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성도가 누릴 영광들
성경본문: 계시록2:1-5절
구원 그 자체는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구원의 전체 그림을 보면 참으로 원대하며,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구원 그 자체는 비밀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매우 신비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구원의 비밀과 그 영광을 한폭의 그림처럼, 드라마처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신비한 내용과 표상들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밧모섬에 유배당한 요한이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 세계를 전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언어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기괴하게 보입니다. 하늘이 종이장처럼 말리고, 바다와 땅에서 용을 비롯한 괴상한 동물들이 튀어나오고, 수정과 12 진주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하늘나라가 찬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1950-60년대에는 구원의 미래성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다가 보니 구원의 현재성이 너무 미약해졌습니다. 그런데 2010년도 이후에는 구원의 현재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구원의 미래성이 너무 약해졌고, 특히 실용주의 철학과 연결되어 구원의 현재성이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 기복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현재의 삶의 문제들, 사건들, 고통들, 현재에 누릴 복의 문제를 잘 정리해 주고 실제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현재성만을 강조하면 나중에는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며, 이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로 흘러가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내에서 자기 희생이나 십자가의 정신이 무너지게 된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나친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함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면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삶을 희생하거나 물질적인 희생과 손해보는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이기적이고 개인중심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균형잡힌 구원관을 형성해 주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성도들의 영광들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들이 얼마나 풍성하며, 값진 것인가?를 보여주며, 그 나라를 사모하며, 소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1.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서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신구약 성경은 드디어 계시록 22장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무너지고 어그러졌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다시 회복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계시록 22장 첫 부분을 읽고 있으면 마치 옛 에덴동산을 보는 듯합니다. 동산 한 가운데로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옆으로 생명나무가 그 강 좌우에 심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도 아름다운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강, 유브라데강 4강이 흘렀습니다. 또한 에덴동산에는 각종 나무와 생명나무가 가득하였습니다. 단지 다른 것은 새 예루살렘의 동산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고, 더 이상 사탄의 유혹도 없고, 금지되었던 생명나무 실과가 이제는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점입니다. 계시록 22장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완전하게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예배하며, 왕처럼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천사의 인도로 이런 멋지고 황홀한 천국을 환상 가운데서 보게 되었습니다. 1절에 보면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수정같은 맑은 생수의 강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 흐르고 있는 4개의 강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에스겔 47장에 에스겔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환상은 성전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나와 강물을 이루는데 그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죽은 바다가 살아나며, 강주변에 있는 각종 나무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창세기 2장과 에스겔 47장에서 빌려 와서 생명수의 강과 그 좌우에 풍성한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즉 요한의 환상은 에덴동산에 강이 흐른 것을 본 에스겔의 환상에서 유추된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생명나무"가 식물이 되고, 열두 진주보다도 더 좋은 보석으로 쌓은 성이요, 정금 보다도 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 있고 해와 달이 쓸데 없는 빛의 황홀한 세계입니다. 또한 이 세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청소도 필요 없고 죽음, 고통, 슬픔이 전혀 없는 곳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과 평강으로 충만한 곳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영원 무궁한 천국"입니다.
내가 본 천국을 요한은 시적 감수성을 발휘해서 천국의 완전함을 전달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국의 모습을 인간의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고 하니 수많은 한계성을 부디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셋째 하늘(삼천층)까지 올라가 천국의 실체를 본 후에 그 광경을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천국을 직접 본 요한과 바울은 모든 환란과 고통을 능히 이길 수가 있었고, 순교의 자리에까지 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순교의 반열에 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진리를 붙잡고 승리하며 살았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어디에서 흘러나옵니까?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옵니다. 에스겔에서는 생수의 강이 성전에서 발원하였지만, 지금은 성전이 없으므로 이 도성의 핵심인 하나님의 보좌에서 직접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강 좌우에 무슨 열매가 가득 맺혀 있는가? 2절에 보면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우리가 눈 여겨 볼 단어는 천국에 흐르고 있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 강은 새 예루살렘에 생명을 공급해주는 자양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생명수 강물이 천국에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곳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고, 그것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 기쁨과 영광은 미약하지만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의 물을 체험할 수 있고, 목마른 자가 와서 마실 수 있습니다. 이 강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서 발견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요7:37-38절에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요7장 39절 말씀에서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은 성령님의 활동, 살아있는 능력, 풍성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물세례를 받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이 있습니다. 물이 말라 버린 우물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고 성경도 보는데, 그 사람의 삶에서 성령의 감동과 충만과 열정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성경에서 이 생수의 강을 마신 분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복음을 들고 뛰어 다니는 사도 바울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베드로 사도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계시록을 받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얼굴에는 빛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고, 병들어도 위축되지 않으며,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얼굴에는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천국에 와서만 이 생명수의 맛을 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 부어 줄테니 마음껏 마시어라. 이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생명수가 바닥난 인생이 아니라, 충만히 넘치는 인생을 사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샘물이 있는 곳에 나무가 살아나듯이, 저와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살아나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생명의 잔치가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2.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시 저주가 없고, 밤이 없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기며, 그 영광과 기쁨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천국에 누릴 영광은 다시는 저주가 없고 밤이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빛이 되어 성도들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천국은 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즉 천국에는 핍박이나 눈물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그 나라에는 기쁨과 영광과 찬양만이 넘쳐나는 거룩한 곳입니다. 천국의 중심축이 무엇입니까? 3절에 보면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왜 천국에는 저주가 없습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더 이상 저주가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심판이 다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주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심판의 저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창세기 본문에서 사용된 “저주”라는 단어와 요한 계시록의 본문의 “저주”와는 동의어입니다. 즉 천국은 타락과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요구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곳입니다.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슥14:11)
