologize)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예수의 이 말씀들의
비신화화를 시작하고 있다고 본다. 예수가 말한 것은 역사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말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결단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주적인 위기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예수가 사용한 신화적 틀이고, 이 신화적 틀은 개인을 현재적인 결단의 위기 속으로 몰아 넣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미래적 종말론적 선포는 구원을 향한 결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신화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현대인들은 그 신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신화적 종말론은 개인 개인의 실존적인 결단에 대한 요청이었다. 이런
점에서 불트만의 해석을 "실존론적 종말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신화화 프로그램과 실존주의적 해석을 통하여 예수를 구출하려고 했던
불트만의 의도는 그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 프로그램을 포기하거나 수정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불트만의 해석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종말론을 철저히 비역사화 하였다는
점에 있다. 예수가 기대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단순한 신화적인 틀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예수 전승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가? 예수의 전승들을 정직하게 평가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시대의 사람이라고
해서 역사적 현실과 신화를 구별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도 역시 비유도 알고 있었고, 신화도 알고 있었고, 역사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역사적 발언들을 모두 신화적 표현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의심될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 때문에 20세기 후반에 많은 사람들이
불트만의 이 해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4) 상징적 종말론(Symbolic Eschatology)
이것은 케어드(G. B. Caird)와 노만 페린(Norman
Perrin)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이 주장들은 다드와 불트만의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면서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두 사람의 주장은 약간 다르다. 케어드는 예수가 사용한 종말론적인 용어들이 실제로는 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위기를 상징하는 비유적 언어(metaphor)였다고 주장을 하였다. 케어드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도
역사적인 중대한 사건을 예언하기 위해서 종말론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전통 위에 서 있다. 페린은 필립
윌라이트(Philip Wheelwright)와 뽈 리꾀르(Paul Ricoeur)의 도움을 받아 "상징"(symbol)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윌라이트는 상징을 tensive symbol과 steno symbol로 구분하는데, 페린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tensive
symbol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Tensive symbol은 어느 하나의 사실이나 사건을 직접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하나의
신화(myth)를 생각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로써 이 세상의 종말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화적 상상을 청중들에게 불러일으키려고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케어드와 페린의 해석은 그 방법과 전제에 있어서
다르기는 하지만, 상징적인 용어라는 점에 착안했다는 점에서 같이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일어날 어떤 종말론적인 사건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은 단순히 도구로써 채택된 용어일 뿐이다. 그
내용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예수의 종말론을 비역사화 시키며, 이런 점에서 이들은 불트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이들의 해석에는 일리가 있다. 예수의 종말론적 용어들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징과 비유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종말론의 실체를 증발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상징과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가 역사적으로 발생하는 구체적인 종말론적인 사건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동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
바이쓰와 슈바이쳐의 "철저히 미래적인
종말론"과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이 나온 이후, 많은 학자들이 두 입장 모두에 동의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학자가
큄멜(W. G. Kuemmel)이었다. 그는 1945년에 발표한 Verheissung und Erfuellung을 통하여 이러한 입장의 대표자가
되었다. 큄멜은 이 책에서 우선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미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분석한다(1장). 이어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차원을
의미하는 말씀과 행적을 분석한다. 결과는, 그 누구도 예수 전승에서 이 두 차원 중 하나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자신의 선포 속에
이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차원과 미래적인 차원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동시 다발적으로 주장되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가 그랬고,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
그랬다. 이 입장은 현재에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은 예수의 전승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음을 확신하였고, 그 사역이 인자의 재림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예수 전승 속에 나타나는 두 가지의 부인할 수 없는 전승층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의 상호 배타적으로 보이는 전승층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신학적 해석의 문제가 남아 있다.
