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라
여호수아 3:5~6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야구해설가가 있습니다. 해박한 야구지식으로 정확한 분석을 하는 분인데,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부터 지금까지 야구중계방송에서 해설을 하는 분입니다. 언젠가 이 분이 방송에 나와서 자신에게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실패의 기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프로야구 초기에 이 분이 해박한 야구 지식 때문에 모 야구단에 스카웃이 되어 감독직을 맡았는데 그게 그만 실패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둔 성적은 15승 40패 2무승부로 아주 초라한 성적이었습니다. 원래 3년 계약을 했는데 성적이 너무 나빠 첫 해,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후 다시 야구해설가로 복귀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두 번 다시 실전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저는 그때 이론적인 야구지식과 운동장에서 실체로 경험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저에게도 적용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야구해설가이기보다는 현장에서 일하는 감독이나 코치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명쾌하게 야구해설을 한다 할지라도 야구해설가는 야구 시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코치나 감독이나 선수는 직접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고 뛰어다니면서 질 수도 있는 경기를 이기게도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지게도 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이런 질문을 저 스스로에게 하곤 합니다. 나는 교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못 끼치는 야구해설가 같은 목회자인가? 아니면 삶속에서 땀 흘리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감독 같은 목회자인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적용해 보시기바랍니다. 교회에서나 목장에서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야구해설가는 참으로 많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래서는 안 돼. 교회가 이래서 문제야.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거 해야 돼.’ 이런 분석은 굉장히 난무하는데, 불행하게도 그것이 삶속에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설가처럼 마이크를 들고 많은 말을 하기보다도 실제 우리 삶속에서 교회가 변화되고 부흥하기 위하여 내가 어떤 작은 몸부림이라도 행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화두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다가 만난 성경 말씀이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3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여호수아 3:5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에서 그의 능력으로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이 믿음을 입술로 매일 매일 선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술로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5절만으로 우리의 신앙이 끝나면 그런 신앙은 야구해설가의 신앙이 됩니다. 안방에 앉아서 선포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말씀의 실제 적용을 위해서 6절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3:6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우리가 안방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면서 입술로 선포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제 그 선포를 바탕으로 문을 박차고 나와서 믿음의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눈앞에 보이는 시점까지 오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가나안을 향한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을 언약궤를 메고 건너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으로 출애굽을 했습니다. 출애굽 여정의 첫 번째 관문은 홍해를 건너는 여정이었고, 사십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출애굽여정의 마무리입니다. 그러니까 물 두 번 건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여정의 전부입니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요단강도 건넜습니다. 둘 다 하나님 은혜로 건너게 되었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또 다른 차이점도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출애굽기 14:14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것이 홍해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자동문이 열리듯이 저절로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광야 사십년을 보내고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 앞에 섰는데 이제는 물이 안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홍해와 요단강의 차이입니다. 요단강물은 갈라지기는커녕 더 범람하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을 잘 표현한 말씀이 여호수아 3:15입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요단강물이 이렇게 언덕에 넘쳐 범람할 정도로 강을 가득 채우고, 더군다나 그 강물이 홍해처럼 갈라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홍해와 요단강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나그네 같은 우리 인생길에 장애물이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언제나 두 종류입니다. 홍해 같은 장애물이 있고, 요단강 같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홍해 같은 장애물은 대박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짝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장애물입니다. 저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특별새벽기도회나 부흥회 때, 혹은 기도원에 가서 특별히 작정하고 기도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기를 가지지 못 했던 자매가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했더니 홍해가 갈라지는 임신의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부는 이혼하기로 결심했는데 부흥회를 참석하면서 마지막 날 재결합하게 되는 홍해의 기적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병이 떠나가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대부분의 간증은 홍해입니다. 월요일 오후 두시까지 오억을 구해야지 부도를 막을 수 있는데 그날 오전까지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전에 나와 식음을 전폐하고 오억을 부르짖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더니, 세상에 한시 오십구 분에 어떤 분이 오억을 입금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홍해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꼭 뒤에 한 마디 덧 붙입니다. ‘그때 십억을 구했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해서 드라마틱하게 홍해가 갈라지듯 한시 오십구 분에 오억이 채워지는 이런 것 보다는 끝까지 안 채워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왜 있습니까? 모두가 다 채워진다면 간증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사실 그런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보다는 요단강처럼 아무리 구해도, 아무리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쳐도 바다가 갈라지기는커녕 물이 더 범람하는 것 같은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초기를 의미합니다. 초신자 같은 신앙,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믿음도 없고 그래서 두려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배려가 홍해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불기둥 구름기둥, 하나님이 직접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많이 받고 연단되고 성숙한 이스라엘백성들이라면 사십 년이 지난 지금, 요단강 앞에서 홍해의 신앙을 벗어버려야 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이런 신앙이 오늘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신앙의 갈등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초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거라. 