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역사!

[스크랩] 2 비유로 가르치심

하나님아들 2012. 9. 14. 17:40
1. 시작하며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통해 주신 교훈에는 이 세상에 대한 그분 자신의 사명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원칙이 드러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잘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 신성(神性)이 인성(人性)을 통해 나타났고 보이지 않는 영광이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통하여 나타났다.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통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늘의 사물이 세상 사물을 통하여 드러났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도 그것은 사실이다. 곧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알고 있는 사물을 통하여 설명되었다. 영적 진리가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세상 사물을 통하여 설명되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니) … 이는 선자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마 13:34, 35)고 성경은 말한다. 천연계(天然界)의 사물들은 영적 사물을 설명하는 매개물(媒介物)이다. 천연계의 사물들과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들의 생활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비유는 사람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진리의 사슬로써 사람들을 천연계로 부터 영계(靈界)로 인도한다.


그리스도께서 천연계의 사물을 실례로 들어 가르치실 때에 당신이 손수 만드시고 친히 특질과 능력들을 부여해 주신 사물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만물이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있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사상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본향에 살던 당시에는 천연계는 모두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신령한 교훈들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지혜를 얻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그분과 교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거룩한 부부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되자 그분의 얼굴에서 비쳐나오던 광채가 천연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의 지구는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더러워졌다. 그러나 만물이 비록 퇴폐한 상태가 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가운데 아름다운 면이 많이 남아 있고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실물 교훈이 말살되지는 않았다. 천연계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그것들이 그들의 창조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공과를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내는 식별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인류의 죄가 만물의 아름다운 표면을 검은 천으로 가리웠으므로 그것들이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대신에 오히려 그분을 숨기는 장벽이 되었다.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었다.” (롬 1:25, 21)  그리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대신하였다. 천연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신 제사제도와 성경 자체까지도 너무 곡해(曲解) 되어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가리는 방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분은 죄가 천연계의 표면에 드리운 검은 천을 거두고 창조 당시에 그것들이 반사하던 신령한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의 말씀은 성경의 가르침과  천연계의 교훈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했고 그 교훈들이 새로운 계시가 되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아름다운 백합화를 꺾어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손에 쥐어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에서 비치는 빛으로 생기 있고 젊음이 넘치는 산뜻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들이 쳐다보고 있을 때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셨다. “들의 백합화가(단순한 자연미로)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그러고 나서 그는 아래와 같은 귀한 보증과 중요한 교훈을 주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산상설교 중에 하신 이 말씀은 어린아이들과 청년들뿐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근심과 번민이 가득하고 실망과 슬픔으로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어서 그의 손을 주위에 둘러선 군중들을 향해 펴시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마 6:28-33).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백합화와 들풀에게 주신 당신의 기별을 해석하셨다. 그는 우리가 피어나는 모든 백합화와 뾰족뾰족 싹트는 모든 풀잎사귀에서 이같은 기별을 찾아내어 읽기를 바라신다. 그의 말씀에는 확실한 보증이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도록 해준다.
진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생각은 너무나 넓고 그의 교훈은 너무도 원대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는 데 천연계의 모든 현상이 사용되었다. 날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들이 다 어떤 영적 진리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천연계는 구주의 비유들로 덮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공중 전도 사업 초기에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나 단순하여서 모든 청중이 다 구원을 얻게 하는 진리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리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므로 속히 그 진리를 빼앗겨 버렸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마 13:13-15).


예수께서는 질문을 이끌어 내고자 하셨으며 주의성 없는 자들을 각성시켜서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새겨 주고자 하셨다. 비유로 가르치는 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었고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교수 방법을 사용하실 수는 없으셨다. 청중들이 영적 사물을 참으로 알고자 했었더라면 그들은 그의 말씀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진정으로 진리를 알려고 하는 자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비유로 가르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할 진리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교훈을 일상 생활의 경험과 천연계의 장면들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의 주목을 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回想)하게 되었다. 성령께 마음문을 열어 놓는 자들에게는 구주의 교훈의 깊은 뜻이 더욱더 공개되었다. 신비하게 여겨지던 것이 분명하게 되고 이해하기 어렵던 것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실 통로(通路)를 찾고 계셨다. 그는 여러 가지 실례를 사용하심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셨다. 그가 사용한 실례들 모두가 그들이 일상 보고 듣는 현장에서 인용된 것이었기 때문에 청중들의 흥미는 더욱 고조되었다. 구주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자기가 등한시되었다거나 잊어버린 바 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의 가르침 속에서 친절하고 동정 어린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비유로 말씀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를 두른 많은 무리들 중에 제사장과 랍비, 서기관과 장로들, 헤롯당과 관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완고한 자, 야심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정죄할 어떤 죄를 찾고자 했다. 또 이들의 밀정(密偵)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의 뒤를 밟으며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 중에서 그를 정죄할 어떤 구실을 찾아내어 지금 온 세상을 모두 자기에게로 이끌어가는 듯이 보이는 그를 영원히 침묵시키고자 하였다. 구주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질을 아시고 진리를 전하실 때에 그들이 산헤드린 앞에 고소할 조건을 잡지 못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는 비유로써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외식(外飾)과 악행을 견책하셨고 비유의 말씀으로써 골수를 쪼개는 듯한 진리를 싸셨다. 만약 그가 노골적으로 공박(功駁)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즉시 그의 전도 사업을 제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밀정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하시는 한편 오류가 밝히 드러나도록 진리를 천명(闡明)하셨으므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그의 교훈으로 유익을 받았다. 하나님의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이 그의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천연계와 일상 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 것이다.”(롬 1:20)

 

비유를 통해 주신 구주의 교훈에는 참된 고등교육(高等敎育)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원(深遠)한 과학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열어 보일 수 있으셨으며 수세기에 걸쳐서 수고하고 연구하여야 겨우 통찰할 수 있는 신비들을 드러 내실 수도 있으셨다. 그는 또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있게 될 모든 발명을 착상(着想)하고 자극할 풍부한 과학 분야의 암시를 제공할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그같은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또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될 수 있는 문을 열어 줌으로 사람들의 야심을 만족시키거나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의 모든 교훈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접촉시키는 데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사업에 대한 인간의 학설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그분의 말씀과 섭리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추상적인 이론을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품성 계발에 요긴한 문제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증대시키고 선을 행할 능력을 증가시키는 문제를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상 생활에 관계되는 진리를 말씀하신 동시에 영생을 붙잡게 하는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교육을 지도하셨다. 여호와의 계명과 율례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예수께서는 당신이 친히 주신 교훈을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이 명령을 성취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율법과 원칙의 높고 아름다움을 잘 나타낼 수 있을지를 보여 주셨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특별한 대표자가 되도록 훈련시키실 때에 그들의 거처를 산과 골짜기에 두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가정생활과 종교적인 의식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천연계와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도 그처럼 그의 제자들을 천연계의 사물들이 잘 보이는 호숫가나 산기슭이나 수풀에서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배우는 동시에 그분의 사업에 그분과 협력하여 일함으로 그들이 받은 지식을 응용하였다.


