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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심어주어야 할 12가지 확신 시리즈

하나님아들 2018. 7. 11. 14:56

꼭 심어주어야 할 12가지 확신 시리즈

 

1.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십니까?(11:6)

에베소서 5:10 은 말씀하시기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에 대한 답으로 히브리서 11: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반드시 살아계신다고 하는 전재 아래 성립된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다 쓸데없는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1. 세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무신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무신론주의에 빠질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1) 무신론주의

무신론주의에는 삼대조류가 있습니다. 과학적 세계관.유물론적 세계관.실존주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물론적 세계관이나 실존주의 사상보다 가장 위험한 사상은 과학만능주의입니다.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과학적 공식에 의해서 분석되지 않고 판명되지 않을 것은 없다고 단정 지어버립니다. 그러기에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해 버립니다. 그러나 진실한 과학주의자들은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던 것입니다. 자연과학자 케물러는나는 하나님의 사고를 따라 사고한다.”고 하였습니다.

2) 무신론의 사촌으로 불가지론주의가 있습니다.

불가지론이 무엇인가? 하면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고 하는 주의입니다.불가지론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무관론적 불가론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나는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이 있든지 없든지 관심이 없다고말합니다.불만론적 불가지론입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은 신자도 있으며 오히려 박에주의자인 유물론자도 보았기 때문에 번민한다고 합니다. 교리적 독단론적 불가지론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든가 어떤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3) 무신론의 사촌격으로 회의주의가 있습니다.

회의주의자들은 경험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사물에 있어서나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기가 경험해 보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전연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2. 사람의 본성에는 하나님을 찾는 심성이 있습니다.

안셀이란 신학자는인간의 마음은 존재하지 않은 실체를 사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없는 것을 희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는 본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불란서가 낳은 세계적인 무신론자 볼테르도 그의 죽음의 침상에서는 오 하나님이여!당신이 만약 살아계신다면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절규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파스칼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없다 하는 자는 가장 불쌍한 자요 하나님을 연구하는 자는 가장 불행한 자요 하나님을 믿어 버린 자는 가장 행복한 자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하늘에는 별이 있고 내 속에는 도덕적 율법이 있다.이 두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고 했습니다. 시편42:1에는 말씀하기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공통된 관념인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고 하나님을 숭경하고자 하는 그 공통된 관념은 시대의 차이나 지역이나 인종의 차이도 없이 다 똑 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우리는 항상 모든 사람의 일치한 의견을 좇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진리로 인정하는 사실은 역시 진리라고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선천적 사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집스런 인간들을 하나님을 일부러 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14:2에서는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나하면서도 우리가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만하도록 모든 것을 섭리하십니다.

1) 우리는 성경은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자기를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성경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해서 의심하는 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전제하고 어떻게 섬길 것인가?

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하는 방법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9-20에서는이는 하나님은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만드신 대자연 앞에 설 때에 우리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시편 121:1에서는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홍하에게서로다고 하는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3) 우리의 느낌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나서 불안하고 초조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혹은 선을 행하고 흐믓한 느낌을 가리켜서하나님에 대한 느낌이라하고 이 느낌을 가리켜종교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이 종교의 씨 때문에 하나님을 느끼며 이 느낌을 통하여 하나님을 뵈옵고 알 수 있습니다.

4)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하는 비결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는 지식을 가지고 분석하거나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믿고 의지하며 무릎을 꿇는 자에게만 자기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믿음은 누가 확실히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2:8에는 말씀하기를 믿음은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큰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2.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사도행전 16:30-31 )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입니다. 우리 개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약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모이신 여러분에게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하고 묻는다면.받았습니다.”이렇게 자신있게 대답하실 수있습니까?“하고 답할 수 있다 합시다. 그러면 또 묻기를당신이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 올 때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왜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까?

1.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구원 그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후에 천국이니 지옥이니. 또는 내세니 무슨 구원이니 하는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 같은 것은 전혀 알바 없고 수양이나 교양차 교회에 다니는 정도의 신앙밖에는 더 이상 들어가려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심이 없는 것은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라기3:14에는 어떤 덜 믿는 자들의 말하기를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였습니다.

2) 구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1에 예수가 곧 구원이라고 했습니다.“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죄를 용서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된 상태를 구원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죽어야 할터인데 주님이 대신 죽어 주심으로 죽지 않게 된 상태를 구원이라 합니다.

3) 구원을 자기 행위와 결부시켜서 생각하므로 확신이 없습니다. 행위가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행위가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라고 대답을 못합니다. 에베소서2:8에는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4) 주님의 피의 권세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확신이 없습니다.

