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교회론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물론 평신도들까지도 이러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른 교회관을 정립해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무엇보다도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현재의 교회가 혼돈된 양상을 보여주거나 또는 교회의 모습을 제시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서 교회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교회를 예시해 주는 구약 성경
구약 성경은 창조, 타락, 새로운 선택의 역사가 진행된다. 이 역사의 진행 속에서 한 자손의 올 것을 예시함과 아울러(창3:15) 그것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 이어진다. 이러한 선택 속에서 하나님은 한 자손의 미래를 예시해 주는데 특히 아브라함의 선택에서는 획기적인 약속들이 주어진다.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한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면서 그를 통하여 열국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한다(창17:16, 18:14-18). 그러므로 온 세상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다는 약속은 아브라함의 한 자손을 통하여 복을 받는다는 약속이다(창12:2-3). 열국을 이룬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하나님은 함께 계실 것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창17:7).그러므로 역사는 열국이 아브라함의 한 자손을 통하여 복을 받는 사건을 향해서 가게 되어 있고 또 그것이 성취가 되어야 그 결국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이 많이 번성을 하기는 하였지만(출1:1-7) 이들은 결국 한 사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후에 얻어진 한 이름을 가진 자들이다(창32:28). 그러므로 이들은 한 사람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사44:1-2). 많은 수로 번성할지라도 이들은 한 성격을 가진 동일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성격은 내 아들 내 장자(출4:22)라는 말과 하나님의 보배 같은 소유요(출19:5)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19:6, 신7:6, 26:18-19, 28:9)이라는 말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세계 만민 앞에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신28:9-10).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고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 시대가 되었다. 왕정 시대의 왕은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 백성의 운명은 왕에게 일임되어 있다. 왕이 율법에 성실하면 그로 인하여 백성이 평화를 누리고 왕이 율법을 떠나면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 이 왕은 율법에 성실함으로써 하나님을 백성에게 보여주는 자다. 이러한 사명을 가진 자이기 때문은 왕은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 입적되며(삼하7:14) 또한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올 참 왕을 예시해 주는 자이다(삼하22:51-23:1-7).이러한 왕들의 불성실로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없으며 남은 자를 통하여 그것을 이루겠다는 말씀들이 주어진다(사4:2-3). 이렇게 이루어질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차원의 것이 될 것이며(사49:6-7, 56:6-8, 슥14:16-21) 그 때에 그들을 다스리는 이는 신적인 인자이다(단7:13-14). 그가 진정 여자의 한 자손이며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자기 백성을 대표할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죽은 자기 백성에게 새 생명을 줄 것이며(겔37장) 또 성령으로 통치할 것이다(사32:1,15).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욜2:2-29) 그들의 마음속에 그 말씀을 새겨 두실 것이다(렘31:31-34). 그러므로 남녀 노소 없이 모두가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 때에는 하나님을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상은 구약의 신약 교회에 대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교회의 근거가 되심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요 백성으로 오셨다(마1:1,2:15). 자기 백성을 대표하는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왕이지만 또한 백성이기도 하다. 그가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죄인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백성의 대표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다(마3:15). 이러한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마3:17). 예수가 하나님의 참 백성이요 그 백성의 메시야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요한에게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구약에서 예시하던 이가 나타나 구약을 이루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이 사실을 '의를 이루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예수가 먼저 선포했던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늘 나라'(마4:17) 또는 '하나님 나라'(막1:1:15, 눅4:43)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이 예시했던 것이 하나님 나라였던 것을 알 수 있다(마25:34참고).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나라가 임박했다고도 하시고(막1:15) 또 그 나라가 임하여 있다고도 했다(마12:28).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그 나라의 현존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중에 있느니라(눅17:21)'고 하셨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시대임을 분명히 하셨다(눅16:16, 마11:11-14). 이것으로 분명한 것은 예수님 자기의 인격 안에 하나님 나라가 현존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소위 말하는 autobasileia인 것이다. 예수님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본대로 그가 자기 안에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약속된 한 자손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해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왕권을 보여주는 왕이면서 또한 하나님께 속하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대속의 사역을 감당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안에 품는 대표적인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 자신이 autobasileia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지상의 예수 안에 하나님 나라는 현존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예수는 현존한 하나님 나라이다. 지상의 예수가 현존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또한 그 예수 안에 창조주 하나님이 현존하여 계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여 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기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기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자기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요14:9-10).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여 내실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 현존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 안에 현존하여 있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현존하여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에덴에서 암시되고(창3:8)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이지만(창17:7) 특별히 새 언약에서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다(렘31:31-34). 그러므로 예수 안에 현존하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현존하게 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까지 하나님이 임재하게 되는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정리하고 지나가도록 하자.
