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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정론에 대한 깊고도 넓은 묵상 / 정성욱 목사

하나님아들 2018. 6. 5. 21:23

 

예정론에 대한 깊고도 넓은 묵상| 신학마당(복음주의 신학과 영성)
다윗 | 조회 99 |추천 0 | 2012.02.10. 22:22

 

 

 

(1).예정론은 성경적 교리인가?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1장 3-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거룩하고 흠없는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문제는 에베소서 1장 3-6절의 컨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장 3절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예정과 선택의 교리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송영의 맥락에서 신앙적 고백을 통해

증거되는 교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송영의 맥락이란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자가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맥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적 맥락이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된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맥락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은혜는 찬양되어지고 고백되어져야 할 진리이지,

그 내용에 대해서 사변적으로 접근해야할 교리는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사변적인 접근이란

누가 선택되었는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알고 싶어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이 택자인지, 또 어떤 사람이 불택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믿는 자들 개개인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차원에서만

개인적으로 내가 선택받은 백성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확인조차도 백 퍼센트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을 속이는 일에 능하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분명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에 일부를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것

둘째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누가 택함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세째로 그러므로 예정과 선택의 교리는 찬양과 신앙고백의 맥락에서만 선포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정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중요한 것은 예정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하는 것은 구원과 관련된

본질적인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정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점을 놓치게 되면 극단적인 입장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알미니안주의나 웨슬레적 감리교가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일반적으로

장로교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할 자를 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예정론을 받아들입니다.

장로교인들 사이에서도 좀 더 엄격한 이중예정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좀 더 온건한 단일 선택론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지요.

감리교는 존 웨슬리의 입장을 정통으로 받아들이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누구를 주권적으로 선택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을 사람이 누구인가를 미리 아시고 즉

예지하시고 그 예지에 근거해서 그 사람을 택했다는 예지예정론입니다.

장로교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믿도록 예정한 사람이 믿게 된다는 것이고,

감리교의 입장은 믿을 것이라고 예지된 사람을 예정한다는 것이죠.

즉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이 더 강조되고,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가 더 강조됩니다.

성결교의 신학적 원천은 웨슬리의 신학이기 때문에 감리교와 거의 같습니다.

오순절교단도 신학적으로는 웨슬이에 가깝지만 우리나라

순복음 교회 목회자들 중에는 장로교식으로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침례교에도 장로교적인 칼빈주의자와 감리교적인 웨슬리주의자가 섞여 있지만

일반적으로 침례교 신학은 예정론에 있어서는 장로교와 비슷한 입장에 있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단이나 교파가 다양해도 모든 교파와 교단을 묶어주는

복음적 신앙고백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성경의 신적 권위

2.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3. 성령의 주되심

4. 중생과 거듭남의 필요성

5. 교회공동체의 중요성

6. 복음전도와 선교의 긴급성

이 여섯 가지 정도에 합의할 수 있다면 서로가 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교제할 수 있는 것이지요.

 

(2)예정론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일으켜온 교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정론에도 몇 가지 모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

종교개혁자 칼빈이 확립하고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정립한 소위 '이중 예정론'이 있지요.

칼빈과 일부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아담과 하와를 타락할 것을

작정하시기 전에 이미 인류의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일부를 버리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의미의 이중 예정론은 후대에 와서 '수프라랍사리안' (supralapsarian)의 입장

즉 전택설로 확립이 됩니다.

전택설자에는 루터와 칼빈, 베자, 오웬, 카이퍼, 바빙크등 개혁파의 유명한 신학자들이 포함됩니다.

전택설적 예정론이 주류였던 16세기 후반 화란의 야콥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 전택설적 예정론에

반기를 들면서 5개조의 항론을 제기합니다.

그 항론의 핵심은 전택설적 예정론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구원얻을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선택하실 것을 미리 알고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적 선택을 강조한 반면

칼빈주의 전택설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강조하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칼빈주의권에서 알미니안 주의의 일부 입장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것을 허용하시기로 했다는 허용적 작정론을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동적 선택과 수동적 버려둠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를 강조하는

후택설자 즉 인프라랍사리안 (infralapsarian)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후택설자에 찰스 하지와 루이스 벌콥 등이 포함되지요.

그리고 고대의 어거스틴 역시도 후택설자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택설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근거도 좀 부족하구요. 저는 후택설의 입장을 취합니다.

전택설, 후택설, 알미니안주의 외에도 아미랄디즘과 바르트의 선택론 등 다양한 모델이 있습니다.

 

(3)후택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에 대하여 작정하실 때

 

1.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2. 창조된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허용하시기로 작정하시고

3. 이미 타락하여 영적 무능력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일부를 선택하여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4.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5. 성령을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택자들에게 적용하기고 작정하셨습니다.

여기서 결국 선택의 작정인 3번이 타락의 작정인 2번 후에 온다고 해서 후택설이라는 것이죠.