요한일서1:7에서는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위력을 이렇듯 엄청납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주님의 피의 위력을 믿지 못하면 구원의 확신은 없습니다.

5) 미혹하는 자들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립니다.

갈라디아서3:1에 보면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지방에서 선교하는 동안에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해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고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미혹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이 흔들거리고 구원의 확신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탄식하면서 편지로써 깨우쳐 주었습니다.

2.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가?,,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읽어 주신 성경에서 빌립보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묻기를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했습니다. 그때에 바울이 답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말씀은 주님이 오셔서 주신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유월절 사건이 나옵니다.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고서 여호와께서 넘어가는 것을 믿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요한복음5:24에서 주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느니라,,고 했습니다.

2) 성령의 증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디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12:3에서는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깨닫게 하시고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구원받았다 안심하라 그리고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만약 구원에 대한 의심이 생기거나 확신이 희미해지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고 성령의 음성을 조용히 들어보십시오.

3)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는 세 번째 근거는 우리 자신들의 증거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의 생활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바가 된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3. 확신을 가진 결과가 무엇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몇가지 달라지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게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1:24에서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라,,고 했습니다. 또 구원의 확신을 갖게되면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자기의 의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죄를 짊어지고 못박혀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을 자랑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오고 하나님의 나라가 심령에 오고 감사와 찬송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원의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았음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3.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십니까?(요한복음 1:12-13)

오늘은 확신에 대한 네 번째 설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오늘에 있어서 생각해 보면 만주의 주가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시고 엄청난 유산을 가지신 하나님의 친아들이 된 것을 어떻게 자랑해야 하며 어떻게 간증해야 통쾌할까 정말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역대상29:11에 보면천지에 있는 것이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되었을 때에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충성하지 않을 수 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확인시켜 드리고자 노력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과 같은 지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2에서 말씀하시기를사랑하는 자녀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 외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임을 인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똑 같은 신분으로 살게 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2) 좋은 것을 얻어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최상급의 선물을 주십니다. 주신 서물 중에 최상급의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8:32에서 자기 아들을 앆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3)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 누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히브리서12:2에서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4) 많은 것을 상속받게 됩니다.

아들은 부모의 유업을 상속받을 특권이 있습니다.갈라디아서4:7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8:17에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영광만 상속받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도 상속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를 삼으으십니다. 우리를 어떻게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는가? 그 비밀을 알아봅시다.

1) 창조하실 때부터 자기의 자녀로 지으셨습니다.

신명기32:6에서는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나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44:2에서는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는 벌써 자녀로 지으셨음을 의미합니다.

 

 

2) 양육하셨기에 자녀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4:15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2:7에서는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3) 양자 삼음으로 자녀가 됩니다.

로마서8:15에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양자의 영이 우리 속에서너는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라고 증거 하므로 양자의 인을 쳐주셨습니다.

4) 다시 낳아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사람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심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5) 우리를 죄 가운데서 속량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갈라디아서4:5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에 예수께서 죄의 값으로 자기의 피를 흘려서 속전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양자로 사신 바가 된 것입니다.

6) 믿음으로 아들이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26-27에서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

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나는 없어지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같은 진리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 하십니다. 이사야45:11에서....내 아들들 일과....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으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레미야31:9에서는 ...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6:9절에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렇게 불러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20:17 하반절에서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의 증거보다도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의 증거가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하나님은 자기의 아버지만 되신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확인하여 주시고 보증해 주셨습니다.

3) 성령께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된다고 증거하셨습니다. 로마서 8:16 말씀하시길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내 영에게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가 되신다,,이렇게 증거하십니다.

4)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안보이지만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습니다.그리고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감을 보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비결은 우리 인물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도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4. 당신은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습니까?(11:24-25)

오늘의 성경에서 주님의 약속을 읽을 수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에서 말씀하시기를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다는 말씀은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을 주시는 이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믿을 때에 기도다운 기도가 나올 수 있고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우리가 기도 응답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몇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1.왜 기도하고 나서도 응답 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가?

1) 이기적 기도는 응답을 받고서도 확신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마치 밑빠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응답을 받고서도 응답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되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것만 간구하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면 기도 응답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의 결단의 기도를 드릴 때에 아버지여....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2) 잘못된 기도는 응답되지도 않고 확신도 없습니다.