2.1 하나님 나라의 성격
첫째, 하나님 나라는 예수 자신이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것도 아니며 예수 외의 어떤 인간의 모임을 생각하기 이전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시키신 왕이시며 자기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는 나라이시다.
둘째, 예수 안에 들어 온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를 덧입고 있다. 그러므로 백성은 예수 자신의 연장이다.
셋째, 예수님의 연장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은 세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요10:16, 17:20-24).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하나님의 백성의 형성을 자기가 부르신 제자들을 필두로 하여 유대인에게서 시작하려고 하셨다(마10:1-7).
넷째, 그는 땅에 속한 나라를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나라를 의도하셨다(마5:1-12, 요18:36). 그러므로 예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지상적인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었다면 하나님 나라도 성령으로 생성되고 현존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지상적인 나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성격의 나라다. 이 성격은 성령으로 대변된다.
다섯째, 따라서 이 나라는 철저하게 예수의 의도 즉 영에 종속된다. 예수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예수의 모습을 덧입고 있는 예수의 연장이 아니다.
여섯째, 예수의 길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이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통과하여 도달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16:24).
일곱째,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해서 저 하늘 어디엔가에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이 역사 속에서 현존한다. 그러나 이 역사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하늘 나라라고 한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 같은데 온 세상을 포용할 수 있고(마13:31-32),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마13;33). 이렇게 역사하는 가운데서 재림 때까지 이를 것이다.
여덟째,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성령은 예수의 것만을 증거하시며 그 증거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시켜 내실 것이다(요16:14). 뿐만 아니다. 성령은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거하시게 되는 처소가 되실 것을 말씀하셨다(요14:3, 23).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메시야와 백성이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옛 약속의 성취의 실체이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아버지께로 가셔야만 했다(요14:2, 16:7). 십자가는 이것을 위한 길이었고 부활은 바로 이 실체를 드러내는 원초적인 사건이었으며 성령강림은 실현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자기 제자들과의 형제관계를 분명히 하셨으며 또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준비시키셨다(요20:17, 2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의 성취는 예수 부활과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재림 때 그 이상적인 모습을 실제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와 교회
3.1 같은 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어찌해서 교회가 탄생했는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의도했는데 교회가 나왔는가? 아니면 예수가 의도한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로 밀려나고 그 사이에 교회가 대체되도록 했는가? 예수의 생애 동안 예수는 교회를 설립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공동체를 의도했으며 이것을 예수는 교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의어적인 의미에서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을 마태복음 16장에서 볼 수 있다. 교회라는 말이 복음서에서 단 두 번 사용되었는데 그것도 마태복음서에서만 두 번이 사용되었다(마16:18, 18:17).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이 말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태복음의 이 말은 후대에 삽입된 말로 이해하려고 한다. 즉 예수가 직접 사용한 말이 아니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근거가 없다. 이미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해서 특별히 외곽지방으로 나아가서 교육을 하고자 하셨다.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의 신분과 가야할 길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식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기로 인하여 분리된 새로운 공동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계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내 교회'라고 부르셨던 것은 바로 이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예수가 교회라고 부르지 않은 것을 후대 교회가 예수가 교회라고 부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생각인가? 기독교를 사기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보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당연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또 예수님 자신이 의도한 공동체를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교회는 예수에 대하여 '주가 바로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말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기는 해도 예수님은 자기에 대한 고유한 인식과 또 가야할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로서 '내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교회는 예수에 의해서 규정되는 인간들의 독특한 모임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을 요한복음에서도 읽어 볼 수가 있다(요14장, 10:16, 17:20-26).