6) 무종말론(Non-eschatological Jesus)
이것은 가장 최근의 움직임이다. "종말론자로서의 예수"라는
정설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 있는 사람은 마커스 보그(Marcus Borg)이다. 그는 예수가 종말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세밀하게 다룬 후, 다른 논문들 속에서도 계속하여 이 정설에 대한 공격을 해 오고 있다. 그의 주장은 세 가지이다. 첫째,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예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관심 했던 인물이다. 둘째, 복음서 전승을 분석해 보면, 종말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는 말씀이나 행동이 없다. 셋째, 비종말론자로서의 예수 그림이 예수에 대한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을 해 준다. 이 세 가지의 주장에 근거하여,
보그는 예수가 종말론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주장은 각각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보그처럼 집요하지는
않지만, 또 다른 입장에서 예수를 비종말론자로 보려는 시도를 최근에 활발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버튼 맥(Burton Mack)과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이다. 이 두 사람은 예수를 견유학파 설교자와 같은 지혜 교사로 그리면서, 종말론의 색채를 깔끔히
지워 버리려고 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출발점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둘은 가장 믿을 만한 문서가 Q문서이며,
도마복음서 안에도 믿을 만한 말씀 전승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기초로 하여 예수를 그린다. 그 결과, 견유학파 설교자 같은 모습의 예수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정경 복음서에 포함되어 있는 전승들을 공정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두 사람은 바이쓰와 슈바이쳐가 수정하려 했던 19세기의 예수전과 유사한 모습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들이 그린 예수
그림은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렸던 것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7) 결론
이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살펴보았다. 여섯 가지로 나뉜 위의 해석들 가운데 네
가지는 예수의 전승 안에 존재하는 종말론의 시제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의 종말론이 철저히 미래적이라는 입장(1), 철저히 현재적이라는
입장(2), 미래적 기대와 현재적 믿음이 공존한다는 입장(5) 그리고 예수는 전혀 종말론을 믿지 않았다는 입장(6) 등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예수가 전혀 종말론자가 아니었다는 입장의 근거가 가장 취약하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정경 복음서의 수많은 전승들을 초대 교회에서 만든
것이라고 치부해야만 한다. 어떻게 종말론자였던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종말론적이었던 교회의 스승인 예수가 철저히 비종말론적일 수가 있을까? 따라서
세 가지의 해석만이 남는데, 이 중에서 예수 전승을 가장 공정하게 평가하고 있는 입장은 5)의 입장이다.
나머지의 두 입장(3과
4)은 예수의 종말론의 시제의 문제이기보다는 종말론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불트만은 예수의 종말론을 비신화화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케어드와
페린은 예수의 종말론적 용어들이 실제로는 상징 혹은 비유라고 주장하였다. 불트만의 입장은 종말론을 철저히 비역사화 시키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역사적 현실로 나타나는 사건이었다. 반면, 예수의 종말론적인 용어들을 상징 혹은 비유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제한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용어들을 모두 상징 혹은 비유로 해석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실체를 증발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예수가 상징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3. 예수 전승에 대한 평가
위에서 우리는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여섯 종류의 다양한 해석 경향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것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이 예수의 전승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라고 판단하였다. 이제 이 부분에서는 이 평가가 얼마나 옳은가를 예수의
전승들을 통해서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역사적 탐구는 언제나, 가능성 있는 가설을 설정하고, 주어진 증거에
입각하여 그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이 가장 적합한 가설이라고 전제하고, 그 가설이
얼마나 입증 가능한 것인지를 아래에서 다루도록 할 것이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말씀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 ) 혹은 "하늘 나라"(
)에서 에 해당하는 아람어는 malkuta이다. 구스타프 달만(Gustaf Dalman)은 이 용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이것은
"영역"을 가리키기보다는 "통치"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 물론, 다른 개념과 합하여 영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통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 나라(이 둘은 동의어이다)는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말은 마치 혜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듯 어떤 공간이 접근해 온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세상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결정적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혀 새로운 이 세상의 삶을 의미한다.
그것이 결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때가 있겠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일차적으로 가리킨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통치 행위는 이 세상의 파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사건들을 수반한다.
예수는 이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믿었기 때문에 종말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이 시작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종말론자였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믿었는가? 복음서의
전승들 중 예수가 실제로 말하거나 행했을 가능성이 큰 몇 가지 증거들을 기초로 하여 우리의 가설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1)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차원
우선, 예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임재를 가리키는 것들이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공간적인 개념이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를 가지는 전승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역사성이 높은 것들에 국한하여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귀신 축출에 관한 예수의
해석(마 12:28//눅 11:20)이다. 이 말씀은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작전상) 후퇴시킴으로써, 예수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비난에 대한 응답으로써 준 말씀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다시 말하면, 귀신을 내쫓는 행위는 바알세불의 힘을 빌은 협잡이 아니라, 오히려 바알세불을 공격하는 것이며, 바알세불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의 의미에 대하여 논란이 있어 왔으나, 과거형으로서의 이 용어는 이미 효력을 발휘하는 하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표준새번역의 "왔다"는 번역은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의 역사성은 대단히 높다. 제임스 던(J. D. G. Dunn)은 다음과 같이 단언함으로써 이 말씀의 역사성을 지지해 준다:
사실, 마 12:28//눅 11:20에 보존되어 있는 Q 말씀이 예수의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 그 사람됨이나 메시지를 복구해 낼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버리 는 것이 나을 것이다.
둘째,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준 예수의 답변(마 11:5-6//눅 7:22-23)도 역시 중요하다. 옥중에 갇힌 세례 요한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어 왔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고,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대답을 한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학자들은 이 말씀의 진정성을, 특히 상황에 대한 회의에 바탕을 두고 의심을 한다. 즉, 옥중에 갇혀 있는 사람이 바깥 세계에 대하여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추측에 해당한다. 특히 이 말씀에 대하여 데이비스(W. D.
