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스크랩] "새내기 목회사역자들을 위한 아홉 가지 실질적 권면"

하나님아들 2017. 10. 6. 18:38

"새내기 목회사역자들을 위한 아홉 가지 실질적 권면"

 

 

 

                                                                                                                              류호준 목사

 

01. 여러분들이 섬길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언제나 인격적으로 대하셨고 또 지금도 그러시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교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십시오.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된 목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여러분들의 목회성공을 위해 동원되는 필요한 ‘도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꿈꾸는 목표나 이루려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마땅히 있어야하는 연장이나 도구처럼 사용하거나 이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그들의 관계는 마르틴 부버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나와 당신’의 관계여야하지 ‘나와 그것’의 관계여서는 아니 됩니다. 주체와 대상, 혹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될 때 비로소 인격적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인격적 주체가 여러분들이 섬길 사람입니다. 목사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 훈육을 통해서, 목자의 애정을 담은 돌봄을 통해서, 그들이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교인들 역시 목사들의 그런 사역들을 통해 자신들이 그들의 목사들에 의해 진심으로 사랑받고 돌봐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야할 것입니다.

 

02. 어느 정도는 기꺼이 잃어버릴 각오도 하십시오.

모든 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욕심입니다. 어느 정도는 잃어버릴 준비도 되어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꿈꾸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다 성취하겠다는 발상은 목적 지향적, 성취 지향적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사역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조직체를 이끌어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직체이기 이전에 유기체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료계에서 흔히 하는 말처럼, “수술을 성공했지만 사람은 죽게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사실이 교회에서도 현실화 될 것입니다. 교회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조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위한 목회,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회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을 위해서라면 목사는 언제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목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리더십을 허락해야합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그러면 혈압도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03.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슬픔과 비통함을 고귀하게 여기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겪는 비애와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슬퍼하십시오.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기술자들처럼 슬픔이나 고통을 ‘고치려’ 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목사들은 말하는 연습보다는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마 신학교에서 잘 배우지 못한 것 중의 하나는 ‘듣는 기술’입니다. 아니 ‘듣는 예술’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인 중 한 명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고 슬픔가운데 있을 때, 허황된 위로나 권면으로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좋은 의도로 시작을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적(神的) 위로나 권고를 준다고 본인은 생각하겠지만 그런 것은 오히려 화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목사는 인간적 얼굴을 갖는 목회자가 되어야합니다. 욥이 울부짖으며 하늘 궁정에 계시는 하나님께 따지려고 돌진하였을 때, 그의 친구들이 입을 다물고 침묵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더라면 그들은 욥의 진정한 친구들이었을 것입니다. 간혹 어떤 목사들은 어려운 일을 당해 괴로워하거나 슬피 우는 교인들을 향해 그들의 문제를 ‘수선’하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차라리 가만히 있거나 그들의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해주는 신학자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어 우는 목사입니다.

 

04. 조언과 충고를 기쁘게 받으십시오.

