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스크랩]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18. 1. 15. 23:06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기도편

 

"늘 기도하며 힘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 받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둘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것이다." -조지 맥도널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형태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자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소중한 자신만의 좌석'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기도 자체에 혼란과 좌절을 맛본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가 마치 다른 나라 얘기 같다.

 

예수 믿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믿기 전과 믿은 후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이승구 교수는 강의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이나 '은혜' 그리고 '기도' 역시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상관없는 거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건 내가 조정하여 내 안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 내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는 '기도'와 '구원' 그리고 '은혜' 같은 측면은 우리 안에서 조정하고 움직여 하나님 뜻과 일치해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외부에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외적인 은혜'라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 기도에 대한 해석이다.

 

기도를 해석하며 '신인협력주의'라는 좀 난해한 용어를 쓴다. 이는 기도를 "하나님이 베풀어야 할 은혜는 반드시 사람의 의지와 호응해 작용되어야 하는 성취"라고 주장하는 용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천주교의 해석대로 처음에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지만, 믿은 후에는 자신이 무언가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기독교 사상은 믿기 전이나 후나 우리 힘으로는 '구원'과 '은혜'가 시작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후에 내려지는 단순한 '내리 사랑'과 같은 포상이자 선물이다.

 

이승구 교수는 "피조물들은 자연의 혜택을 받지만 그것이 주는 효과만 누릴 뿐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기도 자체에 그 어떤 의미 부여하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은 "우리의 소망을 그분께 의존해야 한다"고 기도의 진실한 의미를 부여한다. 기도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그저 하나님께 의존하는 신앙의 요약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모범적인 삶에서 탄생한 기도하는 삶 자체를 누려야 한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지 그저 달라고 요구하는 것, 즉 주문을 외워 무언가 이룩하고자 하는 획득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기도는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교제가 아닌 사람과 사람사이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으로 생각하여 대화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와 같은 기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1.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라

우리는 늘 '자신의 욕심'을 추구한다. 이는 기도에도 적용되는 필수적 요소이다. 기도의 특권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자기 영광 위한 기도를 버리라"고 이승구 교수와 칼빈은 말한다. 자신의 간구만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생각과 자세를 버려야 한다. 자기 문제만을 위해 밤낮 기도하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신 '자신의 문제만을 위한 기도'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겸허한 자세를 취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대화하는 기도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기도가 바로 기도의 시작이다. 이러한 독특성이 있기에 다른 종교의 기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양상을 띤다. 결국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 영광과 뜻을 위해서 노력하는 행위, 마음 그 자체이다.

 

 

2. 부족함에 대한 자각

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중언부언하면서까지 장시간을 기도하고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방언'을 읊조려가며 노력하는 땀을 보고 있자면 "기도를 많이 해서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행위"는 기도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한다. 말을 많이 한다고 기도를 더 많이 들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기도를 안 하는 것은 더 시급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많이 한다고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시간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기도의 결과로 선물을 받고자 하는 기도 역시 바라지 않는다.

 

우선 칼빈은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워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완벽하게 알았던 종교개혁자 루터는 늘 그 문제로 하루에 4시간을 하나님과 씨름했다. 기도는 자신만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장시간 기도하여 남에게 자랑하려는 '액세서리'도 아니다.

 

아래에서 문제 있는 기도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기도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깨닫기 시작하는 의식에서 나와야 하지만 자신만의 기도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노력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헛된 기도라고 이승구 교수는 주장한다.

 

