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 바른 교회의 성장요인 )
과 목 명:
교 회 와 종 말
학 과:
신 학 과 3 년
학 번:
9 6 3 2 0 9 7
이 름:
박 재 홍
제 출 일:
1998년 6월 10일
담당교수:
김 명 용
장 로 회 신 학 대 학 원
- 차 례 -
Ⅰ. 들어가는 말 3
Ⅱ. 교회의 정의와 본질 3
1. 교회의 정의 3
2. 교회의 본질 4
1)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5
2)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5
3)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6
4) 교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7
5) 증거 공동체로서의 교회 7
Ⅲ. 교회성장 8
1. 교회성장의 정의 8
2. 교회성장의 원리 9
1) 성장의 성경적 원리 9
2)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 9
(1) 성경의 권위 인정 9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10
(3) 기도의 영력 10
Ⅳ. 나가는 말 10
1. 선교지향적 교회 10
2. 말씀중심 교회 11
3. 가정치유 교회 11
4. 평신도사역 교회 11
5. 복음전파 교회 11
6.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 11
바른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바른 교회의 성장요인)
Ⅰ. 들어가는 말
얼마 전 갤럽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내의 기독교인의 수가 전체인구 비례 20.2%를 차지하여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중앙일보, 1998. 6. 2일자
여기에 따라 수많은 교회들이 이들과 함께 존립하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교회들 중 과연 바른 교회로서 올바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될 지 의심스럽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한국교회의 성장속도는 매우 둔화되었고, 많은 이들이 카톨릭이나 불교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이러한 모습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IMF로 인해서 교회의 성도들이 다시금 서서히 늘어가고 있는 사정에 접하고 있는 교회는 올바른 교회관을 확립하고 다시는 이들을 놓치는 불행한 모습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바른 교회가 어떠한 교회이고, 올바른 교회성장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교회성장의 역기능적인 신앙구조의 문제-수직적 신앙(vertical faith)만을 강조한 것과, 구조적인 문제로 개교회주의가 강화되는 경향과 성장제일주의 가치관을 심어주고 물량주의 가치관을 조장한 점, 기능 혹은 역할의 문제로 전도만을 절대적인 기능으로 보고 모든 일들을 추진해와 사회봉사의 기능은 철저하게 외면 당한 사실 등은 뼈아픈 교훈으로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모습들이다.
전통적으로 개신 교회는 교회의 네 가지 속성을 믿는다. 그것은 교회의 연합을 의미하는 하나됨(Oneness)과 거룩성(Holiness)이요 보편성(Catholicity)과 사도성(Apostolicity)이다. 신학자들은 이 네 가지 속성이 교회의 참된 표식이요 교회는 언제든지 이 속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김성태, ‘성장의 유형별 분석과 선교적 성장모델’ 목회와 신학, (서울:두란노서원, 1993년 7월), p. 78.
이러한 부분이 항상 존재하고, 의식되어 지는 교회의 모습 속에서 올바른 교회관이 확립되며, 주님께서 명령하신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을 지켜 순종할 때 바른 교회성장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Ⅱ. 교회의 정의와 본질
1. 교회의 정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교회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곧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했다. 이 루터의 정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교회론의 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의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1997), p. 13.
요즈음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거론되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세속화되어진 모습, 그리고 역사와 더불어 구조적으로 갱신된 전통적 교회를 원초적 교회의 형태로 복귀시키려는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갱신을 논하기에 앞서 성서적인 교회관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서 형성되어진 기독 공동체에 대한 명칭으로 신약시대부터 사용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고려할 때, 신약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약의 용어를 살펴봄이 바람직하다. 교회라는 낱말에 해당되는 구약성서의 용어에는 “카할(kahal)"과 ”에다(edah)"가 있다. 전자의 어근은 ‘부른다’ 라는 어근을 가지고 있고, 후자는 ‘지명하다’, ‘택한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종성, 교회론,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9), p. 19.
하지만 이 용어가 처음부터 공동체를 부르기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구약시대 전반에 걸쳐 유대인들을 독특하게 종교적 공동체로 부르기 위해 어떤 특별한 용어를 사용할 것은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이란 명칭 자체는 종교적 명칭으로서 주로 언약한 백성을 의미했으며, 결코 국민 또는 민족적 그룹을 의미하지 않았다. 부루스 라이츠만, 교회의 의미와 사명, 김득중 역 (서울:컨콜디아사,1981), p. 13.
