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바른 영성에 도전하라

하나님아들 2018. 8. 3. 16:41

 

 

 

 

 

 

 

바른 영성에 도전하라

사도행전 5:1~11

 

 

 

사도행전 5장에는 유명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바른 영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바른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드린 헌금이 교회 안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사도행전 4:36~37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 말씀은 바나바라는 성도가 자기의 밭을 팔아 그 판 돈 전부를 헌금으로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그 액수가 무척 컷을 것입니다. 그 돈은 가난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매우 유익하게 쓰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나바를 칭찬하고,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교인 부부인데, 이 부부가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나바, 너만 돈 있냐? 우리도 있다! 우리도 바칠 수 있다!’ 그래서 그들도 땅을 팔아서 바쳤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5:1~2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만 보면 이 부부도 바나바와 똑같이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지 않은 부분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땅을 팔고 났더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받은 돈에서 일부분을 떼었습니다. 물론 자기 돈을 가지고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땅을 팔아 얻은 돈의 일부입니다” 하고 헌금을 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사람들 앞에서 그 돈이 땅 팔아 얻은 금액 전체인 척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사람들에게 공명심도 채우고 자신들의 실리도 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머리가 참 좋다, 머리를 참 잘 돌린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적으로 머리 좋은 것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가 한 일을 속이는 행위로 여기시고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그것이 본문 3~5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한 필요가 없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말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속였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아나니아가 한 행동이 뭐 그렇게 잘못이라고 죽음이라는 큰 징벌을 내리십니까? 사실 헌금을 속인 것은 그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작은 행동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작은 행동 이면에 그들의 마음 전체가 있습니다. 그 마음 전체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눈을 더 많이 의식했습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영성은 깨집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바른 영성은 무엇입니까? ‘바른 영성’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삶, 이런 삶의 자세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습니까? 점잖은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사람의 눈과 칭찬만 의식하는 자는 바른 영성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영성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과 정직함입니다. 내 속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물질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를 바쳐야 되는 지 아십니까? 신명기 6:5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원하시느냐 하면 100퍼센트입니다. 100퍼센트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영성입니다. 그 영성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겉으로 드러난 것은 땅 판 돈을 떼먹는 모습이지만, 그때 하나님이 보신 것은 그 마음 전체의 부패함을 보신 것입니다. 바른 영성은 속마음 전체의 진실함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둘째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속사람이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작은 행동들이 우리 속마음을 들여다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한 5분, 10분 늦는 게 뭐 그렇게 죽을죄입니까?” 죽을죄 아닙니다. 하지만 지각이 누적되는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예배에 지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배 지각은 “나는 예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하는 고백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느 모임이든지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느 집회에 20분을 지각한 적이 있습니다. 집회 장소까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승용차로 길이 막혀도 한 시간 반 정도면 넉넉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예상외로 심한 정체구간이었습니다. 결국 늦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께 굉장히 죄송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한 거 아닌가? 하나님께 마음을 별로 안 둔 게 아닌가?’ 하나님과 그 집회를 소중히 생각했다면, 도로 사정까지 고려해 늦지 않게 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각이라는 행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의 뿌리에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함, 무시하는 마음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은지 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사람의 속마음은 그렇게 작은 행동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결혼식에 축가를 부른다고 합시다. 축가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준비된 몸과 마음으로 결혼식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가보면, 옷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나와서 축가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나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늘 입고 다녀서 해진 청바지, 입고 자기라도 했는지 심하게 구겨진 윗도리 같은 것을 입고 전혀 준비가 안 된 모습으로 나와서 축가를 부르는 것은 신랑신부의 결혼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외모나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불경기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보면, 다들 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LA에서 학원을 하고 있는 한 성도만큼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불경기이지만 학교나 학원 사업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리 경기가 어려워도 아이들 학비는 안 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학비를 줄이지 않는 그 행동 하나에서 ‘아! 정말 자녀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구나! 자녀를 잘 키우기를 원하는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한편, 제가 부목사 시절, 어느 성도는 불경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헌금 밖에 줄일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실제로 헌금을 줄이느냐, 안 줄이느냐 하는 것은 작은 문제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입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서 속마음을 읽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은 절대 손댈 수 없고, 고민 안 해도 그만인 헌금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만약 그럴 때, ‘나는 다른 것은 다 줄여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은 줄일 수 없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그 작은 행동 하나를 통하여, 그가 보통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것처럼 교회에서 점잖게 웃고 다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한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전 캐어 서비스라는 선교 단체가 있습니다. 의료진들과 일반인들이 자비량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개안수술을 해주는 선교단체입니다. 그들은 여름휴가 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해외로 선교를 나갑니다. 그들은 선교시기에 맞춰 휴가를 얻기 위해 연초부터 기도한다고 합니다. 많은 직장들이 7~8월에 직원들을 한꺼번에 휴가 보내기 때문에 그들이 그 기간에 휴가를 얻을 수 있도록 직강의 여건과 상사의 마음을 열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허락을 받아냈다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 마음, 바로 저 마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행동 하나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충만해 있는 마음으로 느껴졌습니다.