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이나 제정하신 성찬과 세례를 주라고 명한 것 등은 자기의 공동체인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지상의 사역 동안에는 아직도 교회는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예수의 전 사역을 근거로 하여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주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신앙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을 그 특질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주님은 천국과 연관을 짓고 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시고 이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회와 천국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동의어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면 어떤 의미로 교회와 천국은 연결되어 있으며 동의어적이기까지 한가? 매고 푼다는 말씀이 단서가 된다. 매고 푼다는 말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천국 열쇠들'이라는 말을 고려해 볼 때 '열고 닫는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천국에 들어감과 나감을 주관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그들의 본 것을 가지고 증거하여 천국이 시작되게 하고 또는 그 본 것에 비추어서 천국이 끝나게 하기도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국이 시작된다는 것은 본 대로 증거하여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하는 일을 뜻하며 천국을 끝낸다는 것은 그들이 전한 대로 받아 믿지 않으면 바른 믿음이 아니니 천국과 상관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마18:15-20절이 이 사실을 보여준다. 범죄하고도 권고를 받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교회에 합당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믿는 형제로서 인정하지 말라는 말이요 회개한다면 교회에 합당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 형제로서 인정하라는 뜻으로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 매고 푼다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16장에서 매고 푼다는 말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교회의 치리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믿는 신자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신자냐 믿지 않는 자냐를 구분하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즉 사죄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이냐 아직도 사죄의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냐를 구분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교회와 천국을 동의어적으로 쓰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천국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요 마지막 날에야 이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지상에서 시작되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천국을 드러낸다. 천국은 교회를 통하여 그 존재를 입증한다. 천국의 모습은 재림으로 드러날 것이지만 그 천국의 실체가 이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나타났고 그 부활의 생명인 성령으로서 교회를 생산했으며 또 생성된 교회에 임재해 있으면서 계속해서 교회를 생성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천국의 생명력 즉 성령의 능력의 구현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력은 교회를 생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성의 완성체가 마지막 재림 때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부활의 생명력은 만물까지도 새롭게 생성시킬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만물까지도 포함시킨다(엡1:22-23). 이것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 등장한 교회는 천국의 구현체요 현존체며 전령사다. 사죄가 이루어졌으며 그것을 깨달아 안 새로운 인간들이 등장하였으며 만물의 새 창조가 있을 것을 예고해 주며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것을 보여주는 전령사다. 이미 이런 세계를 이루실 주인공이신 메시야가 자기 사역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에 이런 세계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지상에 등장한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미래의 영광의 날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순례자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히11:13-14참조). 그러나 현재와 미래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교회를 생성 유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미래에 교회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현재와 미래는 동질이다. 따라서 교회의 영광은 현재나 미래나 동질이며 그러므로 동일하다고 해야 하겠다. 현재는 과정상 고난의 가시덤불에 덮여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와 천국은 동의어로 말할 수 있다. 마태복에서 예수께서 교회와 천국을 동의어적으로 말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3.2 교회와 천국의 차이점
그러나 교회와 천국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요 교회는 그의 소유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은 교회에 대하여 주체적이요 절대적인 반면 교회는 객체적이요 잠정적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천국인 양 그리고 절대적인 양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천국의 전령사이기 때문에 천국에 종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것이 없다. 교회는 천국의 주인공이신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철저히 주님께 종속되어 있다(요16:14). 그러므로 천국의 정신에 맞지 않을 때는 사정없이 책망을 받고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마3:8-10, 7:26-27, 18:17, 롬11:21). 구약의 선지자들도 현 이스라엘을 향해서 심판과 책망을 선언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치 자기가 천국인 양 완전하고 절대적인 양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회는 지배자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주님의 지배를 받을 뿐 지배하는 자가 아니다. 교회는 그저 주님께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가 통치권을 가지고 천국을 만드는 자가 아니다. 천국을 확장하거나 성장시킨다는 것은 교회와 상관없는 개념이다.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 확장되는 것도 성장되는 것도 아닌 주님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체는 주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지 교회 자신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할 뿐이지 교회가 그 나라를 실현시킨 적도 없고 또 실현시킬 수도 없다.
