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신학

[스크랩] 선교신학 연구

하나님아들 2018. 8. 16. 21:13

 선교신학 연구

 


 

 

 제1부 선교와 인류학
 
 
성경적 메시지와 문화적 배경
선교사역을 하는데 있어 우리는 성경과 선교 메시지를 잘 받아야 한다.우리는 해외에 가서 일단 그 지역의 언어를 배우기만 하면 설교도 잘 할 수 있고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선교사로 가는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우리가 사역하러 가는 대상(對象)의 사람들과의 사이에는 간격(間隔)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성경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과 현대의 삶 사이에서는 더 큰 간격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들의 간격에 교량을 놓으며 복음의 효과적이고 통(通)문화적 그리고 통역사적 전달을 가능케 할 것인지 연구하고 복음 현장에서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과 그리고 우리가 사역해야할 대상의 사람들의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분명히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선교학에 끼친 문화 인류학적 공헌

오늘 우리가 사역하는 지역의 문화적 배경의 검토를 가능케 하며 현대적인 면에 관한 정보의 제공을 가능케 하는 방편을 마련하여 주는 인류학 ,사회학,역사학등을 살펴봄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인류학은 통문화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둘째로,인류학은 성경번역과 같은 그런 특별한 선교 업무에 많은 통찰(洞察)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인류학자들이 얻은 통찰이 그들의 메시지를 최소의 왜곡과 의미의 상실로서 다른 사회에 가져 오도록 선교사들을 도울 수 있다.
셋째로,인류학은 사람들이 크리스챤이 될 때 일어나는 사회적인 변화를 포괄(包括)함으로 선교사들을 도와 회심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네째로,인류학은 복음을 우리의 청자 (聽者)에게 적합하게 만들 수 있다.
최종적으로 인류학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문화적인 다양성 가운데 있는 전세계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도우며 그들 사이의 이해의 가교를 설정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신학적 가설
 
인간의 역사는 우주적 사건의 더 큰 윤곽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되고 인간에 대한 우리의 문화 인류학적 모델들은 우리의 신학적인 윤곽에 맞추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선교
선교 신학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여야 하고 창조,타락, 그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과 함께 시작한다
인류의 역사는 그의 구원을 추구하는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의 이야기 즉 선교사로서 오셨던 에수의 이야기 그리고 듣는자의 심령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 의 이야기가 우선적이고 중요하다
 
우리의 과업을 꼭 이해하지 않으며 안되는 것은 선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선교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위적 성경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계시에 대해 충족적인 권위이며 그의 목적을 성취시킴에 있어서 인간 역사 가운데서 그것을 통하여 일하시는가를 보기 위하여 그것에 돌아간다.
 
 
 
성경은 방황하는 세계에 대한 메세지이며 우리의 중심적인 과업은 그것을 사람들애게- 전달함으로 그들이 이해하고 응답함에 있는 것이다.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않고 복음에 대한 표현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참 기독인의 선교의 부분은 못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특별한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인 맥락에서 인간에게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이 주어진 시간과 환경에서 그것들에 관계시켜여야만 한다.
 
그리스도 중심성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대표이며 우리의 모범이 되고 그의 성육신은 우리 선교의 모델이 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분 앞에서 부복함과 그리스도는 주가 되신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것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시작하고 경배에서 끝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
선교는 그의 백성의 삶과 복음을 듣는 자들 가운데서 성령의 진행적인 역사에서 분리하여 이해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성숙에 이르도록 우리 가운데 활동한다 봉사하는 것은 그의 힘을 통하여서 된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선교의 범위는 하늘의 그의 나라 뿐 아니라 땅 위에 그의 왕국이다
 
교 회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은 교회 즉 땅위의 하나님의 백성이다. 또한 선교에 있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연합체 ,신앙의 단체로서의 교회에 강한 신학이 필요하다.선교는 바로 전체 교회의 사명이지 먼저 개인의 책임은 아니다.
 

인류학적 가설
 
“ 문화”는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발전의 여러단계 가운데 처한 오로지 인간의 창조로만 여겨졌다. 1930년대의 문화적 진화 이론들은 인간 사회의 다양성에 초점을 두었던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이론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크게 대치되었다.
문화적 진화 이론의 거부 이후 나타났던 다른 하나의 흐름은 문화 인류학이었다.“문화”는 인간 사고와 행동이 집합을 단순히 의미하지 않고 특별한 사고와 행동 뒤에 놓이는 체계와 이들 즉 사고와 행동의 표현되는 상징을 의미하는데 이르렀다.
인류 학자들은 그들의 주의가 밝히 나타난 문화적 신념들을 놓고 있는 근본적인 가설들에 초점을 맞춘다.

각각의 문화는 그 자체의 세계관 혹은 사물을 보는 근본적 방법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깊은 수준에서 통 문화적인 의사전달이란 우리가 봉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만약 선교사들이 최소한의 왜곡으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려면 그들은 명시적인 상징 뿐 아니라 한 문화 가운데 있는 함축적인 신념도 이해하여야만 한다.
최종적으로 인류학자들은 선교에 유용한 인간 삶의 특수한 면을 취급하는 특수 이론 을 발전시켰고 이들중 하나는 언어학이다.
다른 하나는 심리적 인류학으로 인간의 인격과 문화와 변화에 대한 관계를 연구한다.
 
융합을 지향하며
우리는 어떻게 인간에 관한 신학적 그리고 인류학적 견해를 융합할까?
융합의 어떤 시도이든 성격상 전체적이어야만 한다.
 
 
 
 
인류의 다양성과 통일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과 같은 사람들, 그들 자신의 사회, 그들 자신의 세계와 더불어 기본적으로 관심을 두기때문에 그렇지 못하다 이외에 세계의 여타 지역을 무시한다. 대부분의 신문은 지역 뉴스로 가득차고 세계에 관하여는 거의 대부분 싣지 않는다.
인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은 인간의 보편성-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것 - 에 역시 관심을 둔다. 인간은 대부분 육체적 기능을 공유한다.
 
이러한 인간 보편성이 아니고는 한 문화에 있는 사람들이 타 문화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서로 의사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들 ”로 부터 분리하는 심오한 차이에 가교를 놓을 수 있는 사랑과 신임의 관계를 설정함에서 그 첫번의 단계를 이룬다.이러한 것들 위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다른 보편성을 부가한다.
교회는 새 인간성의 창조를 통하여 종족과 문화의 차이를 능가하는 믿는자들의 하나의 단체라고 불러진다.
언어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목표인 것은 “복음”이다.

인간성의 총제적인 모델
모델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어떤것을 이해하도록 도운다.
축소주의 :우리가 인간 삶에 여러가지 차원들을 인정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설명의 하나의 형태로 줄인다.우리는 사람을 육체적이거나 영적이라는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려한다. 분명히 사람의 영원한 구원은 우리의 최고의 우선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총체적인 복음을 주어야만 한다.성경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우리의 삶의 모든 차원과 관계되어야만 한다.선교 사업은 먼저 하나님의 사업이고 우리는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야만 한다.
 
성층도표적(成層圖表的) 접근
성층도표적 접근이란 그것들을 융합하려는 어떤 신중한 시도도 없이 인간에 관한 다른 이론들을 다른 것 위에 하나를 쌓아 올리는 것을 말한다.그러나 이것들은 함께 모아짐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총체적인 견해를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한다.
복음적 선교사들은 너무도 흔히 이들 영역 중 하나이거나 혹은 다른 것에 사역하는 것으로 스스로 여긴다. 의사들, 교사들, 그리고 농업의 종사자들은 흔히 그들 스스로 육체적 필요를 취급하는 자로 보고 설교자들은 흔히 자신들을 영원한 구원에 그들의 관심을 제한한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인간을 영혼 - 육체의 모든 부분을 보아야 한다.의식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관계를 취급할 필요가 있다.
 
총체주의의 지향
인간이해에 대해 총체적 접근은 축소주의자나 성층의 모델에 의하여 얻어질 수 없다. 우리는 지식이 항상 불완전하고 미완성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신학과 과학이 인간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침과 총체로서 포괄적인 이해에로 이것들 의 통찰을 짜내어야 함은 배워야 한다.
그런 하나의 접근은 다른 연구들이 사람들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갖게 할 수 있는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문화는 인간의 육체적 성격을 형성한다. 인간이
건강과 미 에 관하여 가지는 생각은 서방에서는 날씬한 몸이 매력적으로 미가 부피에 의하여 측정되는 남부 태평양의 통가에서는 여자는 풍만한 모양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다.
어떻게 인간의 과학의 모델들이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이해에 대하여 관계하는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서로 자기의 견해만을 주장할뿐 다른 편은 무시하였다.
보완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일치가 항상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일치가 생기면 우리는 우리의 과학과 신학을 성경과 창조의 빛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양자의 근원인고로 각각의 전망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충돌에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업
2-3세계의 교회들 가운데에서 선교에 증대하는 관심이 있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선교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나 혹은 그녀가 인도에서 봉사하는 아프리카인이든가 스페인에서 그렇게 하는 라틴 아메리카인이든가 통문화적인 환경에서 복음을 전달 하는 자를 의미한다.
 
2. 복음과 문화
 
사도행전의 이방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유대인 개종자들은 유대인의 실천인 할례나 돼지고기의 금지와 같은 그런 타부를 용납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사람들이 타문화에서 기독인이 될 때 우리는 수 많은 결정들에 직면한다. 그들은 여러 아내를 여전히 둘 수 있는가?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음식을 드려야만 하는가? 그들은 옛 종교 습관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선교사로서 이 사람들처럼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들의 노래나 춤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들 대부분의 문제들은 복음과 인간 문화간의 관계를 취급해야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아무 문화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것을 전달하는데 인간 사고의 유형과 언어와 상관없이 그것을 전달할 방법은 없다.
 
