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glish Bible ----------------------------------- The Greatest Is Love 최고의 은사는 사랑
Song of Songs 8:6-7 6Place me like a seal over your heart, like a seal on your arm;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 its jealousy unyielding as the grave. It burns like blazing fire, like a mighty flame. 7Many waters cannot quench love; rivers cannot wash it away. If one were to give all the wealth of his house for love, it would be utterly scorned.
jealously ad. 질투심으로 unyielding a. 굽지 않는, 단단한 grave n. 무덤 blazing a. 타는, 타는 듯한, 강렬한 quench vt. 끄다, 억제하다, 풀다 utterly ad. 완전히, 순전히, 아주 scorn n. 경멸(의 대상), 경멸하다
1 Corinthians 13:1-8, 13 1If I speak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but have not love, I am only a resounding gong or a clanging cymbal. 2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3If I give all I possess to the poor and surrender my body to the flames, but have not love, I gain nothing. 4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5It is not rude, it is not self-seeking, it is not easily angered, it keeps no record of wrongs. 6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but rejoices with the truth. 7It always protects, always trusts, always hopes, always perseveres. 8Love never fails. But where there are prophecies, they will cease; where there are tongues, they will be stilled; where there is knowledge, it will pass away. ......13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resounding a. 울려퍼지는, 반향하는 gong n. 징, 그 소리 clang vi,vt,n. (무기.종 등이)울리다. cymbal n. 심벌즈 fathom n,vt. 수심을 재다, 헤아리다 possess vt,vi. 소유하다, (악령 따위가)들리다 surrender vt. 인도하다, 넘겨주다, 포기하다 envy vt,n. 시기하다, 부러워하다, 부러움, 질투 boast vi,vt. 자랑하다, 가지고 있다 proud a,ad. 자랑하고 있는, 자랑으로 생각하는 rude a. 버릇없는(impolite), 실례의 persevere vi. 인내하다, 굴치 않고 계속하다 cease vi,vt,n. 그치다, 멎다, 끝나다 ,그만두다, 중지 tongue n. 혀, 혀 모양의 것, 말, 국어, 방언
----------------------------------------------------------------- RELATED TEXT Deuteronomy 6:1-5 Psalms 136 John 15:9-17 1 John 3 -----------------------------------------------------------------
Song of Songs 8:6-7 6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1 Corinthians 13:1-8a,13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46/366일차 = 316-322 개째 단어)
quench vt. 끄다, 억제하다, 풀다 utterly ad. 완전히, 순전히, 아주 scorn n. 경멸(의 대상), 경멸하다 fathom n,vt. 수심을 재다, 헤아리다 surrender vt. 인도하다, 넘겨주다, 포기하다 envy vt,n. 시기하다, 부러워하다, 부러움, 질투 rude a. 버릇없는(impolite), 실례의
사랑의 중요성 ------------------ 고전 13:13
믿는 자들의 사회 안에서 방치되는 가난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까닭에, 가진 것이 풍족한 성도들은 그것이 자기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모두의 필요를 공급하시기 위한 때문인 것이요, 이때 자기를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신 15:11).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충만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원리를 완성하여 피차 공유하는 생활을 기꺼이 실천에 옮겼던 것을 보게 됩니다(행 2:43-47 4:32-37).
1. 기독교의 사랑은 감상적이 아닌 실천적 개념임
고린도전서 13:13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내용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날 이 성구는 특별히 결혼식 때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기 위하여 불려지는 대표적인 노래말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본문은 사랑이라는 개념이 복음과 신앙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분명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에 있어서 이 사랑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여기 13장 말씀 전체를 여기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잘못 적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랑을 생각함에 있어서 성도들의 생각이 보통 감상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은 매우 실천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적 사랑은, 단순히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느낌을 가져보는 정도의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베푸는 것으로서의 역동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실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신 모습으로 나타난 실제적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실을 통하여 현실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시게 된 제일 원인입니다. 덧붙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휘하신 사랑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하셨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게 드러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리신 순종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완성하시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실천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신 데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첫 시작입니다. 이 사랑은 급기야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데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몸을 입으셨고, 멸망할 죄인들을 친구 삼으셨으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고 하신 예수님은, 친히 먼저 친구로서의 큰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를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 즉 생명을 주셨습니다. 기꺼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우리는 이제 사랑의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 짐은 성도에게 있어서 구원론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능히 행할 수 있다는 데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론적인 근거로서의 우리의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형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관심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이 사랑의 관심을 실천에 옮겨 사랑을 온전하게 하려 할 때,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 형제의 궁핍함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나타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되 그 사랑을 감사히 받고, 이것을 실천적인 행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이전시킴으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온전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복음은 참된 가치를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을 받은 성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보충적 반응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짐으로, 비로소 그 능력이 제대로 드러남으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온전케 하는 사랑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합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믿음보다도 사랑이, 소망보다도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고전 13:13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사랑 없는 예배는 무익함
성도가 헌금 생활을 할 때에도, 복음을 온전케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을 실제로 사랑하는 마음, 이것을 실질로 품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와 같은 여러 가지 의식들이 제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하다 할지라도, 성도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심정이 없게 되면, 이런 것은 이미 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또한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심정을 가지게 되면, 이 경우 성도는 의식에 신경을 쓰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이 사랑이신 사실을 이웃에게 증거하는 일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형제들을 의와 인과 신으로 대하는 자세입니다(마 23:23). 여기서 의(義)란, 공평을 말하니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호리만큼의 부당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인(仁)은 자비한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자기희생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信)이란, 성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정직한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서 나타나야만 하는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 자는 이런 세 가지 덕목을 소중히 여기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덕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정이 없는 한에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눅 11:42). 그리고 이 세 가지 덕목의 구체적인 표현은 실천적 사랑을 통해 되어집니다. 사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이들에게 실제로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가나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할 때에 발견되어질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2:16). 오늘날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힘입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사랑을 실제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고 했던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은 옛 사람의 특성이고, 이타적이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삶은 새 사람의 특성입니다. 이런 실질이 없는 한에는 주일날 예배와 같은 의식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열심은 사실상 의미가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가볍게 취급하면 안될 것입니다.