이러한 교회는 움직이게 된다. 주님의 생명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삶을 산다. 주님의 생명인 성령을 따라 삶을 산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스런 생명 현상이다. 자유롭게 그러나 생명의 법을 따라 움직이는 생명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교회가 했다고 하는 것이 없다. 주님이 하셨다고 하며 자기는 무익한 종이라고 할뿐이다(눅17:7-10). 그러므로 여기서는 각종 통계 숫자와 과시용 자료들이 있을 수 없다. 교회는 그가 움직여 일한 것에 대한 결과를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는 주님이 책임을 지신다. 교회는 이렇게 일하시는 주님께 충성할 뿐이다. 충성이란 주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 실패의 여부도 교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 주님이 성공하셨다고 해야 성공이며 주님이 실패하셨다고 해야 실패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성공은 주님께는 실패이고 세상적인 실패를 주님께서는 성공이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신 일은 주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내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결코 실패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보이는 결과가 없고 반응이 없다고 해서 염려할 필요도 없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도 없다. 결과는 주님이 내실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를 세우겠다고 한다면 그리고 스스로 세워지는 것이라면 교회는 이런 좌절을 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교회는 절망의 한숨소리로 가득한 어두운 곳이 될 것이다.
만약 이런 곳이 교회라면 그것은 천국을 반영해 주는 곳이 아니라 지옥을 반영해 주는 곳일 것이다. 이런 곳이 교회라면 그곳은 그 곳에 속한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화하고 종으로 삼는 곳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온갖 수단방법이 동원될 것이고 마침내는 인간이 군주처럼 그리고 폭군처럼 자기의 말을 절대시할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세상 임금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이 속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저주가 올가미로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천국은 선포(설교)의 대상이지만 교회는 선포(설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교회는 천국을 선포(설교)하지 자신을 선포(설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천국만을 전해야 한다. 교회가 천국을 설교하는 데서 떠나 자신을 설교하게 되면 그것은 천국의 생명력에서 끊어지고 세상의 생명력을 사랑하게 된다. 천국을 바라보아야 할 교회가 자기를 바라보고 이 세상 안에 있는 자기의 역사를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자기 확장, 자기 소유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확장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천국의 영광과 천국의 능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광과 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 교회가 마귀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마4장).
따라서 교회는 위계의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 천국을 반영하는 자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자유 안에서 평등을 반영하는 곳이어야 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이다(고후3:17).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의 질서인 위계의 질서가 통하는 곳이 아니다. 교인 위에 교인 없고 교인 아래 교인 없다. 또 교회 위에 교회 없고 교회 아래 교회 없다. 노회나 총회 등은 교회 위에 있는 교회가 아니며 지역의 교회들은 교회 아래에 있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위에 주님이 계실 뿐이며 주님 아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회는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똑같은 교회일 뿐이다. 하나의 교회가 곳곳에 나타나 있는 것일 뿐이다. 하나의 교회의 부분으로서 나타나 있을 뿐이다.
큰 교회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며 네 교회와 내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주님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망각한 것은 교회가 자기를 설교의 대상으로 삼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곳이 교회라면 그 교회는 세상도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세상의 힘이 자기 보다 강할 때에는 세상과 타협하고자 할 것이요 세상의 힘이 자기보다 약할 때는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천국은 교회에 생명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교회는 천국에서 생명의 원리를 공급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국이 교회에 제공하는 원리는 천국 자체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며 소망을 천국에 두고 천국으로 만족하라는 원리이다.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를 따르게 한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이 세상을 초월하게 하는 반면 천국 자체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봉사와 섬김과 사랑이란 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교회의 생명의 표현이다. 따라서 교회에는 자기 자랑과 자기 행위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왕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섬기고 죽는 자로 있을 뿐이다. 주는 자도 초월현상 즉 죽었다는 것이 표현되는 것이요 받는 것도 죽었다는 것이 표현되는 것이다. 높음이란 낮아짐의 다른 표현이며 생명이란 죽음의 다른 표현이다. 교회는 천국이 제공하는 이러한 원리를 따라 가는 자이지 이러한 원리를 스스로 만드는 자가 아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원리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도 아니다.
