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멸절주의( Annihilation)

하나님아들 2018. 1. 15. 22:45

 멸절주의( Annihilation)

 



 때때로 교회 역사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분해가 되고 죽음 뒤에 완전히 비존재가 된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무신론 인본주의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이 땅의 삶이 우리가 갖고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결국 이 땅의 삶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단지 육체적이다. 죽음과 분해는 있는 모든 것을 무로 만들 것이다.


일반적인 기독교 전통 안에서, 멸절주의로 알려진 이 견해는 이단 중에서만 주장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때때로 정통적인 믿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력을 주었다.


좀 넓게 말하면, 이런 멸절주의자들의 견해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1. 죽을 때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절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2. 죽을 때에 영혼은 잠을 자다가 마지막 심판 때에 깨어나서 심판을 받고 멸절된다.

3. 죽을 때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최종 부활 때까지 의식적으로 형벌 받고 나서 몸과 영혼이 멸절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견해에 익숙할 것이다. 과거 200년 전에 시작된 여호와 증인과 안식교를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멸절주의의 원조는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다.


흥미롭게도 세 번째 견해는 정통주의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채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멸절주의는 성경적 가르침의 모든 국면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견해라고 주장을 한다. 정통주의 견해처럼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좋은 면이 있다. 이 견해는 성경적인 정통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2세기에 정통신학으로 나타난 유일한 교리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교리는 플라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기독교 저술가인 Atenagoras가 “The Resurrection of the Dead"라는 책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 또한 가장 유명한 신학자인 터툴리안의 작품 속에서 그들은 실제적인 원동력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멸절될 것이라는 견해는 때때로 감정적으로 선호되는 선택이라는 근거로 종결되고 있다. 가끔 멸절주의자들은 이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들은 지옥의 개념과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라는 믿음을 조화시킬 수가 없었다. 19세기 성공회 신학자인 F. W. Farrar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에게 간구를 드립니다. 터툴리안, Minucius Felix, 조나단 에드워드, Dr. Pusey, Mr. Furniss, Mr. Moody, Mr. Spurgeon이 설명한 지옥을 단 1년이라도 견디기 보다는 나는 짐승처럼 멸망하고 영원히 비존재로 있기를 주님에게 간구합니다.”


우리는 멸절주의자들의 약점과 약한 성경적 진술들을 지적을 하였지만, 그들의 입장에 대해서 적절하게 다룬 적이 없었다. 어떤 멸절주의자들은 성경적이기를 원한다는 분명한 주장에 근거해서,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그들의 성경주해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네 가지 논증

멸절주의를 지지하는 데 사용되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영원한 형벌의 전통적인 견해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헬라철학의 견해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영원한 형벌은 계속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장된 것처럼, 성경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영원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딤전 6:16). 하나님은 그들 자신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영혼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를 멸절시킴으로서 우리를 영원토록 처벌하는 것이다.

  ⓑ 전통적인 견해는 형벌에 대한 성경의 설명이 부활 뒤의 사건으로 그려놓고 있다고 가정을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구절들은 최종적인 상태가 아니라 죽음과 종말 사이의 중간상태의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다. 최종적인 상태를 염두 해 둔 것처럼 형벌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읽는 것 때문에 이런 구절들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 전통적인 견해는 이런 “영원한, 파멸, 죽음”과 같은 성경적인 용어들을 오해하였다. 결과적으로 성경에 있지 않는 의미들을 성경구절 속에 삽입하였다.

  ⓓ 영원한 형벌의 영원한 장소의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결국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전 15:28). 다소 하나님의 영광 밖에 있는 어떤 세상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전통적인 견해는 제안을 한다. 이 장소는 성경적인 비전에 오점을 남겨두며 하나님의 영광을 제한한다.

이런 주장들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2. 불멸의 영혼?

전통적인 견해는 영혼 불멸의 비성경적 철학적 전제 속에 기초한 가르침일까?  비 기독교 철학이 초기 기독교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세상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세상을 위해서 성경을 해석한다. 초기 작가들이 영혼의 불멸성에 강조점을 둔 이유는 이해할 만하다. 바로 이것이 일종의 접촉점이었기 때문이다. 복음과 제 1세기 그리스-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하는 다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종, 멸절주의자들은 여기에서 논리적인 오류에 빠지는 경향을 보인다. 영혼 불멸성의 사상이 고대 비기독교 세상으로 들어가는 유용한 연결교리였지만, 이것이 비 기독교 세상으로부터 온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초기 신학자들은 딤전 6:16절의 바울 진술에서 함축적인 의미를 찾은 것이다. 하나님 자신만이 불멸하시다. 우리가 지금 가질 수 있는 불멸성은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이지, 그에게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불멸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창 1:26-27), 우리의 존재가 일시적인 것으로 의도되지 않았다.


