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려라
마태복음 16:13~24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사용하거나 듣게 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는 “자기를 부인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요즘 계속해서 제가 저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라는 물음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떠나지를 않습니다. 사실 제가 목사이고, 모태신앙인데 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저에게 ‘나는 과연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또 나는 지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 계속 떠나지 않는 거예요. 길을 걸어갈 때도, 운전을 할 때도 그 질문이 반복적으로 다가왔고, 어느 날은 밤늦도록 잠도 오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저는 마태복음 16:24의 말씀을 몇 번이고 읽었는데 그전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단어 하나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되는 24절이 ‘이에’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이 이 ‘이에’라는 접속사와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6장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하시는 가운데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16절에서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 대답이 예수님의 마음에 흡족하셔서 베드로를 칭찬해 주시고는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랬더니 방금 칭찬 들었던 베드로가 불쑥 이렇게 말합니다.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그것이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주신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이에’ 로 시작되는 유명한 24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저는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자기를 부인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이 말 속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 두 가지 의미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자기를 부인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생각에 몰두하게 만드는 ‘자기중심적임 태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고하실 때. 그 말씀에 항변하던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 말씀이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자 그 다음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에 ‘생각하지 아니하고, 생각하니라.’를 주목하십시오. 두 종류의 생각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의 삶’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자기중심적인 생각, 이기적인 생각, 탐심으로 가득 차 있는 내 내면의 생각을 버리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 자리에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비극이 뭐냐 하면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해도, 또 설교를 들어도, 심지어 저같이 설교하는 사람조차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덧입는 이게 안 되는 상태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몸은 주님을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내면에 자기중심의 생각, 이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베드로는 버린다는 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버리지 못 했다고 하실 때 베드로는 정말 억울했을 거예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제일 먼저 한 것이 버리는 거였거든요. 마태복음 4:19~20입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무엇을 안 버렸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제자가 될 때 제일 먼저 그물을 버렸습니다. 그거 내 생업입니다. 그거 버리면 나는 굶어 죽을 줄 모르는데 그거 버리는 결단을 택했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그렇게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믿기 위해 버린 게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기 위해 포기한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제가 지난 주간에 깨달았던 것이 바로 이겁니다.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안 버린 것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안 버린 것이 뭐냐? 겉으로 보여지는 그물은 버렸지만 베드로 안에, 그리고 제 안에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태도 이것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에게 제일 절망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분명히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는 제 자아, 여전히 버리지 못한 자기중심적인 태도, 이게 저를 절망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 안에 수많은 봉사자들, 수많은 중직자들, 교회 안에 모태신앙, 그렇게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의 내면에서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자기 자아를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강한 보좌를 형성하고 있는지, 설교가, 말씀이, 기도가 나의 그 강한 자아라는 보좌를 뚫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기 생각하고 다른 생각을 말하면 기분이 나빠지고 그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우리 안에 보좌로 형성되어 있는 자기 생각의 틀을 버리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바로 이 굳어진 내 생각의 틀을 내려놓고, 버리는 작업인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교회에서 말하는 공의,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고무줄 잣대입니까? 이 공의가 나한테는 확 늘어나고 남에게는 확 줄어드는 이것이 공의가 아닙니까? 내 생각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용서가 강물처럼 흐르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전혀 용서가 안 되고 그것을 공의라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으면서 거기에 속고 있는 것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이 시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물은 버렸는지는 몰라도 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생각난 노래가 있습니다. 지금은 목사가 되셔서 CCM 가수로서 활동하시는데, 한때 시인과 촌장이라는 가수로도 활동했던 하덕규 목사님이 쓰신 <가시나무새>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일반 가요로도 히트를 친 노래인데, 여러분들 다 아실 겁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하덕규목사님이 말한 여기서의 ‘당신’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내면세계에서 쉬실 곳이 없어시다고 하십니다. 왜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그러면 내 속에 내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뚯 합니까? 