이러한 교회는 죄인들만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인 셈이다. 죄인들의 교회란 은혜를 아는 자들의 교회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의롭고 경건한 독선이 있을 수가 없고 거룩의 왕 노릇도 자기인 체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에 대한 정죄도 야유와 비웃음도 있을 수 없다. 자비와 더불어 용서받은 자임을 확인하는 것에서 오는 관용과 형제애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교회는 완전을 바라보는 자이기는 할지언정 완전하지 못함을 늘 고백하며 악을 미워하기는 할지언정 악이 있음을 늘 고백하는 자이다. 오히려 교회는 위기를 느끼며 연약함 때문에 천국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늘 구하는 자이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 중에 있는 자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나라 자체가 아니다.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상적인 존재이다.
4. 교회의 출발
이러한 교회는 언제부터 출발했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신 바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의 영 안에서 자기 백성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거하시는 사건의 발생을 가리킨다(요14:24). 예수님은 구속 사역을 완성함을 통하여 이것을 위한 기초를 놓으셨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 사건을 시작하셨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자기 백성이 함께 사는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구약이 예시하고 바라보게 하던 사건이요 주께서 말씀하시던 사건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순절 성령 안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백성이 함께 살게 되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성령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교회는 예수의 성령에 의해서 탄생되었다. 그리고 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으로 이 교회에 임재하여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17,6:16-19).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거하신다. 이것이 교회이다. 그 출발점은 오순절이라고 할 수 있다.
5. 교회의 성격
교회의 성격을 좀 더 생각해 보자.
5.1 앞에서 본 바대로 성령 안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면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출생할 수 있었고 성령의 품안에서 교회는 양육되며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의 어머니요 존재 공간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생명을 영위하고 있다. 고로 성령 없이 교회 없다. 그리고 성령이 있으므로 교회가 있다. 성령이 가진 것은 모두가 교회에 주어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아버지와 아들을 성령을 통하여 모시고 있고 그 은사의 모든 부요함을 교회는 가지고 있다. 교회는 항상 성령 안에 살고 있으며 또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므로 충만과 불충만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현재에 있는 것에 또 더하여 얻어야 할 것이 없다. 더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전부이신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전부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자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교회를 그의 뜻대로 인도한다. 성령이 자유로운 바대로 교회도 자유롭다. 성령은 교회를 법으로써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써 인도한다. 그러므로 강요하지 않으며 획일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알며 즐겨서 그것을 따라서 활동한다.
이러한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며 은사 없는 교회 없고 은사 없는 교회의 구성원도 없다. 교회 됨 자체가 은사이며 교회는 은사로써 살고 있다. 이런 것은 성령이 주권적으로 알맞게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교회는 은사의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은사 현상들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은사 현상들은 성령을 따라 사는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들이다. 추구할 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자체이지 은사 현상들이 아니다.
은사 현상들을 추구하다가 보면 열광주의에 빠진다. 그러나 열광주의적 열정은 인간의 정열의 표현이지 성령의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서 울어나는 자연스런 열정이 있다. 이것은 헌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헌신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를 버리고 누리는 삶이다.
이것은 말씀을 누리는 삶이다. 사랑으로 오신 말씀을 누리는 삶이다. 그 말씀이 확대되어 설명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인도는 성경 말씀의 인도이다. 말씀은 모든 은사들의 총체이다. 그러나 성령은 말씀으로 석고화되지 않는다. 말씀 가운데서 성령은 자기의 인격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성령의 인격의 표현이다.
