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2007
한 세기 반 동안이나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는 청교도적 신앙과 생활의 명확하고 설득력있는 표현으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국, 홀랜드 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의 방식을 열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본서를 탐독했다. 또 그들의 열망이 어떠하든지 임마누엘 대학, 라이든 대학, 하버드 대학, 예일 대학 학부생들은 신학개론의 일환으로 라틴어본 「신학의 정수」를 읽어야 했다.
하트포드의 토머스 후커(Thomas Hooker.1586?-1647)는 매우 열정적으로 동료 목회자들에게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와 또 다른 저서를 추천하면서 “다른 저서들을 전혀 소장하지 못하고 본서들만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본서들은 능히 그를 훌륭한 목사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1717년 매더(Cotton Mather)는 임직식 설교에서 목사들의 필독서로 오직 「신학의 정수」만을 추천했다. 현존하는 영역본은 아마도 19세기에 인쇄된 역본일 것이다· 본서가 17세기 초엽에 저술된 라틴어 저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로써 본서가 매우 광범위하게 출판된 저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를 학문적인 논문이 아니라 평신도와 학생들을 위한 유용한 개론서로 저술했다. 본문은 두 권으로 구분되며 각 장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초신자도 특정한 사항에 대해 에임스의 답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본서는 신학적인 점검을 위한 목록 이상의 저서이다. 「신학의 정수」에 의하면 신학은 인간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삶으로 응답하도록 해야 하며 인간들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딛2:12)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따라서 본서는 근본적으로는 청교도적 형태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교본이다.
윌리엄 에임스는 1576년 서포크에 있는 입스위치에서 탄생하였다. 이곳은 동 앵글리아에서 청교도주의가 뿌리를 내린 지역이며 왕권과 주교의 종교적 박해가 가장 비효과적이었던 지역이다. 그의 부친은 청교도 정신에 공감한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신세계에 플리머드 정착촌을 건설하도록 조역했던 가문들과 관련된다.
어린 시절 양친의 사망으로 에임스는 비극을 일찍부터 경험하였다. 삼촌이 윌리엄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그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졌다. 에임스는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 자연적으로 옥스퍼드 대학 대신 당시 청교도 학문의 중심지였던 케임브리지 대학을 선택하였다. 이 대학은 토머스 카트라이트, 윌리엄 퍼킨스, 존 프레스톤과 같은 대가들이 설교와 가르침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에임스는 “땅에서 유리하거나” 구금되려는 상황에서 영국을 떠나 홀랜드로 망명하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610년에 홀랜드에 도착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명성과 갈등, 첫 번째 부인의 사망, 재정적인 불안정, 영국 당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방해를 겪었으며 마침내 1633년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에임스는 1622년 프라네커에서 신학부 교수로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계획대로 미국으로 이주했었다면 아마 하버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최초의 장서는 에임스의 저서들이었다. 코튼 매더는 그를 “심오하고 고귀하고 섬세하고 반박할 수 없는 영국 박사”라고 명명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종 에임스의 사상에서 출발했다. 초기 미국의 신학과 지성사에 있어서 윌리엄 에임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 1 권
1 신학의 정의 혹은 본질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 혹은 가르침이다. 요6:68,영생의 말씀, 행5:20,이 생명의 말씀, 롬6:11,너희도 너희 자신을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신학을 교리라고 지칭한 것은 이를 다른 분야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탐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지시로부터 유래된 분야라는 것을 명기하기 위함이다. 사51:4,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마21:25,하늘로서냐.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요9:29,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갈1:11-12,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요6:45.
다른 학문의 원리들은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내재한 것이므로 감각적 지각, 관찰, 경험, 귀납법을 통해 발전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 하지만 신학의 기본 원리들은 연구와 근면에 의해 발전될지라도 본래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지 않는다. 마16:17,이를 내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종류의 삶은 살아계시며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삶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일치되어 살아갈 때 하나님에 대해 살아가게 된다. 갈2:19-20,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라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행복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이러한 삶의 범위 내에 포함되지만 올바르게 사는 것(유조니아)이 행복하게 사는 것(유우다이모니아)보다 중요하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만족과 관련된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선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사는 행복한 삶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사는 선한 삶으로 정의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삶은 인간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행하게 되는 전인적인 영적인 활동이며, 분명히 인간의 의지와 관련되기 때문에 신학의 고유하며 최초의 주제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잠4:23,생명의 근원이 이(마음)에서 남이니라. 이렇게 의지된 삶에서는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신학이 사변적 분야가 아니라 실천적 분야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신학은 이를 특별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수행한다.
