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으나 그중에 많은 신학자들이 실패하였거나 또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인식하였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며 또한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시지 아니하시고 인간이 알아야 할 만큼만 알려 주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완전히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본래 오늘날과 같이 격조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에덴동산을 함께 거닐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성은을 입었었다. 물론 그때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지 못했으나 현재와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가려지고 감추어지게 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배반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한 후부터였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만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인간과의 관계를 지속하시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을 부여하셨으며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배려를 전제로 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1) 1) 성령의 조명하심 하에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조명하심 하에서 학력, 지혜, 등등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인식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없기 때문에 학력, 지혜, 등등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2) 2) 하나님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 하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 지식, 지혜, 등등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비 진리로서 이단이 된다. 기독교를 빙자한 이단들이나 비 진리자들이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범주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여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필요로 하거나 또는 요구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다만 존재하시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신학<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입각하여 영접해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으로 영접해야 한다. 신학<하나님의 말씀-성경>의 증거와 선포를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고 불신하며 불만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고 불충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부를 때에 사용한 명칭들은 <엘>과 연합된 명칭들로서 < 엘리욘. 엘 솨다이. 엘 올람. 엘 벧엘. 엘 로이. 엘 브릿. 엘 엘로헤 이스라엘. 엘로힘. 엘로하> 등등이었다. 엘이란 명칭은 본래 셈 어 족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신의 이름이며 또한 신들 중에 최고의 신으로서 <피조물의 신> <인류의 아버지> <신들의 신> 등등의 의미를 가진 신이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엘> 또는 엘과 연합된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하신 것을 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시어 신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히브리어의 <엘>을 번역하여 <데오스-θεὀς>로 사용하였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야훼-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선언하셨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확실하게 반영하는 명칭이다. 스스로 존재한 자 이상의 능력적 신은 없으며 스스로 존재한 자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며 최고의 오직 유일한 신으로서 모든 것을 섭리한다는 의미가 압축된 이름이 곧 <야훼-스스로 있는 자>인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不敬>이라 하여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 고재판하다, 지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아도나이>로 의역<意譯>해서 사용하였다. 훗날 70인 역 성경은 <아도나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퀴리오스>로 하였다. 야훼가 여호와로 명칭 변경된 것은 유대교 신학자들인 <맛소라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본래 고대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었다. 따라서 야훼는 <הזהי- YHWH>로 표기되었는데ꔘ맛소라 학자들이 히브리어 모음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아도나이-יꔷꕌꔣ>>에 대한 히브리어 모음을 야훼<הזהי > 자음에 붙여 여호와<הꕳꕜꖾ>가 되었다.
한편 한국 기독교는 오직 유일하신 한분이라는 의미에서 <야훼-여호와>의 이름을 <하나님>으로 부른다.
하나님의 이름은 원칙적으로는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사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삼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망령되게 부르고 있다. 아무 곳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적용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장난스레 부르거나 농담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불법을 저질러놓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 저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또는 경제력이나 탁월한 수완 같은 것들을 통하여 얻어진 불법적, 위법적, 탈법적, 편법적 등의 불의한 유익이 하나님의 은혜요 강복하심이라고 말하면서 예물을 드려 감사한다. 또 어떤 자들은 심지어 도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나 뇌물 같은 것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으로 알고 자랑한다. 이와 같은 몰염치한 행동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으로 매도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는 망령된 것으로서 형벌 받아 마땅한 행악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 하나님 무지하게 웃기셔> <우리 하나님 참 재미있으셔> <우리 하나님 실수 하셨어> 등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나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 특히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섭리 주이시며 통치 주이시고 심판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는 절대로 적용되어져서는 안 되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다.