 

영성은 우리 행동의 작은 단면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진짜 속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죽음에 처하게 된 것은 너무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본문 5~6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 항상 두려움이 듭니다. 아나니아의 이야기가 어찌 남의 이야기이겠습니까? 내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말로만 하나님을 섬긴다 하고 실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이 진심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죽는다 하면 저도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죽이신 것은 초대교회의 순수함을 유지하려고 특별하게 하신 사역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참아 주고 계십니다. 만약 오늘 아나니아처럼 잘못한 사람을 다 죽이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느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진심이, 제 속사람이 주님께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제 영성이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성은 지극히 작은 행동 하나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행동을 잘 하자’라고 마음을 먹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망이 충만해지기를 원합니다.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되기를 간구해 변화 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른 영성은 바른 교제권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자기 의지와 믿음만으로 온전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역자들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영성을 체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교제권 안에서 체크 시스템이 작동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에게 이 체크시스템이 바로 작동되지 못하였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아나니아가 돈을 감추자고 했를 때 그의 동역자인 아내 삽비라가 “그러면 안 돼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돼요” 하고 눈물로 호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아나니아가 그런 악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악한 일을 계획했더라도 아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금식이라도 하고 몸부림쳤다면 그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어떠했습니까? 팀워크가 좋았습니다. 보통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이 팀워크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팀워크가 아니라 악의 팀워크였습니다.

 

성경에서 팀워크가 좋은 부부 한 쌍을 꼽는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들 수 있습니다. 브리스길라라는 아내와 아굴라라는 남편은 좋은 팀워크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고, 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섬김’의 팀워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이에는 악의 팀워크가 있었습니다. 한쪽이 “불순종하자! 속이자!” 할 때 팀워크가 아주 잘 맞았습니다.

 

신앙 있는 미혼의 젊은 남녀가 교제를 나눌 때, 상대방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이것 한 가지만 분석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사귀기 1년 전과 현재의 자기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민약에 한 형제가 어떤 자매와 사귀기 전에 주일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까지 빠지지 않고, 교회 봉사도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주일도 잘 안 지키고 교회 봉사에서 면제 된 것처럼 생활한다고 합시다. 이럴 때 그 자매는 누구입니까? 바로 ‘삽비라’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장 헤어져야 합니다. 악의 팀워크가 너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인생을 망칩니다. 반면에 기독교인이지만 주일도 잘 안 지키고 교회 봉사도 전혀 안 하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문제투성이였던 한 청년이 어떤 자매와 교제를 시작했다고 합시다. 1년 후에 그는 주일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고 또 교회봉사도 앞장서서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가 만나는 자매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브리스길라’입니다.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서로에게 미친 능력을 맛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제권이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와 교제하느냐, 그것이 내 영성의 수준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교제권이 좋아서 얻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학교의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기만 해도 자기가 나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에서는 그런 생각을 안 합니까? 영성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과 교제해서 내 영이 풍성해지고 성장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왜 인생의 다른 교제권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영적인 부분에서는 소홀한 것입니까? 교제권이 바로 우리 자신의 영성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하고 교제하고 있습니까? 교제권 가운데 영적인 체크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성을 체크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자신의 양심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체크해 주십니다. 세 번째, 동역자들입니다. 아내, 남편, 친구 등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만들어 줍니다. 바른 교제권은 하나님을 향하고, 유혹에 무너지지 않게 든든하게 지켜주는 철옹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믿음을 무너뜨릴 사람들과만 교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성이 있다고 하면서 불신자하고만 사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성이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인생을 걸 수 있습니까? 정말 영성이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인 철옹성을 구축하기 위해,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바른 교제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속으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저버리게 됩니다. 영성은 곧 바른 교제권입니다. 건강한 믿음의 교제를 통해 영성을 든든하게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바른 영성이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영성이란 자기를 힘들게 하는 환경 때문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초대교회는 완전한 퍼펙트한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교인이 있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역사상 교회가 완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제도라고 하는 것은 항상 문제가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교회 제도는 나무껍질과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무껍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껍질이 나무의 생명을 지켜줍니다. 나무껍질을 없애버리면 나무는 쉽게 병에 걸리거나 수분이 빠져 말라죽게 됩니다. 때로는 교회의 제도가 나무껍질 같이 죽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필요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껍질은 그 안에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 좋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멀리서 보면 괜찮을지 모르지만 가까이 가 보면 교회 제도는 죽은 것 같습니다. 우리 정락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락교회는 좋은 교회인 줄 알았는데 와 보니 아무 것도 아니네요”, “아! 무슨 교회가 이래요?”, “교역자들이 뭐 저래요?”, “성도들이 왜 이래요?”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한편으로는 맞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틀렸습니다. 맞는 말인 이유는,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모인 교회가 문제투성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연약한 사람들, 죽은 나무껍질 같은 제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썩고 깨지고 부족한 점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교회에 와서 썩은 나무껍질 같고 연약한 부분들을 바라보면서 낙심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교회가 다 썩었다고 그러면서 무조건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은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 교회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가만히 계실 것 같습니까? 필요한 일꾼들을 보내주시고 성령을 내려주셔서 건져주십니다. 그러니 지나친 낙심은 불신입니다. 가정이나 개인의 문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집은 끝났어, 소망이 없어”, “내 인생 끝났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낙심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게십니다!

 

구약성경 룻기서의 초반부를 보십시오. 룻은 이방 여인이 아닙니까? 과부가 아닙니까? 겉으로는 아무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룻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니까, 보아스를 만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불쌍한 여인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메시아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바른 영성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영성의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사자굴에 던져져서도 찬송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풀무불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절망의 불속에서 헤쳐 나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영성이 있습니까?

 

영성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 시간, 진정한 영성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향해 속마음 전체의 진실함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설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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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침이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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