문화의 개념
무언중에 부리는 평범한 사람 즉 특별히 가난한자, 변두리의 사람 그들은 엘리트를 대립하는것 이외에도 “문화 ”가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문화를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바를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일단의 사람에 의하여 공유된 사상, 감정, 가치 그리고 행동에 연관된 유형과 산물의 통합된 다소의 체계 로 정의하고자 한다.
인식적 차원: 공유된 지식을 취급지식은 하나의 문화의 개념적 내용을 제공한다.
지식은 인간에게 무엇이 존재하고 어떤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에게 말한다.
문화적 지식은 실재를 분류하는데 사용하는 카테고리 이상이다. 문자가 없는 사회는 다른 방법으로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축적함이 사실이다. 구전의 사회와 글을 가진 사회의 차이와 그들이 지식을 축적하고 전달하는 방법들은 선교사들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데, 혹은 신앙으로 성장하는데, 읽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힌두교 마을들은 설교를 쉽게 피곤하여지고 떠나버리지만 그들은 드라마를 보는데는 밤이 깊도록 끝까지 남는다.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전달하는데 음창, 춤, 잠언, 그리고 다른 방법들의 효과적인 사용을 하였다.
감정적 차원: 문화는 사람이 가지는 감정- 그들의 태도,미의 관념, 음식의 맛, 그리고 옷의 선호, 자신들을 즐김과 슬픔을 경험하는 방법 -을 처리하여야만 한다.
요약하면 문화란 인간 삶의 감정적인 방면을 그 즉시 어떻게 취급하는가에 따라 크게 다르다.
평가적인 차원 : 각각의 문화는 인간관계가 도덕적인지 아니면 비도덕적인지를 판단하는 가치를 역시 가진다. 가치판단은 세가지 형태로 나누어 질수 있다.
첫째로 각각의 문화는 그것들이 참이냐, 혹은 거짓이냐를 결정할 인식적 신념을 평가한다.둘째로 문화적 체계는 인간 삶의 감정적인 표현을 역시 판단한다.세째로 각 문화는 가치를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각각의 문화는 자체의 도덕적 규약이 있고 그 문화 단체가 규정하는 죄가 있다. 그것은 어떤 행위는 의롭다고 판단하고 다른 것들은 비도덕적이라고 한다.
세가지 차원 전체에 있어서 복음 : 선교사들은 그들의 사역에 있어 마음에 문화의 세 차원을 기억하여야 한다.이유는 복음은 이들 전부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감정을 포함한다. 지식과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경배와 복종에로, 즉 예수를 우리의 삶의 주로서 순종하고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감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정을 함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복음의 지식을 감정으로 제시하여야만 한다.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제자화이다.우리는 복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만 하기 위하여 선포함이 아니고 혹은 그들의 감정만 좋게 하기 위하여 선포함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게 하고자 한다.

 
 
 
문화의 표현 - 행동과 산물이다
행동 : 인간들은 그들의 문화에 의하여 대단한 범위에서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모든 행동이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적인 상황 가운데 행동은 세밀히 규정된다.
산물들 :문화는 물질적 대상물- 집, 바구니, 카누, 마스크, 수레, 자동차, 컴퓨터 등등 을 포함한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 살고 그것에 맞추어 나아가야만 하고 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만들고 사용한다.
 
상징체계
북미에서 예를 들면 혀를 어떤 사람에게 내어민다는 것은 조소와 거절을 의미한다. 티벳에서는 그것은 인사와 우의 의 상징이 된다.
형태와 의미 : 대개의 문화적 상징들은 여하튼 그들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한번 창조한 상징들은 문화적 체계의 부분들이 된다.
상징들이 문화의 부분이 되기 위하여 그것들을 인간 단체에 의하여 공유되어야만 한다.상징들은 의미를 형태로 바꿈으로 전달을 가능케 한다.
형태와 의미의 용해 : 어떤 문화에서 경배자들을 형상들을 형태로써 그들의 신들의 형태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다른 문화에서 경배자들은 그 둘을 동일시 한다.
유형과 체계 : 모든 행동이 다 유형화 됨이 아니다. 한편 문화적인 기질과 복합은 주어진 사회의 성원들을 위하여 의미를 가지는 유형들이다.
유형화된 것과 비유형화된 것을 구분함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다. 이유는 문화란 계속적으로 새 기질이 더하여 질 때 변하고 있다. 현대사회가 놀라우리 만큼 다양한 종속문화들로 된 것이지만 그것들은 전달과 운송이라는 연결의 거미줄에 의하여, 상업과 일반 통치기구와 사회관게의 얽힘에 의하여 함께 취하여지는 보다 큰 조직체들이다.
 
세계관 : 사람들은 실재에 대하여 다른 인식을 하기 때문에 세계를 다르게 인식한다 예를 들면 대개의 서구인들은 그들에게 외현적인 것을 무생물의 물질로 된 참 세계라고 여긴다. 남부 그리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여하튼 외현적인 세계를 실재로 존재함아 아니고 그것은 환상이라고 믿는다.
한 문화의 신념과 행동 뒤에 놓인 실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함께 뭉쳐 때때로 세계관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서방에 있는 우리들은 시간을 직선적이고 균일하다고 가정한다. 다른 문화는 시간은 순환적인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문화는 도덕의 다른 기준을 가진다는 사실을 많은 통문화적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북미에 있어서 기독교인들 가운데 주요한 죄는 성적인 행동에 많은 강조를 하였다. 여하여튼 남부 아시아에 온 선교사들은 흔히 그 지역에서 중요한 죄는 자신의 성질을 자제하지 못함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떻든 우리는 인간의 기존 윤리적인 신념을 취급해야 함과 어떻게 죄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소개하여야 하는가? 사실로 죄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무엇이며, 우리 문화의 가치를 다른 문화에 강요함이 어느정도 위험한가? 더욱이 우리가 사람들의 개념에 따라 살지 않을 때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가?
예를 들면 많은 사회에서 아이를 못가짐은 악한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로 본다. 그래서 남자는 그의 첫 아내가 아기를 갖지 못하면 제 2의 아내를 취하여야만 한다. 이들 사회 에서는 선교사 부부가 만약 아이가 없다면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까?
제2의 아내를 위하는 것은 죄에 관한 그들의 신조를 범하는 일이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서 전도함에 있어서 신임을 추락시킴이 된다.
인식적, 감정적 그리고 평가적인 가정을 함께 결속함으로써 세계에 관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에게 편안한 감을 주고, 그들이 옳다고 하는 바를 재 확인시키는 하나의 세계를 보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세계관의 기능 : 한 문화에 깔린 가정들을 함께 묶음으로 사람들에게 세계를 보는 다소의 통일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첫째로, 이들 체계의 신념을 위해 합리적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설명체계를 성립시키는 우리의 세계관은 인식적 기초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둘째로,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감정적인 안정을 제공한다. 강력한 감정은 죽음에 대한 위협이며 무의미에 관한 공포이다. 사람이 만약 목적의식을 가진 죽음을 믿는다면 순교자로서 죽음 자체를 직면할 수 있다.
세째로 세계관은 우리의 문화적 개념을 공고히 한다.
 
 
네째로, 우리의 세계관은 문화를 통합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문화 변화를 감시한다.
세계관은 우리 문화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거절하도록 우리를 도운다. 남미의 부락민들은 균을 죽이기 의하여서가 아니고 악령을 쫓아내기 위하여 물을 꿇이기 시작하였다. 그런고로 세계관은 옛 방법들을 보존함과 오랜 시일을 지나온 문화 가운데서 안정을 제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세계관은 변한다. 그것들의 어느 것도 완전히 통합을 이루지 않으며 거기에는 내적 모순이 항상있기 때문이다
 
 
복음과 문화
 
만약 문화가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법이라면 복음은 어디에 적합할까? 그것 자체가 문화의 특별한 부분인가? 만약 우리가 예라고 하면 어떤 문화를 크리스챤이 되는데 우리가 채용하여야 하여야만 하는가?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 문화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데 유대인들이 되어야만 하는가?
초대교회는 이 문제로 논쟁하였다. 그들이 제시한 대답은 아니요였다.
복음은 그 문화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메세지였다. 그것은 문화적인 윤곽에 제한하지 않는다.
서방문화와 기독교를 동동시함으로 우리의 문화적인 우월성을 보장하게끔 복음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인이 되는데 우리 문화에로 전향 하도록 요구함으로 우리는 복음을 다른 문화에 대해 외국적으로 만들었다.
복음의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나 그것의 신성을 잃지않고 인간의 문화라는 수단으로 전달된다.
거기에는 복음과 인간 문화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을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우리가 관찰할 필요 세 가지 원리가 있다.
 
복음 대 문화
첫째로, 복음은 모든 인간 문화로 부터 구별되어야만 한다.그것은 신0 인 계시이고 인간적인 사변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자의 문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 그것은 적절히 그것들 모든 것에서 표현될 수 있다.
선교사들은 그들 자신의 문화의 배경과 어울러 복음을 가끔 동일시 하였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가장 토착적인 습관을 저주하게끔 함과 회심자에게 선교사들 자신의 습관을 부가하도록 유도하였다. 결과적으로 복음은 일반적으로 외국적으로 보여졌고 특별히 서양적으로 보여졌다.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고 회심이 흔히 문화적인 유산과 사회적인 관계를 부정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복음을 거절하였다. 복음과 문화를 동일시 함에 두번째 위험은 서방 제국주의를 정당화 하였다. 복음과 문화를 동등시함의 세번째 위험은 죄에 관하여 점증하는 상대주의의 의미가 성립되어 왔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가 변할때, 죄의 관념도 그렇다 예를 들면 서방에서 여자들이 바지를 입는것은 한 때의 악으로 여겼다. 오늘날 그것은 널리 착용하게 된 것이다. 죄의 문화적인 정의가 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죄는 상대적이고 거기에는 도덕적인 절대가 없다는 것을 논박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인간과 문화가 판단되어야 할 의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기준이 거기에 있음을 인정한다. 복음은 죄에 대한 용서가 거기에 있다고 한다.
 
문화 안에 복음
둘째로, 비록 복음이 인간의 문화로부터 구분되지만 그것은 항상 인간의 문화적 형태들 가운데서 표현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들의 언어, 상징 그리고 의식과 구분하여 그것을 받을 수 없다. 복음은 사람들이 듣고 믿게 되려면 문화적 형태에서 성육 되어야 한다.
인식적 수준에서 인간들은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여야한다. 감정적 수준에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를 체험하여야만 한다. 평가적 수준에서 복음은 신앙 가운데 응답하도록 그들에게도 전하여야만한다. “토착된것 ”으로 “상황화 ”로써 그것에 대해 이해하고 응답한다.
복음과 서신들은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면에서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전한다. 선교에 있어서 복음의 모든 신빙성있는 전달은 성경적인 전달에 유형화 되어야 하고 좋은 새 소식을 그들 자신의 문화 안에서 사람들에게 이해되게끔 노력하여야만 한다.
 