Davies)와 앨리슨(Dale Allison)은 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주장은, 이것이
초대 교회의 창작이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이유이다. 초대 교회는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의 메시야적 정체를 증언하게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교회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초대 교회가 창작을 했더라면, 세례 요한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장면까지 만들어졌어야 납득이 간다. 현재의 상태대로 라면, 초대 교회의 창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대답으로써 무엇을 의도했는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들은 구약의 예언들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즉시로 이사야의 몇 가지 예언들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 날"을 예언하면서, 온갖 비정상적인 상황이 원래의 온전한 상황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바 있다(사 29:18-19; 35:5-10; 61:1-2). 그러므로 예수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
답변을 해 주기보다는, 이사야의 예언들을 언급함으로써 간접적인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우회적인 답변이 말하는 참뜻은, "내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구약의 예언들을 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자신의 치유 사역 속에서도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 말씀도 역시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자신의 사역 속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믿고
있었다는, 부인하기 어려운 증거 중 하나이다.
셋째, 제자들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마 13:16-17//눅 10:23-24)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의 역사성은 불트만까지도 인정하고 있다. 부르스 췰튼(Bruce Chilton)은 이 말씀의
독창성(originality)과 후대의 발전 과정을 볼 때, 예수가 실제로 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언을 한다.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는 이렇게
축복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적 대망 속에서 기다려 왔던 그 현실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제자들이 듣고 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선포와 그 현실이다. 맨슨(T. W. Manson)은 이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 말씀의 요점은 모든 전대(前代)의 사람들에게 미래였던 그것이 지금은 현재의 실체라는 것 이다. 과거의 위인들에게 단지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었던 것이 지금은 경험의 대상이 되었다 는 말이다.
이것은 실로 이 말씀에 대한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씀도 역시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인 실체로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바리새파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눅 17:20-2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계산해 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이 말씀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가 없다. 문제는 이 말씀 특히 21절 하반절("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전치사 가 "안에"라고 번역되기보다는 "가운데"라고 번역되는 것이 옳다는 사실에는 여러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표준새번역의 "너희 가운데"라는 번역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말하는가, 아니면
미래를 말하는가에 있다. 예레미야스는 이 어구가 누가복음 17장 24절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갑자기 너희 가운데
임할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갑자기"라는 말을 넣어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준새번역의 번역처럼,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것인 줄만 알고, 그 나라가
도래할 시간만을 계산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미래를 보지 말고 지금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목하라는 뜻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다섯째, 복음서들이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는 예수의 식탁 교제도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었다는 예수의 믿음을 잘 보여준다.
예수의 식탁 교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곤 했다. 가장 최근의 예를 든다면, 데니스 스미스(Dennis E.
Smith)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식탁의 예수는 예수를 이상화시킨 결과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식탁 교제는 복음서
전승 속에 가장 뿌리 깊이 그리고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전승 중 하나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예수가 실제로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의 식탁 교제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식탁 교제와는 달리,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들을 초대하였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바리새인들이 "죄인들"로 치부했던 사람들까지 포함하였다. 이것은 식탁 교제의 관습에 익숙해 있던
동시대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거북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질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이 다른 종교인들에게 자극적인 줄을 뻔히 알면서, 예수는 의도적으로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행하였다. 이 식탁
교제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에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식탁 교제에는 기쁨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의 식탁 교제에서
경험되었던 기쁨은 독특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식탁 교제를 통하여 예수가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식탁 교제의 이상한 기쁨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준 예수의 답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마 9:15//막 2:19//눅 5:34)
이 대답에서 예수는 자신의 식탁 교제를 잔치로 비유를 하고 있다. 이 잔치는 메시야 시대에 나누게 될 메시야적 잔치를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예수의 식탁 교제는 단순한 사회적 관습(social code)이 아니었고, 다가올 메시야적 잔치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식탁 교제는 그것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고, 하나님 나라의 체험이었다. 이에 대하여 데이빗 티이드(David Tiede)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의 식탁 친교는 하나의 예언적 행동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요한이 선포했던 준비의 시대, 금욕적
자기 부정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축제의 때가 시작되었다.
