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루살렘의 멸망
<시대적 배경>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을 보시고 우셨다"(눅19:41). 멸망 받을 운명에 처한 예루살렘의 무수한 백성들을 위해 우셨다.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다니! 그 광경은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보여주고, 전능하신 분에게 있어서도 죄인을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 결과에서 구원해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타내준다. 예루살렘 백성들의 잔인성은 악마와 같았다. 가정은 파괴되고 부모자식간에 살인이 남발되고 적대적인 파당끼리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성전 제단 앞에서도 죽임을 당하고 성소는 그 시체로 더렵혀졌다. 마24장 예루살렘 멸망의 때와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을 하시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산으로 도망할 지어다”라고 경고 하셨다. 1차적 성취는 우상숭배 하는 로마의 깃발이 예루살렘 성밖에 세워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피난하여야 했다.
<성취된 역사> 유대인들은 AD66년 로마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군대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세스티우스 지휘아래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로마군대가 중간에 포위를 풀고 갑자기 퇴각하였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도성을 떠나라는 신호임을 알았다. 그들은 베뢰아 지방의 북쪽에 위치한 벨라로 피난했다. 이후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안 지휘아래 정벌이 재개되었으나 네로황제의 죽음을 듣고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갔고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하여 AD 69년 로마황제가 된다. 이후 예루살렘 정벌은 그의 아들인 티투스(Titus)가 시작한다. 예루살렘을 재 포위하고 성은 고립된다. 밀 한 되의 값이 한달란트!『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애4:10)의 말씀이 현실이 된다. 티투스는 웅장한 성전을 보고 군사들에게 돌 하나도 다치지 말라고 명령했고 유대지도자들에게 ‘이 거룩한 곳을 부득이 피로써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도성과 성전을 구하기 위해 항복하라고 호소. 그러나 유대군사들이 한밤중에 로마군을 기습. 전투 중에 로마군은 성전의 보화와 돌 사이사이 황금이 있다는 소문에 횃불을 던졌고 그토록 아름답고 웅장했던 성전은 문자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졌다.
ꁰ 율리우스 왕조 ꁰ | |||||
아우구스투스 (BC27~AD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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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AD1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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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 (AD3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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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디우스 (AD4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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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로 (AD5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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ꁰ 플라비우스 왕조 ꁰ | |||||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안 (AD6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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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AD7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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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안 (AD8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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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될 역사> 예루살렘의 파멸은 장차 올 것과 비교하면 아주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택함 받은 도성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고 그분의 율법을 짓밟는 세상의 운명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 때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고 징조를 알려주셔서 도망할 수 있도록 하신 것처럼 세상의 마지막 멸망을 경고하시고 그날이 가까워 옴을 알려주는 징조를 주셔서 피할 수 있도록 하셨다(눅21:25, 마24:29, 막13:24~26, 계6:12~17). 그분의 재림의 전조를 보는 사람들은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마24:33)알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막13:35)고 경고하신다. 그 경고에 유의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때에 그날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주의 날이 밤의 도적같이 이르게 될 것이다.
2. 초기 그리스도교 핍박
바울이 순교당한 네로 황제의 시대부터 박해는 더욱 거세졌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무서운 죄목으로 거짓 고소를 받았고 기근, 질병, 지진들의 재난도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원망을 들었다. 5만 여명의 수용능력을 지닌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에서 짐승의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하묘지 ‘카타콤’을 피난처로 삼게 되었다. 로마법은 토지와 그 안에 있는 무덤들을 소유주의 뜻에 반하여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했다.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단 한번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평생을 이 안에서 지낸 자들도 있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당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 음산한 굴속에서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것이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히11:35).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다”(Tertulian. Apology). 사단은 박해가 오히려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임을 알고 세속적 번영과 명예라는 타협으로 교회를 타락시키기 시작한다. (AD 96년 도미티안 황제의 죽음으로 밧모섬의 요한도 자유의 몸이 되고 교회는 또 다른 위험 즉 이단과 세속에 빠져들기 시작한다.-편집자 주)
이교도들이 개종하면서 그들의 미신적 의식과 우상숭배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핍박이 있는 동안에는 순결을 유지했던 성도가 박해가 그치자 사단의 발판 노릇을 하게 되었다. 소수의 흠 없는 행실과 견고한 믿음이 타협한 교인들에게 견책이 되었다. 마치 아벨이 가인에게 미움을 받은 것처럼 미움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곧 그분의 품성의 순결과 거룩함이 그들의 이기심과 타락에 끊임없는 견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무리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 저촉되지 않는 양보이면 화평과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도 있지만 원칙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진리와 정의를 양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연합이라면 차라리 불화와 투쟁의 편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사9:6)이시다. 그러나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로 왔노라”(마10:34)고 하신 말씀은 서로 배치되는 듯 하다.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평안과 조화와 행복을 전해 주게 된다. 그러나 사단의 지배를 받는 세상은 복음이 습관과 욕망과는 반대되는 원칙을 제시하기에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주는 고상한 진리가 증오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은 검으로 불린다. 그러면 오늘날 박해의 불이 거의 꺼진 듯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세속적 표준과 타협하여 별로 반대를 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순결과 신앙이 되살아 날 때 박해의 정신은 다시 나타날 것이며 핍박의 불길은 다시 타오를 것이다.