또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함에 있어서 <데오스-θεὀς>를 생략하여 첫 자인<θ-델타>로 표기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 방자한 태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표기하듯이 그렇게 대충 표기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나 피조물들의 그것과는 구별되어져야 하며 실제로 구별되어져 왔다. 히브리인들은 ‘야훼’ 하나님을 직접 부르지 아니하고 ‘엘’과 연관된 이름으로 부르거나 ‘아도나이’란 호칭으로 불렀으며 문자로 표기할 때에도 매우 조심하였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성경을 기록하는 자들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목욕하고 기도한 후에 그 이름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이름은 함부로 불려질 수 없는, 존귀하고 위엄 있는 것이며 또한 아무렇게나 대충 표기되어질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임을 명심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예의를 다하고 섭리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예의를 다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예의를 다하여 정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한 표기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진행이시며 결과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한 무<無>에서 자존<自存>하셨고 완전한 무<無>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모든 것을 경영하시고 통치하신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로서 창조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경영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서 통치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45:9>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1>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말할 때에 “속성”<attribut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바람직하지 못하다. 속성이라는 용어는 인간에게 사용되어지기 적절한 용어로서 하나님에게 적용하기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성”<properties>이라는 용어가 더욱 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성이라는 용어도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하게 증거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때에 속성을 사용하지 않고 특성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어차피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그것과 완전하게 구별하는 방법은 되지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속성이나 특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 하기는 하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그것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드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비공유적 속성은피조물에게는 전혀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속성으로서 자존성, 단순성, 무량성과 같은 속성을 말한다.
(1) 하나님의 자존성.
하나님은 어떤 근거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존재<자존> 하심으로서 우주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위치와 자격을 입증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존성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신학적 의미로 논증되어졌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말 할 때에<하나님은 자 기 자신 안에 자신의 근거를 가진다.>라고 말함으로서<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원인>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자존성에 적합하지 아니하다. 그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마치 하나님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음으로 하나님의 자존성이 필연적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실상 그 어떤<자기 자신을 포함한>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논증 할 때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자존적 실유>인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자존하심은<자기창시_self-originated>를 의미하는 자 존성<aseitas>이란 용어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실유 자체에만 묶어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관계되는 다른 모든 것에게도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자존성을<하나님의 독립성>이라는 신학적 용어로 대용하였고 하나님의 독립성을 하나님의<덕, 작정, 사역> 등에도 적용시켰다.
하나님의 자존성은 야훼라는 이름을 통하여 선포되어지고<출 3:14>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증거 함에서도 선포되어지며<요 5:26>
만물과의 관계를 증거 하는 <시 94:8; 사 40:18; 행 7:25>과
하나님의 사상에 대한 증거인 <롬 11:33,34>과
하나님의 의지를 증거 하는 <단4:35; 롬 9:19; 엡 1:5; 계 4:11>과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시 115:3>과
하나님의 계획을 증거 하는 <시 33:11> 등을 통하여서도 선포되어진다.
(2) 하나님의 완전성.
하나님은 모든 면 모든 부분에서 완전무결하시어서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없다. 하나님의 부족함이나 지나침은 하나님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그것은 피조물들로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못한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다음과 같은 분야를 통하여 증거 되어진다.
① 하나님의 불변성.
하나님은 완전하심으로 당연히 불변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하심으로 또한 모든 면에서 불변하실 수밖에 없다. 절대완전 자로서의 하나님에게는 개선, 개수, 보완, 보충, 보결, 퇴진, 퇴보, 등과 같은 추가조치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함에 있어서 몇 가지 유의하여야 할 것이 있다.
첫째 :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부동성<immobility>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더 이상 우주만물 위에 간섭하지 아니하시며 그 모든 것들이 자력에 의하여 운영되어지도록 하셨거나 또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운영되어지도록 하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을 움직이지 아니하는 우주의 방관자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주만물이 당신의 섭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운행되어지도록 창조하셨다. 우주공간을 가득 메운 수많은 행성들이 어딘가에 전혀 매달려 있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질서정연하게 운행되어지고 있음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운행되어지고 있는 자체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우주만물이 자체적으로 생산과 소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오늘과 같은 발전적 역사를 이루어온 것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운영되어지는 자체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부동의 자세로 계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전지하심에 의한 예정에 따라 결정되어진 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하심에 있어서 때로는 종들을 사용하시어 역사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시어 역사 하시면서 우주만물 위에 영원히 살아 역사 하신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해 나갈 때에는 관람주의 입장에서 흐뭇한 눈길로 그 모든 것들을 즐기시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해나가지 아니할 때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시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전개되어지도록 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의치 아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때에는 직접적으로 사건에 개입하시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대로 전개되어지도록 조처하시는 것이다.
