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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묵시적, 성령론적 종말론 | - 종말론

하나님아들 2017. 6. 10. 00:46
바울의 묵시적, 성령론적 종말론 -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1. 머리말

바울은 다른 서신보다 고린도전서에서 종말론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 서신의 서두에서 그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종말론적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나타냈다(1:7). 그는 그들의 현안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할 때에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종말의 빛에서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7:29, 31). 특히 1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사람의 부활, 그리고 몸의 부활 같은 종말론의 주요 논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성령에 대한 논의도 종말론의 빛에서 조명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종말론에 집중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울이 그의 종말론을 전개하는 자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현실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상상해 보는 자리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열광주의자들과 맞서고 있는 자리이다.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스스로를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신령한 것에 참여하는 데 몰두하여 현실의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으며, 종말적 소망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묵시적 종말론을 완전히 폐기하고,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15:32),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6:12; 10:23), 하는 식의 쾌락주의를 교회 안에 퍼뜨렸다. 바울이, 신도 가운데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람까지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고 개탄한 것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5:1).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부정한 것이다(15:12, 35). 이것은, 종말적 소망 가운데서 이 세상의 어려움을 견디며 이겨나가는 신도들로 하여금, 흔들리게 하고, 주님의 일을 할 의욕을 잃게 하고, 그들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15:58 참조).

바울은 이와 같은 열광주의자들의 영향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존립 근거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는 열광주의자들이 폐기한 묵시적 종말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내림의 빛에서 새롭게 확립하려고 한다. 동시에, 열광주의자들의 이러한 사고는 그들의 잘못된 성령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바울은 종말론의 문제를 그의 성령 이해와 관련시킨다. 열광주의자들은 심령적·내면적 성령 이해에 빠져서 종말론을 무효화시켜 버렸지만, 바울은 역사적·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의 기초에서 종말론을 철저하게 확립하고 있다. 그는 성령의 임재의 빛에서 종말론을 새롭게 조명하고, 또한 종말론적 전망에서 성령의 은사 문제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 글에서는, 바울이 제시하는 이러한 묵시적, 성령론적 종말론의 논점을,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죽은 사람의 부활'과 '몸의 부활', 그리고 '종말론적 성령 이해'에 대한 그의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바울의 묵시적 종말론


계몽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묵시적 종말론의 요소들을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속하는 대표적 해석학을 세 가지 들면, 첫째로, 역사-비판적 자유주의에 의한 신화의 제거 작업(demything), 둘째로, 불트만 학파에 의한 비신화화(demythologizing), 셋째로, 다드에 의해서 유행된,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해결이다. 자유주의적 해석가들은, 묵시사상적 틀을, 바울 사상의 핵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장식적 껍데기로 간주하여 벗겨내려고 하였다. 불트만은, 껍데기와 핵심을 취사선택하는 이러한 자유주의 해석학이 독단적인 방법임을 규명하였다. 그는, 바울 사상 전체가 묵시사상적-신비적 세계관 안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모든 바울의 사상은 재해석되고 비신화화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신화화 작업은 실제로는 묵시적 요소들을 개인 실존의 차원에서 해소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묵시문학적 전망은, 역사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학과 관계된 것으로 설명이 되었다. 불트만에 따르면, 바울이 장래에 관해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관해서,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해서,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의 영화에 관해서, 묵시문학적인 상상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진정한 축복은 의요, 그와 함께 하는 자유다. 그는 축복의 관념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고, 축복의 상태는 이미 현재한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이, 바울에게 나타나는 묵시적 요소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고 중요하게 다루려고 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그가, 바울의 묵시적 종말론에서 역사적 핵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그것을 비정치적인 종말론, 또는 개인의 실존과 관계된 어떤 소망으로 떨어뜨린 것은 문제이다.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해석에서 그렇다.