성경적 가르침의 두 가지 요소가 이것을 강조한다:

첫째로, 모든 사람의 부활은( 행 24:15) 인간 존재의 영원성의 요소에 하나님의 언약을 가정하는 것으로서 성경적이고 논리적이다. 아마도 복음주의적 멸절주의자들의 견해에서 가장 약한 점은 그들을 멸절시키기 위해서만 사람들을 부활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죄를 위한 실제적인 형벌이 멸절이라면, 도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부활시키고,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형벌을 주고, 그들의 분해시키고 결국 멸절시킨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과정이다.


두 번째로, 우리 사고의 배경에 항상 전제되는 것은 신학적인 원리이다.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완전한 계시와 어떻게 일치하는가?  복음주의 멸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위한 형벌을 짊어지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확인할 수 없는 버림이 있다; 이것은 멸절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것 또는 그것과 유사한 것을 겪지 않았다면 어떻게 멸절이 죄를 위한 신적 형벌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여호와 증인은 더 일관된다; 그리스도는 공중에 분해되고, 존재를 멈추고, 그리고 나서 다시 영적인 피조물로 부활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멸절주의와 일치하지만, 신약의 가르침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된다.


3. 성경의 오해?

어떤 멸절주의자들의 추리 속에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들은 전통적인 정통주의 견해가 많은 성경 구절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간 상태의 관점 또는 견해에서 말을 하였지만, 그들이 마치 영원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서 미래의 형벌에 대한 진술로서 해석을 하였다고 한다.


이 비평 속에는 어느 정도 진실한 면이 있다. 최종적인 상태의 설명으로서 해석되어졌던 몇 신약 구절들은 미래의 실체라기보다는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적용이 현재 상태를 넘을 수 있는지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면, 계시록의 어떤 부분들은 최종상태의 설명으로 읽는다. 그러나 사실 지구에 있는 교회의 현재 상태와 천국에 있는 교회의 중간 상태로 그려놓고 있다.


눅 16:19-31절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사실 부활 전에 형벌을 설명하고 있지만 최종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것으로 종종 주석되어졌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엄격히 말하면, 이 구절은 최종적인 심판 전의 일이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히 의식을 갖고 있고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구절들이 여기에 덧붙일 필요가 있다.


다른 구절들은 징벌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 일어날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징벌이 영원히 계속될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이 구절들을 읽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이런 구절들의 가르침이 중간 상태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제안하려는 목적으로 멸절주의자들도 읽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신약에서 어떤 구절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마지막 심판이 끝난 다음에 고통을 당하고, 그것이 영원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2:1-16절은 분명히 중간상태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을 염두해 두고 있다. 영생의 즐거움을 그것의 반대인, “진노와 화....노와 분”과 병행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을 존재의 끝으로 설명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마 8:11-12절은 이를 갈고 슬피 우는 것은 마지막 심판 뒤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 슬픔은 구원받은 자들이 경험하는 즐거운 잔치와 병행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시 이 구절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두 가지(슬픔과 즐거움)를 나란히 계속되는 것으로서 보아야 한다.  


계 14:9-11절은 짐승을 경배했던 사람들이 중간 상태를 넘어서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계 20:14-15과 21:8절과 함께 하는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못에서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영원한 고통을 공유한다는 구절들이다. 이것은 회화적인 이상이다. 그러나 이런 실제적인 구절들이 멸절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각 개인을 꼭 대표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구절 위에 지옥의 교리들을 세우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마귀는 분명히 개인적인 인물이고 형별에 대한 그의 경험은 의식적이며 고통을 느끼며 영원하다고 말한다. 불못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은 멸절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중간 상태에서 경험되는 형벌과 최종상태에서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진다. 사실, 무서운 연속성이 있다.


정통주의 기독교인들은 천국과 지옥의 성경적인 설명이 문자적으로 또는 회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한 일치를 한 적이 없다. 존 칼빈과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신학자들은 이 점에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영역에서는 그리고 바르게 일치를 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가 되어서 영원토록 존재하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상태와 연관된 어떤 성경구절들은 중간상태에 대한 반영인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렇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의식이 계속될 것을 확증하는 최종적인 상태의 본질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 또한 멸절주의자들은 증거로서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에 대한 좋은 설명을 하지 못한다.


4. 단어의 의미를 혼동한다?