내가 다 해 주마’ 이런 은혜로 다가오시지만, 오늘 본문에서처럼 요단강물은 범람하고 그 앞에 섰지만 홍해가 갈라지듯 요단강이 갈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각자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그 강을 직접 건너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귀한 우리 성도님들에게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더 성숙해졌을 때 비록 현실은 더 좋아지지 않고 물은 갈라지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의지적으로 믿음의 발걸음을 떼는 강인한 믿음의 용사들이 우리 교회 안에 많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저는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과 같은 난감한 장애물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해답으로 두 가지 중요한 신앙의 균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균형이 뭐냐 하면 ‘실천력을 동반한 솔선수범’입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본문의 상황같은 어려움이 있을 때 제사장들처럼 누군가가 솔선수범하여 그것을 돌파하는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국의 어려운 형편을 아시잖습니까? 정치나 경제나 모든 분야가 지금 만신창이입니다.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요? 다 자기 권리만 주장해서가 아닙니까? 지금은 권리만 주장할 때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헌신하고 누군가는 죽기를 각오하고 범람하는 요단강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이런 실천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변명하지 말고 매를 맞기도 하고, 엎드려서 잘못된 것들에 대해 용서를 빌고 그리고 우리 삶속에서 작은 희생, 작은 헌신 그런 실천의 발걸음을 떼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앞장서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솔선수범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내 목소리 죽이고, 내 기득권 내려놓고, 이제 십자가의 정신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약간 손해보고 약간 희생하는 이런 발걸음이라도 떼기 시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라고 명한 대상은 일반 백성이 아니고 제사장들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저를 비롯한 예수 믿는 사람 모두를 지칭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제가 어느 기도 모임에 갔는데 그 모임은 오늘 이 시대를 걱정하며 함께 기도하는 모임입니다. 뜻있는 분들이 모여 이 시대를 걱정하면서, 이 시대를 이끌어 갈 마땅한 지도자가 없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과거 큰 영향력을 끼친 그런 지도자들이 절실하다. 라고 대화를 하는데 어떤 연로하신 장로님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들, 언제까지 죽은 사람들 이야기만 할 겁니까? 이제는 당신들이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여기 앉아서 걱정만 하지 말고 나가서 그 일들을 하십시오.’ 저는 그 분의 준엄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이제는 네가 발걸음을 떼야만 한다고!!” 이 도전이 저와 여러분의 도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제 스마트폰 카카오톡 머릿글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가 없다.” 저는 이것을 늘 봅니다. 왜 제가 그런 글을 올렸는지 아십니까? 저에게는 개신교 목사로서 태생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모든 대표적인 종교지도자들은 출발 자체가 자기희생입니다. 스님, 신부닙, 수녀닙, 전부다 출발 자체가 출가다 뭐다 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욕망을 비롯해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출발하는 게 바로 신부님, 스님, 수녀님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개신교 목사들은 그런 댓가 지불이 그들에 비해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걸러낼 수 있는 필터가 없습니다. 저질이 많습니다. 그 중에 저도 한 사람이겠지요. 신학교 들어가는 것도 너무 쉽습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배우고, 몇 년의 시간이 가면 졸업이 되고, 목사 시험에 합격하면 별 문제없이 목회하게 되는 그것이 태생적으로 저에게 있는 열등감입니다. 목사의 자격은 자기희생과 인격인데, 너무나 쉽게 주님 가신 길을 가려하는 저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니 제 마음에 그런 성직자로서, 목회자로서의 열등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가 없다.” 라고 날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시에 찔리지 않고 장미꽃만 모으려고 하는 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은 아닌가?
오늘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의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씩만 떼면 좋겠습니다. 두 걸음 세 걸음은 너무 힘드니 아예 바라지마시고 한 걸음씩 만이라도 떼십시다. 큰 돈 말고 만원만 손해보고, 많은 것 보다 하나부터 양보하십시오. 큰 희생을 요구하는 발걸음은 어렵다 할지라도 작은 사랑의 발걸음을 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저도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부디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가운데 내가 양보할 한 걸음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무엇인가? 마땅히 내가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자격이 되지만 그것을 하나만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이 작은 발걸음, 오늘 우리는 여기서부터 영적인 회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균형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균형이 ‘실천력을 동반한 솔선수범’이라고 했고, 이제 두 번째 균형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메는 즉 하나님을 의지하고 떼는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6절에서 제사장들에게 백성에 앞서 요단강을 건너가라 할 때 조건이 뭡니까? 언약궤를 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을 품고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두 가지 균형을 골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신앙의 솔선수범적 실천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균형이 깨져 있는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교회에 십자가가 잘 안 보입니다. 십자가는 강조하는데 실천이 잘 안 드러납니다. 이 두 개가 조화되는 가정, 이 두 개가 조화되는 교회, 이 두개가 균형을 이루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저와 여러분에게 영적인 은혜가 공급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더 많은 영적인 은혜가 공급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계산, 인간의 생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영적인 풍요로움이 우리 안에 우리 교회에 우리 가정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 상식적인 인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저의 생각을 한 순간에 바꾸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책을 읽는데 저를 깜짝 놀라게 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 그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상식을 소중히 여기는 그 태도가 어떨 때는 하나님의 상식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을 받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아는가?’ 가슴이 뜨끔해지는 말씀 아닙니까? 지난 세월동안 우리 정락교회가 세상에 욕 먹을 짓 안 하고, 상식에 벗어난 일 하지 않고, 몰상식한 짓 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상식이 우상이 되는 한, 교회는 영적 부흥이 없습니다. 