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를 올려 드리는 인생
열왕기상 3:3~15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나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란 번제를 ‘천 번’ 드린 것이 아니라, 한 번의 번제를 드릴 때에 ‘천 마리의 제물’을 드리는 대규모 제사였습니다. 즉,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최상의’, ‘지극정성’의 제사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지혜롭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로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솔로몬의 모든 사역이 그만큼 힘이 있고 강력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예배로 시작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있습니다. 아벨의 성공 요인 역시 예배에 있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홍수가 끝나자마자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도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새로운 거처가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미국의 시조 청교도들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곳에 정착하자마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하는 민족이나 가정은 이렇게 항상 승승장구합니다.
‘솔로몬’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솔로몬의 지혜’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 지혜를 언제 주셨을까요? 예배를 다 드리고 난 뒤였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입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의 인생에 있어서 형통 요인은 바로 예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린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설령 경제적인 고충과 여러 위기상황 가운데 있디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백성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과연 어떤 예배를 드렸기에 그렇게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솔로몬이 드린 예배는 번제였습니다. 구약성경에는 5대 제사가 나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그 증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가 번제입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번제가 어떤 제사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통째로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일천 마리의 양을 통째로 태워 드린 제사였습니다. 이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손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화목제는 제사가 끝난 뒤에 그 제물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화목하게 되는 것이 화목제입니다. 속건제는 제사를 드리고 난 뒤 모든 고기를 제사장에게 전부 생활비로 주었습니다. 화목제나 속건제를 많이 드리면 인간에게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번제만은 100퍼센트, 하나님께 전부 태워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제사,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번제’라는 뜻의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레위기 1:3에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또 10절에 "흠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4절에도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식으로 “드린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말이 원문에는 “올라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올라가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 13, 17절에는 공통적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 연기를 피워 올리는 제사라는 점입니다. 번제는 고깃덩어리로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그것을 전부 태워서 연기를 피워,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번제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존재를, 내 고깃덩어리를 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전부 태워서 내 몸이 연기가 되고, 내 몸이 향기가 되어 주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온전한 번제로 드리는 방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2:15에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의 향기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향기가 우러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에는 항상 예수의 빛이 비춰져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생활도 예수 믿는 사람의 향기가 드러나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의 자세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온전한 번제의 의미는 내 평생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번제를 올려 드리기 위하여 필요한 ‘번제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이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진정한 번제의 정신 4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번제의 정신은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 - 이것은 번제의 가장 중요한 정신입니다.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은 흠 없는 소나 양의 수컷, 그러니까 가장 정결하고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제물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는 제물을 직접 드려야 합니다. 소나 양의 흠 없는 수컷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을 예물로 드리겠다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아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 그것이 번제입니다.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드리는 주일 낮 예배 시간은 주일 오전 11시입니다. 왜? 언제부터? 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번제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가장 진정한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과거 농경사회였던 한국 교회가 주일 낮 예배 시간을 오전 11시로 정한 것은 농촌에서 가장 바쁘고 소중한 시간이 오전 11시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시간의 안배는 하나님 앞에 최상의 것을 드리고자 하는 한국의 초대교회 교인들의 정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훌륭한 정신을 망각하고 편한대로 편한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번제적 예배정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뭐든지 최상이어야 합니다. 시간을 드릴 때도 최상으로, 자식을 드릴 때도 최상으로 드려야 합니다. 물론 헌금도 최상으로 드려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에서 최상의 것을 누가 누리느냐 이것입니다. 내가 누리는지, 하나님이 누리시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최상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누리시도록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됩니다.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쓸 것인지, 하나님을 위해 쓸 것인지 결정하여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일이 우리가 드리는 번제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좋은 땅이 생겼을 경우, 이 땅을 내가 쓸 것인지,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내어드릴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 우리의 번제입니다. 좋은 인재를 보면 이 인재를 내가 쓸 것인지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릴 것인지 선택하여 결정하는 것이 번제의 정신입니다. 번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나 양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뽑아 하나님 앞에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최상의 것을 선별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런 일천번제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솔로몬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지혜를 받는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가장 좋은 것들은 자기를 위해 써버리고 남은 찌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교회는 쓰레기통 같은데, 사는 집은 휘황찬란하다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번제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장 좋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내 인생의 가장 고귀한 것들, 가장 고귀한 재물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번제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일순위로 두는 번제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번제의 정신은 ‘자원하여 드린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제물 자체가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중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그리고 진정으로 드리기 원하는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십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그 중심을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외형이 아닙니다. 우리의 중심이 주를 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보다 여가를 즐기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연휴 사이에 주일이 끼어 있다면 당장 교인 수가 줄어드는 일이 예사로 일어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기뻐하며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7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이 헌금에 관하여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즐겨내는 것을 사랑하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가지고 우리도 모든 일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기뻐하며 드리는 번제의 일꾼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번제의 정신은 ‘바치는 사람의 죄를 대속한다는 뜻’입니다.
