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관한 정의는 철학에 있어서 가장 정의하기 힘든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성
경에는 시간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특별히 카이로스와 아이온
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성경에는 시간이 하나의 문제로서 간주되어 있지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실현되는, 피조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있다.
일반적(세속적)인 의미에 있어서 카이로스는 어떤 일의 수행을 위한 특정한 시점을
가리키며(행 24:25,"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 강론하니...가라 틈이 있으면 너를 다
시 부르리라"), 아이온은 일정한 기간의 시간(명문화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을 가리
킨다. 신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특별히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요 7:6,"내 때
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지만, 너희 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구속사에 있어서 어
느 순간이나 세대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적절한 시기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
의 생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권한)에 속한 문제이다(행1:7). 하나
님의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그러한 시점들에 묶여져(한정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은 구속적인 '역사'이다. 진행중인 시간의 모든 기간들이 좁은 의미에 있어서 구
속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카이로스들이 전체적인 시간 속에서 선정되었
다.(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pp.40-41)
신약성경에는 종말론적인 드라마와 연관된 미래의 카이로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반면에,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카이로스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
과 부활이다. 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결정적
으로 중요한 것이다. '주의 날', '시간' '지금(이제)', '오늘'등과 같은 용어들은 영
원한 질서와 구속사와 모든 평범한 사건들이 충돌될 때면 언제나 신약성경 문맥에 있
어서 극적인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상호 연관된 구속사의 줄거리가 형성된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세속적인 시간의 운동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들의 성취를 위해서(때
로는 뜻밖에) 하나님의 시간들 속에 비밀히 내포되어 있다.
카이로스가 영원한 것들을 특정한 순간에 드러내듯이, 아이온은 자신의 목적에 따
라 모든 시간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계시해 주는 것이다.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전환점
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보다 더 긴 아이온속에 내포된다. 성경은 역사를 약속의 세
대, 성취의 세대, 다가올 세대라는 관점에서 구분한다.
인간이 영원한 질서에로 옮겨가는 것(변천, 전환)은 현세적인 경험(삶)의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구속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때에도 여전히 피
조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계 10:6, '더이상 시간이 없을 것이다"는 시간의 단
절이 아니라, 기회가 소멸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시간이란 말은 '지체할 시간'을
의미한다)
현대 철학자들은 그 성격상 고대 철학자들이나 중세 철학자들보다 시간을 더 진지
하게 다룬다. 고전적 헬라 사상은 이 세상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즉 이
세상의 의미를 영원한 이데아나 형상에 대한 한낱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그림자게 불
과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영원'항목 참조). 중세 신학자들은 플라톤의 사상과 아리
스토텔레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네, 이로 말미암아-물론 신조들 속에는 계시
의 역사성과 구속의 중요성이 그대로 존속되어 있었지만-유대교와 기독교의 계시 진리
들에 대한 성경적 역사관으로부터 주의를 다른 곳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현대의 관념
철학자들은 역사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이 어떤 점에서는 영원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
고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보통은 은밀한(가식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
의 교리를 대적한다. 그러나 헤겔(Hegel)의 지도를 받는 현대의 관념론자들(이상주의
자들)은 시간과 역사가 절대적인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대의 관
념론자들은 성경 역사의 독특성을 극소화시킴과 동시에 모든 일반 역사들을 신적인 과
정으로 간주함으로써 일반 역사의 영성을 과장한다. 이러한 관념론자들의 견해는 아주
비성경적인 공상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면에서 성경적인 견해에 유
익을 끼치고 있다. 즉 고대의 고전 철학자들은 현세적인 것들을 낮게 평가했음에 반하
여, 현대의 관념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고 강조한
다. 그리고 역사란 반복적인 세대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하는 순환적인 역사관에 반하
여, 현대의 관념론자들은 시간의 진행은 완전한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 나아가고 있다
고 강조했다.