둘째 :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어떤 결정이 절대로 변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성이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전지성만을 붙들고 늘어짐으로서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적으로 변경되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때때로 마음을 돌이키시고 공의로 다스리기로 결정한 자들을 용서하시는 변함을 보여주신다<출 32:10~14; 욘3:10> 결국 하나님의 변화는 하나님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과의 관계론적 차원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 같은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비롯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의 능력, 진실, 거룩, 무한, 무량, 등 하나님의 실유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주권적 섭리와 하나님의 약속과 같은 것들의 불변함을 뜻하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무한성.
하나님은 어떤 근거에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여 시공간과 사상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등을 총 망라한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미 존재했던 것과, 현존하는 것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들>의 영원한 근원이 되었음으로 참으로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시어 어떠한 것들로부터, 어떠한 제재도 결코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계산이나 측량을 결코 허용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영원히 한계를 정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③ 하나님의 무량성.
하나님의 무량성<Immensity>은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으로도 불리어진다. 그러나 무량성과 편재성은 구별되어져야 한다. 무량성은 하나님이 과거, 현재, 미래, 등의 모든 시공간적인 것들의 제한이나 제약들로부터 자유 하시어 그것들을 초월하심을 말하는 반면에, 편재성은 하나님이 그의 전 실유로 공간의 매 부분을 전혀 빈틈없이 채우심을 말한다. 즉, 무량성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선포하며 편재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무량성<초월적>과 편재성<내재적>은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되어있다.
하늘과 땅은 그를 포함<용납>할 수 없으며<왕상 8:27; 사 66:1; 행 7:48,49> 동시에 그는 하늘과 땅을 채우시며 언제나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다<시 139:7~10; 렘 23:23,24; 행 17:27,28>
따라서 하나님의 무량성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내재성을 동시에 의식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량하신 임재를 말함에 있어 몇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첫째 : 하나님의 임재를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에 무수하게 흩어져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실유를 수 없이 많은 개체들로 오해할 수 있게 하는 범신론적 사상이다.
둘째 : 하나님의 임재를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임재 하시지만 하나님의 실유 전체로 직접 임재하시지 아니하고 우주만물에 다만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임재 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실유를 우주만물 위에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 섭리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하는 자연신론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량성을 말할 때에 다음과 같은 결론적 개념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 미래, 현재, 등의 시간이나 우주의 행성들이나, 전 우주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 인간, 심지어는 유기물 무기물, 미생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우주 만물들이나 그러한 모든 것들의 생각, 의지, 사상, 개념, 정신 등의 혼이나 영적인 모든 부분에 전혀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실유 전체로 빈틈없이 내재하시며 동시에 그러한 것들로부터 완전하게 자유하시어 그들로부터 전혀 초월하여 임재하신다.>
④ 하나님의 영원성.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개념으로만 정의하는 경우가 있다. 저들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시간과의 관계로 대비할 때에 영원하심이라는 성경의 증거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영원성을 정의한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는 경우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시 90;2; 시 102:12; 엡 3:21>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것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적인 것에 한정시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제한시키는 죄악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것은 물론이요, 과거에 존재하였던 모든 것들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나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적으로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질”과 “량”적으로도 영원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 피조와의 관계에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영원히<무한히> 적용되어져야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적인 영원하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과 “량”의 영원성<무한성>을 말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영원성이 정확하게 정립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공유적 속성은 인간들에게도 어느 정도 유사함이 있는 속성으로서 능력, 선, 자비, 등과 같은 속성을 말한다.
(1) 하나님의 인격.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인격적인 임재였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고 또한 인격적인 약속을 맺으시며 인격적인 예우로 사람을 대우하신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증거 되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이야기나, <눅 15:11-32>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인격적으로 예우하시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격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순전하시는가?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것 중에 최고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빌립을 통하여 하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선포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요 14: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성.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상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최대의 관심사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인류의 초미적인 관심사에 언제나 냉담하다. 하나님의 실존 상태를 가장 가깝게 증거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영이시라-요 4:24>이다. 신학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이 명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성>을 정립하고 가르친다. 초대교회 시대의 그노시스 주의자들이나 중세시대의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현대자유주의자들 중의 일부들은 하나님에게 실체적인 신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신체로 존재하시지 않고 영으로 존재하신다. 성경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 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 지어다-딤전 6:15-16>
성경이 하나님의 손, 발, 눈, 입, 코, 귀,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격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실유를 오해할 수 없게 하기 위한 일련의 조처일 뿐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을 인간과 똑같은 성분의 실유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상하거나 괴상한 실유로 묘사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적 실유를 말함에 있어서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다.