교회에서 여러 가지 모임을 인도할 때 혼자만 마이크를 독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항상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목사가 말을 하면 “설교 하시네”하고 말을 할까? 침묵할 기회가 있으면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자신만이 모든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자기기만과 아집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은 전문가이고 교인들은 비전문가라는 잘못된 생각은 나중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담아 들으며 그들에게 기꺼이 조언을 구하십시오. 물론 다른 사람의 충고나 조언을 듣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경고나 권면을 무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아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아들에게 훈계와 설교와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른 채 한참 설교 중이었는데, 아들이 하는 말, “아버지, 지금은 강의 시간이 아니에요. 대화하는 시간이에요.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지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아닙니다. 교수는 말하고 학생은 듣지만, 부자지간에는 그렇지 않아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강의에 익숙한 직업병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는 선생과 학생사이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거나 남편과 아내사이의 관계여야하며,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는 신뢰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통해 때때로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조언과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05. 비판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한 가지 비판을 하기 위해 열 가지 칭찬을 하는 방법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때론 무차별적으로 비판을 퍼붓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비판을 많이 삼켜야 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사전에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약을 많이 먹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비판할 때, 그 비판을 친절하고 부드럽게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비판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 비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그것을 따지려 들지 마십시오. 진실은 언제나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셨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비판 받는 일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두려움 뒤에는 상당부분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열등감의 발로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06. 충격을 흡수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목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이 그렇듯이 신앙생활도 역시 항상 교과서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들과 사건들 치열한 충격들이 오거든 되받아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말고 당신의 온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정규적으로 십자가 밑에 풀어놓으십시오. 무엇인가 강하게 다가오거든 여러분은 그것을 한 걸음 뒤로 물러가며 부드럽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충격이 훨씬 감소될 것입니다. 충격 흡수 장치가 잘 되어있는 운동화를 신으면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고 오히려 건강에 유익합니다. 좋은 자동차일수록 도로면에서 오는 충격을 최소화하여 실내의 안온함과 편안함을 유지해줍니다. 대형기계일수록 ‘충격흡수’(shock absorber)장치는 더더욱 필요한 법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삶의 무거운 충격이나 무게를 감당하려면 그것들에 대해 저항하지 마십시오. 강하게 저항 하면 할수록 부러지거나 무너져 내립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받아들이십시오. 비행기가 착륙할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무거운 쇳덩어리가 새처럼 하늘을 날다가 땅에 내릴 때 말입니다.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대형 비행기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나 착륙할 때는 부드럽게 착륙해야합니다. 일명 ‘연(軟)착륙’(soft landing)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활주로와의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승객의 입장에서 착륙하는 것을 거의 느끼지 않을 정도라면 그 비행기의 조종사의 착륙기술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일 것입니다. 또한 급정거함으로써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이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얼마동안 활주로를 따라 달려갑니다. 비행기 착륙을 신앙생활, 특별히 목회생활에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거친 말(馬)일수록 부드럽게 다루어야합니다.

 

07. 목회사역이외의 삶도 가지십시오.

이 말이 요즈음 젊은 목회자들에게 적용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목회자상은 아직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던 시절의 목회자들입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분들은 오로지 소명 하나에 자신의 온 삶을 다 바치려는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한 목사님들이었습니다. 교회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목회하였던 분들입니다.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논길, 밭길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걸어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 거립니다. 연약한 노인이나 병든 교인들, 시험에 들어 삐딱해진 영혼들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을 떠올리며 “목회사역 이외에도 삶을 가지십시오” 라고 호소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호소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목회자들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종류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위에 언급한 옛날 목회자들처럼 목회에 목숨을 거는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나 사시(斜視)적인 목회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목회에 ‘올인’(all in all)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번 끝장을 보겠다는 강한 집념과 각오로 목회에 임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볼 때 이런 사명감에 충만한 사역자는 마땅히 찬사를 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한번 나도 성공해야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깔려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넉넉한 마음을 상실한 인간적 열정주의의 발로인지도 조사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무대로서 목회를 바라보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로지 앞을 향한 전진만 있고, 모든 것들은 그들이 꿈꾸는 계획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 동원되어야할 도구들일 뿐입니다. 이 도구들에는 자기가 섬겨야할 교인과 가족들까지 포함됩니다. 교인들은 목회사역의 목적이어야 하는데 그 사역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역자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동원하게 됩니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선동이 되고, 교인은 도구화 되어 갑니다. 목회 자체는 ‘비인간적 왕국 프로젝트’가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사역자들의 조바심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어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안절부절 하게 하고 조급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런 사역자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권면합니다. 성공해야겠다는 조바심과 강박관념을 던져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일화를 들어보십시오. 1522년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설교했고 연구하고 글을 썼을 뿐이다. 그 외에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글을 쓴 후에 나는 잠을 자거나 아니면 내 친구들인 필립과 암스톨프와 함께 한가롭게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황제나 왕도 감히 약화시킬 수 없었던 교황의 절대적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렇다.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모든 일을 다해냈다." 이 말은 루터가 맥주에 관해 가장 멋지게 표현 한 구절 가운데 하나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신앙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주석입니다. 루터는 단순히 씨를 뿌린 농부일 뿐이었습니다. 씨가 그의 입에서, 그의 펜에서 떨어져 나간 후에, 그는 그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친구들과 어울려 편안하게 지내었습니다. 씨는 스스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씨는 루터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씨는 루터의 열심과 분주함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 사람들이 개종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은 루터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고 자라게 된 것은 루터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새 생명을 창조한 창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면서 설교단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시며,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즐겁게 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회사역 말고도 삶의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들의 꽃들을 감상하고, 자녀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들과 가끔 외식을 해보십시오. 아내나 남편과 산책을 하거나 여유가 있으면 간혹 여행을 떠나보십시오. 일중독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여유와 성실의 균형, 휴식과 일의 멋진 리듬을 타게 될 것입니다.