잘못된 기도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기도 몇가지만 지적하자면.하나님을 시험하는 기도입니다.마가복음16:17이하에서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게 표적을 보여 주옵소서 아멘,,하고 제초제 한 병을 마셨다면 이같은 기도는 주님을 시험하는 잘못된 기도입니다.의심하는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1:6절에 말씀하기를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기도입니다.야고보서4:3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기도는 응답될 수가 없습니다.

3) 기도의 응답의 형태나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확신이 없습니다.

기도 응답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응답을 받고서도 응답을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확신을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 응답이 방법은

즉시로 허락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무엇을 주소서,,이렇게 기도하면오냐 그렇게 해주마,,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게 해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생각밖으로 빨리 올 때는 정말 믿는 보람을 느끼고 살맛이 나고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에 알맞은 기도를 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무엇을 구하면 바꾸어 주시는 응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한 대로만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시고 또 우리를 잘 알고 계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꾸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해도 안된다고 거절하시는 것도 응답입니다. 잘못된 것을

구 할 때 단연코안된다,,할 것입니다. 이것도 기도 응답의 한 형태입니다.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도 기도 응답의 형태입니다. 믿음을 연단해서 겸손케 하시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소리를 더 듣거자 연기하기도 하십니다.

간접적인 역사로 응답하시는 형태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의사도 내시고 약도 내셨습니다. 난치병을 어느 병원.어느의사를 통해서 치료 받은 것은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같은 응답을 간접응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가 없습니다.

2.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또 간구하는 모든 것이 다 응답된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6:6-9 특히 9절에서는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불러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1에서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나서 응답받는다고 하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만족한 것입니다.

2)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이 있기에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고 약속을 변치 않으시는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3:3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하기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고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7에서 약속하기를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

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신실하시고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기어코 지켜지고 말 것입니다.

3) 예수님과 성령님의 합심기도가 뒤따르기 때문에 기도는 기어코 응답됩니다.

히브리서 7:25에서 말씀하기를 예수께서는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죄많은 사람도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예수님과 성령님까지 기도로 지원하시는데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4) 기도 응답의 체험을 통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12에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실 것을 감사하나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가장 큰 이유로 이전에 기도응답해 주셨던 체험을 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기어코 응답됩니다.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기도한 다음에는 응답될 것을 확신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은 보증 수표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5. 당신은 거듭났다는 확신이 있습니까?1(3:1-8)

언제 거듭났는지 그 시간이나 날짜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날짜를 모른다고 해서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까? 오히려 거듭난 날짜나 시간을 모르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내가 언제 거듭났는지 모른다고 해서 거듭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어느날 어느 시에 거듭났는가 기억하라는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거듭났다는 말씀을 육신의 출생과 비유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 언제 태어났느냐?,,고 물었을 때 난 몰라요,,라고 대답하면 그 때문에 너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의 성경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사건은 마치 바람이 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그 모든 과정 그 모든 내용 그 모든 사실을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어렵다는 의미에서 바람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1. 구원받으려면 무엇보다도 거듭나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에는 니고데모가 모든 믿는 성도들의 상징 인물로 나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당돌히 말하기를 당신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니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심이 확실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말을 듣기가 바쁘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만나자마자 이 말씀부터 하셨을까? 이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이적을 행하고 또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그는 신분과 지위가 아주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께 낮에 찾아오지 못하고 남의 눈을 피하여 밤에 조용히 찾아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 39에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가 부패되지 않도록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근이나 가지고 와서 발라 드렸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엿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오직 거듭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니고데모처럼 정직하고 진실하고 선하게 살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려면 먼저 거듭나는 것이 앞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 어떻게 거듭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니고데모는 지위도 높고 성경 지식은 많으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아직 캄캄했습니다.예수님의말씀을육신적으로만이해하였습니다.사람이 거듭나게 되는 원인은...........

1)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서 거듭닙니다.

본문7절에서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은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 임의로 불되 네가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람은 임의로 분다는 것입니다. 출생은 태어난 자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듭 난 것은 성령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이루어 진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 : 3에서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성경5절에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을 성령이라고 말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요한복음 7 :37-39의 말씀에 의하여 성령이라 했습니다.