3.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회복해야 함
사랑의 실천적인 측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교회는 사랑의 토대 위에서 움직여지는 사회여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인 사회의 특성은 의와 인과 신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데서 찾아질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무참하게 짓밟는다거나, 많이 가졌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고 유린하며, 또 더 가지기 위해서 가지지 못한 자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사회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미 3:1-3). 공정하고도 정당한 선의의 경쟁, 도리어 양보까지라도 할 수 있는 미덕, 그리고 피차 신뢰할 수 있는 진실과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형제를 섬김으로, 스스로 가난하기를 자청하는 능력이 보다 적극적으로 구현되는 사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청결하고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단지 겉으로만 하나님을 향한 온갖 형식적 의식과 구호만이 난무하는 세계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일 수가 있겠습니까?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거나 또는 부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성도들간에 위화감이 조성된다거나, 믿는 자들의 세계에서 드러나야 할 지체의식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면, 이는 그 교회가 복음을 온전케 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 구별과 편당이 조성되기 쉽상이고, 이런 경우 주로 물질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아주 못된 기류가 조성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외모로써 사람을 평가하는 행위를 엄중히 정죄하고 있습니다(약 2:1-9).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악한 행위가 여전히 이 시대의 교회 안에서 범람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아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평균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 중의 지나친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문제를 야기시키게 됩니다. 부유한 형제는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가난한 형제는 자칫 부유한 형제를 향하여 분노하거나, 혹은 비굴함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풍토 속에서는 복음적 사랑이 기식조차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사회 안에서 방치되는 가난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까닭에, 가진 것이 풍족한 성도들은 그것이 자기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모두의 필요를 공급하시기 위한 때문인 것이요, 이때 자기를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신 15:11).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충만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원리를 완성하여 피차 공유하는 생활을 기꺼이 실천에 옮겼던 것을 보게 됩니다(행 2:43-47 4:32-37). 구약 시대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모두가 같은 넓이의 땅을 균등하게 배분 받았습니다. 이후의 역사를 통하여 동족간에 일시적으로 매이는 품꾼이 될 수는 있었어도, 그러나 노예 상태와도 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면제년과 희년이라고 하는 규례를 제정하시는 것을 통하여, 처음에 허락하신 균등한 자유와 소유가 결코 영원히 박탈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저희가 가나안 땅에서 이렇게 살아야 했던 것은 출애굽한 이후부터 제공되기 시작한 만나가 균등하게 배분되고 있었던 데서부터, 이미 이같은 원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는 사실이 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당시, 많이 거두었다고 해서 많이 먹을 수 있었다거나, 혹은 적게 거두었다고 해서 적게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거둔대로 한곳에 모은 후 균등하게 배분됨으로 피차간에 평균케 되었습니다. 이 원리는 바울 사도에 의해서 교회의 원리로 적용되면서 더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고후 8:10-15). 그런데 성도들을 평균케 하는 이같은 원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주심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고전 12:4-7). 이 말은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지체들간에 피차 우월성을 겨룰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지혜의 경륜을 따라 각인에게 균등히 성령의 은사를 수여하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전체적인 시야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각인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가 마치 열등한 것과 우월한 것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물질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구별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홀로 존재함으로 구원을 누리지는 못하게끔 되어 있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함하는 바, 성도들간에 함께 연합함으로 구원에 함께 참여하고 그로 말미암는 모든 혜택들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성도는 그것이 영적 은사가 되었든지, 또는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지간에, 궁극적인 의미로는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일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현실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형제들의 것입니다. 서로 자기의 짐을 질 뿐아니라, 또한 각자의 짐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요, 바로 여기에서 성도들에게 구원이 임했다고 하는 사실이 입증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인과 신이 지배하는 기독교 사회인 것입니다. 곧 사랑이라고 하는 최고의 은사가 한껏 발휘되어지는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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