이와같이 우리들도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와 친숙해져야 한다. 실로 천연계는 위대한 교과서이므로 우리는 이 책을 성경과 연관시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품성을 가르쳐 주고 잃어버린 양들을 하나님의 우리로 인도하는 일에 사용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연구할 때에 성령께서는 그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깨달음은 논리적 추리에 의하여 얻어지는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거나, 우리의 눈이 그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려졌거나, 우리의 귀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교훈의 깊은 뜻을 더 잘 파악하게 되고 성경 말씀의 숭고하고 신령한 진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


천연계로부터 직접적으로 얻는 이러한 공과에는 그것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단순성과 순결성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원천에서 나오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 천연계의 미, 그 자체가 우리의 심령을 죄와 세속적 매력에서 떠나게 하여 순결함과 화평함을 추구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인도한다. 연구자들의 마음은 너무나 자주 사람들의 이론과 가설과 소위 말하는 거짓되이 일컫는 과학과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천연계와 밀접히 접촉할 필요가 있다. 그들로 하여금 천연계와 그리스도교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심을 알게 하라. 그들로 천연계와 영적 사물들 사이에 있는 조화를 보도록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들이 품성 형성에 필요한 공과가 되도록 하라. 그렇게 함으로 정신력이 강해지고 품성은 계발되어 온 생애는 고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목적은 안식일 제정의 목적과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그의 창조력의 기념으로써 사람에게 주셨는 데 이는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그의 손으로 만드신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안식일은 우리에게 만물 가운데서 창조주의 영광을 발견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의 귀중한 교훈을 천연계의 아름다움과 결합시키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성일(聖日)에 다른 어느 날보다도 하나님께서 천연계 속에 기록하신 기별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구주의 비유를 그가 말씀하신 현장, 곧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들과 숲과 풀과 꽃들 사이에서 연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천연계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임재를 실재적(實在的)으로 느끼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평화와 사랑을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훈을 안식일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일하는 평일과도 연결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을 마련하셨다. 즉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일과 곡식을 가꾸고 거두는 일을 통해서 그는 우리의 마음 밭에서 일어나는 당신의 은혜로운 사업이 예증되고 있음을 깨닫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이와같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유용한 일상 업무와 생애의 모든 교제를 통하여 우리가 거룩한 진리의 공과를 배우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매일의 수고에 우리의 정신을 빼앗겨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일들이 항상 우리의 창조주와 구주를 생각나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생각이 우리의 모든 가정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과 업무를 통해 금실처럼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취는 영광이 우리를 위하여 다시금 만물에 깃들 것이며 우리는 항상 하늘의 진리에 대한 공과를 배우게 될 것이고 그분의 순결한 형상으로 닮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요”(사 54:13), 우리가 그 곳에 있도록 부름을 받은 숙명적 환경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고전 7:24)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2. 씨뿌리는 자

(마 13:1~9, 18~23 ; 막 4:1~20 ; 눅 8:4~15에 의거함)

 씨뿌리는 자와 씨
그리스도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을 뿐 아니라 크신 농부로써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사업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는 밭에서 씨를 뿌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 그 자체가 곧 씨앗이었으며 그는 이 씨로써 가장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들을 심으셨다. 씨뿌리는 비유는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비유의 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를 통하여 우리가 복음의 씨, 곧 파종되면 패역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그 씨를 생각하기 바라신다. 작은 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그분은 하늘의 임금이시며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을 주관하는 법칙이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도 주관한다.

 

군중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심과 기대를 가지고 갈릴리 바닷가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자리에 누워 자기의 병을 예수님께 보이려고 기다리는 병자들도 있었다. 죄에 빠진 인류의 고통을 치료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리였으므로 그는 병을 꾸짖으시고 그의 주위에 생명과 건강과 화평을 뿌리셨다.
군중이 점점 많이 몰려와 그 자리가 입추의 여지도 없이 되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들의 어선을 타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자기를 태워 바다를 건네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고깃배에 올라타셨다. 그러고는 제자들을 시켜 배를 뭍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신 후 해변에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그 해변 일대에는 아름다운 게네사렛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에는 산들이 솟아 있었고 산비탈과 들에는 농부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씨를 뿌리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은 이른 철에 나는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3-8).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초림하신 방법 역시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모든 제사 제도의 기초였으며 엄숙한 성전의 봉사는 하나님이 친히 명하신 것이었다. 이 모든 의식과 예전(禮典)은 때가 되면 그 모든 예식이 가리키고 있는 분이 나타나실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형식과 의식만을 중요시하고 그 의식이 가리키는 근본 목적을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의 전설과 격언과 교조(敎條)로써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을 가리워 버렸다. 사람들의 전설과 격언은 참 종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모든 의식의 실체(實體)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시고 오셨을 때에 그가 모든 표상적인 의식의 성취요 모든 그림자의 실체가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의 원형이신 분을 거절하고 그들의 표상적인 의식과 무용지물이 된 예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으나 그들은 계속하여 그분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는 기별에 그들은 기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로 회답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은 그들이 구주를 요구하는 대신에 기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면 그가 대정복을 감행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주장을 입증하고 페허된 지상 왕국의 터 위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로써 이러한 기대에 답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이나 폭력적인 수단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원칙을 심어 줌으로써 건설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마 13:37).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써가 아니요 씨뿌리는 자로써 오셨다. 나라를 뒤집어 엎으려 하심이 아니요 씨를 뿌리기 위하여 오셨다.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국가의 권력이나 세속적인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손실과 실망의 경험을 겪고 신고를 맛본 후에 얻어지는 수확을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의 뜻을 깨닫기는 하였으나 그 교훈이 그들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그들은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무리들은 이 새 교사가 무슨 목적으로 그토록 신비한 것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이상하게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고 그들의 야심을 처절하게 실망시켰다. 제자들까지라도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저희는 흥미를 가지고 예수님께 조용히 나아와 비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좀더 명백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묻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듯이 그렇게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잘 설명해 주셨다. 성령의 깨우쳐 주심에 마음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의 뜻이 언제까지나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써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7)고 말씀하셨다. 진리를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오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천국의 신비들을 그들에게 계시해 주실 것이며, 진리를 알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 신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늘의 빛이 영혼의 성전을 비추일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어두운 길에 밝게 비치는 등불처럼 나타나게 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간다.”(마 13:3) 동양에서는 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폭행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성안에 살고 있었다. 농부들은 매일 그 성밖에 나가 일했다. 그와 같이 하늘의 농부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나오셨다. 그는 평화스럽고 안전한 하늘 집과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을 버리시고 우주의 보좌를 떠나오셨다. 그는 괴로움과 시험을 받는 한 인간으로써 쓸쓸하게 이 땅에 오셔서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눈물로 생명의 씨를 뿌리시고 당신의 피로써 물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종들도 이와 같은 태도로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한다. 아브라함이 진리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에,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22:21)는 기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이와같이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야 한다. 옛 친구와의 교제도 끊어야 하고 일생의 계획도 포기해야 하며 세상에 붙은 소망도 모두 버려야 한다. 고통과 눈물과 고독 속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씨뿌리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뿌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인류의 타락이래로 사단은 줄곧 거짓의 씨를 뿌려 왔다. 그는 맨 처음에 거짓으로 인류를 자기 손아귀에 넣었으며 그 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시 거짓으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시키고 사람들을 자기의 권세 아래 굴복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씨뿌리는 자로써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는 하나님과 같이 의논하는 일에 동참하신 분이시며 영원하신 자의 가장 깊은 성소에 거하셨던 분이시므로 사람들에게 순수한 진리의 원칙을 나타내실 수 있으셨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진리를 계시하시는 자가 되셨다. 그로 말미암아 썩지 않는 씨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벧전 1:23)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려지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약속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씨를 심으셨다. 그러나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특별히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봉사와 그의 사업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이다. 씨앗마다 그 자체 속에 맹아력(萌芽力)이 있다. 그 씨앗 속에는 그 식물의 생명력이 들어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생명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6:63, 5:24)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그분의 말씀 속에 있는 모든 약속에는 능력 곧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으므로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명령은 실현되고 모든 약속은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과 품성을 받는 것이다.