5.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이러한 관계는 요한복음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는 헤롯성전을 헐라고 하면서 대신 자기가 성전을 일으키겠다고 하신다. 예수가 일으키겠다고 한 성전은 예수의 육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요한은 주를 달고 있다(요2:21). 여기서 말하는 육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교회 공동체를 의도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성령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가 새로운 형태로 세상에 계속해서 임재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임재하면서 자기의 일을 계속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수행하신다. 그리스도 통치 밖의 독단적이면서 배치되는 일을 성령은 행하시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현존케 하고 그의 일만을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임재와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연장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인 성령은 그리스도의 현존이요 연장이다. 이 관계는 하나의 유기체적인 생명체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성령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몸이다. 성령 밖에서 교회가 존재할 수도 없지만 또한 성령을 거스려서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못된다. 성령을 따를 때 교회는 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은 교회에 앞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성령이 있는 한 교회는 생성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게 되어 있다.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이 성령 안에 있는 교회를 두고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에서는 머리와 몸의 관계를 그리스도가 부활의 생명 곧 성령으로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것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엡1:19-23).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으로 교회에 충만히 현존해 있다. 그리스도의 이 현존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생명을 공급받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몸인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히 현존해 있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굳게 붙잡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람이다(엡4:7-16). 가시적인 자람이 교회의 자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을 굳게 잡고 있는 것이 자람이다.
바울의 의도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살린다는 것을 다스리신다고 할 수 있다(엡1:22,2:1-7). 골로새 1:18절도 역시 같은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부활하여 부활의 생명으로 자기의 몸된 교회를 살려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 곧 성령으로 교회를 생성시킬 뿐만 아니라 충만히 채우시며 다스리고 계신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고전6:12-20). 신부로서의 교회도 이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마22:1-14, 25:1-13, 엡5:22-33, 고전 6:15, 고후11:2-4).
그리고 이 개념과 관계지어서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엡4:1-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고 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교회는 하나 뿐이다. 교회는 여러 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한 성령으로 한 사람 된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성령으로 하나되어 있다면 모든 개교회들이 하나의 교회 안에 속하여 있다. 여기에는 제도나 정치체제나 형식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성령으로 하나되어 있다면 하나된 교회의 일부분이다. 모든 개체 교회는 이 하나인 교회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교회주의적 사고방식은 반교회적인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영웅주의에서 비롯된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내 교회와 네 교회가 있고,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다. 그러나 하나인 교회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다.
둘째, 교회는 한 하나님, 한 주 아래 있다. 교회 위에는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아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교회에는 위계질서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 위에 교회 없고 교회 아래 교회 없다. 노회나 총회도 위에 있는 교회가 아니다. 개체 교회들의 모임일 뿐이다. 이것들도 교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교회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개체 교회들 위에 상존해 있는 교회가 아니다. 일시적인 모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모여 있을 그 때에는 하나된 교회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위에는 역시 주님이 계실 뿐이다. 그것들이 주님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 성격을 가지는 한 그러하다.
셋째, 교회는 제도가 아니며 어떤 정치 체제가 아니다. 교회는 제도나 정치 체제에 결코 매여 있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이 생명체 교회가 필요로하여 만들어낸 것인 한 그리고 그것들이 그 교회를 돕는 도구의 위치에 서 있는 한 필요한 것이지 교회의 생명체를 얽어매고 제도화시켜버리고 나아가서는 석고화시킨다면 버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들은 오히려 교회의 유기적인 생명력을 억압하는 마수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를 억압하는 모든 제도적인 노력들을 거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노력들 배후에 있는 인위적인 조작된 마음을 거부하여야 한다. 교회 생명 자체가 이러한 정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를 이용하여 군림하려고 하고 주인으로 나서려고 하며 나아가서 주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을 생명체 교회는 거부할 수밖에 없다.
넷째,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의 표현은 무엇보다 통치와 순종을 표현하는 관계이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고 교회가 순종하는 관계의 표현이다. 여기에는 사람의 통치가 개입될 수 없다. 그리스의 통치만 있을 뿐이다. 사람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대신하면 그것은 인간의 왕국이지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니다. 그리스도 통치의 특성은 자유와 사랑이다. 이 외에 다른 법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의 이 관계는 주종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며 교회가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앞서 가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에 계승되지 그리스도가 교회에 계승되지 않는다. 로마 교회에서 이런 측면이 강하지만 그래서 '교회 있는 곳에 성령이 있다'고 하지만 이러한 원리의 혼란은 개신교 역시 봉착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신교에서 주님은 인간들의 들러리요 인간의 야망과 소원을 이루어 주는 도깨비 방망이 취급을 당하고 있다.