3. 종교 암흑 시대
『[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3-4)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의 이름뿐인 개종은 교회가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의(義)”의 탈을 쓰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교가 정복당한 듯 하였으나 실상은 승리자가 되었다. 이교신앙이 예배에 혼합되고 이교의 제사장 같은 ‘법왕’이 탄생한다. “주 하나님이신 법왕” “절대 무오(無誤)의 존재”로 불리며 사람들은 법왕을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인식한다. 법왕은 자신의 절대 권위를 위해 성경을 금지시키고 “때와 법을 변개”(단7:25)하여 둘째계명을 삭제하여 성상을 숭배하고 열째계명을 둘로 나눈다. 사단은 일요일을 부활의 축일로 삼고 여러 종교적 행사들을 시행하며 오락일로 삼았다.
AD 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칙령을 내려 일요일을 로마제국 전체의 공적인 휴일로 삼았다. “존경할 만한 태양의 날에 쉴 것이다”(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이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충돌을 연합시키는 것이 황제의 정책이었다.
경건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을 하나님의 거룩한 날로 지키고 있었다. 대규모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이교의 축제일은 신성한 제도인 듯이 높임을 받게 된 반면 성경상 안식일은 유대교의 유물이라는 선고를 받고 그날을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을 자로 공포되었다. 사단은 교황을 통하여 참 하나님을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유일한 계명을 변경하였다. 넷째 계명은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 계시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다른 거짓 신들과 구별된다. 이날은 창조사업을 기념함과 동시에, 인류의 마음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존경과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계명이다.
6세기에 법왕권은 더욱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로마 감독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공포하였다. 곧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계13:2)를 주었다. 이리하여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예언한 1260년간의 법왕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단7:25, 계 13:5~7).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절개를 버리고 법왕교의 의식과 예배를 받아들이든지, 지하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과 화형 참형 등의 집행을 받든지 선택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로마교황에게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죄의 용서와 구원을 그리스도에게 의뢰하는 대신에 법왕과 신부나 주교에게 구하게 되었다. 법왕은 세상에 있는 중보자이며,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위치에 있으므로 그에게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법왕을 인류의 중보자로 우러러보고,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순례, 고행, 유물예배(遺物禮拜), 수도원과 교회건립을 위해 많은 돈의 헌납을 명령받았다.
11세기 법왕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교회는 완전하며, 황제들을 폐위시킬 권세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가 법왕권위를 무시하였다가 파문과 폐위의 선고를 받았다. 하인리히는 한 겨울에 험한 알프스 산을 넘어 카놋사의 눈 쌓인 교황숙소 밖에서 맨발로 추위에 떨면서 3일 동안 금식하며 자복한 후 법왕의 사면을 받았다. 이것이 1077년에 있은 「카놋사의 굴욕」이다.
그릇된 교리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끊임없이 나왔다.
①죽은 후에도 의식(意識) 있다.
②영원토록 고통 받는 지옥.
③연옥(영원한 형벌 받을 정도까지 이르지 않은 죄인이 형벌을 받아야 할 곳. 거기서 모든 부정한 것이 씻겨졌을 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 Catholic Belief, p.196)
④동정녀 마리아 숭배 등이 생겨났다.
또한 면죄(免罪)에 관한 두 가지 교리인데,
①십자군을 모집하면서 교회의 적을 징벌하고, 법왕의 영적 최상권을 부인하는 자들의 박멸에 참여하는 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
②돈을 내면 자신뿐만 아니라 연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별한 영혼까지도 구원할 수 있다.