씨마다 그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 씨가 올바른 조건하에 심어지면 곧 발아해서 그 식물 속에 있는 자신의 생명을 자라게 한다. 그와 같이 믿음으로 마음속에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품성과 생명이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실현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교사로써 하신 일은 그리스도 당시의 랍비들이 한 일과는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전설과 인간의 이론과 가설에 구애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그 말씀에 대한 인간의 가르침과 저서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교훈에는 심령을 소생시키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항상 질문하는 자들을 “기록되었으되”, “성경에 어떻게 말하였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하는 단순한 말로써 대하셨다. 반대자들이나 찬성자들을 막론하고 그들의 관심이 일깨워졌을 때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씀의 씨를 뿌리셨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 되시는 그분은 성경을 가리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리스도의 종들도 바로 그같은 일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요긴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사람의 학설과 이론을 받아들인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 전체를 영감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다. 어떤 학자는 한쪽 부분을 부정하고 다른 학자는 다른 부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자기의 판단과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이고 저희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침으로 성경의 거룩한 권위를 파괴한다. 그리하여 불신의 씨가 널리 뿌려짐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 되어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우리가 마음대로 막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될 신조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 당시에 랍비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억지로 이상하게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한 교훈들이 그들의 생활을 질책하였으므로 그들은 그 말씀의 능력을 소멸시키고자 애썼다.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법 행위를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하고 모호하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에 있었던 이같은 행위를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하여야 된다고 그분은 가르치셨다. 그분은 또 성경을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권위있는 책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마땅히 그렇게 하여야 한다. 성경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논쟁의 해결서로써 그리고 모든 신앙의 기초로써 제시되어야 한다.

성경은 이같은 능력을 빼앗겨 버렸고 그 결과로 인류의 영적 생활은 점점 타락하게 되었다. 오늘날 강단에서 하는 많은 설교는 사람들의 양심을 각성시키고 심령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룩한 현시(顯示)가 없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고자 부르짖는 사람들과 그의 임재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적지 않으나 어떠한 훌륭한 철학적 이론이나 문학적 변론도 그들의 요구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주장이나 그들이 지어낸 이론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하라. 전설과 사람의 학설과 격언만을 들어온 사람들에게 심령을 새롭게 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자애를 주제(主題)로 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품성과 율법이 얼마나 신성한가에 대하여 많이 논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것들이 또한 그리스도의 종들의 논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전하라. 율법의 요구와 복음을 밝히 설명하라. 그리스도의 생애와 극기와 희생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그의 겸손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이야기하라. 그리고 그가 지금 하늘 궁정에서 그들을 위하여 하시는 중보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요 14:3)하리라는 약속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릇된 학설에 대하여 토론하거나 복음의 반대자들을 상대로 싸우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라. 하나님의 보고로부터 나온 신선한 진리가 생활 속에 번쩍이게 하라.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사 32:20)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말하는 것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렘 23:28).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5, 6).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에 모든 교육 사업의 기초가 되는 대 원칙이 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있다. 다른 문제들이 그들의 정신을 점령하고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의 저서를 연구하는 일이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에도 회의론적 사상들이 섞여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그 발견된 것들이 잘못 해석되고 악용됨으로 인하여 과학적 연구가 오도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가상적 학설과 비교되고 있으며, 드디어는 불확실하고 미덥지 못한 것같이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의혹의 씨가 청년들의 마음속에 심어지게 되어 그들이 시험을 만나게 되면 심겨진 의혹의 씨가 발아되어 싹이 튼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심령은 보호자와 안내자를 잃게 되므로 청년들은 하나님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탈선하게 된다.

오늘날 이 세상에 죄악이 널리 퍼지고 있는 주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할 때에는 죄된 본성에서 치밀어 오르는 악한 정욕을 제어할 능력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육체를 위하여 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또한 여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쇠퇴시키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저서에 몰두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은 편협해지고 천박해진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영원한 진리의 깊고 넓은 원칙들과 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력은 평소에 익숙한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연히 제한된 사물에만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해력은 약하여지고 그 능력은 감퇴되어 얼마 후에는 더 넓힐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같은 모든 것은 다 그릇된 교육이다. 모든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청년들의 마음을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에 붙들어매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세나 내세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교육이다.
이 교육이 과학적 연구를 방해하거나 교육의 수준을 저하시킨다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하늘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생과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는 일처럼 우리를 더욱 고상하게 하고 활기차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청소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그들의 지력은 발달되고 그 일에 힘을 기울이는 동안 그 지력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들은 더욱 넓은 사색(思索)의 분야로 인도되어 불멸의 지식의 보화를 풍성히 얻게 될 것이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얻어지는 교육은 구원의 경륜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육이 심령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유혹을 대항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요새화 해줄 것이며 학생들로 하여금 세상에 자비의 기별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그분과 더불어 동역자가 되기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할 것이다. 또한 이 교육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고 성도의 기업을 얻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진리의 교사는 그 자신이 경험을 통하여 배운 것만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씨뿌리는 자는 “자기의 씨”를 뿌렸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였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가르치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 자신의 사상과 인격과 생활 경험은 모두 다 그분의 가르침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종들도 그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그들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는 그 말씀을 “아마 그럴 듯하다”거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나타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고 말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과 모든 교사들은 사도 요한같이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흙-길가에 떨어진 씨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취급하고 있는 주된 문제는 씨가 뿌려진 땅이 씨의 발아와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로써 당신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셨다. 내가 하는 일을 비판의 안목으로 보거나 또 그것이 너희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너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너희가 나의 기별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나의 기별을 받고 안 받는 데 따라서 너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길가에 떨어진 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길가에 뿌려진 씨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듣는 자의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고 있다. 마치 사람이나 짐승의 발에 밟혀 단단해진 길과 같이 그들의 마음은 세상적인 거래와 쾌락과 죄가 난무하는 대로가 되어 있다. 이기적인 목적과 죄악적인 방종에 몰두 된 사람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히 3:13) 된 자이다. 그들의 영적 기능은 마비되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 비유가 저희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저희의 부족과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기별을 마치 저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간과해 버린다.

마치 새가 길가에 떨어진 씨를 재빨리 주워 먹는 것처럼 사단도 우리 심령에서 진리의 씨를 빼앗아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관심한 자들의 심령을 깨우치고, 완고한 자들의 마음에 감화를 끼칠까 두려워한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전도 집회에 참석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도록 힘쓰는 반면에 사단은 그 말씀이 아무 효과도 나타내지 못하도록 재빨리 활동한다. 그는 깊은 원한을 갚기 위해 나타내는 악착같은 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영혼들을 이끌고 계시는 반면에 사단은 마음에 감동을 받고 구주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려고 애쓴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계략으로 점령해서 비평하게 하고 의심과 불신을 갖도록 조장한다. 설교자의 말과 태도가 청중의 마음에 맞지 않을 때 그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같은 결점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비하시사 그들에게 보내 주신 진리, 곧 그들에게 꼭 필요한 진리가 지속적으로 그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게 한다.

사단은 많은 조력자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진리의 씨를 빼앗는 유혹자를 도와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를 가정에서 비평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강연이나 정치 연설가의 말을 비평하는 것과 같이 설교를 비판한다. 그들은 마땅히 여호와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그 기별을 소홀히 하고 비꼬는 말로 논평한다. 그들은 목사의 인격과 동기와 행동에 곁들여 동료 교인들의 품행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주고 받는다. 혹독한 비판을 내리고, 잡담과 중상하는 말을 하되 흔히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한다. 부모들은 이런 일들을 그들의 자녀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한다. 그렇게 함으로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에 대한 존경심과 그들이 전한 기별에 대한 존경심을 소멸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소홀히 여기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가정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불신자가 되도록 교육을 받고 있다. 부모들은 왜 그들의 자녀들이 그처럼 복음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성경의 진리를 그토록 의심하는지를 의아해 한다. 그들은 또 저희의 자녀들이 도덕적 감화와 종교적 감화를 받는 데 그처럼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해 한다. 그들은 저희 자신이 보여준 모본이 저희 자녀들의 마음을 그토록 완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좋은 씨는 뿌리를 내릴 곳이 없으므로 사단이 그것을 빼앗아 간다.

 

돌밭에 떨어진 씨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씨가 뿌려진 돌밭은 흙이 깊지 못하다. 싹이 곧 나기는 하나 그 뿌리가 돌을 뚫고 들어가 필요한 양분을 섭취할 수 없으므로 얼마 안 가서 말라 죽는다. 믿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 돌밭 청중이다. 선천적인 이기심이 땅속에 깔린 바위처럼 그들의 선한 욕망과 포부의 밑 바닥에 깔려 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죄가 얼마나 흉악한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죄를 자각하고 겸손해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쉽사리 진리를 확신하고 겉으로는 유망한 신자처럼 보이나 그들이 가진 믿음은 피상적일 뿐이다.

