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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엡 6:1-9 요절: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지난주의 부부간의 질서에 이어 오늘은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 상전과 종 사이의 질서에 관해 공부합니다.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서뿐만 아니라 인간 간의 질서도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서는 고착된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며,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있음을 자각할 때에 진정으로 이 질서에 순복할 수 있으며, 질서 안에 살면서 성령 충만을받을 수 있습니다.
1. 자녀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1-3)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도 질서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질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부모에게만 순종한다는 의미가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의도하신 창조질서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명령은, 보통 사람이 그들의 부모에게 하는 것보다 더욱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주 안에 있는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 있는 자이며, 주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의 내적 상태가 반드시 표면적인 열매로나타납니다.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열매는 부모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가장은 자녀를 노예로 팔거나 큰 죄를 지었을 때 죽일 수도 있는 큰 권한까지 가졌는데, 당연히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을까요? 오늘날의 탈권위 시대에서나 이러한계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십계명에서도 제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소위 두 돌판의 첫 계명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인간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부모공경이며,이것은 결코 쉽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에는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고,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이라는 계명으로 매우 분명하게 질서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에도 „하나님 안에서“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을 하라고 명한다면, 자녀는 이것에 순종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순종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의 뜻(계명)에 어긋나는 순종은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1 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 즉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 의로운 것(dikaios)이라고 합니다. 즉,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인 „의“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는 반드시 행위로 표현됩니다.
2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제5 계명과 함께 하나님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신명기에서 십계명을 반복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신5:16). 이 축복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고 장수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생에서의 축복 약속은 신약에서 매우 희귀합니다. 신약에서의 축복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이며,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 시대의 성도에게 구약적 축복이 아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모두 출세하고 부자 되고 장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결코 작게 보지 않으시고, 여기에 세상적인 방편으로 보상하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한 방편인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본문은 자녀가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며, 우리가 심사숙고하여 반드시 따라야 할 계명임을 강조합니다.
2. 부모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4)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내가 지켜야 할 계명에 이어서 남편에 대한 계명이 따른 것과 같이, 자녀가 지킬 계명에 이어서 부모의 계명이 따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일방적인 순종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권위를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어서, 하나님이 권위를 주신 목적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권위로 자녀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여 이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화를 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존중하는 태도로 아이들에게도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며, 부모가 아이를 그들의 성장기에 하나님의 훈련과 훈계로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부모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즉,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따르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서,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독자적인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잘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큰 책임을 의미합니다. 부모는하나님 앞에서 자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천국에는 아들과 부모의 관계가 더이상 의미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사는 동안에만 맺어주신 것이므로,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부모가 이들을 최대한 잘 양육하여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훈련과 훈계는 히 12:5-11에 있는 대로, 필요하다면 벌을 주어서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함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채찍질 하시듯이 부모가 사랑하는이이를 징계하라고 하십니다. 신자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엄한 훈련과 징계가 있으며, 이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으로 기르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이들이 어린 동안에는 부모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겁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는 것은, 자기 생각과 뜻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유럽은 원래 상당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였습니다. 여성들이 독자적인 계좌를 갖게 된 것도 몇십 년 되지 않았습니다. 여성과 자녀의 위치는 한국이 앞선 면도 있습니다. 유럽에서의반 권위 운동은 1968년에 주로 젊은이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68혁명이라고 합니다. 골자는 반 권위, free sex, 남녀평등, 반자본주의, 전쟁반대 등의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운동은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등 유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독일은 상당히 변했습니다. 소수가 시작한 이 운동이 점점 영향력을 발휘하여, 비록 독일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아직 다수는 보수적이므로, 독일 사회는 이념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권위주의 운동인데, 그 결과 학생과 교수 간의 격차가 상당히 줄었습니다. 녹색정당의 요쉬카 피셔는 외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독일에서 아직까지 명망 높은 은퇴 정치가입니다. 그는 헤센 주의 주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수백 년의 전통을 깨고 운동화를 신고 의회에 참석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으며, 결혼도 벌써 다섯 번을 한 사람입니다. 68세대들은 완전히 반권위적으로 자녀 양육을 했습니다. 전혀 잔소리를 하지 않고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인격적인 대화를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방임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욱 방법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교육을 받으면, 그들이 공부를 더 잘할 것이며, 사회의 경쟁력도 높아진다는 것을 신봉했습니다. 독일의 좌파 사회학자 모임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이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이들은 아이들도 부모에게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즉, 부모에게 „철수“, „영희“라고 합니다. 물론 독일에서 친인척끼리는 전부 친근어(반말)을 사용하는데, 아빠 엄마 대신에 부모의 이름을부르는 것은 68세대가 만든 풍습입니다.
