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스크랩] 사도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소 아시아 지역

하나님아들 2018. 7. 12. 22:42

[성경인물] 사도 바울 ④ 제1차 전도여행(A.D 44-48년)-소아시아지역


제1차 전도여행 [A.D 44 ~ 48(?)년]

 

 

 

 

 

 

* 전도일지 (행13:1-14:28)

   1. 안디옥(시리아) > 실루기아 > 살라미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받고 전도목사로 파송받아 1차 전도여행을 떠남.

  2. 바보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소경이 되게 함.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임.

   3. 버가(밤빌리아)

      동행한 마가 요한이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함.

   4. 안디옥(비시디아)

      일부 유대인들의 시기로 바나바와 함께 핍박받음.

   5. 이고니온

      돌에 맞을 뻔함.

   6. 루스드라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고침. 돌에 맞아 죽을 뻔하다 살아남.

  7. 더베

  8. 이고니온과 안디옥

     제자들을 격려하고 교회의 장로를 세움.

  9. 비시디아 지역 >버가 >앗달리아

10.  안디옥 도착

     전도여행을 보고함.


바울의 대 전도여행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대한 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행 13:1-3). 교회는 이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전도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요한 마가가 조수로 동행하였다. 

 

 

이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 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전도여행인데, 사도행전 13장,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왜 이 코스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때 소아시아의 남해안을 따라 전도할 계획이어었는데, 버가에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으므로 건조한 고원 지방인 갈라디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한 수리아, 길리기아의 주변 지방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하는 뜻으로 이 여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전도여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는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 이것은


첫째, 동포를 구원하려는 생각에서였으나,

둘째,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경건한 이방인 구도자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진다. 초대 기독교가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이미 유대교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으로 양육되고 있던 이방인 구도자가 계속 기독교로 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재빨리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바울은 단순히 설교하고 신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를 세우고성도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귀로에 자연스럽고 안전한 더베 다소 안디옥의 코스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다시 순회한 것은 이와 같은 교회 조직을 촉진시키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열렬한 전도자임과 동시에 용의주도한 목자인 바울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도여행 후 바울과 바나바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말하고 감사했다. (인터넷자료)

아굴라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지인 고린도에서 만난

  성령이 충만한 믿음의 부부로 천막짓는 일을 하며

  바울의 사역을 돕는다.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행전 18:1-3)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16:3-4)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브리스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영] Aquila and Priscilla 초대교회의 유력한 신자 부처로, 바울의 전도의 협력자(고전 16:19,딤후 4:19,롬 16:3-5).


이 부처의 이름은 신약에 6회 나오는데(행 18:2,18,26,롬 16:3,고전 16:19,딤후 4:19), 그중 4회는 아내 브리스길라(정식 이름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보여진다(행 18:18,26,롬16:3,딤후 4:19). 이것은 브리스길라가 아굴라보다 전도활동에 열심이어서, 또는 남편 아굴라가 흑해 남안 지방 본도 출생의 유대인이었던데 대해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의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는 이도 있고, 아내 브리스길라의 편이 개성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지고도 있다. 로마의 지하묘소의 유적 등에 의해, 브리스길라는 로마의 상당한 고관의 가족출신이었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아굴라  

아굴라( Agulla) 「독수리」


본도 태생의 유대인인데, 아내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같이 로마에서 살고 있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이 내렸을 때(AD 52년)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하여 거기서 천막짓는 업을 했다.


동업상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 부부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행 18:1-3).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고린도에서 에베소에 갔다(행 18:18,19).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은 바울과 같이 아시아 교회(아마 에베소)로부터 문안 인사를 보내고 있다(고전 16:19).

에베소에서 그들은 아볼로를 만나자 그를 초청해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들었다(행 18:26). 그리고 그들은 한 때 로마로 갔던 것으로 보이나(롬 16:3), 다시 에베소로 왔다(딤후 4:19).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대략인데, 이 사실로부터 자연히 추측되는 것은(언제든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같이 기록되어 따로 따로 볼 수없다), 이들 부부가 교회에서 브리스길라가 남편인 아굴라보다 능동적인 활동가였다는것이다.


이 설을 지지하는 이는 크리소스톰인데, 그는 자세히 `하나님의 도'(행 18:26)를 풀어 이해시켜 아볼로에게 도움을 준 것은 그녀였다고 한다.