사람들이 믿다가 타락하는 것은 도를 너무 빨리 받아들인 연고도 아니요, 기쁨으로 받아들인 까닭도 아니다. 마태는 구주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임할 때 우리가 즉시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동시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에도 기쁨이 있다. 그러나 이 돌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에 의해서 지적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받기는 하지만 거기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생활 습관을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하여 보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 말씀의 지배에 맡기지 않는다.

식물의 뿌리는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식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분을 빨아들여 식물 각 부분에 보낸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다. 영적 생명이 영양 공급을 받는 것도 믿음을 통해서 사람의 심령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연합을 유지함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밭 청중은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을 의지한다. 그들은 저희의 행실과 순간적인 선한 생각을 의뢰하고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강하지 못하며 그의 굳센 능력 안에서 강건하지 못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속에 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햇볕은 튼튼한 곡식은 강하게 하고 잘 익게 하지만 뿌리가 깊지 못한 곡식은 시들게 만든다. 이와같이 “뿌리가 없”는 자는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 많은 사람은 복음을 받지만 그들이 죄에서 구원을 얻기보다는 고통을 피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종교가 저희를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얼마 동안 기뻐한다. 그들은 생활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일지 모르나 풀무불의 연단과 같은 어려운 시험을 받게 될 때에는 엎드러지고 만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품고 있는 어떤 죄를 지적하거나 그들에게 극기와 희생을 요구하게 될 때 그들의 감정은 몹시 상한다. 그들의 생애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큰 노력이 요구된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불편과 시련만을 보고 영원한 사물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예수를 떠난 제자들처럼 서슴지 않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성령의 깊은 감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호에 따른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저희의 구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가 저희에게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실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 계신 구주와 개인적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의 품성은 선천적인 결함과 후천적인 결함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써의 성령의 역할을 총체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회개를 요청하는 책망자로써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또 자기 자신과 죄에 대하여 종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같은 상태를 개선하고자 애를 쓰고 있으나 저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는다. 그들은 저희 자신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고 그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거룩한 능력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형성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막연하게 저희의 결함을 시인하나 그 죄를 낱낱이 구별하여 버리지는 않는다. 악을 행할 때마다 우리의 이기심은 점점 강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진리의 말씀을 스스로 깨닫는 데 있다. “거듭나야 하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7, 3).
참된 성결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아가는 데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인 헌신과 온전한 봉사를 요구하신다. 그분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기를 요구하신다. 자아를 소중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랑이 모든 행위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를 이루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그리스도인들을 견실하게 하고 보호해 줄 수 있다. 이 사랑만이 시련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사랑은 또한 희생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속의 경륜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이 희생은 너무도 넓고, 깊고, 높기 때문에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셨으므로 그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저희의 구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저 없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구주의 영예와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 살고, 그에게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그를 위해 일하기를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몹시 가벼울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고통과 수고와 희생을 자청하게 될 것이다.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분의 열망(熱望)을 우리도 가지게 되고 그분이 느끼셨던 영혼에 대한 부드러운 간원을 우리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기만이다. 진리의 이론이나 그의 제자라는 공언만으로는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목적 의식이 약해지고 갈망이 늘 변하는 것은 전심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를 겸하여 섬기려는 노력은 결국 우리로 돌밭 청중이 되게 할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시험이 이를 때에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복음의 씨는 가끔 가시떨기와 잡초 속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덕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종래의 습관과 행위와 죄된 생애를 버리지 않고, 또한 사단의 특성들을 심령 속에서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발아된 씨는 질식될 것이다. 가시가 돋아나서 그 곡식을 덮어 마침내 다 죽게 만들 것이다.

귀한 진리의 씨를 받기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는 마음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잘 자라날 수 있다. 죄의 가시떨기는 어떤 땅에서든지 자란다. 가시떨기는 가꾸어 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곡식은 반드시 잘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찔레와 가시는 언제나 빨리 자라게 됨으로 제초하는 일이 늘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지배하에 두지 않거나 성령이 끊임없이 품성을 세련시키고 고상하게 하지 않으시면 옛 습관은 우리의 생애 속에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비록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으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결되지 않으면 저희의 고백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죄를 이기지 않으면 죄가 저희를 이기게 된다. 가시떨기를 잘라 버렸을지라도 뿌리가 뽑히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것이 다시금 속히 자라서 그 덩쿨이 영혼을 덮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을 위태롭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 주의를 주셨다. 마가는 그것들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욕심과 다른 모든 물욕이라고 말했고, 누가는 이 세상의 염려와 부와 쾌락을 열거하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영적 씨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사람의 심령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그의 영성은 사멸해 버린다.
“세상의 염려”. 어떤 계층의 사람들을 막론하고 세상의 염려로 시험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역(苦役)과 빈곤과 궁핍의 염려가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또 무거운 짐이 된다. 부자에게는 재물을 잃어버릴 염려와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들의 꽃에서 배우라고 그분께서 당부하신 공과를 잊어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보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의 짐을 그리스도께 맡기지 아니하므로 그분은 저희의 짐을 지실 수 없다. 그리하여 생활의 염려가 그들로 그리스도께 가서 도움과 위안을 얻도록 하는 대신에 그것들이 오히려 그들로 그분에게서 떠나게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많은 열매를 맺힐 수 있는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모든 정력을 그들의 사업에 바치게 되어 자연히 영적 사물을 등한히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한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롬 12:11)라고 명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자들을 위하여 응분(應分)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해야 하고 사업에도 종사하여야 한다. 저희는 죄를 짓지 않고서도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업에 너무나 열중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도, 성경을 연구할 시간도 없고 하나님을 찾아 섬길 시간도 없다. 때때로 그들의 심령이 성결하게 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떠나 장엄하고 위엄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시간이 없다. 영원한 사물은 부차적이 되고 세속적인 사물이 으뜸으로 삼아진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심령의 활력이 세속의 가시떨기를 자라게 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과는 전혀 같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과오에 빠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지만 저희의 임무가 너무 무겁고, 책임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할 시간이 없을 만큼 분주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등한히 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말씀을 잊어버린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남으로 인해 저희의 생애에 그분의 은혜가 결핍되어, 자기 자신의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봉사는 남보다 높고자 하는 욕망과 제어되지 못한 거칠고 추악한 성벽으로 인하여 더럽혀진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봉사가 실패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이며, 사업의 결과가 미미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리의 유혹”. 재물에 대한 사랑에는 사람을 호리고 기만시키는 힘이 있다. 흔히 세상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저희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신 8:17)고 말한다. 저희의 재물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대신에 저희 자신을 높이게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이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는 동시에 저희 동포들에 대한 의무감마저도 잊어버린다. 저희 재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향상을 위하여 주어진 달란트로 여기는 대신에 그것을 자신들을 섬기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사용된 재물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특성을 계발시키는 대신에 사단의 특성을 조장한다. 그리하여 말씀의 씨는 가시떨기에 덮이어 기운이 막히게 된다.

“이생의 … 일락”.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추구하는 오락에는 위험이 있다. 체력을 약화시키고, 정신을 흐리게 하며, 영적 식별력을 마비시키는 모든 방종의 습관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벧전 2:11)이다.
“기타 욕심”. 이것은 그 자체가 죄악적이 아니라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보다 다른 무엇을 더 귀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께 대한 애정을 빼앗아가는 것은 영혼의 원수가 된다.

 

젊은이의 기름진 마음밭
한창 자라나는 원기 왕성한 청년 시절에는 자기 중심적인 야망과 자기를 섬기고 싶어하는 커다란 유혹을 만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세속적 사업의 성공으로 인하여 양심을 마비시키고 참으로 훌륭한 품격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일에 계속 빠져들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환경이 이를 조장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금지하는 방향으로 자라가게 될 것이다.