바로 그 다음 가사에서 답이 나옵니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헛된 바램들로 생각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내 안에 주님이 쉬 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그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는 그래서 내 생각이 너무나 많아 주님이 쉬실 곳이 없을 만큼 삭막하고 메마른 그런 내 내면세계를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매우 힘들었던 이유가 여전히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그런 나를 발견하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니까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데 뭐라고 칭찬하십니까?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고 있는데 그 칭찬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를 향한 칭찬의 포인트는 ‘네가 지혜롭다. 네가 똑똑하구나’ 이것이 아니고 ‘네가 이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한 가지 칭찬 듣고, 한 가지 책망을 받았는데 이 둘의 뿌리가 같습니다. 칭찬 받는 것은 주님 의지하는 것 때문에 칭찬 받는 것이고, 책망 받는 것은 주님을 의지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베드로에 대한 칭찬과 책망의 뿌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복잡한 게 아닙니다. 믿음이 좋으냐, 안 좋으냐 점검하는 잣대는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내 속에 탐심이 많고,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고, 내가 제일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는 이 자야가 얼마나 깨뜨려지고 있느냐가 신앙의 성숙의 척도인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탐심, 이것들을 깨뜨려 주님의 생각으로 덧입히려고 몸부림치고 애쓰는 마음이 오늘 우리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부인하고’ 라는 말씀의 의미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내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끊고, 내 탐욕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고 내 마음에 주님이 오셔서 쉬실 곳이 있는 평탄한 마음으로 만들어 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만나자마자 그물을 버리는 일은 너무나도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금방 그물은 버렸지만, 자기 내면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쉽게 버리지 못해 예수님께 책망 받았던 베드로, 그가 언제 자기의 내면에 있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덧입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그 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 상담학에서 보면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서 ‘거짓 자아’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거짓 자아’라는 용어는 그 첫 출발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범죄 한 아담과 하아가 범죄 이후로 취한 행동이 두 가지입니다.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 창세기 3:7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범죄하고 두 번째 한 행동이 청세기 3:8입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상담학에서 말하는 ‘거짓 자아’라고 하는 것은 무화과나무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행위, 그렇게 치부를 가리면 자기 치부가 가려진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거짓 자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나무 밑에 숨어 있으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거짓 자아’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철저하게 자기의 범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로 회개하고 자복을 했더라면 오늘 이 세상이 달라졌을텐데 불행히도 그렇게 하지를 못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초라하게 숲속에 숨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치부를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해서 입히십니다. 창세기 3:21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지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나의 치부를 다 가릴 수가 없습니다. 내 의지, 내 도덕심, 내 윤리의식이 남들보다 조금 더 낫다고 해도 그것으로 내 치부를 다 가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내 치부를 온전히 가려주시는 그 가죽 옷으로 덧입는 이 신앙생활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 그렇게 미숙해서 주님 앞에 꾸지람 듣던 베드로였는데 그 베드로가 언제 그가 온전히 가죽 옷으로,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덧입는 삶을 살게 되느냐? 저는 그 첫 출발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그 초라한 베드로를 찾아주셨던 요한복음 21장이 그 첫 출발이고요. 사도행전 1:8에서 성령이 강하게 임하신 그 사건이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주십니다. 요한복음 21:7을 보니까 거기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저는 이 장면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장면은 똑 같이 범죄 했던 아담과 하와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나무 밑에 숨어 있던 아담과 하와와는 너무 대조적인 말씀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부끄러운 인생이지만, 주님 앞에 실패한 인생이지만, 그래서 옛날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초라한 자였지만 주님이시라는 이 말씀 앞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님 만나러 바다로 뛰어드는 그 모습을 보세요. 이게 베드로의 귀함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께서 만나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유명한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까? 세 번에 걸친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이 질문은 네가 예수 믿고 그렇게 설치고 다니다가 비참하게 몰락하고 옛날 예수 믿기 이전에 자리로 되돌아 낚시질 하는 형편에 빠졌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그 뜻입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이 세 번의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시고 그 다음에 베드로를 온전하게 치유하게 하는 세 번에 걸친 반복되는 또 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네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 자아로 똘똘 뭉쳐져 있던 베드로를 만나주시면서 나는 여전히 네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 라는 말씀을 주신 주님께서 내 양을 치라고 세 번에 걸쳐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가 발견한 깨달음은 시선을 교정하라는 겁니다. 시선을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 치부를 가리고 동산 밑에 숨어가지고 지금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다스리라는 그 가슴 벅찬 꿈을 주셨는데, 소명을 주셨는데 범죄하고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가지고 온통 좁은 시야로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있는 그 베드로를 향하여 네 시선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는 거예요. 네 눈을 넓은 데로 돌리라는 이야기입니다.
