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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음이 흔들릴 때 기도하라

하나님아들 2018. 8. 3. 16:43

 

 

 

 

 

마음이 흔들릴 때 기도하라

마가복음 14:32~42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무척 힘드셨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믿음의 주요, 우리가 항상 바라봐야 할 대상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시지만 또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믿음의 모델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본받을 대상으로도 바라봐야 합니다. 히브리서 4:15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이 우리도 당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방식을 따르기만 하면 예수님이 이기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시험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사순절기에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는 것을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경험하신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처럼 육체의 연약함을 가지고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또 모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살아가면서 함께 느낄 수 있는 고통이고, 또 함께 받을 수 있는 시험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무슨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고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도 너무나 자주 겪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고통입니다.

 

첫째,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느끼신 두려움은 십자가를 앞에 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거 상당히 심각한 두려움 아닙니까? 여러분은 죽음의 위기를 느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제가 병원에서 원목으로 사역할 때 목사로서 제일 괴로운 것은 말기 환자들에게 ‘당신은 이제 삶의 남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인생 말기 암환자’라는 사실을 알려 줄 때입니다. 의사도, 가족들도 환자에게 암에 대한 진단 결과를 직접 알려주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제가 맡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주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셨을 때,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굉장히 두려워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33절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두려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업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시험에 불합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등 크고 작은 두려움이 날마다 엄습해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처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너무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너무 슬퍼서 소리 지를 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울부짖게 되고, 초조해지고, 숨이 가빠옵니다. 정말 괴롭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별의별 두려움에 다 사로잡혀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대학에 못 들어가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공부를 굉장히 잘하던 이웃의 형이 있었는데 대학에 한두 번 떨어지고 군대에 다녀와서 또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내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시험 치는 꿈을 자주 꿉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사역에 대한 고민에 시달렸습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지배했습니다. 심지어 운전면허도 못 딸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이거 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목회자가 되고 난 다음에도 이러한 두려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강원도에서 목회할 때, 새벽에 일어나면 밀려드는 생각이 있었는데, ‘새벽기도회에 교인이 하나도 없으면 어떡하지?’ 주일 날 아침이면 ‘오늘 눈이 왔는데 성도들이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사람들은 제가 강단에 서면 설교가 수돗물처럼 막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때는 ‘강대상에 올라가서 할 말이 없으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있어도 마음이 약해지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면 이렇게 온갖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마음을 짓누르게 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도 이러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계셨습니다. 특별히 곧 닥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숨도 쉬기 힘든 답답함과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둘째,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분노심’입니다

예수님도 분노가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보라, 가롯 유다가 왔느니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사랑하는 제자인데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나를 파는 자’라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분이 매우 나쁜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기조차 싫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화가 나면 이름도 부르기 싫어서 ‘그 놈’, ‘그 자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폭발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이름만 들어도 속이 상하는 그런 이름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힘들게 하고, 넘어뜨리게 만드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롯 유다가 바로 그런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기에 그런 고통이 지금 분노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고통 속에서 하늘 아버지께 깊은 고뇌를 토로하는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본문 36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에 대해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왜 나는 지금 고통 중에 있나? 왜 날 이 지경으로 몰아가나?’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주변에 분명히 조금만 힘쓰면 나를 도와줄 수 있는데, 도와주지 않는다는 원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조금만 힘을 써 주면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데 ‘왜 힘써 주지 않나?’ 하고 분노심이 치밀어 오릅니다.

 

흔히 독립적인 사람보다 의존적인 사람일수록 분노심이 더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들을 의존하다 보니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에 찾아와 “교회가 이렇게 크고, 헌금이 이렇게 많은데 나같은 사람을 안 도와줘?” 하고 화를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눈에는 교회에 있는 헌금만 보이고, 그 돈이 필요한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많은 헌금 중에서 자기는 조금 필요한데 그것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노심이 일어 폭발 직전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의존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인사 청탁의 어려운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인사 청탁을 받았다면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거절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분노합니다. 왜 분노합니까? 전화 한 통 걸어 말 한 마디만 해주면 되는데, 왜 안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만 급해서 앞뒤를 하나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상대가 공인이고, 그것이 옳지 않는 일이라는 것,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내 문제가 저 사람의 말 한마디면 풀린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해 준다고 하니까 분노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미리 내다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실 때까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당면한 과제에만 골몰합니다. 여러분이 요셉의 상황에 놓였다면, 내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왜 꺼내주지 않느냐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내가 노예로 팔려 가는데 왜 나를 안 건져주느냐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느냐고 따지고 들 것입니다. 그것만 보면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더 화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삶에 아무 변화가 없고 자신은 계속 이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더 화가 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능하시다면서 왜 나를 이렇게 나두시나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고난 중에 괴로움이 있고,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예수님도 외로움을 느끼셨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외로우셔서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도 같이 겪으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20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대학에 입학하여 낯선 서울 땅에서 가족들을 떠나 처음으로 따로 생활하는데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연희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대구에서 올라 온 친구와 함께 있게 된 것이 객지 생활하는 저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없었다면 그 시절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자취방에 남게 되었을 때, 다시 밀려왔던 그 외로움, 싸늘한 자취방의 분위기가 정말 싫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어느 겨울, 신촌의 한 분식집에서 혼자서 저녁을 먹는데 그 식당 거울에 비친 제 모습, 혼자 쭈그리고 앉아있는 쓸쓸한 제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배가 아무리 고파도 혼자는 절대로 식당에 가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외로움이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외로우셔서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을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옆에서 잠만 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와 함께 고난가운데 있어 주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제자들과 똑 같습니다. 엎어져서 잠만 잘 뿐 도움이 안 됩니다. 세상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고난 중에는 사람들과 더 말하고 싶은데, 주위에 사람이 안 보입니다. 외로울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싶은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 있으면, 남편과도 대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남편(남의 편)입니다. 아내는 왜 아내입니까? 내 생각은 전혀 ‘안 해’(아내)입니다. 남편은 남의 편을 들고, 아내는 내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두려움과 분노와 외로움을 느끼셨습니다. 두려움과 분노와 외로움은 무일의 마름을 뒤흔드는 고통의 감정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들을 똑같이 마음에 품고 살고 있습니다. 단지 표현만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마음의 고통들을 최종적으로 다 이겨내셨습니다.