멸절주의자들은 영벌(永罰)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가 고정된 뼈대의 관점에서 몇 가지 중요한 성경적 표현의 의미를 잘못 읽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한 여러 가지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영원하다는 단어(aionios)가 정통적인 견해에서는 “끝이 없는, 영원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독특하게도, 여기에서 멸절주의자들은 ‘aionios’가 ‘aeonic’를 의미하며, 이것은 ‘기간에 대한 언급이 없는 다가올 세대에 속한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영원하다’는 것은 질을 말하는 것이지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형벌(eternal punishment)(마 25:46)’은 ‘영원히 지속되는 형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세대의 형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물론 끝없는 의식적인 고통도 필연적으로 동반하지 않는다. 다시 영원한 파멸(eternal destruction, 살후 1:9)은 계속되는 파멸을 언급하지 않으며, 다가오는 세대에 적합한 파멸을 말한다. 그것은 파멸이지 영원토록 지속적으로 파멸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극복하기 어려운 반대를 직면한다. ‘aionios’라는 용어는 현재시대와 다가오는 시대 사이의 성경적인 구별이라는 문맥 속에서 신약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신학적 구조 속에서 보면, 다가오는 세대는 정의상 질적인 면에서 영원한 요소를 가진 “영원성”이다.  


두 번째 실례는 많은 멸절주의자들이 “영원한”이라는 단어와 연결해서 사용되는 명사가 끝이 없는 행동이 아니라 영속되는 결과임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영원한 구원”(5:9)과 “영원한 구속(9:12)”이라고 말할 때에, 영원한 상태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지, 계속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막 3:29절에서, “영원한 죄”는 계속되는 죄가 아니라 죄의 의미가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영원한 것은 첫 번째 논증을 채택한 멸절주의자들이 부인하였던 의미들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되어져야 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다음과 같은 구절과 특별히 관련이 있다; ‘영원한 심판(히 6:2), 끊임없는 형벌(마 25:46), 그리고 끝이 없는 파멸(살후 1:9). 여기에서 영원하다는 것은 심판하는 것, 형벌을 주는 것,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주어진 심판, 형벌 그리고 파멸의 의미를 전달한다. 파멸은 단번에 일어난다. 그러나 파멸의 의미가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그때에 두 번째 죽음은 실제적인 죽음이고, 최종적인 멸절이다.


이런 주장들을 들어보면, 논증은 매우 힘이 논리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절의 가능한 의미와 특별한 문맥에서의 실제적인 의미와 혼동을 해서는 안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정지이다. 멸절주의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두 번째 죽음은 멸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견해는 형용사 ‘영원함’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명사 ‘죽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놓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죽음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존재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의식의 중단이 아니다. 하나님과 교제의 분리이다. 죽음의 상태는 존재의 끝이 아니라 교제의 삶의 끝임을 창 2, 3장에서 이미 보아왔다. 구약 학자 Franz Delitzsch는 이것을 아주 잘 표현하였다: “성경에서 죽음과 멸절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멸망”하는 것과 “파멸”은 무슨 뜻인가? 이런 용어의 이해는 그들의 성경적인 용례에 의해서 정의되어야 한다. 보편적인 사용법은 존재의 중단을 전달하지 않고, 전에 갖고 있었던 상태나 조건의 분열이다. 여러 가지 예가 이 점을 증명한다.


마 9:17
여기에서 “터진다(ruined)”는 것은 낡은 가죽 부대의 존재가 아니라, 가죽부대의 능력이 부서지는 것이다.


눅 9:24
여기서 각 개인이 잃어버리는 것(destroy)은 존재가 전혀 아님에 분명하다.


히 2:14
여기에서 없이한다(destroy)는 것은 마귀의 멸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멸절되지 않았다. 실제로 요한은 전 세계가 사단의 손 안에 있다고 말을 한다(요일 5:19). 우리가 보는 것처럼, 계 20:10절은 그가 미래에 멸절되지 않을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가 마귀의 파멸을 말했을 때에, 특별한 영역에서 그의 능력이나 권세의 파멸을 생각한 것이다. 다시한번 파멸(destroy)은 존재의 멸절의 의미하지 않는다.


롬 6:6
이 구절은 우리의 주장을 지지한다. 바울은 죄의 몸이 파멸될(destroy) 것이라고 말한다. NIV 성경은 "세력이 없는(rendered powerless)"이라고 번역함으로서 이 점을 분명하게 하였다.


살후 1:7-9
이 구절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함에 틀림이 없다. “파멸”이 완전한 그리고 온전한 멸절이라고 한다면, “앞에 있는 형용사 영원한”이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도 없다. 두 번째로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라는 것은 그들이 능력을 잃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은 계속되는 의식적인 존재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배제된 존재가 가지게 되는 파멸을 말하고 있다. 존재의 정지를 함축하기 보다는, 이 단어에 대한 성경적인 용어는 존재의 계속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어떤 멸절주의자들은 막 9:47-48절과 동행구절들에서 사용된 실례적인 언어들이 멸절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막 9:47-48]  (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단어들의 배경은 사 66:24절이다. 부패되고 있는 시체에 파리가 알을 낳는 것으로서 심판의 무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알들은 구더기가 된다. 그리고 썩어가는 시체를 먹어간다. 추가적으로 파멸시키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 전통적인 주석은 영원한 고통을 기술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왔다. 사실, 멸절주의자들 이것은 온전한 멸절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불은 태워버리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구절을 지나치게 강조를 하고 있다. 멸절주의자들의 논증은 이 그림을 매우 문자적인 해석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 구절들의 요점은 벌레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먹이와 연료가 계속해서 제공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멸절주의자들의 견해가 은유법을 과장한다고 할지라도, 멸절주의의 주석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5. 불완전한 결론?