첫째 : 불가시적인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의 실유 자체를 하나의 이데아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분명한 실유로 존재하며 성경은 그것을 확증한다. 아담이 타락하여 하나님께 징계 받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창 3장>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실유를 인식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실유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의 실유를 직면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완전한 영적 상태를 회복하였을 때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고전 13:12>
둘째 : 비물질적인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의 실유 자체가 실체로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분명한 실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져질 수 없는 영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현대적 오류들.
현대 기독교는 지도자들의 신학적 무지와 편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왜곡하고 오류 시켰다. 현대 기독교에 만연되어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오류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 심각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율법적 하나님 강조.
보수주의 정통 기독교를 자부하는 목회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근엄하심과 공의로우심에만 연연하여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징계의 하나님>으로만 선포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저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전혀 도외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들도 때로는 사랑의 하나님을 선포한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주로 심판의 하나님 징계의 하나님과 같은 율법적인 하나님을 강조하여 성도들이 사랑의 하나님은 기억하지 못하고 두렵고 무서운 율법적인 하나님만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예배<특히 주일 낮 예배>에 불참하거나 또는 헌금<특히 십일조 헌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추상같은 호령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선포한다. 이러한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은 결국 사랑의 하나님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심판하는 하나님 징계의 하나님과 같은 두렵고 무서운 율법적인 하나님만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만 실수하여도 하나님께 징계 받으리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게 되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각종 예배에 불참하게 되면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전전긍긍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율법적인 하나님을 강조하는 일부 목회자들 중에는 성도들이 회개할 때에 반드시 속죄의 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할 때에 속죄의 헌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결국 성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나 교회봉사를 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적 차원에서 하지 아니하고 두려움과 의무감, 또는 책임의식 같은 것들에 의하여 행하며, 특히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것을 헌금<물질 내지 돈>으로 해결하려는 신앙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하지 못한 채 항상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며, 한숨과 비탄에 잠겨 눈물로 간구 하고 용서를 갈구하는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우러러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기쁨과 평안,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신앙적 삶을 살지 못하고 슬픔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의 신앙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복음적 하나님 강조.
징계와 심판의 율법적 하나님을 강조하는 목회자와는 달리 오직 복음적인 하나님만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저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오직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강복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십자가상의 대속제를 통한 용서를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 그리고 심판과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종결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강복의 하나님, 복음의 하나님이실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은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 현재의 죄는 물론이고, 미래의 죄까지도 낱낱이 용서하여 주셨으며 택한 자의 죄에 대해서는 추궁도 책망도 징계도 심판도 면제하신다는 용서의 원리를 함부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성도들은 죄와 무관함으로 죄에 대한 개념에서 완전히 자유하며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된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에 일반인들과는 신분이 다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죄 같은 것에 매달려 살면서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자신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유대인에게까지 소급한다. 저들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비극은 하나님의 심판과는 전혀 무관한 민족적인 것이요, 국제적인 정치 문제라고 결론 내린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지고하신 사랑의 속성 때문에 비록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중한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을 징계할 수 없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의 원리상 유대인들에게 형벌을 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하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오직 사랑의 하나님 강복의 하나님으로만 인식하여 죄에 대한 개념에서 지극히 자유하여 죄의식이 전혀 없는 방종스러운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으며 심지어는 하나님께 농담조차 하는 불경스러움을 보이기조차 한다.
(3) 방관하시는 하나님.
자유주의신학자들 중에 방관하시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제반사에 일일이 간섭하시고 관여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는 모든 피조의 세계가 자연의 섭리대로 진행되게 하셨으며,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후에는 그 문제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시고 간섭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구원문제를 비롯한 현세적인 길흉화복은 인간들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여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서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려는 생각은 하나님께 너무 염치없는 것이며 나태하고 무책임한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야하며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아니하는 것들에 대하여서만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바른 신앙적 자세라는 것이다.