 
 
문화에 대한 복음
 
세째로, 복음은 모든 문화를 변하게끔 요청한다. 마치 예수그리스도의 생이 우리의 죄 많음에 대하여 저주하였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문화의 심판가운데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상황화도 되어야 하고 선지적으로도 되어야 한다.
모든 문화는 삶을 의미있게, 가능하게 하는 어느 정도의 질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인간 죄성 때문에 모든 문화가 역시 악한 구조와 실행을 가진다. 이것들 중에는 노예, 인종차별, 억압, 착취, 그리고 전쟁이 있다.
나의 참된 토착 신학이란 그것이 공식화된 문화의 긍정적 가치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은 악의 악마적 비인간화의 세력을 표현하는 면들을 역시 도전하여야만 한다.
복음이 선지적 소리를 잃은 곳에 그것은 그것의 메세지를 왜곡하는 신념과 가치에 결합되는 위험중에 처한다.
모든 기독교인과 교회는 계속적으로 복음이 무엇인가, 문화가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 간에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과 씨름하여야만한다.
만약 그렇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상실한 위험 가운데 처한다.
 
 
 

 
 
 
제 2부 문화적 차이와 선교사
 
3.문화적 차이와 새 선교사

우리가 진정으로 이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수 있을까? 이 백성들과 진정 동일화가됨과 그들 가운데 하나의 교회를 심을수 있을까? 우리가 생존도 가능한가? 이런 변화가 생길때 우리는 모든 새 선교사들의 관심들의 하나인 문화적 차이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문화적인 차이들
인간은 대단히 다양한 문화를 창조한다
덜 분명하지만 더 심오한 것은 사람이 서로 관계하는 방법과 그들의 세계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같은 세계를 본다. 그러나 그들의그것을 다른 문화적 안경을 통하여 인식한다. 그들은 그들의 문화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 (문화 )이 그들에 보는 바를 어떻게 색깔을 칠하는가를 흔히 잘 모른다.
두 사람의 미국인 혹은 두 사람의 애굽인까지 만날때 혼란이 없다.
이유는 그들은 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애굽인 목사와 미국인 목사가 만난다면 혼란을 야기한다.
 
문화충격
 
문화충격의 원인들
우리가 새로운 문화에 들어 갈 때 무엇이 심리적 동요를 야기시키는 것인가?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 처럼 가난과 더러움의 광경이 아니다.문화적 충격은 우리가 아이때 부터 학습하였던 문화적인 지도(地圖)와 안내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경험하는 왜곡이다.
 
언어 충격- 새로운 문화에서 언어 충격은 의사 전달의 불가능에 있다.어린아이 처럼 우리는 간단한 일까지 말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계속적으로 오류를 범한다.

일상 업무에서의 변화 - 또다른 괴로움의 하나인 일상업무에서의 변화는 새로운 경에서 단순한 일까지 많은 심리적 정력과 더 많은 시간 아니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관계에서의 변화 - 인간의 삶은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이룬다.다른 문화에서 관게를 유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들은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우리는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다.이유는 우리가 우리를 지탱시키는데 필요한 관계가 거의 없는 스트레스 뿐인 그런 상황에 함께 처하여 지기 때문이다.
그 지역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함은 더 많은 스트레스가 된다.우리는 겨우 그들의 언어를 할 수 있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뉴앙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외롭게 되고 우리 자아의 의문들을 의논할 상대는 한 사람도 없다.하인을 두고 생활하는 것도 하나의 충격이다.하인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문제가 된다.
 
이해의 상실 - 하나의 새로운 문화에서 우리의 옛 지식의 많은 것이 오도(誤導)되지 않더라도 무용하게 된다.우리가 손가락으로 어떤 것을 가르키면 사람들은 감정을 상하게 된다.이유는 우리가 더러운 표시를 하였기 때문이다.
 
감정적 그리고 평가적인 방향상실 - 문화 충격은 인식적 차원을 가짐과 그것은 역시 감정적 수준에서 우리는 상실과 혼돈을 지면한다. 새로운 언어로 의미들을 이해하고 난 오랜 후에도 유모어 풍자, 조소 ,시와 이중적인 캐어 물음과 같은 그것의 훌륭한 감정적 뉴앙스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문화 충격의 증세들
 
새로운 문화에 있어서 초기는 환상적인 새로운 광경과 충격적인 광경의 뒤범벅이다.문화 충격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할 동안은,탐지가 안되게 오는 심리적인 왜곡이다.
 
스트레스를 일으킴 - 첫 임기의 해에 새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제적 위치, 직업, 지리적 위치, 오락수단, 교회의 일정, 사회적 행동 그리고 식사습관에 있어서 현격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들은 다른 문화에로 옮김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생기는 스트레스를 직면한다.
 
육체적 아픔
이상한 환경에서 우리는 쉽사리 건강과 청결에 집착하게 되고 모든 중상을 나타낸다.
심리적 그리고 영적 억압 스트레스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가끔 억압과 실패의 감각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화에서 삶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혼란한 상황을 계속적으로 직면함으로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배움의 긴장에서 압도 당한다.
우리가 만약 실패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문제를 더 강중시킨다. 이유는 실패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원기를 짜내기 때문이다.
 
문화충격의 순환
 
여행자의 단계 -
새 문화에 대한 첫번의 응답은 환상적이다.상냥한 본국인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미몽에서 깨어남 -
여행자의 단계는 우리가 외부에서 온 방문자가 됨에서 부터 문화적인 내재자 가 됨에로 옮길 때 끝이난다.우리는 홀로임을 또한 느낀다. 우리를 그렇게 따뜻하게 환영하였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일터로 갔고 우리의 어러움에 지금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낯설은 문화가 흥분할 것이 못된다. 이 단계는 병이 들었다는 위기를 ㅍ시한다.이것에 어떻게 대처하는 가는 우리가 남아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궁극적으로 새 문화에 적응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결심 - 유모의 나타남은 흔히 회복의 시작을 표시한다.이때 그 사람들과 그 문화에 어떻게 관계하는 가는 중요하다.이유는 우리가 형성하는 적응의 유형이 여기에 우리와 더불어 머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적응 - 문화 충격의 최종 단계는 새 문화에서 불안을 느낄 때 온다.우리는 근심이라는 감정없이 새로운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도록 지금 충분히 배웠다.우리는 여러가지로 새 문화에 적응할 수 있다.
 
 
 
문화 충격의 역전(逆轉) - 우리가 외국에 오래있다가 “본국”으로 돌아 올 때 우리가 역전적인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로 놀라게 한다. 한때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였던 것이 지금은 궁핍한 하나의 세계 가운데 사치스럽고 무의미하게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친척들과의 관계함이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 있어서 나그네가 된다.우리가 돌아온 약 1년간은 음침하고 유쾌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위험 가운데 처한다. 여하튼 때가 되면 우리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리의 본래의 문화에 적응하게 된다. 아뭏튼 우리는 이 문화를 떠난 본래의 그 사람 - 해외 주재의 여러 해를 걸쳐 깊은 변화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과 우리가 우리의 첫 “고국”에 결코 꼭 맞지는 않는다. -이 아니다는 것을 안다.

새 문화에 적응을 배움
 
우리 모두는 새 상황으로 옮김을 따라 위치 전환을 경험한다. 선교사들은 이 새로운 환경을 그들의 고향으로 여기게 되었다.언어를 충분히 배우게 되고 화폐 가치에 대한 감각을 지닌다. 개인들이 새 문화 환경에서 그들이 겪는 쇼크는 범위에 있어서 크게 다르다.부분적으로 이것은 그들의 인격에 달렸다.
 
근심을 인정함 - 문화 충격을 줄이는 첫번째의 방법은 우리의 근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새 환경에 직면하는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은 문화 충격에 가장 손해를 주는 부분이다.
 
 
 
새 문화를 배움 - 하나의 문화를 배우는 것은 역시 전도의 중요한 수단이다.우리는 가끔 우리가 형식적인 선교사로서의 역활보다 문화를 배우는 자로서 들어갈 때 비기독교인에게 증거할 더 많은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 언어와 문화를 같이 배움이 우리 선교의 미래 봉사에 중요하다.
 
신뢰를 얻음 - 새 문화에 진입함이 가장 중요한 단계는 신임을 얻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신임할 때에만 그들은 우리가 하는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선교사업에 있어서 관계란 사업보다 우선에 두어야 한다. 특별히 초기에 그러하다.메시지를 신임함은 메시지를 전한 사람을 먼저 신임함에 의존한다. 우리가 타인으로 하여금 우리를 신임토록 기대할 수 있기 전에 우리가 그들을 신임하여야만 한다.
 
스트레스를 다룸
문화 충격을 취급함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면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다.
 
현실적인 목표를 세움 -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길은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위하여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우리는 단거리 경주로써 소모됨을 피하여만 하고 우리는 평생 사역을 하는 그런 방법으로써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크나큰 불일치로 의하여 생산되는 스트레스를 처리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은 실제적 분량에 대해 우리의 목표를 감소하는데 있다.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도록 배움 - 스트레스를 취급함이 두번째의 길은 우리 자신을 적절한 전망에서 보는 것이다.그것은 우리 자신을 활동의 중심으로서 그리고 중요한 시간으로서 현재를 인식함이 자연스럽다. 유모어는 그것이 내적 안정과 자아우월감의 표시일때 ,자아 중요성에 대한 과도한 인식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약이다.
융통성 역시 스트레스에 대한 치유이다. 용서는 자아 중요성의 거짓 감각에서 생기는 긴장에 대하여 제 3의 해독제이다.감사하라. 감사는 스트레스에 대해 역행하는 다른 하나의 대리자이다.
 
우리 자신을 다룸 - 아무리 노력하여도 초문화적인 상황에서는 우리의 스트레스의 정도가 몇배가 된다.긴장을 덜려고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일어난다. 가끔 우리는 우리의 본래문화에 포함됨이 우리 자신을 재 잠입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새문화를 배우는데는 반드시 스트레스가 동반한다.성장을 위해서는 기본이다.우리가 필요한 것은 스트레스의 회피가 아니고 스트레스의 조정이다.
 