여섯째, 예수의 행동과 말씀을 세례 요한의 행동과 말씀에 관계시켜 보면, 하나님의 현재적인 구원 행동에 대한 예수의 신념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한 동안 세례자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후대의 기독론의
경향은 예수를 할 수 있으면 높이려 했다. 그러한 전승 공동체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어 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는 세례 요한 공동체가 예수 공동체와 함께 경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초대 교회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의 역사적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신의 독자적인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는 세례 요한의 임박한 종말론에
동의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고 함께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체포를 당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독자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독자적인 사역을 시작하면서, 세례를 더 이상 행하지 않았고, "광야"를 떠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 왔다. 그는 더 이상
세례 요한이 행하던 금욕적인 삶을 살지 않았고,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더 이상
세례 요한과 같은 심판이 아니었고, 구원과 은혜였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예수는 세례를 버렸으며, 광야를 떠났으며, 금욕적
삶을 버렸으며, 심판의 주제를 구원과 은혜의 주제로 바꾸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의 종말론적인 시각의 전환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믿고 세례 요한을 따랐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잡혀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는 준비의 시대가 아니라
실현의 시대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준비의 성례전이었던 세례를 버렸고, 준비의 장소인 광야를 떠났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이 지금 그의
사역을 통해서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금욕적인 삶도 버렸다. 그 모든 변화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자신을 통하여 시작되고
있다는 신념이 만들어 내었다. 따라서 세례 요한과의 비교는 예수의 종말론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위에서,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개시되었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여섯 가지의 역사성 높은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그 이외에도 열거하자면 수 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된 여섯 가지는 그 역사성이나 의미에서 가장 확실한 것에 속한다. 이것만을
보더라도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믿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드의
발견은 옳았다. 그는 철저히 미래적인 종말론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예수의 전승 속에 이러한 현재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한 사람이었다. 다만, 아래에서 살펴 볼 미래적인 차원들을 무시했다는 약점을, 그는 안고 있다.
2)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차원
위에서 본 것처럼, 예수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행동이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또 많은 전승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의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들을 말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몇 가지의 중요한 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의
설교를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4:17//막 1:15)라고 요약하고 있다. 누가복음 저자는 제자들에 대한 선교 명령 속에
이 어구를 소개하고 있다(눅 10:9).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러한 선포를 명령했다면, 그 자신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세 복음서 저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설교의 중심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였음을 한 목소리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예수의 실제 설교 내용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비록 전승 공동체나 복음서 저자의 요약이기는 했겠지만, 이
어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믿음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이 어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까왔다"를 의미하는
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드는 이것을 완료형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큄멜은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은 매우 임박한 의미에서의 미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자들의 의견은 큄멜의 해석을 지지하는 편으로 기울어
있다. 따라서 표준새번역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번역함으로써,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주기도문의 한 어구도 예수의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원을 하고 있다: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마 6:10//눅
11:2). 여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여전히 미래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어구가 예수에게서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형태의 주기도문은 상당한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어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함께
나와 있다. 따라서 이 어구는 예수가 직접 말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한 형태로 임하게
되기를 기원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을 했다는 사실은, 예수 자신이, 비록 현재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믿고 있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미래의 차원이 남아 있음을 믿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주기도문의 또 다른 어구도 역시
이러한 미래적 차원을 뒷받침해 주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눅 11:3)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논쟁의 핵심이 되어 온 용어가 바로 이다. 이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논의가 있었지만, 예레미아스는 교부
제롬(Jorome)의 증언을 바탕으로하여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해 주었다. 제롬에 의하면, 아람어로 쓰여 있던 "나사렛 사람의
복음서"(the Gospel of the Nazarezes)를 보면, 가 아람어 "마하르"(mahar)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스는 비록 "나사렛 사람의 복음서"가 정경 복음서보다 후대의 것이기는 하지만, "마하르"는 원래 아람어를 사용했던 예수가 실제로 한
말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람어 "마하르"는 "내일을 위한"(for tomorrow)의 뜻으로서, "필요한 양식"은 원래 "내일을 위한
양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기원은 내일 먹을 양식을 미리 달라는 뜻인가?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초기 유대교에서
"마하르"는 "다음 날"을 뜻할 뿐만 아니라 "큰 내일"(the great Tomorrow) 즉 마지막 완성의 날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기원은 마지막 날에 있을 메시야 잔치를 기대하는 기원이다. 그 메시야 잔치에서 먹을 음식을 오늘 먹게 해 달라는 것은 종말론적인 완성의 날이
속히 오게 해 달라는 기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주기도문은 그것 자체로서 "종말론적인 기도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적인 완성이 속히 임하게 되기를 비는 기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현재적인 차원의 기원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조망은 미래적인
것이다.
셋째, 예수의 임박한 종말 기대를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전승은 다음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 16:28//막 9:1//눅 9:27).
불트만은 이것이 재림의 지연으로 인하여 위로의 말이 필요했던 교회가 만들어 낸 창작품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이 말씀은 초대 교회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미 복음서가 쓰여질 시기에 이르면, 예수의 동시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세 복음서 저자가 똑 같이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이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말씀이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현대 학자들이 이 말씀을 초대 교회의 창작으로 제켜 두려는 이유는, 이 말씀을 예수의
육성으로 간주할 때, 예수가 시간 계산에 실수를 했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역사적 판단이
달라지면 안 된다. 역사가의 작업의 우선 순위는 먼저 실제로 있었던 일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다음의 과제이다. 이 말씀은
분명히 예수의 육성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가 지칭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정직한 역사가라면, 예수가
여기에서 파루시아( )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현되지 않은
예언"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제안들을 한다. 뒤이어 일어날 변화산 체험에 대한 언급이라느니, 부활에 대한
언급이라느니, 심지어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예수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정직하게 본다면, 이것은 분명히 파루시아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동시대인들 중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목격할 사람도 있을 만큼, 파루시아가 임박해 있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넷째, 바로 위에서 다룬 것보다 더 자극적인
전승이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전승인데,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한 말씀이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다니지 못해서 인자가 올 것이다(마 10:23).