물은 예수님 피라고 말한 성경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 : 18-19 에서는.....“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학자가 많습니다. 에베소서 5 : 26은 말씀하기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야고보서 1 :18. 고린도전서 4 : 15. 베드로전서 1 : 23의 말씀을 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이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거듭납니다. 거듭나냐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3. 사람이 거듭날 때에는 갓난아이처럼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미 거듭나서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으면서도 왜 거듭났다는 확신이 없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거듭나면 완벽한 성자로 거듭난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1)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2 : 3은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 :15에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2) 거듭날 때는 갓난아이처럼 불완전하게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거듭난 것도 완벽하고 성숙한 사도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맨 먼저 무엇을 합니까? 내가 세상에 나왔다는 표로 웁니다. 안 울면 죽은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거듭나면 무엇을 먼저 하는 줄 아십니까? 회개하고 회개하면서 울게 됩니다.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육적으로 나는 것이 같은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바울도 한 번 거듭난 다음에는 완전하게 거룩한 사도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 : 11이하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다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거듭난 다음에도 자기 속에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이 함께 살고 있으며 싸우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37 : 24에서 거듭난 의인이라도 넘어질 때가 있고 실수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에게 실수가 있다고 해서 거듭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의 주로 믿습니까? 그러면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셨습니다(고전12:3) 그리고 죄를 짓고 나면 양심에 가책이 되십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거듭났음이 틀림없습니다.(16:8) 우리가 이제 거듭났으면 조금씩 자라가도록 힘씁시다.

 

 

6. 당신은 거듭났다는 확신이 있습니까?2(요일 5:1-5.18)

지난 주일에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이 성령으로 난 자도 이와 같다,,고 하는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바람이 불 때에 바람 그 자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나뭇잎이 흔들립니다. 나무가 꺾어지거나 넘어집니다. 그같은 흔적을 보고서 바람이 불고 있거나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이 불고 간 흔적과 표적은 남습니다. 그 흔적을 가리켜서 거듭남의 증거나 혹은 거듭남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는 하나님께로서 난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듭난 증거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거듭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됩니다.

오늘의 성경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자니,,라는 뜻입니다. 또다시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아니한 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거듭났는가. 아직도 거듭나지 못했는가를 식별하는 기준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믿어지는가. 안 믿어지는가를 진단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제사장으로 믿는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되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진다는 것이 보통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통 정상적인 자연인으로서는 절대 불가는한 일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2.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의 성경 1절 중반에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요한일서에만 사랑,, 이란 말씀이 46번이나 나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신명기 10 : 12에서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3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 : 10에서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3 : 18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치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3.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오늘의 성경 4-5절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하였습니다. 한편 세상은 그리스도를 영접치 아니한 곳이요. 그리스도를 죽인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은 곧 의미의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이긴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세상 조류에 떠밀려가지 않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거듭난 성도는 세상 죄악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서 12 : 2에서는 거듭난 성도는 세상을 본받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야고보서 1;27에서는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 : 5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또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은 세상과 벗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고보서 4 : 4에서는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과 벗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은 세상의 정욕을 피하는 것입니다.

3)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은 죽음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2 : 15에서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라고 했습니다.

4. 거듭난 사람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성경 5 : 18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하신 데는 몇 가지 중대한 뜻이 있습니다.

1) 거듭난 사람이라도 죄를 짓기는 짓지만 기쁨으로 짓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육신으로 실수를 하면서도 속에 있는 양심의 법과 싸우면서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2)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거듭난 성도는 죄를 안 지으려고 몸부림치고 자기 자신과 싸워도 약해서 넘어지고 실수할 때는 있다는 것입니다.

3) 똑같은 죄를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어쩌다 실수하고 또 약해서 죄를 짓다가도 늘 기도하는 가운데 언젠가는 그 죄를 끊게 되는 것입니다.

4) 거듭난 성도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뜨입니다.마태복음 12 : 31-32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결국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어느 때인가는 회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5. 거듭난 사람은 힘써 의를 행합니다.

요한일서 2 : 29에서는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요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소극적인 행위요 의를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범죄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의를 행해야 합니다. 성경은도적질하지 말라고만 가르치지 않고 도적질을 끊었으면 그 손으로 의로운 일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 손을 더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주님께서 그의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난 증거가 확실한데 무엇 때문에 염려하고 고민하십니까? 거듭났다는 확신을 가지고 의롭게 사십시오 죄를 끊으려고만 노력하지 마시고 의로운 일을 한 가지씩 더 하도록 하십시오.

 

 

7. 당신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으십니까?(20:24-29)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의 모임에 나타나신 부분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의아해 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손바닥에 피흘린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자기도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본 후에야 믿겠노라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부활의 확신이 없는 신앙자의 비극을 말씀드립니다.

1) 확신이 없는 도마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였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방 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며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때에 하필이면 의심 많은 도마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동료들의 증거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기뻐 좋아하며 서로 간증하는데 자기 혼자서만 확신이 없을 때 정말 마음이 편치 못한 것입니다.