후택설의 장점은  인간의 죄와 타락에 대해서는 예지에 근거한 허용적 작정을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는 예정에 근거한 효과적 결정을 돌린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가 바르게 세워지는데 그 강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속에 이미 타락되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중 일부를 은혜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에 처하도록 내어 버려 두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가 함께

세워진다는 것이죠.

반면 전택설은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류의 일부를 선택구원하시고 일부를 유기하시겠다는 작정

2. 그들을 창조하고 그들이 타락할 것을 작정

3. 예수 보내기로 작정

4. 성령 보내기로 작정 의 순서를 따릅니다.

그래서 창조되지도 않았고, 아직 죄에 빠지지도 않은 일부의 사람들을 영원한 절대적 예정에 의해서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이 과연 의로우신 분이냐라는 반론을 초래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후택설이 더 성경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봅니다.

후택설자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 대한 계획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일에 대한 계획입니다.

선한 일과 모든 사건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작정을 말하고

악한 일에 대해서는 허용적인 작정을 말하지요.

악한 일에 대해서 효과적인 작정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럴 경우 하나님이 악의 조성자가 되신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의미 해진다는 반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효과적으로 결정하고 작정했다기 보다는

(물론 이 입장은 전택설자들의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함으로 타락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막지 않으시고 허용하시겠다고 작정하심 즉 허용적 작정을 말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전택설자는 예정 유일론을 주창하는데 반하여

후택설자는 예지와 예정이 함께 역사한다고 보는 것이죠.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서 존중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지요.

전택설자는 예지와 예정을 동일시 하지만

후택설자는 예지와 예정을 구분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후택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이 바뀐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전에 이미 타락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그것을 허용하시겠다고 계획하신 것이니까요.

전택설이든 후택설이든 두 입장 모두 하나님의 계획의 불변성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4)후택설에 있어서 중보자 그리스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후택설을 취하는 학자들 중에도 제한 속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밀러드 에릭슨은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잡습니다.

1. 인류를 창조하시겠다는 작정

2. 타락을 허용하시겠다는 작정

3. 모든 죄인을 위해 예수님 보내시기로 작정

4. 죄인들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만 예수님 믿도록 작정

5. 이들에게만 성령임재하시도록 작정

그러니까 속죄의 범위 즉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에릭슨은 모든 죄인을 위해 죽었다고 말함으로써 제한 속죄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보편적 속죄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그 신앙에 근거한 중생은

제한적이다 즉 선택된 사람만 믿을 수 있고, 중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과거 도르트대회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 자체가 제한된 범위의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으로 규정했지만 에릭슨은 예수님은 일단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그 속죄를 받아들이고 믿어 중생하는 사람들이 제한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에릭슨의 입장에 좀 더 동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택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너무 엄격하고 야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지요.

에릭슨의 입장이 가진 장점은 우리가 전도할 때 아직 믿지 않는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정말로

죽으셨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선한 양심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일 제한 속죄를 받아들인다면 전도할 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 정말 죽으셨는지 우리는 모르게

되는 것이죠.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죠.

 

(5)후택설과 제한속죄이론의 상관성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1618-19년 화란?도르트 대회에서는 알미니안파의 5개조의 항론을 정죄하고

소위 칼빈주의 5대교리를 정통으로 확정합니다.

그 중 하나가 제한 속죄교리죠.

즉 예수님께서 오직 영원 안에서 선택된 사람만을 위해 속죄의 죽으심을 죽으셨다는 교리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칼빈주의 5대교리를 구성할 당시 도르트에 모인 대다수의 칼빈주의자들이

수프라랍사리안 즉 전택설자였다는 것입니다.

전택설이라는 엄격한 예정론을 믿었던 칼빈주의자들이 제한 속죄이론을 밀고 나간 것은

뭐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개혁파 신학자들 간에 후택설자들이 대다수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후택설자들 중에는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제한속죄교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파와 칼빈주의 5대 교리중 네개는 받아들이되

제한 속죄는 거부하는 파로 말입니다.

소위 'four point' or 'four point five (4.5)'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나타났지요.

오늘날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중 후택설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제한 속죄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밀러드 에릭슨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모든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기 위함이라고 확언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결국 선택된 자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고 주장하지요.

이 입장은 '보편적 속죄'와 '제한적 중생 혹은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즉 '제한'을 속죄의 범위에 두지 말고 중생과 신앙의 범위에 두는 것이죠.

엄격한 칼빈주의자의 입장에서 에릭슨의 입장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고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릭슨의 신학적 고민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에 있어서는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여집니다.

 

PS: 위의 모든 내용은 정성욱목사님께서 신학마당에 올리셨던 예정론에 대한 답글입니다.

      흩어져 있는 글들을 원문 그대로 모아서 다시 보니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다윗 12.02.10. 22:30
다윗(민병진)
예정론에 대하여 목사님의 글을 모아서 묵상하던중 깊고도 넓은 깨닭음이 있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학의 성숙함을 위하여~ 반복하여 배우며 묵상합니다^^
 
 
정성욱 12.02.11. 02:05
예,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한 참 읽다 보니까 이거 내가 쓴 글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아서 다시 한 번 읽으니 부족하지만 괜찮네요...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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