이 말씀에 대해서도 마태가 창작을 했다거나 전승 공동체가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도 역시 바로 위에서 본 것처럼
"실현되지 않은 예언"이라는 문제 때문에 의도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시도로밖에는 볼 수 없다. 데이비스와 앨리슨은 이 말씀이 예수가 실제로 말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여러 가지의 증거들을 열거하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판단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 특히, 교회가 이 말씀을 창작해 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해 주는 사실이 있다. 이 말씀이 주는 뉘앙스에 의하면, 마치 "인자"가 말하고 있는 예수와 다른 사람인 것같은 느낌을
준다. 인자가 예수 자신이 아니라 제 3의 인물인 것같은 느낌을 주는 "인자 말씀"은 이것 하나 뿐이다. 그렇다면, 인자를 예수 자신으로
인식했던 초대 교회가 이러한 이상한 말씀을 지어냈을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예수가 직접 한 말씀이라면, 그는 파루시아가 매우 임박해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물론,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다니는 것"이 그렇게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버트 슈바이쳐는, 예수가 이 말을 하면서, 제자들이 돌아오기 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온 동네들을 다 다니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히 매우 임박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다섯째,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가 한 말씀도 역시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마 26:64//막 14:62//눅 22:69).
위에서 인용된 것은 마태복음의 구절이다. 복음서마다 약간씩 뉘앙스를 달리 한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통치를 강조하려 했던
누가복음에서는 현저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그러나 이제부터 인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서두에 나타나는 승천의 주제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누가복음 저자가 손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원형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도 본 것처럼, 예수가 파루시아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여, 파루시아가 더욱 임박했다는 기대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자신의 사역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파루시아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루시아가 매우 임박했다고 믿었다. 미래적인 종말론적인 말씀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더 많이 있다. 여기에서는 다만 파루시아에 대하여
임박하게 기대하고 있는 몇 가지 말씀들만을 택하여 소개하였을 뿐이다.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들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거의 전적으로 통치 개념이었다. 하지만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들 안에서는 영역의 개념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실현되고 있는 것은 믿는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이지만, 파루시아에서 이루어질 것은 모든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의 완전한 통치의 실현이다. 이것은 통치만이 아니라 영역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3) 결론
위에서 우리는 예수의 전승 속에 있는 두 가지의 경향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전승을 살피기에 앞서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이 예수의 전승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라는 가설을 설정하였다. 바로 위에서 행한 우리의 분석은 우리가 설정한
가설이 가장 예수 전승에 적절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을 시켜 주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이 자신의 사역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 구원 행동은 머지 않아 완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두 경향은 상호
모순적인 느낌을 준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면서 또한 미래적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느낌 때문에 학자들은 어느 한 측면만을 역사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다른 차원을 초대 교회의 창작으로 돌리는 실수를 범해 왔던 것이다. 이 두 차원의 공존을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이 논문의
서두에서 언급한 "종말론" 혹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조직신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종말이 시작되었으면 그것으로
끝이요, 아직 오지 않았으면 철저히 미래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으로 생각을 하다 보니, 현재적인 실현에
대하여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정의한 대로, "종말"과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두 가지의 차원은 전혀 무리 없이 공존할 수 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야훼의 날"에 예정해 두셨던 구원 행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구원 행동은 (예수의 믿음에 의하면) 짧은 시간 안에 인자의 강림을 통하여 완성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은 예수가 말한 "성장의 비유들"(parables of growth) 안에서 잘 통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겨자씨처럼 이미 예수의 사역 속에서 숨겨져 있다. 그것은 또한 누룩처럼 반죽 속에 숨겨져 있다. 심겨진 씨앗이나 넣어진
누룩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실현이라고 볼 수 없다. 아직 미래가 남아 있다. 심겨진
씨앗이 완전히 자라 충만한 열매를 맺는 날 그리고 반죽 속의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씨앗이 심겨지고 누룩이 넣어진 것이
예수의 지상 사역이라면, 그 씨앗이 완전히 자라고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날은 그의 파루시아( )이다. 파루시아 이후의
실현은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실현이 될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믿음을 통한 개인적, 영적 실현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종말론적 변화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며, 그럼으로써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 쿨만의 표현을 빈다면, 예수의 지상 사역은 D-day이고, 그의
파루시아는 V-day이다. 예수는 이 파루시아를 통한 완전한 승리를 매우 임박했다고 믿었다.
