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는 기독교의 비극이다

하나님아들 2017. 12. 6. 23:57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는 기독교의 비극이다

최재석  |  jschoi@cnu.ac.kr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다. 특히 6·25을 전후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경험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70년이 넘도록 북한과 대치하면서 한국교회의 보수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보수적인 자세로 인해서 미국의 근본주의 신앙에 친밀감을 갖게 되었고 복음주의를 바로 근본주의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양산되었다.

현대교회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데에는 현대과학도 한 몫을 했다. 진화론이나 뇌 과학 같은 현대 과학이 전통적인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새롭게 변하는 문화나 과학을 받아들이기를 꺼렸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서 창조과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정치적 상활뿐 아니라 과학에 대해서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보수주의가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북한과의 대치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적인 특수 상황이어서 어느 나라에서보다 한국교회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새로운 신학 이야기를 하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그들을 매도하고 나선다. 그래서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목회 현장에서 활용되지 못하고 연구실 안에 묶여 있다.

그런데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진보적인 삶을 가르치는 교회가 보수적인 자세를 고집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한국교회는 보수화했다. 그래서 소외된 자들을 품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면서도 그 가르침이 진보적인 줄을 모른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에서는 새로운 신학을 말하는 사람이나 진보라는 용어를 입에 담는 사람은 눈 밖에 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보수에 치우친 한국교회를 위해서 존 스토트의 『균형 잡힌 기독교』(새물결풀러스, 2011)를 소개하려고 한다. 스토트는 그의 저서가 20여 권이나 한국어로 번역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자다. 그는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큰 비극은 ‘양극화’라고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지성과 감성, 보수와 진보, 형식과 자유,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차례대로 다루면서, 이 대립적인 네 영역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말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 언급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귀 기울여야 할, 보수와 진보의 균형에 관한 글을 정리하여 소개하겠다. 이 글은 내용 그 자체가 좋지만, 이 글이 교인들을 위한 강연을 그대로 옮긴 것이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현대 교회에 불필요한 두 번째 양극화는 보수와 진보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각각의 용어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합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사람, 즉 어떤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반기를 들고 급진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저는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고문 자격으로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저는 어느 신문에서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을 즉각 몇 부류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간 경멸하는 투로 보수주의자나 수구주의자, 현상 유지자, 고리타분한 전통주의자, 그리고 열렬히 환영하는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진보주의자 등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구분입니다. 균형 잡힌 기독교인이라면 양쪽 진영 모두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보수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계시를 지키도록, 즉 “부탁한 것을 지키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딤전 6:20; 딤후 1:14). 또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하셨기 때문에 보수적이어야 합니다(유 3). 교회의 임무는 새로운 복음, 새로운 신학, 새로운 윤리, 새로운 기독교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고, 오직 하나의 영원한 복음을 충실히 수호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에 보존된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로 이미 완성된 것이며, 이것은 진리나 권위에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보수주의를 성경적인 신학에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질상 보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치나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자신들의 삶의 양식, 패션스타일, 헤어스타일, 수염 모양 등 갖가지 것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갖습니다. 그들은 단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온갖 변화를 금기시합니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이란 기존의 질서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전통이나 관습, 어떤 제도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것도 신성시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산을 비판적으로 철저하게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철두철미한 비판은 전면적인 개혁, 심지어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는 “문화 충격”이라는 말의 병행어로 “미래 충격”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는데, 그는 그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미래 충격이란 빠르게 변하는 미래로 인해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미래 충격은 앞으로 가장 무서운 질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어떤 변화에도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변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변화를 환영하며, 변화에 적응하며, 심지어 변화를 이끌기도 합니다.

얼핏 보기에 보수적인 사람들과 진보적인 사람들은 서로 반대될 뿐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보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진보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그분의 태도는 분명 보수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 10:35),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그들이 구약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의 신적 권위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질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진보주의자였습니다. 그분은 유대교의 기성 체제를 주저하지 않고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순종하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들을 과감하게 버리셨습니다(막 7:1-13).

또한 예수님은 사회적 인습을 폐지하는 데도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시에 허용되지 않았던 여인들과의 공적인 대화도 서슴지 않으셨으며, 또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그분은 또 접촉해서는 안 될 한셈병 환자들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간의 관습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의 마음과 양심을 매어 두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보와 보수를 결합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그분에게 충성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교회에 더 많은 급진적 보수주의자들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변화시켜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비판적으로 분별할 줄 아는 복음적인 기독교인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신조나 계명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계시 또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움직이시며 자신의 백성을 새롭운, 모험으로 가득 찬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과 문화를 더 분명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화는 교회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 예술적 창조물의 혼합체일 뿐입니다. 문화가 가질 수 있는 권위란 기껏해야 교회와 공통체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그것은 개혁 혹은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문화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를 성경적인 잣대로 끊임없이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적 변화에 분노하거나 저항할 것이 아니라, 이런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더 진실하게 표현하고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급진적인 변화를 제안하고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약 이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 기독교는 그 기간만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루터교회, 성공회교회, 장로교회, 감독교회, 형제교회 등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형태입니다. 여기에는 교리뿐 아니라 예배 의식이나 음악, 예배당이나 장식, 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 출판이나 홍보, 목회와 전도방법 같은 사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에 의해 정기적으로, 비평적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만약 우리가 교회나 사회에서 변화를 거부하려고 할 때, 우리가 변호하려는 것이 성경이 아니라 교회 전통이나 문화적인 유산은 아닌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전통이 그저 전통이기 때문에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배척하려는 사상은 전통이기 때문에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사상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며 때로는 위험합니다.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전통이 성경적 비평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통에 특별한 권한이 주어져서는 안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변화를 원할 때, 우리가 반대하려는 것이 성경인지 아니면 개혁되어야 할 전통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약 그 전통이 명백히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최소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무조건 변화를 거부해서도 안 되며 변화를 무조건 지지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를 이용해 무분별한 전통파괴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교회 역사는 역사(歷史)의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役事)를 믿는 기독교인에게 변화를 위한 변화를 좋아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묵은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눅 5:39). 그것은 시간의 시련을 견뎌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지켜 온 것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의해 쉽게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 비추어 지혜롭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물려받은 과거의 유산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반응할 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교회와 사회의 모든 문화에 과감한 성경적 비판을 적용할 수 있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 더 나은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저는 변화만을 추구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서 뿐 아니라,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기독교적인 잔소리꾼도 필요하고, 우리가 비성경적인 진리와 타협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요란하게 꾸짖는 기독교적 감독관도 필요합니다.

잔소리꾼과 감독관이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소리꾼은 감독관을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되고, 감독관도 잔소리꾼을 업신여겨서도 안 됩니다. 이 둘은 교회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양쪽 모두 서로의 임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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