레위기 1:4입니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이 말씀의 뜻은 번제물로 바쳐진 짐승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죄 때문에 제물로 비쳐져야 하는데, 나를 제물로 바칠 수 없기에 짐승을 대신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제물 곧 대속물이 되신 것처럼 번제물이 내 대신 바쳐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번제물로 바치는 짐승을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도 물질을 드리는 것이지만 나를 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인데도 초라한 헌금을 드리는 반면 가난하지만 애써서 헌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이면서 초라한 헌금을 드렸다면 그 헌금은 그 사람 자신이며,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초라합니다.” 여러분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 두 렙돈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과부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과부의 인격이었습니다. 괴부가 드린 것은 헌금만이 아니며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전존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를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과 마찬가지로 자기가치를 스스로 평가해 보십시오. 저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목사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따라서 저의 가치를 제가 올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 앞에 제가 드리는 온전한 헌신과 최선의 충성이 저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자신의 헌신과 헌금,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드러내는 데,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어느 정도 하면 될까?’ 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틀렸습니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드리는 만큼’입니다. 내 가치는 내가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최선의 것, 최상의 것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번제의 세 번째 정신입니다.
네 번째 번제의 정신은 ‘향기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우리에게 남는 것 없이 전부 다 태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모든 것을 불사르고 향기마저 올려드리는 번제가 되길 원합니다. 20대 청년이 올려드릴 수 있는 번제란 어떤 것입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열정입니다. 젊음입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오직 열정 하나로 열심히 몸으로 뛰어야 합니다. 30대는 용의주도함으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40대는 집중력과 관록으로, 50대는 시간과 물질로, 60대는 완숙한 성숙함으로, 70대 이후는 관제와 같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희생제물의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번제의 의미는 각기 달라도 그때그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것이 번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 다 드리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 좋은 체력을 가지고 왜 저러고 있나, 만날 방에서 빈둥빈둥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땅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허락하신 분들이 하나님 앞에 물질로 헌신하지 않고 그것을 짊어지고 죽을 떼까지 갈 태세라면 너무나 답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번제의 삶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주께 전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 전체가 향기와 같이 드려지는 번제가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번제로 드려지는 제물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시대 번제에 제물로 쓰이는 짐승은 황소, 양, 염소, 비둘기인데, 짐승마다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황소입니다.
황소를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부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황소는 양보다 훨씬 비쌌고, 부자들은 주로 황소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의 현대적인 의미는 황소를 바칠 만한 물질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은 황소를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황소를 바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비둘기를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번제가 되지 못합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과부의 황소였습니다. 부자는 그보다 더 큰 황소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번제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드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번제는 하나님 앞에서 공평합니다. 황소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은 황소를 바치고, 비둘기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은 비둘기를 바치면 됩니다. 가끔 우리 주변에서 무조건 많이 드리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헌금을 강조하는 목사님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있습니다. 비둘기와 황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다 황소를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이해입니다. 수준에 맞게 드리면 하나님이 다 받으십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 교우들이 되도록 이면 하나님 앞에 황소를 번제로 드릴만한 물질적인 축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양입니다.
이사야 53:7에서 예수님을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께서는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과 같이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 앞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과 같이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100퍼센트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가 주님 앞에 온전히 드립니다. 제 뜻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사용해주십시오.” 우리에게 바로 이 태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번제가 무엇입니까? 내 뜻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저를 사용해주신다면 제가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라는 자세가 바로 번제를 드리는 자세입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천사가 나타나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했을 때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불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자기 뜻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가운데는 마리아와 같이 온전한 순종의 번제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을 시키려고 해도 귀찮아해서 못 시키고, 일을 시키면 그 일이 싫으니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고, 지금 하라고 하면 나중에 하겠다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번제와 같이 주께 드려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전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어떤 일을 시키든지 하는 것이 종입니다. 내 뜻대로 내 구미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은 종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주인이 시키면 하는 것이 종 된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같이 순종하는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염소입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염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양과 달리 염소는 항상 나쁜 것, 죄인의 자리,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분으로 취급받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염소는 죄,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자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염소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의 완전한 대속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릴 때마다 염소를 생각하고, 우리의 죄악을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넷째, 비둘기입니다.
레위기 5:7입니다.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번제를 드릴 때, 황소나 양, 염소를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리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누가복음 2:24입니다.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이 말씀은 예수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인데, 예수의 부모님도 유대인 중에서 가난한 분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가정에서도 가난하여 소나 양으로 제물을 드리지 못하고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가난을 수치로 여기지 마십시오. 가만을 어려움으로 여길 것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열등감에 빠지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 받은바 은혜대로, 지금의 모습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향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남편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향수를 사달라고 했지만, 지금 당장은 형편상 사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어떤 향수인지 묻고 불러주는 대로 수첩에 적더니 조만간 돈을 벌면 사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아내가 갖고 싶다는 향수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는 남편이나 돈을 벌면 향수를 꼭 사주겠다는 남편의 말을 믿고 행복감에 만끽하는 아내의 소박한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설령 이렇게 가난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할 때도 충성할 줄 알고 부자가 되어서도 충성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잊지 마십시오. 비록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꺼내어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있는 것,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주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삼박사일 뛰어도 끄떡없는 체력의 소유자라면 그 사람은 주를 위해 황소같이 뛰어야 합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 붙들고 주를 위해 황소같이 뛰어야 합니다. 남은 게 시간밖에 없다면, 젊을 때 많은 시간을 바쳐서 주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 사람이 황소로 드리는 번제입니다. 우리는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비둘기를 태우거나 황소를 태워서 번제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우리의 모습이 주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하고 온전한 번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의 제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천번제였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고귀한 것들을 주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솔로몬의 예배를 기뻐하셨고 그래서 전무후무한 지혜를, 장수의 축복을, 부귀영화와 그밖에 모든 축복을 솔로몬에게 주셨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리고 난 뒤 솔로몬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많은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솔로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려지는 거룩한 인생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 이 믿음 더욱 굳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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