부담을 나눔 - 선교에 있어 짐을 서로 나누어 지는 것은 필연적이다.우리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지도록 격려하는 반면 ,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우리의 자신의 것을 나눌려는 의지와 귿르에게 그 짐을 지고 가게끔 도움을 주는데 인색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영적이고 개인적인 상담을 위하여 갈 수 있는 어떤 사람을 크게 필요로 한다는 것은 선교사로 마땅한 일이다.
 
문화 충격의 저 넘어
 
문화 충격은 대단한 중요한 경험이다.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사회에서 우리 사역의 성격과 결과를 특정지울 수 있는 관계의 태도와 형태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문화 적응에 일어나야만 하는 중요한 변화는 그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는 것 - 우리와 같은 인간 처럼 - 과 그들의 문화를 우리의 문화와 같이 보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와 “그들”로 분리하는 장벽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4 .성육적인 선교사
 
새 문화에 대한 적응은 이 시점에서 시작일뿐이다.우리가 진정으로 문화를 이해하고 새 문화에 들어가려면 문화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성육적인 선교사가 되어야만 하고 문화적인 차이로 일어나는 신학적인 문제를 취급해야만 한다.
 
 
새 문화와의 동일화
 
초문화적인 오해(Cross-Cultural Misunderstanding)
다른 문화에 충분히 들어감에 제일 첫번의 장애는 오해이다.이것은 인식적 방해물 새 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결여는 혼돈에 이르게 한다.
어떤 때는 오해라는 것은 심각하다.왼손으로 선물을 인도인에게 주는 것은 그의 얼굴을 때리는 것보다도 더 모독이 된다.
 
오해를 극복함 - 우리는 극복해야할 두 가지 오해를 가진다.사람과 문화에 대한 오해와 우리에 대한 오해가 있다.이들 가운데 먼저 것은 극복을 하기 위하여 , 우리는 학습자로서 새 문화에 진입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유혹은 우리가 복음의 담당자이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왔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스승으로서 우리는 그 사람들의 습관과 신념을 배움에 대해서 우리의 문을 흔히 닫는다. 우리는 스승으로서 보다 학생들로서 인간 사회에 들어갈때 우리가 보통 복음을 의미있게 나누어 가지는데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한다는 사실이다.
 
내부와 외부의 견해 -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문화를 내부로 부터 배우도록 배운다. 우리가 다른 하나의 문화와 부딪칠때 여하튼 우리는 곧 외부자로서 그서을 보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초문화적인 이해는 가능하며 항상 일어남을 발견한다. 서로의 대한 이해는 완전하지 못하나 대단히 좋은 것이다.
양자의 접근은 선교에 있어서 우리에게 중요하다.우리는 복음을 그들의 사고의 유형에 맞게 번역함에 사람들과 그들의 사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교와 메시지는 다같이 “성육적”이다.그들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하여 한 문화안에서 내부자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은 외부자 - 다른 문화의 성원으로서 선교사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로서 복음 -로 남아야만 한다.
 
자민족 중심주의 -
우리는 우리의 문화는 문명화 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문화는 원시적이고 퇴보적인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다른 문화에 부딪칠 때 우리의 방어는 우리의 문화가 더 나 다른 사람들은 덜 문명화 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 문제를 회피하고저 한다.
자민족 중심주의는 쌍방통로이다.그들 서로는 문명화가 안된 것이라 판단한다. 자문화 중심주의의 해결책은 감정이입이다.우리는 다른 문화와 그들의 습관의 진가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자문화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가 가는 대상지역 문화에서 학습자가 되는 것이다. 이유는 우리의 자민족 중심성은 다른 자의 것에 대한 무지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문화의 사람을 틀에 대고 보는 것을 피하고 오히려 그들을 우리 자신처럼 인간으로 보아야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극복할 수 있다.
 
미숙한 판단 - 우리가 다른 문화에 관계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진가를 평가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그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문화도 다른 것들에 대한 판단으로 군림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상대주의는 대단히 매력적이다.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하여 높은 존경을 보이고 자문화 중심주의나 미성숙한 판단을 피한다.
 
두 세계에서의 삶
우리가 이중 문화의 사람이 될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두 세계와 더불어 산다.우리는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가?
 
거절 - 두 세계의 삶에 대한 해결은 거절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봉사하는 대상의 문화를 거절할 때 이것은 쉽게 이루어 진다. 선교지에서 자신의 문화의 재구성은 복음 전도의 문을 막는다. 또한 우리 자신의 문화를 거절하고 “토착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몇가지 이유로 실패한다.첫째,우리의 첫문화를 거절하는 것이 일어나는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둘째,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는 결코 참된 “토착으로 감”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 셋째, 우리는 항상 노력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외국인이라 본다.네째,우리 첫 문화의 거절은 외부 접촉을 하는 교회에 우리의 유용성을 줄이는 것이다.
 
구획화 - 두 세계에서 삶의 문제 해결의 다른 방법은 구획화이다. 우리는 흔히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에로,그리고 한 문화 가운데서 한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옮긴다. 구획화는 모든 이중적인 그들의 삶의 어떤 영역에서 반드시 사용하는 술책이다.그러나 구획화는 두개 혹은 더 이상의 문화에서 삶으로 야기되는 깊은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통합 - 오랜 지속과 깊은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두개 문화들 사이의 통합을 위하여 일할 필요가 있다.
 
동일화의 수준
 
우리는 삶의 스타일로 동일화를 생각한다.많은 선교사들은 그 지방의 교통과 거주 적응에 더 많은 어려움을 발견한다.집 역시 동일화에 있어서 문제를 제시한다. 어ㅗ떤 동일화의 영역이라도 우리의 자녀들을 취급함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얼마만큼 우리가 그들과 동일화를 추구하나 만약 우리가 그들위에 우리를 두는 사회적 위치에 있다면 거기에는 우리를 분리시키는 장벽이 있을 것이다.
궁극적인 동일화는 그들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에서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우월감과 거리를 가진다면 그들은 곧 알아차릴 것이다.또한 우리가 그들을 정밀 사랑한다면 그들도 이것 역시 깨닫게 될 것이다.우리가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인간으로 볼 때 삶의 스타일과 차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5.서방 선교사들의 문화적 추정
 
북미인과 다른 세계관들
 
미국인들의 세계관의 주제들은 어떤 것들이며 , 다른 세계 지역의 주제와 어떻게 대조되는가?
 
하나의 실재와 합리적인 세계 -
미국인들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실사(實事)세계안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또한 칼데시안의 이원론 사상을 가지고 있다.대부분 미국인들은 인간을 독특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적인 세계를 책임맡은 자로 본다.서방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보다 헬라인들에게 더 영향을 입었는데 그것은 자연은 적대적이라는 견해다.
그들은 영적인 실재와 그리고 물질적인 실재 사이의 이원론과 16c이래 물질세계와 과학에 점차 증가하는 강조를 둠으로 ,우리 북미인들이 그들이 소유하는 바에 의하여 인간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음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행복의 추구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재산과 물질적 위안을 얻으려는 기회를 의미한다. 그들의 물질에 대한 강조는 재산이 사유적으로 소유될 수 있다는 깊은 신념과 연관된다.이러한 소유권의 개념은 부족사회 같은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 북미인들은 발전을 믿는다.우리는 삶의 더 나은 길을 찾는다.그리고 대부분 물질적인 뜻으로 그것을 생각한다.
 
 
 
 
 
분석적 접근 -
또한 그들은 상황 분석을 하기를 좋아한다.우리는 세상을 참이라고 믿을뿐 아니라 그것을 질서정연하다고 믿는다. 상황 분석에 있어서 북미인들은 가끔 도덕적 가치로 지정되는 바 서로 반대되는 카테고리로 실재를 분류하려는 경향이 있다. 북미인들은 일과 놀이에 역시 예리한 구분을 짓는다. 또다른 하나의 북미인의 양분은 공사(公私)의 구분이다.
 
기계적 세계관 -
그들은 합리적 으로 정비된 사회에서 미래를 위하여 계획을 수립하기를 좋아한다. 또 미국인들은 자연에 관하여 마치 그것이 여러부분의 움직임이 외적인 힘에 의하여 결정되는 기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비서방세계에서 무엇이 됨이란 행함보다 우위에 둔다.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를 가진 젊은 영향력 있는 인물을 찾는다.그러나 동양인이나 남 아시아인은 사려깊고 지혜로운 지도자들에게 듣는다.
 
기계적 세계관의 다른 하나의 기본적인 성질은 측정적이다. 생산에 대한 기계적 접근에서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분업적 접근이다.미국의 세계관 중에 가장 근본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개인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벽돌이라는 것이다. 많은 부족들에게서나 동양에서는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벽돌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다.
북미인들의 동일성의 중심에 자아 신뢰가 있다.자아신뢰는 북미인들이 가치들: 자립, 자아실현, 그리고 개인적인 성장의 한다발의 송이에 속한다.자아 신뢰는 필연적으로 세계많은 곳에서 긍정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남아시아에서 이상적인 관계는 하나의 의존성이다.좋은 관계형성에 대한 견해 차이는 북미인들과 남부아시아인 간에 많은 혼란을 유발하였다.
 
북미인들은 좋아하는 존재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준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인 관계에서 성공의 표식으로 본다. 사회적 성공은 성취의 중요한 측정이다. 미국인의 개인주에 대한 하나의 특별하고도 중요한 표현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다.
소유권에 대한 미국인의 개념은 소유권이 부족이나 친척 그룹과 함께 두는 많은 문화에서 공유되지 않고 있다.모든 개인에 대한 북미인들의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의 표현은 박애주의이다.우리는 흔히 도움을 청함에 재빨리 반응을 보이고 재난이 덮칠때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개인 각자의 존엄성에 대한 미국인의 개념은 다른 하나의 근본적 인식 즉 모든 인간의 동등성에 밀접히 결속된다.우리에게 동등성은 공통적인 사회와 경제적 삶의 수준에 든 자가 자동적으로 수평성취를 말함이 아니고 동등한 기회를 말한다.동등성에 대한 강조 때문에 미국인들은 계급구조적인 관계에서는 불안하다. 결과적으로 이것들에서 동등성의 비공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한다.
 