두 번째, 유대인들의 외식하는 기도는 올바르지 않다.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든 안보이든, 어디에 있든 반드시 매일 9시와 3시에 서서 두 손 들고 기도한다. 주로 회당과 큰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의 기도(마태복음 6:5)는 상(포상)을 받았지만 예수는 이들의 기도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세 번째, 몇 시간씩 자신의 만족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전혀 의미 없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마음에는 타인을 향한 매일 삶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기도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하나의 의미요 다른 하나는 그 기도로 인한 진정 자신만을 위한 기도로 변하여 퇴색되어 간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 말을 많이 하면 들어줄 것 같은 심리적 보상을 노린다.(마태복음 6:7) 유대인들처럼 기독교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로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방언'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지적은 우리 같은 종교인들의 지적이 아니라 바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적임을 직시해야 한다. 심지어 예수는 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아무도 모르는 곳,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보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선포한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사람의 마음을 보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갚는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 1568년 교황 비오 5세의 업적(?)을 일궈낸 <성무일과>라는 라틴교회 공적 기도처럼 공통된 기도의 형식대로 하는 기도는 문제다. 이는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더 높이 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기도가 마치 의무화 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에 그 어떤 형식이 있다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는 의미에 비춰볼 때, 진정한 의미를 퇴색한다. 이승구 교수는 "기도의 의식에는 '형식'과 '내용'이 함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예수를 의존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섯 번째, 기도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사상을 제거해야 한다. 천주교의 기도는 마리아를 위한 기도, 성자들을 위한 기도 혹은 성자에게 부탁하는 기도, 세례명의 성인들이라고 말하는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수호성인'들에 대한 기도 등이 첨가되었다. 이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죽은 '성인'에 대한 모독이 될 수가 있다. 살아있는 성인들을 위한 기도 즉 동역자와의 교류와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진실한 목적을 상실한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해야 한다. 역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기도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다시 죽이는 일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로는, 주문성을 가진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에서 그 자체가 갖는 효과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예수를 향한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이룩하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다.

 

 

3.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기도하는 마음'

첫째, 먼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둘째, 내가 기도했더라도 자신이 이룩한 생각을 지우고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임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내가 기도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길 바라며 끈을 놓치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 어디서든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처소처럼 그에게 우리의 기도를 의탁해야 한다.

 

구약에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없었기에 기도에 제사적 의미를 부여하여 '성소' 혹은 '제사' 라는 예수의 보혈과 일맥상통한 상징적인 의미로서 기도가 행해졌다. 신약에 들어서는 구약에서부터 밝혀온 메시아 예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로 말미암아 기도 형태가 바뀌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기도의 올바른 해석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의 의미는 기도를 주문처럼 외우라는 게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 때, 하나님 뜻과 부합되는 모든 것들에 해당되면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된다는 뜻이다.

 

주문과 같은 신약의 기도가 이제 '언어의 미신' 같은 기도를 배제하고, 주문과 다른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구속사적인 감사에 더 치우쳐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르친 기도는 성 어거스틴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로, 그가 칭찬한 밀라노 감독이자 설교가인 암부로스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입이시다. 그를 통해 아버지께 말한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칼빈이 말하는 기도는 '간구(solicitation)'와 '감사(thanksgiving)'하는 두 가지 태도를 수반한다. 간구는 하나님 뜻과 함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 기도 후, 하나님 뜻을 필요로 하는 우리 욕구에 관한 것을 구하여야 한다. 감사는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그리고 영광을 그분에게 돌려 드리는 마음의 기도다.

 

ACTS (기도의 네 가지 요소)
Adoration (흠모·예배): 하나님께 찬양.
Confession (고백·자백): 죄와 용서에 대한 자백과 삶의 고백.
Thanksgiving (감사): 신에 대한 감사
Solicitation (간구): 바라고 구함

 

Prayer is the wing where with the soul flies to heaven, and meditation the eye where with we see God. (기도란 천국을 향한 영혼의 비상들과 함께 하는 날개이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눈의 묵상이다.) -Ambrose(암부로스, A.D. 340~397)



 
칼빈이 말하는 두 가지 기도, 사적 기도와 공적 기도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기도편 : 예수의 기도(상)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 주의 깊게,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다." -데이비드 허버드(David Hubbard)

 


 



1. 기도의 태도

 


 

'기도하는 양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기도의 양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고 한다. 신약에 들어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 유대인들은 주로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고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드리기도 했다. 또한 일부는 가정집에서 이루어진 예배의 형태를 '처소' 혹은 '각처'라는 말로서 대신한 것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나중에 기독교인들을 유대 회당에 발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이단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들의 신변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늘 그러한 위협을 느끼고 살았던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기도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신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의 편지에는 피와 땀이 녹아 있다. 그는 힘들 때 위로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웠고 배고파야 했다. 그것도 감옥에서 말이다. 제 삼자가 볼 때는 가히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무엇이 그를 추위와 고통에서 방치했는가? 그래도 그는 예수를 쉬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예배하고 있었다. 그에게 장소와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중요했다.