신학은 이러한 최종 목적 혹은 그 목적에 연관된 수단들과 관련되지 않은 어떠한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의 모든 내용은 실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러한 삶의 실천이 신학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고찰되므로, 경제, 도덕, 정치 생활, 법 제정에 있어서 올바르게 사는 것과 관련된 보편적 진리에 대한 교훈들 중에 신학과 정당하게 관련되지 않은 교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학은 모든 학문 중 궁극적이며 가장 고귀한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파송되어 신적인 일들을 다루고 하나님을 지향하며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함으로써, 우리의 최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지침이며 총괄적인 계획이다. 따라서 이를 신학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테오조니아), 하나님을 향해 사역하는 것(테우르기아)라고 지칭하는 것도 부정확한 것은 아니다.
2 신학의 구분 혹은 부분들
신학의 두 부분은 신앙과 순종이다. 딤후1:1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지키고. 딤전1: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시37:3,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동일한 부분들이 아브라함의 신학을 구성한다. 창15:6, 17:1,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스도는 신앙을 넘어서서 그들이 그가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셨다. 바울은 명백히 신학의 정수를 지니고 있는 로마서에서 동일한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구분은 대상의 본성에서 연원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학의 고유한 관심인 영적인 삶의 시작 혹은 최초의 행위가 신앙이요, 두 번째 행위 혹은 신앙의 원리의 작용이 순종이므로, 양자가 신학의 진정한 부분들이며 다른 것들이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도출된다.
율법적이며 노예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구약성경에서는 신학이 때때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전12: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신앙과 순종은 활용되고 행사될 때에는 항상 함께 결합된다. 하지만 이들은 본성상, 그리고 이들을 규제하는 규범에 있어서는 서로 구분된다. 본성의 질서에 있어서도 구분된다. 신앙이 첫 번째 위치를 점하고, 영적 순종은 두 번째 위치를 점한다. 왜냐하면 새 생명의 원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생동적인 행위들이나 삶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신앙
신앙은 심령을 생명과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악에서 구원받고 모든 선을 따르게 된다. 사10:20,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시37: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렘17:7,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믿는다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증거를 승인하는 지성의 행위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지가 감화되며, 의지를 통해 이와 같이 증명된 선을 받아들이게 되므로, 신앙은 의지의 행위로 정당하게 지칭될 수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신앙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요1:12,영접하는 자 --- 곧 믿는 자들에게는.
신앙은 선택행위이며 전인적인 행동이다. 이는 결코 지성만의 행위가 될 수 없다. 요6:35,내게 오는 자는 --- 나를 믿는 자는. 신앙이 항상 복음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지의 행동이 수반된다. 지성과 관련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항상 신적 증언에 의존한다. 하지만 신적 증언은 하나님에 대한 의지의 진정한 전환 없이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요3:33,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롬4:20,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앙은 증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신앙은 그 본성상 어떤 인간적 지식보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신앙은 무오류성이라는 형식적 기초로 그 대상에 인도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다. 딤전4:10,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니라.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 아니라 매개적 대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롬6:11,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고후3: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벧전1:21,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신앙의 진정한 대상은 우리가 선을 추구할 때 우리가 의뢰해야 할 하나님이다. 고전2:2,예수 그리스도 --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의 구원에 주목하는 신적 신앙을 가지려면,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해야 한다. 고전2: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는 이러한 방식으로 신앙되어야 할 모든 진리에 대한 직접적이고 고유한 근거가 된다. 신앙은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 즉 신적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벧후1;20-21,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로되. 또 신앙이 신앙하는 행위를 지시할 때 신앙의 최종적인 근거는 성령의 작용과 내적 감화에 두어져야 한다. 고전12;3,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대해서 믿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게 하는 이러한 신앙은 진정하고 본래적인 신뢰이다. 이는 확신과 기대를 위한 선하고 충족한 수단의 선택과 획득을 지칭한다. 이는 신앙의 진정한 본질이 제시되는 모든 성경 구절에서 언명되고 있다.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앙하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신앙함으로써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충족한 삶과 구원으로서 하나님에게 안식하는 것이다. 신30:20,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신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게 하는 최초의 행위이므로,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대한 승인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더욱이 자신의 비참함과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안에서는 구원의 수단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신앙을 수용하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충족하고 신실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 지성의 승인을 통해서는 이렇게 복종할 수 없다. 이는 오직 의지의 동의로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장차 오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확고한 희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신앙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바란다는 점에서 신앙 자체이다. 어떤 자들은 신앙을 부분적으로는 지성 안에 있고 부분적으로는 의지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타당하지 않다. 신앙은 단일한 덕목이요 항상 단일한 성질로 구성된 행위들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고전 13장.
출처 자기부인...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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