어쨌든 이들에게 가정에서의 권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부 사이에도 권위는 흔적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도 야단치지 않고, 잘못하고 게을러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임신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계를 잘 모르고 성장하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며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들은 직장에서 자주 결근하고, 학교 수업 시간에 엉뚱한 짓하고 모든 면에서 거침없이 행동합니다. 물론 이들 중에서도 스스로 잘 터득하여 자신을 잘 제어할 줄 아는 사람들은사회적으로 훌륭하게 된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요쉬카 피셔 외에도 사민당 수상을 역임한 쉬뢰더 수상도 68운동 출신이며, 그 외에도 녹색 정당의 많은 훌륭한 전직 장관들이 있습니다. 국회의원 숫자는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도지사까지도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이들의 운동이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권위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죄 상태인 낙원에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선악과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의 경계선을 분명히 해주어, 인간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타락 후에도 가정에서의 남편의 권위, 부모의 권위, 국가의 권위를 분명히 세우셨습니다. 이권위를 통해 질서를 세우시고 인간을 다스리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성령 충만을 받는 길이 열립니다(5:18).
인간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시행되어야 하므로, 만약 인간이 경계를 넘어서 권위를 시행한다면 불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사용해야 합니다. 권위를 남용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권위 사용은 피 권위자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범위에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권위가 자체 목적인, 권위를 위한 권위는 없습니다. 권위란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인 가정, 교회, 사회, 국가를 세워나가기 위한 수단이며, 권위자는 하나님의 분부를받고 이를 시행하는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 권위자는 권위자를 인간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그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보고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결론적으로 피 권위자는 그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잘 유지한다는전제 하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하며, 권위자는 사랑과 존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3. 종들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5-8)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이제 노예가 주인을 어떠한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오늘날에는 노예 제도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말씀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듯이 말씀은 변하지 않으나, 단지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말씀이 시대를 맞추는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변해가는 시대에 마다 새롭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 부분을 해석할 때에는 먼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 성경의 기본 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다음에 이것을 변화된 상황에 알맞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윤리는 시대에 적용하는 상황윤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해서 성경도 그에 맞추어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맞추어 인간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죄인이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제일 먼저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생 가치관을 바꾸어나가는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자기 십자가와 자기부인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는 지금 5:15-6:9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현명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5:16). 그리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인데,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삶의 상황에 맞게, 즉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상전으로서, 노예로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질서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에 따르면, 성령님께서 내 삶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장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서 특권을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잘못해서 노예가 된다면, 그의 삶은 상당히 고달플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성령 충만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7절 말씀대로 그가 주인을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선 당시의 노예제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예는 보통 전쟁포로가 많이 되므로, 노예 중에는 쟁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가 되었다가 어렵게 탈출했습니다. 에픽텟(Epiktet)이라는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는 노예였습니다. 주인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팔을 부러트린 일화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토이커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받아들이고 인종하는 것을 실행하므로, 주인은 그의 팔을 부러뜨리면서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은 노예를 물건처럼 부릴 수 있었고, 기분에 따라 사형에 처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이 빚을 져서 못 갚게 된다면, 자신이 노예로 팔리거나 자녀가 노예가 됩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아무나 노예가 될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노예 중에는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린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대다수는 문자 그대로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오늘날처럼 대량생산하는 공장에 가서 기계의 부속품처럼 일했습니다. 