북미인들은 경쟁에 높은 가치를 둔다.승리는 유아기로부터 권장된다. 경쟁과 밀접히 연관되는 것은 자유기업의 관념이다.모든 사람들은 성취를 위하여 동등의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그들은 직접적이고 직면적(直面的)인 경향을 가진다.그들과 일치 않는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려는 솜씨는 북미인들이 외국에 갈 때 하나의 장점이다.
 
 
 
 
 
공간보다 시간의 우선성 -
북미인들은 시간에 높은 가치를 둔다.그것은 많지 못한 것이고 아껴써야만 한다.이유는 그것은 낭비될 수 있고 유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시간에 대한 강조는 비 산업화된 문화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설다.
미국인에게는 시간은 선이다.그것은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다.그것은 자체를 반볷함이 없이 유유히 흐른다.그래서 측정과 계획이 가능하다. 선의 시간은 미래를 지시한다.그래서 북미인이 중요한 것은 과거보다 미래이다.전통적인 아프리카인의 사고는 미개가 아닌 과거에 초점을 둔다. 전통적인 중국인의 사고는 한편 현재에 가장 큰 강조를 둔다.미래에 대한 지향과의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은 젋음에 대한 강조이다.
북미인들이 전통적인 농민과 부족사회에 대하여 가지는 더 많은 근본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토지에 대한 관념과 시간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우리에게 시간은 공간보다 더 중요하다.
 
북미인의 세계관에서 다른 하나의 근본적인 주제는 소리, 촉각, 미각 혹은 후각 보다시각에 대하여 우리의 강조가 놓인다.
책을 읽고 그들의 관념을 관념 자체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알지 못하는 저자의 신임할만한 가치에 그렇게 많이 검토를 하지는 않는다.그런고로 우리는 매일 생활의 경험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관념의 추상적인 체계를 설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북미인들은 기록된 정보에 큰 가치를 둔다. 그리고 그것은 프린트 된 메세지에 더 의존한다. 그들은 문자는 전달의 최고의 형태라고 인식함으로 그들은 학교나 책, 잡지 쓰여진 기록에 굉장히 투자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은 흔히 문맹자를 무식한 사함으로 경시한다.
 
지식을 축적하고 되찾기 위하여 효능적인 기록의 체계에 의존함으로, 북미인들이 지식에 놓은 가치를 둠은 놀란 일은 아니다. 지식 자체를 위하여와 지식의 획득을 위하여학교에 강조를 둔다. 그리고 그것을 얻은 자들은 높은 위치를 부여받는다.
 
우리가 통문화적인 상황에서 일할 때 우리는 문화적인 편중서의 내용과 범위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자문화 중심주의와 상호 오해를 줄이도록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3부 문화적 차이와 메세지
 
 
6.문화적 차이와 메세지
 
문화적 차이는 메시지 전달자에게 영향을 준다.그러나 그것들은 역시 메세지에 영향을 준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최선을 다하여도 비효과적인 전달자가 되는 위험에 빠지고 잘못되면 오해되고 왜곡된 복음을 전달하는 위험에 처한다.
 
상징과 전달
 
상징의 본보기 - 상징의 각각의 체계는 정보의 어떤 본보기를 전달하는데 사용된다.예를 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식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말을 사용하지만 느낌을 전하기 위하여 제스추어와 음성의 톤(TOUN)을 사용한다.
 
상징의 의미 - 상징들을 통하여 우리는 관념, 감정 그리고 가치를 전달한다.그것들은 두가지의 다른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많은 상징들은 매일 생활의 사건을 언급한다.그러나 어떤 사물을 가르킴에 있어서 그것들은 다른 관계된 것들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둘째로, 상징들은 함의적인 의미를 갖는다.다른 문화에서 상징에 대한 외연적인 의미를 배우는 것은 쉬운 반면 함의적인 의미를 가끔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상징을 위한 의미들의 배경을 배운다는 것은 중요하다.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외면적으로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함의적인 의미때문에 오해가 될 것이다.
 
상징의 체계에서 문화적 차이 - 다른 문화들은 다른 상징체계를 가진다.우리는 언어란 다르다는 것을 안다.그러나 우리는 몸짓,소리의 음조,맛,그리고 침묵의 사용하는 부분까지 이해하기는 쉽지않다.
 
번역
 
단어들은 암시적인 것이 많은 함의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번역을 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형태와 의미 - 우리가 하나의 메세지를 새 문화에 번역할 때 우리는 형태와 의미 사이의 관계를 취급하도록 강요된다. 예를 들면, 텔루구어에서는 “목자”란 양을 돌보는 것(지시적 의미)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타락한 술꾼 (함의적 의미 )으로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들었던 메세지는 선교사들이 전달하기 위한 메세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해를 극소화 하기 위하여 오늘의 번역가들은 하나의 강조가 함의적인 의미에 두는 역동적인 번역을 강조하였다.어떤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상징 혹은 단어를 변하게 함을 의미한다. 성경은 회개의 표식으로 “그의 가슴을 치는 ” 세리에 대하여 말한다.니다가 지적하였듯이 이것은 서부 아프리카인에게는 이상하게 보인다.그들의언어에서는 “가슴을 친다”는 용어는 자신의 성취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짐을 단지 의미할 수 있다. 회개를 말할 때 그들은 “그는 그의 머리를 친다”라고 말할 것이다.
 
 
 
함축된 의미의 번역 -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단어들 간의 단순한 일치는 없다.결과적으로 번역에서 항상 메세지의 왜곡이 생긴다.첫째로 거기에는 첫째로 거기에는 첫번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어떤 의미의 상실이 있다. 둘째로 거기에는 원어에서 발견되지 못하는 의미의 부가가 있다.
성경 번역은 분명히 복잡한 과업이고 그것을 착수하는 사람은 특수한 훈련을 요구한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들은 지역 문화에로, 성경적 관념을 번역함에 포함됨으로 그들이 포함되는 많은 면을 알 필요가 있다.
 
메세지와 유사 메세지
 
COMMUNICATION은 송신과 수신의 메세지를 포함한다.
 


메세지

의미 의미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형태 형태

메디아

 
상 황 기능 혹은 목적
 
지역의 언어의 습득이 선교사의 사역을 위하여 중요하다.우리가 복음을 우리가 말하는 바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면 문화적으로 경계를 넘는데 무용하다.
이차적 혹은 유사 메세지는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기본적인 메세지가 이해되는 방법을 결정하는 직접적인 상황을 마련한다. 우리는 기본 메세지보다 유사 메세지를 더 의존한다.제 2차적인 메세지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유사 메세지는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우리 근본의 메세지는 유사 메세지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의 드러난 메세지와 일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메디아와 유사 메디아 - 우리는 동시에 여러가지 메디아를 사용한다.하나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다른 것들은 유사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서이다.우리는 그 사라믇ㄹ이 상기할 구체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제시하게끔 이들 메디아를 사용해야만 한다.
 
수신자와 송신자 - 전달은 송신자와 수신자를 포함한다.송신자는 중개물을 선택함과 메세지를 상징하고 형태 즉 언어 ,제스츄어 , 혹은 기록으로 발신함에 의하여 이 과정을 시작한다. 발신은 많은 요소들에 의존한다.분명히 송신인은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문화적 상징을 사용한다.빌신은 역시 상황을 고려한다.최종적으로 발신은 다종의 배열이다.
수신자들은 과정을 거꾸로 바꾸어 그들이 의미를 바꾸는 상징적인 형태를 수신한다.송신자와 같이 그들은 그들 문화의 신념과 가치 그리고 그들 자신의 인격적 경험을 통하여 그 메세지를 걸러낸다. 수신자는 역시 유사메세지를 수신하고 그것들로 하여금 기본 메세지를 평가함에 사용한다. 우리의 보내는 메세지에 의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이 받는 메세지에 의하여가 아니고 사람들이 받는 메세지에 의하여 측정되어야 한다고 촬스 크레프는 지적한다.즉, 우리의 전달은 수용자 중심이어야만 한다.
 
여과와 피드백 - 우리는우리의 메세지가 오해되고 있을 때를 아는가? 부분적으로 대답은 피드백 -메세지들 듣는 사람을 들음-이다.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메세지를 보내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우리 청자들의 응답을 듣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는 판단자로서 청중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메세지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것을 전달하지 못한자는 분명히 우리 송신자들이다. 피드백은 우리의 전달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수정해야만 한다.
 
분위기와 불일치 - 케뮤니케이션의 다른 장벽은 메세지를 받음으로 부터 사람들을 착란하게 하는 어떤 즉, “분위기”이다.불일치는 다른 한 종류의 분위기이다.외국적임은 통문화적 상황 아래 특별히 불일치의 한 형태이다.우리의 메세지는 아마도 이해될런지 모르나 우리의 방법은 이상하고 착란을 가져오게 한다.
 
쌍방 통행의 전달 - 인격적인 전달은 일방 통행의 과정이 아니라 쌍방이 듣고 배우는 대화이어야만 한다. 쌍방의 전달은 선교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하다.
 
재해석과 응답 - 사람들이 복음을 향하여 가지는 느낌은 메세지가 전달되는 방법과 상황에 의하여 좀더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면 새로히 문맹을 면한 사람은 흔히 인쇄된 종이에 대단히 신임을 둔다. 사람들의 감정은 흔히 전달자를 신임하는 정도에 따라 영향을 역시 바든ㄴ다.만약 전달자가 그들의 눈에 신임성이 없다면 그 메세지 자체도 일반적으로 거절된다.그 문화에서 우리의 전달이 목적에 맞는 메디아를 상ㅇ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의사전달과 선교사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에 대해서 이 모두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효과적인 전달이 우리의 사역에 대하여 중심적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전달의 암시적인 요소에 대하여 더 많이 알 필요가 있다.
세째로, 우리는 우리의 사고에서 수용자 중심이 되어야한다.우리는 당연히 해야할 바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청자 가슴들에 복음에 대하여 그것들을 준비시킴으로 그의 성경을 통하여 활동한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말아야한다. 이것이 없이는 참된 회심은 불가능하다.
 
 
7.비판적 상황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될 때 그들의 옛 문화적 풍속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이들 전통적인 신념들과 실천들에 대하여 응답해야 하는가?
 