2) 부활의 확신이 없는 신자는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 : 8에서는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의 증인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열심히 증거하고 있는데 확신이 없는 도마는 그 누구에게도 부활을 증거할 수 없었으니 그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겠습니까?

3) 부활의 확신이 없는 신자는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만약 부활의 확신이 없다면 예수를 믿어도 헛되게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 : 14-15절은 말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리에서 부활을 빼버리면 망하는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확신을 가질 만한 근거를 여러모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과 장차 우리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오직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 안에 있는 증거로서..............

1) 에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기 전에 부활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설명하면서 요나가 밤낮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죽으신 후에 부활의 실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0 : 19-23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임에 나타나신 주님은 평강을 주셧습니다. 그 밖에도 40일간이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부활의 몸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2) 천사들의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우실 때에 많은 제자들은 슬프고 허전한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위로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증거했습니다.

3) 사도들의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 : 17-18에 보면 당국자들이 부활의 증인 베드로를 붙들고 말하기를 이 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4) 일반 학자들의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학문의 분야에서 석학들은 무슨 진리나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모든 문제가 발생하거나 어떤 진리가 선포되면 일단 비판을 해 본 다음에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람들이 꾸민 연극이라면 그 조직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꿔가면서까지 복음을 전할 사람이 있을까? 또 몇 사람은 속일수 있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없으며 잠시 동안은 속일 수 있어도 영원토록 속일 수 없다고 부활을 확증했습니다.

3. 부활의 확신을 가진 성도의 생활

오늘의 성경 26절 이하에서 보면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도마도 함께 모였습니다 그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평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도마가 말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 고백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드디어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도마는 다시 의심하거나 무엇이나 보고서야 믿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믿고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어코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눈에 뵈지 않아도 믿고 의지하며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복음을 전하다가 고문을 당하고 자기의 살가죽이 벗김을 당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에 끌리어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영안이 어두워서 부활의 주님을 뵈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의 줄이 나를 잡고 있음을 보아서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뵈옵지 못하였지만 주님의 사랑의 줄이 날마다 때마다 나를 당기고 계시는 것만 보아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고 주님께 기도하고 싶고 주님께 찬양하고 싶고 주님께 헌금하고싶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도 주님의 사랑이 강권한다고 절규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부활의 신앙이요 확신의 생애입니다. 부활의 새순은 기어코 꽃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니 나도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씀했습니다.

 

 

8.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이 있습니까?(8:28-39)

성경은 사랑을 곧 믿음이라고 정의한 것 같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마무리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을 믿지 아니하면 공포감만 줄 뿐입니다. 이외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까지에는 몇 단계가 있다고 보아져서 오늘은 그의 단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본질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사라의 속된 인간의 사랑으로 오인하기 때문에 믿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아가페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에로스가 갈구하는 그 대상은 자기 충족을 위하여 갖는 가치와 의의를 띤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에로스는 오직 자기 자신의 것만을 갈구하고 찾는 것이라 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가치한 존재나 사랑스럽지 못한 존재도 차별없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가페의 사랑은 그 대상의 사랑스러움이나 가치에 의해 비롯된 것이 아니요 또한 관련되어 나타나는 동기적 결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가페는 고린도전서 13 : 5에 나타나 있는 대로 그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시말해서 에로스의 사랑은 그 대상을 찾되 그것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사랑하나 아가페의 사랑은 설령 그 대상에게서 어두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 : 1 이하에서는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에게 주님의 영광의 광선을 힘있게 내려쏘임으로 사울을 압도 시켰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범위를 깨달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3 : 18-19에서 말씀하기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의 분량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1) 그 사랑의 넓이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품은 너무나 넓고 크십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랑은 얼마나 편협한지 알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만 위해주고 싶고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만 생각해주고 싶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싶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품은 참으로 넓습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교회를 잔해하고 스데반 같이 충성스런 제자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바울도 품에 안아버리고 사랑하셨습니다.

