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깨달았도다(행10:34-43)

하나님아들 2016. 6. 2. 16:13

2008.08.31대민(주일낮)

 

*깨달았도다(행10:34-43)

 

사람이 세상에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닫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많습니다만 깨닫는 바가 적어서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했고, 그렇게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해도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함으로 해서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인생을 끝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깨닫고 얻은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인간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생각을 바꿉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신령한 세계가 열립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자유 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깨닫게 되면 세월을 절약합니다. 물질을 절약합니다. 젊음을 아낄 수 있습니다. 보람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생산적인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사건을 만나도 문제를 만나도 생각이 없습니다,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깨달음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나가서 개처럼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처럼 씻은 물에 다시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49편12절에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말씀하였으며 이어서 20절에서도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여 모든 생물 중에서 존귀하지만, 오래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멸망하는 짐승 같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멸망하는 짐승에 불과하다고 노래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귀 영화를 누리는 존귀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가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에게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도 아니요, 질병도 아닙니다. 전쟁도 아니요, 재난도 아닙니다. 깨달음이 없는 것이 불행의 요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돈이 많고 재산이 많다고 행복한 것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결코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깨달음에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옷가게에서 외투 한 벌을 샀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까 주머니에 값진 보석 반지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돌려주어야 하느냐, 모른 척 그냥 가져야 하느냐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돌려주자니 아깝고 가지자니 양심의 가책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옆집에 있는 랍비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랍비는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당신이 산 것은 외투지 반지가 아닙니다. 당연히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돌려줄 때 절대로 혼자만 가지 말고 당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보석 반지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

 

얼마나 놀라운 가르침입니까? 이것이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경험에서 오는 깊은 지식입니다. 그래서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마음 문을 열고, 뜻을 굽히고, 고집을 버리고, 믿음으로 이해하면 깨달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생에 있어, 인간됨이란 깨달음에 있고, 그 행복과 가치는 인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격은 그가 가진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대한 실천력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적어도 아는 만큼은 행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이 설교를 통하여 깨달음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시는 분임을 깨닫고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혁신적이었으며, 유대인의 편견과 사상을 깨끗이 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은 분명히 구약 시대부터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그의 약속과 계시의 특별한 수령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교회를 통하여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베드로는 만유의 주 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신 내력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깨달은 바 은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를 취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도행전 10장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하고 전혀 관계없는 고넬료라하는 로마 중대장을 선택해서 구원시켜놓고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속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를 더듬어 보면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이 철저히 회개하며,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 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집에 들어가서 첫 번째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 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잘못되는 경우가 허 다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속성을 아시고, 인간의 본질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 하여 바울을 통해서 남의 외모를 보지 말라고 강력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의 키가 작으면, 키가 자기보다 작다고 무시해 버립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좀 별로이면, 얼굴이 예쁘지 않다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학문이 부족하고, 가난하고, 돈이 없으면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직장이 없어, 서성거리면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장애자면 장애자라고 또 무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 영국의 대문호였던 셰익스피어가 한 번은 식사를 하기 위해서 어느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셰익스피어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빗자루를 들고서 마당을 쓸고 있던 종업원 가운데 한 사람이 쓸던 빗자루를 갑자기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갑작스러운 광경에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떨떨해졌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종업원에게로 다가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내가 식당 문을 들어서면서 실수한 것이 있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내게 좀 가르쳐 주게나."

그러자 식당 종업원은 죄송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제 자신이 너무나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이나 저나 똑같은 남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셨고, 저는 그저 선생님이 지나가는 발자국이나 쓸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저 자신에 대해서 미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를 들은 셰익스피어는 청년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네나 나나 실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걸세. 생각해 보게나. 자네는 빗자루를 들고서, 나는 펜대를 들고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네나 나나 똑같은 것일세."

그 소리를 듣고서 청년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던졌던 빗자루를 다시금 들고서 바닥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상16장7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외모적으로 무엇을 갖추었다고 우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는 내 외모를 이 정도 갖추었으니까 특별해야 돼.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비록 우리가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죽어 살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아름답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모를 갖춘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웃어른을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 자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외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을 만났습니까? 그러면 더더욱 우리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용기를 잃지 않고 힘을 내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중심보다는 외모에 치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태도는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방식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는 [편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는 특별히 돌봐 주고, 누구는 냉대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습니다(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혈통이나 국적, 혹은 기타 인간적인 자격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얼마나 진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믿음만이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비결 즉 구원받는 비결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10장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서 부활시키신 것 그리고 우리의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로마서10장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 교회에서 세례식을 베풀 때 세례 받기 전에 반드시 입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예수는 나의 구주 되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과 자기 자신을 향해서 고백하게 하고 그 다음에 세례를 베풉니다. 이 세례를 베풀고 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교회의 회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어떤 이름으로도 어떤 이로써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사실 이것을 믿는 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끊이지않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 대해 종교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몰지각한 독선이다"

"모든 종교는 동일한데 어찌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하는가"

"불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회교를 믿든, 토속종교를 믿든 믿음은 동일하고 고귀한 것이니 무슨 종교를 믿든 구원을 받는다."

"남의 종교를 비판하지 말라"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비인격적 행동이다."

 

보통 이렇게 네 가지 유형으로 항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목사도 있고, 신학교 교수도 있는 형편이고, 또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존경(?)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경 받는 이유는 타종교까지 인정해주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까지도 존중해 줄줄 아니 그 사람들은 도량이 넓고 선한 인격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사람들에게는 칭찬 듣고 존경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책망과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실 때,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느냐, 우리가 얼마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들이시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를 오해 다녔다고 할지라도, 또 교회에 아무리 많은 헌금을 드렸다 할지라도 그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경외해야 하겠습니다.

단지 곁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경외심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복음의 시작을 깨달았습니다(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마가복음1장1절에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고 장엄한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말합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선지자, 대제사장, 그리고 만인의 왕' 을 뜻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죄와 죽음 권세 아래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복음이 시작되기 이전의 세상은 한마디로 아담의 범죄로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곳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땅에는 죄와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다 심판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계시록 21장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채찍과 조롱과 멸시를 받게 하셨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시고 무서운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몸으로 내가 받아야 할 죄를 담당케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죄인들이 정결케 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이 치료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불안과 절망과 회의와 허무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절에는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했던 평화의 복음은 요한의 세례에서 부터 출발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직후부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3:15). 그 후 하나님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 선구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선구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요,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메세지나 삶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회개의 세례를 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선전하였습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을 선전하였습니다.

 

마가복음1장7절에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눅3:15). 그는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메도 풀 수 없는 비천한 존재요, 예수님은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는 고귀하고 위대하신 분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낸 평화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복음이 세례 요한의 세례 반포이후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전파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 가정에 초청받아 온 베드로 사도의 설교와(34-43)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찬양하므로 이방인들에게 성령강림으로 전 세계 복음화에 불이 붙게 되었고 기독교 선교에 핵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복음의 핵심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36)고 하였는데 복음의 핵심이 화평이란 것입니다. 여기에 화평이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 화평도 우리가 얼마나 갈급해 합니까? 전쟁을 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이 평화는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되어 단절되어 버렸기에 죽음이 왕노릇하고 고통과 괴로움이 극심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평화의 길이 복음에 핵심입니다.

이 평화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는 성도되기 원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출처 : 대민성결교회
글쓴이 : 진리수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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