전통적인 문화
 
물질적인 문화 - 인간들은 사용과 위안을 위하여 대상들을 창조한다. 아픈 자를 위하여 약을 만든다.인간들으 치료로써 주술과 방어적인 주문을 사용한다. 이들과 더 많은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한 문화의 물질적인 대상이다.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해야만 할까?
 
 
표현적 문화 - 모든 문화들은 위안과 기쁨과 흥분 ,철학자들의 창작적 전시 , 신들과 영들에 대한 신비와 두려움이거나 간에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방법들을 마련한다.보편적으로 음악,기도,이야기 등이다.
 
의례적 문화 - 생의 순환에서의 의례들,탄생,성년,결혼,그리고 죽음과 같은 그런 사건들에 대해 의례와 더불어 삶의 중요한 전이(轉移)를 뚜렷이 함으로 처리한다.이들 의식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성격과 운명 그리고 세계 가운데 그들의 위치에 대한 사람들이 가장 의의 있는인식을 보인다.또 치료와 번영의 의례를 가지는데 인간지식이 실패할 때 많은 사람들은 해답을 얻기 위하여 종교적 혹은 주술적 의식에 귀의(歸依)한다.
 
전통을 취급함 - 어떻게 기독인들은 이 모든 것에 응답해야할까? 어떻게 새 회심자가 문화적인 과거 - 음식, 옷, 의약,노래,춤,신화,의식 그들이 복음을 듣기 이전에 그들의 삶의 부분에 많은 것이었던 모든 것들 -에 관계되어야 할까?선교사ㅏ들은 이 모든 것에 관하여 피선교지 교회에 어떤 채김을 가지는가?옛문화에 대한 결정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이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일에서 계속적으로 직면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옛것에 대한 부정 :상화화의 거절
과거의 선교사들은 흔히 대부분의 옛 풍습을 “이방인의 것”으로 거절하게끔 결정하였고 그런 경향을 보였다.이것은 선교사들의 자문화중심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그들은 복음과 그들 문화를 동등시하고 다른 문화방식들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옛 풍속의 도매적인 거절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첫째로 그것은 채워야될 필요가 있는 공백을 남겼다.그리고 역시 이것은 가끔 선교사의 풍속을 수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전통문화에 대한 도매적인 저주와 더불어 오는 문제는 선교사들과 교회지도자들을 경찰로 변하게 할 뿐 아니라 회심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결정을 내리게 하는 권리를 부인함으로 회심자를 성장함으로부터 막는 것이다.
 
옛것의 수용: 무비판적인 상황화
전통적인 실천에 대한 제 2의 응답으로 그것들을 교회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이 접근은 역시 중대한 약점을 지닌다.첫째로 그것은 거기에는 개인적인 허물과 함께 단체적이고 문화적인 죄가 있다는 사실을 지나쳐 버린다.
무비판적인 상황화의 두번 째의 약점은 그것은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에 대하여 문을 열어 놓음이다는 사실이다.
 
옛것을 다룸:비판적 상황화
옛방법에 대한 무비판적인 거절과 그것들의 무비판적인 수용 양자가 선교 과업을 훼손한다면 우리와 회심자들을 그들의 문화적인 유산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 삼의 접근은 비판적인 상황화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에 의하여 옛 신념과 풍속들은 시험없이는 거절되거나 수용되지는 않는다.그것들은 먼저 의미와 그것들이 문화적인 배경안에서 갖는 위치에 연관하여 연구하게 되며 그리고 성경적 빛에 의하여평가된다.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첫째, 하나의 개인과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과 더불어 성경적으로 취급해야할 필요를 인정해야만 한다.
둘째, 지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는 직접적으로 의문과 연관된 전통적 풍속을 무 비판적으로 모우고 분석하는 가운데 교회를 인도하여야만 한다.
 
 
세째, 단계에서 목사나 혹은 선교사는 숙고해야 할 문제에 관련된 성경 연구 가운데 교회를 인도해야만 한다. 이것은 중요한 단계다.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성경적 교훈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문화적 과거를 처리함이 불가능할 것이다.
네번째의 단계는 교회가 그들의 새로운 성경적인 이해의 빛으로 그를 자신의 과거 풍속을 비판적으로 평가함과 그것들의 용도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문화를 평가함에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그들의 힘을 이끌어낸다.그들은 선교사들 보다 그들의 옛 문화를 더 잘안다.그래서 성경적 교훈을 가진다면 그것을 비판하는데 유리한 지점에 있다.더욱이 그들은 성경적 교훈을 그들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기는데 학습에 의하여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녀와 새 회심들에게 우리 기독인의 분명한 의미를 가르친다는 그것은 중요하다.그래야 이것들은 공허한 형태가 되지 않으며 그것들이 그들이 도출하였던 비 기독교의 풍속들과 혼돈되지 않는다.
 
신학적 근거
 
비판적인 상황화를 위한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상황화와 함께 결정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지도자들에 의하여 내려진 것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에 의하여 된다.우리 모두가 삶의 문제에 대해 성경 적용 가운데 포함될 때 무엇이 방황하는 것으로부터 문제들을 막을 수 있는가? 성경과 기독교 실천에 대해서 대략의 해석에 대해 그런 과정이 문을 열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그런 과도성에 대하여 세 가지의 검토가 있다.첫째로, 성경은 기독교인의 신념과 실천에 대한 최종적이고 한정적 권위로 취하게 된다.
둘째로,믿는 자의 제사직은 모든 신앙이 있는 자가 성령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살에 대한 성경의 이해와 적용에 있어서 그들을 인도하도록 가정한다.
세째로, 거기에 교회의 계속적인 검토가 있다.
 
 
8.제 4의 자아
 
3가지 자아들
 
선교운동을 통해 심어진 교회가 계소적으로 지도권이 선교사들에게 머물러 있다면 교회는 성숙하고 성장하기가 어렵다. 교회는 자전(自傳), 自給 그리고 自營하여야 한다.
1861년경 루돌프 안델슨과 헨리벨의 젊은 교회를 위한 자발적인 교회서립 안내를 채택하게 되었다.
첫째 원리인 자전은 초기 선교운동의 약점 가운데 하나에 대하여 지적하였다.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했으나 이들 교회들은 그들 백성들을 복음화함과 혹은 자기들의 선교사들은 다른문화의 보냄에 대하여 비젼을 가지지 못하였다.
둘째 원리인 , 자급은 더 많은 논재를 일으켰다.선교사들은 젊은 교회들이 그들 스스로 자급함을 배워야 할 것과, 외부의 후원에 계속적인 의존은 성숙과 성장을 방해하는 의존을 만들었음 주장한다.
제 삼의 원리인:자치는 가장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여기에서 테이블들이 둘러 엎어지게 되었다. 젊은 교회들은 그들이자 통치를 할 때 까지 결코 성숙 못할 것임을 주장하면서 그를 스스로의 결정을 할 힘을 원하였다.
 
세 가지의 “자”의 원리는 현대선교 계획의 많은 것을 인도하게끔 계속한다. 그것들은 중요한 관점-젊은 교회들은 세계적 단체인 교회에서 동등하고 독립적인 성원이다-이다.
 
자신학화 제사의 자아
 
대개의 선교운동은 신학적인 위기에 인도하였다.
우리는 국내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그들의 문화에 더 적합한 신학을 발전시킬때 어떻게 응답해야만하는가? 다른 역사 문화적인 배경에서 신학의 증식은 신학의 성격에 관하여 중요한 논제를 제기한다.
 
외국에 있는 본국 지도자들은 새 문화적 상황에서 복음에 나타나는 어려운 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신학적인 응답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문화적인 충격에서와 같이 우리의 과거의 절대는 도전 받게 되고 우리가 주장하였던 확실성은 시험의 대상이 된다.
신학적인 다원주의에 대한 우리의 최초의 반사적 행동은 가끔 그것을 부인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슷한 마음을 가진 신자들의 고립된 단체 안으로 물러선다.
 
성경 신학 그리고 문화 - 복음주의자로서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을 주장한다.우리는 역시 강한 신학적 확신을 가진다. 어떻게 이들 둘은 관계하는가? 우리는 먼저 그들ㅇ을 동등시 하려는 시험을 받게된다.우리는 둘을 혼돈한다.우리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편견이 개재되지 않는다는 것과 성경에 대한 우리 자신의 해석은 오직 참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학이 문화에 의하여 역시 영향을 받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 , 그것은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신학은 인간의 상황 가운데 신적 계시의 이해이다.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
 
신 학
 
특별한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상황
 

신학적 가교 - 우리의 신학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세가지의 것이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에 대한 주의깊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둘째로, 우리 자신의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상황에 대한 주의 깊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세째로 우리는 다른 때에 주어진 성경의 메세지와 문화가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 적합하게 되는 하나의 좋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진리의 검토 - 첫번째의 검토는 성경자체이다.두번째는 진리 가운데서 신자들을 지도하는 성령의 진행적인 역사이다. 세번째는 기독교인의 단체이다.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은 5년 혹은 10년 간격뿐 아니라 50년 혹은 100년 또는 그 이상 의 윤곽 가운데서 복음화와 교회심음에 관하여 생각해야만 한다.이유는 그들은 교회의 토대를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의 기능 - 신학은 실재에 대한 지도들이다.또한 그것들은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는 지도들이다.
무엇에 관한 지도-첫째 신학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행하는가에 대한 포괄적인 묘사를 제공한다. 신학의 두번째 사용은 우리 모두가 가진 암시적인 신학의 관념을 현시하는 것이고 그것들을 검토하도록 둔다. 신학의 세번째 사용은 변증학이다.그것은 우리의 신학을 단단히 결속하고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비기독교인에게 분명히 하도록 함을 도운다. 신학의 네번째 사용은 이단과 투쟁하려는 것이다.
우엇을 위한 지도 - 하나의 신학은 그것이 회심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안의 권고에서 유용함이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우리의 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큰 성화를 요구하는 살아있는 신학이어야만 한다.그럴 때만이 그것은 우리의 청자들에게 신임을 얻을 것이다.
 
상황 가운데 신학
 
상황화의 단계 - 상황화에 있어서 첫번째의 노력은 일반적으로 선교사에 의하여 ,그나 혹은 그녀가 메세지를 그 백성에게 이해할 만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할려고 애쓸때 이루어진다. 교회가 자체 문화적인 배경 가운데 복음을 상황화 함의 질문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중요하다.
 
