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라!
로마서 5:1~8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님 침스키>라는 책이 있습니다. 님 침스키(Nim Chimpsky)는 침팬지의 이름입니다. 침팬지는 인간과 대단히 가까운 동물로 DNA의 98.7퍼센트가 일치한다고 합니다. <님 침스키>라는 이 책은 원숭이의 언어능력을 연구하기 위해 일반 가정에 입양되어 인간의 아기처럼 키워진 침팬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놈 촘스키(Noam Chomssky)는 “언어 능력은 인간에게만 존재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에 행동과학자 B. F. 스키너(B. F. Skinner)가 “그렇지 않다. 동물도 잘 가르치면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반박하면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스키너의 제자인 테라스 교수가 스승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동물실험을 진행하는데, 촘스키의 이름을 조롱할 목적으로 ‘님 침스키’라고 이름 붙인 침팬지에게 미국식 수화를 가르치는 이른바 ‘님 프로젝트’였습니다. 테라스 교수는 태어난 지 2주된 침팬지 님 침스키를 뉴욕의 한 중산층 가정에 입양시켰습니다. 그 가정에서 님 침스키는 인간의 아기처럼 키워졌습니다. 옷을 입히고, 기저귀를 채우고, 양치질도 시키고 아기 재우듯이 재웠습니다. 인간의 아기처럼 키워진 님 침스키는 생후 2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침팬지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침스키는 그 가정의 주부를 엄마라고 인식했고, 수화를 배워 자기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미안한 짓을 하면 수화로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는 등 님 침스키의 언어능력이 계발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침스키가 커갈수록 침팬지 특유의 야생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님 침스키를 맡아 기르던 가정은 내보내기로 결정했고, 님 침스키가 세 살 되던 해 정들었던 가정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님 프로젝트’는 컬럼비아 대학교 소유의 한 별장에서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님 침스키의 야생성은 점점 더 심해져 한번은 여자 연구원의 얼굴을 심하게 물어뜯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연구비 확보가 어려워지자 1977년 ‘님 프로젝트’는 중단을 맞게 되었습니다. ‘님 프로젝트’를 진두 지휘했던 테라스 교수는 이후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님 침스키는 언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단지 조련사의 행동을 흉내 낸 것뿐이다. 언어는 인간 종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저는 그 결론이 의미 있고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 과정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님 침스키는 4년 동안 가정집에서 사랑받으며 사람처럼 지내다가 한 번 버림받고, 이후 연구소에서도 또 한 번 버림받고, 결국 여러 수용소에 전전하다 다른 침팬지들과 똑같은 철장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님 침스키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으며 살 때의 그 생기발랄한 눈빛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뭔가를 아는 것처럼 뉴욕의 가정집에 입양하여 지내던 시절에 찍었던 가족사진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침팬지들이 50년 정도 사는 것에 반해 님 침스키는 버림받은 아픔 때문인지 27년밖에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손에 선택되어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결국 다시 버림받아 쓸쓸히 죽어간 님 침스키의 이야기가 기억이 되면서 한참 동안 제 마음은 무척 우울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로마서 5:1~2의 말씀이 제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성경을 펴 그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하나님 앞에서, 제가 바로 그 님 침스키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님 침스키가 침팬지로서는 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누리며, 인간 가정의 사랑을 받고 지냈던 것처럼, 저 역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조차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 그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님 침스키와 저는 분명 차이점도 있었습니다. 님 침스키는 사랑 때문에 입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의 필요에 의해 실험을 목적으로 입양시킨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님 침스키가 야생성을 드러내어 더 이상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자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어디에 써먹기 위해, 실험을 위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저를 받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님 침스키를 입양한 가정은 님 침스키의 야생성을 감수하는 희생을 포기했으나, 하나님은 죄성 가득한 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저를 자녀로 입양시켜주시기 위해 큰 대가를 치르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제가 아무리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고 하나님 뜻에 어긋난 삶을 살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용납해주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먹는 것은 어쩌면 다 하나님이 자초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이름에 먹칠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냉정하게 벌하시고 버리셨다면 교회는 착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사람들만 모여 있을 테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장 쓰레기통에 직행할 사람들조차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오래 기다리시며 버리지 않으십니다.
