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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3장.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아들 2018. 6. 5. 21:27

하나님의 사역은 내적 사역들과 외적 사역들로 나뉘는데, 내적 사역은 일반적으로 작정이라는 명칭으로 지칭되고, 모두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 포함된다. 이 작정은 신적 존재의 내재적 사역들과 창조와 재창조의 외적 사역들 사이의 연관을 수립한다. 그와 같은 작정은 세 가지 특징들을 지닌다. 첫째, 하나님의 작정 안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존재 밖에서 실현되도록 정해진 그 모든 생각들은 하나님 안에 영원히 현존하는 충만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 것은 말하자면 단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에 대한 하나의 대요(大要), 요약일 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가능하나, 그것들 모두가 현실 가운데 발생한 것은 아니다. … 둘째,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기초한다. … 만물이 존재하고 창조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 셋째, 작정의 개념 가운데 포함된 것은 때가 되면 실현될 것이다. … 작정으로 인하여 세상의 창조와 보존은 필연적이다.

 

로마서 9장 21절을 배타적으로 타락전 선택설의 타락하지 않은 집단으로만 생각하거나, 또는 배타적으로 이우구스티누스와 타락후 선택설의 타락한 집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바울은 여기서 이러한 구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자기 피조물들에게 목적지를 부여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바울은 선택에 대한 모든 반대들을 논박하지만, 선택이 의롭고 정당하다는 사실로써 논박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적 권리에 호소함으로써 논박한다. … 참된 선택은 거룩, 자녀 됨, 구원, 영생, 그리스도를 본받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초대 기독교회는 … 절대적 예정론과 불가항력적 은혜는 가르쳐지지 않았다. … 펠라기우스는 원죄,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 등과 같은 교리적 요소들을 경시했다. … 펠라기우스의 출발의 전제는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우며,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도 역시 그 본성상 반드시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선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었으나, 원하고 실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 비록 인간이 악을 행할지라도, 그는 선을 행할 가능성과 능력인 의지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펠라기우스 논쟁 오래전에 예정론을 가르쳤다. … “예정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장차 행할 것을 예지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예정은 공로나 가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에 따른 것이며, 믿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도록 선택되었다.” … 예정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유기를 자주 예정으로 여긴다. … 예정이 하나님의 행위인 것처럼, 유기는 공의의 행위다.

 

오렌지 공의회(Orange, 529)는 한편으로 전인(全人)은 아담이 죄로 인하여 부패되어 그 스스로 오직 거짓과 죄밖에 없으며, 믿음의 시작과 성장 모두는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 우리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굽혀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돌이키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 주입, 작용, 영감,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자유의지가 죄로 인해 쇠약해지고 빈약해졌으며, 모든 세례 교인들은 만일 신실하게 노력한다면, 세례 가운데 받은 은혜, 그리스도의 도움과 협력으로 구원에 필요한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성취해야만 한다고 언급되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절대적 예정, 블가항력적 은혜, 은혜의 특이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 트렌트 공의회(Trente)는 명백하게 가르치기를, 그리스도가 보냄을 받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양자 됨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구속했으며, 사람은 은혜를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으며, 보존하거나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종교개혁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돌아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고백에서 로마교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 할 힘을 발견했다. … 루터파가 루터와 종교개혁 전체의 본래 입장을 점점 더 포기했던 반면, 개혁파는 그 입장을 충실하게 고수했다. 따라서 분리의 원인을 개혁파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 … 예정론은 칼빈에 의해 모든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에 수용되었다.

 