2.1 죽은 사람의 부활


영지주의적 사고에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플레로마(Pleroma)'로 흡수되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물질적인 몸을 벗어버리는 영적 자아의 천상적 상승이 된다. 헬레니즘계 유대교나 후기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것은 죽음 이후의 개개 영혼의 불멸성과 동의어가 된다. 불트만에게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가올 새 세대로부터 분리될 때, 그것의 우주론적 측면은 개별화되고 영성화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시간적 측면도 영혼의 "사후" 불멸성으로 떨어진다. 그는, 바울의 종말론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현재"로 한정시키며, 바울의 묵시사상을 거절한다. 종말론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인한 순수한 인간의 진정한 가능성이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심리 내적 혹은 실존주의적 사건으로, 즉 세계 안에서의 새로운 자기-이해로 떨어진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인식으로 변하며, 따라서 사건으로서 그 특성과 그 시간적 묵시사상적 근거를 모두 상실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부활(고전 15:12-34)에 대한 바울의 논의는 그런 묵시적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하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묵시적 종말론을 거부하면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부정한 자는, 바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적대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영-육의 이원론에 빠져서 몸을 천시하고 영의 불멸성을 추구한 열광주의자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두개파 사람들과 같이, 부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부정한 것은 종말에 있을 부활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마지막 부활은 일어났으며, 자신들은 지금 여기에서 마지막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개인의 심령이나 내면에서 성취한 부활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망의 근거가 되는 바, 고난 당하고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나, '몸의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진정한 해방으로 여겼으며, 지금 여기에서 그 신령한 영에 참여하는 것을 구원으로 믿었다.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15:32)는 그들의 말은 종말론을 제거해 버리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그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한 마디로 집약해 준다. 그 특징은 내일이야 어찌 되든 오늘은 즐기고 보자는 쾌락주의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하는 허무주의이다. 그들에게서 묵시문학적 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또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바라는 희망도 어리석은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없다'는 그들의 구호는,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선취의 표현이다. 그들은 묵시문학적인 부활 희망에 반하여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죽음의 실체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의 종말에 있을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개개인의 영혼이 죽은 다음에 즉시 하늘로 옮겨진다는 교리로 바뀌게 된다.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이러한 주장을 물리친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전파한다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15:12). 그리고 나서 바로,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13, 15, 16절). 이런 이례적인 반복에서, 그가 이 말을 얼마나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논리적 따진다면, 같은 내용의 말을 어순을 바꾸어서 반복하는 순환논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사람의 부활, 이 둘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입증해주고 그것에 종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죽은 사람의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열광주의자들의 비묵시적, 비종말적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모두 소용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핍박을 받고 죽은 사람, 지금 고난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그는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종속시키지 않고, 같은 지평에 둠으로써, 묵시적 종말론은 영지주의적 그리스도론에 흡수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그는, 억울하게 고난 당하고 죽임을 당한, 그리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는 자포자기나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그들이 반드시 신원되고, 보상받고, 권리를 회복하는 종말을 대망할 수 있게 하려 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없다. 내일 죽으면 그만이니, 먹고 마시자" 하고 선동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15:32-33).




2.2 몸의 부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옵니까?" 하는 바울의 인용문(35절)은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에는 그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부정함과 동시에 몸의 부활을 부정했음이 암시되어 있다. 그들은 몸을 천한 것으로 여겨서 영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부활로 이해했으므로 그 천한 몸을 부활 이후에 들어갈 천상의 세계에까지 가지고 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보였을 것이다.

바울에게서 '몸'은 그런 천한 신체의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격을 가리킴을 밝힌 사람은 불트만이다. 그러나 그가 몸을 전체 인격으로 보는 한 철저히 개인의 몸을 생각하는 것이다. 케제만은 불트만이 자기에게 소외되어 있는 인간 이해를 바울에게 덮어씌웠다고 비판한다. 그는, 불트만이 몸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현대의, 특히 칸트적인 사고의 눈, 곧 '자아'는 세계로부터 고립될 수 있고 따라서 그 자신의 통제와 처분에 맡길 수 있다는 사고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인간학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케제만은, 바울에게서 몸은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과 갖는 연대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서로 서로 교통하고 관계하는 수단이다.

몸의 부활은 죽음의 순간과 관계가 있다거나, 그것은 분명한 개별적 자아로서 우리의 생존을 보증하는 것이라는, 현대적 사고로써 바울의 글에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그리스나 후대 서구 사고에서와는 반대로, "'몸'이 함축하는 것은 개별화가 아니라 연대성이다." 부활한 몸은,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세계의 연대성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하는 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부활 소망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그래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역사적이다. 그것은, "몸으로부터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씨앗이 땅에 심겨서 새로운 몸으로 나타나는 것에 비유한다(15:36-49). 여기에서 바울은,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난다고 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 '신령한 것'을 뚜렷하게 대조하고 있다. 이런 용법을 두고, 바울이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받아들여서, 신체적인 것을 부정하고 신령한 것을 추구하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유로써 죽은 사람의 부활에서 나타날 몸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 비유에서, 죽은 사람이 땅에 묻히는 것과 씨앗이 땅에 심기는 것 사이의 유사점을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씨에서 나온 새로운 몸이 무형의 몸이 아니라 볼 수 있는 화려한 것이고,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의식했을 수 있다. 그가 이 비유로써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몸을 떠난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몸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대조를 하면서도 '자연적인 것'을 조금도 천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 비유의 결론 부분에서,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15:46). 이 구절은 바로 앞에서 열거한 긴 대조의 내용과 잘 어울리지 않게 어색하게 끼어 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유와, 적용 부분의 긴 대조를 이런 식으로 곡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넣은 것이다. 신령한 것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라고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신령한 것에 몰두하여 공동체를 세우는 현실의 과제를 망각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영지주의적 종말론에 쐐기를 박는 것이다.