침팬지 님 침스키를 향한 인간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 차이인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5:6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자격, 우리의 공로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침팬지에 불과한 님 침스키가 뉴욕의 가정에 입양되어 인간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히 그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8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사랑의 확증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닙니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입니다. 십자가가 사형틀이기 때문입니다. 사형틀을 목에 걸고 다닌다는 것은 ‘나는 사형수이다. 나는 죽일 놈이다’라는 뜻밖에 더 됩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우리가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은, 그것이 로마서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을 확증해주신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인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3:14~15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질 십자가의 의미를 구약에 나와 있는 모세가 든 놋뱀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그 배경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홍해를 건너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만 건너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인줄 알았는데, 힘든 광야 여정이 계속되자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물론 광야여정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면 그런 불편한 여정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곳에서 천년만년 눌러 살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이라는 목표가 있다. 지금 이 고생을 견뎌내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목표의식을 가지고 힘을 내며 전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꿈과 목표가 뚜렷하면 현실의 어려움을 견뎌낼 힘이 생깁니다. 반대로 꿈이 없기 때문에 현실이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된 광야길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의 시간으로, 하나님을 더 붙잡고 갈망하는 은혜의 시간으로 활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며 차라리 애굽의 노예로 살 때가 좋았다고 하면서 패역을 부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같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뱀에 물려 광야에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하여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드렸고,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조치를 취해 주시는데, 그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안 가는 조치였습니다. 민수기 21:8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지금 불뱀에 물려 온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는데, 벰 모양을 만들고 장대에 달아놓고 그것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니 무슨 어린애 장난 같지 않습니까? 차라리 어떤 이를 찾아가 치료를 받으라거나 해독초를 구해 먹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면 쉽게 수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 어이없는 내용이 나옵니다. 민수기 21:9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진짜로 놋뱀을 만들어서 쳐다봤더니 다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 때문에 성경을 믿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맹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들어 쳐다보라고 하더니, 이젠 한 술 더 떠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진짜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쉽게 믿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도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유치한 이야기를 믿다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야.”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저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누가 성경을 이렇게 만들었어? 이러니 사람들이 안 믿지”하고 어이없어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경험과 상식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면, 이것은 이해 안 가는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각의 범위를 조금만 넓혀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여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매우 중요한 배려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것은 비합리적이지만 실현 가능한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놋뱀을 만들어 쳐다보라고 했을까요? 그 명령에는 지금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모두에게 상식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해결책은 “해독초를 캐서 달여 먹어라”라든가 “어디에 가면 용한 의원이 있으니 가서 치료를 받아라”와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놋뱀을 만들어 쳐다보라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합리적이면 뭐합니까? 지금 당장 온몸에 독이 들어가 펴져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해독초를 캐먹으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죽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놋뱀을 쳐다보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해법을 주신 것은 그야말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선의 배려였습니다. 온몸이 마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그들이었지만, 그들 안에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있다면 순종하여 고개를 들고 놋뱀을 쳐다보는 일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놋뱀을 쳐다보라는 요구를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교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누군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그 사람을 굳이 신뢰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을 경우 믿기는커녕 그 말 자체를 들으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몸이 몹시 아픈데 전문 사기꾼이 “어서 병원에 가 봐라. 그러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그 사람의 인격을 믿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신빙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제가 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다급하게 “지금 빨리 잠실역으로 가보세요. 거기에 천 만원짜리 텔레비전을 선착순으로 나눠주고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그 말을 듣고 차를 돌려 달려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내가 평소에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분이라면 어땠을까요? 당연히 믿습니다. 그 말의 내용은 믿기지 않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진실 된 인격을 신뢰하게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내 상식과 경험으로는 놋뱀을 아무리 쳐다본들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상식을 벗어난 하나님의 요구가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있다면, 그런 믿기 어려운 요구조차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능력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놋뱀이라는 도구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놋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놋뱀을 쳐다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변질의 근본원인은 놋뱀을 쳐다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 놋뱀 자체를 대단하게 보는 데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누가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가?’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온전한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세워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그 분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라’는 하나님의 명령 안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 안에는 인간이 가진 지식이나 논리로는 담겨지지 않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지실 십자가를 ‘장대 위에 매딜린 놋뱀’에 비유하신 이유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지식과 경험만을 가지고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 애타게 호소하십니다. ‘너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하여 닫힌 너의 마음의 문을 열어다오. 마음을 열고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너는 살 수 있단다.’