성경의 주의 만찬(성찬예식)도 미사라는 우상숭배 제도로 대치되었다. 의식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가 실제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뀌어 진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된 언행으로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창조할 권능이 있음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트렌트 공회 미사교리-the Can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in 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dom vol.Ⅱ, pp.126~139).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협 아래서 하늘을 모독하는 끔찍한 이단을 믿노라고 고백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화형을 받았다.
13세기 법왕의 가장 무서운 제도 즉 종교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재판소에서 죽어갔다. “큰 성 바벨론”은 “성도들의 피에 취하였다." 법왕은 전 세계의 독재 군주가 되었다. 왕들은 법왕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법왕교의 대낮은 세상의 한밤중이었다.” 성경은 일반 사람뿐 아니라 신부들에게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법왕과 주교들의 저택은 극히 비열한 죄악의 장소가 되었다. 그리스도교국은 도덕적 지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결과는 이러했다.
4. 왈덴스인들
세상은 암흑으로 덮여있었지만 하나님의 참 증인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믿고 성경을 삶의 유일한 지침으로, 참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해 지키는 무리가 있었다. 영국에는 로마교의 부패되지 않은 복음이 있었으나 색슨족이 영국을 침략하여 이교도가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6세기 법왕교로 이교도가 개종하고 그리스도인 핍박이 시작 된다. 로마교황권이 세계를 지배할 때마다 제일먼저 일요일을 거룩히 여기고 안식일을 더럽히도록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 남부프랑스와 북부 이태리사이의 알프스 피에몽 계곡으로 모이게 된다. 이곳에 왈덴스(1140~1217.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보름스의 루터 기념물 옆에 동상)를 중심으로 유럽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성경 절들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최초 번역된 곳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왈덴스인이라 부른다. 이곳에서 진리의 횃불이 천여 년 동안 타올랐고 이곳을 중심으로 유럽각지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스위스, 헝가리, 폴란드 등에 복음이 전파된다.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자 수도원에서 일생을 보내고 고행과 잔혹한 고통 등을 통해 양심의 평안을 얻으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하나님을 마치 보복만 하시는 분으로 알고 엄격한 심판을 기다리면서 죄 짐에 눌려있는 사람들에게 (요일 1:7)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 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들었을 때, 죄인을 위해 신부와 주교의 중보가 무익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면 화형이나 참형도 달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복음이 전파되자 교황은 세계의 교인들에게 이단을 토벌하는 십자군에 참가하도록 요구했고, 가담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특권 ‘모든 종교적 형벌에서 면죄, 모든 죄 용서, 비합법적으로 얻은 재산 인정, 그리스도인의 소유 약탈허락’을 허락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제자들을 살육한 바로 그 정신. 피에 굶주린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그 정신이 가톨릭교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알프스산맥의 피에몽은 아직도 강력한 복음주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고 이들이 종교개혁의 씨를 뿌린 사람들이 되었다.
5. 존 위클리프
14세기 영국 “개혁의 샛별”이다. 그는 법률가, 왕실목사, 옥스퍼드대학 신학 교수였다. 교황이 영국에 요구하는 조공에 반대 입장이었고 왕실도 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영국은 미래가 없었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일하는 것보다 탁발승이 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가정이 황폐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승려들의 영향을 두려워하여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법왕은 승려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었고 승려들은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했으며 타락한 승려가 직업 1순위였다.
위클리프는 가톨릭교리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발간한다. 당시 교황청은 그레고리 11세 사후, 1378년 로마와 프랑스에서 각각 교황을 선출하고 서로가 적그리스도라 비방하고 권력다툼이 심화되어 유혈참극이 벌어졌다. 1409년 피사종교회의에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지만 셋 모두 적그리스도로 낙인찍히고 1417년 콘스탄틴 종교회의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다. 이러한 가톨릭의 부패를 일반인들도 느끼고 있었다.
위클리프의 가장 큰 업적은 “유일한 참 권위는 법왕을 통해 말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고 외치며 최초로 성경전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보급한 일이다. 이일로 세 번 소환 되어 심문을 받고 「금지된 교리」를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투옥하고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된다. 영국 국왕은 로마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 역사상 최초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화형 시킨다.
위클리프 죽은 지 40년 후에 콘스탄틴 회의의 결의에 의해,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대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근처에 흐르는 시냇물에 던졌다. 후대의 한 저술가는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 시내로, 아본 시내는 세버언 강으로, 세버언 강은 영국해협으로, 영국해협은 대양으로 옮겨 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있는 복음의 밑거름이 되었다.”