새 기독교인들을 가르침 - 사역 초기 단계에서 선교사는 지역 문화에서 성경적인 메세지를 상황화함에 지도적이어야 한다.
 
본국인 신학자 양성 - 우리 전도자들이 현지 지도자들로 신학자가 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면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떠나게 될때 그들은 모든 그릇된 교리에 대하여 방황하게된다.
 
초문화적 신학
 
초문화적 신학은 문화적 차이를 초월한다

성 경

초문화적 신학

인디안 신학 라틴 아메리카 신학 서방신학 중국신학 등등

인도 상황 라틴 아메라카 상황 서방 상황 중국상황


 
초문화적 신학의 성격 - 전도적이고 초문화적 신학의 성격은 첫째, 성경적으로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초문화적인 신학은 인간 문화의 제한과 편견을 초월하게끔 추구해야만 한다. 하나의 초문화적인 신학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행동에 초점을 둔다.이것들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중심한다.역사적이고 기독론적이다.
 
 
 
 
초문화적인 신학의 기능 - 왜 우리는 초문화적인 신학을 구하여만 하는가? 하나의 이유는 믿는자의 세계적인 교제를 세우기 위함이다. 둘째는 교회의 선겨에 있어서 부담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문화적 신학을 형성함의 과정은 우리 신학에 있어서 문화적 편견을 더 분명히 보도록 도울 수 있고 우리 신학을 무비판적으로 상황화할 때 나타나는 혼합주의를 피할 수 있게끔 도운다.
 
기독교와 비기독교 종교들
 
비기독교종교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쉬운 길은 우리 자신의 것보다 다른 모든 종교를 거절하는 것과 비기독교 종교들을 저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접근은 교회의 전도와 성숙에 대한 문을 닫는다.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신뢰를 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을 수 있다.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분 안에서 발견된 새 삶을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
 
 
 
 
 

 
 
제 4부 문화적 차이와 이중 문화적 단체
 
9.이중 문화적 가교
 
통문화적 관계 수립
 
이중 문화 단체 - 이중문화 단체란 다른 문화에서 잘 규정된 사회적 역활의 기초위에 서로 관계하는 하나의 현지화된 사회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에서 부터 온 삶들이 다른 문화로 옮길 때 가정을 안정시키고 그 지역 사람들과 어울리게 될 때 시작하는 것이다.
 
문화 부로우커 - 이중 문화적인 단체는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 있다.그것은 그들의 본래 문화의 끈을 유지하지만 서로 만나고 생각을 교환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진다.그런 사람들은 문화의 부로우커이다.문화 부로우커는 흔히 두 세계 사이에서 붙들리게
되어 외로운 것이다. 양 세계 사람들은 가끔 문화의 부로우커들을 불신한다.
 
선교사들 가운데 세대차
 
제일 세대 선교사들 - 첫 임기의 선교사들은 이중 문화의 첫 세대에 속한다.이 시기, 우리는 대부분 이상적이고 일에 대한 큰 열심과 큰 비젼을 가지기 때문에 임무를 수행한다.또한 그들이 기존의 문화를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또한 우리를 방해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계획에 따라 크게 프로그램을 수립할 힘을 가진다.첫 임기자들로서 우리는 프로그램을 주도함에 단지 적당히 성공적일 수 있는 반면 실패자가 될 확률도 높다. 이들은 많은 문화적 충격을 느낀다.
 
제 2세대 선교사들 - 지금 우리는 새 문화에 동화되었고 거기에 익숙하여 진 것을 느낀다.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것뿐 아니라 그들 교회들의 독립과 성숙에 이르도록 돕는 문제에 직면하여 장기적인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제 2세대 선교사들과 경험을 가진 내국인 동역자들은 선교 사역의 크나큰 분담을 긴밀하게 하여 협조하였다.
 
제 3세대의 선교사들 - 이들 그룹은 때때로 고참 그룹이라 한다. 시대는 많이 변하였고 선교사들도 그렇게 변하여야만 한다.우리는 더 이상 식민지 통치와 외국인의 우월성이 용납되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내국인 지도자들 사이의 세대차
세대차는 이중문화에서 본국인 지도자들 가운데 역시 발견된다.첫번째 세대는 가끔 사역을 위한 큰 비젼과 열심을 가진다. 2세대의 현지 지도자들은 이중 문화 가운데에서 활동하는 것과 그들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을 배웠다.
 
 
이중 문화에 있어서 강조점
 
이중문화의 창조
강조할 하나의 영역은 이중문화 자체의 창조를 어떻게 하느냐이다. 외국인과 내국인들이 커뮤니케이션하고 일을 동역할 수 있도록 ,안정된 이중문화를 설정하도록 대답이 주어져야 한다.
 
동일화 - 이중문화를 창출하는데 안내하는 선은 동일화이다. 우리는 동일화를 통해 이중적인 가교를 가로질러 우리는 복음을 더 멀리 전파할 수 있다. 우리가 이사회 안에서 토착적인 역활을 떠맡을 때는 우리는 여전히 우월성에 무의식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가장 깊은 수준에서 동일화는 태도와 더불어 시작해야만 한다.
 
변화 - 변화를 구하고 환영하는 사람들은 대 부분의 사회에 있다.이들이 먼저 선교사들과 관계하게 됨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일화의 추구 - 이중문화의 성원이 직면하는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동일화와 더불어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최소의 적응과 더불어 우리의 첫문화에로 동일화 하려고 기대한다.우리의 첫문화에서 동일성의 상실은 단지 사회적인 것만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불행하게도 많은 선교사들 처럼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중문화 동일성들로 끝맺고 그것들 사이에서 쪼개어진다. 어떤 의미로 이중문화 사람들은 흔히 참된 문화인 고국은 없다.
 
소외 -동일성 문제에 밀접히 관계 되는 것은 소외의 문제이다.사람들이 이중 문화의 부분이 될 때 그들은 여러 정도로 그들의 첫번째 문화로 부터 소외된다. 선교사들의 경우 그들은 그들의 본토 문화로 부터 멀리 있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올 때 다시 한때의 그 안에서의 위치를 발견하기 위하여 기대한다.현지 지도자들은 그들이 백성으로부터 소외되고 외국인과 함께 불신을 당한다.
 
국제적 지도자들 - 선교에 있어서 우리는 국제적 지도자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제 2,3세계의 지도자의 경우에 있어서 소외는 다른 문화 즉 외부의 후원에 의존하게 만든다.
 
자녀들
선교사의 자녀들 - 선교사의 자녀들은 첫번의 문화에 그들이 진정으로 포근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성장하였던 이중문화이다.선교사의 자녀들이 그들 부모들의 첫 문화에 갈때 그들은 큰 문화의 충격을 경험한다.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많은 면에서 그들에게 이상한 문화에 진입하기 위해 준비케 할 수 있다.
 
학교 교육 - 많은 선교사 자녀들은 지금 이중 문화적 학교, 즉 일반적으로 기숙사 제도가 있는 학교에 다닌다.젊은 선교사의 자녀들이 직면하는 하나의 문제는 그들은 가끔 하나님을 그들 부모애(父母愛)의 적수로 본다.직면하는 둘째 문제는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뿌리가 없다는 문제는 대부분의 선교사들 가정과 친밀을 도모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극복된다.
 
재입국 - 성년기 초에 선교사 자녀들은 가끔 외국에서 그들 유년기 배경에 돌아가고자 하는 강한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들은 환멸을 느낀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던 바와는 같지 않다. 부모의 본래의 문화에 적응한다 하더라도 글에게 이것은 항상 제 2의고국일 것이다.
 
내국인 지도자들 - 선교사들과 밀접히 일하는 내국인 지도자들은 선교사 자녀보다는 덜 하나 이중 문화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은 외국인과 연관되는 인상을 받아 외부인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 자녀들이 더 높은 위치로 스스로 진출을 추구할 때 일어나는 긴장이다.
 
 
 
힘의 양도 (讓渡)
선교사 사회 - 선교사들은 서로 방문하여 독특한 문제와 유익을 논한다.때때로 우리는 형식적으로 선교사업을 행정할 힘을 가진 회의를 조직한다. 선교사들이 가끔 묻는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선교지에서 누가 사역을 행정할 권위를 가지는가? 과거에는 대부분 선교지에서 결정은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오늘 날은 많은 선교기구들이 본국 사무실에서 중앙집중적 결정을 내린다.
 
현지인의 단체 - 이중문화에 포함된 현지인은 역시 자신의 세대들과 지위의 수준과 더불어 단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권위와 명예를 위하여 역시 경쟁한다.
 
선교사와 현지 지도자와의 관계 -과거 3세기간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흔히 논란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선교사들과 현지 지도자들간의 문제였다. 흔히 현지 사람들은 비문명화된 종속자로 취급했다. 오늘날 선교지에 대한 식민지주의와 격리의 장벽들은 깨어지게 된 것이다.그러나 너무도 흔하게 그것들은 찾아져 근절되어야 할 교묘한 형태로 잔존한다.
 
교회 - 선교구조
교회의 부분으로서 선교 - 어떤교회에 있어서 선교사업은 교회 혹은 교단 전체에 의하여 실행되는 과업들 중 하나로 보게 된다.선교사들은 현지인 교회로 부터 분리시켜 두게 되는 선교사 회의를 두지 않는다.
 
교회로 부터 구별된 선교 - 많은 교회들이 선교에 대해 비젼을 ㄱ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하나의 구조적 모델이 발전되어 선교부 자체가 어떠한 교회에도 예속되지 않는다.이 모델의 강점은 선교에 대한 강한 열심은 있으나 교회에 대한 약한 관념을 가지게 된다.
 
혼합된 선교의 모형 - 선교는 구조적으로 본국에서는 교회의 부분이 되었고 그러나 해외에서는 선교부와 현지 교회로 구분되었다.
 
다리를 지나 저 넘어
 
이중인의 단체는 복음이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에로 가로 지르는 다리이다. 선교의 효과는 크게 단체의 질과 그 안의 관계형성에 달려있다.
 
 
10.선교사들의 역활
 
위치와 역활
위치 - 하나의 사회는 사람들로 구성된다.거기에는 많은 사회적 경쟁들이 있고 이것들이 각개의 것에서 서로 보완하는 지위와 혹은 위치들을 갖는다. 한 사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사회안에 위치들 가운데 하나 혹은 더 많은 것을 차지해야만 한다.
 