 

사도 바울은 살아 있는 동안 교회 혹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7~18)고 당부한다.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 역시 "모든 사람이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에서든지 만사를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모든 일로 그를 찬양하면서 자기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기를 바울은 바란다"고 사적인 기도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개인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간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들어주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여기에는 '지속성'이 추가된다. 또한 '인내'가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기도와 예배를 쉬지 않았다. 기도의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다. 그는 순교했다. 결국 그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기도는 없었다. '자신의 잔을 옮기어 달라는 기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예수와 한 몸이었기에 그의 영광이 예수의 영광과 일치하는 순간이다.(요17:22)

 

다니엘은 3주 동안 기도 응답을 기다렸으며,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의 예레미야 역시 열흘을 기다렸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가서 엿새를 기다린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고 예수의 응답의 기도 역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요2:4)을 강조한다. 특히 예수는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과 기도의 잔을 끝내 하나님 뜻에 맞추어 피하려는 개인의 욕심이 드러난 기도를 지속하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글 중 하나는 "비는 나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여전히 오늘 동일하게 내린다"라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응답과 부재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응답' 혹은 '응답 없는 응답'으로서 이 땅 위에 동일하게 내린다.

 



2. 사적 기도와 공적 기도

 


 

칼빈이 언급하는 두 가지 기도가 있다. '예배 차원'의 기도는 '사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가 늘 동일하게 흘러간다. 기도에는 끊임없는 연속성을 가지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적인 기도 즉, '개인 기도'가 있다. 이와는 다르게 우리가 가끔 함께 모여 드리는 다수의 공식적인 '공적 기도'는 쉬지 않고 하기보다 일시적인 기도이다. 기간을 요하는 시간과 공간적 상황과 마주하는 '공적인 기도'는 일시적이면서도 공동체적 상황이 주기적으로 주어진다. 물론 요즘 공기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릴레이 기도'를 하는 곳이 늘어나는 풍토이지만 대부분은 일정 시간과 한 장소에 모여 함께 기도하게 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에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여 그곳에 참석하지 못한 자들에게 출석을 강요하거나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영적인 무지가 있다고 해야 할까? 바울이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고전 14:40)라고 표현한 것처럼 모든 일이 교회 안에서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칼빈은 이에 대해 예견한 듯하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져 버린 후 우리는 예배 장소에 대한 장소적 개념을 받아들여 처소적 예배의 의미로서 여전히 구약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교회라는 '처소' 혹은 '성전'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낸 장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예배의 처소는 사람이 필요한 대로 짓고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 유익한 나눔과 영적인 예배를 드림으로 진정 하나님나라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곳이다. 칼빈은 특히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비밀스런 성스러움을 꾸며 놓았다고 한들 기도가 더 거룩해지거나 혹은 하나님이 특별히 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간혹 교회 안에서 맨 앞자리와 맨 뒷자리와의 관계를 은혜의 높낮이로 표현하는 것이 이에 해당되는 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장소적인 예배'가 아닌 우리 자신이 참된 예배의 처소이자 성전임을 이승구 교수는 칼빈의 저서를 인용하며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성전이고 성령이 거하는 곳이 바로 예배 장소이자 그 성령이 거하는 우리 자신이 성전이다. 이제 교회 건물이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는 아니다"라고 이승구 교수는 말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이후에 생겨난 공동체가 세운 것이 교회이다. 우리 공동체가 교회이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점이 적용된다.

 

문득 사마리아 성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비교하여 어느 곳이 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제구실을 하는지 물어보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생각났다.(요4:21) 칼빈처럼 말하는 근거는 바로 예수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것은 사실로 되어 오늘날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임대하든지 땅을 구입하여 교회 건축을 했다. 그러한 장소는 결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아니고 심령 깊은 곳에서 폭발하는 내 안에 움직이는 기도와 예배하려는 마음이 진정 예배의 중심지다..

 

이승구 교수는 "장사하는 곳이 나의 예배처소요, 모인 곳이 우리들의 예배 처소요, 사업하는 곳 즉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예배 장소"라고 힘주어 말한다. 나는 늘 다음의 기도 제목에 대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러한 기도가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말이다. 특히 과거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의 기도에서 공통적으로 잘못된 한 대목을 본다. "내가 세상에서 죄를 짓다가 이제 주일을 맞아 하나님 전에 기도하러 나왔습니다…"라는 말이다. 과연 그런 마음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기도의 가치관일까? 이는 잘못된 기도이자 진정한 예배의 주체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잘못된 기도라고 꼬집으며 "우리의 마음과 심령의 통곡이 바로 예배의 기도 자세로 마음에 있다"라고 말했다.