4.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해석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인 차원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 실현된 통치가 완성될 날에 대하여 매우 임박하다고 생각하였다.
V-day가 매우 임박했다는 표현을 적지 않게 하였다. 파루시아의 임박성에 대하여 가장 명백하게 말한 곳으로서 우리는 두 군데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
16:28//막 9:1//눅 9:27)라는 말씀이다. 그 동안 보수주의학자들은 이 말씀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비판적인
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 말씀은 액면 그대로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예수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두 번째는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다니지 못해서 인자가 올 것이다"(마 10:23)라는 말씀이다. 이 두 말씀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예수가 인자의 도래로써 이루어질 파루시아을 매우 임박하게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파루시아는 예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빨리 오지 않았다. 아니, 그 이후 2천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파루시아는 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파루시아 기대는 여전히 유효한가? 파루시아가 여전히 기다려야 할 분명한 미래라고
한다면, 예수는 시간 계산에 있어서 실수한 것은 아닌가? 한 때 이신론자들(deists)은 예수가 파루시아의 시간 계산에 있어서 착오를 범했고,
그렇다면 그것에 근거하고 있는 다른 모든 가르침의 정당성도 없어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예수는 그 가르침의 근본에 있어서 실수를 하였기
때문에, 다른 면에서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정당한 평가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예수를 방어하기 위해서 요즈음에
"비종말론자 예수"의 그림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열정으로 착각하고 있던 예수를 구제하기 위해서 종말론의 색채를 지워 없애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하에서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시도해 볼 것이다.
1) 예수와 파루시아
우선, 우리는 예수가 비록 파루시아를 매우 임박해 있다고 믿기는 했지만, 당시의 다른 유대적
종말론자들과는 달리, 그 완성의 시간을 계산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하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복음서 전승을 보면, 실제로 그 때를
예측해 보라는 요청이 예수에게 주어진다. 누가복음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종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이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를 가깝게 따르지 않던 일반 군중들도 예수가 종말론자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았다면, 혹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그 내용은
비종말론적인 것이었다면,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었을 리가 없다. 이 요청에 대하여 예수는 우회적인 말씀으로 거부한다. 이 말씀은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인용을 하겠다 :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0-21).
여기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명백하게 거부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통치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가 인정되고 있는 인간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는 파루시아의 시간을 계산하는 행동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믿고 사는 사람의 우선적인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만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곳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사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예수가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그러한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고
만물이 새롭게 될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 19:28//눅
22:30).
학자들은 이 구절이 실제로 예수가 한 말씀인지를 놓고 논란을 벌였으나, 결론은 역사성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특히 보른캄(Guenther
Bornkamm)은 "새 세상에서"( )라는 어구에 해당하는 아람어가 없음을 근거로 이 구절의 역사성을 부정하려
했으나, 아돌프 슐라터(Adolf Schlatter)는 그 어구의 아람어를 발견해 낸 바 있다. 맨슨(T. W. Manson)은 "이 말씀은
유다의 배반이 알려지거나 의심되기 훨씬 이전에 발설되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단언한 바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열둘" 속에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는데, 초대 교회가 이런 말씀을 만들었을 리가 없으리라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예수가 인자의 도래로써 시작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는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더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더 관심을 두었다. 말씀의 회수를 단순히 비교해 보더라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들은 매우 드물고, 오히려 현재적인
실현의 말씀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의 관심이 미래보다는 현재에 더 치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현재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예수가 파루시아의 시간을 계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또 다른 말씀이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 24:36//막 13:32; 비교, 행 1:7).
이 말씀도 역시 예수의 육성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대 교회에서 이 말씀을 창작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왜냐하면 후대로
갈수록 예수의 신성이 강조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의 지적 한계를 말하는 것은 불경스럽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후대의 몇몇 사본들은 "아들도 모르고"를 삭제하고 있는 경향을 보여 준다. 모든 비밀을 전해 받은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는 말을 했다는 것이 후대의 필사자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전승자들의 신앙에 거슬리는 것이기는
했지만, 예수가 발설한 중요한 말씀이었기 때문에 전승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는 파루시아의 시간을 계산하는 것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말은 그 파루시아의 시간이 이미 정해졌는데 하나님이 비밀로 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와 그 이후의 신약 저자들에게 있어서 파루시아의 시간은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 가변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보면서 정해 가실 대상이다. 그 시간을 정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렀던 예수도 제외되지 않았다.