생활 경험이후 국가가 파멸되고 또 많은 유대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게 되면서부터 히브리용어인 “카할”이 종교적인 의미를 얻게 되었고, 특별히 예배를 드리거나 율법을 듣기 위해 모인 유대인의 성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Ibid., p. 13.
즉 “카할”은 단순히 유대인이나 유대사회와는 구별되게 계약에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을 나타내는 말로 정착된다. 이러한 “카할”의 언어적 특성은 자연히 ‘남은 자 사상’에로 우리의 관심을 이끈다. 왜냐하면 ‘남은 자’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배반과 타락에 물들지 않은 경건한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남은 자’에 대한 구약성서의 언급은 주로 예언자의 글에 언급되어 있으며(사1:9, 7:9, 6:7, 14:32, 습3:12-15, 학1:12-14, 슥8:6, 스9:8, 14-15, 느1:2-3), 중간기 유대교 묵시문학에까지 계속되었다. 이종성, 교회론,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9), p. 32-33.
‘남은 자’에 대한 사상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서 피할 길을 얻은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사명을 가진 공동체로서 보호되어 남겨져 하나님이 그들을 중심으로 의로운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여러 가지의 역경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남은 자’로 생각하게 되었고, 교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Ibid., 305.
이런 의미에서 “카할”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담아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Ekklesia)”란 말로 번역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공동체는 결국 의식적으로 그들 자신을 히브리적 유산과 관련시키면서도 유대적 예배 공동체들과 구분하여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부루스 라이츠먼, p. 14.
유대적 예배 공동체는 “에다”란 말을 제한시켜 유대인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와 건물을 의미하도록 하여 “시나고그(synagogue)”로 사용하였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에클레시아” 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건물과 장소를 포함한 교회보다 경건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2. 교회의 본질
앞에서 교회로 번역된 용어에서 교회의 모임에 대한 성격이 강조되었던 것을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에클레시아”가 지닌 교회의 본질적인 면을 성서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에클레시아”란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공식문서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번째 편지(살전1:1)에서이다. E. 제이, 교회론의 역사, 주재용 역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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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말은 성서적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내용을 내포한 교회로 사용되기 전에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사용되어졌던 용어를 바울이 전용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군주를 선택하고, 정치적인 결정을 추인하거나 사법적 차원의 탄원을 듣기 위해 모인 시민전체의 회합을 지칭할 때, “에클레시아”라고 하였다고 한다. Ibid., 11.
이런 유래를 거쳐 이 용어는 ‘집회’의 의미로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신약교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낱말로 자리잡게 되었다.
1)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은유적 표현으로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 안에(살전1:1), 그리스도와 함께(롬6:1-11), 그리스도와 연합하는(갈3:27), 그리스도의 지체(고전6:15) 등등의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용어와 표현이 의미하는 교회의 본질은 주로 교회의 통일성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전12:27에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많은 지체들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음을 주장한다.(고전12:13) 따라서 지체는 하나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획일적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은사를 통한 조화로운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박위근, 교회갱신의 과제와 그 방법에 관한 연구 , (미출간석사학위 논문: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1987), p. 59.
다양한 은사가 전체의 몸과 조화를 이루어 상호봉사를 함으로 일체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지체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에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지, 몸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머리인 그리스도가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생명과 의지를 부여하며, 하나의 유기체로서 모든 지체를 연합시킨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개념을 더 확대하여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보이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아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존재론적으로 연결시키는 도식이다. 이종성, p. 53.
이것은 인간으로 구성된 지체를 그리스도의 신적인 몸과 동일시하는 관점으로 교회를 절대시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것은 교회의 중심이 지체가 아닌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어야 하며, 지체는 머리에게서 생명력을 부여받아 다양한 은사를 통하여 봉사하는 구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성서의 기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사건을 구약시대에 야훼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했다. Ibid., p. 55.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 백성, 곧 독특한 임무와 주체성을 가진 새 공동체가 되었고, 예수도 추종자들은 새 이스라엘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의도적으로 열두 제자를 택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고, 모세의 언약과 율법을 토대로 새 계명을 주었다. 부루스 라이츠만, p. 55.
이러한 의도는 예수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을 기점으로 낡은 율법시대는 지나고, 복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 주었다. 이들은 새 시대에 적합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새 공동체가 곧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믿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이스라엘, 곧 새 이스라엘이다. 이종성, p. 56.
