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예배자
시편 15:1-5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시작된 초대교회는 주후 2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가지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는 교회 외부에서 일어난 것으로, 복음을 반대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박해였으며, 다른 하나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이단사상이었습니다.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증언과 황제숭배 거부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일어났으나, 후에는 로마제국에 의해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
습니다. 박해는 주후 313년 콘스탄틴이 로마 황제가 되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끝이 났습니
다.
이단 사상은 전통적인 성경적 가르침과는 대치되는 것으로써, 이교적 문화권에서 복음을 곡해한 연유에서 발생
했습니다. 두드러진 이단들 중에서, 교회에 광범위하게 파급되어, 심각한 위협과 도전을 가져다 준 것은 영지
주의와 마르시온의 가르침, 그리고 몬타니즘이었습니다.
윌리스턴 워커가 쓴 ‘세계기독교회사’에 의하면, 세 이단 중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것은 몬타니즘이었습니다.
사도시대의 특징이었던 성령의 감화에 대한 의식이 크게 약화되었을 때에,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사상과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난 것이 몬타니즘이었기 때문입니다.
몬타니즘은 주후 156년 경 소아시아 중앙에 있는 프리기아 사람 몬타누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몬타누스는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성령 사역의 강조와 신약성서의 계시보다 자기들의 계시가
더 높다는 주장으로 인한 비판이 일어나자, 기존 교회와 분리하여, 자신들만의 별도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몬타누스는 임박한 종말을 예언하며, 신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성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도덕적 생활을 강요했습니다.
급기야 몬타누스는 성결하지 못한 사람들의 교회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몬타누스의 이러한 조치는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과연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만 출입하는 곳일까요?
하지만 이러한 논란은 몬타누스를 통해서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서에도 이러한 논란을 일으킬
만한 구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역대하 23장 19절 같은 구절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슨 일에든지 부정한 모든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 구절은 유다 왕 요아스 때에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가 성전의 문마다 문지기를 두어, 부정한 사람은 아무도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설명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약시대에 실제로 성전 문에서 성전출입 부적격자에 대한 출입통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에, ‘성전출입 의식’을 주제로 한 시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5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시편 15편은 성전 문 앞에 선 순례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순례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성전 문지기나 제사장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 질문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인과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하게 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5장에 보면,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어갔을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
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고, 엘리가 제사장이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첫 번째 전투에
서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승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사람들
이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긴 후에, 빼앗은 언약궤를 가지고, 자기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스돗에서는 언약궤를 다곤 신전 안에 있는 다곤 신상 곁에 세워 놓았는데,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 엎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스돗 사람들에게 악성 종양
재앙이 내려서, 그 지역 사람들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는데, 그곳의 모든 사람에
게도 악성 종양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가드 사람들이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에그론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그론 사람들에게도 악성 종양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언약궤는 일곱 달 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로 인해 재앙이 왔음을 블레셋 사람
들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서 임재하시는 곳이 어떤 사람에게는 화가 임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순례자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절 이하에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옵니다. 이 대답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전 문지기나 제사장이
말합니다. 먼저 2절에 보면, 포괄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첫째는, 정직하게 행해야 하고, 둘째는, 공의를 실천해
야 하며, 셋째는, 마음에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3절부터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은 2절부터 시작된 요구 사항과 금지 사항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약속으
로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출입 의식을 주제로 쓰여 진 이 시에서 몇 가지 중요한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발견하
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악인과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소는 복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화를 당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소의 출입 여부는 누가 결정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성소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히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격심사를 통과했음을 입증한 것입니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 셈입
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감사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올 때마다, 부족
함이 많은 사람을 예배자로 초청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한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
님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씀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
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나병을 고침 받음으로써,
성전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성전의식에 참여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표로 예물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늘 예배할 수 있도록 복을 허락해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15편에서 발견하는 두 번째 말씀은 윤리적인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15편을 쓴 시인은 책망 받을 것이 없이 온전하게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실천하며,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함당한 사람은,
예배규정대로 준비하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 이전의 삶이 윤리적인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자리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
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예배 때의 모습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삶의 모습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누구나 경건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예배
이전의 모습에 더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더 진솔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이전의 삶이
예배에 합당한 윤리적인 삶이 아니면, 그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창세기 4장 5절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가
됩니다. 윤리적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은 사람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좋은 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자주 모여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찬송과 기도 소리가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이제
는 교회 안에서의 예배만을 강조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의 예배인 삶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몇 차례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은 그 대표
적인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경고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예배 이전의 우리 삶이 과연 예배에 합당한 윤리
적인 삶인지를 묻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리적인 삶이 뒷받침 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용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매일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시편 15편에서 발견하는 세 번째 말씀은 이웃과의 평화 없이 하나님과의 평화는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5편을 쓴 시인은 본문 3절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거론합니다.
곧 혀로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아니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입
니다. 이것은 이웃을 험담이나 조소의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 되며, 이웃의 불행을 달가워해서도 안 된다는 말입
니다. 그 모든 것은 이웃과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그들에게 이웃은
공동운명체의 일원이지, 상호경쟁 대상자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한 가족과도 같은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그 가족 공동체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도 매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공동 운명체를 이루고 있는
이웃과의 평화 없이는, 모두의 주(主) 되시는 하나님과의 평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15편을
쓴 시인은 이웃과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을 위한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경쟁사회요, 적자생존의 원리가 판을 치는 사회입니다. 각자의 경쟁상대를 정해 놓고, 그를
넘어뜨려서, 그보다 앞서는 것을 인생의 성공으로 부각시킵니다. 동료의식을 강조하며, 함께 일하던 산업화 시대
의 모습은 사라지고, 상대적으로 홀로 일하는 정보화 시대의 특징인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기’라는 개인만 남고, ‘우리’라는 공동체는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성서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이웃은 경쟁상대가 아닌 공동 운명체의 일원이며, 이 땅에서 서로 도와
가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벗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요, 내 힘이 모자랄 때에 힘을
보태줄 사람이며, 나에게 지혜를 깨닫게 해 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까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님
께서 원하시는 것은 한 개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개인과 이웃 모두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웃과의 평화 없이 하나님과의 평화는 없다는 것을 가장 잘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만큼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웃과
의 평화 없이는 하나님과의 평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마다 여러분이 예배할 자격이 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늘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또한 흔들리지 않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힘써 윤리적인 삶을 살았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 이웃과의 평화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까?
여러분 모두 자신을 돌아보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함과 동시에,
흔들리지 않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 윤리적인 삶과 이웃과의 평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15:1-5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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