(4) 성경의 증거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 저들의 주장대로 거룩하고 공의로우시고 근엄하시기만 하여 성도들의 잘못 하나 하나를 일일이 책망하시고 형벌주시며 회개할 때에 반드시 예물을 요구하시는 율법적인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자녀들의 모든 잘못을 일체 묵과하시고 오직 사랑과 자비와 긍휼만을 베푸시며 강복과 은총과 보호하심만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후에 남은 문제를 인간에게 일임하시고 인간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만을 때때로 해결하여 주시는 가운데 인간들의 행동여부에 대한 결과에 따라 심판하시는 방관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먼저 성경의 증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① 공의로 훈계하시고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언어행동을 할 때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훈계하시고 책망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돌아서지 아니할 때는 적절한 징계를 내리신다. 이것은 자녀의 행동을 미워하여 진노하심이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리시는 공의와 사랑의 조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자녀가 바로 서고 바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자녀들이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벋어나는 행동을 할 때에 그와 같은 조치를 내리시는 것이다.<잠 3:11; 6:23; 13:24; 22:15; 렘3:19; 30:11; 고전 11:32; 고후 6:9>
②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위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의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자녀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신다. 과거의 잘못은 물론이고 현재의 잘못과 심지어는 미래의 잘못까지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하신 용서는 철저한 회개를 요구한다.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예정과 선택하심에 의하여 결과 되어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자복의 철저한 회개가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 이전에 이미 세례요한을 통하여 회개를 재촉하심으로서 이와 같은 원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자녀들을 향하여 여전히 회개를 촉구하신다.<시 7:12; 마 3:2; 눅 13:3; 5:32; 13:3; 15:7; 막 1:4; 1:15; 행 2:38; 11:18; 13:24; 20:21; 26:20; 롬 2:4; 고후 7:10; 딤후 2:25; 히 6:1; 계 2:5; 2:21; 9:20,21; 16:9>.
물론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상에 있어서 죄인이 아니고 의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죄에 대한 법률적인 문제이고, 행정적인 문제이지 현실적인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현세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죄인<원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죄에 대한>인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일상적인 삶 속에 있는 죄에 대한 회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 있어서 성도의 회개는 의무적인 것이나 책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윤리요, 도덕이며, 효심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영원히 도말하여 주시고 일체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신다 하여 자신의 신분이 의인이라고 호언하면서 일체의 잘못에 대한 면죄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질 수 없는 망상이며 망언이며 망동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히려 더더욱 죄의 길에 서지 아니하려고 노력함은 물론이요, 비록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죄라 할지라도 빛과 소금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로서의 책임 의식과 의무감에 의하여 철저하고도 진솔한 회개가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가 내려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가 뒤따른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자녀들의 아픔과 괴로움에 연민의 정을 갖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 하고 민망스러워 하는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심으로서 위로하여 주시고 자애롭게 다독여 주심으로서 자녀들의 부끄러움과 슬픔을 달래어주시어 자녀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시 49:15; 사 49:13; 51:3; 마 5:4; 막 2:5; 눅 2:25; 행 20:12; 롬 3:24; 고후 1:4; 2:7; 7:6; 7:13; 살전 3:7; 4:18; 히2:18; 10:10>
③ 기쁨과 강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현세를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각종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각양각색의 다양한 복을 내려주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진 복을 누리며 사는 자녀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도 또한 기쁨을 누리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복이 현세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강복은 현세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미래적인 것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 더욱 크고 놀랍다 .현세적 강복은 하나님 나라의 강복에 대한 작은 예표에 불과하다. 반면에 현세적 강복은 때때로 하나님 나라의 강복에 대한 장애적 요소가 될 때도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현세적 강복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자녀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실적인 것이 더욱 다급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한 자녀들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당장 시급한 현세의 문제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매달리게 되고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게 되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거나 불만을 품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경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더 큰 행복을 위하여 그들의 간구를 외면하실 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녀들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선포한다<마 6:7-11>. 