파루시아의 시간 계산을 거부한 예수는 또한 파루시아가 오기까지의 시나리오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마가복음 13장과 같은 묵시적인 말씀들을 가지고 있지만, 예레미야스가 바로 지적한대로, 그는 당시의 유대
묵시주의자들이 말했던 많은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묵시적인 말씀들을 통하여 개략적인 시나리오를
재구하는 것도 헛수고가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 예수의 말이고 어느 것이 후대의 첨가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렵고, 설사 예수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 언어들이 매우 상징적이고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벤 마이어(Ben F. Meyer)와 함께, 예수가 구체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크게 보아 자신의 고난과 제자들의 고난,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해결이었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개입을
파루시아로 생각을 하였고, 그것이 매우 임박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파루시아의 시간을 계산하거나 파루시아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식의 시도를 전적으로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당시의 유대적 종말론자들과 매우 달랐다. 그는 시간
계산과 시나리오 작성을 거부하고, 파루시아에 대한 굳은 소망을 가지고 현재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파루시아가 임박한 것처럼 말했던 그의 발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의 문제이다. 그가 시간 계산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가 계산 착오를 했다는 평가는 부당하다. 그는 계산 착오를 한 것도 아니고, 착각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의
임박한 종말 기대는, 비슬리-머레이가 말하고 있듯이, 그의 희망(hope)이었지, 계산에 의한 도그마(dogma)가 아니었다. 그는 파루시아가
속히 임하게 되기를 희망하였고, 그 희망은 그를 그러한 믿음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자신의 희망이었고,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예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시간 계산에 착오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임박한 파루시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바꾸어 말해야 할 것이다. 파루시아는 예수의 소망대로 빨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파루시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이유가 아니다.
예수 자신도 파루시아의 시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가변성을 인정하면서도, 파루시아의 현실에 대해서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예수의 가르침의 종말론적인 배경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다음의 질문은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가 예수의 가르침을
규정하고 있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더 이상 무효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종말론적 성격이 논쟁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질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들을 논의한 대표적인 학자가 폴 램시(Paul Ramsey)이다.
그는 예수의 중심 사상이 묵시적 기대였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예수의 가르침들이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의미를 가지는가를 물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성격을 오해한 데서 오는 잘못이다. 이러한 질문은 예수가 오로지 임박한 미래적인
기대만을 가지고 살았으며, 따라서 그가 가르친 윤리적 가르침은 모두 그 임박한 도래를 준비하기 위한 "중간기 윤리"(interim
ethic)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예수가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의 더 많은 관심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는 현재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윤리를 종말론적
윤리(eschatological ethic)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은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토대라면 윤리적 가르침은 그 위에 서 있는 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혹은 묵시적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종말론자이며, 따라서 그의 윤리적 가르침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듯이, 예수는 임박한 파루시아를 희망하기는 했지만, 더 큰 관심을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바로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바탕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프강 슈라게(Wolfgang Schrage)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수의 윤리는 중간기 윤리로 해석될 수 없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말씀들이 임박한 우주적인 파멸의 연기와 섬광 속에 서 있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의 비상 조치로서 이해되는 것은 명백 한 잘못이다. 예수는 대학살이나 우주적인 파멸 위에서 가르침을 준 재앙의 예언자도 아니었 고 재앙의 윤리주의자도 아니었다. 바이쓰와 슈바이쳐는 예수의 말씀들 위에 묵시적인 불을 얹어 놓았다.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그 사실은 예수의 윤리의 실체를 보면 드러날 것이 다. 예수의 윤리적 요청에 대한 지배적인 동기와 근본적인 기초는 이 세상의 묵시적 종말이나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 안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 예수 안에서 그의 최종적인 구원을 실현시키고 있는 하나님, 예수로 하여금 그러한 자신의 의도를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이다. 임박한 묵시적 기대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예를 들면, 마태복음 5 장과 누가복음 6장에 나와 있는 이웃과 원수에 대한 사람의 계명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묵시 적 기대와 시간적 차원은 그것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여기에서 슈라게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의 성격을 옳게 간파하고 있다. 그는 다른 곳에서 더 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현재적인 도래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예수의 사역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러한 현실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생각이
가장 잘 표현된 곳이 바로 이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a마 19:3-9//막 10:2-9)이라고, 벤 마이어는 보고 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이혼을 하는 것이 허용 가능한가를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암시함으로써 이혼이 불가하다는 대답을 준다. 그러자
질문자들은 신명기 24장 1-4절의 율법을 가리키면서, 모세는 허용했는데 왜 당신은 금지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가 암시하고자 한 것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더 이상 모세의 율법대로 살지 말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하나님의 원뜻대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지금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살던 때는 지나갔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친밀한 교제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에 의해서 에덴의 원초적 상태가 회복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이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결코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에 기초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예수는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가르침 안에서 그리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더 큰 자리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사역 속에서 인간에 대한 구원 행동을 시작하셨고, 이제 인간은 그 행동에 대하여 응답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윤리는 종말론적인 윤리인 동시에 응답적 윤리(responsive ethics)이다.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축업적(蓄業的) 윤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구원 행동에 대한 응답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받아들이라는 말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시작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지금도 역시 믿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믿으라는 말이다.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가르침은 상관이 없다.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만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시대부터 그러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윤리적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시간적인 변화 때문에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차이 때문에
