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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으로 거듭나자

하나님아들 2016. 5. 12. 11:02

우리가 먼저 변하자!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의 자기혁신 모색-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이선희 교수




I. 문제


   1. 먼저 필자는 1995년부터 2002년 현재까지 8년 동안 설교자나 부흥집회 강사로 다니면서 관찰한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파악해 보고자 합니다. 이 강연의 주제가 새롭게 ‘변하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로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그 원인들과 개선방법들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2. 1995년도와 1996년도 2년 동안은 수요 저녁예배나 금요철야기도회에 주로 초빙되어 가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그 당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에 대한 간증에 관심들이 많았고, 찬송도 기도도 뜨거웠습니다. 강화도부터 해남까지, 대천에서 동해까지 두루 집회하고 다니면서 관찰한 바, 그 당시에는 어느 지역의 교회든지 간에 대개의 경우 눈에서 빛이 날 정도로 순수하게 듣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했습니다. 그 만큼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생생한 분들이 많았다는 뜻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뜻입니다.

  

  3. 특히 여선교회 회원들의 안내와 봉사가 특별했습니다. 집회 전에 일찍이 교회에 와서 준비하고, 집회가 보통 밤 10시 넘어서 끝나도 준비한 대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집 안 일도 바쁘고, 그렇게 많은 시간 교회에 와서 일하고, 집회도 그렇게 늦은 시간에 끝났는데도 그들의 얼굴에 기쁨과 미소가 넘쳐나는 것이 그 당시 초년생 간증강사, 부흥강사인 저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만큼 그 분들에게 은혜체험이 아직 생생했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확신이 생생했다는 뜻입니다.

  

  4.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자가용이 없기 때문에, 집회에 가려면 대개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날에 누가 나와서 저를 태워갑니다. 그 당시에는 저를 태우러 나오는 차량봉사자가 대개 그 교회에서 지금 막 은혜받기 시작하고 신앙생활의 진수를 맛보기 시작한 집사님이나 집사님 부부가 많았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부흥강사인 저보다도 더 밝았습니다. 신혼부부같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 기쁨을 애써 감추는 듯한 얼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강사님 모신다고 특별히 차량청소를 그날 한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대화 중에 대개 자기 교회 자랑이나 목사님 자랑을 하는데, 저에게는 참으로 기분 좋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다녀 본 전국의 감리교회들마다 대개의 경우 그러했기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특이한 공통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이것이 바로 그 당시에는 그래도 믿음으로 거듭나는 일이 계속 일나고 있었다는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은 대개 믿음으로 중생한지 몇 달 안 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5. 1996년도에 경기도 어느 지방의 큰 교회에 주일저녁에 간증하러 간일 있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그 주일 이틀 전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전교인이 기도원에 가서 산기도하는 기도회를 마치고, 주일 낮 예배를 드리고 주일 저녁예배로 다시 모였던 것입니다. 한 1500명가량이 모인 것 같았고 좌석을 다 채웠습니다. 이틀 밤잠을 설치고 주일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한 그 피곤한 몸으로 부르는 찬송이 성전을 가득 채우면서 올라가는데, 그 찬송의 열기와 기도의 열기가 얼마나 뜨겁던지, 제가 단에 올라가서 강단에 서기 전에 의자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벅찰 정도로 은혜가 임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은 성도들의 찬송과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내리시는 성령의 감화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 교회 뿐 아니라, 많은 감리교회의 성도들이 특별 기도회를 통해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는 일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교회를 예로 든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들의 영적 문제 가운데 하나를 여기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5년 뒤인 2001년 같은 교회에서 지방연합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는 회중석의 양쪽 가의 좌석들은 대개 비어있었고, 회중의 분위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강사인 제가 설교 중에 여러 번 말을 더듬을 정도였습니다. 영적 분위기가 냉각된 원인을 뒤에 가서 분석하겠습니다만, 한마디로 기도를 통하여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는 능력이 지난 5년 동안 서서히 상실되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눌려있는 성도들이 된 것입니다.]

