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14대민(주일낮)
*바라는 것(고전15:16-20)
세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어린이들은 장난감을 바라고 청소년들은 용돈을 바라고 청년들은 애인을 바라고 장년들은 성공을 바랄 것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끝없이 바라는 것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칭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를 받아서 말했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않으면 그나마 한 방울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이 때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챤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시각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같은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도 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엣 것만 바라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진정한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잠시 잠간입니다. 세상의 즐거움도 괴로움도, 기쁨도 슬픔도 잠깐 후면 지나가고 없어집니다. 잠간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마음을 두면 반드시 낙망하는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요동하는 것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환경을 바라보면 흔들립니다. 요동치는 파도를 보고 흔들려 빠져가던 베드로처럼, 세상을 바라보면 넘어집니다.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식시장에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 내리락 하는 주가를 보면서 희비가 엇갈리는 것처럼 마음의 중심이 흔들립니다.
더군다나 오늘의 현실을 보면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는 사회의 현상과 삶의 고달픔으로 말미암아 자기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묻지마 살인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혼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세상의 현실은 안개가 자욱한 길과 같습니다. 언제 어떤 사건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날지 모르겠습니다. 혼란과 불안에 쌓여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봅시다. 라고 강력하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봅시다 라는 말은 ‘현실을 잊어버리자,’ ‘현실에 무책임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현실에 대한 자기의 입장과 견해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안을 가지신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도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는 성도들이 가장 불쌍한 자로 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을 다 버리고 교회에 헌신과 봉사하는 우리의 모습들 이 그들이 불 때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비춰진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땅의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 곧 부활 생명입니다.
성도는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저주스러운 것도, 끝이 아닌 것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고 강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은 아무리 큰소리치며 살아도 삶은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비밀을 알고 믿을 때, 분명한 것은 이 부활생명을 확신하는 성도는 이 땅의 것이 별 유익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세상 사람들처럼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아도 기쁨과 평안으로 춤추며 살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있을 부활을 확신하며 이 세상이 참으로 어려울지라도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는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1.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을 조작설, 기절설, 환상설로 왜곡하고 부활의 역사성을 실존적 의미로 변질시키는 자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가진 신비입니다.
인류 역사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랍고도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사망을 정복하시고,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지 못한다는 것은 불변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자연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권능을 믿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24:25-26)" 즉 선지자들의 말을 믿었더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마땅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례 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무거운 돌을 굴려 무덤을 막고 거기에 왕의 어인을 찍고 철저히 야간경계를 강화하였습니다. 이 같은 로마 당국과 군병들의 무지행위는 하나님의 아들을 죄로 어두워진 피조물 인간이 돌무덤 속에 가두는 행위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빛이시므로 어둠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므로 사망에 갇힐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소망이시기 때문에 절망 가운데 갇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의가 되시기 때문에 불의에 매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의 돌무덤에 머물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창조주이시므로 피조물에 갇혀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모든 종교는 서로 같다는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시대의 인본주의적이며 무신론적 사상의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세계 4대 성인 중의 하나로 알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던 게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새 생명과 새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으로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에 그는 죽음에 머물 수가 없고 다시 사셔야 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어느 종교들처럼 누구의 사색이나 사상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기독교는 논리나 학설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의 결정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도행전2장의 마가 다락방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 지역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마가다락방에 성령이 임함으로 교회가 시작되어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말은 예수께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마가다락방에 성령으로 임한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리라는 약속대로 사도행전1장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하신대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교회 역사를 본다면 틀림없이 예수님께서 부활 한 사실임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사건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한번 죽으면 끝이지만 예수님은 죽으실 뿐만 아니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마가 다락방에만 아니고 지금도 모든 믿는자 속에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심과 인간의 죄가 얼마나 비천한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허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구한 설명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사건 현장이 그대로 완전히 보존된 것을 성경대로 보고 믿고 증거할 따름입니다. 