<크래비티>라고 하는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우주에 어떤 문제가 터졌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저는 그 영화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 영화의 스토리보다도 뛰어난 영상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광활한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창조의 솜씨를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떨렸습니다. 너무나 우주가 웅장하고 광대하니까 그 우주의 신비감과 경외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영화를 보는 내내 하나님께 죄송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를 보고 있는데도 거기에 압도되어 부들부들 떨리는데, 하물며 그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내가 너무 내 생각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축소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팔다리 자르고, 머리 자르고 몸통 자르고 이렇게 조그마하게 만들어서 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꼭 여러분의 머리에 이해가 되어야 되겠습니까?여러분의 머리에 다 담겨져야 믿으시겠습니까? 광대하신 하나님을 내 알량한 머릿속에 담아가지고 내 필요에 따라서 내 욕구만 충족시키려는 기도에 동원하고 있는 나는 아닌가?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제 가슴이 떨렸던 것은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작게 만들어 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내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게 하셨는데 에덴동산을 통치하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는데 이게 뭡니까? 나무 밑에 숨어 웅크리고 앉아 내가 보는 좁은 세계,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새 봄을 시작하는 희망보다도 아직도 제 마음이 힘듭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목회를 하며 버린 것이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여전히 내 견고한 자아가 깨뜨려지지 않았고, 자기 생각, 자기 아집, 내꺼 이 생각으로부터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저를 보면서 내가 어떻게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씀을 감히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게 정말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강호동이라는 한 때 씨름 천하장사였던 분을 기억하십니까? 그 분은 지금은 연예 프로그램의 유명한 사회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강호동씨가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너무너무 제 마음을 떨리게 만드는 한 마디를 했습니다. 이 분이 천하장사를 몇 번이나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 되었는데요. 이 분이 유명해지기 전에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마산에서 씨름을 늘 일등만 하는 유망주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프로 씨름 선수들이 뉴욕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의 여정에 씨름 유망주인 고등학생 강호동을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이 강호동씨가 뉴욕을 관광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가게 되었는데 그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 102층 전망대에 올라가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왜 울었는지 아십니까? 당시에 자기가 살던 마산에는 10층 이상 되는 건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작은 도시에서 자기가 씨름 잘한다는 생각 때문에 기고만장했는데, 지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보니 자기가 한심하고 그렇게 기고만장했던 것이 억울하고 부끄러워 울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작은 도시에서 씨름 좀 잘한다고 교만해가지고 자기만족에 빠져있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도시 뉴욕의 102층 꼭대기에 올라오니 자기 모습이 한심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강호동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하고 알량한 자기 도덕심, 자기 윤리의식의 무화과 잎으로 자기 치부를 가리고는 진짜 가려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무 밑에 숨어보는 그 세계가 진짜 자기 세계인줄 알고 있는 아담의 모습이 제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이런 좁은 내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넓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 제 인생이 어떻게 될지,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 한 가지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이 발걸음을 뗀다할 때에 우리를 불행과 절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님을 저는 믿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 좁아터진 내 생각을 깨뜨려버리고 광대하신 하나님 생각으로 덧입는 것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이 우주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눈을 들어 이 어지러운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더 넓은 곳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은 나 망하라고 주시는 명령이 아니고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신 그 크신 하나님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여 내 이 알량한 도덕심으로 무장된,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내 치부를 가리는 이것을 다 벗어버리고 주님의 십자가 가죽으로 해주신 옷으로 덧입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무 밑에 웅크려 숨어보는 세상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호령하며,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그렇게 자리매김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인도하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내 안에 여러분 안에 온전히 각인되기를 축원합니다.
남궁송옥 CCM - 우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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