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변화된 삶(행3:1-10)

하나님아들 2016. 6. 2. 16:16

2008.09.28대민:주일낮

 

*변화된 삶(행3:1-10)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출산하자 마자 소리를 지르며 우는 것도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어머니 뱃속으로 되돌려 보내달라고 호소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가 출생하자마자 꼭 안아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환경에 변화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변화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형상·성질등이 달라짐입니다. 변화란 새로움의 추구 현상의 결과입니다. 가구의 위치를 바꾸고 장식을 달고 환경을 개선하는 일들을 변화를 주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령의 변화도 있습니다. 마냥 무기력하게 살고 있던 사람이 어떤 자극을 받아 심령이 변화되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도 변화가 제일 느린 곳이 있습니다. 교회와 학교와 군대와 공직사회입니다. 변하지 않으니까 어렵습니다. 교회도 정말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데 도무지 변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를 알아보려면 변화하고 있는가? 변화를 하고 있지 않는 가를 보면 압니다. 살아 있는 것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변화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텅 빈 공간을 아름다운 우주 공간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흙을 가지고 멋진 남자로 변화시켰고 딱딱한 갈빗대를 가지고 부드러운 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팔려간 한 소년을 이방나라에 총리로 만들었고 양치는 목동을 임금으로 변화시켰고 무식한 어부를 유능한 제자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창녀가 새 사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원하면서도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인간변화라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듣기 좋은 말 가운데 하나가 "변화되었다" 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 젊은 집사님이 담배를 끊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집사라는 사람이 담배도 끊지를 못한대서야 체면이 서질 않는다고 생각한 끝에 고심하다가 금년 여름휴가를 기해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철원에 있는 모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자기 생각엔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고 담배를 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가도 이틀이 가도 남들 다 받았다고 날뛰는 성령도 못받고 담배는 여전히 피고 싶어서 숲속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담배를 피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피우긴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처량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왕에 결심하고 올라온 걸음이니 도중에 내려갈 수도 없고해서 다시 도전하기로 하고 기도중 갑자기 “내버려라 내버려라”는 음성이 들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뭘 내버리라는 걸까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져보니 바지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 있더랍니다. 그는 변화를 원했지만 옛것을 버리지 않고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꺼내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바위 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한탄강 물과 함께 떠내려간 담배갑과 라이터처럼 그의 희미하고 흔들렸던 지난날의 신앙생활도 함께 떠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그에게 찾아 왔고 그는 찬송하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날부터 담배냄새만 맡으면 구역질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여 변화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새로이 원기를 회복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않은 채 일상의 활동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배터리를 재충전하듯 음식을 먹지 않고 오래 버틸 수는 없습니다. 일터에서 기민하게 활동하며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주말의 휴식이 필요합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를 늘 새롭게 만들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소진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늘 인식하면서 늘 새로운 변화의 힘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삶의 변화를 가져온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겉모습과 마음이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도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변화를 추구하여 더 나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지 본문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변화를 기대해야 합니다.(4-5)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듯이 사도들에게도 구걸을 합니다. 그것은 그의 생활이고 습관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비전은 한사람에게서라도 더 많은 동정을 받아 많은 것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말할 때에도 이 걸인은 조금 많은 구제 정도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구제하면서 온갖 생색을 내려하는 사람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구를 보느냐, 무엇을 보느냐는 진실로 중요한 일입니다.

날마다 아래를 보면서,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가 기대하는 금과 은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 걸인의 요구는 한 푼, 또는 두 푼의 동정을 바라는데 반해, 사도들은 금과 은으로 대변되는 그가 바라는 물질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를 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제하려고 할 때에, 돈이 없어 못한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돈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가 무엇을 얻을까하여 사도들을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여 바라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즉 5절 말씀을 보면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이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기대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앉은뱅이는 여러 해 동안 이 성전 미문 앞에서 많은 사람에게 가련한 몸짓으로 동정을 유발하는 눈짓으로 구걸하였습니다.