6.후스와 제롬
보헤미아(現-체코)의 얀 후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시절부터 영특하여 프라하 대학의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고 대학 졸업 후 ‘신부(神父)’의 직분을 얻고 승진하여 왕실전속 신부가 되었고 프라하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절친한 친구 제롬이 영국에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으로 개종한 영국왕후는 원래 보헤미아의 공주였으므로 그녀의 감화로 보헤미아에는 개혁자의 저술이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후스는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
영국에서 두 사람의 전도자가 와서 복음전파를 금지 당하자 도심 광장에서 두장의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광경,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제자들은 헌옷과 맨발로 그 뒤를 따르고 있고, 다른 한 장은 법왕이 화려한 옷과 삼층 면류관을 쓰고 나팔수들이 호위하며 뒤에는 추기경과 주교들이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무언의 설교였다. 이 그림을 계기로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서를 깊이 연구하게 되고 복음전파를 시작했고 독일까지 전파된다. 로마 교황청에서 알게 되어 후스 소환명령이 내리지만 보헤미아 왕이 보내지 않는다. 교황청은 프라하시를 파문에 처한다고 선포한다. 법왕이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영적 심판자여서 백성들은 큰 공포를 느끼게 되고 시민들은 후스를 미워하게 된다. 제롬이 대신 개혁사업을 추진한다. 이러한 종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톨릭의 흑암에서 나오도록 인도하셨다. 개혁자들은 모든 빛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암흑 속에 오래 갇혀있던 사람들이 강한 햇빛을 받게 되면 오히려 눈을 감고 돌아서게 될 것이다.
결국 후스는 콘스탄틴 종교회의(1414~1418까지 개최)에 소환되고 1415. 7.14일 악마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대 이단자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종이고깔을 쓰고 화형을 당한다. 이어 제롬도 소환되어 1년간 옥중에서 고문당하며 신앙의 취소를 강요당한다. 고문에 못 이겨 로마교를 인정하게 되나 이내 번복하고 “청년시대 이후로 내가 범한 모든 죄악 중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이곳에서 후스와 위클리프에 대한 선고를 옳다고 인정한 것이다” 말한 후 후스와 동일한 장소에서 1416. 5.30 화형 후 나일 강에 뿌려진다.
이들의 처형은 보헤미아에 큰 분노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개혁자의 신앙을 받아들인 계기가 된다. 법왕과 황제(독일제국)가 연합하여 전 유럽에서 십자군을 모집하여 보헤미아를 공격하지만 패전을 거듭하다 세 번째 공격에서 연약한 국민으로 편성된 소수의 방위군에게 초자연적 공포감에 사로잡혀 십자군은 궤멸당하고 만다.
사단은 무력으로 안 되자 타협정책을 사용하고 결국 보헤미아인 들끼리 내분과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로마교를 지지하는 왕이 선출되면서 핍박은 다시 시작된다.
개혁자들은 「연합된 형제들」이라는 특수교회를 조직하고 알프스의 왈덴스인들과 교통하며 “새벽이 오려면 백년은 지나야 한다.”는 후스와 제롬의 말을 기억하고 조심스레 복음을 전파한다. 16C초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이들의 교회가 200곳 정도 비밀리에 생겨난다.
7. 개혁의 큰별(루터)
루터는 대학도서관에서 서적을 조사하다가 「라틴어 성경」을 발견한다. 성경을 통해 죄에 대한 자각이 깊어지면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된다. 가장 엄격한 생활을 하고, 금식․철야․채찍으로 맞고, 갖은 고행을 해도 영혼의 짐은 조금도 경감되지 않았다. 루터는 이 당시의 일을 이렇게 술회한다. “이러한 수도로써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나는 분명히 그러한 자격을 얻었을 것이다. 그 일을 계속했다면 나는 고행의 결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후 신부로 임명되어 수도원에서 나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부름을 받았다.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곳의 신부, 수도사, 교황의 음란과 사치와 죄악을 보고 번민하기 시작한다. 후일에 그는 “로마(교황청)에서 감행되는 모든 죄악과 파렴치한 행동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실제 가보지 않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로마는 필시 그 위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온갖 죄악이 생겨나는 무한한 지옥이다.”