하르나크는 이 증언에 근거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를 브리스길라라고 하는 교묘하고도 엉뚱한 설을 주장했다. 로마의 비문이나 또는 전설에서 브리스가(Prisca, 바울이 쓴 것과 꼭 같은 철자로) 또는 그 지소사(指小詞) 브리스길라(누가가 쓴 애칭)의 이름이 매우 존귀히 여김을받고 있다는 점에서 호르트(Hort)는 그녀는 로마의 명문 출신이었다고 결론 짓고 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로마에서 추방된 것은 AD 52년이라고 한다. 그들이 추방당하기에 이른 유대인들의 소요(騷擾)는 `크레스타스(Chrestus)의 교사에 의해' 일어났기때문에,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알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동정을 가지고 있었음은 전연무근한 것은 아니다. 이 가정으로 볼 때 고린도에서 바울을 그들의 집으로 기꺼이 맞아 들인 것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큰 은혜를 받은 것은 그들 뿐만 아니라 람제이(W. Ramsay)가 암시하고 있듯이, 이방인의 사도는 교회 발전에 있어서 로마의 중심적 중요성을 배웠을 것이다… 우리는 이 교우(交友)와 로마, 그리고 서부의 교회에대한 바울의 계획의 성숙과를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후 얼마 안 있다가완전히 성안(成案)된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행 19:21,롬 15:24).


고린도에서 바울이 18개월 동안 체류한 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를 에베소에 동반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집에 모여 예배 드리고, 또 고린도전서 16:19에 의하면 바울이 다시 그들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기간 중 그들은 에베소에 머물렀는데, 당시 대학자이며 능변가였던 알렉산드리아인 아볼로가 와서 그들의 원숙(圓熟)한 크리스찬 경험에 의해 큰 유익을 받고, 또 그 중 한 사람, 또는 두사람으로부터 은혜의 복음을 섬기는 능력의 비결도 전수 받았다(행 18:26-). 또 그들은 거기에 많은 이방인 교회를 세웠는데, 그 신자들은 바울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의

목숨마저 버리려고 했다(롬 16:3,4).


이 귀절로부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잠시 로마에 이주하였는데, 거기서도 따뜻한 그들의 가정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가 된 것을알 수 있다. 바울은 이 믿음직스러운 우인(友人)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받고 로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 보기를 열망하기에 이른 것이리라(롬 1:11). 이 경건한 가정에 대한신약성경의 마지막 인용은, 그들이 에베소에 돌아온 것이다(딤후 4:19). 그들과 디모데와의 교제는 반드시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게 했을 것이다(딤후 2:1).


(인터넷자료)


사도바울의 동역자로서 빼놓을수없는 사람들중

한 가정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부부' 가정입니다.


본래 '아굴라'는 유대인으로 이름의 뜻은 '독수리'란 의미로

흑해 근처에 있는 '본도'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로마에가서 브리스가 집안의 노예신분으로

있다가 브리스길라와 결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브리스길라'는 로마인으로 브리스가 명문 가문출신입니다.

그녀 이름의 뜻은 '작은 노부인'으로, 이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속에 있는 빛'

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굴라는 노예신분이었지만 성품이 온화하고

정직하며 매사에 순종하는 신뢰가 가는 인물이었으므로

나중에 주인에 의해서 자유인이 되었으며

후에 그 집안에 브리스길라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결혼전에 이미 개종하였고

이로인해 글라우디오 황제때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하여 고린도로 떠나 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천막짓는 일을 하며 지내던 중,

바울이 1차 고린도 방문때 그들을 만나 그집에 머물면서

장막짓는 일을 도우며 하나님의 도를 사모하였던

그들부부에게 복음에 진수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고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성령충만을 받은 두 사람은 바울의 동역자로

주께 헌신할것을 결심하고 18개월후에

바울이 에베소로 떠나자 함께 동행했습니다.


그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로마에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 사역의 특징은 자신의 집을 열어 예배모임을 갖는

가정교회를 제일먼저 시작한 사역으로 고린도, 에베소,로마,등

가는 곳마다 교회를 창립하였던 부부 사역자였습니다.


다시 로마에서 네로황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에베소로 돌아와 사역을 하였으며


브리스길라의 복음전파에 대한 특심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사도바울의 뒤를 이어나갔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목이 잘리어 순교하자 그들도 끝까지

복음중거에 힘쓰고 사도바울과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목에 잘리어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순교자의 역사가운데

7월8일에 그들의 이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남달리 믿음과 영성의 깊이가 뛰어난 브리스길라는

작자미상으로 있는 히브리서를 쓴 저자로

지목받고 있는 여인이기도 합니다.