3. 바울의 성령론적 종말론




3.1 바울의 종말론의 정치적, 공동체적 의미


유대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이 세대, 즉 지금의 역사의 때가 끝난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예수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전제하면서도 현재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에 역점을 둔다. 이 점에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유대 묵시문학의 종말론과 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거나, 그 근저에 있어서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서는, 이 드라마의 주역인 메시아가 이미 나타났으며, 앞으로 전개된 모든 일은 그가 주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스(Geerhardus Vos)는, 전체적으로 바울의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본적인 성격에서 유대 묵시문학과 다르다고 한다. 첫째로, 바울의 종말론은 비정치적이다. 그의 종말론적 구조에는 지상적이고 잠정적인 메시야 왕국의 여지가 없다. 이교에 대한 바울의 공격은 엄격히 종교적인 것이다(롬 8:1 이하). 멸망당할 큰 세력들은 "죄"와 "사망"이다. 그것들에 대한 승리는 "은혜"와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롬 5:17, 21; 고전 4:8). 바울의 종말론은 유대교의 종말론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다. 바울에게서는 특히 종교적인 관심이 주도적이다.

그러나 바울의 종말론, 특히 파루시아와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그의 논의는 비정치적, 개인주의적, 종교적 관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공동체적, 현실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쾨스터(Helmut Koester)가 이 점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살전 4:13-18을 중심으로 해서 파루시아와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논의가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문제와 관련된 것임을 밝히고, 특히 그것은 당시의 사회 상황에서는 뚜렷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음을 밝힌다.

그에 따르면, 죽은 자들의 운명에 관한 논의는, 주님이 오실 때에 공동체가 어떤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공동체의 관심사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바울은, 살전 4:14a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고 하면서 전통적인 신조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나서 이어서 14b에서, 그 신조의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기대를 인용하는 대신에, 그 문장을 이렇게 고친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언급을, 죽은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로 대체한다. 여기에서 바울의 관심사는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관심사, 즉, 죽은 사람들은 파루시아 때에 우리와 함께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는 가운데 그들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논의된 문제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있을 것인가?" 하는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죽은 사람들은 주님이 오실 때 그를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인가?" 하는 공동체적 문제이다.

쾨스터는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바울이 사용한 몇 가지 종말론적 용어들이 정치적, 공동체적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이를테면, 파루시아 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구절(살전 45:17)에서, '아판테시스(apantesis, 영접)'라는 용어는 바울이 도입한 것이며, "도시를 방문하기 위하여 도착하는 왕이나 다른 고관에 대한 축제적이고도 의례적인 영접을 묘사하는 전문 용어"라고 밝힌다. 그것은 주님이 오실 때에 그를 영접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서술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는, 황제가 방문하러 올 때 그를 마중 나가서 영접하는 도시의 대표단처럼 그렇게 주님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는 것"도 신비한 묵시적 언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전문용어의 영역에서 취한 것이라고 본다. 분명히 그 용어 자체는 신화적이지만, 바울은 이 논점에서 그 어떤 특정한 묵시적 전승도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신화적인 언어가 세속적 영역의 지평을 넘어 설 수 있도록, 또한 주님과의 종말론적 만남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본다. 그리고, "평안하다, 안전하다"(eirene kai asphaleia, 살전 5:3)는 구호도 묵시적 언어의 문맥에 두기 어렵다고 본다. 그것은 "도시의 안전"이나 "안전한 행위"와 같은, 협정이나 약속, 혹은 강력한 방어에 의해 보장받는 안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사용된 정치적 용어 또는 정치적 슬로건이며, 로마 제국의 선전 방식에서 연유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바울은 주님의 날의 도래를 로마 체제의 거짓 평화와 거짓 안전을 산산조각 내는 사건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날의 급작스런 도래를 두려워해야 하는 어떤 집단이 아니다. 살전 5:1-3이, 그 제국의 "평안과 안전"이 "주님의 날"의 급작스런 도래로 산산조각이 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믿는 사람들에게서, "그 날"은 공동체 안에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존재하는 가운데서 실현된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진다. 그들의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살전 1:3) 속에서, "낮의 자녀" 또는 "빛의 자녀"는, 미래가 현재의 실재가 되고 있는, 새로운 종말론적 공동체의 건설자들이다.