당시 교황의 한 교령이 반포된다.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자는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층계는 예수께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고 재판정에서 나오실 때 내려오신 계단인데 그것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루터는 경건한 마음으로 층계를 하나씩 오르고 있었는데(이 계단은 아직도 애용), 갑자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이 천둥처럼 들려 급히 나오게 된다. 독일로 돌아온 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되고, 마침내 가톨릭의 이론이 아니라 성경의 기별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로마 성 베드로교회 건축자금 모금을 위해 면죄부 발매가 시작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당이 죄의 대가로 건설되는 것이다. 면죄부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이며 이것을 사는 자는 그 후에 범하는 죄까지도 용서되며 돈이 궤 밑에 떨어져 소리를 내는 즉시 죽은 자도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이적행하는 능력을 사려고 할 때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행8:20)고 했다. 루터는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고 값없이 받는 선물이다.”고 외친다. 로마에서는 “이 신성한 면죄부를 반대하는 모든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에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어 축제일에 순례객들이 많이 온다. 루터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제성제(諸聖祭)」전날 면죄부 교리에 반대하는 「95개조 항의문」붙여놓는다(1517년. 루터나이 34세). 교회의 무서운 죄악을 보며 탄식했던 많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빛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분노의 표적이 되어 고문과 죽임을 당한다.
루터는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바라보게 하는 일인데 그것이 교황의 보좌를 전복시키는 일임을 알고 지상에서 가장 큰 세력을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루터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간다. 도처에서 영적 향상이 깨어나고 의에 대한 주림과 부흥이 일어난다. 오랫동안 신부들과 제사의식(미사)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루터의 저서들이 대학생들을 통해 유럽전역에 퍼진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은 상태에서 깨어나 신앙의 기쁨과 희망을 누리게 된다. 이 즈음 루터는 후스의 저서를 읽게 되고 후스의 교리를 덧붙여 복음을 전한다. “교황의 교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고 있다. 교황은 바울이 말한 불법의 사람이며 계시록이 예언한 적그리스도이다.”
루터는 “루터당”을 만들어 백성들을 혼란케 만든 죄목으로 「보름스회의(보름스에서 열린 독일의회)」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당시 독일제국은 스페인, 아메리카, 이태리, 시칠리아, 네덜란드 등이 제국에 포함됐다. 황제(카알5세)와 각 나라에서 온 영주들과 수많은 청중들 앞에 서게 된다(1521년 37세). 보름스로 들어가는 길에 “내 주는 강한 산성이시다.”고 외친다. 그 의회에서 교황청에서 온 사람들만이 루터를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루터가 숙소에 있을 때 카알5세는 “사단이 신부의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는 교황청의 손을 들어준다.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하나님께서 루터를 피신시킨다. 독일의 제후(프레드리후)가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몰래 피신시키고 이곳에서 1년간(1521년 5월~1522년 3월) 독일어 성경전서를 쓰고 각종 저술들로 복음을 전파한다.
8. 스위스에서의 개혁(츠빙글리) 순복음의 시작
루터와 동시대의 사람. 대학졸업 후 신부가 되고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된다. 원어성경 연구하다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의 유일한 구속’이 된다는 진리를 깨닫고 복음전파 시작한다. 루터의 교리와 약간 차이가 있었는데, 츠빙글리는 ‘성화의 중요성과 흠이 없는 생애’를 강조했고, 루터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이 중심주제였다.
두 가지 운동이 같은 시기에 전파되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를 받는다는 개혁의 교리를 전하기 시작할 때 가톨릭은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다. 하나는 돈을 받고 죄 용서 해준다는 운동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 한다는 운동이다.
가톨릭의 세력이 강한 도시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이 화형과 고문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개혁은 스위스 전 도시로 전파되고 몇 개의 도시가 개혁을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9. 독일에서의 발전
사단은 가톨릭의 핍박으로 안 되자 1세기처럼 거짓 그리스도들로 혼란케 한다. 종교개혁의 빛을 받은 사람들이라 주장하며 백성들을 혼란케 한다.
이 소식에 바르트부르크성에 피신해 있던 루터가 돌아온다. 복음을 전파하며 ‘미사를 폐지하고 대신 성만찬 예식 교리 확립’시킨다. 이 당시 인쇄기의 발명으로 독일전역에 성경이 보급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 수도원의 승려들이 단체로 개혁하여 각지를 돌며 루터의 저서들을 판매하는 일을 한다. 개혁이 전파되는 지역에서는 수도원이 사라지고 1525년 루터는 수녀였던 카테리나와 결혼한다.