새 이스라엘은 외면적 유대인이 아닌 내면적 유대인으로 G.E. 래드, 신약신학 , 신성종, 이한수 역, (서울:기독교대한출판사, 1984), P. 604.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따라서 할례는 육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가 된다. Ibid., p. 604.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 곧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교회가 새로운 계약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콘첼만은 초대교회와 관련하여 교회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존재’로 인식하는 동시에 ‘세상 안의 존재’로 이해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H. 콘첼만, 신약성서신학 , 김철손외 2인역,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2), P. 48.
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거룩한 자들, 선택된 자들,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김창인, 성서연구 중심의 소그룹 형성을 통한 교회조직 갱신에 관한 연구, (목회학 박사논문:아세아연신대원, 1987), P. 8.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 즉 신앙에 의하여 결정되며,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때에 진정으로 새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 성전을 구별하여 거룩성을 부여하였다. 더구나 지성소는 제사장들도 철저하게 예전을 갖춰야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구별되어 거룩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가라졌고, 자신의 몸을 성전과 동일시하였던,(요 2:19-21)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단번에 드려짐으로 더 이상 다른 희생 제물도 필요없게 되었고, 따라서 더 이상 희생을 드릴 거룩한 장소도, 거룩한 제사장도 필요없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성전은 신자들의 공동체로 그 의미를 건네주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2장 21-22절에서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바로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지어졌던 것이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고인들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벧전 2:5)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은 더 이상 건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 성령의 전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 벌콥은 그 의미를 교회가 거룩하여 그 무엇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L. Berkhop,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 1974), p. 56.
이런 차원에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근거가 제공된다. 이러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로마 천주 교회는 거룩성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두며, 현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넘겨준 신적 권위를 받아 지상에 완전한 신적 사회인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하는 성례전을 집행하므로 교회 자체가 거룩한 기관이 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부여받은 신자들은 성화되고 신화된다고 하여 교회가 거룩성을 위임받은 것으로 주장한다. 이종성, p. 156.
또한, 동방교회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사상에서 거룩성의 근거를 빌려온다.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며, 따라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완성되고, 예전을 통해서 신도가 신과 하나가 되어 신적 존재가 된다 Ibid., p. 157.
고 하여,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존재론적으로 연결시켜 교회의 권위를 절대시하려 한다. 하지만 교회의 거룩성이 과연 어떤 유형적 기구, 제도, 조직이나, 또는 교회가 신성하고 구성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요, 합리화이다. 성서는 교회가 성스러운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하지 않는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교회가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 속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Ibid., p. 158.
또한 신자가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교회는 결코 개개인의 신자가 아닌 구체화되어 있는 살아있는 전체 공동체의 유기적인 통합이 거룩한 성전인 것이다. 부루스 라이츠먼, p. 53.
4) 교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구약성서에서는 신약성서가 뜻하는 교제(κοινονια)에 해당하는 개념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신을 지극히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신과 대화하거나 교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종성, p. 69.
그러나 기독교의 교제는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인 교제를 의미한다. 수평적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상대로 가지는 수직적인 교제가 전제된다는 측면에서 구약적 회합, 회중의 의미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 코이노니아를 제공하는 기본적인 내용은 수직적 차원으로 성령의 사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코이노니아는 연결하여 상합하여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움으로 성령 안에서 주신 개인적 은사를 이 땅 위에 나타내는 몸인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이강천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0), p. 103.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사를 나누어 가질 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고, 부활하고, 영광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또한 그의 것을 우리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종성, p. 67.
하워드 스나이더는 성령의 교제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깊은 교통의 경험이며, 초자연적인 상호교제의 체험으로서 성령이 주시는 신자들의 사귐이며, 둘째로 성령의 교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셋째는 초대교회의 영적인 환경과 위기로서의 사귐이며, 넷째는 하늘에서의 영원한 교제를 맛본다는 지상적 모형으로, 다섯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동일성과 사귐, 그리고 상호 교통과 흡사한 형태라고 하였다. 하워드 스나이더, p. 106-108
따라서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안에서 장차 누릴 사랑의 교제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체험하며, 그의 능력으로 부여받은 은사를 함께 연합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5) 증거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그 자체가 교회의 존재와 활동이 지향하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땅의 모든 족속과 만물을 지향한다. 본래 제자들은 처음부터 교회를 형성할 생각은 없었다. 유대인으로서 시나고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이종성, p. 69.