이 사건 위에 설 때 우리의 가슴은 뜁니다. "할렐루야! 예수 부활하셨다!"는 짧은 한 마디가 우리를 기쁨으로 소생하게 합니다. 예수 부활하셨다는 이 말씀이 어두운 세상에 소망과 확신을 줍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구약의 예언성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구약성경 예언의 성취입니다. 고린도전서15장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 예언의 중심입니다. 구약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이 거의 예언되어 있습니다. 미가서5장2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과, 스가랴11장12-13절에는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은 30냥에 팔릴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 외친 ‘엘리 엘리 라막다니’라는 말씀도 시22편에 예언되어 있고, 이사야53장9절에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12장40절에는 예수님께서 선지자 요나의 사실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도 시편16편10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호세아6장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 수도 없이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예언한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분명히 부활하신 것을 믿으시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며 부활을 바라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예수님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부활 하셨고 그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다면 우리는 의심없이 우리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찾아 불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분명이 성경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부활에 대한 관심은 적어지고 부활 신앙은 흔들리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오늘 우리 시대의 부활의 의미가 왜 퇴색되고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많이 현실의 것을 누리고 살고자 애쓰기 때문에 부활을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입니다. 불확실한(?) 믿음보다는 현실을 실컷 즐기며 살자는 태도입니다. 세상살이, 채움, 욕구에 급급하니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부활 신앙의 중요성이 퇴색되는 또 한 가지 이유 중에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복제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과 똑같은 자신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낳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자를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겠다는 발상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역행하는 행위이며, 더불어 부활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죄악된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부활신앙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죽음을 벌로 생각했던 우리의 모습을 벗어버려야만 부활신앙의 회복이 가능합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그 어떤 절망도, 죽음이라 할지라도 극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절망은 여전히 절망이요, 죽음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비록 소망을 가졌어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어도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죽은 자만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부활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큰 절망에서 기독교 신앙이 꽃피워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을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생명은 빈무덤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도라 하면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성도가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13절에 “만일 죽은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하였습니다. 또한 19절의 말씀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분명한 말씀을 주는 구절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신약의 모든 약속은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도 다 무산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삶의 자세는 부활신앙입니다. 순교하고, 절제하며, 고생하고, 혹은 스스로 자기를 버리며, 봉사하는 전부가 부할 사건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땅에서 욕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 가서 영광을 누리 것이요 땅에서 다 빼앗겼어도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것이요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먹을 것 못 먹고 마실 것 못 마시고, 세상 사람들은 다 빼앗느라고 힘을 쓰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느라고 애쓰고 이렇게 살다가 갔으니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내세관은 부활 신앙 위에 있습니다.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끔은 교인들 중에서도 부활신앙만을 예외로 생각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기독교의 골자는 부활입니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특별히 대학교수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젖은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리 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로지 부활 신앙 입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위에서 부활 신앙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의 어느 장군에게 부활 신앙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특별히 좀 포악한 장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전도를 받고서 하는 말이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니 나는 예수를 안 믿겠소"하더랍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인 사람들이 다 살아난다고 생각하니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전부가 허구입니다. 자유, 평등, 선, 진리, 사랑, 인내, 등 무슨 이야기를 해도 부활의 없으면 거짓말입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참아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빼앗아도 모자라는 세상에 남을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말로도 부활 없이는 진리와 의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모르는 자가, 진리, 믿음, 선이니 하고 부르짖는 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도덕, 윤리는 꽃병에 꽂아 놓은 꽃입니다. 뿌리가 없기에 생명이 지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서의 많은 증언 속에 예언들의 성취 속에 살아 계십니다. 부활의 사실과 증언들 속에 살아 계십니다. 기독교의 증언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와 신앙고백들과 간증 속에 살아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기는 어머니의 최후의 유언속에 사형수의 최후의 참회와 고백 속에, 과학자의 입에서, 어린이의 입에서 진실속의 진실에서 신앙고백이 되는 예수님은 사랑 속에 살아 있고 원수들의 미움 속에도 살아서 역사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백만의 순교자들 속에 살아 게십니다. 성도들의 생애와 성화된 삶 속에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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