역활 - 사람이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면 그나 혹은 그녀는 어떤 예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행동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특별한 위치와 더불어 연관된 행동의 유형을 역활이라 부른다.
 
다수의 위치들 - 대부분의 개인들은 삶에 있어서 동시에 여러개의 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 위치의 각각은 특별한 사회적 내용과 연관되고 각각은 그것 자체의 기대된 행도의 유형을 가진다.한 사회에서 이들 위치들을 함께 하면 복잡한 사회구조를 말한다.

역활의 짝들과 역활의 마춤들 -
여러가지 역활들은 단 하나의 위치와 연관될런지 모른다.
 
일반 공중 행정가

부모 교 사 동료교사

학 생 청소부
 
 
 
초문화적인 역활의 혼란
 
우리는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움직일 때 큰 역활의 혼란이 기대될 것이다. 하나의 혼란의 형태는 두 문화가 비슷한 위치를 가질 때 일어난다. 두번째 혼란의 형태는 우리가 우리의 본래 사회에서 행하는 역활의 우리의 새로운 사회에 존재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선교사 역활의 정의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많은 다른 환경 가운데 사람들과 내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선교사”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가족의 성원들과 관계한다.
 
선교사와 현지 비기독교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비기독교인과의 관계는 선교 사업 핵심에 놓인다.선교사들이 기독교인들로서 보여질 뿐 아니라 그들 출신 국가의 대표로서 보여진다.서방 식민 통치시대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유럽국가들로 부터 왔기 때문에 “식민지 통치자”들로 보여진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선교사들로서 우리는 보통 우리 국가의 대표로서 먼저 보여지고 선교사로는 다음이다는 사실과 여전히 부딪혀야만 한다.
 
주인 아니면 종 어느 것인가? -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그들은 자주 땅을 경작하는 농노를 사실상 소유하는 부유한 지주에 대한 용어인 후원자로 불렀다. 지주적 역활이 어떤 선교사들로 하여금 더 억압적 지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져다 주는데 문을 닫았다.
 
배우는 자 - 배우는 자의 역활을 수용한다는 것은 선교사로 하여금 새 사회로 들어가 그것의 풍습을 배우는 것을 가능케 한다.이것은 역시 친밀한 관계를 수립함에 문을 연다. 우리는 문화를 배우려는 우리의 소원에 있어 진실하여야 한다. 배우는 자의역활의 신임을 설정함과 한 사회에서 개인적 증거를 위한 문을 여는 반면 그것은 오랜 기간 복음화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역활이 아닐런지 모른다.
 
선교사와 현지 기독교인들
경찰인가 아니면 변호자인가 - 선교사가 행하는 하나의 역활은 “경찰”이다.만약 우리가 “경찰”로서 의를 강요하면 복음은 율법주의가 되고 그 사람들에게 대한 우리의 사역은 손상을 받는다.
 
성자.아니면 구원받은 죄인인가? - 선교사가 빠지기 쉬운 역활은 성자의 역활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그리고 확실히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현지 기독교인들에게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거기에는 성자적 접근과 더불어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먼저, 그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우리가 아는 것보다 흔히 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안다. 두번째의 문제는 우리는 고백과 사죄의 방법을 현지인 지도자들을 위하여 모본을 보일 수 없다는데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자로서 관계하려할 때 우리는 거룩의 텅빈 마스크를 씌움으로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솔직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가장 큰 위험은 우리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것 처럼 행동하려고 할 때이다.
 
영적 부모인가 아니면 형제 자매인가? - 특별히 취급하기 어려운 하나의 역활은 “영적 부모”의 역활이다.우리는 현지교회와 시작 할때에는 그들이 의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곧 독립 그리고 상호 의존으로 성숙해야만 한다.
 
선교사와 다른 선교사들
“선교사”아니면 동료인가? - “만약”거기에 우리가 “선교사”로 역활 할 수 있는 하나의 장소가 있다면 이것은 그 선교지에서 우리의 동료들과 더불어 함에 있다.우리는 선교사 동료들과 경쟁의식에 사로 잡히지만 우리는 이러한 긴장을 풀어야 한다.우리 모드는 위치가 필요하다.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위험은 이것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우리의 사역을 추진함에 단순히 수단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협동과 우의의 다리가 됨보다 우리를 가르는 벽이 될 수 있다.
 
선교사와 선교 행정가
모든 선교사를 유지하는 하나의 민감한 관계는 선교사 행정가와의 관계이다.몇 가지 일반적 평가는 이들 역활의 역동성에 관하여 내릴 수 있다.첫째는 우리는 선교부나 행정당국의 성원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다.둘째로 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마지막으로 충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선교사와 그의 아내
선교사와 남편과 아내는 강한 결혼을 이루워 감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둠이 중요하다.선교사의 환경이 결혼 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스트레스를 첨가한다.선교사들은 가족 친구,낯익은 환경으로부터 고립되고 서로를 후원하고 위로함에서부터 떠나 있다.
선교사의 남편은 그가 그의 아내가 처한 어려운 위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 쌍방의 각자가 의미있는 사역을 하며 성취의 감정을 가지는 역활을 실현시킴이다 -중요하다.
 
선교사와 그의 자녀들
선교사는 그들의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며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너무 바빠 그들 자신의 자녀들을 등한시하는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그들은 배운다.
 
독신 선교사들
하나의 공통된 어려움은 고독 그것이다.새 사회에서 홀로 사는 것은 특별한 은혜와 은사이다.독신이 직면하는 다른 문제들은 지역문화 가운데서 그들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창녀, 성도착과 같은 정도의 이상으로 독신 성년들에게 대한 문화적 역활이 없는 사회에서 해답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독신 선교사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세번째의 문제는 결혼한 부부에 대한 그들의 관계이다.
 
기능적 역활과 所在的 역활
 
오늘날 선교사가 어떤 역활을 하여야 할까에 대한 물음은 크게 놀라운 가운데 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여전히 유지하는 식민주의의 더 교묘한 형태로 부터 스스로 관계를 두절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현대 선교사는 그들의 본래 문화에로 갑자기 돌아올 가능성에 직면해야 한다.어떤 선교사가 취하는 여러 모양의 역활이 숙고할 만한 정도로 섬기게 될 때 그들과 관계를 형성할 것임을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하다.이들과의 인간관계는 여전히 복음이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에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다리이다.
 

11.미완성의 과업
 
복음의 초기 진행
 
기독교의 시작은 장래의 기약이 없었다.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이어 5세기의 기독교는 제국내에서 하나의 다수가 고백한 충정을 회득하였고 선교사들은 아시아 인도 등으로 보내어졌다. 주후 500년에서 950년까지 기독교의 운명은 미지수 인 것처럼 보였다. 1350년과 155년 사이 기독교는 停滯하였다.1500년후 교회는 선교와 로마 카톨릭의 개혁과 그리고 얼마후 러시아 기독교의 갱생을 통하여 새 삶, 제 2의 경험을 하였다.
 
신교의 선교기
 
신교의 선교운동은 18세기 초 경건주의자들과 모라비안들 가운데 시작하였다. 1792년 윌리암 케리에 의하여 침례교 선교회의 창립으로 선교의 흥미가 다른 교회들에 확산되었다. 신교 선교의 초창기는 고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특징이 지어졌다.
신교 선교의 두번째 파도는 19세기에 일어났다.1865년 허드슨 테이러는 중국 내륙으로 이 운동을 유도하였다. 세번째의 세기 19세기에 있어서 상업이 신교 선교전략에서 나타났었다.
오늘의 선교 시기동안 교회의 급성장은 인간 노력의 성공에서 보다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 역사에 대한 증거가 더 많다.하나님은 깨어지고 헌신하였던 사람들을 붙드시고 그의 일을 성취하셨다.
 
현대의 선교의 장
 
20세기 세계는 땅의 모든 표면을 변하게 하고 역시 미래 선교에 대해 심오한 함축된 의미를 가진 거대한 변화로 휩쓸게 될 것이다.
 
인구의 증가
첫번째의 의의있는 변화는 인구증가이다.세계 인구에 있어서 근래의 증가는 우리의 상상을 흔들리게 한다.
 
도시화
문화적 변화의 두번째 물결은 도시화이다.도시화는 먼저 서방의 현실인 반면 그것은 어느 곳보다 2,3세계에 급속히 일어나고 있다.
 
문화적 위기
폭력 - 오늘과 내일의 선교는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점증하는 폭력을 취급해야만 한다. 교회는 폭력의 희생물인 자들에게 복음화하여 봉사하여야 한다.
 
가난과 기근 - 영양실조,문맹,그리고 질병으로 점철된 상황이 대개 5억의 인구가 굶어죽은 것과 같이 일어나고 있다. 서양의 부유함에 대항하는 원인이 불어나감은 이들로 하여금 막스주의와 그것의 혁명적 목표에 열려지게 만들었다.
 
압박과 불공평 - 전세계의 사람들은 압박과 불공평을 점점 더 의식하고 있다. 오늘 날 선교사들은 불공평과 고통에 대해 성경적인 응답을 통하여 생각하며 거기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국가 주의 - 지구를 휩쓸려는 또 하나의 문화적 현상은 국가주의이다.공산주의 정권과 많은 모슬렘 나라들은 그들의 문을 선교사에 대하여 닫는다.
 
비기독교 종교들의 부흥
오늘날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는 종교라는 관점에서 다원적이 되어 가고 있다.
더우기 부분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반사적으로 자극된 비기독교 종교에서 성장하는 투지와 선교 정신이 있다. 아주 이상한 것은 비기독교 종교의 부흥과 함께 세계의 더 교육받은 인구들 가운데 세속주의의 확산이 있다.
 
미래의 도전
 
전통적인 종교의 재흥은 전 세계의 젊은 교회들의 성장하는 활력에 匹敵한다.오늘날 우리는 교회는 진정으로 국제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가 선교지가 됨으로 지상의 교회들은 성격상 선교사가 되었다.한나라에서 교회의 투자에 폐쇄된 문들은 다른 곳에서 열리고 있다. 선교의 행위는 하나님의 첫번 그리고 우선 적이다는 사실이다.만약 어느 교회가 그 과업에 흥미를 잃으면 그일을 할 다른 손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감히 그 책임으로부터 피하지 말아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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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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