  

  6. 그러다가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금요철야기도회에 와서 간증하라는 교회의 숫자가 급속히 감소하게 됩니다. 특히 1997년 후반기에 시작된 IMF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금요철야기도회에 와서 간증하라는 교회의 숫자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지금까지 적어도 저의 경우에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요예배에 오라는 교회도 감소했고, 그 대신 주일저녁에 오라는 교회의 숫자가 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경부터는 주일 낮 예배와 오후예배를 일일 부흥회식으로 인도하라고 청하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박4일 부흥회 대신 매주 주일 저녁마다 연속 네 번 와서 설교하라고 청하는 교회도 생겼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3박4일 부흥회는 아주 드물어지고, 그 대신 2박3일 부흥회가 일반화됩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어느 교회나 공통적으로 같은데, 바로 예배 또는 집회참석 인원의 감소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금요철야기도회 참석인원이 감소하고, 그 다음 수요예배 참석인원이 감소하고, 그 다음 주일 저녁예배 참석인원이 감소해 갔던 것입니다. 그 원인은 복잡합니다만, 우선 가장 표면적인 원인은 IMF 이후 일자리를 찾아 나선 주부들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더욱 교회 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영적으로 무장하기보다는,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일단 눈에 보이는 문제해결 방법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 그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믿는 자를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가르침에 대한 체험적인 불신감이 더 깊은 원인으로서 밑바닥에 깊이 깔려있습니다. 가계를 유지하고 아이들 교육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교인들은 교회에서 그리고 기도에서 쌀도 돈도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는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다, 우선은 생활고를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교인들을 예배에, 집회에 불러 모으기 위해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나, 교인들은 가면 갈수록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교회와 신앙생활에 대한 기대를 상실해 갔고, 결국 교회가 오히려 교인들의 세속화(즉, 우선 생활을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신앙생활은 여유 있을 때 열심히 하자는 사상의) 추세를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교단의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감리교회의 교인들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예배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부흥집회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기도회에 대한 기대를 상실한 교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감소되고 상실됐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교인들의 숫자가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7. 이런 현상을 아주 상징적으로 나타낸 일이 있었습니다. 2001년 하반기에 경기도 어느 지방의 평신도 연합 집회에 이틀 동안 강사로 간 일이 있습니다. 저를 강사로 초빙하게 된 사연을 평신도회 회장되시는 장로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누구를 강사로 초빙하느냐에 대해 평신도회에서 회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1) 전문 부흥강사는 절대로 피한다. (2) 가급적 목사님 말고, 평신도를 초빙하자. (3) 2시간씩 이틀 동안 해야 하므로, 대학교수를 초빙하자.

  

  이 결론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1) 전문 부흥강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현상을 보여 줍니다. (2)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현상을 말해 줍니다. (3) 이제는 세상지식에 뭔가 그래도 들을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기대가 옮겨가고 있는 현상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훨씬 더 심각한 영적인 문제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타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감리교회에도 진정한 부흥의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2)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한 실망감은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성경말씀 말고, 세상의 학술적 지식에 무언가 우리가 따라서 유익한 길안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점점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현상에 반드시 병행하고 있는 영적인 문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진정한 부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는 일과 믿음으로 거듭나는 일과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거룩하게 사는 일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부흥이라는 것은, 과거에 우리가 적어도 190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체험한 바대로, 예수 믿고 새 사람되는 일이 집단적으로 강렬하게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일들이 이제는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체험 없이 그냥 교회에 다니면서, 마치도 천주교인들처럼, 믿음으로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도 믿고 선행에 힘쓰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자꾸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미 새 사람이 되어서 거룩하게 사는 길로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입장에서 앞으로 언젠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선행을 힘써 하는 소위 구도자의 숫자가 우리 감리교에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에도 젊은 사람들의 계층에 이런 구도자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구도자 정도만 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서서히 생기고 있습니다.

  