2) 그 사랑의 길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변하기 쉬운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영원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람은 백 번 천 번 잘해주다가도 딱 한 번만 실수하여 잘못을 저지르고나면 끝장나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히브리서 13 : 8은 말씀하기를 에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13 : 1 이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3) 그 사랑의 높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같이 저속한 사랑만 깨달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원이 높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55 : 8-9에서 말씀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달한 천문학으로도 높은 하늘을 측량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그 높음이야말로 다 측량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4)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지성으로나 이성으로는 다 깨달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 사랑의 깊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 : 18 에서는 주님의 사랑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시편 34 : 8 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했습니다. “맛보아서 알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참사랑의 맛을 보아야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참사랑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 : 11 이하에 나오는 탕자가 왜 아버지 품을 떠나서 망하고 돌아왔습니까? 아버지의 참사랑의 맛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멜이 왜 남편을 떠났다가 몸서리친 고생을 하고 나서야 본 남편에게 돌아가겠다고 후회하고 결심했습니까? 남편의 참사랑의 맛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탕자와도 같고 창녀와도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죄의 구덩이에서 주님의 사랑의 줄로 우리를 건져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령한 신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고 원수같이 대적하면서 세상과 짝짓기를 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러분과 저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특권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괴로운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심을 확신해야 하며 때로 우리가 기도도 나오지 않을 만큼 답답한 일을 만날 때라도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 : 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뜻대로 부르심을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오늘의 성경을 다시 읽어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9. 당신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십니까?(살전 1:2-7)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축복입니다. 더구나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 사실은 참으로 크고 귀한 축복입니다. 에베소서 1 : 4-5 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창세 전에 선택하셔서 자기의 자녀를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인가? 못받은 것인가?”를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생각보다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선택받았다고 보았던 확실한 증거를 몇가지 찾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선택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갖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믿음다운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택함받은 성도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2-3 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다운 신앙생활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세 가지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1)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믿음이 나무라고 하면 역사는 그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라 해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주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도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믿음 이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후서 3: 2 에서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아 놓았습니다. 또 사도행전 13 : 48 에서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또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이 믿어지는 것을 보니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실하다고 믿어도 좋습니다. 베드로전서 1:8에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2)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싹터서 자라면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한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가서5:2이하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들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3) 소망의 인내가 있을 때에 선택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말로 할 수 없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소망 중에 참아내는 것을 보니 선택받은 성도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선택받은 성도는 환난 중에도 소망으로 인내합니다.

2. 환난 중에도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선택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6절에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기쁨으로 잘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선택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환난 당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 두 가지로 서로 다른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1)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데 복음을 들으면 가슴이 더욱 눌리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슬픔을 치료해주지 못하고 더욱 아프게 한다고 합니다.

2) 택함을 받은 사람은 사람은 복음을 들으면 마음이 열립니다.

설교를 들으면 귀로 쏙쏙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가슴에 와서 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을 가르쳐 주셨을 때에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맛을 알게 되고 그 말씀의 맛을 알게 되면 꿀송이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시편119:103에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히니이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찌 되든지 알 바 없고 우선 내 입에 어찌 그리 단지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택함을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 이하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과 귀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그 말씀을 날마다 상고했습니다. 이 모든 증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표지였습니다.

3.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을 보니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확실했습니다.

오늘의 성경 6절 하 반절에서 우리가 주를 본받은 자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 믿는 조건 때문에 많은 핍박을 당하고 예수 믿는다는 죄 때문에 많은 환난을 당하고 사회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일부러 자기의 몸에서 예수 믿는 흔적을 다 털어버리고 예수 안믿는 척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도 예수 믿는다는 조건 때문에 그처럼 무서운 박해와 환난을 당하는데도 예수처럼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다해보는 이도 있습니다. 또 바울처럼 살아보려고 애를 쓴 이가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또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3:14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성격은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닮아보려는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남을 대접할 마음이 생깁니다 남을 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예수의 마음이 그 속에 자리잡게 되고 예수의 영이 그 마음을 다스리고 예수의 정신과 예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서 싹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지는 까닭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성경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너무 가혹한 환난 속에서 조금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선택받은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더욱 분발해서 선택받은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10. 당신은 승리의 확신이 있습니까?(고전 10:13)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단 마귀입니다. 에베소서 6;12 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들은 이 세상에 가득하여 성도들을 넘어뜨려서 멸망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덤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원수 사단 마귀는 어떠한 전략으로 걸어오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각종 시험을 걸어서 도전해 오는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하려면 나는 이길 수 있다는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승리 비결이요 골리앗 앞에 어린 다윗의 비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은 승리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몇가지 비결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시험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에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시련이나 시험을 당할 때에 왜 하필이면 나에게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렇게 원망하면 이기기 어렵습니다. 언제나 어려운 시련을당하고 환난을 당할 때 다 편안히 잘 살고 있는데 나만 홀로 당한다고 생각하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정말 살고 싶지 않고 죽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을 모든 사람이 다 당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나도 이길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도 하와도 다 시험을 당했습니다. 능력이 많으시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사단의 시험을 무섭게 당하셨습니다. 믿음이 별로 없는 아담과 하와만 시험을 당한 것이 아니고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이나 욥도 시험을 당했습니다. 평소에 기도가 부족했던 베드로만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날마다 기도로 교제하던 모세도 사단의 시험을 당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신자도 사단의 시험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시험을 받고 아주 못 배운 사람도 시험을 당합니다. 성도들에게 시험이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교통사고 질병 사업의 실패 인간의 죽음 인간의 고뇌 가정의 파괴 등등이 사단 마귀로부터오는 전쟁임을 알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2.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의 배후에는 계심을 믿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높여주기 위해서 주시는 연단의 시험이 있고 또 하나는 사단이 성도를 끌어 내리려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아무튼 사단의 시험이라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사단도 다 아버지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므로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시편 103:14에서 말씀하기를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약함도 아시고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 당하도록 사단에게 묵시적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시험하도록 사단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시험을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시험의 범위와 한계를 정해놓고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사단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되 시험의 범위와 시험의 한계를 정하고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욥의 체질을 아시고 욥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만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도 아시고 우리의 능력의 한계도 잘 알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을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에서 말씀하기를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시련과 함께 그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시련에서 벗어날 길까지 마련해 주십니다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능히 감당할만한 시험도 주시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시험을 피할 수 있는 길까지도 만들어 놓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비상 동작을 발동하셔서 기어코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3. 승리하려면 힘써 싸워야 합니다.