지옥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멸절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영원한 지옥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정서적인 어려움 그 이상이다-신학적인 장애물이다. 악한 자의 완전한 멸망은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것과 일치한다.


전통적인 이해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에게 맞지 않는 창조 질서의 면들이 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부활 뒤에, 최종적인 심판이 끝난 다음에, 두 나라가 존재한다. 각각은 분명한 경계선을 갖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자의 것이다. 하나는 선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나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전자는 영원하게 참되고 행복하게 산다. 후자는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이 영영히 비참한 존재를 이끌어간다.  생명과 죽음은 끝이 없이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의 주권에 하나가 된다는 예견되는 성경적인 비전에 영속의 개념은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다고 멸절주의자는 주장한다(엡 1:9-10, 골 1:18-20).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된다는 바울의 위대한 기대와도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전 15:24). 이런 사상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떤 것도 남아서는 안됨을 요구한다. 마지막 세상에는 영속되는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멸절주의는 신학적인 어려움과 질문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에도 답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하나님 자신이 나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서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 그러나 천국에 있지 않고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 사람이 저 밖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즐거워할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신 밖의 영역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신중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멸절주의자들의 견해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좀 더 만족할 만한 그리고 통일성 있는 설명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떤 가정에 근거해서 보면, 멸절주의는 이런 어려움에 좀 더 나은 해결책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여러 가지 사항들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첫 번째로, 성경 그 자체에 있는 모든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들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대신에 우리는 다른 강조점을 발견한다. 천국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에서에 보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뻐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죄를 형벌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벌은 또한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그의 공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악의에 찬 즐거움을 갖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한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결과가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문제들을 야기한다는 암시가 성경에는 전혀 없다.


아마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수 있다. 우리의 타락한 정서가 이와 같은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못할 수 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을 때이기에, 헛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말라고 우리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후 6:1-2). 인간의 죄에 대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심판이 표현되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를 인정할 것이라는 놀랄만한 사실 때문에 우리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는 안된다.


게다가,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의 개념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음으로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큰 실수가 될 것이다; “너는 이런 식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창조주가 멸절을 시킬 것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간에, 가장 두려운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보편구원론주의만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견해) 이런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주의는 예수님도 사도들도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두 번째로, 신약은 “[빌 2:10-11]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을 확언한다.  은혜로 말미암건 또는 공의에 의해서건, 모든 것들이 그의 결백한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정통주의 견해는 마지막 그리고 미래의 세계에 어두운 면이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래에 이 “검은 점”도 마지막 세상에서는 신적 영광을 진열할 것임을 우리를 또한 이해할 것이다.


세 번째로, 예루살렘 성 밖에는 외곽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계 22:15). 이곳은 바깥이고 어두움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슬프울며 이를 갊이 있다. 우리의 신앙에는 신비함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정서가 이것이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우리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공의에 복종할 것을 믿을 수 있다.

 여기에 있는 문제들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에 대한 모든 것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사실, 이런 심판들은 두려운 것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흐릿하며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간다. 우리는 어거스틴처럼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깊음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바닥에 도달할 수가 없다.”  성경 계시는 우리를 보이지 않게 하는 능력을 가진 빛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 신앙의 비밀 중에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지식에서만 해결이 된다. 아직까지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해결책이 없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주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야 하고 기이함을 찬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신 29:29]   (29)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진리들은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목적을 준다. 결과적으로, 이런 주제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단순한 학문적인 관심이 될 수가 없다.


거의 모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영벌 교리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받는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했던 일 때문에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들이다(고후 5:10). 그러나 이런 가르침의 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물어보아야 한다:

ⓐ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구원시켰는가의 관점에서 나는 나의 구원을 바르게 평가하는가?

ⓑ 하나님의 의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죄와 저주를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평가하는가?

ⓒ 저주 대신에 의의 면류관을 내가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르게 평가하는가?

ⓓ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내 이웃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찾고 발견할 수 있도록 내 이웃들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는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한 교리는 지적이고 신학적인 짝을 맞추는 퀴즈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문제의 중압감과 함축적인 의미를 보고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논의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


핸더슨 신학교 임 바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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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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