상식을 존중하되, 상식을 뛰어넘는, 상식을 초월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안에,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유명한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이 두 균형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4:15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그랬더니 주님께서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네가 직접 해라. 이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받는 도전은 하나님은 나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성실을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균형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균형이 뭡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응수합니다. 17절입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제자들은 지금 오해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일하라고 하시는 줄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일하시고, 내 열심과 성실을 기뻐 받으시지만 주님은 내 손에 들려져 있는 재료만 가지고 일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 드려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것으로 기적을 일으키시고 일하시는 겁니다. 내 성실도, 내 열정도 필요하지만 이 열정이 창조주 되시는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 상식을 뛰어 넘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두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영적인 부흥을 갈망해야 합니다. 맨날 상식 상식 그러고 있으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 손에 상식을 뛰어 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 개개인에게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남의 것 가지고 안 됩니다. 내가 직접 주님을 만나고, 내가 직접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방금 신학대학을 졸업한 어떤 초보 전도사님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교회에 부임을 했습니다. 안 그래도 긴장이 되는데 담임목사님이 수요예배 설교를 하라는 겁니다. 한 번도 설교를 안 해보았는데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인근 교회에서 아주 설교를 잘 한다고 알려진 부흥사가 와서 부흥회를 한다는 겁니다. 내가 거기 가서 좀 배워야 되겠다. 은혜 받으러 가는 게 아니고 설교를 좀 배워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가보니까 역시 설교의 대가답게 성도들을 울리고 웃기며 정말 대단했습니다.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안아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가슴이 따뜻한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성도들이 무슨 소리야 그러면서 술렁술렁 대는데, 바로 이어서 이 목사님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여자는 내 어머니였습니다.’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전도사님이 이것을 보더니 ‘아, 바로 저거다.’ 그러고는 그것을 받아 적었어요. 자기도 써먹을려고. 그러다가 이제 드디어 수요일이 되었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예상한대로 성도들은 졸고, 분위기도 냉랭하고, 오늘 같은 이런 분위기에요. 설교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되나 고민하다가 그 부흥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이 전도사님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습니다. ‘여러분 제가 안아본 여자 중에서 가장 가슴이 따뜻한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설교를 저렇게 하나 그러면서 반응이 이상한 거에요. 그 전도사님이 너무 긴장하고 너무 떨어서 그 다음 대사를 까먹었던 겁니다. 막 긴장이 되고 식은 땀은 나고 당황이 되니까 툭 튀어 나온 말이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납니다.’ 여러분 그 전도사님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지난 한 주간 내내 이 썰렁한 이야기가 마음 한 켠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흉내로는 안 된다. 오늘 이 어두운 영적 암흑기에 남의 꺼 가지고는 안 된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오직 내가 경험한 은혜, 그 난감한 요단강 앞에서 절망적일 때 내가 만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게 해주셨던가하는 영적인 은혜의 직접적 체험 없이는 오늘 우리 시대는 안 된다. 일주일 내내 그 생각이 저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태신앙, 오래 예수 믿으신 분들 그 자체가 너무나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부모의 신앙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균형, 하나님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그래서 내가 열심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고 솔선수범하여 한 걸음 손해 보는 이 몸부림도 필요하고, 그런가 하면 언약궤를 메고 하나님 의지하고 그 하나님 능력을 내가 경험해서 요단강을 기어이 건너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열정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니 영어로 ‘인뚜지아즘’(Enthusiasm)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어원을 보니까 그리스어로 엔테우스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엔테우스 라는 단어는 ‘무엇 무엇 안에 있다’ 라는 뜻을 가진 ‘엔’ 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데오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열정, 이 인뚜지아즘은 ‘무엇 무엇 안에 하나님을 둔다’ 는 뜻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이 무기력합니까? 의욕이 없습니까? 우울하십니까? 이런 우울한 것들을 한 방에 날려버릴 열정이 필요한데, 이 열정은 내 내면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실 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에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게 용기를 주시며, 우리 교회를 향한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큰 은혜가 되고 감격이 되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지난 겨울에 무기력했고 우울했던 것들이 그 말씀 한방에 다 날라 갔습니다. 그 새벽에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7:54~56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제가 받았던 그날의 감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세요. 우리 교회와 교인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시기를 원하세요. 이 교회가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거나, 우리 교우들의 신앙이 초라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신령한 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꿈을 주시는데 그날 겹쳐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야.’ 스테반 처럼 사방의 원수들이 돌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들 때, 현실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안을 열고 하늘 문이 열려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 새벽에 제가 받았던 가슴 터질 것 같은 감격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꿈꾸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꿈이 저급한 인간의 욕망과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꿈이 아니라,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놀라운 역사들, 그래서 스테반이 그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났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 삶에 영적인 지경이 넓어지는 그런 은혜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전도단 CCM - 모든 열방 주 볼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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