영적 전쟁도 육신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힘써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기기를 기다려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2:4 에서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 한 때에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올라가서 우리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에도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들은 올라가 싸워도 우리는 메뚜기 같이 작아서 가나안 땅의 건장한 족속들과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해서 이스라엘의 기를 죽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것도 일종의 전쟁입니다. 어떤 부자가 나타나서 헌금이나 몽땅 바쳐서 그 돈 가지고 교회당도 크게 짓고 주차시설도 넓히고 학교도 크게 짓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신앙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빈들에서 저물 때까지 군중들에게 설교를 길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군중은 배가 고파서 기진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어디에 가서 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일 떡을 살 수 있습니까?” 여쭈었습니다. 사람의 수는 많고 가진 돈은 별로 없고 오죽이나 갑갑하였으면 이렇게 문의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뜻밖에 너희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부흥되고 예배당을 짓고 하는 것이 가만히 손 모으고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신앙으로 밀어붙이는 교회만이 부흥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앙은 전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6:12 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승리하고 싶거든 싸우라는 것입니다. 싸우되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요한일서 5:4에서 말씀하기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싸우는 병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겨놓으신 싸움입니다. 이 모든 싸움에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11.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 있습니까?(71:9-14)

오늘날 아주 심한 질병을 얻든지 또는 재산에 큰 어려움을 당하든지 또는 신분상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 같을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가 의아할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또는 불의한 자가 나를 쳐서 조롱할 때에 하나님께 버림받지는 않았는가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침체되고 땅끝까지 내려가는 것 같은 좌절을 느낄 때에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는가 라는 느낌을 갖게도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상고해 보면서 오늘은 확신에 대한 설교 마지막 순서로 당신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택함받은 성도들은 절대로 버림받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결단코 버림받지 않는다는 근거 몇가지를 제시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버릴 수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13절은 말씀하기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성품과 반대되는 행위는 절대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 86절에서는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

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어버린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31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를 깨달으라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이 넓고도 긴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1절에서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다가도 권태를 느끼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사랑은 열 번 백 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실수를 저지르면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열 번 백 번 천 번 잘못해도 끝까지 사랑하시며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버림받을 수 없는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어버리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와 항상 같이 해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서 4915절에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리빙스턴은 자기의 생애의 전기를 쓰면서 천직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아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만물의 찌끼만도 못하고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버릴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피가 아까워서라도 버릴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자기의 독생자의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우리를 사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 사셨습니다.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에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이나 누군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꼴을 못보십니다. 그리고 자기만 홀로 영광을 받으려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피가 아까워서라도 피로 사신 성도들을 버릴 수가 없으십니다.

자기 피로 사신 자들을 어떻게 버리십니까? 갈라디아서 221절은 말씀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피가 헛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릴 수 없으십니다.

4.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없는 근거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에베소서 113절에서 말씀하기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인쳤다는 말씀은 도장을 찍었다는 뜻인데 두 가지 목적으로 찍는 것입니다.