교회와 국가가 이단(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고 투옥, 고문, 화형 등으로 핍박했지만 이들은 피로써 신앙을 인 쳤고, 박해는 진리를 전파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
10. 독일 제후들의 항의
1529년 ‘스파이얼스 회의’에서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이 죽음과 파문을 각오하고 의회에 제출한 항의서를 독일 및 전 유럽의 「신앙고백문」으로 채택한다. 이때부터 개신교인들을 “Protestant"라 부른다. 루터는 파문당한 처지라 의회에 참석할 수 없었고 제후들이 가는 길에 동행하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지어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귀족들과 수천의 사람들이 참형을 당하면서 내부분열이 생기고 가톨릭의 끊임없는 공격에 개혁세력이 약해진다.
스위스에서도 독일에서와 같이 종교개혁의 암흑시대가 왔다. 교황의 핍박으로 내란이 일어났고 츠빙글리와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순교를 당하고 로마교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11.프랑스에서의 종교 개혁
캘빈은 12세부터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된다. 어느 날 큰 광장에서 이단자를 화형 시키는 광경을 보았는데 순교자의 얼굴에 화평의 빛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을 깨닫게 된다. 1536년에 출판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그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 중 선두에 서게 했고 개혁교회의 교리는 캘빈의 신학에 기초하여 형성됐다.
그러나「공포시대 도래」한다. 가톨릭은 개혁파들이
①왕의 암살 도모
②정부 정복
③가톨릭교도 학살
등의 거짓죄목으로 핍박한다. 화형집행 때 그들의 고통을 더욱 연장하기 위해 화력을 약하게 하고 단두대는 파리의 모든 거리에 세워지고 이러한 사형집행은 날마다 수십 명씩 집행되며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낸다. 그러나 순교자를 화형 시키기 위해 쌓은 장작더미보다 더 좋은 설교단은 없었다.
교황청은 개혁사업을 진멸키 위해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수이트(Jesuit)」(예수회)이다. 가장 잔인하고 무법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는 규칙에 의해 암살, 방화, 폭력으로 무장되었다. 평상시에는 거룩한 옷을 입고 감옥과 병원을 방문하며 봉사하다가도 정탐꾼 노릇을 하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가장하여 여러 나라의 공직자, 교사, 남의 종도 된다.
12. 유럽에서의 개혁
루터 교와 개혁교회 외에 재 침례교라는 제 3의 분파가 생긴다. 이들은
①세례가 아닌 침례가 성서적으로 옳다 주장
②유아세례 비성서적
③침례의 조건은 회개와 믿음
을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양방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당한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무서운 박해를 받는다.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시편을 노래 한 것도 사형에 처해지는 죄목이 되었다. 어린처녀들을 산채로 매장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비텐베르크대학 루터의 제자 타우젠과 페트리에 의해 개혁사업이 시작된다. 스웨덴왕은 개혁자들을 지지한다. 페트리에 의해 성경이 스웨덴어로 번역되고 스웨덴은 개신교의 보루(도피성)가 된다. 작은 나라임에도 30년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독일제국을 구원한 유일한 나라이다. 스웨덴의 군대덕분에 독일은 교황청의 횡포를 물리치고 종교자유를 인정하고 개혁주의를 받아들인 여러 나라에도 종교자유를 회복시킨다.
13. 후기 영국의 개혁자들
⑴ 윌리엄 틴데일: 위클리프의 사업완성. 영어 성경의 인쇄 보급. 영혼 불멸 반대 등의 이유로 박해. 해외에서 도피하다가 벨기에에서 체포되어 교수형.
⑵ 래티머: 틴데일의 친구. 42개조 교리 편찬. 지금도 영국성공회의 기본교리로 사용. 여왕 메리 1세 통치기간에 화형.
드디어 영국에서 개신교를 국교로 결정한다. 그러나 교황의 권위는 무시되었으나 임금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 각 사람이 신앙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을 수백 년 동안 박해했다.
⑶ 존 번연(1628~1688): 영국의 감옥은 개혁자들로 꽉 찼다. 그 감옥에 침례교 목사인 존 번연도 있었다. 신앙 때문에 12년간 투옥 당했고 옥중에서 「천로역정」씀.