또한 천국에는 어둠, 밤이 없는 곳입니다. 5절에 보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천국에는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과 해의 비췸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 하나님께서 친히 빛이 되셔서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임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4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냈던 경우를 연상하게 합니다. 요한은 천국의 아름다움과 그 완전함을 “밤이 없는 세상”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항상 비추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어둠이 남아 있지 못하게 되고, 햇빛이나 등불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한계가 극복되는 완전한 생명의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밤이 없다는 요한의 외침이 오늘 우리에 비해 2천년 전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절실한 구원의 메시지로 들렸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밤이 없는 세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너무나 밝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밤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별로 실감있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밤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고대인들은 태양이 사라진 밤을 무척이나 두려워했습니다. 동서양의 많은 종족들이 태양을 일종의 신으로 섬겼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이 밤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밤은 실제로 물리적 세계인 밤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악한 권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로마의 사악한 황제들이 자신들의 실정을 가리기 위해서, 혹은 변태적 성격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권력에 의해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도 역시 순교의 위기를 넘기고 지금 밧모섬에 유배당한 실정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그리스도인을 향한 로마 황제들의 박해가 다시 시작할지 모르는 아주 급박한 시대, 바로 그런 질서는 밤의 세력이었습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던 시기는 바로 이처럼 밤의 악한 권세가 기승을 부릴 때였기에 “밤이 없는 세상”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밤이 없는 세상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질서 때문에 선량한 이들이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못하고 기죽어 사는 그런 세상이 끝장나고 성도들이 “왕노릇”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되는 천국일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상에서도 성취(成就)되고 선취(先取)되어야 할 세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밤이 없는 세상”을 이 땅에 이루지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신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상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특권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시고 난 후 하나님의 등만 보았습니다. 태양을 똑바로 보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부활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성자 예수님의 얼굴을 똑바로 뵙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기쁘랴!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찬85장) 사랑하는 주님과 같이 앉아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제가 목사지만 천국에 대하여, 성경속에서 이해하지 못할 신앙적인 질문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예수님께 직접 여쭤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편기자는 84:10절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천국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불완전한 부분적인 교제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교제는 인간의 불완전한 것이 완전히 극복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100% 누리고, 영광중에 계신 주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3.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주 하나님과 더블어 세세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완성된 천국에서 무엇을 합니까? 성도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왕노릇을 합니다. 5절을 보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왕노릇한다는 말은 통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불신자를 향하여 왕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도가 또 다른 성도 위에 왕이 되어 통치한다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만물을 통치하도록 위탁받았던 통치력이 다시 회복되어 새 창조 곧 새롭게 된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세세토록 왕노릇 한다는 말은 교회가 누구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과시한다는 말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아담이 다스리던 것처럼 완성된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천국에서 만물을 다스리며, 주관하는 왕이 되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만들어진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는 영원한 왕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 왕처럼 지배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왕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수종들지만 왕노릇하는 특권이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왕노릇 해야 하는 저와 여러분이 쩨쩨하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스펄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보여줄 듯 이 말을 하면서도 더 이상 보여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천국에 도착할 때 우리에게 서프라이즈 패키지(surprise package)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 보면 이에 대한 암시가 조금씩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므나를 가지고 열심히 사명을 감당했을 때 결과가 어떠한지 1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여기서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는 것은 열 개의 지역을 관할하는 도지사쯤 됩니다. 물론 비유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천국의 영광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거룩한 노동도 있지만 정치도 있을 것입니다. ‘왕 노릇’한다는 것이 바로 정치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작은 왕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 그러면 고개를 내두르는 것은 죄 때문에 이 세상의 정치가 부패하여 치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바른 정치를 한다고 해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공명정대한 정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목사님들의 모임에서도 임원을 뽑고 정치를 하는 것을 보면 부패하고 어둡고 더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세상의 정치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하신 영광스러운 천국에서는 왕 노릇과 정치가 부패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황금보석으로 영광스럽게 만들어지고,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각종 생명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천국을 선물로 받았고, 또한 그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이처럼 놀라운 은헤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평생 감사하며,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이 기쁜소식,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실로 놀라운 영광과 축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어떠한 부귀영화도 부러워하지 말고 또한 어떤 고난과 핍박이 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신앙의 정조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잠자는 평신도를 깨우자 (0) | 2016.04.20 |
|---|---|
| [스크랩]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0) | 2016.04.20 |
| [스크랩] 올바른 십일조 정신과 삶 (0) | 2016.04.20 |
| [스크랩] 구원의 완성작품을 보라 (0) | 2016.04.20 |
| [스크랩] [엡2;1] 심령의 부활 / 박조준 목사 (0) | 2016.04.19 |