동등하게 의미있는 견해로서 진화론적 자연주의는 실재에 대한 유신론적 해석 대신
에 헬라의 세계 중심적 사상으로 돌아갔다. 이 진화론적 자연주의는 시간이란 결정적
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현대의 진화론 사상에 호소한 것이다. 시간이란 삶
의 새로운 형태를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관념은 다윈(Darwin)이후 반세기 동안 아주 인
기가 있었는데, 그때에는 돌연적 진화에 대한 공상적인 관심이 지대했었다. 이 관념론
자들과 진화론자들의 두 견해 속에는 보다 더 고상한 목표에로 진행해 나아가는 현세
적인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성경적 교리에 대한 현대의 진보적
이론들은 그러한 관념론이나 진화론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공상
적인 설명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교리의 초자연적인 특징들을 제거해 버린다
성경 신학적 흐름의 밖에서 볼 때, 고대의 종교와 철학의 모든 사조들은 실제로 현
세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했다. 동양의 종교들은(모두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
불교는 '열반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열반 사상이란 역사와 개인의 경험(삶)
을 악한 것으로 강조하고, 축복에 대한 기대는 역사적인 구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
의 멸절을 통해서 신적인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성취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동양 종
교의 어느 것도 성경적인 견해-즉 역사에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목표를 향한 유목적적
인 운동이 나타나 있다는 것-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고대의 비성경적인 종교
들이나 사상들은 순환적인 역사 이론-즉, 역사란 일련의 반복적인 세대들이라는 것-
사실상 이러한 비성경적인 관념들은 때때로 범신론적인 계열을 따라서 이 역사 과정
(시간)을 '신격화'함으로써 영화되어진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해당 항목 참
조)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의 영원한 원리들을 강조함으로써 윤리적 목적론에 이
르는 길을 마련한 반면에, 그 구제받을 수 없는 이원론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대한 영
구적인 중요성을 배제해 버렸다. 사실상 조로아스터교는 영원한 반복 관념을 피했지
만, 이 세상의 운동을 네세대로 구분해 버렸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그 어느 사상이나 종교도 성경에서 시간의 중요성을 가르친 것
과 같은 견해를 주장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보존 사
역과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역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투쟁을 하고 있다. 역사는(창조주에 의해 선택된 자들
의 구속을 포함한)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서 진행해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주형
(모형)안(속)에서 모든 사상과 언어와 행동은 영원한 도덕 질서에 반향된다. 리챠드
크로너(Richard Kroner)가 이러한 성경 철학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역사는 하
나님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그 중심점이 있으며, 영원한 종말과 최후의
심판속에 그끝이있다"(ER:"Philosophy of History,p.582.New York, The Philosophical
Libary,1945).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강조하기를, 유대인의 계보적인 역사관
은 아직도 그 절정(그리스도의 도래(파루시아)사건과 일치함)을 기다리고 있는 반면
에,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역사의 중심점이 종말론적인 미래에 있다기보다는 과거적
사건에 있다(즉,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결정적으로 그 이후의 시간을 지배한다
는 것)고 한다. 쿨만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바르트(Barth), 브루너(Brunner),
불트만(Bultmann)이 시간과 영원을 지나치게 분리시킨 사실에 대해 적절히 경고하고있
다. 그러나 이에 대한 쿨만 자신의 대안은 하나님의 독특한 영원성('영원성'항목 참
조)을 손상시킨다. 더구나 쿨만은 '태초와 종말'(시작과 끝)이라는 성경적 언어 속에
들어 있는 많은 것들을 '현세적으로 비역사적인 신화'라는 관념이라고 양보함으로써
그의 성경적 실재론은 위협받고 있다. 만일 현세적 사건들의 연속성을 이러한 신화 속
에 포함시킨다면, 왜 모든 성경적 사건들도 신화적 사건 속에 포함시킬수 없으며, 둘
째 아담(예수님=역자 주)도 첫째 아담처럼 동일한 양식(즉,신화)으로써 추방시키지 않
겠는가? 따라서 쿨만의 '신화화'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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