5.3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 개념이 구체화된 것은 출애굽 과정에서다. 하나님은 나라 차원으로 번성된 야곱의 자손들을 불러내어서 자기의 '보배로운 소유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다(출19:5-6). 이러한 의미들을 살려서 신약에서는 교회에 사용하고 있다(엡2:19, 벧전2:9-10). 이것은 교회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뜻이다(롬4:16, 9:25-27).이것은 온 이스라엘을 뜻하는 12제자를 택하시고(마10:1-3) 이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제자를 삼아라고 하신 뜻을 통하여 드러난 주님의 의도가 전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 온 백성이 제사장이다. 제사장과 비제사장의 구별이 없다. 온 백성 모두가 똑같은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 계급이 존재할 수 없다. 성직자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또한 교회는 성직자 중심도 될 수 없다. 역으로 온 백성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면 온 백성 모두가 성직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 백성은 모두가 거룩한 백성이다. 따라서 온 백성은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한 영으로 섬기는 책임이 있다. 섬김을 받을 자와 섬길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섬기는 자로 있으므로 왕이신 주님을 섬기게 된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섬기는 자들이다(엡4:12). 교회에 높은 자는 없다(마18:1-4).
교회의 섬김에는 서로가 서로를 진리로 보살피는 일이 포함된다. 모두는 모두에게 진리 안에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섬기는 일이다(마18:15-19).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평신자를 살피듯이 평신자들도 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진리에 서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할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 이 책임은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임을 분변하는 것은 교회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계2:2, 민31:8 참조).
둘째, 교회는 인격이다. 교회는 성전도 빌딩도 세상 재물도 아니다. 교회는 오로지 인격이다. 예수님의 인격을 덧입은 인격들의 모임이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 됨을 보여주는 중심은 숫자의 다소와 건물의 유무와 화려하고 그렇지 않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있다. 보이는 건물이나 부동산 등은 교회가 아니다. 이것들은 인격인 교회가 사용하는 물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한다든지 교회의 이름으로 부동산을 확장하는 데 집중을 한다든지 또 이런 것들이 많아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것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축소되더라도 인격이 세상을 초월하는 인격이라야 한다. 세상을 초월하는 인격은 십자가를 지는 인격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영광은 누구에게 보여 주고자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본성상 드러나는 것이다(마5:13-16). 교회의 관심은 항상 이러한 영광을 지닌 인격이냐에 두어야 한다.
셋째, 교회는 인격적 공동체다. 교회에 부름 받는 자는 개인이다. 그러나 이 개인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는 개인이다. 하나님이 개인을 부르신 것은 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를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부름에서부터 이것은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개인 구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이룸에 있다. 이것이 구체화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이스라엘이요 마침내 드러난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정하신 것은 바로 이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 1장에서 밝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이 교회에 부름을 받지만 그러나 개인이 교회의 목표는 아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은 공동체 교회 즉 나라를 의도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작부터 공동체로서 의미가 있으며 공동체로서 그 목표에 이른다. 구원은 온 교회 공동체가 구원받는 것에 의의가 있다.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교회를 생명체라는 말로 이해할 때 잘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개인 구원과 개인주의적 사고는 교회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개교회주의적 사고 역시 교회의 성격과 맞지 않다. 개교회의 잘 됨이 아니라 온 공동체 교회의 잘 됨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사람이든 물질이든 유무가 상통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우월주의 사고와 패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유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의 인격은 자유하는 인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든지 개인이든지.
넷째, 죄인의 교회이지만 거룩한 교회이다. 현실 교회는 인간들의 모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들은 온전한 자도 없고 허물없는 자도 없다. 더구나 교회는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하는 공동체이다. 자신의 죄성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뉘우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에는 거룩을 빙자한 독선과 오만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정죄와 우월감과 스타의식은 없다. 잘 난 사람도 더 못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이다. 그러나 사죄를 확인하므로 평화하는 교회이다.