  (2) 성경을 영감있게 이해할 줄 아는, 즉 성령의 감화감동을 따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재미없고, 늘 그 얘기가 그 얘기처럼 들리고, 들어도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그래서 성경을 내 수준에 맞게 해석한 것에 귀가 솔깃하다가, 그것도 곧 재미없어집니다. 내 생각이나 그 성경 얘기나 마찬가지인데, 뭐가 은혜가 되고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자꾸만 무의미한 책, 무기력한 책, 무능한 책처럼 보입니다. 고리타분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기대를 상실하고, 하나님에 대한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것이 없으면,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흥의 현상이 사라지면, 성경에 대한 무지가 곧 도래합니다. 부흥의 현상이 사라지면, 과거에 부흥을 체험하고 중생을 체험한 사람들도, 꾸준히 열심으로 은혜생활에 몰두하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메마른 분위기에 휩쓸려서 성경이 무미건조하게 됩니다. 더구나 중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려 하다가 포기하든지 아니면 제 나름대로 명심보감 읽듯이 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성경을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가 없고, 그래서 조만간에 중단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짐만 됩니다. 그래서 한 이 년여 전부터 이제는 감리교 안에서도 ‘목사님, 성경공부 또 시작해요?!’라는 담대한 저항인지 좌절인지 알 수 없는 한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믿음으로 중생한 것이 없고, 그래서 성령 받은 것이 없고, 그래서 영감 있는 성경독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먹지 못하고, 영적으로 자꾸 말라가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지식에 눈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3) 그래서 교회에서도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새로워지고, 말씀대로 살면서 거룩해지고, 그래서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해결되는 체험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그 대신 인생의 문제들을 세상의 학술적 지식의 응용을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부부간의 문제는 부부세미나를 통해 해결을 시도하고, 부모와 자녀 간의 문제는 ‘좋은 아빠 되기 운동’ 같은 것을 통해 해결해 보려고 하고 하는 식입니다. 이런 시도들은 대개 심리학이나 인간관계학 같은 세상 학술을 응용한 방법들입니다. 이런 류들은 갈수록 그 숫자가 늘고 있습니다. 예컨대, 결혼준비세미나, 이혼상담 등이 그런 류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털어서 소위 ‘영성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행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성훈련’은 천주교에서 벌써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는 영성훈련과 동일합니다. 천주교는 본래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교리가 없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통해 서서히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선행을 종교적으로 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 바로 ‘영성훈련’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이 이제는 개신교의 교회들에서도 유행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것’이 개신교의 교회들에서도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들에서도 오늘날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 그렇게 열심히 선행과 행동을 강조하고 영성훈련에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는 오늘날 다시 가톨릭교회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1500년대에 종교개혁하고 가톨릭교회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성경말씀대로 예수를 믿음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서, 말씀대로 살면서 거룩하게 살자고 했던 개신교 교회들이 이제는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선행과 행동이 있어야 된다고 외치면서 다시 가톨릭교회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서, 말씀을 따라 점점 거룩해지는 방법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 대신 인간이 고안해낸 지식과 방법에 의존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해 보려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확신도 없고, 하나님은 그냥 머리 속의 지식 가운데서도 무기력한 지식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지식을 응용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하는 것이 어떤 교인들에게는 오히려 세련되고 앞서가는 방법처럼 보여서, 그런 강좌를 교회에서 한다면 그 참석률이 오히려 부흥회 참석률보다 높으니까, 어떤 교회들은 한술 더 떠서 꽃꽂이 강좌, 영어회화 강좌, 붓글씨 강좌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들을 교회에 자주 그리고 많이 모이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교회가 일종의 학원이나 동호인 친교단체처럼 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의 이미지가 서서히 바뀌고 있습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곳, 즉 죄를 깨닫게 해서 죄를 회개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알게 해서 믿음으로 죄사함 받게 하며, 믿음으로 중생을 체험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서 사람들이 말씀의 형상으로 점점 성장하며, 그래서 육신이 점점 죽고 영이 점점 커져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때를 따라 영육 간에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하며 증거하며 살아가면서, 재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런 집단이라는 교회의 자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을 재미있게, 보람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서서히 자라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를 이런 눈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교회관 안에는 내 인생에 유익이 되지 않는 교회라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는 전제가 숨어있습니다. 또는 다른 곳에서 내 인생을 위해 더 유익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곳으로 간다든지, 또는 교회와 이런 세상적 방법을 얼마든지 결합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결국에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인간의 집으로 변질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그렇게 변질될 수 있다는 증거를 우리는 유럽의 교회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스위스는 1500년대에 칼빈의 종교개혁을 통해 카톨릭 교회로부터 벗어나서 개혁교회가 됩니다. 이 교회의 기본 신앙과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면서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 백 년을 거쳐 오면서 이 개혁교회는 스위스 전국에 걸쳐서 수차례에 걸쳐서 커다란 부흥을 경험하고 크게 성장합니다. 그래서 스위스 취리히라는 도시에는 이런 부흥의 시기에 700여명 들어가는 성전을 나란히 둘을 건축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일예배에 노인들 10여명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스위스 한인 교회에 부흥강사로 집회하러 갔을 때, 제가 머물었던 권사님 댁의 스위스인 남편이 사람은 참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돈도 잘 버는 은행가로서 스위스의 엘리트 가운데 한 사람이데, 교회에 다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기를, ‘부인도 아이들도 교회에 다니게 하면서, 당신 자신은 왜 교회에 다니지 않는거요?’ 하고 물으니, 대답이 이렇습니다.