쾨스터가, 공동체와 관련한 바울 종말론의 현재적 의미에 치중한 나머지 바울의 종말론에서 묵시적 요소들을 해소시켜 버리는 것은 문제이지만, 바울의 종말론이 공동체적,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임을 밝힌 점은 옳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데살로니가전서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논의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종말론이 현재 시련을 겪고 있는 공동체를 위로하고(살전 4:18),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 정치적,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는 것인 한, 그것은 그의 성령 해석과 관련된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열광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신도들의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와, 그에 따른 일탈된 삶의 행태가 공동체의 존립 근거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종말론적 요소가 없는 점이다. 바울은 그의 성령 해석을 종말론적 지평 위에 세움으로써, 이런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의 영향으로 생긴 문제들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3.2 약속으로서 성령


바울이 그의 성령 해석을 종말론적 소망과 연관시키는 것은 그가 구약성서적 전통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구약성서, 특히 포로기 이후의 예언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다. 요엘서에서는 다가올 종말의 날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두루 부어지는 환상이 나타난다(2:28-31). 구약성서에서 영은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 실질적인 것의 징표이다. 바울이 선교하던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의 환경에서 이런 구약성서적, 종말론적 성령 해석이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같은 헬레니즘 세계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누가 기자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보도에서, 바울의 종말론과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령의 종말론적 강림에 대한 환상이 오순절 사건에서 성취된 것으로 본다(행 2:16-21). 그는, 파루시아가 지연되고 교회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상황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요엘서의 이 부분을 베드로의 설교에 포함시키는 형식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때를 "마지막 시대"로 이해하며, 성령을 역사적 실재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점은 갈라디아서에서 잘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성령의 활동은 특별한 역사적 시기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시대에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복을 주기로 약속을 하셨으며(3:16), "기한이 찼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으며(4:4), 그들이 자녀가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다(4:6).

바울이 종말론을 그의 성령 해석과 연관시키는 것은 성령과 관련하여 그가 사용하는 몇 몇 전문용어들에서 잘 나타난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성령의 보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1:22; 5:5), 여기에서 '보증'이라는 말은 후에 지불할 것을 약속하는 의미에서 내는 1회분 분할금을 의미한다. 그것은 완납을 앞두고 있는 상태나 완납을 약속받고 그 가운데 일부를 받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비슷한 의미로 '첫 열매'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롬 8:23). '첫 열매'가 유월절 의식에서 사용된 용어임에 반해 '보증'은 그리스 도시의 상업 용어이다. 후자는 상업이 발달한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며, 전자는 유대사람들이 많은 로마 교회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러나 둘 다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열광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무질서하게 방언으로 말한 것이다(고전 14).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바울에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고후 13:3). 이러한 잘못된 행태와 요구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의 선물은 종말적 구원의 완전한 성취나, 그 성취를 눈에 보이게 입증해 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장차 풍성히 거둘 것의 첫 열매, 또는 앞으로 온전히 받을 것의 보증금 또는 계약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성령을 받은 사람의 삶은 미래에 온전히 성취할 삶을 선취(先取)하고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성령론의 이러한 종말론적 특징은, 그가 성령을 '약속'과 동일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육신을 따라서 태어난 아들'과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 아들'을 대조하고, 이어서 '육신에 따라 난 사람'과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대조함으로써, 성령을 약속과 동일시한다(4:23). 그는 '성령의 약속'이라는 용어도 사용하는데(3:14), 이것은 성령을 주시기로 한 약속을 뜻한다. '성령'과 '약속'은 동격 관계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약속'은 '약속된 성령'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바울은 성령과 관련된 이러한 종말론적 용어들로써, 성령을 받은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을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종말적 구원을 미리 맛본 사람들이며, 그리하여 지금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임을 역설하고 있다.




4. 맺음말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고전 15:19).

이 한 마디는, 초대 교회 사람들이 가진 종말론적 소망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형편과 처지로 보면, 그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이 한 마디에는, 그들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건 것이 아니기에 절대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고난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났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좋은 날도 보지 못한 채 고난만 겪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고 아직 살아서 고난을 겪고 있는 그들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살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 살아난 "첫 열매"가 되셨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며, 그 다음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소망(고전 15:20-24) 때문에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살 수 있었고, 바울의 경우에는, "날마다 죽는" 삶을 살 수 있었다(30, 32절).

이 소망이 있는 한 그들은 절대로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바울의 묵시적 종말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의 부활과 몸의 부활 문제를, 이미 지나간 일이나, 죽은 다음에 천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지금 여기에서 고난받는 공동체의 종말적 소망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내림의 빛에서 조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살전 5:10-11).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롬 13:1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고전15:58).
출처 : 하나님 내가 누구죠?
글쓴이 : 隸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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