⑷ 윗필드와 웨슬리형제: 국교회의 통제아래 이교와 거의 분간 할 수 없는 종교적 쇠퇴 상태에 처함. 루터가 그렇게도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사라지고 개신교안에 로마교 교리가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존 웨슬리와 찰스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업을 위해 미국으로 파송되어. 모라비아 교인들과 배를 타게 됨. 심한 폭풍을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존 웨슬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화평을 확신하지 못했는데 대조적으로 그 독일인들은 신뢰와 평안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 사반나에 도착 후 웨슬리는 그들과 얼마동안 함께 지냈는데 그들의 삶의 모습과 예배에 깊은 감동.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영국교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그들의 예배에 대해 “사도 바울과 베드로 가 직접 지도하는 성령이 충만한 예배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고 고백.
영국으로 돌아온 후 런던에서 모라비아 교인들의 집회에 참석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변화를 일으킨다.”는 루터의 글이 낭독되었다. 그 말을 듣자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신앙의 불이 타올랐다.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했다고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내 자신까지도 제거해 버리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여 주신 데 대한 확증을 얻었다.”
엄격한 극기와 자책과 겸비의 긴 세월을 통해 웨슬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한 가지 목적에 굳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 사업과 자기희생으로 얻으려고 애쓴 은혜가 실상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그는 엄격한 극기의 생애를 계속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신앙의 근거가 아니고 결과였으며 성결의 기초가 아니고 열매였다. 웨슬리는 3가지 진리를 전하기 시작한다.
①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②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
③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생애에 이루어지는 열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메소디스트(Methodists-규칙준수자)’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칭호가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세력 있는 교파가 되었는데, 바로 ‘감리교(C Connection)'의 시작이다.
형식주의로 마비되었던 교회들이 생기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국교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심한 박해를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Methodists의 집을 파괴하고 약탈하려는 자는 어느 곳으로 모이라는 광고를 공공연하게 써 붙여도 국가에서 내버려 두었다.
당시 개신교인들은 웨슬리의 교리가 너무 엄격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좁게 만든다고 반대했다. 이 시대 영국의 영적쇠퇴는 율법 무용론의 교리가 빚어낸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계명을 폐지하셨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택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예정해 놓으셔서 택한 사람은 저항 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게 된다(겉보기엔 ‘하나님의 절대주권’ 같지만 결국엔 ‘운명론’이다-편집자 주)고 주장했다. 사람의 성격을 변경할 수 없도록 고정시켰다는 하나님의 선고에 대한 교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웨슬리는 이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며’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선물을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외쳤다. 사도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한다고 했다. 사람이 죄를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 병든 상태임을 먼저 깨닫게 해야 한다. 율법은 끊임없이 복음의 길로 가도록 인도한다. 그래서 죄를 깨닫고 절망뿐인 나에게 곧 ‘복음’ 기쁜 소식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한다. 이것이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어느 부분을 삭제해 버리는 것은 입맞춤으로 그분을 배신하는 것과 같다.
웨슬리는 율법주의자 Methodists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50여 년 동안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이 되었다.
14. 프랑스 혁명과 공포 시대
여러 세기동안 프랑스에서 계속하여 온 성경에 대한 투쟁은 프랑스 혁명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15~18세기 까지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약 300여 년간 프랑스는 공포시대였다. 개신교도들은 법률상보호에서 제외되고 현상금이 붙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처형당하거나 노예선에서 죽는 날까지 고역을 했다. 들판에 널려있는 시체를 보는 일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스런 만행은 1572년 성 바돌로메 제일(祭日)의 대학살이다. 한밤중에 개신교인들의 집에 침입하여 몰살시켰다. 학살은 전국에서 2개월간 계속되었다. 어린아이와 노인 가리지 않고 개신교인 7만 명이 죽었다. 로마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카알 황제에게 황금장미를 보내고 학살자들에게 상급을 주고 축포를 쏘며 이단박멸을 기념했다. 황제는 1685년 낭트칙령(종교자유허락)을 철회하고 개신교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300여 년 동안 개신교인들은 주변나라로 추방되었다. 지각 있고 우수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쫓겨났다. 국가의 쇠퇴는 극도에 달하여, 추방될만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서운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이러한 시기를 거치며 프랑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20만 명 이상의 거지들이 있는 반면 제수이트 당원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백성들은 귀족들과 신분차이로 노예와 같은 비참한 생활을 했다. 왕실도 타락하여 혁명 일어나기전 루이 15세가 50여 년 동안 통치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대로 버티자. 재앙은 나의 후세에”라며 개혁의 필요성을 무시했다. 로마교는 나라가 약화되면 백성과 통치자들이 자기의 지배아래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왕과 지배계급의 질투심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노예상태로 묶어두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마교는 자기의 교리를 맹종하는 대중을 만들기는커녕 그들을 이교도와 혁명가로 만들었다. 마침내 1789년 ‘프랑스혁명’이 시작된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인본주의의 탄생. 1700년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18세기 말에 있은 프랑스혁명의 기초를 제공했다. 그중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혁명의 바이블’로 불려지며 혁명세대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루소는 이 책에서 백성들이 직접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급진적인 민주정부형태를 이상으로 주장한다.