   (1) 종교는 자유이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종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2) 나도 기독교인으로서 월급에서 헌금을 원천징수 방식으로 내고 있다.

  (3)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배울만한 모범이 없기 때문이다(즉, 내 인생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곳이 못되기 때문이다).

  (4) (‘그래도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사실 나는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인생의 문제해결을 교회 이외의 곳에서 더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다(즉 인간의 발달된 다양한 지식의 응용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위스 사람들이 유무식 간에 근본적으로 이와 동일한 기독교관, 교회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가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은 부흥을 체험하며, 중생하며,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1400명 들어가는 교회를 짓고 신앙생활했는데, 그 후로 기백년도 안 지나서, 그들의 후손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교회들도 (교파를 불문하고) 정확히 이 코스를 밟으면서 선진국들의 기독교의 슬픈 운명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8. 요약: 오늘날 한국감리교회 성도들이 당면해 있는 영적인 문제는 한 마디로 신본주의(하나님 중심주의)를 상실하고 점점 인본주의(인간 중심주의)로 변질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점점 줄어들고,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보다는 행동을 더 높이 평가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은근히 신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선행을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는 영혼의 구원이나 성령충만 같은 말들은 이름만 있을 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행동들에 집착하고 집중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진정한 영적 감각을 서서히 상실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기독교도 서구 기독교처럼 겉으로는 세련되어 보이나 사실은 하나님도 말씀도 능력도 없는 하나의 인간적인 사회적, 종교적 기구와 집단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문제가 역시 우리 감리교회의 문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II. 문제의 원인


   1. 한국 감리교회가 신본주의를 상실하고 인본주의로 변질되는 원인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서 말씀과 성령으로 성화되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의 원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하고도 능력 있는 체험이 드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대신으로 인간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여러 가지로 복된 인생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나, 갈수록 무기력하고 무능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부흥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는 현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성도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할 수가 없고, 따라서 부흥회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점점 감소하고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에 의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한 부흥이 중단됐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부흥회에 성도들은 갈수록 부담을 느끼고, 중생하지 못하고 성화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 갈수록 실망하게 되고, 거룩하게 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신 부부세미나, 좋은 아빠 되기 운동, 이혼상담, 사회참여 등의 활동에 기대를 걸고 그런 방식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진정한 하나님 체험은 희귀해지고, 그래서 갈수록 인본주의가 됩니다. 이 악순환을 이런 방식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서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이렇게 거룩해지는 것이 집단으로 일어나는 일을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왜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2. 진정한 부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성경은 성령세례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과 5절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레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런 후 얼마 안 되어서, 오순절날에 저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되 충만하게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행 2:1-4). 이 때 이들이 방언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되었고, 베드로가 일어나 예수가 주시오 그리스도시라고 증언함으로(행 2:36), 듣던 자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되 한번에 3천명이나 받았다고 되어있습니다(행 2:37-41).

 

  여기서 볼 수 있는 바, 성령세례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령세례는 이미 예수를 믿고 중생한 사람들이 받되, 이것을 받는 것은 분부된 의무요 허락된 권리다.

  (2) 성령세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며, 이를 통해 은사와 능력을 받게 한다.

  (3) 성령세례를 받아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가 된다. 예수를 담대히 증거하게 된다.

  (4) 성령세례는 이런 방식으로, 예수 믿고 중생했으나 무슨 이유에서든지 다시 죽은 것처럼 된 믿는 자들을 집단적으로 다시 살려서 살아 있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한다.

  (5) 성령세례는 이런 방식으로, 아직 믿음을 모르던 자들에게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게 하고,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거듭나게 한다.

  

  3. 그러면 이런 성령세례가 항상 있고, 진정한 부흥이 항상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오직 하나님만이 섭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세례를 항상 내리시지 않는 이유와 어떤 경우에 성령세례를 내리시는지를 알아야, 진정한 부흥이 중단된 이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알 수 있겠습니다.

  

 4. 우리의 구원에 관련하여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보입니다. 하나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세례입니다.

