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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없는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긍휼
본문: 마 9:35-38 요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한 획을 긋는 것을 보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이 사역하신 결과를 돌아보시면서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그 처방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들로 오셔서 많은 것을 보시고 경험하시며 당시의 이스라엘을 판단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판단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판단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우리 자신을 진단하고, 교회와 사회를 진단하여 예수님의 처방을 따라야 할 것 배웁니다.
10장에서 예수님은 사도를 임명하셔서 파송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운명에 대해 무서운 예언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도를 부르시고 그들을 파송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본문 연구를 통해 우리는 우리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5절은 흥미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5장에서 9장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마태는 5-7장에서는 가르침을 기록하고 8-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도우시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물론 이것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보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서 대표가 될 만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다음에 35절에서 한 마디로 그 모든 활동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아직까지도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볼 때, 바리새인이 거세게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보도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회당에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평일에는 집에서도, 그리고 길거리에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사람들이 그분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항상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것을 기뻐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예수님 사역의 열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즉 사람이 구름과 같이 자기에게 몰려오는 것이 대부분 목사나 선교사의 꿈일 것입니다. 그래서 만 명, 십만 명, 백만 명의 교인의 교회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성공신화를 써서 인기 도서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슬퍼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몰려드는 무리를 보자 불쌍한 마음이 그분을 엄습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다는 말은 스퀼로(스킨)에서 나온 말인데, 껍질을 벗기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상처를 받았음에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바위틈이나 가시밭길에서 헤매는 양들을 나타냅니다. 기진하다는 말은 (시체처럼) 땅에 던져서 버려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두 마디는 이스라엘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렇게 보통 사람과 예수님의 관점은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목사는, 수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몰려오면 기뻐하고 자신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처럼 착각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분노하실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양이란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라는 말에서 목자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소개하시고, 신약에서는 하나님 아들이 목자의 칭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 40: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히 13: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그렇다면 „목자 없는 양“이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는 바리새인, 서기관, 에센파와 같은 수많은 종교적 엘리트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한창 번성할 때였습니다. 성전에는 제사가 끊이지 않고, 축제 때에는 성전이 인파로 메워지고, 회당 예배에도 사람이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게 되었다고 하십니까?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이 질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세대에 꼭 맞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는 천만 명의 신교 신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사람의 판단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신자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처럼 철벽같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꼴을 먹어야 하듯이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매일 먹고 살아야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고, 매일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리고, 확신과 감사함으로 찬양과 경배를 통해 마음이 가득 찬다고 할지라고, 영혼은 쓰러져 누워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갑니까? 텅 빈 마음을 채우려고 신비주의로 갑니다.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방언이나 예언, 환상을 통해 종교심으로 빈 마음을 채웁니다. 그러나 마음은 결코 이러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활발하게 신앙활동을 하지만, 영적으로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양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아로서 활동하셨습니다. 열심히 가르치시고 사람들을 섬기신 후에 사람들을 살펴보니, 모두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을 깨달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보도되고 예수님께서 마음 아파하신 것으로 보아,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괴로움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눈도 이처럼 밝아져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기뻐 찬양하는 무리 속에서, 시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이 해결 방법도 우리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37-38절을 보시겠습니다: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추수라는 말은 보통 하나님께서 수확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도를 통해 추수가 가능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효과적인 전도 사역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로 초대받아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군이 적습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일군이 적어서 추수를 못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역사는 일군의 수에 좌우됩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목사, 장로가 되고, 혹은 선교사로 파송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이스라엘에 그렇게 경건한 사람이 많음에도 일군이 적다고 한 점을 주목합시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성직자라고 볼 수 있는 제사장과 경건한 레위인, 그리고 랍비, 서기관, 바리새인 등, 수많은 일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숫자가 아직 부족하다는 의미로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히려 이들을 저주하다시피 하십니다:
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예수님의 꾸지람과 저주가 너무나 무섭지 않습니까? 이것이 모두 경건하게 보이는 영적 지도자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이 저주가 오늘날의 목사나 장로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매우 분명한 사람 외에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목사보다는 평신도 교사가 되는 것은 권합니다. 목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무섭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지도자, 목사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또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실된 하나님의 종은 너무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단지 이러한 현상만을 지적하시는 것 같습니다. 구원받을 신도는 너무나 많은데, 단지 그들을 인도해주는 영적 지도자는 부족하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너무 적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이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주는 사람은 너무 적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짜가 너무 많다 보니, 진짜가 있다고 해도 사람 눈에 띄지 않고 묻혀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양을 찾아서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잘 인도해주는 보조 목자는 너무도 적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있던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에도 항상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악한 종은 너무 많고 선한 종은 너무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한 종은 예수님의 양을 자기 양인 것으로 착각하여 양들을 통해 자신이 부유하게 되고 명망을 얻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경계해야 하는데, 잘 되는 것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여 그런 사람에게만 몰립니다. 선한 종은 자기를 희생하여 양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표현하신 일군이라는 말이 여기에 잘 어울립니다. 일군은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닌,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땀 흘려 일하되 주인만을 위해 일합니다. 남이 잘 때 자지 않고, 쉴 때 쉬지 않고 오직 주인이 부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든 노동이나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에게는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좋아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싫어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일군은 주인의 뜻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므로 사람들이 그들 조롱하고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마 22절의 천국 잔치 비유는 이러한 현상을 잘 나타냅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그러므로 이러한 종의 일을 할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있다고 할지라도 죽임을 당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종으로 시작했다가 일이 잘되자 악한 포도원 농부처럼 소작료를 받으러 온 종들을 죽이고 농장을 차지하려는 악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일군은 자기 욕심대로 살려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항상 회개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므로, 하나님의 일군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38절을 보시겠습니다: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대부분 사람이 이 말씀과 반대로 하는 것이 눈에 뜨입니다. 어디에 가도 일군 모집광고입니다. 한국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신학교가 있으며, 재직 제도가 있어서 일군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과 사정이 비슷합니다. 우리는 일군을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를 모집하고자 많은 전도 행사가 있고 전도된 사람을 일군으로 만들고자 제자양성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마치면 직함도 붙여주어 추수하는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추수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추수할 때와 장소는 추수의 주인이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누가 추수하는 일군이 될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능력있고 소질있는 자, 의욕이 있는 자가 추수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추수할 일군이 많고 또한 열매가 많은 것같이 보이는 때가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4). 이 말씀은 이방이 아닌, 바로 예수님께서 거하고 계신 가버나움과 갈릴리 도시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대부분 한국 사람은 한국교회가 선교 대국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 교회 자체도 소돔과 고모라와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선교를 한다는 것, 즉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은 선교할 때가 아닙니다. 제자양성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젊은이를 붙잡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목숨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가증스러운 거짓 교회가 선교하는 것보다 세상을 더 더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를 그쳐야 합니다! 선교할 때가 아니라, 재를 뒤집어쓰고 슬피 울며 절망할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슬퍼하지만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추수하는 일군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추수하는 일군을 만들 것이 아니라, 일군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기를 수도 없고 길러서도 안 됩니다. 죄인을 변화시키기고 그를 기르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추수꾼으로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오직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장에 나가서 전도하라! 가르치라! 혹은 무슨 일을 해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악과 더러움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추수를 당한다는 것은, 즉, 구원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경망되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나 교육, 양육, 섬기는 것, 모두 심사숙고하여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사인을 보며 일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기도는,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 나라가 오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분은 모든 능력을 가지신 성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잘 이루어가는 것이며, 둘째로는 이 확장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말씀을 애써서 잘 배우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우리를 복음을 전하는 일군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이 임할 때에 우리는 물론 순종해야 합니다.
다음 장에는 예수님께서 그간 준비시킨 사람을 복음 사역으로 부르시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말씀을 잘 배우고 순종하면서 일군을 보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사역으로 부른다거나, 단체나 교회에서 자기를 부른다고 해서 선뜻 나서면 안 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망치고 자신도 망치는 길입니다. 부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음 단계의 일을 맡기시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
http://cafe.daum.net/reformedchurchs/AQmI/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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