혁명초기 왕의 양보로 백성 대표자는 귀족과 성직자 수보다 많았다. 백성의 힘이 우세하자 그들은 사회개조를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자신들을 비참한 상태에 빠트린 지배계급에 보복하기 시작한다. 왕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이어 귀족들과 로마신부들이 매일 처형당한다. 프랑스는 반란과 무정부 상태가 된다. 혁명주의자들이 여러 당을 만들어 서로 죽이게 되고 시민들은 굶어 죽어가며 나라는 거의 파멸상태에 빠진다. 노예선과 감옥이 차고 넘치고 사람을 가득히 태운 배의 구멍을 뚫어 몰살시키기도 한다. 자코뱅당원들은 젖먹이들을 어머니의 가슴에서 떼어내어 이 창에서 저 창으로 던지며 꽂기까지 했다. 10여년의 기간동안 실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1793년 프랑스 의회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신론을 선언하기에 이르고, 일주일제도는 폐지되고 10일마다 휴식을 선언한다. 이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은 로마교의 하나님인데 로마교의 탐욕과 잔인성은 바로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기에 성경을 전연 무용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후 다시 입법의 최고기관인 의회에서 ‘자유와 이성의 여신 숭배’를 결의한다. 여신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 경배를 받는다.
1793년 그리스도교를 폐하고 성경을 금지한다는 법령은 3년 반이 지난 후 그 결의를 무효로 하고 성경 용납을 재결의 한다. 18세기 말엽 사람들은 합리주의 결과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하나님의 계시와 체험 종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는 성경을 거절한 결과로 생긴 가증한 범죄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일임을 인정하였다. 프랑스가 하나님의 두증인(구약, 신약)에 대해 도전했지만 그 두 증인은 오히려 전에 없이 높임을 받았다. 1804년 영국성서 공회가 조직되었고 50개 국어로 인쇄되어 배부되었다. 또한 1816년 미국 성서공회가 창설되었고 유럽 대륙에 이러한 지부들이 형성되었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시 111:7-8) 『[7]…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8]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15. 청교도와 신대륙
영국교회는 국가의 권력에 의해 유지되면서 가톨릭의 교리는 버렸을지라도 그 교리의 여러 형식은 행했다. 우상숭배와 미신적 의식들이 행해지고 교회가 국가에 흡수되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법률로 강제되었다. 허가 없이 종교집회를 여는 일은 금지되었고 이것을 범하게 되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피난하게 된다. 국교의 핍박을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찾아 1620년 11월 23일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한다. 양심대로 살 수 있다는 소식이 유럽에 알려지자 무수한 사람들이 신앙을 위해 북미대륙으로 모여든다. 먼저 이주한 사람들은 핍박을 피해 온 그리스도인들을 환영하고 헌금으로 돕는다.
이들을 Pilgrims(순례자‘신앙의 자유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자들’)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1776년 독립선언서와 헌법 제 1조에 “신앙의 자유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천명하게 된다. 미약하고 외로웠던 식민지는 강대한 합중국으로 자라게 된다. 그러나 처음의 Pilgrims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찾아오는 수가 증가 되었고 세속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교회에 입교하면서 교회의 타락과 부패가 급속하게 된다. 또한 미국의 개신교인들 역시 유럽의 개신교인들처럼 종교개혁의 풍성한 축복을 받는데서 그치고 그 길을 따라 전진하는 일에 실패한다. 암흑 속에 있다가 빛을 보았기 때문에 완전한 빛이 한꺼번에 다 주어지지 않았고 개신교가 여전히 로마교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종교개혁이상의 발전은 없고 현재에 만족하며 다시 형식주의로 빠지게 된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계속 따랐다면 미신과 오류를 버리고 더 밝은 진리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사단은 핍박으로 진리를 깨뜨리려 했던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로마교를 큰 배도로 이끌었던 타협으로 교회를 부패시키고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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