자녀들의 발육기에 있어서 부모들의 책임은 실로 크다. 부모들은 청년들이 인생과 인생의 참된 성공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도록 올바른 감화로 그들을 두를 수 있도록 연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자녀들의 세속적 번영을 첫째 목적으로 삼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친구를 택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러한 목적을 참작해서 선택한다.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가정을 대도시 속에 두고 자녀들을 유행이 난무하는 사회로 안내한다. 그들은 자녀들의 주위를 속화(俗化)와 교만을 조장하는 감화로써 둘러싸고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결과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쇠미해질 뿐 아니라 높고 고상한 인생의 목적도 잃어버린다. 영생을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과 딸될 특권을 세속적 이익과 바꿔 버린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향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족시켜 줌으로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려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로 온갖 운동 경기를 하도록 허락하고 재미있는 각종 연회 장소에 가도록 허락할 뿐 아니라 허식(虛飾)과 자기 만족을 위하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빠져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강렬해져서 급기야는 그들의 흥미가 이 곳에만 쏠리게 되어 그것을 인생의 원대한 목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게으르고 방종하는 습관을 갖게 되어 거의 견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할 교회까지도 오락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을 조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종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금을 모금할 때 많은 교회들이 어떠한 방법을 쓰고 있는가? 바자회와 만찬회와 자선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품 뽑기와 그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장소가 먹고 마시는 일과 사고 파는 일과 온갖 놀이로 그 신성성이 더럽혀지는 때가 종종 있다. 그리하여 예배당에 대한 존경심과 예배에 대한 경건함이 청년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자제의 방벽은 약해지고, 이기심과 식욕의 방종과 허식을 사랑하는 일이 그들의 마음을 끈다. 그것들은 방종될수록 더 강해진다.

도시는 쾌락과 향락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많은 부모들이 도시가 저희 자녀들에게 유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위하여 도시 생활을 선택하지만 마침내 실망하게 되고 너무 늦은 다음에야 저희의 큰 실책을 후회하게 된다. 오늘날 도시는 급속히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휴일이 나태함을 조장시킨다. 극장에 가는 일과 경마와 도박과 음주와 흥청거리는 흥분적인 오락들이 온갖 욕정을 극도로 자극시킨다. 청년들은 유행의 풍조에 휩쓸려 간다. 자신의 향락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조수와 같이 밀려드는 유혹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교적인 오락과 경박한 환락에 몰두하게 되고,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과의 교제가 저희의 마음을 취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한 가지 형태의 방탕에서 다른 형태의 방탕을 즐기도록 인도되어 마침내는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내기 위한 좋은 소질과 욕구를 잃어버리게 된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식어지고 그들의 영적 생애는 어두워진다. 심령의 모든 고귀한 기능들이 마비되고 사람을 영적 세계와 교통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력이 저하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 것이 사실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심령에 상처를 냈고 일생 동안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한다. 선악을 분별하는 데 명민하여야 할 그들의 식별력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인식하는 데 민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단의 계책도 분별하지 못한다. 위기에 처하게 될 때에 그들은 시험에 굴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는 일이 너무도 많다. 쾌락을 사랑하는 생애의 결국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모두 파멸일 뿐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행해지는 인생의 게임에 사단은 근심과 재리와 쾌락 모두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졌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 16). 사람의 마음속을 펴놓은 책처럼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눅 21:34)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 10).

 

마음 밭의 준비
그리스도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그 뿌린 결과가 토지의 여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모든 경우에 씨뿌리는 자와 씨는 다 동일하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기대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이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결과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 속한 청중들일지라도 그러한 상태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은 늘 사람을 세상 사물에 몰입시키는 마력을 깨뜨리시고 그들로 썩지 아니할 보화를 찾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주의하고 등한히 하게 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한 결과이다. 좋은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마음이 완고해지고 그것의 성장을 저해하는 악이 자라게 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마음 밭은 잘 갈려져야 한다. 흙은 죄에 대한 깊은 회개를 통해 잘게 부숴져야 한다. 유해한 사단의 잡초는 뽑아 버려야 한다. 가시떨기에 덮였던 밭은 부지런한 노력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이와같이 선천적으로 악한 성질도 예수의 이름과 힘을 의지하며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4:3)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호 10:12).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이루고 싶어하시며, 우리에게 그와 협력하기를 요청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설교를 너무 많이 하고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하는 일은 너무 적게 하고 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일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동정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가까이 접촉해서 영생에 관한 중대한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일깨워 주도록 힘써야 한다. 그들의 마음이 밟혀 굳어진 한 길처럼 단단하여 겉보기에는 그들에게 구주를 소개하는 일이 전혀 허사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론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변론으로 설복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개인적 봉사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돌 같은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진리의 씨가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씨를 뿌리는 자들도 그 씨가 가시덤불에 기운이 막히지 않게 하고 흙이 얕아 말라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원칙을 잘 배워야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들의 생애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들의 품성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들에게는 져야 할 짐이 있고 고쳐야 할 타고난 나쁜 본성이 있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좋은 군사로써 자기를 부정하고 어려움을 참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이 큰 축복임을 배워야 한다. 그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지하고 그분께 그들의 모든 염려를 맡기도록 가르치라. 그들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라, 그렇게 하면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과 관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속적인 쾌락이 그 매력을 잃게 되고 우리를 낙심케 하는 온갖 짐들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진리의 모습이 자기의 일을 하게 되어 묵은 땅을 갈아 엎을 것이다. 땅위에 나와 있는 가시덤불을 자를 뿐 아니라 뿌리까지도 뽑아 버릴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씨뿌리는 자가 늘 실망만 당하는 것은 아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에 대하여 구주께서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은 삼십배가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써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 비유 가운데 말씀한 “착하고 어진 마음”은 죄가 없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자는 마음이 착한 자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필요를 느끼는 자이다. 그는 진리를 알고자 하고 그것을 순종하고자 진정으로 열망하는 자이다. 어진 마음은 믿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진 마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런 사람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고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기 때문에 진리가 저희 마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의적인 무지와 짐짓 스스로 취한 무분별에 대해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교훈에 마음문을 열고 믿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그들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믿었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좋은 밭으로 표상된 청중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으로 받는 자들이다. 성경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는 자만이 참으로 배우는 자이다. 그는 그 말씀을 인해 떨게 될 것인데 이는 그 말씀이 그에게 생생한 현실(現實)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하려는 자세로 마음문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 한다.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 바로 이러한 청중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에게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고 말했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사람의 지적 능력보다는 그것을 얻고자 하는 순수한 목적과 열렬하고 진실하며 단순한 믿음의 여하에 많이 달려 있다.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들은 가까이 할 것이며, 그들에게 풍성한 진리의 보화를 열어 보이기 위하여 성령이 보내질 것이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청중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할 것이며 사단이 자기의 모든 악한 부하를 총동원할지라도 능히 그 말씀을 빼앗을 수 없다.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는 넉넉치 않다. 성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제시된 진리를 깊이 명상해야 한다. 그는 열심히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알고자 하고 그 거룩한 말씀의 깊은 의미를 맛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웅대한 사상과 순결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라고 명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고, 구원의 대 경륜에 나타난 그분의 기이한 역사를 연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음의 순결과 사상의 명료함을 바라는 우리의 욕구가 더욱 고상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거룩하고 순결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심령은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것이다.

