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義)
성경: 로마서10:1-13절
한 천사가 세상으로 구경을 나왔습니다.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가장 아름다운 것을 기념으로 가지고 가기로 했습니다. 시골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꽃을 보았습니다.
꽃다발을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침대에서 누워 잠을 자는 아기를 보았습니다. 아 아기의 미소는 꽃보다 아름답다 그래서 그것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볼에 입을 맞추는 어머니를 발견하였습니다. 아 아기의 미소는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구나 하고 그것도 가지고 갔습니다. 드디어 하늘나라 진주 문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꽃들은 이미 시들어 버린 것입니다. 귀여운 어린 아기의 미소도 살아지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어머니의 사랑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가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이것을 가지고 가야 하겠다고 생각되는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떠나겠습니다.
1. 바울의 고통이 무엇으로 변하는가?
경기가 좋아지면 남성의 정장인 양복이 많이 팔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주차장에 자동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 일보고 돈 벌고 쓰려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기가 안 좋을 때 많이 팔리는 물건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신문에 보니까? 소주소비량이 늘어난다, 는 것입니다. 화가 나니까 술이나 먹자 이렇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나면 술집에 가고, 고상한 사람은 동해안에 가서 마음을 식히고 오고, 또 어떤 사람은 방에 들어 박혀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목숨을 끊는 죽는 사람도 있고, 사회에 대해서 화가 나서 불을 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을 학대하고 망가트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분노가 그를 회오리처럼 휘감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그는 그 불길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는 고통과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455장 찬송을 아십니까?
2.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후렴]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특별히 2절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을 때 느브갓네살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군대의 선봉장은 랍사게로써 항복 문서를 보냅니다. 왕은 이렇게 부르짓습니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사37:3절)
아기를 낳을 힘이 없는 산모에다 비교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 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 옵소서”(사37:17절)
그날 밤에 하나님은 죽음의 천사를 보내사 적군의 진지를 공격했습니다. 18만 5천명이 죽습니다. 앗수르 왕 산해립은 니느웨이로 돌아가서 왕자인 아들에게 살해를 당하고, 다른 아들이 왕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습니다.
무슨 일이나 핑개 꺼리만 있으면 술을 먹는 사람, 또 싸우는 사람, 혹은 도망을 가는 사람, 잠을 못자는 사람 등등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모든 고통과 고난이 올 때 그것에 어떻게 반응을 할 것입니까? 눈감고 뛰어 내릴 수 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처럼 교회 안 간다. 학교 안 간다. 밥 안 먹는다. 이렇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이 오더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손을 들어서 하나님을 붙잡고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그분이 뭐라고 하실지 귀를 귀울여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곤란하고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진실이 나타나고 신앙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여러분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칠 때 능력 있는 선장은 파도를 헤치고 나가지만 경험이 없는 선장은 배와 승객 그리고 자신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용사와 전쟁터에 그 실력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참 모습은 고통과 근심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근심을 기도로 가지고 가고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믿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그들이 왜 하나님의 구원에서 탈락되고 멀어져 가는가? 하는 의문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행위에 의지한 것이 그 원인으로 이미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런 전제가 전혀 없기에 오히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혈육들의 구원문제 때문에 매우 큰 부담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바울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통과 근심이 기도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절) 하나님을 상대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이 됩시다.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손을 모으고 무릎을 굻고 십자가의 핸들을 굳게 잡고 바람 속을 헤쳐 가길 바랍니다.
2. 진리 없는 열심은 무엇을 만드는가?