 

칼빈 역시,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기도의 본질은 마음(롬8:27)에 있으며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쏟아 부어진 마음속의 어떤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골방'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마음을 살피는 '성령의 기능'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 탄식과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은밀하게 우리 마음속으로 끄집어내려, 외식자들과 달리 문을 닫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령과 교통해야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정석이다. 이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기도의 '내면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외부적인 예배 형태를 이내 내부로 끌어들여 외부에 들어나는 것보다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외면성'에 대한 기도의 본질이다.

 

우리의 기도 자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야 하며 이와 반대로 기도에 사용하는 소리나 노래가 마음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도 유익도 없고 급기야 입술 끝에서나 목 줄기에서 솟아나는 이 소리는 하나님의 진노만 부추길 뿐이라"고 칼빈은 강요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청소년 때 번민 속에서 기도 모임을 하면 기도하다가 딴 생각이 나고 고민에 휩싸였던 것을 돌이켜보면 과거 '하나님의 진노'가 내 머리 위에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찬양하면서도 스스로 다른 문제와 씨름을 하느라 가사를 잊고 멍하니 바라보는 예배자로서, 오늘도 수없이 많은 고통의 자녀들이 치열한 전쟁에서 한판승 벌이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과연 무엇이 기도인가를 곰곰이 살필 시간과 고뇌가 필요하다. 기도는 중얼거린다고 입 속에서 무언가 튀어 나오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안다. 그래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기에.

 

교인들 모임에서 기도할 때, 다 같이 한 목소리, 한 입으로 같은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함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공적인 기도'이다. 혼자서 기도하고 자신과의 문제로 씨름하는 것과 다르게 공적인 기도에서는 중언부언할 수 있는 방언은 문제가 된다. 마치 과거 천주교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라틴어'로 기도하다가 또 라틴 사람들 속에 헬라어로서 예배하거나 기도했던 것처럼,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는 건 함께 이룩해가는 협력의 의미를 잃고 두서없는 메아리가 될 것이다. 과거 천주교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초래하는 언어적 방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칼빈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들이 수정했다고 이승구 교수는 말했다.

 

말에는 내면을 바꾸는 힘이 있듯이 우리에게 혀가 있기에 함께 노래하고 말을 알아들어야 전도가 되는 것이 방언의 참된 의미이다. 방언이 시간 때우는 것으로 전락한 오늘날 기독교 현실에서 전도와 방언이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물론 방언은 중요하다. 방언으로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어느 한 곳에서 퍼져 나가 순간 근처에 있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방언이 무엇인지 곰곰이 살필 수가 있다.

 

참다운 예배 형태를 이룩하게 되면 한 몸 안의 영으로서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방언은 개인 기도 시간에 필요할 것"이라고도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하늘의 언어'로 말한다면 아름다운 서시가 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공적인 기도 혹은 사적인 기도 모두가 마음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지 않는다.

 

혀로서는 무당도 하늘에 제사 올릴 수가 있다. 어느 정도는 그 무당의 기도에도 힘이 들어가 있고 혹은 땀과 정성이 배어있어 혀로 기도하는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말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하나님 존재 여부에 따라 판단된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이 없으며 우리에게는 유일신 '하나님'이 존재하기에 우리 내면에서 발산되는 기도에는 헛된 노력이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고 결정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 우리 안에 내재한 '초월성'을 전제로 영원무궁함을 갖춘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말이다. 목회자이자 시인인 제럴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가 자신의 시집 "The Poems" 에서 발표한 <I Wake and Feel the Fell of Dark>의 한 대목을 옮긴다.

 

"… cries like dead letters sent. To dearest him that lives alas! away."

"가장 사랑하는 분, 그러나 슬프게도 너무 먼 곳에 사는 이에게 배달되지 못할 편지를 부치듯 그렇게 부르짖습니다."

사실 내 편지를 '받은 이', 늘 내 안에 있는 예수를 잊기도 한다. 또한 세상은 늘 그와 반대로 흐른다. 그럼에도 그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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