“열매맺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선행(善行) 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과 생애가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요 5:30)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성경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고 말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유전과 후천적으로 이루어진 품성과 생활 습관 등과 충돌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계시된 모든 요구 조건을 다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그의 모든 습관과 관습과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킨다. 그는 유한하고 허물 많은 인간의 말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면 전혀 보잘것이 없다는 견해를 갖게 된다. 그는 전심을 다해 오직 한 가지 일념으로 영생을 구하게 되고, 모든 손실과 박해와 죽음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내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고난과 시험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환난이 올 때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불안해 하거나 불신하거나 낙망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사건의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없고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분간할 수 없지만 우리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윽한 자비를 기억하고 우리의 염려를 그분에게 맡기는 동시에 인내로써 그분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투쟁을 통하여 영적 생애는 힘을 얻게 된다. 시련을 잘 견디게 되면 그것이 견실한 품성과 보배로운 영적 미덕을 계발시켜 줄 것이다. 믿음과 온유와 사랑의 완전한 열매는 흔히 풍파와 역경 속에서 가장 잘 성숙된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비를 기다리나니”(약 5:7).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길이 참아 그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때때로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열매가 가장 잘 발육될 수 있는 환경에 처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히 생각하며 낙심한다. 그러나 성장하고 결실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이러한 미덕을 계발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굳게 붙잡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그 말씀에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더욱 강하고 완전한 정신이 우리를 주관하게 될 것인데 이는 우리가 길이 참는 능력의 근원이신 자와 산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보통 사람과 같은 이기적인 생활을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며 그의 품성이 우리의 성품 가운데 재현(再現)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 가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3.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막 4:26~29에 의거함)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적지 않은 의혹을 일으켰다. 청중 가운데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왕국을 건설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많은 사람이 기이히 여기며 당황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시고 다른 비유를 가지고 그들의 생각을 세상 왕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심령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업으로 돌이키시고자 계속 노력하셨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추수 때”에 “낫을 대”는 농부는 곧 그리스도시다. 마지막 큰 날에 땅의 곡식을 거두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가리킴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자기 임무를 등한히 여기고 조는 분이 아니다. 그는 밤낮으로 그것을 지키시는 분으로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지 못하실 리가 없다.

씨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천연계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씨는 그 자체 안에 발아소(發芽素)를 갖고 있다. 이 요소는 하나님께서 친히 넣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씨를 그대로 버려두면 싹을 내지 못한다. 씨를 발아시키기 위해서는 농부가 해야 할 일이있다. 먼저 땅을 일구고 비옥하게 만든 다음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농부는 밭을 갈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지라도 오히려 인력(人力)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작은 씨에서 살아 있는 식물이 나오도록 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의 최대의 노력을 다한 후에 파종에서 수확기까지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기이한 역사를 이어가시는 하나님을 계속 의존해야 한다.

 

씨에는 생명이 있고 땅에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무한하신 능력이 밤낮으로 역사하지 아니하면 씨는 아무런 수확도 내지 못한다. 바싹 마른 밭에 수분을 주기 위하여 비가 내려야 하고, 태양이 온기를 보내 주어야 하고, 땅에 묻힌 씨에는 전기가 전달되어야 한다. 창조주께서 넣어 주신 생명은 오직 창조주만이 불러낼 수 있다. 모든 씨가 싹이 트고 모든 식물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사 61:11).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파종에 있어서도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는 마음의 밭을 잘 일구어야 한다. 그는 씨를 뿌려야 한다. 그러나 생명을 발생시키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인간의 노력이 미칠 수 없는 한계가 있어서 그것을 넘으면 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우리는 말씀을 전파해야 하지만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와 찬양을 솟아나게 할 능력을 나누어 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어떤 능력이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만 말씀이 영혼들을 소생시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살아 있고 능력 있는 말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새겨 주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 저희 자신에게는 전혀 없고, 오직 그분의 말씀을 효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씨를 뿌리는 일은 일종의 신앙 행위이다. 씨가 발아해서 성장하는 신비를 씨를 뿌리는 자가 이해할 수 없으나 그는 초목을 무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한다.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릴 때에는 마치 자기 가족들이 먹고 살 귀중한 곡식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단지 더 많은 것을 수확하기 위하여 현재의 좋은 씨를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는 여러 갑절의 수확을 바라면서 씨를 뿌린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종들도 저희가 뿌린 씨로부터 수확을 기대하면서 일하여야 한다.

좋은 씨도 얼마 동안은 냉담하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속에 들어가 전혀 눈에 띄지 않게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 씨는 그것이 뿌리를 내렸다는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하나님의 영이 그의 마음속에 생기를 불어넣으면 묻혀 있던 씨는 싹이 나서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하는 필생의 사업을 통해 어느 것이 잘 될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후에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전 11:6). 또한 하나님의 크신 언약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 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선언한다. 이와 같은 언약을 믿고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영적인 파종에 있어서도 이에 못지않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라는 약속들을 믿고 일해야 한다.

씨가 발아하는 것은 영적 생활의 시작을 나타내고 곡식이 자라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한 아름다운 표상이다.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자라남이 없이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식물은 자라나지 않으면 죽는다. 식물이 자라는 소리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나 끊임없이 계속하여 자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생애의 발전도 그와 같다. 매 발전의 단계마다 우리의 생애가 완전하게 될 수 있다.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면 계속적인 발전이 있게 될 것이다. 성화는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 할 사업이다. 우리가 기회를 많이 가질수록 우리의 경험은 넓어지고 우리의 지식도 증가한다. 우리는 책임을 질 만큼 강해지고 특권에 비례해서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식물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련하신 것들을 섭취함으로 자라난다. 식물은 그 뿌리를 땅속에 뻗고 위로는 햇빛과 이슬과 비를 흡수하며 공기 속에서는 생명소를 흡수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능력과 협력함으로 자라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하고 보다 넓은 경험을 얻도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들을 잘 이용하여야 한다. 식물이 뿌리를 땅속에 내리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식물이 햇빛과 이슬과 비를 받는 것처럼 우리도 성령을 받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문을 열어야 한다. 주의 사업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우리가 마음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치면 그는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호 6:3)실 것이다. 그는 의의 태양으로써 “치료하는 광선”(말 4:2)을 발하며 우리 위에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백합화같이”(호 14:5) 필 것이요 “곡식같이 소생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호 14:7)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끊임없이 의뢰함으로써 범사에 우리의 머리가 되신 그분에게까지 자라나게 될 것이다.

밀은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난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가꾸는 목적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그들은 굶주림을 채울 양식을 바라고 후일에 거둘 추수를 위하여 씨를 뿌린다. 이와같이 하늘의 농부께서도 당신의 수고와 희생에 대한 보수로써 수확할 곡식을 찾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당신 자신을 재현시키고자 하신다. 그는 이 일을 당신을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신다.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은 열매 맺는 일이다. 곧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시키고 또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 품성이 재현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이다.

곡식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싹을 내고 자라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사 55:10) 주기 위해서이다. 이와같이 누구든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대표자로 이 땅에 있는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생애에는 자라나는 일도 없고 열매맺는 일도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그대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해 주고 그분의 인자하심을 이야기해주라. 그대에게 주어지는 모든 의무를 다하라. 마음속에 영혼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을 힘써 행하라. 그대가 그리스도의 정신 곧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기심 없는 사랑의 정신과 그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신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자라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그대의 품성에 무르익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 그대의 신념이 더욱 확고해져서 그대의 사랑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순결하고 고상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 가운데서 그대는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욱 많이 반사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의 절제”(갈 5:22, 23)이다. 이 열매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종류대로 수확을 내어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촉진시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벧후 3:12). 그의 이름을 믿노라고 하는 자들이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열매를 맺는다면 온 세상에는 얼마나 빨리 복음의 씨가 뿌려질 것인가! 최후의 큰 수확을 위해 곡식은 속히 익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귀한 곡식을 거두기 위해 강림하실 것이다.

 

 

4. 씨뿌리는 비유에서 배울 다른 교훈들

씨를 뿌리는 일과 발아하여 식물이 자라나는 일을 통하여 가정과 학교에서 매우 귀중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어린이들과 젊은이들로 하여금 천연계의 사물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배우게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믿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축복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대가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협력해야 할지를 이해하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더욱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고 그들의 매일의 생애 속에 역사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더 잘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으로 이 지구를 창조하신 것처럼 씨를 창조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써 그 씨들이 자라나고 번식할 능력을 주셨다. 그분께서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1, 12). 그 말씀이 지금도 씨를 자라게한다. 푸른 싹을 내는 모든 씨는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서”(시 33:9)게 하신 분의 기이한 말씀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마 6:11)소서라고 하셨다. 그리고 꽃을 가리키면서 그는 제자들에게 보증의 말씀으로 “…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30)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그의 보증을 유효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역사하신다. 한 보이지 않는 능력이 사람의 종으로써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하여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다. 우리 주께서는 겉으로 보기에 내어 버린 것 같은 씨를 살아 있는 식물(植物)이 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알찬 곡식이 되게 하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적당한 분량대로 공급하신다.