진리에는 열정이 있고 열심이 있습니다. 진리를 발견하면 흥분하고 열정이 나타납니다. 진리는 차가운 것이 아닙니다. 진짜 지식은 살아있고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열심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북한 공산당들을 보세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정으로 그 생명도 던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허무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이었습니다. 그 열정의 진위는 참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고쳐 져야하는 것은 내 자신이며,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는 자신의 의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주장, 자기생각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걸레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내세움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반항합니다. 비판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비판하고 자신을 세우는 사람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잘못된 이단은 그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정도를 뛰어 넘는 열심을 보입니다..(대체복무) 이것은 사단이 주는 열심입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10월28일 예수님 재림을 주장한 다미 선교회 열심을 여러분 따를 수 있습니까? 아이들 학교에 보내지 않습니다. 직장도 그만둡니다. 아기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밤낮없이 기도에 빠집니다. 열광주의, 광신주의 자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신앙에서 떠나게 하고 교회를 웃음꺼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주도한 이들이 그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지금도 여기저기 숨어 또 다른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으로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리에서 떠난 자기중심적인 열심이요, 믿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지나치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광신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 적이 없습니다. 이단이 우리나라만큼 극성을 부리는 나라 없습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옵니다.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이고 하나님이라는 교주가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주변에는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열심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의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는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고 가슴아파하며 속을 앓고 있는 하고 있는 바울을 봅니다. 여러분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진리에 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중심이 내가 되었다는 자기 확신에 두지 말고 하나님이 되었다고 인정하실 수 있는 신앙인이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의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잘못된 길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려하고, 노력만 하면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방식을 만들어 내어서 수많은 조항과 조문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보다 더 많아 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비판하시던 장로들의 유전이요, 인간의 교훈과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논에 침을 뱉으면 물을 대는 것이요, 사람이 죽게 생겨도 병원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 적군이 쳐들어 와도 대항하지 않고 그냥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열성을 부렸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노력과 의를 들어내는 자들이 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계명주의 율법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의를 세운다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오는 고백은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서 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죄입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의 뿌리에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이 있으면 불편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철학이 나타납니다, 성경대로 말씀대로 믿지 않습니다. 자기 취향과 감정을 가지고 믿습니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적인 것보다 더 악한 것 더 무서운 것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그것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교회출석하고 십일조하고, 새벽기도하고, 장로, 집사, 교사같은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결과요 표현이지 그것 자체가 구원이거나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의식하고,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종교 습관이 생깁니다. 형식을 붙잡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찾지 못합니다. 피곤합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다 감사요, 다 은혜이지만 율법으로 돌아가면 다 내가 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행위가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도 비참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세요.
이것은 하늘의 별과 같아서 내 능력으로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의는 그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을 자신을 끝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우리대신 다 행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그 몸으로 충족시키신 분이십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되는 그런 시대에 속한 것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고 받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받아들이는 것 말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 말입니다.
⑴ 말씀에 순종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듣는 것이 말씀이고 또 그 말씀이 당신을 구원하는 생명수요 보증수표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따릅니까? 다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말씀을 들을 생각은 안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수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흐릅니다. 이 말씀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사람이 됩니다.
⑵ 주님을 시인함
시인한다는 말은 주님이 맞습니다. 주님을 따릅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고 순교한 사람도 많습니다. 왜 소중한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주님이 옳다고, 주님을 배신할 수 없다고 하였나요. 그것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세례요한이 참수를 당하여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는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나요, 없습니다.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어떤 곳에서도 주님이 옳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인입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이나 나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곳 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내가 살려고 주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⑶ 주의 이름을 부름
어렸을 때 누구이름을 부릅니까? 어머니를 부릅니다. 이것은 오래 계속 됩니다. 크면 누구이름을 부릅니까? 배우자를 부릅니다. 나중에는 자식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서 떠나가는 가고 무너져 것이 사람입니다. 무당들은 북을 치고, 꽹과리 치고 춤을 추면서 귀신을 부르고, 신령을 부릅니다. 방울을 흔들면서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면서 굿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을 부르면 전부 자기를 섬겨라 바쳐라 대 굿을 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름은 다 미혹하는 이름이요, 어둡게 하는 영들입니다. 애굽에서 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출애굽 했습니다. 감옥에서 불렸습니다, 출옥했습니다. 여러분 소월의 초혼이라는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시를 아시죠?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절)
결론
남태평양 한 복판에 투발루(Tuvalu)라는 섬나라가 있습니다. 전체 인구가 1만 명 조금 넘는 아주 작은 나라로 섬의 최고 높은 곳이 해발이 4.5m밖에는 안 되고 평균 해발이 3m 밖에 안 되는 산호초 위의 세워진 작은 섬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적도 부근에 있으면서도 그리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이 나라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말미암아 모든 바다의 해수면이 점점 높아지면서 나라 전체가 바다 아래에 잠길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웃 섬 두 개가 얼마 전 바다 속으로 잠기는 것을 목격한 후로는 전 국민이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이에 투발루 공화국의 총리는 주변 여러 나라에 자기 나라 전 국민을 이주민으로 받아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러 마침 뉴질랜드에서 그 요청을 수락하여 지금 순차적인 이민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무너지고 인생에 물이 차는 날이 옵니다, 당신은 어디로 이민을 갈 작정입니까? 당신을 받아줄 뉴질랜드는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잊지 마세요, 그의 이름을 부르 싶시오 지금 사망의 물이 죽음의 파도가 점점 몰려들어오는 것이 안보이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절)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다 주님을 바라봅시다.
조영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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