미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가운데 “Let me help you?"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변에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여성이 보이면 다가가서 “Let me help you?"라고 물어 봅니다. 그 말은 ”내가 좀 들어줘도 될까요?“ 라는 뜻의 호의가 담긴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이 말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Let me help you?" ”내가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너를 도울 수 있게 허락해 주지 않을래?” 우리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미신 이 구원의 손길 앞에서 내 상식과 선입견에 갇혀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으신 분이십니다. 손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 뛰어 다니면서 탄원서를 제출하여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냈을 뿐 아니라 ‘안재선’이라는 그의 이름을 ‘손재선’으로 바꿔 자기 호적에 올려 아들로 입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토록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안재선 씨는 죽을 때까지 불행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손 목사님이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자신을 용서하고 사형당하지 않도록 애를 써주고 아들로 삼아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동안 안재선 씨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며 받아서 누리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랑을 누리지도 못하고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죽는 그 순간까지 불행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Let me help you? 내가 너를 도울 수 있게 허락해 줄래?” 우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저 그 물음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안재선 씨가 손양원 목사님의 그 사랑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재선 씨는 손 목사님의 큰 사랑 앞에서도 끝없이 밀려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정죄하며 하루도 편하게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 로마서 8:1~2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로 용서하고 정죄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사탄은 우리에게 상처를 남기고 아픔과 거절감을 심어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거절당했다. 너는 자격이 없다.” 이것은 사탄의 공격이지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혼을 사탄에게 사로잡힌 채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거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저 역시 그런 거절감에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적에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가끔씩 우리 교인들이 나를 별로 좋아하고 있지 않고 있다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도 반대로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으셨을 겁니다. 저 목사가 나를 안 좋아하나? 우리 목장 목자가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나? 물론 항상 그런 거절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탄은 끊임없이 작은 틈을 노려 우리 안에 거절감을 부추기고 자극합니다. 이 거절감은 사탄의 작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날 제 친구 페이스북에서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사진을 보고 저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한 아이가 바닥에 그려진 엄마 품에 안겨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에는 이런 설명이 있었습니다. “인도의 고아원에 있는 소녀가 엄마 품에서 자고 싶어 바닥에 엄마를 그려놓고 살며시 한가운데 누웠다.” 그 사진을 보고 저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외로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현대인들은 사진 속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은 갈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이 있는데 왜 우리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마음에 허전함을 느낍니까? 왜 겨울만 되면 마음이 그렇게 스산해지고 해가 바뀔 때면 울적해집니까?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면 그런 일이 왜 일어나겠습니까? 우리에게 영혼이 없이 육신만이 전부라면 이생의 삶이 온전히 끝이라며,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으로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안에 울리는 이 같은 공허함은 영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공허해 질 때 이렇게 의역해서 듣기를 바랍니다. “Let me help you? 지금 너는 행복하니? 그렇게 부자로 살아서 행복하니? 지금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아서 네 영혼 만족하니?”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더라도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뻥 뚫린 마음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나그네 인생길 가운데 공허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의 허무가 밀려올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Let me help you? 여러분 마음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 거절하지 말고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손미경 CCM - 오 신실하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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