 

시편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이 있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나이다.
  (시 65:9-11)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천연계
물질계는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으며 만물은 자연 법칙을 순종하고 있다. 만물은 다 같이 창조주의 뜻을 말하고 있으며 또 그 뜻을 따르고 있다. 구름과 햇빛, 비와 이슬, 바람과 폭풍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감독 아래 있으며 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곡식의 싹이 흙을 뚫고 나와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막 4:28)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순종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것들을 때를 따라 발육시키는 것은 그것들이 주의 역사에 반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이성(理性)과 말하는 재능을 받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그의 뜻을 불순종해도 된단 말인가?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이 세상을 어지럽혀도 괜찮단 말인가?

 

하나님과 함께 일함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력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저희 손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씨를 뿌려도 햇빛과 우로와 구름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면 곡식은 자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업 경영과 모든 학문과 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영적 사물과 품성 형성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봉사 사업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 모든 일에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우리의 온갖 노력은 허지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사람이 영적인 사업이나 세속적 사업에 있어서 어떤 것을 성취시켰다고 하면 그것은 창조주와 협력함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신뢰하고 사람의 꾀를 지나치게 의뢰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능력에 대해서는 너무도 적게 신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이다. 사람이 하는 역할이 말할 수 없이 미약하지만 그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연결된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어린이들의 교육

씨에서 나온 식물이 점진적으로 자라는 모습은 자녀 교육의 좋은 실물 교훈이 된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이 비유를 말씀하신 분께서 작은 씨를 만드시고 그 씨에 생명소를 넣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씨의 성장을 주관하는 법칙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비유가 가르치는 진리가 그분 자신의 생애 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육체적인 면이나 영적인 면을 막론하고 그가 모든 청년들이 하기를 바라시는 그대로 식물에 의하여 실증된 거룩한 성장의 법칙을 따라 행하셨다. 그는 비록 하늘의 임금이요 영광의 왕이셨으나 베들레헴에 아기로 탄생하시고 얼마 동안은 어머니의 보호를 받는 무력한 아기로 지내셨다.

 

소년시절에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어린이로써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셨다. 그때 그는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않으시고 소년답게 말하고 행동하셨다. 부모를 공경하고 어린이로써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부모의 명령을 준행하고 가사를 도와 드렸다. 자라나시는 각 단계에 있어서 그는 죄없는 생애를 사셨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미덕을 갖추셨으며 완전 무결하셨다. 성경은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하여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고 하였고 그의 청소년 시절에 대하여는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고 하였다.

여기에 부모와 교사의 할 일이 제시되어 있다. 그들은 청소년들의 성벽을 잘 지도하여 줌으로써 그들의 생애의 각 단계에서 마치 밭의 곡식이 하는 것처럼 각각 그 시기에 적절한 자연미를 자연스럽게 나타내도록 힘써야 한다.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한 어린이일수록 가장 큰 매력을 갖고 있다. 그들을 너무 추켜 세우거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들의 재치 있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그들의 용모와 말과 행동을 칭찬해 줌으로 허영심을 길러 주지 말라. 그리고 값이 비싸고 사치스러운 의복도 입히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의 마음속에 교만심이 조장되고 그들의 동무들의 마음에는 질투심이 일어나게 된다.

어린이들은 어린이다운 단순성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들로 나이에 맞는 작은 일을 하게 하여 부모를 돕게 하고 그들의 나이에 알맞는 오락과 경험에 만족할 수 있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유년 시기는 비유 가운데 나오는 싹에 해당되는 데 싹은 그 싹 특유의 미(美)를 갖고 있다. 어린이들이 빨리 조숙해지도록 강요하지 말고 저희 유년 시절의 싱싱함과 미덕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보유하고 있도록 해야 한다.
어린이들도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들의 연령에 맞는 경험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전부이다. 그들은 영적 사물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품성을 조성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온갖 편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종류대로 거둠
천연계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법칙 가운데서 원인에는 틀림없이 확실하게 결과가 따른다. 수확되는 곡식은 무엇을 심었느냐를 증명해 준다. 게으른 일꾼은 그의 행위로 인하여 정죄를 당한다. 수확은 게으른 자에 대해 불리한 증거를 제시한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모든 일꾼의 성실성은 그가 한 일의 결과로 헤아려진다. 각 사람이 한 일의 특성이 그의 부지런함과 게으름 여하에 따라 수확물에 나타나게 된다.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도 이와 같은 식으로 결정된다.

뿌려진 모든 씨는 그 종류대로 수확을 낸다.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 긍휼과 동정과 사랑의 씨를 심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심은 것을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심과 자애(自愛)와 자존심과 모든 자아 방종적 행실은 그 특성에 해당되는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이므로 그는 육체로 말미암아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시키지 아니하신다. 멸망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 될 것이다. 양심의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불신(不信)의 씨를 심는 자이다. 그 씨는 정확하게 불신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 옛날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첫번째 경고를 거절함으로 강퍅의 씨를 심게 되었고 따라서 강퍅함을 거두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제로 불신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가 뿌린 불신의 씨는 그 종류대로 수확을 냈다. 그리하여 그의 거역은 마침내 자기 나라의 황폐와 자기 맏아들의 차디찬 시체와 자기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가정의 장자들의 시체를 보기까지 계속되었고 드디어 바닷물이 그의 말과 병거와 그의 모든 군사들을 덮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같은 바로의 경험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진리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무서운 실례이다.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들이 뿌리는 씨에 대해 조심하게 될 것이다.

뿌려진 씨는 수확을 내고 그것은 다시 뿌려져서 수확은 점점 불어나게 된다. 이 법칙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모든 행동과 모든 말은 열매를 맺는 씨가 된다. 모든 친절한 행동과 순종과 극기는 다른 사람에게서 재생산되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뿌려진다. 이와같이 질투와 증오와 불화 따위의 행동도 “쓴 뿌리”(히 12:15)를 나게 하는 씨가 되어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더럽힘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칠지 모른다. 그리하여 선악간에 씨를 뿌리는 일은 그 영향이 현세와 내세에까지 미치게된다.

 

물가
씨뿌리는 비유는 영적이거나 현세적인 것 모두에 있어서 관대해야 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주께서는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 … 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 32:20)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선물을 항상 나누어 준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업이나 인간의 요구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그 씨를 땅에 던져 버림으로 더 많이 불어나게 한다.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주는 일에 신실한 자들도 그와 같다. 그들은 나누어 줌으로 저희의 축복을 증가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나누어 주는 사람에게 계속하여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그리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에는 이 말씀 이상의 의의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 물질을 남에게 나누어 줄 때 우리의 사랑과 동정의 표시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생각을 일깨우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 밭이 영적 진리의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진다. 그리고 씨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분은 씨가 발아해서 영생의 열매를 맺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본
땅에 씨를 뿌리는 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속을 위한 당신의 희생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고 말씀하셨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매를 맺게 한다. 식물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로 얻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써 열매를 맺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생명이 세상의 필요를 상징하는 밭이랑에 던져져야 하고 자애(自愛)와 이기심이 죽어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자아 희생의 법칙은 자아 보존(保存)의 법칙이다. 땅속에 묻힌 씨는 열매를 내고 그 열매는 또다시 땅에 심어진다. 그렇게 함으로 곡식이 불어나게 된다. 농부는 그 곡식을 땅에 던짐으로 그것을 보존한다. 이와같이 인생에 있어서도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보존될 생명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아낌없이 바쳐진 생명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게 될 것이다.