이부부를 통하여 가정사역의 중요성과 브리스길라의 헌신된

주님을 위한 훌륭한 사역을 우리도 본받아

이 세대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출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작성자 inmyhands

 

루스드라에서 신(神)이 될뻔했던 사도 바울과 바나바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지인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 뱅이가 된자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키자 무리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제우스)와 허메(헤르메스)

신(神)으로 추앙하려 한다.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사도행전 14:8-18)

* 제우스와 헤르메스 : 개역에서는 쓰스와 허메로 영어 비슷하게 번역되어 있는데,

  새번역(개역개정)에서는 원문을 따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바로 역하고 있다.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성화의 도시,현재지명 꼰야)에서 남쪽으로 약 30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어원의 뜻은 "양의 무리"라는 뜻입니다. 당시 루스드라는 로마의 속주 갈라디아의 남부 루가오니아 지방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이 선교하였던 비시디아 안디옥과는 로마의 군용도로로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카툰 세례"라 불리우는 한적한 시골 마을입니다. 이곳 마을에서 약1.6km떨어진 구릉이 루스드라라고 추정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제단에서 라틴어로 LUSTRA라는 문자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이것은 꼰야의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2차 전도 여행때 이 성읍에 왔었습니다.[행14:6이하] 그리고 사도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는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이곳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은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에 성읍 사람들이 그들의 믿는 신인 쓰스와 허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고 하고, 산당의 제사장은 소와 화관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제사하려는 소동이 일어난 곳입니다.[행14:8]  

(인터넷자료-성지순례를 다녀 온 분이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인용합니다)

 

< 1차 전도여행 여정 > 

  

 

 

* 쓰스와 허메=제우스와 헤르메스


쓰스와 허메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쓰스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를, 허메는 제우스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를 가리킨다. 루스드라의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초라한 나그네로 변장하여 루스드라에 왔는데 아무도 그들을 맞아주지도 않고 먹을 음식이나 잠자리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가난한 노부부만이 허름하나마 그들을 정성껏 대접했다. 화가난 제우스는 루스드라에 홍수를 내려 자신을 대접한 노부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홍수의 거센 물결에 휩싸이게 했다.

그래서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을 보고 전설이 다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로, 바울을 허메(헤르메스)로 생각하고 신으로 추앙하는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인터넷자료)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행13-15장)

본 장에서부터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전도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복음을 탄압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이제는 변하여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발견 할 수 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은 결코 순탄하게만 진행되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죽임을 당할 위기(행14:19)까지 겪기도 하였다. 그가 1차 전도 여행에서 보여 준 삶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하는 좋은 교훈이 된다.

 

1. 구브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사역(행13장)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된 안디옥 교회의 당시 상황과 바울의 전도사역지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각 사역지마다 바울은 어떠한 일을 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방해를 받은 적은 없는가? 그리고 바울이 한 설교(행13:15-41)의 중심 사상은 무엇인가?

 

1) 구브로에서의 사역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외에 훌륭한 일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행13:1). 그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선택이셨다.(행13:2). 즉 앞으로 있을 이방 선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첫 사역지는 구브로였는데(행13:4), 이 지역은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하다(행4:36). 이곳에서 박수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듦으로 인해 복음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행13:12). 이러한 사건은 총독 서기오 바울도 개종케 하였다. 다음으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어 설교를 하는데(행13:15-41), 그의 설교는 이신득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으며(행13:39),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메시야 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에 감동을 받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백성들은 복음을 수용하게 된다(행13:42,43). 이 또한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편 바울의 설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유대인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나서지만(행13:45), 그는 그들의 비방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담대히 이방인의 선교의 계속을 말한다(행13:46).

 

2) 전도의 중요성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전도를 해야 한다. 이 전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지로 행하기는 꺼려한다. 그 이유는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다. 전도를 하는데 따르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희생을 한 선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 제1차 전도여행의 종료(행14장)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은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재미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 이곳에서의 박해를 피해 루스드라로 갔을 때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와 보고를 한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의 경로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1)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오해함

바울은 이고니온에서도 똑같은 바나바로 복음을 전한다. 그 방법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두 종류의 무리들이 생겨하는데, 즉 복음을 수용하며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는 자들이다(행14:1,2,4). 핍박받는 가운데서도 이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행14:3). 그러나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들은 이고니온을 떠나 더베와 루스드라 지방으로 전도 장소를 옮겨야만 했다. 이곳으로 온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된 앉은뱅이를 고쳐 준다(행14:8-10). 이 일로 인해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각각 자신들의 신으로 오해하게 된다(행14:11-13).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은 경배를 받을 수 없으며, 경배의 대상은 오로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증거한다(행14:14-18)

 

2) 복음의 능력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를 믿으며 육신적인 질병도 치료되는 기적들이 나타나곤 하였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자유가 임하게 된다(요8:32). 복음의 증거는 인간들이 하지만 그 결실은 성령이 맺게끔 하신다.