그러나 예수께로부터 분부 받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예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이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하게 되었고, 이 공동체는 결국 확장되어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자신의 목적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수단으로서 쓰임 받는 것이다. 교회의 내적 기능은 오직 교회에서 부여된 임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교회는 이 기능을 제자를 삼아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더 나아가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새로운 표현인 그리스도의 몸의 산 세포가 되어 재생산을 통해 교회를 공적이며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도록 하는 계속적인 순환을 지탱하는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 그리스도의 공동체 , 김영국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0), p. 138-139.
고로 교회의 내적 기능과 외적 기능은 불가분리의 관계이지만 교회의 지향점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입이 열려 있다.
Ⅲ. 교회성장
1. 교회성장의 정의
교회성장이라고 하는 말은 역사적으로서는 Mission, Evangelism등으로 말하다가 최근에는 Body Evanger라는 말로 쓴다. 이 말은 맥가브란이 “주의 몸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바로 Mission이 되는 것이고 Evanger가 되는 것이다”라는 데서부터 나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김선도, ‘성장하는 교회, 열린 목회’ 목회와 신학, (서울:두란노서원, 1990년 2월), p.43.
한국 교회에서 논의되고 응용되고 있는 교회성장의 원리로서의 교회성장론은 미국에서 도입된 풀러학파의 이론이다. 즉 1965년 풀러신학교는 인도에서 30년간의 선교 경력을 가진 맥가브란교수를 초빙해서 세계선교학원(School of World Mission)을 세움으로써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선교이론과 교회성장학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풀러신학교 교수들을 중심으로한 교회성장학의 흐름을 「교회성장학파」 또는 「풀러학파」라고 칭한다. 크리스찬생활백과편집위원회,크리스찬생활백과 ,(서울:성서교재발행사,1986), p. 812.
대표적인 학자로서는 P. Wagner, D. McGavran, G. Hunter, D. Miles, D. Kelly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사상이나, 강조점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종합하여 정의하면 성장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고 있다. 즉 맥가브란과 헌터는 교회성장의 방법을 보여주는 몇 가지 성경적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원규,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교회성장학에 대한 임상적 평가’ 목회와 신학, (서울:두란노서원,1993년 7월), pp.44-45.
우선 성경을 교회성장적 사고의 근원으로 보면서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므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잃은 자를 전도하는 것이 성장과 배가의 이유가 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해 있으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은 잃은 자를 찾아 교회성장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비슷하게 헌터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복음화의 목적이요, 교회성장의 목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장론자들은 교회성장은 하나님에의 충성의 표시이며, 기독교는 잃은 자를 찾고 구하기 위해 보내졌기 때문에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의 명령을 하고 있다. 하나는 ‘문화명령’이요 또 하나는 ‘복음명령’이다. 이 두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문화명령은 창1:28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으로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가 있다.
즉 이웃 사랑, 부의 분배, 자연계의 균형, 결혼과 가정, 인도적인 정치, 평화의 유지, 문화의 본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번영과 증진을 축복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복음명령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마28:18-20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로서 교회성장은 복음명령과 관계되어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교회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성장이란 제자를 삼는 것으로서 첫번째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대면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두번째 과정은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친교를 나누게 하는 것이다. 즉 교회공동체에 참여하게 하여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받고 봉사를 하게 하므로 한 명의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세번째 과정은 그들을 훈련하고 교육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는 것으로서 책임지는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즉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교회성장이 이루어진다.
2. 교회성장의 원리
1) 성장의 성경적 원리
교회성장에는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이 있으나 이 둘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교회성장에 대해 기술할 때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행2:41, 47, 4:4, 6:1, 9:31, 11:21, 24, 14:1, 16:5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숫자의 증가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받는 제자의 수가 더하는 것이며,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기독교교회가 확장, 발전되어 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단지 양적 성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동시에 또한 질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자라 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행2:41-47에서는 오순절 날 당일에 제자의수가 3,000명이나 더했을 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오순절 날에 탄생한 예루살렘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부흥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영적으로도 큰 부흥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행6:7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왕성(곧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이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변종길, ‘무엇이 성경적 교회성장인가’목회와 신학, (서울:두란노서원,1993년 7월), p.35.
2)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
교회성장의 전략을 수립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원리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교회성장의 바른 전략을 세울 수가 없다.