아무런 권리가 없으므로 주인의 자의에 따라 희생될 수 있는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노예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사도의이 가르침은 당시 사람의 관념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노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즉 교회에서 완전히 자유를 누린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똑같이 성만찬에 참여했으며, 형제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주인이 자기가 부리던 노예와 평등과 사랑의 입맞춤을 했다면, 이것은 정말로 인식의 혁명적인 전환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사회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중세처럼 종교전쟁을 일으켜 폭력으로 개종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성경은 단지 인간의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가 개선되도록 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회라도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평등하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 혹은 오용하여 이 말씀을 사회적 평등을 위한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형제요 자매입니다. 사회개혁은 이러한 인식이 낳은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사회개혁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일차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여, 영원한 삶을 눈앞에 두고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인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면, 집에 가서도 이들은 형제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은 주인으로부터 특별대우를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는 종에게 주인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보통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을 다해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형제이지만 주인에게 특권을 기대하는 것을 전혀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더 충실하게 섬기라고 합니다. 5절에서는 심지어 „두려워하고 떨며“ 섬기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문자 그대로 두려워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상전과 종의 위치를 분명히 하여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종 된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실하게“, 즉 위선이 없이 진실된 마음으로 주인을공경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7절에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듯 주인을 섬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6)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노예가 주인에게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기본자세 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결과나 대상으로부터 판단을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판단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사람입니다.
4. 상전들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9)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노예에 대한 행동지침은 매우 길지만, 상전에 대한 지침은 훨씬 짧아서 무슨 차별이 있는가 하고 오해하는 분도 있을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는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가르칩니다. 즉, 노예를 물건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대할 것이며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사고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명에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 되심이 드러납니다. 노예의 주인은 상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결국 자신은 노예를 잠시 동안만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위협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을 더 많이 시키기 위해 때린다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즉, 노예에게 폭력은 물론 위협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노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노예에게도 해당합니다. 주인이 이러한 방식으로 노예를 대한다면 사회는 기독교화되면서 상당히 정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정해준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기독교는 혁명의 종교도 아니며, 끊임없이 사회개선을 도모하는 단체도 아닙니다. 복음은 사회를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인을 완전히 변화시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렇게 변화되고 새로와진의인은, 열악한 환경에도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일을 불평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듯이 함으로써 자신이 우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윤리와는전혀 다른 기독교 윤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산다면, 자신이 주변을 비취는 작은 빛이 되고 세상은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 말씀이 저를 비추었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가끔 아르바이트하였는데, 항상 마음을 다해서 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선교회에 잘못 들어가게 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취직을 하였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선교회로부터 세뇌당하여, 모든 삶을 선교 중심적으로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저에게 되도록 필요한 일만 하고 시간을 아껴서 선교에 총력을 기울이는 도적과 같은 심성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직장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선교에만 가 있었으므로, 직장도 가정도 올바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사도가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선교를 앞세워서 직장과 가정을 소홀히 하게 하는 단체는 완전히 잘못된 단체입니다. 그러한 곳은 성경의 가르침을 반대하기 때문에 교회로 불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선교를 많이 한 것 같지만, 실상은 선량한 독일 사람들을 사회와 가정을 해치는 악인, 혹은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들이 선교한 독일 사람들이 점점 병자로 변화되는 것을 보고 마음을 아파했습니다.
저는 2000년에 그 단체를 나와서 망가진 자신을 치료하고 성경을 올바로 배우기 위해 많은 애를 쓴 결과 조금씩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불의함을 드러내기에 애쓴 결과, 제가 공격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간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다행히도 말씀을 통해 상처가 치료되고, 잘못 형성된 성향이 차차로 줄어들고 있습니다.오늘 말씀을 연구하면서, 제가 종과 같이 섬기는 자세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보지 아니하시고 단지 어떠한 자세로 일했는지를 보십니다. 오늘부터 마음을 바꾸어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며 섬기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세로 하고자 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http://cafe.daum.net/reformedchurchs/AQmI/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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