 

08. 당신이 하는 일에 진정으로 어깨를 함께할 협력자를 찾으십시오.

광야 길을 가는 외로운 여행자에게 동반자가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은 없을 것입니다. 동반자는 친구이며 동무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친구라는 말보다 동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어릴 때 함께 먹고 놀고 지내는 친한 아이들을 ‘어깨동무’라고 부릅니다. 또한 어깨동무하다는 말은 팔을 어깨에 얹고 나란히 서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어 관용어에도 어깨동무하다는 것은 “힘을 합하다,” “마음을 합하다”(一心)는 뜻입니다. 길이 없는 광야를 지나가는 두 나그네가 있다고 합시다.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마음을 합하여 간다면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행복한 여행이 될 것입니다.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같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두 마리의 소를 연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마음을 하나(一心)로 묶다”, “어깨를 같이하다”, “힘을 합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교회애서 목사와 장로들은 같은 명에를 메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한 겨리의 소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먼저 장로님들과 동역하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그들도 목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함께 일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을 견제하는 사람이나 목사의 라이벌로 보지 말고 동역자로 생각하십시오. 물론 장로들 역시 목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목사들 가운데 간혹 들리는 말은 “목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장로들의 기선(機先)을 제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조직폭력배적 사고에서 나온 말입니다. 활동 영역이나 영토를 넓히기 위해 혹은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서로 경쟁하는 두 조직 파벌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온갖 계획을 다 꾸밉니다. 그러나 목회자와 장로들의 관계가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이 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목회자와 어깨를 같이 할 사람들은 장로들뿐 아니라 교회의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아내나 가까운 친구들이나 동료 목사들로부터도 영적 도덕적 정신적 지원을 받으십시오.

 

09. 목회사역을 즐기십시오.

목회(牧會)는 말 그대로 목자가 양떼를 이끌고 초원을 다니면서 먹이고 누이고 보호하고 돌보는 일입니다. 푸른 초원에서 양들이 풀을 뜯어 먹으면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목자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흡족해 합니다. 물론 항상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몹쓸 들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들짐승들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일을 한 후에도 즐거움과 기쁨을 느낍니다. 일종의 ‘피곤한 즐거움’ 말입니다.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물려오는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목회하는 일에서도 그런 보람을 느낄 때 비로소 목사는 자신이 소명에 적합한 사람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하십시오. 마지못해서 하거나 혹은 억지로 한다면 부작용은 자신에게뿐 아니라 회중들에게 나타납니다. 즐기면서 하게 되면 일 때문에 찾아오는 피곤함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얼굴에는 언제나 피곤한 즐거움이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을 선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 그 때가 가장 좋은 순간이든지 아니면 가장 비참한 상태였던지 상관없이 - 깊이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는 사실은 목사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특권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부분, 영원까지 이어지는 삶 속까지 참여하도록 초청받겠습니까? 목사는 그들의 삶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겪는 고민과 좌절, 탄식과 갈망을 목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그리스도께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목사는 교인들을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도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사역을 즐기십시오. 정말로 즐거운 일입니다. 매주일 누군가에게 최상의 음식을 준비하여 준다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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