간절하게 구걸은 했지만 그 결과 잘 해야 차가운 동전 몇 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했을 때 그 거지는 뭔가 큰 것을, 뭔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한국 6.25 전쟁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미국 군목 참호마다 뛰어다니면서 격려하면서 기도인도하였습니다. 한번은 한 참호에 들어가니 거기에 흑인병사가 있었습니다. 군목이 물었습니다. "기도할 제목이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드릴까요?" 그러자 흑인 병사가 말합니다. "제게 기도할 제목이 있어요. 저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전쟁터에서 내일을 볼 수 없는 병사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삼중고로 인생을 살았던 헬렌켈러에게 한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여사께서 참 여러 가지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는데 그래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헬렌켈러 여사가 대답을 합니다. "볼 수 없는 것은 답답한 일이지요 그러나 두 눈뜨고 내일을 볼 수 없는 사람보다는 훨씬 낳지요" 】

무엇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큰 힘이 생겨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삶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기도의 제목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10장46절-52절에는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바디매오란 소경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바디매오를 부르신 주님께서 묻습니다.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바디매오가 확실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가 즉시로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늘 눈을 떠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소경의 삶에서 보는 자로 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으셨을 때에도 솔로몬은 주저함 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평상시 가지고 있었던 기대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디매오나 솔로몬은 주님께 구할 것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분명한 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분명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몽롱한 상태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답함이 그지 없습니다. 기도는 원하는 것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면서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냐 합당치 않느냐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분별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소리를 지르니까

이 바디매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드니 이유 없이 구경삼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한다고 아뢰자 주님께서 즉시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곧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변화를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처럼 또 소경 바디매오처럼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늘 지니면서 변화된 삶을 늘 추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예수 이름을 의지해야 합니다.(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보라"는 사도들의 말에 그 앉은뱅이는 귀가 솔깃하여 무엇을 얻을까 기대에 찬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고 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기서 은과 금이 없다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베드로는 본래 가난한 어부 출신이었지만 그가 거지에게 동냥 몇 푼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 비해 사도 요한은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도록 부탁했던 제자가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거지에게 동냥할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자기들의 가진 것을 모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내놓고 남에게 베푸는 사람,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질 것은 다 갖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것은 헛된 욕망일 뿐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생활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물었을 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고 명령하셨습니다. 다 나눠주고 와서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모든 것을 다 나눠주고 예수님을 좇았기 때문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세상의 재물은 없어졌지만 그들은 대신에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하늘의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만약 거지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몇 푼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을 주면서 만족해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 앉은뱅이 거지는 평생을 구걸을 하는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과 금은 다 나눠주고 없을지언정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돈으로 건강을 살 수 있습니까? 돈이 많다고 해서 생명이 연장됩니까? 아니면 돈으로 지식과 명예를 얻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대단한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그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나를 헌신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물질이 없고 시간이 없어서 주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있으면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변화될 것입니다. 그 어떤 일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은과 금은 없을 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무서운 시험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 사업이 어려워지는 것, 병이 드는 것, 진학에 한번쯤 실패하는 것, 아닙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시험은 예수님의 사랑이 있고, 예수님의 지혜가 있고, 예수님의 능력이 있는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져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희미해져 갑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다. 나의 삶을 향한 예수님의 능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시험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할 수도 없고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변화를 받아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사랑해야 합니다.(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랑은 기독교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을 많이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진정한 사랑이 없었으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베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두 명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자기보다도 열 살이나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반대로 다른 아내는 자기보다도 열 살이나 연하의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여자는 아무래도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과 같이 사니까 남들 보기에 조금은 쑥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남편을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에게 올 때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남편의 머리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주었습니다. 나이가 적은 여자는 반대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으로 하여금 좀 더 젊어 보이도록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에게 올 때마다 그는 기회가 되는 대로 남편의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주었습니다.

남편은 불쌍하게도 이 집에 가서 검은 머리카락을 뽑히고, 저 집에 가서 흰 머리카락을 뽑혀서 번갈아 가며 뽑히기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내들의 등쌀에 남편의 애꿎은 머리카락만 죄다 뽑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얼마가지 않아서 그는 빤질빤질한 대머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두 여인은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거짓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나를 희생하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거지처럼 살고 있는 앉은뱅이 손을 누가 잡아 주겠습니까?

베드로의 뜨거운 손이 앉은뱅이 거지의 차가운 손을 잡았을 때 이제는 구걸하는 거지와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이 일어났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앉은뱅이는 관심의 손을 잡아보는 것입니다.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솟아오름을 느낍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왜 당신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느냐’고 묻지 마시고 ‘왜 내게는 사랑이 없는가?’ 라고 자신에 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힘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죽음을 뛰어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아가서8장6절에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 왕이 내린 사랑의 정의인데, 사랑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강할 뿐 아니라,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자녀와 남편과 아내와 친구, 등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가 자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남편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친구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랑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대민성결교회
글쓴이 : 진리수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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