죄인들의 교회이지만 주님의 의를 덧입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교회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죄인들이 이룬 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 거룩하다. 그리스도가 언약을 완성하시고 의를 이루시므로 그 의를 입혀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의롭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교회를 그 누구가 거룩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교회도 완전하며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교회도 영원하다. 교회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없어지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결코 잘 못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잘 못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 성자 성부 삼위 하나님이 완전 불후 불멸 영원한 것처럼 교회도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비밀이다.
6.교회의 직분
교회는 성령의 구현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성령의 은사의 표현들이다(고전12:28).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모든 직분은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것도 없고(엡4:11-12) 영구적인 것도 없다.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뜻대로 주시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직분이라는 것은 교회에 맞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직분이란 인간 중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용하고 있고 정착되어 있으니까 사용하도록 하자. 그러나 직분은 주님이 뜻대로 주관하시는 은사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직분이 은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위계질서가 아니다. 천국이 계급사회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계급 공동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위계의 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직분의 제도화(고착화)가 있어서는 안된다.
제도화(고착화)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교회는 직제화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이 표현하는 기능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필요로 한다면 기능을 살려야 하지 사람을 살려서는 안된다. 더 나은 다른 사람이 그 기능을 하도록 하고 물러나는 것이 은사의 주인을 아는 교회(성도)의 취할 태도이다. 일하지 않는 자가 직분이 없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당연하다. 직분은 은사로서 기능을 감당하고 있을 때 은사이다.
7.은사
은사가 성령의 나타남이라면 은사란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성령이 와서 일하고 계시는 표적이다. 성령이란 그리스도가 언약을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뜻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뜻하며(엡4:8)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뜻한다(행2:36). 은사란 이것을 증거하는 성령이 일하고 있다는 표적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계시는 곳이 교회라면 교회에는 은사가 있다. 더구나 교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온 교회는 자체가 은사이다. 그러므로 은사 없는 교회 없고 은사 없는 성도 없다. 온 교회 온 성도들은 다 은사가 있다.
은사들은 높낮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자기의 뜻대로 주신 선물들이기에 다 성령의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동일하고 동질적인 성령의 나타남이다. 고로 모든 은사는 동일하다. 주님이 주권적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한 성령의 흔적들이다. 한 생명의 다양한 나타남이다.
8. 교회의 생활원리의 성격
이상에서 교회는 자유함과 즐거이 섬김이 교회의 생활원리가 된다는 것을 간간히 말해왔다. 자유함과 즐거이 섬김 즉 사랑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자유함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유함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 즉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성령을 따르면서 누리는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만약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옛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서 옛 사람으로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을 부인하는 태도요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의 자유를 신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신자에게 무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다. 신자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에게도 무한 자유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이요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가 신자 된 후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갈2;20). 그리스도의 말씀이 산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신자의 새로운 생명이기 때문에 신자가 사는 것은 생명현상으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 있어서 지켜야 할 법은 없다.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것에 따라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하게 하고 덜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신자가 이루어야 할 것은 없다. 신자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룬 것을 생명으로 삼아서 자기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서 사는 것이다. 신자의 자유란 이런 의미에서의 자유다.
둘째, 이러한 삶이 신자의 삶이라면 신자의 삶은 종노릇하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종노릇하는 본을 보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사는 것도 당연히 종노릇하는 삶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신자의 자유는 종노릇하기 위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롭게 살되 종노릇하는 방향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갈5;13-15).
셋째, 이러한 삶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받은 사랑을 아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되새기면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교회의 생활원리는 자유하는 가운데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노릇하는 것이 신자가 교회의 삶을 살아가는 원리라고 하겠다.
9. 결어
가시적이고 제도화된 교회관에서 벗어나 성경 중심의 교회관을 되찾아야 할 시대이다. 우리 자신이 잊고 있는 부분이 어떤 점인지를 반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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