  

  4-(1)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는 믿음으로 중생한 이후에 중생한 사람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이 중생한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항상 감화감동하시면서 동행하시는 역사입니다. 이는 중생한 자가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그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을 넘어서서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축도할 때 ‘성령의 감화감동하시는 역사가 영원토록 함께 하실지어다’하는 것은 특별히 이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 관한 축복기도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는 중생한 자에게 늘 동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에, 갑자기 임하거나 격렬하게 임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늘 잔잔하게 끊임없이 마음을 움직이시는 방법입니다. 중생한 자가 이 성령의 내주하시는 감동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내주하시는 성령은 이 사람에게 기쁨과 감사와 믿음의 강건함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가 성령의 내주하시는 감화감동에 순종치 않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책망과 양심의 찔림을 주시고 회개로 인도하시고 다시금 믿음을 회복하도록 도우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는 늘 잔잔하게 둥행하시기 때문에 비유컨대 이슬비가 한결같이 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슬비도 하루 종일 맞으면 옷이 흠뻑 젖듯이,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도 늘 순종하며 오랜 세월 살아가면 누구나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가 됩니다. 즉, 갈수록 육이 죽으며, 영이 살아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순조롭게 되어, 늘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되, 말씀대로 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순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라도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화감동에 믿음으로 순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 둔감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는 예컨대 냄새피로 현상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좋은 냄새라도, 처음에는 그 냄새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으나, 조만간에 그 냄새에 둔감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육신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가 아니면 어떤 인간도 이 육신의 기본구조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도 중생 초기에는 예민하게 느껴져서 순종하며 잘 따라가지만, 조만간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둔감해져서 순종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내 힘으로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힘을 써보다가, 갈수록 예수 믿고 사는 것이 부담이 되고, 짜증나고, 재미없고, 비판하고 싶은 것만 눈에 보이고, 원망이 가득하게 되고, 설교를 들어도 판단만 하게 되고, 내 나름대로 성경을 읽어 보나 스스로 싱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는 중생한 사람에게 늘 동행하기 때문에, 그리고 잔잔하게 감화감동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의 육신의 구조가 냄새피로적 현상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중생한 자라도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만 있는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갈수록 생생한 하나님 체험을 잊어버리고, 그래서 서서히 하나님 중심주의를 떠나서, 점점 인간 중심적 신앙양태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감리교회의 성도들이 점점 인간 중심적 신앙양태로 변질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즉,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만 있는 가운데 긴 세월(1988년 이후로 약 15년 정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갈수록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예민하게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감화감동에 둔감해지며, 그래서 내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하니까, 갈수록 인간의 행동을 그렇게 강조하게 되고, 그래서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에 매달리다가, 갈수록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진정한 감각은 사라져가고,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집단으로 점점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4-(2)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깊이 병들었을 때, 이를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2000여년 되는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이런 의미로 성령세례가 임했던 대표적인 경우들이 사도행전, 1500년대의 종교개혁, 1700년대의 부흥운동, 그 가운데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 1800년대의 미국의 부흥운동, 1900년대의 오순절주의 부흥운동, 1960년대의 은사주의 갱신 운동, 1970년대의 성령운동 등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과 1910년의 평양 대 부흥운동, 1930년대 부흥운동, 1950년대 이후의 오순절주의 부흥운동, 1970년대, 1980년대의 부흥운동입니다. 이들 부흥운동의 공통점은 집단적으로 죄를 회개하며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말씀과 성령(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살게 되는 일들이 불같이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갈수록 세상으로 돌아가서,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세상사람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 형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고치시는 방법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방법인,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거듭나서, 말씀과 성령을 따라 거룩하게 살게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집단적으로 그리고 비상한 방식으로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주로 믿는 자들이 깊이 병들었을 때,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갑자기 임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세례는 그런 만큼 격렬하고 강합니다. 강렬한 죄의 회개가 마치도 전염되듯이 집단적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믿음도 전염되듯이 집단적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는 일들이 역시 전염되듯이 집단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래서 이미 중생한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이 회복됨으로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담대하게 이 하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다녔지만 아직 중생을 체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믿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거듭나서 믿음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세례에 의한 진정한 부흥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세례는 마치도 소나기와 같아서 갑자기 퍼붓듯이 임했다가 조만간에 다시 갑자기 걷히어 갑니다. 그래서 어느 지방에 부흥이 갑자기 시작됐다가 한달이 채 안 되어서 다시 식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세례가 임하는 방식이 이러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비상하게 강한 역사이기 때문에, 이것이 일상적이 되어서는, 어떤 사람도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성령세례는 중생한 자들이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듯한 상황이 되었을 때,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어느 믿지 않는 지역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자 간에 성령세례는 갑자기 강하게 임했다가, 목적을 달성하시면, 갑자기 걷히어 버리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한 부흥의 역사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갑자기 믿음으로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교회는 계속 다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 이름만 교인인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중생하여 그 시점으로부터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인간의 육신적인 구조 때문에, 조만간에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 둔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중심적인 신앙생활 양태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5. 요약: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적 신앙생활을 점점 상실하고 인간 중심적 신앙양태로 변질되는 원인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 둔감해지면서, 성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병든 하나님의 백성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성령세례라는 부흥의 역사인데, 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 대신 인간적 방법으로 살아 보려고 하는 인본주의의 병 가운데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III. 문제의 해결