따라서 자녀들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는 절대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녀들의 기도를 외면하시며 때로는 오히려 약간의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이 아니라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하신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보다 큰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자녀들이 보다 성숙한 신앙적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때때로 자녀들에게 약간의 고난을 주시고, 자녀들이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밀접하게 하시는 것이다<롬 8:17,18; 고후 1:5; 4:16-18; 빌 3:10-11; 벧전 4:13>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헤아려 자신의 고난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차원의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⑤ 끝까지 모든 것에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공하신 후에 그것들을 인간들에게 내어 맡기시고 수수방관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공하신 분으로서 그 모든 것들이 인간들에게 적용되어짐에 있어서 모든 책임을 홀로 지시는 하나님이시다. 특히 자녀들의 삶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시어 사소한 문제 하나조차도 배제하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보살펴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모든 것에 개입하시어 독재하시며 간섭하시고 잔소리하시어서 자녀들을 귀찮케 하신다거나 또는 자녀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독선에 일일이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녀들을 무능하게 만드는 것이요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요 무용한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녀들을 위축시키거나 낙후시키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함께 하시되 자녀들이 자신의 지혜와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결과들을 창출해 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의 각 영역을 조명하시면서 은밀하게 유도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자녀들이 정도와 순리에서 벋어나게 되거나 또는 어떤 위기에 처하게 되어 자녀들의 신상에 불의 한 사태가 발생할 여지가 있을 때에는 즉각, 그리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어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녀를 사랑하시며 자녀를 위하여 자녀의 편에 서신다. 따라서 성도들의 불행은 언제나 임시적인 것이며, 그 불행 뒤에는 더 크고 화려한 아름다운 결과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하여 준비되어져 있는 것이다<사 43:1-3; 54:10; 렘 323:40; 마 18:12-14; 요 6:35-40; 10:27-30; 17:11-15; 롬 5:3; 고전 1:7-9; 고후 4:6-17; 4:14,17; 12:7,9; 살전 5:23,24; 딤후 4:18; 빌 3:10>
(5) 결론.
지금까지 상고한 바대로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 함에 있어서 율법적인 하나님만을 증거 하지 아니하며 또한 복음적인 하나님만을 고집하지도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방관하는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 함에 있어서 율법적임과 동시에 복음적이신 하나님을 증거 한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 근엄하시고 준엄하시되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단호하시고 엄격하시되 부드럽고 따뜻하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으로 자녀들의 잘못을 단호하게 다스리시되 자녀에 대한 사랑하심과 하나님 자신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의하여 관용과 자비로 용서하시며, 자녀들의 불의를 준엄하고 근엄하게 훈육하시고 징치 하시되 자녀를 향하신 애틋한 사랑으로 긍휼과 은총을 베푸시어 위로하고 품어주심으로서 자녀들의 고통과 슬픔과 부끄러움 등을 달래어주시고, 자녀들에게 각종의 강복을 허락하시어 그들이 기쁨과 평안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자녀들의 일신은 물론이요, 그들의 영원한 삶까지도 영원히 책임지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앞에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리는 충성과 순종의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본래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은 서로 상반되는 대립적 관계를 이룬다. 기독교 신학은 공의적인 것으로서 날카롭고 절대적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으로서 명령적으로 주어졌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순종만을 요구하고 명령한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신학으로부터 정립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자비, 긍휼과 용서, 온유와 화평 등등의 온유한 인격과 품위를 형성하면서 너그러움과 원만함과 부드러움과 따뜻함 등등의 실천 신앙적 삶을 영위한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의 절대적 법으로서 오직 순종만을 요구하고 명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신앙이 율법적인 절대적 신학에 상반되는 사랑과 자비, 긍휼과 용서, 온유와 화평 등등의 온유한 인격과 품위를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자비를 양립시키시어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를 공존하게 하시지만 당신의 섭리 역사를 진행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공의를 초월하는 자비를 베푸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의를 초월하는 자비를 베푸실 때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시되거나 생략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공의를 집행하시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성립하신 후 자비를 베푸심으로서 공의 하에 놓여 있는 피조들에게 용서와 긍휼과 사랑을 통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http://www.제자훈련교회.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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