(1) 성경의 권위 인정
모든 설교와 선교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교회를 성장시키거나 갱신시키거나 성경 안에서 해야 한다. 순종의 열매, 믿음의 성장 모두가 성경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된 당시의 문화적 여건과 상황 속에서 당시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므로 그 의미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적합치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 당시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이 성경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그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제시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한 성장이 있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복음이란 인간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사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 즉 그의 아들을 통해 이룩된 십자가의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선행을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함으로 교회성장을 가져와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3) 기도의 영력
교회의 탄생은 기도로 시작되었다.(행2:1-20) 그리고 기도로 교회는 유지, 성장을 가져오고 있다. 각 교회들은 여러 가지 기도모임을 가져 왔다. 그러나 모두가 성장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교회의 영적, 수적성장을 위하여 얼마나 구체적이고 열심으로 기도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고 있고 교회가 날로 번창해 가는 교회에서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일꾼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힘이다.
Ⅳ. 나가는 말
21세기를 내다보는 현실에서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서있고, 시대를 선도해 나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교회의 모습들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1. 선교지향적 교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위임하신 지상명령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민족에게나 지속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주신 복음은 2,000년이 지난 현재에도 결코 변할 수가 없다. 즉 시대에 따라,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하는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선교적 사명은 계속된다.
현재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열심을 낼 때 여러 가지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의 열정으로 청년을 깨우고, 사회를 향하여 올바른 모습을 보이고, 이단과 대처를 해야 한다. 내 교회위주의 성장이 아니라 아시아를 생각하고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열정적인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것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2. 말씀중심 교회
성경 말씀은 신앙의 중심이며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방편이기에 성경 말씀이 바르게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배울 때 사회적인 변동, 이단사상, 범람하는 사상들 속에서 이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말씀에 입각한 설교와 성도들의 성장을 위하여 끝임 없는 교육을 통하여 굳건한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만들어야 한다.
말씀없이 예화 중심의 설교나, 코메디식 설교, 축복만을 최우선을 두는 설교는 일시적으로는 교회의 숫적 증가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결국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말씀을 통한 교회성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3. 가정치유 교회
현대 사회에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가정의 몰락이다. 부부간의 갈등, 청소년의 가출과 비행, 성범죄의 증가, 도덕성 파괴로 인하여 가정이 흔들리고 그 영향으로 사회가 흔들린다. 가정에서 용납과 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청소년이 사회에 반항하며 체제에 도전하게 되고, 가정에서 예절을 배우지 못한 십대들이 학교와 공동체에서 무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시급히 가정을 하나님의 원래 창조하신 모습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종종 가정보다는 교회를 우선적으로 여기도록 하는 신앙교육과 생활과 신앙의 분리를 지도 받은 사람들이 교회 건물 안에서는 훌륭한 신앙인으로 부각되지만 삶의 현장인 사회에서는 적응에 실패하여 갈등하거나 위선적인 행위를 하는 사례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에서의 참다운 사랑과 신앙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신앙인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4. 평신도사역 교회
교회의 99%는 사역자가 아닌 평신도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일생을 사역을 위해 드리는 전임 교역자와 다른 직업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사역에 참여하는 평신도는 여러 면에서 다르며, 또 전문성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그들을 동원하고 제대로 활용되기만 한다면 사역은 새로운 활력과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은사개발’이다.
교인의 대다수는 자신이 가진 은사에 대하여 무지하며 또한 특수한 기능을 보유한 사람도 그것이 주의 사역을 위해 개발되지 않기 때문에 사장되는 사례가 많다. 그러므로 교회는 적극적으로 평신도를 깨우고 발전시켜서 사역에 동참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움직이느냐는 교회성장에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다.
5. 복음전파 교회
교회라면 모두 복음을 전하고 있기에 별로 색다를 것이 없지만 교회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외치는 교회가 바르게 성장을 한다. 즉 성도들로 하여금 또는 교회 조직으로 하여금 계속적인 복음증거를 위하여 움직이도록 할 때 교회나, 성도들에게 복음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새로운 성도를 통하여 새생명의 모습이 힘있는 교회로 유지 시켜 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증거를 중단하거나, 쉬어서는 안된다. 쉬는 것이 교회성장을 막는 것이고 생명력을 잊게 하는 것이다.
6.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
개교회는 지역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말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그 지역 주민들에게 보여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도 성장되는 것이다. 지역 주민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교회는 얼마가지 않아서 그곳을 떠나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지역 주민에게 좋은 인식을 주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서 교회의 일부 시설(주차장, 교육관등)을 개방하여 일반인도 쉽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지역 행사에도 교회가 참여하여 거리감을 좁혀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여섯 가지 외에도 많은 모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교회의 중요한 원리는 담겨져 있다고 본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조화를 이뤄 가는 교회가 올바른 교회가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행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늘의 우리 시대에 이뤄질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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