칼빈은 타락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이 있다는 피기우스의 결론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유기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심오한 원인은 선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있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와 타락후 선택설의 견해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이것은 타락전 선택설을 취했던 후기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거의 언제나 그러했다. 그들은 타락전 선택설이 허용된다고 생각했지만, 타락후 선택설을 정죄하거나, 자신들의 견해를 유일하고 참된 견해로서 고백서에 표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타락후 선택설을 대신하는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타락후 선택설과 더불어 자신들의 견해의 정당성을 변호했다. … 타락전 선택설은 고백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또한 정죄되지도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이 문제를 심지어 의도적으로 결정하지 않았고, 타락후 선택설과 타락전 선택설의 어느 편도 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중에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타락전 선택설을 선호했으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타락후 선택설의 정당성에 대한 인정과 결부되어 생각되었다. 결국 타락후 선택설은 공식적으로 고백서에 포함되었고,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열심히 옹호되고 강력하게 변호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설교에서도 전면에 부각되게 되었다.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 예정 개념을 좁게 보느냐 아니면 넓게 보느냐에 따른 정의다. … 타락후 선택설 입장의 특징은 창조와 타락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에 선행한다. 다른 한편으로, 타락전 선택설은 예정을 매우 확대시켜, 창조와 타락을 궁극적 목적,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에 이르는 방편들로서 예정 가운데 포함시킨다. 예정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은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에서 지속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되었다. 네덜란드 신앙고백 표준문서들은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지만, 그 어떤 교회 회의도, 도르트레흐트 총회도 타락전 선택설 지지자를 정죄한 일이 없다. … 개혁파 신학자들은 항상 이 두 견해의 권리를 인정했다. … 이 두 견해는 자유의지를 부인하며, 신앙이 선택의 원인이며 죄가 유기의 원인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이 두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뻐하는 뜻에 기초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작정의 순서에 관한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 지지자들은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순서를 취한 반면, 타락전 선택설 지지자들은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인 순서를 선호한 것이다. 전자는 예정 개념을 좁은 의미로 이해하고 창조, 타락, 섭리를 예정에 선행시킨 반면, 후자는 예정 아래 다른 모든 작정들을 포함시킨다. … 이 문제는 성경에 호소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후 선택설은 선택과 유기가 타락한 세상과 연관된 모든 구절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자비와 공의의 행위로 제시되는 반면, 타락전 선택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하는 모든 구절들, 특히 죄와 관련된 구절들 가운데서 자신의 강점을 찾기 때문이다. …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은 최종 목적에 선행하는 모든 것을 수단들로 삼아 상호 종속적 관계 가운데 놓음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수단들은 당연히 최종 목적에 종속되나,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 타락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모든 작정들이 합해져서 통일성을 이루고, 모든 것이 종속되고 사용되는 최종 목적이 있으며,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했다거나 예기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했고, 결정했으며, 창조는 이미 곧바로 재창조를 의도했고,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가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작정들이 비록 단일할지라도 그 대상들에 대해 구분되고, 그 작정들 가운데 단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인 순서도 드러나며, 창조와 타락은 단지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들로서만 여겨질 수 없으며, 죄는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창조의 파괴였으며, 하나님은 단지 그 자체만을 원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예정을, 선행적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결과적 은혜로 인해 인내할 하나님의 예지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지만, 믿지 않거나 인내하지 않을 다른 이들은 징벌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할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된다. 성경이 어디서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모든 존재와 발생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의 실현이며, 그 모델과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 하나님의 작정은 내적인 사역, 즉 신적 존재 안에 있는 내재적, 영원한 그리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사역이다. …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제일 먼저 작정이 구별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에 일반적으로 ‘섭리’라는 명칭으로 지시되었다. ‘섭리’라는 용어는 원래 다름 아닌 미리 내다봄, 미리 준비함, 미리 숙고함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섭리는 “종말을 위한 사물들의 배열의 방식”, 즉 자신의 확정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영원부터 만물을 정돈했던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의 행위로 정의되었다.

 

성경은 신앙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이 단지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의 대상이기도 함을 명백하고 선명하게 가르친다. … 예지는 계획이나 목적, 예정, 선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의 행위다. … 신앙은 자연인에게서 나올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따라서 선택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전제하고, 그 열매와 결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 구원은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 모두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모든 종교적, 기독교적 경험이 만장일치로 증거한다. … 하나님의 예지의 성격은 그 대상을 미리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아는 것이며, 그래서 그 예지는 예정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대상이 전적으로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라면, 예지도 역시 견지될 수 없다.

 

예정 교리는 결코 개혁파만의 신앙고백이 아니며,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사적인 견해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전체의 교리다. 예정 교리가 일컬어지는 명칭에 있어서, 그리고 제시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일치한다. 즉, 모든 기독교회와 학자들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영원부터 아는 것처럼 모든 것이 존재하고 발생하는 결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로운 이단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주의를 기울여 변호되는 이 예정에 대한 신앙을 갖지 않은 적이 없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타락한 모든 인간에게 구원에 충분한 은혜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선행적이고 조건적인 의지 또는 작정”을 수용한다. … 펠라기우스주의는 유효한 은혜로의 예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 한다. … 펠라기우스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는 그 자체로 충분하며, 이제 사람의 의지가 그 은혜가 유효할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에 있어서는 사실상 은혜의 보편적 제공에 대한 작정 이후 더 이상 그 어떤 작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 죄로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복음을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을 능력을 소유할 수 있으며, 첫 번째 은혜를 선용하거나 선용하지 않을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가? 어디서 그가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는가? … 성경은 가능한 한 선명하게 가르치기를, 인간은 전적으로 원하지도 않고 원할 수도 없으며, 신앙은 과분한 은혜의 선물이며, 구원은 또한 주관적으로도 하나님의 사역이다. … 펠라기우스주의는 영광으로의 예정에 있어서 자기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려고 노력한다. 비록 어떤 사람이 진리를 믿어 죄 용서함을 받고 생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 믿음을 보존하여 구원을 얻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출처 : (안산) 회복의 교회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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