우리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세 가지 고통, 두려움, 분노, 외로움을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고통을 기도로 이기셨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우십니까? 분노심이 치밀어 오르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정말 외로우십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려고 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도 이 모든 것을 기도로 이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두려움, 분노, 외로움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 모든 문제, 마음을 뒤흔드는 이 문제들을 이길 힘은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엎드리십시오. 엎드림 외에 다른 답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답을 얻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가진 두려움을 기도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분노를 표현하지 마십시오.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마다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이 어둡고 외로울 때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악한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마구 흔듭니다.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분노를 일으키며, 외로움에 빠지게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아서 심장이 쿵쾅거히고, 호흡도 가쁘다고 합니다.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기도하면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까? 자기 딴에는 이 정도 기도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음성도 들리지 않고 조용할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쉽게 응답이 오지 않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 응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여러분 도대체 기도 응답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두려움과 분노와 외로움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도 응답입니다. 기도를 계속 할 수 있는 자체가 기도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계속해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한 번 정도는 내 힘으로 할 수 있지만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게 될 때, 첫날에 꼭 나오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날 나오면, 주님이 그 다음 날에도 나와서 기도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월요일만 나가야지’ 이렇게 작정한 사람이 금요일까지 나오는 것은 그것이 바로 기도 응답입니다. 하루 기도하고 다음 날에 나온다면, 주님이 주신 힘으로 나온 것입니다. 수, 목, 금 나온 것 자체가 기도 응답입니다. 지금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일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내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를 지치게 만드는 배후에는 악한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기도 하지 못하도록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뛰어넘고 계속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전쟁터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쓰러지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둘째로 기도 응답 중에 또 하나는 기도의 내용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36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함에서 시작해서 아버지의 원함으로 관점이 바뀝니다. 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최고의 기도 응답은 나의 변화입니다. 내가 지금 계속 기도하고 있는 중에 나는 지금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이렇게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이제 곧 최종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마음의 불안이 점점 사라지고 확신이 생깁니다. 분노가 눈 녹듯 녹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친다 해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혼자라서 너무 외로워야 하는데도 흔들림이 없는 것, 이것이 응답입니다.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 뜻대로 시작했던 인생이 ‘아버지의 뜻을 원합니다’ 라는 멋진 표현으로 삶의 목표가 바뀝니다.

 

이유 없는 두려움과 분노와 외로움은 없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먼저 강하게 만드시고, 기도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도의 응답입니다. 예수님도 이 고통을 다 극복하시고 강하게 훈련되어진 상태에서, 그 후에 가장 큰 싸움인 십자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위대하게 승리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변화되어 승리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괴로움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에게 괴로움을 줄 때, 그것을 마귀에게 돌려주십시오. ‘이 괴로움은 내가 받을 필요가 없으니 가져가라!’ 하고 외치십시오. 마귀나 세상이 준 모든 괴로움을 돌려주십시오. 마귀가 받지 않으면 버리십시오. 이 괴로움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십시오. 마음이 어둡고 외롭고 흔들리십니까? 두려움과 분노와 외로움 가운데 지쳐 있으십니까? 예수님처럼 기도로 승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해서 모든 문제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두려움과 분노와 외로움에 시달릴 때 부르던 찬송이 있습니다.

괴롭고 힘이 없을 때, 마음이 유난히도 흔들릴 때 제게 큰 힘이 되던 찬송입니다.

그야말로 힐링송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 찬송을 영으로 부르면 동일한 은혜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과 분노와 외로움이 가득한 이 땅의 회복을 위해 힘차게 선포하며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이 찬양으로 기도를 대신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러주십시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유지영 CCM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출처 : 아침이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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