씨는 새 생명을 내기 위하여 죽는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의 이치를 배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하늘 에덴에서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무덤에 묻혀 썩도록 버려진 사람의 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전 15:42, 43)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적 교훈
이상의 교훈은 씨뿌리는 자와 씨에 대한 천연계의 생생한 비유를 통해 주신 많은 교훈들 중에 몇 가지이다. 부모와 교사들이 이 공과를 가르치고자 할 때에는 그 일을 실제적으로 해야 한다. 자녀들로 하여금 직접 밭을 고르고 씨를 뿌리게 하라. 자녀들이 그 일을 할 때에 부모와 교사들은 좋은 씨와 나쁜 씨가 뿌려진 마음 밭을 설명하여 줄 것이며 또한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진리의 씨를 심기 위하여도 마음이 준비되어야 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씨를 밭에 뿌릴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공과를 가르쳐 줄 수 있고 싹이 나올 때에는 부활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다. 곡식이 자라는 동안은 천연계와 영계의 파종을 대조하며 계속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교훈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밭을 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학교마다 경작할 토지가 있으면 매우 좋을 것이다. 이러한 토지는 하나님이 친히 가르치는 교실로 여겨져야 한다. 천연계의 사물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교과서로 여겨야 하고 이 교과서에서 영혼의 훈육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해야 한다.

밭을 갈며 토지를 개간하는 동안 끊임없이 배워야 할 공과들이 있다. 아무도 개간하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고는 즉시 그 수확을 거둬들이려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씨를 뿌리기 전 밭을 일구기 위해 열심 있고 부지런하고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행해지는 영적 사업도 그러하다. 땅을 경작해서 수확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면 그들은 성령의 부드럽게 하고 굴복시키는 감화로 말미암아 깨어진, 개간되지 아니한 마음의 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밭을 일구는 데 고된 수고를 하지 아니하면 밭은 수확 물을 낼 수 없다. 마음 역시 그러하다. 먼저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해서 마음을 개선하고 단련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열매를 맺지 못한다.

마음내킬 때만 토지를 손질하게 되면 수확을 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주의성 있게 돌볼 필요가 있다. 토지는 자주 깊게 갈아서 곡식의 양분을 빼앗는 잡초가 돋아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밭을 갈고 씨를 심는 자들은 수확을 위해 준비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준비한 자들은 아무도 저희의 기대에 어긋나는 흉작으로 인하여 한탄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축복은 이렇게 토지를 가꾸면서 천연계로부터 영적 교훈을 배우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다. 일꾼이 밭을 갈 때에는 그가 자기 앞에 어떤 큰 보화가 있게 될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그는 경험 있는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의 지식과 교훈을 멸시하지 말아야 하되 스스로 교훈을 얻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그가 받는 훈련의 한 부분이다. 땅을 가꾸는 일은 마음의 훈련에 이바지한다.
씨가 싹이 트도록 하시고 자랄 힘을 주시며 밤낮없이 돌보시는 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늘의 왕이시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더욱 크신 보호와 관심을 가지고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신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씨를 뿌리나 거룩한 파종자께서는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심령 속에 씨를 뿌리신다.

 

5. 가라지 

(마 13:24~30, 37~43에 의거함)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밭은 세상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비유는 천국에 관한 것과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업을 묘사하고 있는 데 이 일은 교회를 통하여 성취될 사업이다. 성령은 온 세상에 편만해 계셔서 어디서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여질 만큼 자라고 익어 가야 할 곳은 교회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서 난 자들을 대표한다. 가라지는 오류와 거짓 원칙의 열매나 그 화신(化身)이 된 자들을 대표한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은 가라지를 나게 하는 씨를 절대로 뿌리지 않는다. 가라지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인 사단이 뿌리는 것이다.
동방(팔레스틴)에서는 사람들이 원수에 대한 보복으로써 새로 갈아 놓은 상대방의 밭에다 자라는 동안은 곡식과 흡사한 유해한 잡초의 씨를 뿌리는 일이 있었다. 이 잡초는 곡식과 같이 자라나면서 곡식을 해롭게 하고 밭임자에게 어려움과 손해를 끼쳐 준다. 이와같이 사단이 그의 악한 씨를 좋은 곡식 사이에 뿌리는 것도 그리스도에 대한 원한 때문이다. 사단은 자기가 뿌린 씨가 맺은 열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돌린다. 사단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그의 품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들여보내서 그들로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구원의 사업을 그릇 나타내며 영혼들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 안에 진실한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한다. 그들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비유에 나오는 주인의 종들처럼 그들은 가라지를 뽑아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공공연한 죄를 고집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품성과 동기를 판단하는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의 성정을 너무나 잘 아시므로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우리의 생각에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교회에서 끊어 버리려 하다가는 반드시 실수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께로 이끄시고 계시는 바로 그 사람을 오히려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의 불완전한 판단에 따라 처리한다면 그들의 희망을 영원히 꺼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자기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 전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같이 보이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가라지와 곡식이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되며 추수할 때는 바로 은혜의 시기가 끝나는 때이다.

구주의 말씀 가운데는 또 하나의 다른 교훈 즉 놀라운 인내와 부드러운 사랑의 교훈이 있다. 마치 가라지의 뿌리가 곡식의 뿌리와 서로 얽히게 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거짓 형제들이 진실한 제자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거짓 신자들의 본성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끊어 버리려고 하면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었을 다른 사람들까지 넘어지게 할 수 있다.

 

이 비유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천사들을 취급하시는 일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사단은 기만자이다. 그가 하늘에서 범죄 했을 때에 하나님께 충실한 천사들까지도 그의 내심을 충분히 간파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즉시 멸망시키지 않으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장 그를 멸망시키셨더라면 범죄하지 않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오해했을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은 마치 나쁜씨와 같아서 죄와 재난의 쓴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본성이 완전히 드러나기까지 악의 장본인을 그대로 놔 두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긴 세월을 통하여 악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을 견디어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이 마귀의 악선전에 미혹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무한한 갈바리의 선물을 주셨다. 이는 귀한 곡식이 뽑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사단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처럼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 안에 교인답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의심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거짓 형제들을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초대 교회는 어떠했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이들도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며 마술사 시몬도 침례를 받았다. 바울을 버린 데마도 한 신자로 여겨졌다. 가룟 유다도 사도중에 한 사람으로 계수되었다. 구주께서는 한 영혼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예수께서 유다를 취급하신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패역한 인간에 대하여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기록됐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 참으신 것처럼 참으라고 부탁하신다.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거짓 형제들이 교회 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라지를 뽑으려고 애쓴다. 악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벌하기 위하여 교회는 세상 나라의 권력을 의존해 왔다. 교회가 정해놓은 신조들과 다른 자들을 소위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하는 자들의 교사(敎唆)로 옥에 가두고 고문과 사형을 자행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교사한 것은 사단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은 세상을 자기의 지배 아래 묶어 두려는 사단의 방법이다. 이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처리함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그릇 나타내지셨다.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부족을 느끼고 겸손하라는 것이다. 밭에 뿌려진 모든 씨가 다 좋은 곡식이 아니듯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 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잎이 청청할 때에는 가라지와 곡식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밭의 곡식이 익어 누렇게 되면 쓸모 없는 잡초들은 여물어 고개 숙인 곡식과는 전혀 다르다. 경건의 모양을 가장한 죄인들이 한동안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섞여서 외형상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지만 이 세상의 추수 때가 이르면 선한자와 악한자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이 드러날 것이다. 그 때에 교회와는 연합하였으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은 자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가라지도 곡식 사이에서 햇빛과 비가 주는 모든 좋은 것을 받으면서 자라도록 용납되었다. 그러나 추수할 때가 되면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 3:18). 그리스도께서 친히 누가 하늘 가족과 같이 살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결정하실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그들의 말과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공언은 저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품성이다.
구주께서는 모든 가라지가 다 알곡이 될 시기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곡식과 가라지는 추수 때, 곧 세상 끝날까지 같이 자란다. 세상 끝에 가서는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불에 사르고 알곡은 모아 하나님의 곳간에 들여 놓는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그 때에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출처] 2.비유로 가르치심|작성자 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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