   1. 성령세례는 임하여 사람을 새롭게 바꾸어 놓지만,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 동안만 역사하고 곧 걷히어 버립니다. 그런 다음에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가 뒤따라오면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동행하시면서 감화감동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육신적 구조가 곧 피로를 느끼고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이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도 오랫동안 순종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처음에는 새 사람이 되어서 천사처럼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보통 사람처럼 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을 숨기려고, 속은 보통 사람이나 겉은 천사처럼 해보려 하다가 위선적 교인이 됩니다. 그것마자 못하는 사람들은 이름은 기독교인이나 실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비도덕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니면 교회 안에서 온갖 분란과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그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해석하되, 그것을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미화까지 합니다.

  

  2.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도 이런 형태의 변질을 다소간에 스스로 경험 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있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에는 누구나 예외 없이 조만간에 둔감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병들어 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런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성령세례의 역사가 임할 때 그것을 정확하게 받는 것입니다.

  

   3.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임으로 행하시는 비상한 역사이지만, 간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상령세례도 간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간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본주의라는 병을 고침 받기 위한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을 떠나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살아 온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지역을 구원하실 때는, 그들이 회개하기 전에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성령세례를 내리시는 수도 있으나, 이미 믿고 중생한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간구할 때는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가 가득한 상태에는 성령세례가 임하지 않습니다.

  

  (2) 중생한 자의 회개라는 것은 힘써 악을 버리고, 힘써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소개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1] 주일날 물건을 사고  팔지 말 것. [2] 의사가 약으로 먹으라고 처방하지 않은 한, 술을 맛보지도 말고 먹지도 말 것. [3] 목숨을 구할 목적으로라도 거짓맹세를 하지 말 것(거짓말을 하지 말 것). [4] 불필요한 사치품을 몸에 걸치지 말 것. 반지나 화려한 옷장식 등(오늘날 불필요한 머리염색도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5] 의사가 약으로 쓰라고 처방한 경우가 아니라면, 담배를 피우지 말 것 등입니다. 또한 이웃사랑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6] 굶는 자를 먹일 것. [7] 헐벗은 자를 입힐 것 등입니다. (그러나 사회복지 사업식으로 1만원씩 내서 하는 방식은 잘 못하면 위선과 면죄부가 되기 쉽다고 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했으니, 나를 위해 한 달에 1만원만 쓰는 사람이라면, 1만원내도 되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이 규정하신 방법을 철저히 따르라고 했습니다. 즉, [8] 예배에 참석할 것(우리 같으면, 주일 두 번 예배, 수요 예배입니다). [9] 병이 있거나, 거리가 멀거나, 사업 상 시간이 허락지 않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에 설교시간에 참석할 것(우리로서는 새벽기도입니다). [10] 시간 나는 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 [11] 매일 시간 나는 대로 기도를 드리고, 가장이면 가정기도회를 매일 드릴 것(우리의 가정예배입니다). [12] 매주 금요일은 일년 내내 금식이나 절식(예컨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지킬 것 등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힘써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면서 성령세례를 간구해야 합니다.

  

  (3) 성령세례는 인위적으로 임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성령세례를 받게 하려는 목적의 부흥회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잘 못된 시도들 때문에 오늘날 감리교의 성도들 사이에는 부흥회 기피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선행과 행동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성령세례는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에 내리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우리의 무능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거룩하게 살기를 염원하며, 그래서 힘써 악을 버리고 힘써 선을 행하면서, 이에 만족하여 이런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가 임해서 진정한 부흥이 오도록 염원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감리교회 성도들의 자기변혁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곧 허락하셔서, 진정한 부흥이 다시 임하게 하시기를 주님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 부산 참사랑교회
글쓴이 : 하늘의 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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