달라진다. 2천년 전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가르침이
여전히 효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3) 임박한 파루시아 희망과 관련된 가르침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복음서를 보면, 많지는 않지만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와 밀접하게 엮여 있는 가르침들도 있다. 예컨대, 늘 깨어 근신하라는
요청들이 그런 것들이다(마 24:45-51//눅 12:41-48). 그렇다면, 예수의 임박한 파루시아 희망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분명한
상태에서, 우리는 그 가르침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것들이 예수의 임박한 희망에 근거해 있었고, 그 희망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그
희망에 근거한 가르침들은 모두 거부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답도 역시 "아니"(No)다. 왜냐하면 파루시아의 시간은
언제가 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태도는 임박했다는 믿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파루시아는
하나님께서 정하실 일이다.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앞으로 정해 가실 일이다. 따라서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처방은 그것이 임박해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사는 일이다. 이러한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모든 책에서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이 경각심이다. 신약성서를 옳게 읽는다면, 그는 이미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깨어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파루시아를 임박하게 소망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러한 바탕에서 주고 있는
가르침도 우리에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그러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파루시아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신앙의 선택의 문제이다. 다만 신약성서는 전체적으로 파루시아
소망에 대하여 일관된 말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파루시아를 믿는다면, 신약성서의 대부분의 저자들이 요구하는 바에 의하면,
그것이 임박해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언제든지 준비된 상태로 살게 만들어 준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임박한
파루시아를 이야기하면서 요청한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희망은 우리를 시한부 종말론자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땅에서 이미 승리를 즐기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루시아를 동경하기도 하지만, 계속 되는 역사 속에서의 책임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파루시아가 곧
오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도 시한부 종말론자와 차이가 있다. 이들은 시간 계산 하에 임박한 종말을
기다린다. 우리는 시간 계산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속히 파루시아를 이루어 주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미 믿음 안에서 파루시아 이후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루시아가 속히 오기를 희망하되("마라나타!"), 지금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파루시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파루시아에만 집착하여 살고 있는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임박한 파루시아 희망 속에서 발설한 말씀들의 요청이다. 신약의 문서들은 이러한 요청을 대부분 그대로
따르고 있다.
5. 결론
이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 논문에서 다루지 못한 주제들도 여전히 많이 있다.
예컨대, 공간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개인적인 종말에 대한 이해 같은 것들도 이 논문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지면상, 그것까지 다 다루지 못했다. 이 논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성격과 그것에 대한 해석의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현존하는 다양한 오해들을 수정할 수 있었다. 종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용어가 복음서에 적용되면서 생긴 오해, 예수의 종말론의
성격에 대한 오해, 종말론에 기초한 예수의 가르침의 유효성에 대한 오해 등을 수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전승들을 정당하게 다루면서도, 예수를 시한부 종말론자와 유사한 인물로 보려는 시각을 수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예수는 현대인들로서는 접근하기
힘든 어떤 인물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현대인들에게도 이해 가능하고 의미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결국, 이 논문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문제는 예수가 사용한 신화적 틀도, 예수의 임박한 파루시아 기대도, 예수의 종말론적인
용어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예수를 의미 있게 만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믿음 때문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인들은 예수의 동시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예수의 동시대인들도 예수를 의미 있게 만나기 위해서는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받아 들여야 했다. 오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의미 있게 만나기 위해서는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받아 들여야 한다.
그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지금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서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질 파루시아를 희망하고, 그러한 임박한 희망 아래에서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예수의 선포를 믿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예수는 의미 있는 존재도 될 수 있고, 전혀 무의미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로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활개를 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예수의 종말론이 어떤 것이었고, 참된 종말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먼저 종말론자였고, 신약의 신자들도 모두 종말론자들이었다. 우리가 신약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도 역시 종말론자들이 되어야
한다. 다만 질문은 "어떤 종말론자냐?"에 있다. 이 질문에 있어서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위의 논의는 좋은 안내가 되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노해의 시 한 편을 소개함으로써,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요약해 보고자 한다.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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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협성신학논단 제 2집(1999년)에 실린 것이다. 예수의 종말론은 예수 연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논문을 만들어 낸, 논쟁의
초점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종말론'이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연구의 역사, 예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평가,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해석을 차례로 다루고 있다. 예수의 종말론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을 거의 다 다루었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인 차원이다. 그리고 예수가 미래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인으로서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기 위해서 꼭 한 번 일독해 주기를 바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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