1) 자기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택하시고 십자가로 구원할 뿐 아니라 성령의 도장을 딱딱 찍어 버리십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 141절에는 144천명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으로 된 인을 쳐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기 피로 사신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을 쳐서 자기의 소유임을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것은 끝까지 아끼시고 보호하십니다.

이사야서 431하반절에서 너는 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것은 끝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표로 도장을 찍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고 팔 때 계약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서로 책임을 지겠다는 표시로 도장을 찍습니다. 성령께서 무엇하러 인을 치는 것입니까? 끝까지 구원을 책임지시갰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129절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6절에서는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순례자들이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10730절에서 소원의 항구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소원의 항구인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12. 주님은 당신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13:1-11)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소유는 지독하게 아끼시고 보호하시고자 하는 본능이 아주 강하십니다. 이사야43:1에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하셨습니다. 오늘의 성경 1절에서도 보면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 1절에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는 말씀을 몇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주님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지 않고 자기 사람들만 더욱 사랑하십니다. 오늘의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이라고 할 때 어떻게 해서 자기 사람이라고 불렀는가?

첫째,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이란 제한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르킴니다.

그러나 포괄적으로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친히 선택한 자를 자기 사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15:16에서는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자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38년된 병자를 말씀으로 치유하신 기적을 친히 목격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5000명에게 먹일 빵을 위하여 그에게 질문했을 때 예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계산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를 앞세웠던 이성주의 자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한 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으려는 철저한 이기주의 자였습니다.

도마는 감각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했던 회의주의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기 때문에 늘 실수 많은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지막 날 밤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서열을 위하여 자시 싸움을 벌였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답지 못하고 사랑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그들을 사랑하시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에서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믿음보다는 이성을 앞세우고 주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회의와 불신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 앞에서 허물과 실수투성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활이 의롭고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로 삼으신 것이 기적이요 우리같은 죄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우리로서는 감사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자기 사람은

1)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신부로 삼아 주신 자를 자기 사람이고 부르셨습니다.

고후11:1 그리스도는 성도의 남편이고 하였고, 에베소서 5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자기의 신부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을 자기 사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으셨고 택하였고 부르셨으므로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3)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신 자들을 자기 사람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고전6:20에서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셨으니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라 했습니다.

4)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줄로 끌어 당기어 자기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호세아11:4에서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이끌었다고 하였습니다.

5)예수님은 자기의 정복한 자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주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에서 건져내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셋째,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끝까지라는 의미는 제한적으로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자기 사람들은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특성입니다.

사람들은 오늘까지 사랑하다가도 그 사랑이 내일 미움으로 바뀌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일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으셨으며 영원히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해도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나같은 죄인을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으로 삼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요 우리의 영원한 감격입니다.

이기적을 순간 순간 체험하면서 사는 우리들의 할 일은 오직 한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을 받는 자의 생활입니다.

 

 

2.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이란 곳이 어떠한 곳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곳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곳임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이며, 세상은 시험이 많고 유혹도 많은 곳이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곳입니다.

또 세상은 질병도 많고 죽음도 많고 사고도 많고 죄가 많은 곳임을 우리 주님이 친히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이 괴로운 세상에 남아 있는 자기 사람들이 얼마나 환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 것인가까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기 사람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무렵 너무 큰 외로움을 느끼셨고 기도의 협력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자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긴박한 부탁입니까!!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사정을 알아주시면서 그를 미워하지 않고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으므로 육체적인 허약과 정신적 허약 등 많은 두려움의 대상에 둘러쌓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괴로운 세상에서 남아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3.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미련하고 우둔한 자들을 오래참고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기초 지식도 없는 너무나 우둔한 자들이었습니다. 늘 가르쳐 주셔도 쉽게 잊어버리고 잘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의 인품이 불완전한데도 주님은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가장 측근 제자들 가운데는 완전한 인품을 갖추었다고 할만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나약하고 불완전하고 세속적이고 운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불신자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 물러간 자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2) 그들을 완전하게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더없이 현명하게 사랑하셨습니다.. 또 더없이 강렬하게 사랑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가운데 어느 것도 완전할 수는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들을 최대한으로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여 천국에 가 계시면서도 자기를 반역한 이 죄인들을 위해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계속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4) 영원토록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시작과 끝이 되십니다. 구원을 주고자 착수하시면 기어코 구원을 완성시키십니다. 한번 사랑하시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시초에 사랑하시기로 시작하시면 종말까지 책임을 져주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십시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