 

3. 예루살렘 공의회(행15장)

 

초대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공의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의회가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개최되는데, 그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공의회의 결정은 어떻게 내려졌으며 그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 율법이냐, 믿음이냐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 선교의 정당성에 대해 입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였다. 이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할례와 율법 준수 문제로 개최되었다(행15:1-5). 즉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전도 여행을 했던 바울과 바나바를 공식적으로 불인정하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안디옥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행15:2), 이때 베드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한다(행15:11), 또한 야고보도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에게 율법을 강조하면서 괴롭히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행15:19), 결국 베드로와 야고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선교를 정당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2) 믿음과 행위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로 개최되었지만 그 결과는 성령의 역사요, 하나님의 섭리로 끝나고 말았다. 즉 이방 선교의 정당성이 다시 한 번 입증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은 불변하는 진리로서 믿음과 행위는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전도자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전도 여행은 온 인류에게 있어서 크고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형성이 바울의 전도여행으로 인해 이방인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단지 복음의 씨만 뿌렸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예수를 믿음으로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1. 구브로(Cyprus)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복음 전도자로 파송받은 후 첫 번째 전도 여행의 시발점으로 삼은 곳이다.

1) 이름과 위치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지중해는 오늘날의 터키인 길리기아 남쪽 74Km, 시리아 서쪽 96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구약 시대에는 수도였던 키티온(Kition)의 이름을 따서 깃딤(Kittim)이라 불렀다. 오늘날은 키프로스(Kypros)로 잘 알려져 있다.

2) 지리적 배경

구브로 섬은 길이가 224Km에 달하며 그 폭은 96Km가량 된다. 길리기아와 시리아의 해안에 인접해 있으며, 소아시아와 이집트 사이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역사와 문명의 중요한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감당 하였다.

구브로의 남서 지역은 산악 지대로 제일 높은 산봉우리는 해발 1951m인 트로두스(Trodos)이며, 북동부에는 메조리아(Mesorea) 대평원이 있다. 오늘날 키프로스의 수도인 니코시아(Nicosia)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3) 역사적 배경

이 섬은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리와 제목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오랜 기간 동안 상업적 요충지로 인정받은 곳이었다.

구브로는 페니키아와 이집트의 정복 후에도 로마의 통치를 계속해서 받게 되는데 짧은 기간이지만 한때는 로마의 통치 직전에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아래 놓이기도 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1960년 8월에 영국의 식민 통치하에서 독립하였다.

 

2. 바나바

 

본명은 요셉이며, 사도들에의해 권위자, 위로는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란 이름이 붙여진 사람이다. 환경과 여건을 초월하여 이방인에게까지도 복음을 잔파할 정도로 전도에 뜨거운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1) 시대적 배경

A.D.30-68년경에는 주로 활동 하였으며 이 시기는 오순절 사건과 함께 교회가 태동되기 시작하여 로마 전역으로 복음이 전파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바나바는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직접 목격하고, 베드로를 중심한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으로서, 또한 사도 바울과의 제1차 전도 여행 및 자신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이 당시의 교회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더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체험한 인물이었다.

2) 구속사적 지위

12사도 외에 사도로 불렸던 사람이며(행14:1-14), 초대교회내에서 두드러질 정도로 헌신하고 수고한 사람이었다. 또한 바울의 동역자로서 안디옥 등 이방 선교에 힘쓴 사람이었다.

3)평가 및 교훈

바나바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어느 곳에서든지 소외당하고 어려움당하는 자들의 편에서서 위로와 격려가작 되어준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관대한 모습은 너무나도 쉽게 상대방을 판단하고 비판해 버리는 오늘날의 세태에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자세가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와 달란트, 생애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 주의 일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전적인 헌신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3. 예루살렘 공의회

 

행15:1-21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는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종교 회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에 의해 신학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전되려는 과도기에 그 당시 초대교회의 최대의 현안 문제였던 구약 율법에 대한 신약 성도의 자세를 최초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정립한 회의였다.

1) 공의회의 결정과 그 신학적 의의

첫째,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막론하고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이방인 성도에게 율법의 멍애를 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율법 준수가 구원의 근본 조건이 아니라는 신학적 대원칙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방인 성도는 구약 율법, 더욱 정확히는 구약 시대의 의식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대원칙 내에서 교회의 단합을 깨며, 특히 유대인 성도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 음란하게 보이는 행동들, 피를 먹는 행위)들은 금할 것을 결의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이방인 출신 성도들간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고 볼 수 있다.

2) 공의회의 역사적 의의

예루살렘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공식 공의회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기독교는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유추적으로 신학적 결론을 유추해 낼 수는 있으나,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어떤 사실들을 규명할 때는 이같은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공식 입장을 정리하는 관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 한마음의 멜로디
글쓴이 : Only Yo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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